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구원받거나 지옥에 떨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뜻인가 아니면 인간의 책임인가? 인간에게는 인간만이 가지는 독특한 특징이 있다. 그중에서도 자유의지라는 것이 있다. 그렇다면 아담의 타락 이후에 인간의 자유의지는 어느 정도 인가? 과연 그것으로 스스로 구원에까지 이를 수 있는가?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팔게 된 것은 과연 누구의 뜻이었으며 누구의 책임인 것인가?
1. 들어가며
인간은 자신이 가진 자유의지로서 스스로 하나님을 찾고 믿어서 구원받을 수가 있을까? 그리고 사람이 죄를 짓게 되는 것은 전적으로 인간의 책임인가 아니면 하나님 책임인 것인가? 가령 예를 들어보자. 예수님의 12제자의 하나였던 가룟유다가 죄짓고 이후에 멸망에 떨어진 것은 자신의 책임인가 아니면 하나님 책임인 것인가? 오늘 이 시간에는 인간에게 있는 자유의지란 대체 어떤 것이며, 그것의 한계와 책임이 누구에게 있으며, 우리 인간은 어디까지 책임을 져야 하는지에 대해 함께 나살펴보고자 한다.
2. 자유의지란 무엇인가?
첫째, 인간에게 부여진 자유의지란 무엇인지부터 살펴보도록 하자.
자유의지란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형상의 한 종류다. 하나님의 형상에는 하나님의 속성들과 양심 그리고 자유의지 등이 있는데, 이러한 하나님의 형상 중에서 자유의지는 인간을 특징지우는 매우 독특한 성질인 것이다. 자유의지란 무엇인가? 그것은 어떤 것의 강요가 아니라 자발적인 선택의 의지를 가리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어떤 영향이나 그 누구의 도움없이도 스스로 선과 악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가리킨다. 맨 처음 창조된 인간에게는 이러한 자유의지가 완전하게 갖추어져 있었다. 그때에 인간은 선을 택할 권한과 악을 택할 균등한 권한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그때에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주신 자유의지와 그 권한을 결코 침범하지 않으셨다. 만약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자유의지의 권한을 100% 위임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하와와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으려 할 때 천둥 번개를 내렸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선악과를 따먹지 못하도록 조종하거나 막았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선택권한을 침범하지 않았다. 다만, 그들이 자유의지를 사용해 죄를 범하게 된 이후에 그들의 행한 일에 대한 책임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셨다.
3. 타락이후에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3가지 견해
둘째, 그렇다면 타락 후에 인간의 완전한 자유의지는 어떻게 되었을까?
타락 이후에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해서는 크게 2가지 신학사조가 있었다. 하나는 어거스틴의 신학사조이며, 또한 펠라기우스 신학사조다. 이 중에서 어거스틴(Augustinus, A.D.354~430)은 자유의지에 대한 부정적인 입장의 대변자였다. 그는 아담의 타락이후 인간의 자유의지는 완전히 상실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죄지을 자유의지만 남아있다고 했다. 그러므로 인간은 오직 악을 행할 자유를 가졌을 뿐 영적인 그 어떤 선도 행할 수 없다고 했다. 인간이 다만 할 수 있는 것은 세속적인 선을 행할 수 있는 의지, 다시 말해 저급한 수준의 칭찬받을 자유의지만 있다고 했다. 그러므로 이러한 상태에 있는 인간은 결코 스스로 구원에 이를 수 없기에,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서 가능하다고 했다. 다시 말해 불가항력적인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이 가능하다고 믿은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의 은총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설파했다.
하지만 어거스틴 당시에 또 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펠라기우스(Pelagius, A.D.360?~420)라는 사람이었다. 그는 자유의지에 대한 매우 긍정적인 입장의 소유자였다. 그는 비록 아담이 범죄했어도 그에게는 여전히 죄짓지 아니할 자유의지가 남아있었고 그의 후손들에게도 그것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즉 비록 아담이 범죄했어도 인간의 자유의지는 결코 손상되지 않았으며, 마귀에 의해 파괴되지도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인간이 가진 자유의지는 완전하게 후손들에게 물려지고 있다고 했다. 마귀의 힘이 강하기는 하지만 인간이 자신의 자유의지를 사용할 수 없을 만큼은 아니며, 죄된 육체가 영혼을 지배할 만큼 죄성이 강한 것도 아니라고 했다. 그러므로 인간이 죄를 짓는 것은 자유의지가 악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남용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래서 펠라기우스는 인간은 자신이 가진 자유의지를 사용해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으며 구원에도 이를 수 있다고 주장했다. 다시 말해 인간은 죄를 이기고 하나님을 선택하여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한 것이다. 결국 펠라기우스는 그가 죽고 난 10년 뒤, A.D.431년 에베소 회의에서 이단으로 정죄되고 말았다.
하지만 펠라기우스의 주장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도 반(semi)펠라기우스주의로 부활했다. 이들은 펠라기우스주장도 틀린 데가 있고 어거스틴의 주장도 틀린 데가 있다고 말했다. 즉 인간은 아담의 타락이후에 자유의지를 상실하기는 했지만 구원에 이를 수 없을만큼 완전히 상실하지 않았다고 했으며, 반대로 오직 구원은 불가항력적인 하나님의 은총으로만 주어진다는 어거스틴의 주장도 틀린 것이라고 했다. 일종의 절충안이었다. 이들은 어거스틴의 절대예정론을 반대했다. 왜냐하면 절대예정론은 구원을 향한 인간의 노력이나 수고가 필요없게 만들고 전도의 열을 약화시킬 뿐더러, 반대로 사람을 숙명론적으로 자포자기와 슬픔에 빠지게 할 수도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즉 인간의 타락 이후 인간의 자유의지는 손상을 입기는 했으나 완전히 소멸된 것은 아니며, 비록 약화되었기에 그 자체만으로는 자신을 구원에 이르게 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은총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남아있는 자유의지로 구원의 첫 발을 내디딜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 반대의 의견도 주장했다. 다시 말해, 어떤 사람에게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은총이 주어진다고 할지라도, 인간은 남아있는 자신의 자유의지로서 구원을 거부할 수도 있다고 한 것이다.
4. 자유의지에 대한 성경적인 견해
그렇다면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가장 성경적인 입장은 어떤 것일까? 그것은 놀랍게도 반펠라기우스주의자들의 주장과 거의 흡사하다. 그러나 역사는 아이러니하게도, 어거스틴의 신학사조를 다시 계승발전시킨 종교개혁의 형태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래서 종교개혁이후에는 대부분 어거스틴의 신학사조를 이어받은 칼빈의 이중예정론과 하나님의 절대주권사상을 따라가고 말았다. 그리하여 또다시 어거스틴의 신학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고 있는 인간의 자유의지는 어떤 것인가? 이제 그것을 정리해 본다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창조된 인간은 완벽한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둘째로, 그러나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 자유의지에 상당한 타격을 받기는 했으나 자유의지가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비록 아담이 타락했어도 죄된 본성이 끄는데로만 100% 이끌려갈 수밖에 없는 노예의지만 있는 것은 아닌 것이다. 작지만 선택의 자유의지가 살아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것은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이후 첫번째로 낳았던 가인과 둘째아들의 제사 사건에서 발견할 수 있다. 어느날 가인과 아벨이 제사를 드렸는데,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제사는 받아주시고 가인의 제사는 거부하셨다. 그때 가인은 치밀어오르는 분노를 주체할 수 없었다. 그때였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 앞에 죄가 엎드려 있지만 나는 네가 죄를 다스리기를 원한다(창4:7)" 하지만 가인은 분노를 참지 못했고 결국 동생을 쳐죽이고 말았다. 죄된 본성이 착한 본성을 이겨버린 것이다. 그런데 이때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면, 인간은 죄가 올라왔을 때에 무조건 죄에 순복해버리는 것이 아니라 어느정도 대항할 수 있는 자유의지가 있다는 것을 말씀하셨다. 다시 말해 인간은 타락 이후에도 어느정도 선택의 자유의지가 남아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그후에도 출애굽한 2세대들을 향해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 앞에 생명과 사망, 복과 저주를 놔두었으니 살기 위해서 생명과 복을 택하라(신30:19~20)" 만약 인간이 생명과 복을 택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고 했다면,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그리고 에스겔선지자도 하나님의 마음을 이렇게 알려주었다. "나는 악인이 죽는 것을 조금이라도 기뻐하지 아니한다. 돌이켜 살기를 원한다. 그러니 돌이켜 회개하고 모든 죄로부터 떠나거라. 그리고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하여 하나님을 섬기거라(겔18:23,30~32)". 그렇다. 인간은 아담의 타락이후로 죄된 본성을 자기 안에 가지고 태어나지만 하나님의 은총에 반응할 수가 있고, 죄된 본성을 거부하면서 하나님의 은총을 향해 갈 수도 있는 것이다.
셋째로, 아담의 타락 이후 인간은 하나님의 은총없이 스스로 죄된 본성을 이기고 선을 행할 능력이 있기는 하나 턱없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은총이 주어지지 않은 자연상태에서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을 찾기가 어려우며, 죄를 거역하여 이길 능력이 턱없이 부족한 상태다(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나면 죄된 본성을 이길 수 있는 또다른 강력한 능력 곧 성령의 능력이 부어지게 된다). 그렇다고 인간은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해 자신이 책임이 없는 것은 아니다. 사람이 죄를 짓게 되는 것은 자신의 양심으로부터 가책을 느낌에도 불구하고 죄를 좋아해서 죄를 선택한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롬7장에서 사도바울이 언급하고 있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한다. 선을 행하고자 하는 원함은 내게 있지만 원치 아니하는 악을 행하고 만다(롬7:17~20)" 그러므로 인간이 하나님께 요구하시는 선을 행하려면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 있어야 하는 것이다.
넷째로, 아담의 타락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자유의지는 하나님이 구원으로 이끄시는 선행적인 은총에 반응할 수 있을 정도는 된다는 것이다. 다시말해, 인간이 아무리 타락했어도 구원으로 초청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에 스스로 반응할 수 있을 정도의 자유의지는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의 경우도 성립된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은총이 그에게 부어짐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자신의 남아있는 자유의지를 사용해 하나님의 구원의 초청을 거부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실에 근거하여 하나님께서도 훗날 인간을 심판하실 수가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소아시아의 일곱교회 중에 하나인 라오디게아교회의 사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린다. 그러면 누구든지 나의 음성을 듣고 문을 열거라. 그러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갈 것이고 나는 그와 더불어 먹을 것이며, 그는 나와 더불어 먹을 것이다(계3:20)" 그렇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우리를 구원으로 초청하실 때에 우리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신다. 그러나 강제로 여시지는 않으신다. 하지만 인간은 자신에게 남아있는 자유의지로서 주님을 자기 안으로 모셔들일 것인가 아니면 거부할 것인가를 선택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아담이 타락한 이후에도 인간에게 남아있는 자유의지의 능력과 한계가 무엇인지를 설명해준다.
그러나 아담의 타락의 전이나 후나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강제하시는 않으신다. 부족하지만 인간이 가진 자유의지를 존중해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들은 우리에게 이렇게 가르친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면 진리에 이르기를 원하신다(딤전2:4)", "오직 주님은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신다(벧후3:9)" 그렇다. 아담의 타락이후라도 모든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은총이 임할 때에 그것을 수용할 수도 있고 거부할 수도 있는 자유의지가 남아 있는 것이다. 그때 우리 모두는 그것을 사용해 구원에 이르러야 한다. 우리가 죄지어 지옥에 떨어질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는 하지만, 구원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은총에 응해야 하는 것이다. 그때가 되면 단연코 우리는 그분을 붙잡아야 한느 것이다. 그리고 그분 앞으로 믿음으로 나아가야 한다. 지은 죄에 대해서는 회개해야 한다. 그리고 어떠한 어려움이 찾아온다해도 그분에 대한 믿음을 끝까지 붙들어야 한다. 그분에 대한 믿음을 저버려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어거스틴의 주장처럼, 가만히 있어도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해 주시는 것이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은총에 우리의 노력과 의지가 들어가야 우리도 구원의 노정에 들어설 수 있는 것이다.
5. 가룟유다가 지옥에 떨어진 것은 누구의 책임인 것인가?
그렇다면 가룟유다가 자살해서 지옥에 떨어진 것은 누구의 책임인 것인가? 어거스틴이나 칼빈의 주장대로하면,ㅡ 가룟유다는 만세전부터 예수님을 팔 자로 예정된 자요, 지옥에 떨어질 것으로 예정된 존재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틀린 것이다. 아니다. 예수님을 팔아넘길 자가 예정되어 있었던 것이지, 가룟유다가 그 사람으로 예정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설령 그가 잘못하여 자신의 스승이었던 예수님을 팔았다 하더라도, 그는 회개하면 용서받을 수 있는 기회가 얼마든지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가진 돈욕심에 끌려 예수님을 넘겨주었으며, 양심의 가책 때문에 자살을 선택하여 지옥에 떨어지고 말았다. 자신이 지었던 죄를 들고 예수님 앞으로 가서 용서를 구해야 했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주님을 의지하지 않는 것이다. 결국 그는 영원한 멸망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그렇다. 자신을 지옥에 떨어뜨리는 범죄는 자신의 책임인 것이다.
6. 나오며
그러므로 이미 회개와 믿음을 사용해 구원으로 가고 있는 자는 하나님의 은총이 남들에게 주어지도록 노력해야 한다.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구원받을 수 있도록 기도해줘야 한다. 그리고 그들이 비록 죄를 지어 지옥형벌뿐이지만, 살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사실을 전해주어야 한다. 그럴 때에 멸망받을 수밖에 없던 자라도 누군가의 중보기도 때문에 구원받을 기회가 주어지게 된다. 왜 기도해야 하는지 그리고 우리가 왜 복음을 전해주어야 하는지 이제 분명해졌다. 구원은 누구든지 복음을 듣고 수용하는 자애게 주어지며,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회개하는 자에게 주어재기 때문이다. 만세전부터 어떤 개인이 구원받기로 예정된 것은 없다는 것을 알라. 다만 누군가로부터 복음을 듣거나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 예수님을 믿고 그리고 회개하는 자가 구원받게 되는 것이다. 결코 만세전부터 구원받기로 예정된 개인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회개하라. 복음을 받아들이라. 그리고 자신이 얻은 구원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해주라. 이것이 우리의 할 일이다. 건투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