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경 이사야 41:8과 신약성경 야고보서 2:23의 말씀을 읽어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자신의 벗(친구)라고 하셨다는 대목이 나온다. 그렇다면 대체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친구가 된다는 말인가? 그리고 하나님의 친구가 된 자에게 주어지는 축복은 또한 대체 무엇인가? 상상할 수 없는 축복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부스러기의 축복만을 기대한 채 오늘도 헤매고 있지는 아니한가? 이제 가슴을 한 껏 펴고 주님이 주실 진정한 축복을 바라보자.
1. 들어가며
아브라함은 오늘날 우리 믿는 이들에게는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린다. 하지만 그가 믿음의 조상이 되기까지는 여러가지 어려운 시련과 역경 그리고 실수를 겪으며 성장했던 것 또한 사실이다. 한 번 믿었던 것으로 모든 것이 끝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의 삶에게 있어서 가장 큰 대전환점이 있었으니 그것은 그의 나이 99세 때에 있었던 하나님의 육신적인 방문이었다. 그때 그는 비로소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기 시작했고 회개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당신만이 알고 있는 비밀들을 아브라함에게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가장 크고도 중요한 비밀공개는 모리아산 사건에서 있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모리아 땅의 한 산에서 일어난 사건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장차 당신이 온 인류가 복을 받게 하기 위해 무엇을 계획하고 있으셨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때에 당신의 벗으로 여기셨던 아브라함에게 당신의 비밀계획을 다 가르쳐주셨기 때문이다.
2.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자기의 독자 이삭을 어디에서 바치라고 하셨나요?
여러 고비를 거친 후에 드디어 아브라함은 자신의 나이가 100세가 되었을 때에 약속의 자손을 비로소 얻게 된다. 그가 바로 "이삭"이다. 이러한 이삭은 부모님의 양육 가운데 잘 자라갔다. 그런데 그의 나이 37세 이전의 어느날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시험('테스트'로서의 시험)하시기 위해 그에게 말했다. 그것은 그의 사랑하는 아들 독자 이삭을 모리아 땅으로 데려간후 하나님께서 말하는 한 산을 찾아가 거기서 그를 번제물로 바치라는 것이었다(창22:1~2). 그렇다면 그 장소는 대체 어디인가? 오늘날까지 수많은 믿는 이들은 아브라함이 그의 독자 이삭을 바친 장소를 "모리아산"이라고 알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좀 더 공부한 사람은 그 장소에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 성전을 지었다는 것까지 말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 말은 맞는 말일 수도 있겠지만 정확히 표현한다면 틀린 말이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이 그의 독자 이삭을 번제물로 바친 장소는 성전산이 아니라 골고다 언덕이었기 때문이다. 그 증거들은 이렇다. 첫째, 하나님께서 아브라함더러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라고 했던 장소는 "모리아 땅에 있는 하나님께서 지시한 한 산"이었기 때문이다(창22:2). 그러니까 모리아 땅 안에 여러 산들이 있을 수 있는데, 그중에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어떤 산이 바로 그 산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 우리는 모리아 땅에 2개의 산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나는 지금 우리가 '성전산'이라고 불리고 있는 "모리아산"이고(해발 741m) 또 하나는 지금 우리가 '골고다언덕'이라고 불리고 있는 '해골산'이다(해발 777m).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때 모리아산 곧 지금의 성전산에서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지 않고, 지금의 골고다언덕이라고 불리는 곳에서 이삭을 번제로 바치려고 했던 것이다.
참고로, 솔로몬이 아버지의 유언을 따라 성전을 지은 곳은 "모리아산"(해발 741m)으로서 지금의 '성전산'이라고 일컫는 곳이다. 이곳은 원래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나타난 장소로서, 여부스 사람 오르난(아라우나)의 타작마당에 다윗이 정한 곳이었다(대하3:1). 그렇지만 콘스탄틴가 기독교로 개종한 이후 그의 어머니의 요청에 따라 예루살렘의 성지를 방문하게 되는데, 그때 그녀는 예수께서 돌아가신 장소에 교회를 짓게 된다. 그곳이 바로 "성묘교회"라는 곳이다. 고로 오늘날 성지순례를 가서 가이드의 안내를 따라 예수께서 못박혀 죽으신 장소를 찾아간다면 대부분 그곳은 골고다언덕이 아닐 것이다. 그곳은 예루살렘 서쪽 벽 바깥 좀 떨어진 곳에 위치한 지금의 '성묘교회'로 안내하기 때문이다. 그럼, 왜 그 장소가 예수께서 못박혀 돌아가신 장소가 되어버린 것인가? 그것은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헬레나(콘스탄틴 대제의 모친) 때문이었다. 그때부터 약 1,500년간 아무 의심없이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1882년에 영국의 찰슨 고든 제독이 요한복음의 말씀에 따라 그 장소가 잘못되었다는 것이 알려지게 되었다. 예수께서 죽으신 장소는 "해골"이라고 불리는 장소로 성경에 나온다는 것이요, 레위기에 의하면 성전에서 제물을 잡을 때에는 북쪽에서 잡는다고 나와있다는 것이다. 결국 고든 제독은 루살렘 북서쪽에 위치한 "골고다(해골)"를 찾아낸다. 그래서 지금 영국성공회에서는 예수님처형장소를 "골고다"라고 공식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카톨릭과 개신교에서는 그곳을 '성묘교회'의 그 자리라고 보고 있다. 그러나 실제 그 장소는 찰스 고든이 발견한 '골고다언덕'이 맞는 것 같다. 왜냐하면 그 언덕의 땅 속에서 미국의 고고학자 론 와이어트가 법궤를 발견했는데, 그 법궤 위에는 그날 지진으로 인하여 십자가에서 흘린 피가 떨어져 있었고, 굳어있는 그 피를 혈액연구소에 의뢰하여 확인해본 결과, 사람의 한 쪽의 유전자만 들어 있는 특별한 혈액이었기 때문이다. 고로 우리는 "골고다"를 예수님의 처형장소로 본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그날 성전산으로 간 것이 아니라 골고다로 간 것이다. 그것도 이삭이 번제에 쓸 나무들을 지고서 약 800m를 올라간 것이다.
3. '모리아'와 '여호와이레'는 같은 말인가 다른 말인가?
성경의 기록은 명확하다. 하나도 틀림이 없다. 우리가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기 때문에 잘못 알게 된 것 뿐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힌 장소나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장소에 대한 정보도 그렇다. 왜냐하면 창세기 22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이삭 대신 숫양을 번제물로 바쳤던 장소는 "모리아 땅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지시한 어떠한 한 산"이라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이 때문이다(창22:2). 그리고 그 장소를 아브라함은 '여호와이레'라고 고쳐 불렀다. 그러니 모리아 땅에 있는 골고다언덕과 여호와이레는 같은 장소를 일컫는 다른 말인 것이다.
그러면, 이제는 이 장소가 어원적으로도 어떠헥 같은지 살펴보도록 하자. 먼저 '모리아'란 지명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이 단어는 "모리+야[흐]"라는 두 단어가 합쳐진 말로서, "모리(라아)"에다가 "야[흐]가 합쳐진 말이다. "라아"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보다(1차적인 의미)" 혹은 "마련하다(2차적인 의미)"라는 뜻의 동사이며, "야[흐]"는 "여호와"의 줄임말이다. 고로 "모리야[흐]"라는 단어는 "여호와께서 [번제에 쓸 어린 양을] [장차] 보여줄(혹은 마련하실) 것이다"는 뜻이다.
그리고 "여호와이레"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여호와 + 이르에"가 합쳐진 말이다. 여기서 '여호와'는 신명사문자로 하나님의 이름을 가리키며, '이르에'는 히브리어 동사 '라아'(보다, 마련하다)라는 동사가 어근이다. 고로, "여호와이레"라는 어구의 뜻도 동일하게 "하나님께 [번제에 쓸 어린양을] [장차] 보여줄(혹은 마련하실) 것이다"는 뜻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로, "모리야[흐]'와 '여호와 이르에"는 동일한 지명에 대한 다른 말인 것이다.
4. 하나님께서는 그 장소에서 장차 누구(무엇)를 보여주신다고 했는가?
하나님께서 그때 아브라함에게 모리아의 한 산에서 대체 무엇을 보여주신다고 말씀하셨을까? 그것은 "희생제사에 사용할 어린양"을 보여주신다고 한 것이다(창22:8).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렇게 계시해주었기 때문이다. 히브리어 원문으로 창22:8의 말씀을 읽어보면 이렇다. 이제 번제에 사용할 나무짐을 올라가는 이삭이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묻는다. "아버지, 번제에 쓸 나무 그리고 불과 칼은 있는데, 번제할 어린양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러자 아브라함은 이렇게 말했다.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양은 하나님 그가 자기자신으로부터 [장차] 보여줄)(나타낼, 마련하실) 것이다"(창22:8). 그럼 그때 하나님께서 그 장소에서 무엇을 보여주신다는 말인가? 그것은 1차적으로는 "제사에 쓸 제물"로서 곧 수풀에 걸려있는 "어린양"을 지칭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2차적으로 장차 아들로 오실 것이지만 실제로 하나님께서 친히 육신을 입고오실 자신을 가리킨다. 왜냐하면 "여호와이레"가 무엇인지를 설명해주고 있는 말씀 곧 창22:14의 말씀이 그렇게 증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창22:14에 나오는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는 말씀을 한글성경만으로 보면 그런 것이 잘 모를 것이다. 정확하게 번역해놓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중간태 재귀형으로 해석해야 할 문장을, 영어성경이나 한글성경은 다 수동태로 번역해놓고 있기 때문이요, 주어가 '하나님'인 문장인데, 주어를 생략하든지 아니면 "그것(it)"으로 번역해놓고 있기 때문이다. 약 20여종의 한글성경은 대체로 "라아"에 대하여 1차적인 의미와 2차적인 의미로서 번역하고 있지만, 여전히 수동태문장으로 번역하고 있으며, 주어를 생략하고 있든지 영어성경처럼 "그것"으로 번역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 개역성경은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라고 번역하였다(창22:14). 그리고 권위역은 "주의 산에서 주께서 그것을 보실 것이다"라고 번역하고 있다. 한편 새번역에서는 a와 b견해를 다 각주로 달아놓았다. 본문에는 "주님의 산에서 준비될 것이다"라고 되어 있지만 각주에는 "주님께서 산에서 친히 보이신다"라고 해놓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히브리어본문은 어떻게 되어있을까? 그것은 b의 견해다. 창22:14의 말씀 전체를 직역해보자. "아브라함이 그 장소의 이름을 '여호와 이르에'라고 하였으므로, 그것은 말한다. 그 산에서 여호와께서 자기자신을 [장차] 보여줄(혹은 마련하실) 것이다 라고" 그렇다. 하나님께서 99세 때에 아브라함에게 나타나 장차 아들로 오시겠다(창18:10,14)고 약속하신 하나님께서, 이제 앞으로 골고다언덕에게 자기자신을 보여줄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아들로서 오셔서 그날 나무 위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이야말로 한 분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으신 존재라고 믿는 것이다.
5. 아브라함은 어떻게 해서 하나님의 벗이 되었는가?
예수께서는 마22:32에서 하나님을 이렇게 소개하셨다. 그분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로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는 항상 살아계시는 분이라는 뜻이기도 하지만,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으로 계시하셨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삶이야말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사역을 소개해주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니 아브라함이 모리아의 한 산에서 이삭을 번제로 바쳤던 사건은 곧 아버지가 아들을 속죄제물로 바쳤던 사건과 동일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때이후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더이상 아브라함을 시험하지 않고 복만 주신다. 이제는 됐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날 여호와의 천사가 하나님을 대신하여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네가 네 아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창22:12)" 그랬다. 인간 최초로 자기자식을 희생제물로 바치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알았던 자가 바로 아브라함이었던 것이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이때부터 아브라함을 자신의 벗이라고 칭하신다(사41:8, 약2:23). 하나님의 마음을 온전히 깨달은 자로서 하나님은 그를 자신의 친구로 생각하게 되신 것이다. 하나님의 과분한 은혜가 그때부터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6. 지금으로부터 2천년전 아들로 이 땅에 오신 하나님께서는 누구를 자신의 벗이라고 하셨는가?
그런데 이러한 일은 성자인 예수님에게서도 동일하게 일어난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도 하나님의 뜻을 자신의 제자들에게 다 계시해준 후에는 그들을 더이상 '종'이라고 하지 않고 '친구'라고 하시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요15:15).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요15:15)" 그랬다. 예수께서 돌아가시기 하루 전날 밤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아버지의 모든 계획들을 다 일러주셨다.
그럼 그때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무엇을 들려주신 것인가? 그 말씀의 핵심만을 요약한 것이 바로 요한복음 13~16장의 말씀이다. 그 내용은 다음시간에 더 자세히 소개하겠지만 간단히 정리하면 이렇다. 첫째로, 예수님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을 향하여 가는 존재라는 것이다(요13:3, 16:27~28). 둘째, 예수님은 "스스로 있는 자"라는 것이다(요13:19). 셋째, 예수님만이 아버지께로 가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것이다(요14:6). 넷째, 예수님은 곧 한 분 하나님으로서 아버지의 다른 표현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보았으면 아버지를 본 것이라고 했다(요14:9~10). 그러니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은 스스로 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예수 안에서 그분의 일을 행하고 있다고 하셨다. 다섯째, 예수께서 떠나가시지만 곧이어 또다른 보혜사 성령으로 다시 오실 것이라는 것이다(요14:18~19). 그러면 보혜사 성령께서는 믿는 이들 속에 거주하시게 될 것이며, 그분은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주시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했던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실 것이며(요14:26), 그분은 오셔서 예수님이 누군지를 증언해주실 것이라고 했다(요15:26). 그리고 그분은 진리의 영으로서 오직 진리만을 말씀하실 것이며, 또한 그분도 역시 예수님처럼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었던 만큼만 말씀하실 것이며, 장래의 일도 알려주실 것이고, 그분은 예수님의 영광을 나타내실 것이라고 했다(요16:13).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친구가 되는 자들이 받게 될 축복은 무엇인가? 그것은 시간관계상 다음 시간에 다루고자 한다. 그 중에 하나만 먼저 말씀드리자면 예수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해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는 것이다(요15:16, 16:23~24). 입이 딱 벌어지는 너무나 큰 말씀이다. 그날 그렇게 큰 축복을 예수께서는 친구가 된 제자들에게 약속하셨다.
6. 나오며
과연 오늘날 요한복음 13~16장까지 예수께서 말씀하신 바를 온전히 이해하고 있는 성도가 얼마나 될까? 아니 요한복음 13~16장의 말씀보다도, 이미 창세기 18과 19장 그리고 22장에서 말씀하셨더 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알고 있는 성도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지금까지 성도들은 여전히 하나님께서 이미 밖으로 나와 활동하고 있던 성자를 이 땅에 속죄제물로 보내셨다고만 알고 있지 아니한가? 아버지가 아들을 보내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아들로 오셨다는 것을 아는 성도가 얼마나 되는가? 사도행전을 보면, 사도바울은 에베소 장소들에게 고별설교를 한다. 그런데 그때에 사도바울도 이렇게 말한다.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여러분에게 전하였음이라.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조심하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고 했다(행20:27~28). 그렇다. 그날 골고다에서 흘리신 예수님의 피가 곧 하나님의 피였던 것이다. 창세기 22:2,14,18의 말씀이 예수님에게서 그대로 성취되었던 것이다. "오 주님, 이 은혜 어찌 다 갚을 수있나이까? 나를 위해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 죄인과 같은 사람으로 오시어 돌아가셨다니요. 그리고 우리를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고 또 도와주기 위해 돕는 자인 성령께서 보내주시다니요." 우리는 지금도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일하고 계시는 한 분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살고 있는 자들이다. 하나님께서 친구로서 우리를 대우해주시고 있는 것이다.
2021년 05월 21일(금)
정병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