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정말 무소부재(無所不在)하신 분이신가? 하나님께서 무소부재하신 분이라면 그분은 어떻게 무소부재하실 수가 있는 것인가? 그리고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을 믿는 자가 받게 되는 축복은 무엇인가? 오늘 이 시간에는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속성들 중에서 무소부재성의 특징들을 살펴보고, 무소부재하신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에 대한 바른 믿음을 얻게 되기를 바란다.
우선, 하나님께서는 어디에 계시는가를 살펴보도록 하자. 여호와 증인이라는 이단에서는 하나님께서는 하늘에 있는 당신의 보좌에 앉아계시는데, 그 자리를 비운 적이 없다고 가르친다. 그리고 하나님은 동시존재하시지도 않는다고 가르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하늘에도 계시지만 아들이라는 신분으로 오실 수 없다고 가르친다. 그러므로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창조한 맨 첫번째 영적 피조물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성령님은 하나님의 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활동하시는 힘이라고 가르친다. 과연 이들의 주장이 맞는 것일까?
하나님은 정말 어디에 계시는가? 하나님은 셋째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보좌에만 앉아계실까?(시103:19, 사6:1, 단7:9) 아니면 오순절이후에는 믿는 이들 속에도 들어가 계시는가?(계3:20, 고전3:16) 아니면 천지에 충만하게 거하고 계시는가?(렘23:23~24) 분명한 사실은 온 우주가 창조되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홀로 계셨다는 것이며, 한 분이신 그 하나님께서는 높이 들린 보좌 위에 앉아계셨다는 사실이다(시103:19, 사6:1, 단7:9). 다시 말해, 천국에서 보좌는 하나님이 계시는 장소요, 하나님의 본부로서 하나님의 활동의 중심지였음은 분명하다. 다음의 성경구절을 보라.
시103:19 여호와께서 그의 보좌를 하늘에 세우시고 그의 왕권으로 만유를 다스리시도다
그러한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 어느날에 창조사역을 시작하셨다. 그리고 그때부터 당신이 만드신 만물을 통치하시고 다스리시고 계신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창조한 만물을 어떻게 관리하시고 다스리고 계시는 것일까? 그것은 2가지 통치방식이 있다. 하나는 당신의 영을 직접 보내어 관리하고 다스리는 방식이 있고, 또 하나는 당신의 종으로 지은 천사들을 보내 관리하고 다스리는 방식이 있다.
첫째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을 직접 보내어 당신이 창조한 만물을 관리하고 다스리는 방식이 있다. 이 방식은 하나님이기에 가능한 직접적인 통치방식으로서, 하나님께서 어디에나 계실 수 있는 능력 곧 무소부재의 능력으로 하시는 일이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창조사역을 시작하실 때부터 당신의 영을 보내어 그 일들을 행하셨다고 기록되어 있다(창1:2, 시104:30). 하나님께서는 사실 영적인 존재이시다(요4:24). 그러므로 그분은 동시존재가 가능하시다. 그분은 천사와 인간과 같은 피조된 영적 존재와는 차원이 다른 영역이 있다. 그것은 모든 것을 창조하실 수 있는 전능하신 영적 존재이며, 어디에나 계실 수 있는 영적 존재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동시에 다른 장소들에 당신의 영을 보내시어 만물을 창조하실 수도 있고, 동시에 만드신 만물을 감찰하실 수도 있고 그것들을 지켜보실 수도 있다. 그리고 그것들로부터 어떤 상황을 알게 되면, 즉시 동시에 여러 곳에 어떠한 조치를 취할 수가 있으시다. 이것은 바로 전능한 창조주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속성으로서, 하나님이 하나님되심에 대한 속성이다. 이것을 우리는 무소부재의 속성이라 말한다.
그렇다면, 성경에서는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에 대해서 어떻게 표현하고 있을까? 여기, 2개의 성경구절을 살펴보라. 시편 기자는 하나님에 대해서 이렇게 말을 시작한다.
시139:1-4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 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2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3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 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4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그렇다면, 여호와께서는 어떻게 모든 사람의 앉고 일어섬을 다 아시고, 멀리서도 그 사람의 생각까지도 헤아리시며, 길과 눕는 것을 포함한 모든 행위를 다 아실 수가 있을까? 더욱이 사람이 자신의 혀로 말하는 모든 것까지도 빠진 것이 없이 다 아실 수가 있을까? 그것은 무소부재하신 하나님께서 항상 그 사람과 함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그분은 아니 계신 곳이 없으시다. 그러므로 시편기자는 또 이렇게 말했다.
시139:7-10 내가 주의(당신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당신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8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9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10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여기에서 "주(당신)'라는 존재는 시139:1~3에서 여호와이심을 증거하고 있다. 그리고 시편139편의 저자가 말하고 있는 '하늘'이라는 곳은 이 온 우주가운데 가장 높은 곳을 상징하며, '스올'은 가장 낮은 곳을 상징한다. 다시 말해 이 말이 뜻은 하나님께서는 아니 계신 곳이 없으시다는 뜻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아니계신 곳이 없으실 수 있을까? 그것은 그분이 동시존재가 가능한 그분의 영을 모든 곳에 보내실 수 있기 때문이다. 예레미야 선지자도 그렇게 말했다.
렘23:23-24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는 가까운 데에 있는 하나님이요 먼 데에 있는 하나님은 아니냐 24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사람이 내게 보이지 아니하려고 누가 자신을 은밀한 곳에 숨길 수 있겠느냐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나님께서는 가까운 데에도 계시지만 먼 데도 함께 계신다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은 천지에 충만한 분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영을 보내시어 동시에 모든 사람과 모든 환경을 다 살피시고 감찰하실 수가 있기 때문이다.
둘째로, 하나님께서 당신이 지은 만물을 통치하고 다스리는 두번째 통치방식이 있다. 그것은 당신의 종으로 지은 천사들을 사용하는 것이다(시103:20~22).
시103:20-22 능력이 있어 여호와의 말씀을 행하며 그의 말씀의 소리를 듣는 여호와의 천사들이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21 그에게 수종들며 그의 뜻을 행하는 모든 천군이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22 여호와의 지으심을 받고 그가 다스리시는 모든 곳에 있는 너희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시91:11-12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천사들을 명령하사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12 그들이 그들의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아니하게 하리로다
천사들은 하나님께 수종들도록 처음부터 능력있게 창조한 하나님의 종들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홀로 창조하신 것들을 향하여 천사를 보내신다. 그래서 천사로 하여금 그것을 감찰케하고 지키게 하고 보호하게 하기도 하신다. 이것은 간접적인 통치방식이다. 그러므로 구약성경을 읽어보면, 분명 하나님께서 보내신 천사 곧 여호와의 천사가 나타나서 어떤 일을 하는데,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일 때가 있다. 하나님께서 그의 천사를 보내 일을 하게 하시지만 하나님께서 그 천사를 통해서 일을 하시는 것이다. 어찌 되었든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을 보내 직접적으로 통치하시든, 당신이 창조한 능력있는 천사를 보내 통치하시든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지은 모든 만물을 관리하시고 다스리고 계시는 것이다.
구약시대에 자신이 무소부재하신 창조의 영이신 것을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어느날 사람의 육체를 입고 아들이라는 신분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 그분을 우리는 예수님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예수님을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면서 하나님 자신이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과연 무소부재하셨을까? 아니었다. 그분이 육체를 입으신 잠깐의 시기에 그분은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으셨다. 왜냐하면 그분에게는 육체라는 인성이 같이 결합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분이 영으로는 아니 계신 곳이 없으셨다. 다시 말해 그분의 영은 무소부재하셨던 것이다.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을까? 마18:20의 말씀을 보라.
마18:18-20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19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20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이미 모여있는)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있다)
이 말씀에 의하면, 예수께서 기도하는 그들과 함께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이미 주의 이름으로 모여있는 곳에 함께 하고 계신다고 말씀하신다. 미래형이 아니라 현재형이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 것일까? 그것은 비록 그분이 육체를 입기는 했지만 그분의 영은 신성한 아버지의 영이시므로 무소부재하고 계셨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마28:18-20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결국 이 말씀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예수님은 한 분이신 하나님 자신인데, 자신의 백성들이 자기에 기도하면 그 기도를 다 들으신다고 말씀이요, 복음을 전파하러 가면 그곳에 항상 함께 동행하시겠다는 뜻이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가?그것은 그분이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렇다. 하나님은 존재자체가 영이시니까 동시존재가 가능하며, 또한 이 세상에는 그분의 영을 보내시므로 동시에 모든 일을 수행하실 수가 있으시다. 그리고 그분이 육신을 입으실 때에는 시공간의 제약을 잠깐 받으시기는 했지만 그분의 영만큼은 그렇지 않았다. 기도하는 자들 가운에서 가 계셨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이다(요14:14). 그리고 이어서 복음을 전파하러 가는 이들과 함께 하고 계신다. 이것은 천사들을 보내 역사하는 간접적인 방식이 아니라 직접적인 방식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이여, 기도하는 일에 힘쓰고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힘쓰기를 바란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알아야 할 것은 구속사역을 완성하시고 하늘에 오르신 예수께서 보내주신 보혜사 성령에 관한 말씀이다. 보혜사 성령님은 세 번째 하나님이 아니시다. 그분은 예수님이 사람 속에 들어올 수 있는 영으로 다시 이 세상에 오신 하나님 자신이다. 예수님 자신인 것이다. 그러므로 천국에서 성령님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영들이라고 말해지고 있다(계1:4). 그런데 그 하나님의 일곱영들은 또한 일곱 눈들을 가진 어린양의 눈들로서, 온 땅에 보내심을 받은 것이라고 증거하고 있다. 다시 말해 성령님은 따로 존재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바로 예수님으로서, 이 온 땅에 있는 모든 것을 감찰하고 있는 예수님의 눈들인 것이다. 특별히 일곱 눈들이라고 표현한 것은 일곱이라는 숫자는 이 땅에서의 완전수를 가리키므로, 이 땅에 있는 모든 것을 다 세밀하고 완전하게 감찰하고 있는 눈들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다. 하나님의 영인 성령은 예수님이시요 이 땅에 보내어진 예수님의 감찰기관이다. 그러니 우리가 그분 앞에 피하여 도망칠 수가 없다. 하늘 끝에 오를지라도 거기에 계시며, 땅 아래 지옥으로 내려갈 지라도 거기에 계시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마지막으로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유익은 무엇인지를 살펴보자.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을 믿는 자들은 적어도 4가지 이상의 유익이 있다. 첫째, 그분으로부터 지키심을 받는 것이다. 온 땅을 전부 다 감찰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영으로 인하여,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눈동자같이 보호하심을 받게 되는 것이다(시118:6~7, 신31:8, 민14:9). 둘째, 어떤 세력으로부터도 해침을 받지 않게 되는 것이다. 모든 환난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낮의 해와 밤의 달도 해치 못함을 받는 것이다. 더욱이 악한 사탄마귀가 건들지도 못하게 하신다(요일5:18). 셋째,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에 어떤 힘든 일도 견뎌낼 수 있고 고난도 달게 받을 수가 있는 것이다. 고난이 오히려 유익이 되는 것이다. 넷째, 마지막으로 항상 우리를 불꽃같은 눈으로 감찰하시는 주님이심을 알기에 함부로 죄를 짓지도 않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 그러기에 이러한 사실을 알았던 야곱과 요셉은 두려워하지 않았다. 어려움과 역경도 잘 이겨내었다. 여호수와 갈렙도 마찬가지로 두려워하지 않고 가나안땅을 정복하러 나갔던 것이다. 그리고 다윗도 그랬다. 사울왕이 그를 아무리 죽이려고 했지만 그를 죽일 수가 없었다. 하나님께서 그를 보호해주셨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어떤 자를 이와 같이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것일까? 그것은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하나님은 보이지는 않지만 항상 그분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으로 사는 자들이다. 사자굴에 던져졌으나 살아난 다니엘을 보라. 극렬히 타는 풀부불에 던져졌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보라. 내가 주님을 알고 주님을 믿게 된 이상 주님께서는 내가 죽는 그날까지 나를 눈동자처럼 지키신다는 것을 믿으라. 우리의 머리털까지 세고 있다는 것을 믿으라. 그러면 두려움이 사라질 것이다. 안정된 삶을 살게 될 것이다. 평강을 누리게 될 것이다. 미래가 결코 두렵지 않을 것이다. 건투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