개신교단 가운데에서 성령세례에 대해서 특히 강조하는 교단이 있다. 오순절 교단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순복음교회가 여기에 속하는데, 이 교단에서는 성령세례를 반드시 받도록 가르친다. 그런데 여기까지는 그리 문제가 될 것은 없다. 하지만 그 다음이 문제다. 성령세례의 증거가 방언이라고 한다. 이것도 그리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런데 만약 어떤 믿는 자가 방언을 말하지 못하면 그는 성령세례를 받지 못했으며, 결국에는 구원도 받지 못한다고 말한다. 오늘에 들어와서는 구원과 성령세례를 연관시키는 것에 대해서는 약간 주의를 하고 있기는 있지만 그 핵심은 거의 변함이 없다. 과연 오순절교단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믿는 자는 반드시 말해야 하며, 방언을 말하지 못하면 성령세례를 받지 못한 것이며, 결국에는 구원도 받지 못하는 것일까?
오늘 이 시간에는 성령강림주간을 맞이하여 성령세례에 대한 성경적인 견해에 대해 생각해보기로 하겠다. 성령세례란 과연 어떤 것이며, 성령세례는 누가 주는가? 그리고 성령세례는 어떻게 받으며, 성령세례를 받은 자의 증거는 무엇인가? 뿐만 아니라 성령세례가 부어지는 목적과 유익(장점)은 무엇이며 성령세례의 한계점은 무엇인가?
첫째, 성령세례란 무엇이며 누가 주는 것인가? 성령세례란 성령께서 세례주시는 것이 아니다. 믿는 자에게 성령으로 세례가 부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성령으로 세례를 베풀어 주는가? 그분은 우리 주 예수님이시다(마3:11, 요1:33). 우리 주 예수께서 믿는 자들에게 부어주시는 세례가 바로 성령세례인 것이다. 그렇다면, 성령세례란 무엇을 가리키는가? 신약성경에 보면, 대부분의 성령세례는 외적인 성령세례를 가리킨다. 다시 말해 성령께서 믿는 자들 위에 물이 부어지듯이 내려오시어 어떤 선물을 나누어 주시는 것을 성령세례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런데 이때 놀라운 일이 발생한다. 성령께서 각 사람의 분량에 따라 어떤 선물을 나눠주시기 때문이다. 이때 부어지는 성령의 선물을 일컬어 우리는 성령의 은사라고 부른데, 이러한 선물로서 대표적인 것은 방언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때로는 예언을 말하기도 하고 방언찬양도 하기도 한다. 다시 말해 일반적으로 말하는 성령세례는 외적인 성령세례를 칭하되, 성령께서 믿는 자들 위에 내려오시어 어떤 선물을 부어주시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바로 성령세례인 것이다.
하지만 성령세례에는 내적인 성령세례도 있다. 이것은 고전12장과 롬6장에 등장하는데, 믿는 자들의 마음에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그 사람에게 회개하는 마음을 부어주시고, 예수님을 구주로 믿을 수 있는 마음이 부어주심으로 그 사람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마음 속에 구주로 영접하게 하는 것을 가리킨다(고전12:3,13, 롬6:3~4). 이때 그들은 자신을 죄인이라고 시인하면서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시인하게 된다.
둘째, 성령세례는 어떻게 받는 것이며, 성령세례를 받은 증거는 무엇인가? 성령세례는 어떻게 받는 것일까? 그것은 두 가지 경우 뿐이다. 하나는 믿을 때에 받고 또 하나는 요청할 때 즉 기도할 때에 받는다. 여기서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와 하나님으로 믿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대표적인 경우가 행10장의 고넬료가정의 경우다. 이때 고넬료가정은 예수님이 누군지를 잘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베드로를 초청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써 그들은 비로서 예수님이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자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자 말씀을 듣는 중에 예수께서 보내신 인격적인 그 성령께서 그들 위에 내려오셨다. 또한 동시에 성령께서 주시는 선물도 그들에게 부어졌다. 그러자 그들은 방언을 말하기 시작했고 찬송(아마 방언찬송)하기를 시작했다. "베드로가 이 말을 말할 때에 그 성령이 말씀을 듣고 있는 모든 사람들 위에 내려오셨다. 그러자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받은 믿는 자들이 놀랐다. 왜냐하면 이방인들에게도 그 성령의 선물이 부어졌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방언들을 말하며, 하나님을 높이 찬양하는 것을 들었기 때문이다. 이에 베드로가 이르되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그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를 베푸는 것을 금하겠느냐 하고(행10:44~47)". 그랬다. 고넬료가정에서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영접하는 순간에 성령께서 그들 속에 역사하셨고 뿐만 아니라 성령께서 오시면서 그들 위에 성령의 선물도 부어주셨다. 그러자 그들의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방언을 말하기 시작했고 하나님을 높이 찬양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하지만 고넬료의 가정처럼 믿을 때에 성령세례 곧 성령의 선물을 항상 동시에 받는 것은 아니다. 먼저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난 후에 성령세례를 받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즉 어떤 사람이 회개하여 예수님을 믿은 후에, 성령의 선물을 받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이때에는 성령세례가 예수님을 영접한 시점에 부어지지 않고 얼마 후에 부어진다. 이러한 대표적인 경우가 행8장에 나오는 사마리아교회의 경우요 행19장에 나오는 에베소교회의 경우이다. 먼저 사마리아교회의 경우를 보자. 예루살렘교회에 불었던 대대적인 핍박으로 예루살렘교회의 일곱집사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빌립집사가 사마리아지역으로 가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사마리아 도시는 일찍이 예수님의 전도로 말미암아, 복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다 되어 있었다. 그러자 그들은 빌립의 전도를 듣고 예수님을 믿었으며 예수이름의 세례까지 받았다. 즉 그들은 이들은 회개한 상태였고 예수님을 믿고 있었던 상태였던 것이다. 그때였다.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러자 예루살렘교회는 베드로와 요한을 그곳에 파송했다. 그러자 그들이 내려가서 성령의 어떤 것(정관사 없음)을 받기를 기도했다. 왜냐하면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의 선물이 주어지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러자 두 사도가 그들에게 안수했고 즉시 사마리아교회 성도들이 성령의 어떤 것(성령의 선물, 정관사가 없음)을 받았다. 아마도 이때 그들은 다 방언을 말했을 것이다. 그러자 그 광경을 지켜본 마술사 시몬이 베드로와 요한에게 돈을 주면서 말하기를, 그 권세를 자신에게도 주어서 자신이 안수하는 사람이 성령의 어떤 것(성령의 선물, 정관사가 없음)을 받을 수 있도록 해달라 요청했다. 그렇다. 사마리아교회의 경우를 보라. 이 경우에도 믿고 난 후에 성령의 선물을 받은 경우다. 물론 그때에 그들에게 보이는 무엇인가가 나타났었다. 그것이 바로 성령의 선물인 것이다. 그러니까 시몬이 그것을 보고는 자기도 그렇게 하게 하고 싶어서, 베드로와 요한에게 돈을 주며 청탁을 했던 것이다. 사마리아교회의 경우는 예수님을 믿는 일이 먼저 발생했다. 그리고 나중에 기도를 통해서 성령세례를 받게 되었다.
또 하나의 경우를 보자. 행19장에 나오는 에베소교회의 경우도 이것과 비슷하다. 이들은 이미 아볼로를 통해서 예수님이 누군지를 들었고 회개한 다음에 회개의 세례를 받은 상태였다. 그후에 바울이 그곳에 당도하였고, 그들에게 물었다.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의 어떤 것(선물, 정관사 없음)을 받았으냐?" 그러자 그들은 "우리는 성령의 어떤 것(선물, 정관사 없음)이 있는지조차 듣지 못했다"고 대답했다. 그들은 세례요한이 가르쳐준 회개의 물세례를 받은 상태였던 것이다. 그러자 사도바울은 그들에게 이제는 주 예수의 이름의 세례를 주었다. 그리고는 그들을 위해 안수하여 기도했다. 그러자 그들에게 그 성령께서 내려오셨다.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방언들을 계속해서 말하기 시작했고, 예언을 말하기 시작했다(행19:6). 에베소성도들도 믿을 때에 내적인 성령세례 곧 인격적인 성령을 받기는 했지만, 믿을 때에 성령의 어떤 것이 주어진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사도바울을 통해서 그때야 비로서 성령의 선물이 주어진다는 것을 들었고 그것을 사모하게 되었다. 그러자 사도바울이 그들에게 안수기도를 했고, 그러자 그들이 다 성령의 어떤 것을 받게 된 것이다. 그때에 나타났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역시 방언이었고 또 다른 성령의 은사인 예언이었다. 즉 성령의 선물로 주어지는 대표적인 2가지 결과가 그들에게 나타나게 된 것이다. 그런에 이런 것들은 성령께서 믿는 자 위에 머물러 계실 때에 일어나는 현상들이다. 이런 것들을 일컬어 '성령의 은사'라고 부른다. 그렇다. 에베소교회의 경우는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게하는 내적인 성령세례를 먼저 받은 다음, 그리고 나서 외적인 성령세례를 받은 경우다. 이런 경우에 누군가가 성령세례를 받으려면, 그 사람은 믿을 때에 믿는 자 안에 들어오신 성령님은 선물도 가지고 오신다는 것을 믿고 성령세례를 사모해야 한다. 그러면, 성령의 은사가 그에게도 나타날 것이다. 하지만 초대교회의 경우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대부분 성령의 선물은 방언이었다는 것이다. 믿어서 내적인 성령세례를 받는 것과 기도해서 외적인 성령세례를 받는 것에는 상당한 차이점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외적인 성령세례가 믿을 때에 동시적으로 나타나는 경우는 오순절교단이 상대적으로 많다. 하지만 믿고 난 후에 기도함으로 외적인 성령세례를 받는 경우는 장로교교단쪽이 상대적으로 많다. 그래서인지 오순절교단 쪽에는 유난히도 초신자가 많다. 장로교단은 대부분 믿는 자 안에 들어오셔서 역사하는 성령님에 대해 더 관심이 있고 그것을 더 기뻐한다. 그러므로 믿는 자 안에 들어오신 성령께서는 믿는 자들의 성품을 바꾸신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리하여 그들을 점차적으로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바뀌어 간다.
이제 마지막으로, 성령세례가 부어지는 목적과 유익(장점)은 무엇이며 성령세례의 한계점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성령세례가 부어지는 목적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믿는 자들을 성령으로 무장시켜 복음을 증거하게 하는 데에 있다(행1:8). "오직 그 성령이 너희 위에 내려 오시면 너희가 능력을 받고...(행1:8)". 그렇다. 성령세례가 부어지면 아무래도 눈에 보이는 어떤 또렷한 현상이 나타난다. 그러면 자신에게도 성령이 오셨고 지금 자기 위에서 성령께서 역사하고 있음을 눈으로 확인할 수도 있고 귀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면 믿는 자는 용기가 충만해지고 담대함도 생겨난다. 그러면 밖으로 나가서 복음의 증인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 믿는 자에게 성령세례가 부어지는 목적 즉 믿는 자에게 성령의 선물들이 부어지는 목적은 다른 데에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복음의 증인으로 삼고 파송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왕이면 믿는 순간에 성령세례를 받게 하고 나중에라도 기도함으로 성령세례를 받는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한편, 성령세례의 한계점은 무엇인가? 그것은 외적인 성령세례가 구원의 절대적인 기준이 결코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성령세례는 외적으로 부어지는 성령의 선물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성령의 선물이 한 사람의 영혼의 구원을 좌지우지하지는 않음을 알라. 어디까지나 선물이니까 말이다. 왜냐하면 방언을 받았느냐에 따라서 구원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여 예수님을 믿는 것에 의해서 구원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신이 방언을 말하고 있는 자라고 해도 결코 자만하지 말라. 지옥에는 방언으로 말했던 수많은 사람들이 들어가 있음을 알라. 결국 성령세례를 받은 자가 방언으로만 말하는 데에 온 힘을 기울여서는 아니 된다. 방언을 말해도 회개하지 않고, 믿음생활을 잘 하지 못해서 믿음에 합당한 열매가 맺혀지지 않고 있다면 그 사람의 구원은 장담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한편 자신이 방언으로 말하지 못한다고 해서 구원받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자들이 있다면 그것에 대해서는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 왜냐하면 사도바울이 방언이 성령의 선물인 이상 다 방언말하는 자겠느냐고 언급했었기 때문이다(고전12:30). 즉 인격적인 성령을 받은 자라 하더라도 방언을 말하지 못하는 자들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방언이 구원의 표준이나 잣대가 되지 않다는 것을라. 오직 구원은 회개와 믿음으로 얻는 것임을 죽을 때까지 기억하고 실천하라. 그래야 구원을 얻는다. 방언기도가 성령께서 주시는 선물임에는 분명하지만 그것이 만능은 아닌 것이다. 방언기도는 자신의 영이 깨어난 후에 자신이 영이 기도하는 것이니만큼, 방언기도를 맹종해서도 아니 될 것이다. 건투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