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직계조상들 중 누가 과연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을까? 마태복음 기자는 두 사람을 천거하고 있는데 한 사람은 아브라함이고, 한 사람은 다윗이다(마1:1). 한편 예수님의 조상들 중에 여자의 이름들도 언급되고 있는데, 그들은 가나안여인이었던 다말과 기생라합과 모압여인 룻과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와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였다. 그리고 예수님의 조상들 가운데 그들의 이야기가 좀 더 소상히 언급된 인물들은 과연 누구였을까? 그들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그리고 유다와 베레스 그리고 다윗과 솔로몬 등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수없는 조상들 가운데 왜 이들만이 예수님의 조상들의 족보에 언급된 것일까? 이들의 공통적인 특징들과 중요한 특징들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첫째, 이들의 공통적인 특징을 살펴보면 이들은 거의가 다 장자(첫째아들)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사실 모든 족보는 장자로 내려가는 것이 정상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성경에 그 이야기들이 언급된 조상들은 대부분 장자가 아니었다. 아브라함은 셋째아들이었고, 이삭과 야곱은 둘째아들이었으며, 유다와 베레스는 넷째아들이었고, 다윗은 여덟째 혹은 일곱째 아들이었고(삼상16:6~11, 대상2:15), 솔로몬은 열째아들이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의 조상들의 족보에 오른 사람들이 대부분이 장자가 아니었고 차자 내지는 그 이상이었던 것이다.
둘째, 그렇다면 예수님의 조상에 오른 이들과 5명의 여인들의 특징들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첫번째는 그들은 행함으로 자신의 믿음을 인정받은 인물들이었다. 특히 여기에는 아브라함과 이삭이 있으며, 기생라합과 모압여인 룻이 여기에 속한다. 이들 중 기생라합과 룻은 조금 있다가 좀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고, 우선 아브라함과 이삭을 살펴보도록 하자.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었을 뿐만 아니라 행함으로 자신의 믿음을 인정받은 인물이었다(약2:21). 자기의 독자 이삭을 모리아산 제단에 드림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믿음을 인정받았기 때문이다(창22:12). 뿐만 아니라 이삭도 자기자신을 제단에 드림으로 행함으로 믿음을 인정받은 인물이었다(창22:7~10).
두번째는 그들은 하나님의 뜻이 자기를 통해 성취되기를 간절히 열망했다는 것이다. 특히 야곱과 다말과 밧세바와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가 그렇다. 이들 중 야곱은 형 에서의 쌍둥이 동생으로 태어났다. 하지만 그는 차자로 태어난 것을 운명으로 여기지 않았다. 어찌하든지 형이 가지고 있는 장자권을 자기의 것이 되게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먼저는 팥죽으로 형의 장자권을 샀으며(창25:27~34), 어머니와 짜고 장자의 축복까지 받았다(창27:5~29). 반면에 그의 형 에서는 장자권을 경홀히 여김으로(창25:34), 장자권 및 장자의 축복이 그의 동생 야곱에게로 넘어가고 말았다(히12:16~17). 또한 유다의 첫째 며느리였던 다말은 어떠했는가? 그녀는 시아버지의 주선으로 유대의 장자 엘의 며느리가 되었다. 하지만 장자 엘이 죽자 형사취수법에 따라 차자인 오난에게 들어갔다. 그러나 오난은 그녀에게 씨를 주지 않았다. 그러자 오난은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죽고 말았다. 하지만 셋째인 셀라는 어려서 아직 장가갈 나이가 아니었다. 시아버지 유다는 며느리 다말에게 셀라가 장성할 때까지 친정에 가서 기다리라고 하였다. 하지만 셀라가 장성했음에도 시아버지 유다는 다말을 집으로 불러들이지 아니했다. 그런데 어느날 시아버지가 양털깎는 일로 자신의 친정 쪽에 온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다말은 창녀로 변장을 하고 시아버지를 꾀여 동침을 하였다. 그리하여 임신을 하게 되었다. 그러자 며느리의 임신소식을 전해들은 유다는 며느리를 죽이려고 하였다. 그러자 그때 증표로 받아놓은 것들을 내 보이면서 자신은 그 증표들의 소유자로부터 임신하였다고 말했는데, 그 사람은 다름 아닌 자기 시아버지였다. 결국 시아버지는 다말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그녀는 나보다 의롭도다(창38:26)" 그리하여 다말이 아이를 낳았는데, 쌍둥이였다. 그런데 먼저 나온 자는 나중에 나오려던 자였다. 먼저 나온 아이의 이름은 베레스였다. 그렇다. 다말은 어떤 사람이었는가? 시아버지를 꾀인 창녀였는가? 아니면 유다집안의 씨를 이어받으려고 애쓴 인물이었는가? 그런데 예수님의 조상의 족보는 유다에서 셀라로 이어진 것이 아니라, 유다에서 다말을 통해 태어난 베레스로 이어지고 있다(대상2:4, 마1:3). 이것은 자신의 태를 통해 여자의 후손 곧 메시야를 낳고자 열망했던 사람을 통해서 결국 메시야의 조상이 결정되었음을 말해준다. 하나님께서는 창녀로 분장을 하기는 했지만, 메시야를 기다린 여인을 메시야의 조상으로 선택하신 것이다. 또한 다윗의 아내되었던 밧세바를 보라. 그녀에게 있어서 오직 한 가지 소원은 오직 그녀의 아들인 솔로몬이 왕위를 이어받으는 것이었다(왕상2:15~31). 그런데 그의 아들 솔로몬은 다윗의 10번째 아들이었다. 하지만 다윗은 오직 밧세바의 간절한 열망에 따라 보위를 그녀가 낳은 둘째아들 솔로몬에게 물려주었다. 왕위가 간절히 열망하는 사람을 통해 이어진 것이다.
세번째는 이들은 수고와 희생 심지어는 죽을 각오를 했던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 중에는 살몬의 아내 기생라합과 보아스의 아내 룻이 있으며, 예수님의 부친 요셉과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가 있다. 이들 중 기생라합은 가나안땅의 여리고성의 여인이었다. 그의 직업이 기생이었는지, 여관집주인이었는지, 가나안의 신전지기였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있는 위치에서 모든 정보를 파악하였다. 그리고는 누가 참 신인지를 가늠하였다. 그럴 때 그녀는 홍해물을 말리고 요단저쪽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아모리왕 시혼과 바산왕 옥을 전멸시킨 여호와께서 상천하지에 유일한 하나님인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자 그녀는 목숨을 내 건 일을 실천하였다. 그것은 정탐꾼으로 뻔히 보이는 두 인물을 자기집에 들여서 그들을 숨겨준 것이었다(수2:6). 하지만 그러한 사실은 금방 발각되었고 그녀의 집이 수색되어졌다. 하지만 그녀는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서 정탐꾼들을 그녀의 집의 옥상의 삼대에 숨겨둠으로써 희생을 자처했다. 결국 그녀는 그 정탐꾼의 하나였던 살몬과 결혼하게 되었고 그리하여 그로부터 보아스를 낳았다. 가나안여인으로서 유다지파의 후손인 살몬과 결혼을 하게 된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행하는 일이 엄청나게 위험부담을 가진 것이었지만 믿음으로 정탐꾼들을 평안히 영접하여 숨겨주었던 것이다(히11:31). 그리하여 그녀는 행함이 있는 믿음을 가진 여인라 칭함을 받았다(약2:25). 그리고 모압여인 룻을 아는가? 그녀는 모압여인으로서 예수님의 조상이 된 인물인데, 당시 모압사람은 10대까지 여호와의 총회 들어올 수 없다고 율법에 규정되어 있었다(신23:3). 그만큼 그들의 조상이 부정했기 때문이리라. 그런데 그녀가 어느날 기근을 피해 자기 땅으로 이사온 엘리멜렉과 나오미의 며느리가 되었다. 그녀는 나오미의 맏며느리가 된 것이다. 하지만 얼마 안 가서 시아버지가 죽고 남편과 시동생도 죽고 말았다. 그리하여 하루 아침에 과부만 셋이 남게 되었다(룻1:1~5). 어느날 시어머니 나오미가 고향에 돌아가겠다고 하면서 두 며느리인 룻과 오르바더러 모압땅에 남아 자기민족의 남자에게 재가하라고 하였다. 하지만 룻만큼은 어찌 시어머니를 떠나지 않겠다면서 끝까지 시어머니를 따라와 시어머니의 고향인 유대땅 베들레헴에 정착하게 된다. 그런데 사실은 그녀가 모압 땅에 있을 때 시어머니로부터 여호와 하나님을 알았기 때문이다(룻1:16~17). 자기들이 섬기던 모압땅의 그모스신은 참 신이 아닌 것을 알았던 것이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의 땅으로 알려진 베들레헴에 정착하였다. 결국 룻은 거기서 시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이삭줍기를 하다가, 기업무를 자인 보아스를 만나 결혼하게 되었으니, 결국 룻은 라합의 며느리가 된 것이다. 그리하여 보아스로부터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바로 오벳이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가 다윗왕을 낳았으니 룻은 다윗왕의 증조할머니가 되었으며(룻4:17~22), 이 가문에서 메시야가 탄생했으니 이방여인으로서 예수님의 조상이 된 특별케이스가 바로 룻이었던 것이다(마1:5). 그러므로 이 여인도 행함있는 믿음을 보인 여인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선택이 얼마나 큰 어려움과 고비를 가져올 것인지를 알면서도 부모공경과 하나님섬김을 자처함으로 유대인의 며느리가 되어 예수님의 조상이 된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예수님의 부친이 된 요셉도 약혼녀인 마리아의 임신사실에 대해 모든 책임을 다 자신이 감당하려 했던 인물이었고, 모친이 된 마리아도 죽으면 죽으리르라는 각오로 자신의 태를 통해 하나님의 아들이 잉태될 수 있도록 허락했던 인물이었다.
네번째는 이들은 하나님을 매우 사랑했거나 여호와 하나님만을 신뢰하고 따르기로 결정한 사람들이다. 기생라합과 룻이 그랬고 다윗왕이 그랬다. 특히이들 중 다윗왕은 매우 하나님을 사랑한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의 형들이 장차 왕이 될 자를 간택하는 자리에 참여하지도 못했지만 그것을 못마땅하게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아버지께서 자신에게 맡겨준 일에 최선을 다했고, 광야를 예배처소로 삼아 하나님께 기도하고 찬양을 드렸다. 그랬더니, 사울왕을 폐하시기로 결정하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마음에 합한 인물을 찾고 있었는데, 다윗이 발탁된 것이다. 그것은 8년이 지난 후에 일어났다. 하지만 다윗도 실수가 있었다. 아니 악한 행위를 저질렀다. 간음죄와 살인교사를 저질렀기 때문이다(삼하11:2~21). 하지만 그러한 다윗의 행악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눈물로 회개했던 다윗의 앞길을 가로막지는 못했다. 워낙 하나님을 사랑했고 자신의 존재목적이 하나님께 있음을 늘 시인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까지 살펴본 사실들을 다시 한 번 조심스럽게 들여다보자.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예수님의 조상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들이 전부 어떤 댓가를 지불해서 그 자리에 들어간 것이지 결코 거져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 거져였다면 아마 장자가 당연히 그집의 가문을 이어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들 대부분은 다 행함으로 믿음을 인정받은 인물들이며, 자신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하는 강렬한 열망을 가진 자들이다. 이는 마치 예수님 탄생 당시 시므온와 안나의 열망과 비슷한 경우다. 예수님 탄생 당시에 예루살렘 성전에는 중요한 두 사람이 있었다. 둘 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은 자기 생전에 메시야를 자기의 눈으로 꼭 보리라고 각오했던 인물들이었다. 그런데 안나는 과부가 된 지 84년동안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면서 금식하면서 주야로 메시야를 기다렸는데, 아니나 다를까 아기예수님을 낳고 40일이 지나서 율법에 따른 정결례를 행하고자 아기를 안고 마리아가 성전에 나타난 것이다. 안나는 그녀의 품으로부터 아기를 안고 메시야를 축복할 수 있었다(눅2:22~24,36~39). 또한 시므온도 비슷한 경우인데, 그가 아이를 안을 때 어떤 노래를 불렀는지 아는가? 이렇게 했다. "주재여, 이제는 당신이 말씀하신대로 당신의 종을 평안히 놓아주시는도다. 왜냐하면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기 때문이니, 이는 당신이 만민의 얼굴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인들에게 계시하는 빛이요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눅1:29~32)"이라고 했다. 그렇다. 주님의 뜻이 자기를 통해 이루어지기를 갈망하기를 주저하지 말라. 그리고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라. 또한 하나님을 자신의 인생의 최고의 목적으로 두라. 그리고 그 일을 하다가 죽으면 죽을 것이라고 다짐하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사용하시어 하늘나라의 계보책에 우리의 이름을 기록해 주실 것이다.
여러분은 이 지상에 교회를 위해 예수께서 마지막으로 주신 말씀이 무엇이었는지 혹시 기억하는가? 그것은 라오디게아교회에게 주신 말씀으로서, 그 말씀은 이렇다.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며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계3:19)" 그렇다.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우리도 인간인지라 실수할 수 있다. 그러므로 책망을 받고 징계를 받는 순간 빨리 알아차려야 한다. 그때에는 즉시 회개에 돌입해야 한다. 하지만 회개로 끝나서는 아니 된다. 뜨겁게 열심을 내어서 주의 일을 감당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계3:19). 주님을 섬기는 일에 열정을 가져야 한다. 왜냐하면 주님을 위해서 산 것만 하늘나라의 내 행위책에 빼곡히 기록될 것이니까.
그렇다. 믿음의 가문은 그냥 일으켜지는 것이 아니었다. 댓가를 지불해야 했다. 엄청난 고난과 희생과 죽음이라도 각오해야 했다. 또한 주님을 사랑하는 뜨겁게 사랑함이 있었다. 이러한 마음이 우리에게도 있다면 우리도 난관을 헤치고 나갈 수 있다. 열심을 품고 주님을 섬기라. 그러면 우리 자신의 이름을 하나님의 계보책에 올릴 수 있을 것이다. 장차 우리가 섬기는 교회명의의 행위책에 누가 이름을 올릴 수 있을 것인가? 죄만 짓고 회개만 하던 인물의 이름이 올라갈까? 아니면 잘못했던 것을 회개하면서도, 열심을 품고 주님의 뜻을 실천하며 살았던 사람들의 이름이 올라갈까? 예수님의 조상들의 숫자를 헤아려보면 총 62명인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들 중에서 특별히 기억되는 인물들이 여럿이 있었다. 이들의 공통적인 특징과 그 인물들의 특징을 간과하지 말라. 왜냐하면 그들의 행적이 오늘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건투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