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이란 무엇인가? 이신칭의일까? 아니면 죄사함을 받는 것일까? 그것도 아니면 영생을 얻는 것일까? 우리는 구원이 아닌 것인데도 구원이라고 생각함으로 실제로 구원으로부터 멀어진 신앙생활을 할 수가 있다. 오늘은 정말 우리가 받아야 할 구원이란 대체 어떤 것이며, 구원이 아닌 것인데도 구원으로 알고 있는 것들을 찾아보고, 대체 어떻게 구원을 얻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1. 들어가며
구원이란 무엇이며 구원인 것 같은데 구원이 아닌 것들은 또 무엇일까? 그리스도인들은 흔히들 자신은 이미 구원받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구원받았다고 말을 할 때에 그 기준은 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저마다 각각 다르다. 예를 들어보자. 보통 장로교인들은 예수님을 믿고 있으면 자신은 구원받았다고 말한다. 믿음이 자신을 구원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순절 계통에서는 예수님을 믿어야 하고 그리고 성령세례까지 받아야 구원을 받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과연 사실일까? 오늘 이 시간에는 우리가 말하는 구원이라는 개념이 어떤 것인지 그리고 성경이 말하는 궁극적인 구원의 개념은 또 무엇이며, 구원이라고 말은 하고 있지만 정확히는 구원이 아닌 것들을 살펴보도록 하자.
2. 일반적인 구원의 개념
먼저, 구원이란 무엇인가? 구원이란 어디로부터 건짐을 받는 것을 가리킨다. 그래서 구원한다는 말은 '건져낸다' 혹은 '구조한다'는 뜻을 가진다. 그대로 놔두면 문제가 발생하고 죽을 것이니까 그러한 곳으로부터 건져내는 것을 구원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에 등장하고 있는 구원이라는 개념은 상당히 포괄적인 것임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12해를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에게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막5:34)" 그렀다. 여기에서 구원이라 질병에서 낫게 된 것을 가리킨다. 그러나 제자들이 풍랑 때문에 죽게 되었을 때에 "주여, 우리를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마8:28)"이라고 말했을 때에, 구원이란 풍랑에서 건짐을 받는 것을 가리킨다. 뿐만 아니라 소경이 눈을 뜨게 되었을 때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막10:52)" 그렇다. 여기에서 구원은 소경이 자신의 눈을 뜨게 된 것을 가리킨다. 그런데, 방금 언급한 구절에서 구원이란 어떤 공통분모가 몇 가지 있다. 그것은 첫째, 육신으로부터 구출되는 것이라는 것이다. 둘째, 보다 더 좋은 상태로의 전환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포괄적으로 보았을 때 구원이란 육체의 질병에서, 육체의 죽음의 위험에서, 육체의 비정상적인 상태에서 구출받는 것을 포함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3.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일반적인 구원 개념
하지만 성경에서 구원이라는 개념은 이것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고 있다. 예를 들어보자. 예수라는 이름의 뜻을 보면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마1:21)"고 천사가 가르쳐 주었다. 그런데 여기에서 구원은 우리가 죄들로부터 사함을 받는 것을 가리킨다. 뿐만 아니라 귀신들렸던 자가 귀신이 쫓겨나가 정상적인 상태로 회복된 것도 구원이라고 말하고 있다(눅8:36). 그리고 육체는 죽었지만 자신의 영혼이 음부에서 나오게 되는 것도 구원이라고 말한다(히5:7). 결국 이러한 사실을 종합하여 볼 때,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이란 상황에 따라 약간씩 다르기는 하지만 어떤 좋지 않은 상황으로부터 구출받는 것을 포함하는 것이라 하겠다. 다시 말해, 만약 그대로 놔둔다면 불행해질 테니까 그것으로부터 구출해 내는 것을 구원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4. 교회에서 말하는 정확한 구원 개념
그렇다면 오늘날 교회에서 말해지고 있는 구원이란 어떤 것을 가리키는 것일까? 사람들은 보통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받습니다."라고 말을 한다. 이때 말해지는 구원이란 무엇으로부터의 구원인가? 기본적으로는 죄와 죽음과 사탄마귀의 세력으로부터 구원이다. 하지만 좀 더 깊게 들어가보면, 이것은 육체의 구원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구원을 가리키는 개념인 것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위치적으로 볼 때에 이 세상에서 얻을 수 구원이 아니라 천국에서 받게 되는 구원으로서, 이 땅에서 천국으로 옮겨지는 것을 가리킴을 알 수 있다. 결론적으로, 교회에서 말하는 구원이란 사람의 영혼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말하는 구원은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라 사람이 죽은 다음에야 천국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다. 예를 들어 보자. 어떤 사람이 질병에 걸렸는데 예수님을 믿고난 후 열심히 기도해서 나았다고 쳐보자, 이 사람은 구원받은 것인가?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만약 질병에서의 치료받은 것을 구원이라고 친다면 이 사람은 구원받은 것이다. 하지만 영혼의 측면에서 보았을 때 이 사람은 아직 구원받은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의 영혼이 죄와 죽음과 사탄마귀로부터 벗어나 천국에 들어가야 비로소 구원받았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 기독교인이 말하는 구원은 사실 자신의 영혼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므로, 우리는 지금 일차적으로 구원받고 있는 상태에 있기는 하지만 아직 완전한 구원은 받지 못했다고 말을 해야 한다.
이렇듯, 자신의 영혼이 천국에 들어가는 구원 개념은 사도바울이 쓴 신약성경에서도 그대로 살펴볼 수 있다. 사도바울은 처음에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말을 했다(롬1:16). 하지만 그는 또한 구원을 이뤄가고 있다고도 말했다(빌2:12). 그러다가 그가 죽음을 앞 둔 마지막 시점에 가서는 그의 영혼이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받을 것이라고 했다(딤후4:18). 그는 구원을 3단계로 말한 것이다. 그렇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우리는 이미 구원을 받은 상태에 있기는 하지만 지금도 구원받고 있으며 앞으로 구원을 받을 상태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아직은 구원을 못받은 것이다. 왜냐하면 육신의 장막을 벗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아있는 육신 안에 있는 한 함부로 구원받았다는 표현을 쓰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 자신의 영혼이 천국에 들어갔을 때에라야 비로소 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금은 이렇게 말해야 한다. "나는 오늘도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뤄가고 있습니다."
5. 구원이라고 표현하지만 구원이 아닌 것들
이제 크게 두번째로, 우리가 흔히들 구원이라고 표현하는 것들이지만 사실은 구원이 아닌 것을 살펴보도록 하자. 우리는 흔히들 구원이라고 표현하지만 사실은 구원이 아닌 것들이 있다. 그것은 구원의 일부분만을 가리키는 개념들이다. 이러한 것에는 '이신칭의'와 '죄사함을 받은 것'과 '영생을 얻은 것'이 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완전한 구원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일부만을 칭하는 것들이기에, 이것을 일컬어 구원이라고 말해서는 아니 된다. 왜냐하면 만약 어떤 사람이 이신칭의를 받았다 하더라도 아직 자신의 영혼이 천국에 들어가기 전의 상태라면 그는 아직 구원받지 않은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죄사함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또한 혹 자신이 믿음으로 영생을 얻었다고 할지라도 아직까지 자신의 영혼이 천국에 들어가지 않은 상태라면 자신은 구원받지 않았다고 말해야 한다. 오히려 자신은 앞으로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말해야 한다.
6. 이신칭의가 구원인가?
먼저, 이신칭의가 구원인지 아닌지를 좀 더 살펴보자. 이신칭의 곧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것은 구원의 출발일 뿐 구원의 종착지는 결코 아니다. 그러므로 이신칭의를 얻었다고 자신은 구원받았다고 말해서는 아니 된다. 여기서 믿음이란 율법에 외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하나님의 의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믿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칭의는 그리스도로 옷을 입는 것과 같음을 알라. 이처럼 칭의란 외적인 신분의 변화만을 가리키는 것이지 속사람까지 변화된 것을 가리키는 개념이 아니다. 자기의 속사람은 전혀 의롭게 되지는 않았어도 나의 밖은 덧입혀진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받은 상태에 있음을 말해줄 뿐이이다. 그러므로 칭의는 우리가 구원을 얻기 위한 순례자들의 여정에서 시작단계에 해당한다. 우리는 칭의를 얻음으로 비로소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첫걸음을 뗀 것 뿐이다.
7. 로마서가 말하는 구원의 3단계 과정
그러므로 로마서를 집중해서 살펴보면, 로마서에서의 구원은 칭의에서 시작하나 칭의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세례 곧 할례를 통해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참여하는 과정이 있다. 즉 자신의 죄된 본성을 십자가에 못박는 단계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세번째로 자신 안에 보내어진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야 하는 단계가 있다. 다시 말해 로마서에서 칭의를 통한 구원은 3단계다. 칭의로 시작하여 그리스도와 연합에 의한 옛사람을 죽음에 넘기는 것과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로마서에서는 아무리 찾아보려고 해도 찾을 수 없는 개념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회개'라는 단어다. 로마서에서는 회개하라는 말이 없다. 하지만 자신의 죄된 본성을 십자가에 못박고 성령의 인도를 받으라고 명령하고 있다. 이것이 곧 로마서에서 말하는 회개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회개 중에서 회개인 본질적인 회개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사실 사람이 본질적인 회개를 하기 전까지, 자신의 믿음은 인침을 받은 상태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다시 말해 그의 믿음은 아직 온전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한 상태에서 혹 죽음이라도 맞이하게 된다면 그 사람의 구원은 보장받을 수 없을 것이다.
8. 아브라함의 이신칭의의 3단계 과정
이러한 사례는 아브라함의 실례를 통해서 나타난다. 아브라함은 약85세 때에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았다(창15:6). 하지만 그의 믿음이 인침을 받아야 했다. 그것이 곧 할례다(창17:10). 그때 아브라함의 나이가 99세였으니 아브라함은 약 12~14년정도를 회개하는 삶을 살고 나서야 비로소 할례를 받은 것이다. 할례는 영적으로 볼 때, 사실 육적인 자신의 몸을 벗는 것으로서 자신이 모든 생각과 계획들을 죽음에 넘기는 것을 가리킨다. 다시 말해 이후부터는 육신의 본성을 따라 살지 않기로 결단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것이 곧 할례다. 그러므로 할례는 죄된 본성으로부터 회개 곧 본질적인 회개인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했다고 해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온전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의 믿음이 온전히 인정받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테스트를 통과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적어도 아브라함이 125세였을 때다. 그때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독자 이삭을 바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런데 125살 무렵 아브라함의 믿음은 상당히 성장해 있었다. 이미 칭의를 받았고 할례(본질적인 회개로서 칭의의 인침)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했다. 그제서야 하나님께는 그의 믿음을 온전한 것이라고 인정해주셨다. 하나님께서는 "네가 이제야 나를 경외하는 줄을 알았다(창22:12)"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때 아브라함의 믿음은 온전해졌다. 완성의 단계에 도달한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도 구원의 완성의 단계에 도달하려면, 칭의 후에 회개생활을 잘 감당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무조건 순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때에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는 것이다. 당신에게도 이러한 믿음이 있게 되기를 축복한다.
9. 죄사함이 구원인가?
두번째로, 죄사함이나 영생을 얻음이 구원인지 아닌지를 살펴보자. 믿는 자가 회개하여 죄사함을 받은 것을 가지고 구원이라고 말해서는 아니 된다. 왜냐하면 죄사함을 받았어도 우리의 육신 때문에 우리는 또 다시 죄를 짓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때가 되면 우리는 또 다시 회개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야 예수님의 보혈로 깨끗함을 얻을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지은 죄를 회개하거나 죄된 본성을 회개했다고 해서 자신은 이미 구원받았다고 말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목숨을 다하는 그날까지 죄와 싸워야 한다. 그리고 혹시라도 죄에게 졌다고 한다면 우리는 즉시 회개해야 한다. 그래야 죄사함을 받고 천국에 들어갈 수가 있기 때문이다.
10. 영생얻음이 구원인가?
뿐만 아니라 우리가 믿음으로 혹시 영생을 소유하였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자신이 구원받았다고 말해서는 아니 된다. 왜냐하면 믿음을 가져 영생을 소유한 자라 하더라도 계속 범죄하거나 범죄하였으나 회개하라는 성령의 책망을 거부한 채 회개하기를 거부한다면 그 사람은 얼마든지 기록된 하늘의 생명책에서 그의 이름이 지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구약의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해주셨고, 부활후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사도요한에게 들려주신 말씀이다.
출32:33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게 범죄하면 내가 내 책에서 그를 지워 버리리라
계3:5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구원을 장담할 수 없다. 첫째로, 언제라도 우리는 핍박과 죽음의 현장을 만날 때에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할 가능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둘째로, 죄를 짓고도 계속해서 회개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하늘에 기록된 생명책에서 우리의 이름이 지워질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이렇게 말해야 한다. '우리는 오늘도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뤄가고 있습니다(빌2:12)" "주여, 아직도 내게 믿음이 부족하오니 내게 믿음을 더하여주시고, 생각날 때마다 내 죄를 회개하여 도와주시옵소서. 아멘."
11. 나오며
그렇다. 구원은 자신의 영혼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리고 이신칭의는 내 영혼이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 믿음의 첫발을 내딛은 것이다. 이때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어느순간에 하나님의 생명에 내게 더해지는데, 이것을 거듭남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우리는 날마다 회개함으로 우리가 지은 죄를 사함받게 된다. 고로 구원이란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 이신칭의와 더불어 하나님의 생명을 얻고, 날마다 회개하여 죄사함을 얻는 가운데, 우리의 영혼이 천국으로 옮겨지는 것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