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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19-03-22
본문말씀 고린도전서 13:8~13(신약 279면)
설교자 정병진목사
주제어 방언중지론,방언폐지론,방언은사는끝났다,방언과방언통역의은사,방언통역의은사의한계,

방언은 서기1세기를 전후로 그쳤는가? 더이상 방언의 은사는 경험할 수 없는가? 이것에 대해 그렇다고 주장하는 분들도 있고, 그와 반대로 주장하는 분들도 있다. 보통 방언무용론이나 방언폐지론을 주장하는 분들은 방언은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가 아니었고 외국어였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신약성경의 기록이 끝마쳐졌을 때에 외국어방언도 중단되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사실일까? 오늘날 많은 분들이 여기에 동조하거나 그것을 뒤따라가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분명히 해야 한다. 과연 성경에서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는지를 말이다.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만큼 믿고 따라가야 하며, 성경이 말하지 않는데도 억지로 맞출 필요도 없다. 그렇다면, 성경에서는 방언의 은사를 무엇이라고 가르쳐주고 있으며, 방언의 은사가 지금까지 유효한 지에 대해 무엇을 증언해주고 있는가? 진짜 방언이 좋은 성령의 은사라면, 방언은 만능의 기도의 은사인가? 아니면 방언을 하면서도 주의해야 할 것들이 있는 것인가? 그래서 오늘은 방언이 무엇이며, 방언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지, 방언의 한계는 무엇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1. 들어가며

  방언은 외국어인가? 아니면 거듭난 자의 알아들을 수 없는 영이 말하는 것이며 기도인가? 그런데 방언의 은사가 아예 처음부터 외국였다고 주장하는 분들이 있다. 그런데 그들은 방언의 은사는 성경의 기록이 끝남과 동시에 방언도 그쳤다고 주장한다. 즉 방언의 표적은 사도시대에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졌는데, 이는 더이상 더이상 외국어로 복음을 전해야 할 필요성이 없어졌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과연 그러한가? 그렇다면 이들은 대체 무엇을 근거로 방언은 외국어였으며, 외국어 방언은 성경기록이 종료됨과 동시에 즉 사도시대가 끝남과 동시에 사라졌다고 주장하는가? 한편 방언을 성령세례의 표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넘어서 구원의 표로까지 여기는 자들도 있다. 정말 이들의 주장처럼, 방언을 말하는 자는 이미 구원받은 자이며 그런 자는 다 천국으로 들어가게 되는가? 한편 방언은 만능기도의 은사인가?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방언의 은사가 외국어이며 성경기록후 사라졌다고 주장하는 이유가 과연 합당한지를 살펴보고, 그렇다고 방언을 구원의 표적이요 만능의 기도의 은사로 보는 이들의 실수는 없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방언은 성경이 다 기록된 후에 그쳤는가? 아니면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가?

  방언은사중단론이나 방언폐기론자들은 방언은 원래부터 외국어였으며, 성경이 다 기록되자 외국어방언은 동시에 사라졌으며, 그 뒤로 방언을 비롯한 초자연적인 은사들마저 다 사라졌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이런 주장을 하는 분들은 과연 무엇을 근거로 그러한 주장을 하는 것인가? 그들은 2가지 말씀을 근거로 하여, 방언은 표적으로서 처음부터 외국어였으며, 방언은 사도시대 이후 사라졌다고 주장한다.

  첫째, 방언은사중단론자 내진 방언폐기론자들은 "방언은 고전14장에 나와있는 고린도교회의 방언 곧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 아니라, 처음부터 외국어였는데, 그 이유는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방언 자체가 외국어였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오순성 성령강림 사건을 지켜보고 방언소리를 들었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들었던 것이 아니라, 각기 자기나라의 말 즉 자기지방의 언어로 들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날 마가락방에서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말했던 방언은 헬라어로 "글로싸"라고 나와 있는데, 이것이 곧이어 이방인 고넬료가정에서도 나타났으며(행10:46), 에베소에서도 나타났기 때문이다(행19:6). 만약 오순절날 120명의 마가락방에서 성령세례를 받았던 자들이 외국어로 방언을 말했다면, 그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디아렉토(외국어)"라고 말했어야 했지만 오순절날 120명의 말하던 방언도 "글로싸"(행2:4)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고넬료가정에서 말했던 방언도 "글로싸"라고 기록되어 있고, 사도바울이 안수함으로 성령을 받고 방언을 말했던 에베소교의 12명의 남자들도 "글로싸"를 말했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만, 행2장에 처음 방언을 말했을 때, 그것을 들었던 15개국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자기나라의 언어(외국어, 디아렉토)로 들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므로 종합해보면, 행2장의 120명의 유대인들도 처음부터 알아들을 수 없는 말 곧 "글로싸"의 언어로 말한 것이다. 다만 그것을 듣고 있던 15개국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에게 하나님께서 초자연적으로 자기나라의 언어(디아렠토)로 듣게 하신 것이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그날 자기들의 말했던 방언을 "표적(원문, 한글성경은 '징조')이라고도 말했으며(행2:19), 선물(은사)(행11:17)이라고도 말한 것이다. 분명한 사실은 행2장의 120명의 유대인들이나, 고넬료가정에 모였던 자들이나, 에베소교회의 12명의 성도들이나 다 "방언(글로싸)"를 말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고린도전서 12장과 14장에 나오는 성령의 은사들 중에 방언의 은사로 동일하게 방언을 "글로싸"라고 표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고전14:2에서 사도바울은 그 방언을 사람이 알아들을 수 없고 오직 하나님만 알아들을 수 있는 영의 언어로서, 거듭난 자의 영이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는 것이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고로, 우리는 예루살렘교회나, 최초의 이방인교회였던 고넬료가정이나, 그리고 바울에 의해 성령을 받고 방언의 은사를 받았던 에베소교회나 고린도교회가 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 곧 "글로싸"를 표적과 성령의 은사로서 받았음을 확인해 볼 수 있다. 백 번을 양보하더라고, 만약 방언이 성령께서 주시는 초자연적인 선물로서 성령의 은사가 아니었다면, 왜 굳이 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더 나은 은사들을 사모하라고 하면서 방언과 방언통역을 언급했겠는가 하는 것이다. 방언이 만약 외국어였다면 외국어를 배우라고 하고 더욱 더 영적인 은사를 사모하라고 권면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사도행전을 기록했던 의사 누가는 바울의 선교동역자로서 바울의 2차전도여행 때에 함께 하여 바울이 순교할 때까지 그의 곁에 있던 이방인 그리스도인이다. 그런데 만약 행2장에 나오는 방언(글로싸)과 자신의 스승이었던 바울이 안수함으로 에베소교회에 나타났던 방언(글로싸)의 은사가 정말 다른 것이었다면 그것을 분명하게 다른 것이라고 기록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의사 누가는 둘을 똑같은 단어로 번역해놓았다. 둘 다 "글로싸"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행2장과 10장, 행19장 및 고전12장과 14장에 나오는 방언(글로싸)가 사람은 알아들을 수 없는 영의 언어이자 기도라는 것을 인정한다. 그리고 그러한 은사는 지금까지도 계속된다고 믿는다.

  둘째, 방언은사중단론자들이나 방언폐기론자들이 사도시대 이후 혹은 성령기록이 완성된 이후 방언이 그쳤다고 주장하는 근거는 고전13:10의 말씀 때문이다.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방언이 그칠 것이라고 했는데, 온전한 것이 온다는 말은 성경이 기록이 마친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우리는 분명히 할 것이 한 가지 있다. 그것은 그들의 해석이지 말씀 그대로가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온전한 것"이라는 말을 "성경기록이 끝난 것"이라고 주장하는 근거는 매우 약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뚱단지 같은 해석을 끌고 들어왔기 때문이요, 앞뒤의 문맥을 무시한 처사이기 때문이다. 사실 "온전한 것(완전한 것)"이 무엇인지 모를 때에는 우선 그 단어의 헬라어를 살펴보면, 앞뒤 문맥을 살펴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헬라어로서 "온전한 것"이라는 단어는 별 의미가 없다. "온전한 것, 완전한 것" 이상의 다른 번역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헬라어로서 그 의미를 찾는다면 동사에서 찾아야 한다. "온전한(완전한) 것이 올 때에"라는 문장에 나오는 동사의 시제다. 여기에 나오는 동사의 시제는 가정법 과거 문장이다. 그러므로 가정법 문장대로 고전13:8~10을 번역한다면, 이렇다. "사랑은 결코 떨어지지 아니한다. 그런데 비록 예언들일지라도 그것들은 [장차] 폐해질 것이다. 비록 방언들일지라도 그것들은 [장차] 그칠 것이다. 비록 지식일지라도 그것은 [장차] 폐지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부분으로부터 알고 있기 때문이요, 그리고 부분으로부터 우리가 예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일] 온전한 것이 [단번에] 올 때에는 부분으로서 있는 것이 [장차] 폐지될 것이다." 그렇다.  "그런데 만일 온전한 것이 단번에 올 때에는"이라는 문장은 동사, 가정법, 과거, 능동태 구문이다. 헬라어서 가정법은 미래의 일들을 표현하는 문장인데, 그중에는 가정법 현재 구문이 있고 가정법 과거 구문이 있다. 가정법 현재 구문은 그것이 시간적으로 현재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며, 그 일이 반복적이거나 계속적으로 나타나는 것일 때 즉 진행적이거나 선적인 동작을 묘사할 때 사용하는 구문이다. 그런데 가정법 과거 구문도 시간적으로 과거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단순히 일회적이며 점적으로 발생하는 동작을 묘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일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이라는 말은 계속적이거나 반복적인 일을 가리키지 아니하며, 단 번에 이루어질 일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 문장을 "성경의 기록이 완성될 때"라고 가정한다면, 가정 자체가 성립되지 아니한다. 왜냐하면 성경의 기록의 완성은 점진적으로 계속적으로 일어났었기 때문이다. 사도바울의 서신은 50년대에 완성되었고, 공관복음서는 70년대에 완성되었으며, 사도요한의 저작들(요한복음, 요한일서, 요한이서, 요한삼서, 요한계시록)은 90년대에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온전한 것이 올 때"라는 말을 "성경기록이 완성된 때"로 본다면, 이 문장은 가정법 과거구문을 사용하지 말고, 가정법 현재구문을 사용했어야 했다. 하지만 이 문장은 가정법 과거 구문을 사용하고 있다. 이것은 온전한 것이 오는 것이 단번에 일어날 미래의 어떤 것을 가리키고 있다는 결론을 맺는다.

  그럼 "온전한 것이 올 때"라는 말은 대체 무엇을 가리키는가? 그럴려면 문맥을 좀 더 살펴보아야 한다. 그럼, 이어지는 문장을 살펴보자. "[직역] 내가 유아로 있어왔을 때에 나는 유아처럼 말해왔다. 나는 유아처럼 생각해왔다. 나는 유아처럼 판단해왔다. [그런데] 내가 장년(성년)이 된 채 있을 때에, 나는 유아의 것들을 [이미] 버린 채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지금은 거울을 향하여 희미함 안에서 보고 있으나 그런데 그때에는 얼굴을 향하여 얼굴이 볼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내가 부분으로부터 알고 있으나 그때에는 내가 역시 온전히 [(그분에 의해)] 알이졌던 것같이 내가 [장차] 온전히 알 것이기 때문이다(고전14:11~12). 그렇다. 온전한 것이 올 때가 언제인지 우리는 이 문맥을 통해 확인해볼 수 있다. 그것은 얼굴을 향하여 얼굴이 보는 날을 가리킨다. 그날은 언제인가? 여기서 우리가 그분의 얼굴을 보는 날을 짐작해보아야 한다. 사람으로 이 땅에 나타나셨던 예수께서는 장차 그분이 재림하시는 날, 우리도 그분의 얼굴을 그날에 보게 될 것이다.  그러니 온전한 것이 오는 날은 다른 것이 아니라 주님이 재림하시는 날이며, 그날은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서로가 서로를 알아볼 것이기 때문에, 주님의 재림의 때를 가리킨다고 해석함이 옳다고 보여진다. 그렇다면, "온전한 것이 올 때" 폐지되고 말 방언의 은사는 주님의 재림때까지 계속 있을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상의 사실을 종합해보면, 오순절날에 120명이 성도들이 받았던 성령의 은사로서 방언이나 고넬료가정에 주어진 방언이나, 행19장에 나오는 에베소교회의 방언이나, 고전12장과 14장에 나오는 고린도교회의 방언은 전부다 알아들을 수 없는 영의 언어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영의 언어인 방언의 은사는 주님의 재림하시는 그날까지는 그치지 않고 계속되어야 할 성령의 은사인 것을 알 수 있다.

 

3. 방언의 유익한 점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방언을 하게 되었을 때에 어떤 유익이 있는 것인가? 사실 방언을 말하게 되면 여러가지 많은 유익들이 있다.

  첫째,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신이 이미 성령을 받아 거듭난 자라는 사실을 확인받기 때문에 유익하다. 둘째, 방언을 말하는 것은 성령의 초자연적인 은사가 지금 자신에게 나타난 것이기에 여기 성경의 나오는 말씀들은 사실이며 진리라는 것을 더욱 굳건히 신뢰하게 되기 때문에 유익하다. 방언을 통해서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예수님은 동일하며 성경은 사실인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셋째, 만약 방언을 통역하게 된다면, 지금 자신의 무슨 잘못을 하고 있는지를 성령의 예언을 통해 깨우치게 되며, 자신의 영이 지금 무슨 기도를 드리고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기 때문에 유익하다. 더불어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에 대한 답답함도 동시에 사라진다. 그리고 덧붙혀 방언으로 말하는 자는 미래에 되어질 일들을 성령께서 가르쳐주심으로 먼저 알고 기도함으로 준비해나갈 수 있으며,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선한 뜻을 온전히 깨닫고 자신의 사명에 더욱 충실할 수 있다.

 

4. 방언의 한계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방언은 만능의 기도의 은사인가? 정말 방언만 한다면 모든 것이 다 좋아지게 되는가? 그런데 사실은 아니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방언이 신령한 은사인 것은 맞지만 방언의 은사에도 인간이 개입할 여지가 많이 있기 때문이요, 아무리 방언으로 많이 기도한다고 해서 안 되는 일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방언통역으로 나온 성령의 말씀과 내 영이 드리는 기도라 할지라도 그것이 성경을 대신할만한 가치가 있거나 중요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제 좀 더 풀어서 말해보자.

  방언의 은사가 개인에게는 정말 유익한 은사인 것을 맞지만 방언의 은사도 한계가 있음을 보게 된다. 그것은 크게 3가지다.

  첫째, 아무리 방언으로 많이 말했다고 하더라고 그렇게 행한 사실 자체가 우리를 구원탈락의 위험성으로부터 지켜주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구원의 시작은 믿음과 회개인 것이 맞기는 하지만, 구원의 완성은 자범죄에 대한 회개와 어떠한 핍박과 고난 속에서도 주님을 믿는 믿음을 끝까지 지키고 배반하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마10:22, 계14:22). 즉사 아무리 방언을 많이 말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자범죄에 대한 회개를 대신할 수 없으며, 우리의 신앙고백을 대신할 수는 없는 것이다.

  둘째, 방언으로 아무리 많이 기도한다고 할지라도 방언 자체가 그 사람의 성품자체를 바꾸어주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의 성품의 변화는 외적인 성령세례를 통하여 주어지는 은사로 자동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부단한 회개생활과 순종과 기도생활을 통해 완성되어가기 때문이다. 그런데 방언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 나 자신의 성품을 바꾸어놓지는 못한다. 날마다 회개하면서 자신의 육체를 쳐복종시키며 주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에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성품을 바꾸어주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내성적인 사람은 적극적인 사람으로 바뀌고, 적극적인 사람이 신중한 사람으로 뒤바뀌는 것이다.

  셋째, 마지막으로 방언통역으로 받은 말씀이 성경만큼이나 값어치가 있다거나 성경을 대신할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방언통역을 통해서 방언의 내용을 들어보면, 방언은 참으로 신비롭기만 하다. 방언 안에는 성령의 말씀이 많이 들어 있는데 거기에는 내 사정을 다 아시는 전능자께서 우리의 사정을 다 아시고 우리 영과 더불어 탄식하며 기도를 도와주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래서 기도가 하나라도 개인적인 욕망으로 채우거나 욕심대로 구하는 것이 들어있지 않음을 발견하게 된다. 더욱이 방언기도에는 이기적인 간구도 들어있지 않음을 알게 된다. 그렇더라도 방언이 성경을 대신할 수는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방언은 사실 성령의 바램이거나 내 영의 소원일 따름이기 때문이다. 방언대로 반드시 그렇게 된다는 법칙은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소원이 그것이라는 것을 확인하거나 먼저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렇더라도 우리는 방언통역으로 주신 말씀에 순종하면서 그리고 잘못하고 있는 것은 회개하면서 기도하면서 나아갈 때라야 비로소 방언의 내용대로 우리가 되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약 방언통역이나 예언을 통해서 들었던 말이라도 그것을 소홀히 여기거나 죄를 짓고도 회개하지 않을 때가 있다면 방언의 내용은 점차 무용지물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더욱이 방언통역은 대부분 방언을 말하는 자가 하는 말을 의역으로 알아듣고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때로는 방언통역자의 생각도 같이 끼어들어갈 위험성도 가지고 있으며, 방언통역의 내용이 통역자의 신앙상태와 성경지식을 초월하지 못하다는 것도 알고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방언을 성경말씀처럼, 진리처럼 생각해서는 아니 된다. 다만 하나님의 바램과 소원이 들어있는 말씀이로구나, 그래서 내가 스스로 이 말씀에 자신을 복종시키지 않고 순종하지 않는다면 그러한 바램과 소원은 결국 사장되고 말 것이다.

 

5. 나오며

  방언은 성령께서 말하게 하심을 따라 이미 거듭난 자에게 성령이 부어질 때 나타는 성령세례의 결과로서, 죽었던 자신의 영이 되살아나가 영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방언은 일종의 내 영의 기도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방언은 자신의 영의 기도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방언은 성령께서 그 사람과 더불어 그에게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함(권면함, 충고함, 책망함, 위로함, 격려함)으로서 그를 돕고 있기 때문이다. 방언은 성령을 통해 그 사람을 향한 하나님을 전달해 주기도 하며, 잘못한 채 살고 있으면 책망하기도 하시는 분이 바로 성령님이시다. 그러므로 방언은 나 자신을 죄로부터 벗어나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뜻을 이루는 사람이 되는데 선구자처럼 도와주는 위대한 도구일 수 있다. 그러므로 방언은 하지 않는 것보다 하는 것이 훨씬 더 낫다. 하지만 방언의 한계도 있다는 것을 알고 방언과 방언통역을 활용해야 한다. 방언이 아무리 좋은 것일지라도 자범죄에 대한 회개와 믿음의 인내를 대신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또한 방언이 아무리 유익해도 사람의 성품까지 자동적으로 바꾸어주게 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셋째, 방언이 자기자신의 미래를 위한 가장 선하고 의로운 길을 제시해주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꼭 방언이나 방언통역으로 나온 말대로 다 성취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좋은 방언일지라도 항상 진리의 말씀인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방언은 하기는 하되, 위험성을 알고 방언을 잘 활용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방언의 은사를 사모함을 통해서 더 은사도 받게 되고, 천국에까지 들어가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2019년 3월 22일(금)

정병진목사(alletei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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