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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투브 주소 https://youtu.be/m6MGoqNHDEk
날짜 2019-08-16
본문말씀 창세기 4:1~12(구약 5면)
설교자 정병진목사
주제어 가인과아벨의제사,가인의질투와시기,가인의미움과살인,최초의살인자,비교의식의결과,분노와마귀,악한자의사로잡음

아무리 화가 난다고 할지라도 자기의 친동생을 돌로 쳐죽이는 형이 있을까? 놀랍게도 있다. 그는 바로 "태어난 최초의 사람" 가인이었다. 그가 자신의 동생 아벨을 그렇게 죽였다. 그래서 가인은 인류 최초의 살인자라는 타이틀을 거머쥐게 되었다. 그렇다면 왜 그는 동생 아우를 죽였던 것일까? 거기에는 2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그의 살인은 우발적인 범행이 아니라 그에게 동생에 대한 미움과 시기질투심이 계속 자라오다가 그만 창4장의 제사사건으로 인하여 감정이 폭발해버린 것이다(창4:7). 미움은 곧 살인이라는 말이 실감이 나는 데목이다. 둘째, 그 사건에는 사탄마귀의 배후조종도 동시에 있었다(요일3:12). 그는 사탄마귀의 속삭임에 속아넘어간 것이다. 이처럼 모든 사건의 배후에는 귀신의 역사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최초의 살인사건에 담겨있는 인간의 분노조절장애가 어떻게 해서 생겨나게 되는지를 살펴보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1. 들어가며

  가인은 왜 동생 아벨을 돌로 쳐 죽였는가? 무엇이 그토록 그에게 분노의 마음을 부추겼던 것인가? 그가 드린 곡식제사과 아벨이 드렸던 동물의 희생제사와 그 분노는 무슨 관련이 있는 것은 혹 아닐까? 우리는 창세기의 기록으로서 그때 가인의 마음과 생각을 전부 다 읽을 수는 없다. 하지만 감사하게도 우리는 그가 드린 제사와 그가 동생을 죽인 이유를 신약성경에서 조금 더 살펴볼 수 있다(히11:4, 요일3:12). 고로, 우리는 신구약의 66권의 성경이 성령의 감동으로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정말 실감한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우리가 깨달을 수 있도록 성경 어딘가에 그 이유를 기록해 두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가인와 아벨이 제사를 드린 직후, 가인이 왜 아벨을 쳐죽였는지를 그 이유를 살펴봄으로서, 오늘날 우리도 가인처럼 어떻게 되면 살인자가 될 수 있는지를 알고 경각심을 가져야 할 뿐더러,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고 칭찬듣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함께 살펴보도록 한다.

 

2. 하나님께서는 왜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시고 아벨의 제사는 받으셨는가?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으로 쫓겨나와 에덴 동편에 거주했을 때에, 그들은 동침하여 두 명의 아들을 낳는다. 첫째의 이름은 가인(얻음)이었고, 둘째의 이름은 아벨(허무)이었다. 아담과 하와는 사실 맏아들 가인을 낳았을 때에 얼마나 기뻐했는지 안느가?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약속하셨던 "여자의 후손"(창3:15)을 주실 줄 알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은 아니었다. 그래서 둘째 아들의 이름을 "허무"라고 지은 것이다. 하지만 두 아들의 삶은 이름과는 정반대였다. 가인은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자기 마음대로 살았다. 자기의 만족을 위해 일했고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해가면서 살았다. 하지만 둘째 아벨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항상 하나님께서 무엇을 기뻐하실까를 생각하며 살았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날 둘이 함께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게 되었다. 가인은 농사를 하는 자이었기에 땅에 소산으로 제사를 드렸고(소제제사를 드린 것임), 아벨은 양을 치는 목자였기에, 양의 첫 새끼들과 그것들의 기름(좋은 것)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하나님께서는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시고, 아벨과 그의 제물을 받으신 것이다. 그것이 어떤 형태로 나타났는지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으니 정확히는 알 수 없다. 다만 둘은 그것을 분명히 알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가인이 곡식을 태워 하나님께 드렸을 때에 갑자기 바람이 불이 제물을 사르고 있는 불이 꺼졌을 가능성이 있고, 아벨이 양의 첫새끼들과 그것들의 기름을 드렸을 때에는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제물을 살랐을 수도 있다. 어찌되었든지 두 사람은 자기들의 제사를 하나님께서 받으시고 거부하셨는지를 말이다. 그때 아벨은 자기와 자기의 제물을 하나님께서 열납하셨다는 사실을 알았다. 하지만 가인은 자기와 자기의 제물을 하나님께서 열납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이때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지만,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않으신 것일까? 우선은 첫째로, 그들이각각 바친 제물둘(예물들)이 가르쳐준다. 히11:4에 보면, 아벨은 더 나은 제물을 드렸다고 나와 있다(히11:4). 그리고 하나님께서 드린 예물에 대해 증거하셨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렇다. 제물이 달랐던 것이다. 그렇다고 베뢰아(김기동목사)의 가르침처럼, 아벨은 메시야를 예표하는 양을 잡아바쳤으니까 하나님이 받으신 것이고, 가인은 곡식을 드렸으니 속죄의 피가 없었기에 그 예물을 안 받으셨다고 해석은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동물제물이든 식물제물이든지 다 받으시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제물은 우리에게 어떤 비밀을 알려주는가? 간단하다. 아벨이 드린 제물은 첫 새끼(맏배)였다. 즉 아벨은 자신이 생각하기에 가장 귀하고 거룩한 것을 하나님께 드리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가인은 그냥 땅의 소산물 이부를 가져다가 바쳤을 분이다. 아벨은 하나님께서 첫번째로 제물을 드리는데, 어떤 제물을 드리는 것이 가장 합당한지를 늘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자기의 생각에 가장 귀하고 거룩하고 깨끗하며, 순결하고 어린 양을 바치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드렸을 때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에 맞은 것이다. 그리고 둘째로, 하나님께서 무엇을 받으셨는가 하는 부분이 그것의 진실을 알려준다. 하나님께서는 아벨과 그의 제물을 받으셨지만 반대로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제물에만 관심을 가지신 분이 아니다. 제물은 신분과 부함의 여부에 따라 송아지를 바칠 수도 있었고, 양과 염소를 바칠 수도 있었으며, 비둘기새끼나 혹은 고운 밀가루도 바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제물만 받으신 것이 아니라 제물을 드리는 사람(헌제자) 자신도 하나님께서 받으셨는지 안 받으셨는가에서 판가름 난다.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제물만 받으신 거싱 아니라 아벨까지도 통째로 함께 받으셨다. 아벨의 마음을 보셨기 때문이다. 얼마나 아벨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는지를 보셨던 것이다. 그리고 제사를 드리기 전까지 얼마나 회개기도를 했는지를 보셨던 것이다. 하지만 가인은 달랐다. 건성으로 드렸던 것이다. 형식에 누가 나지 않게금만 생각하고 드렸던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아벨은 받으셨으나 가인은 받지 않으신 것이다.

 

3. 왜 가인은 안색이 변해야 했는가?

  왜 가인은 하나님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자신과 자신의 제물을 받지 않은 것에 대해 기분 나빠하고 분노하였을까? 자신이 진정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하였다면 가인은 아마도 그순간 "하나님께서는 왜 내가 드린 제사를 받지 않으셨을까?"하고 하나님 앞에 겸손히 엎드려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를 파악하고 하나님앞에 회개할 것은 회개하며 다음 번에는 하나님께서 기뻐받으시는 제사를 드리겠노라고 다짐하면 되었을 텐데 말이다.

  그러나 그의 분노의 감정은 그때만 있었던 것이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이미 그는 하나님과 틀어져 있었고 동생을 미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그가 하나님께 드린 제물과 모습을 통해서 우리는 그것을 감지할 수가 있다. 그는 제사를 드릴 때에 결코 정성을 기울이지 않았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를 드릴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 고민하고 준비하고 생각하는 흔적이 발견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벨은 달랐다. 그는 항상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았다. 그래서 그는 제사를 준비할 때에 각별했다. 어떻게 하면 자신이 드리는 제물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까를 생각하고 또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가 직접 선택한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직업을 통해서 자신이 드릴 수 있는 최상의 제물을 선택했으니 그것은 양의 첫새끼들이다. 그리고 그것들 중에서도 기름부분을 드렸다. 이것은 비로소 모세에게 율법이 주어지고 제사법이 주어질 때에 비로소 알려진 제사규정들인데, 어떻게 아벨이 그것을 알아냈을지 궁금하기도 하지만 아벨은 그렇게 했던 것이다.

  그리고 가인은 평소 때부터 아벨을 싫어한 것 같다. 그리고 시기질투하고 있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제사를 통해서 그의 마음이 폭발했는데, 그것은 동생을 죽이려고 했기 때문이다. 사람이 사람을 죽일 때에는 물론 우발적인 것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계획적이다. 제사 후에 그가 한 말은 무엇인가? "우리가 들고 가자"였다. 그는 계획적인 범행을 저질렀다. 그를 평소 때에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었다는 증거다. 그는 믿음으로 제사를 드리지 않은 것도 있었지만 동생을 미워하는 마음도 항상 갖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동생이 늘 하나님 중심으로 살았기 때문이었으리라 판단해본다. 그러나 가인은 늘 자기 중심적으로 살아왔으니 하나님 중심적으로 살고 있는 동생이 미웠던 것이다. 그렇다. 자기 중심적으로 자기를 만족을 위해 사는 자는 그 사람이 드리는 예배도 형식적이다. 그리고 마음과 정성이 들어가지 않는다. 영과 진리로 예배하지 않는다. 가인은 영을 사용하지 않고 혼을 사용하고 있었고, 하나님을 늘 마음에 두지 않았던 것이다.

  아마도 하나님께서는 가인에게 이 제사를 통해서 깨닫게 하실 의도도 있었던 것 같다. 그것은 왜 하나님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자신과 자신의 제물을 받지 않았는지 깊게 생각할 시간을 주시려고 했던 것 같다. 그래서 형제를 늘 미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얼마나 제사에도 심각한 영향을 미치는지를 알고 동생과 화해하기를 바라셨던 것 같다. 산상수훈을 보라. 형제와 화해할 일이 있으면 예물을 제단을 드리려다가도 먼저 화해하고 와서 예물을 드리라고 하지 않았던가!

 

4. 비교의식은 어떻게 없앨 수 있는가?

  문제는 비교의식이다. 가인은 늘 비교의식 가운데 살았던 것 같다. 그러나 인간을 삐뚫어지게 하고 분노의 마음을 갖게 하는 것은 사실 비교의식에서 나온다. 요일3:12에 보니, 그 배후에는 마귀가 있었던 것 같다. 그것을 부추긴 것이다. 가인은 늘 생각했다. 왜 아벨을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실까? 그때 그 뒤에서 마귀가 꾀인 것은 동생을 없애버리면 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동생이 하도 하나님께 잘 하니까 내가 하는 행동이 상대적으로 약하거나 부족하거나 못되게 보일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욱더 눈덩이처럼 커졌고 마침내 제사를 통해서 표출되고 만 것이다. 이처럼 비교의식은 나를 불행하게 만드는 초석이 되고 만다. 비교의식은 사탄이 심어주는 것이다. 비교의식은 나를 더 나쁘게 만들고 불행하다고 느끼게 하는 것이므로, 이것을 마음에 두면 안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면 비교의식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인가? 성경에 보니, 몇 가지 해답들이 보인다. 그것의 핵심은 하나님은 나를 가장 나답게 지으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나를 다른 사람답게 지은 것이 아니라, 나를 꼭 나답게 지은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나와같은 사람은 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을 그 사람답게 지으신 것이다. 그것은 부모의 달란트와 기질 그리고 심지어 부모의 영으로부터도 분리되어 유전되는데, 거기에다가 자신의 일생을 통해 나다움을 점점 더 명확해지고 보태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모의 형질 중에서 나납게 태어난 유일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잠언기자는 이렇게 말했다.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쓰임에 적당하게 지었나니(잠16:4)" 그렇다. 우리는 우리가 쓰임받기에 합당한 구석이 있는 자로 지음을 받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영광을 위해 사람 각자를 창조하셨다(사43:7)고 말씀하고 있으며, 그것은 하나님의 눈에 가장 보배롭고 존귀한 자로 지으셨다는 것을 의미한다(사43:4). 그렇다. 하나님께서는 사람 각자를 각각 따로따로 지으신 것이다. 그것은 부모의 유산과 더불어 하나님의 솜씨가 함께 들어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에 나같은 자는 나만 있으니, 나만이 하나님께 영광돌릴 수 있는 부분을 가지고 태어났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신약에 들어와서 보니,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당신의 목숨을 내놓으셨음을 알게 된다. 우리의 목숨은 예수님과 맞바꿀만큼 귀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얼마짜리인지 아는가? 예수님짜리다.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당신의 목숨을 내놓으셨기 때문이다. 주님은 결코 천사를 위해 당신의 목숨을 내놓으신 것이 아니다. 주님은 결코 다른 동물을 위해 당신의 목숨을 내놓으신 것이 아니다. 그분은 우리 사람을 위해 당신의 목숨을 내놓으셨고 그 목숨을 우리을 사신 것이다. 그리고 천국에 들어가보라. 천국의 주인공은 천사도 동물도 식물도 아니다. 천국의 주인공은 거듭나서 천국에 들어간 우리 믿는 성도들이다. 우리 사람들은 천국에서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을 가지고 그 나라를 상속받는 상속자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이 자기보다 더 많이 배웠고, 더 많이 가졌고, 더 잘났다고 생각하고는 자기를 비하하며, 자기를 못마땅하게 여기기도 한다. 그러면 일평생이 불행하다. 그러면 일평생 짜증만 나고 불평불만만 하게 된다. 그러한 인생을 하나님을 결코 기뻐하지 아니하신다. 나는 이 세상에 나밖에 없는 가장 존귀한 자로서 하나님이 나를 지으셨고, 하나님께서 나를 구속하시려고 당신의 목숨을 맞바꿀 만큼 나를 귀하게 보시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이 나보다 더 좋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 그것을 그대로 인정하라. 그 사람은 그것으로 하나님께 영광돌리도록 지으셨구나 하고 생각하면 된다. 나는 내가 가진 것 곧 나밖에 없는 것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도록 지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찾아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발전시켜야 한다. 그리고 그것으로 하나님께 영광돌리면 된다. 그것은 나밖에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많은 배운 것, 자랑할 것 없다. 지식이 많은 자가 주님을 모르고 자기 지식 자랑하다가 더 지옥갈 수 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배웠기에 그렇게 하나님께서 쓰임받는 존귀한 사도였지만 교만하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사탄의 가시 곧 귀신을 그 몸 속에 집어넣어놓아서 일평생을 귀신과 함께 살아야 했다. 많은 가진 거, 자랑할 것 없다. 왜냐하면 많이 가지면 부자가 천국 들어가기가 더 어렵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이다(마19:23~24). 많은 받은 자에게 주님은 더 많이 찾겠아고 하셨다(눅12:48). 많이 배우고, 많이 가졌으면 더 고생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에게 주어진 분량이 적다고 불평해하지 말라. 내가 가진 것에 최선을 다하면 된다.

 

 

5. 나오며

  그러므로 그때 가인은 이렇게 했어야 했다. "오, 하나님! 이번에는 보리가 이렇게 탐스럽게 열렸습니다.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올 해는 제가 이것을 하나님께 올려드리겠나이다. 그리고 주여, 올 해는 사과가 참 예쁘게 잘 컸습니다. 가장 잘 생기고 탐스러운 것을 주님께 올리겠습니다."하고서 제사드렸으면 아마도 하나님께서 그 제물을 기쁘게 받으셨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아벨만 탓했다. 자신에게 주어진 것이 무엇인지를 살피고, 그것 중에서 최상의 것을 드리면서 하나님께 감사했더라면 그도 또한 하나님께 칭찬받을 수 있었을 텐데, 그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는 비교의식 가운데 파묻혀 살았던 것이다. 그러자 마귀가 그를 치고 들어와서 더욱 더 나쁜 비교의식 가운데 빠뜨렸다(요일3:12), 그는 결국 분노의 감정을 제어하지 못했고 결국에는 동생을 들로 불러내어 그를 돌로 쳐죽이고 만 것이다. 그뒤로 그는 회개했다는 말이 성경에 나오지 않는다. 그의 최후는 그래서 더욱 더 불행했을 것이라고 짐작해본다. 한 때는 주님의 제자였으나 결굴 불행을 자초한 가룟유다가 생각이 난다.

 

2019년 8월 16일(금)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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