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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투브 주소 https://youtu.be/adcTfuIGztI
날짜 2018-09-28
본문말씀 요한계시록 3:14~22(신약 402면)
설교자 정병진목사
주제어 두아디라교회, 영적으로 죽어있는 교회, 사데교회, 착각하며 사는 자, 댓가를 지불하라

사람이 영적으로 죽어있다는 것을 무엇을 말하는가? 살아있다고 하나 이름뿐인 신앙인이라는 사실을 어떤 잣대로 확인할 수 있는가? 여기 그 방법이 있다. 그것은 부활승천하신 예수께서 말씀해주신 방법이다. 그것은 2가지였다. 그러므로 오늘날 나도 이러한 잣대로 늘 자신을 점검해 보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도 모르게 나태하거나 안일한 삶으로 치달아 구원의 노정에서 탈락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괜찮하고 말한다고 해서 될 일도 아니고, 누군가가 괜찮다고 말해주었다고 해서 될 일도 아니다. 이것은 영적 전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신을 점검하고 무장하지 않는 한 시간과 공간에 관계없이 쳐들어오는 귀신들과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없음을 기억해야 한다. 사탄마귀의 궤계를 물리치기 위해 오늘도 힘써야 한다. 그것은 평생을 힘써서 해야 할 일이지 한 두 번으로 끝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자, 이제라도 내가 영적으로 죽어 있는지 한 번 들여다보자 그리고 어떻게 회복할 수 있는지도 알아보자. 그리고 도전해보자. 어떤 진리라도 그냥 얻어지는 영적 진리는 결코 없는 것이니까...

 

1. 들어가며

  요한계시록 2~3장에는 일곱 개의 교회가 나온다. 이 일곱 개의 교회는 A.D.95~96년 당시 소아시아에 실재하였던 교회들 가운데 주님께서 소개하고 계시는 대표적인 교회들이다. 그 중에서도 다섯번째로 등장하고 있는 사데교회는 종교개혁시대의 교회상을 반영해주고 있다고 하는 것을 여러 신학자들도 동의한다. 그리고 바로 앞선 두아디라교회는 중세로마카톨릭시대의 교회상을 반영한다고들 말한다. 그렇다면, 중교개혁시대의 교회상을 반영해주고 있는 사데교회를 향해 우리 주님께서는 무슨 평가를 하고 계신가? 참으로 놀랍게도 우리 주님께서는 매우 가련한 평가를 하셨다. 왜냐하면 사데교회는 살아있다고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제로 죽은 교회였다고 평가하셨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종교개혁시대의 교회가 죽은 교회로 변모해버린 것일까? 그리고 교회가 죽었다고 하는데, 그 뜻은 무엇을 가리키며, 어떻게 해야만이 다시 살아날 수 있는 것인가? 그리고 사데교회 이후에 등장하는 빌라델비아교회와 라오디게아교회는 이러한 사데교회와 어떤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 오늘은 그것을 살펴보자.

 

2. 사데교회는 왜 두아디라교회와 함께 교회 앞의 지역의 이름이 복수인가?

  사데교회는 바로 이전에 등장하는 두아디라교회와 어떤 연관성을 가지고 있을까? 그리고 사데교회 이후에 등장하는 빌라델비아교회 및 라오디게아교회와는 또 어떤 연관성을 가지고 있을까? 우선 소아시아 일곱교회들 가운데 특이한 이름부터 살펴보자. 소아시아에 있는 일곱교회들(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가운데, 이름이 복수인 교회가 있다. 그것도 딱 두 개만 있다. 그것은 두아디라교회와 사데교회 뿐이다. 다시 말해, 다른 5개의 교회들은 다 그 이름이 단수명칭으로 등장하고 있는데, 이 두 교회만은 복수명칭으로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즉 두아디라교회는 "두아디라들 안에 있는 교회"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사데교회는 "사데들 안에 있는 교회"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이 말은 당시 소아시아의 두아디라 라는 도성이 2개 이상 있었고, 사데라는 도시가 2개 이상 있었다는 말인가? 그건 아니다. 그렇다면 왜 주께서는 사도요한에게 도시의 이름을 복수형태로 말씀하신 것인가? 그것은 이 두 개 교회의 특징을 보면 알 수 있다. 두아디라교회는 주지하시다시피 중세로마카톨릭시대의 교회상을 반영하고 있으며, 사데교회는 종교개혁시대의 교회상을 반영하고 있다고 말해지고 있다. 그런데 이 2개의 교회는 둘 공히 이 교회의 책임맡은 자 곧 말씀전파자인 주의 종들에게 커다란 문제가 있었다. 먼저 두아디라교회는 거짓 선지자 이세벨을 교회에 용납하여 이 교회을 인도하는 주의 종이 이미 타락해 있었다. 그래서 우상숭배와 음행같은 것은 죄가 아니라는 가르침에 미혹되어 그 가르침을 전파하고 있었다. 한 마디로 주의 종이 타락해 있는 교회가 바로 두아디라교회였던 것이다. 그러니 우상숭배의 죄로 이 주의 종의 메시지를 듣고 따라가고 있는 자는 불못에 떨어질 위험성을 가지고 있었다(계21:8). 그리고 사데교회는 말로는 살아있다는 알려져있지만 실은 주의 종이 이미 죽어있는 상태에 있는 교회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이 교회도 주의 종에게 심각한 문제가 있는 교회였던 것이다. 그렇다. 이 두 개 교회의 지명들이 복수로 등장하고 있는 것은 두 개의 교회가 이미 주의 종들이 거짓 가르침에 넘어가 있는 상태에 있었고, 이미 죽어있는 상태에 있어서, 평신도들이 이들 지도자들을 따라갈 수는 없는 상태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 교회에 소속되어 있지만 주의 종의 가르침을 따라가서는 같이 멸망할 수 있어, 교회에는 소속되어 있으나, 다른 영역으로 분리되어 있는 성도들이 교회 안에 또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한 개의 교회이나 공동체가 둘이 있는 상태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이름 앞에 등장하는 지역명칭이 복수로 언급되어 있는 것이다.

 

3. 사데교회, 빌라델비아교회, 라오디게아교회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그렇다면, 사데교회는 어떤 교회였는가? 사데교회는 살아있다고 하는 말은 있지만 실은 죽어있는 교회를 지칭한다. 여기서 죽어 있다고 하는 대상은 평신도를 가리킨다기보다는 이 교회를 책임지고 있는 주의 종을 가리킨다. 그리고 목회자의 잘못된 가르침으로 인하여, 목회자 자신도 죽어 있는 상태에 있을 뿐만 아니라 그분으로부터 말씀을 듣고 있는 성도들도 또한 같이 죽어있는 교회를 가리킨다. 그래도 이 교회 안에는 숫자적으로는 많지 않아도 진실한 평신도들이 있었다. 이들은 사데교회 안에 속해 있기는 하지만 아직까지 자기의 옷을 더럽히지 아니하고 흰 옷을 입고 있는 자들이었다(계3:4). 그들은 늘 더럽혀진 자기의 옷을 예수의 피로 빨아서 희게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요일1:7). 그러므로 사데들 안에 있는 교회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다. 한 부류는 흰 옷을 입은 무리들로서, 날마다 예수님의 피로 자신의 죄를 씻어내고 살고 있는 자들이다. 그런데 또 한 부류는 죽어있는 가르침을 전하는 주의 종을 따라 평신도들도 영적인 측면에서 이미 죽어있는 자들이 있었다. 앞의 부류를 확대적용하면 빌라델비아교회적인 상황이 되는 것이고, 뒤의 부류를 확대적용하면 라오디게아교회적인 상황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빌라델비아교회와 라오디게아교회는 사데교회의 연장선상에 있는 교회요, 확대판인 것이다. 그것은 교회들에게 보낸 편지의 첫머리에 등장하는 예수님에 대한 소개에서 그러한 이유를 찾아낼 수 있다. 다시 말해,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교회의 경우는 예수님에 대한 소개가 전부다 계1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모습과 예수님의 자기선언에서 따왔다(지금 읽어보라). 하지만 빌라델비아교회와 라오디게아교회는 계1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모습과 예수님의 자기선언에서 따온 것이 없다. 새로운 표현들이다. 예수님의 모습과 자기선언에서 나오는 표현은 이미 에베소에서 사데교회 가운데 다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빌라델비아교회와 라오디게아교회는 추가된 교회들인데, 그것은 앞에서 말씀드렸다시피 사데교회의 확대판인 것이다. 그러므로 빌라델비아교회는 사데들에 속한 한 공동체로서 그래도 흰 옷을 입고 있는 무리들을 가리키며, 라오디게아교회는 이미 죽은 상태에 있는 주의 종을 비롯하여 그러한 주의 종을 따라가고 있는 죽어있는 공동체를 가리킨다고 하겠다.

 

4. 라오디게아교회는 왜 영적으로 죽어있는 상태에 있었는가?

  그러므로 사데교회의 부정적인 측면을 확대적용하면 그것이 곧 라오디게아교회의 상태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라오디게아교회는 어떻게 되어서 죽어있는 상태에 놓여 있었을까? 요약해보면, 그것은 2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오늘날에 들어와서도 라오디게아교회처럼 살아있다고 말은 하지만 실은 죽어있는 교회들이 즐비하다. 그래서 어떤 상황이 그들에게 주어진다고 해도 그들은 차겁지도 않고 뜨거워지지도 않는다. 이미 신앙이 화석화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이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라오디게아교회에게 주신 말씀 속에 들어있다.

  첫째, 이들은 자기들이 지금 어떤 영적 상태에 있는지를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상태에 있었다는 것이다(계3: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계3:17)" 그들은 외적인 자신의 모습만을 바라보고서 자신의 내면도 그렇게 되어 있으리라고 믿고 있었을 뿐이다. 그랬다. 그들은 자신을 부자라고 생각했고, 부요하며 부족한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들의 실재는 영 딴판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어떻게 구원받는지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겉으로는 사금산업으로 인하여 부자가 되어 있기에 자신들은 축복받았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그리고 양모를 팔아서 부요한 자가 되었기에 자신들은 축복받은 사람들이라고 여겼다. 그리고 부르기아안약을 팔아서 남의 눈도 고치고 자신의 눈도 고쳐서 돈을 많이 벌어놓았고 자신들은 교회에 출석하고 있기에 구원받고 천국에 들어가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하지만 주님의 평가는 이와는 정반대였다. 우리 주께서는 육체적이고 물질적인 측면의 평가를 내리신 것이 아니라, 오직 영적인 평가만을 내리시기 때문이다. "너희는 살았다고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계3:1)", "네가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계3:16)"

  둘째, 이들은 믿음과 선행과 영적 진보를 위해서라면 어떠한 댓가라도 지불했어야 했지만 그들은 그것을 전혀 지불하지 않고 있었다는 점이다(계3:18). 그래서 그들은 한 마디로 죽어가고 있었다. 세상의 좋은 것을 얻기 위해서는 댓가를 지불해서 얻어냈지만 영적인 것을 얻기 위해서 그들은 댓가지불하려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기도회에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말씀듣기를 게을리했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영혼의 상태를 진단해주는 말씀을 싫어했을 것이다. 그들은 현재에 그냥 만족하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내가 부자로 살고 있고, 또 교회에 다니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안전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더욱이 주의 종도 그것에 대해 아무런 지적을 하지 않았고, 자신도 지금 어떤 영적 상태에 있는지 돌아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둘 다 망하는 길이다. 댓가를 지불하지 않고 얻을 수 있는 영적인 것은 없기 때문이다. 부르짖어 기도하지 않은 자를 하나님께서 만나주실 리가 없으며, 그들에게 참된 복을 주실 리가 없다. 사실 우리에게 거져주시는 이신칭의의 은혜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구속의 사건이라는 댓가가 지불되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우리가 거저 얻을 수 있는 것은 없다. 마25장의 열처녀의 비유를 보라. 신랑이 올 때에 미련한 처녀에게서 기름이 떨어져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에 거져 얻을 수 있는 기름이 그들에게 있었는가? 가서 사와야 했다. 늦게 댓가를 지불했지만 이미 때는 늦어버렸다. 지금 댓가를 지불하라. 지금 더욱 더 기도하라. 지금 더욱 더 진리의 말씀을 들으라. 지금 더욱 더 책망을 받으라. 지금 더욱 더 회개하라. 지금 더욱 더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뤄가라.

 

5. 라오디게아교회가 살아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라오디아교회가 영적으로 죽어있는 상태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것은 첫째로, 가능한한 빨리 자신의 영적인 상태를 자각하고 깨어나는 것이다. 누군가로부터 괜찮다는 말을 들었다고 해서 괜찮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비진리의 누룩같은 말씀들로 부풀려 있는 자신이 심각하게 영적으로 가사상태에 빠져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그리고 이어서 둘째로, 날마다 댓가를 지불해서라도 영적인 무장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별히 사데교회 안에 있었지만 이기는 자들로 남아있던 작은 무리들처럼 예수님의 피로 자신의 행실의 겉옷을 빨아 희게 해야 한다. 그래야 그날에 이르러 이미 기록된 생명책에서 자신의 이름이 지워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계3:5). 그렇지만 이러한 작업은 육체를 쳐 복종시키는 수고와 노력 그리고 영적으로 자신을 무장하기 위한 애씀과 인내, 이런 것들이 없이 거져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댓가를 지불하지 않고 얻을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6. 나오며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그날 죽는다면 순전히 주의 은혜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날 죽지 않는다. 앞으로 수십년을 더 살아야 한다. 하지만 사탄마귀가 그 사람을 천구가도록 그냥 놔두겠는가? 결코 아니다.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여 넘어뜨린다는데, 어찌 믿음 하나로 시작한 사람들을 그냥 내버려두겠는가? 온갖 수단과 방법들을 동원하여 넘어뜨리려 할 것이다. 그런데 만약 자기가 출석하고 있는 교회의 상황이 두아디라나 사데교회의 상황이라면 정말 큰 일이 아닐 수 없다. 주의 종도 이미 타락했거나 죽어있는 상태에 있으니 같이 멸망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천성적으로 쉽고 편한 길을 택하려고 한다. 노력하고 수고하고 애쓰며 고통스럽고 힘든 길을 선택하려 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영적으로 무장하여 사탄의 온갖 교묘한 속임수와 유혹을 이겨내어 천국에까지 들어가기 위해서는 2가지가 필요하다. 자신의 영적 상태를 늘 진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신앙과 구원의 바른 길을 가기 위해서는 댓가를 지불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이미 믿음으로 얻은 일차적인 구원을 잃어버리지 아니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늘 기억해야 한다. 기적과 같은 절대적인 은혜로 애굽에서 탈출해나왔지만 교회생활을 대변하는 광야에서 애굽의 우상숭배의 습관과 불평불만하던 습관을 고치지 못하고, 하나님이 주시려는 가나안땅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한 자들이 다 광야에서 죽었다는 것을 말이다. 그것은 천국에 못들어갔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건투를 빈다.

 

2018년 9월 28일(금)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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