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는 이 땅에 어떻게 오셨는가? 아들이라는 신분으로 오셨다. 그래서 그때에 하나님은 예수님에 의해 아버지라고 불리우셨다. 사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께서는 아버지라 불리우지 아니하셨다. 왜냐하면 아직 아들을 보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구약성경에도 가끔씩 하나님에 대해서 아버지라는 표현이 등장하기도 한다(사63:16,64:8, 말1:6). 하지만, 그분이 모든 만물의 창조주라는 측면에서 아버지인 것이지, 정말 낳은 아들 때문에 아버지라 불린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게 '아버지'라는 호칭이 사용된 것은 예수님에 의해서 처음이었다. 그 어느 누구도 감히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지 못했으며, 그분의 거룩한 이름조차 입으로 말하기 어려웠다. 왜냐하면 십계명 중 셋째계명에 따라, 하나님의 이름을 망녕되이 일컫는 자의 죄를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묻겠다고 하셨기 때문이다(출20:7).
그렇다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인가 사람의 아들인가? 아니면 그냥 아들이신가? 눅1:35에 의하면, 예수께서 처녀인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나실 때에 비로소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리울 것이라고 했다.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하나님)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칭함을 받으리라, 불리울 것이라)(눅1:35)"고 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칭할 때에는 그분을 단지 사람으로 태어나셨다는 측면에서만 칭하는 것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인성을 취하셨다는 측면에서도 불리는 명칭임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분의 신성과 인성을 같이 아울러 부르는 명칭인 것을 알 수 있다. 어떤 이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니까, 그것이 완전히 그분의 신성만을 가리키는 호칭정도로 생각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아니다. 어찌되었든 예수께서는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빌어 태어나심으로 비로소 아들이라고 칭함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을 뜻하는 말인 것을 우선 정리해 둘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이땅에 아들로 오신 하나님께서 인성을 취하실 때에, 그분은 우리 인간과 어떤 공통점이 있으셨고 어떤 차이점이 있었을까? 그분이 사람으로서 우리와 다른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우선 알 것은 그분은 우리 인간과 똑같은 인성을 취하셨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단 한 가지 차이점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그분은 죄된 본성이 없으시다는 것이다. 그분은 아담의 혈통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잉태되셨기 때문이다(눅1:35). 다시 말해 그분의 부성은 하나님이신 것이지 결코 요셉과 같은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그분을 죄를 알지도 못하신 분이라고 했었고(고후5:21), 히브리서 기자는 그분은 우리와 성정이 같으시지만 죄는 없으시다고 했었다(히4:15). 그렇다. 예수님은 대부분 우리 인간과 똑같으시다. 예를 들자면, 그분도 먹지 않으시면 배고프셨으며, 먹고 소화시켰으면 화장실을 가야 했다. 그리고 많은 일을 행하신 후에는 피곤하기에 쉬셔야 하셨으며, 여기 있으면 저기에 동시에 존재할 수 없었다. 그분은 비록 하나님의 신성을 소유하고 있었지만 인성의 측면에 있어서는 우리와 똑같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그분은 사람으로 이 세상에 오셨기에 사탄마귀도 그분을 시험하러 들었다는 사실이다. 예수께서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기에 사탄은 얼마든지 아담처럼 그분을 유혹하여 넘어뜨릴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기에 그분에게 세번씩이나 시험한 것이다. 그렇다.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기에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셨다(마4:1~11). 뿐만 아니라 그분은 사람이셨기에 하나님께 기도해야 했고, 고난을 겪어가면서 순종을 배우셔야 했다(히5:8). 그분도 육체로 계신 이상,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아버지께 올리셔야했다(히5:7). 그분이 드린 겟세마네동산의 간절한 기도를 보라(눅22:44). 또한 그분은 사람이었기에 어떤 면에서는 모르시는 것도 있으셨다. 다시 말해, 재림의 날짜에 관해 묻는 질문에 그분은 자신이 다시 오실 날은 아버지만 아신다고 하셨으며(마24:36), 아버지는 자기보다 크시다고 말씀하셨다(요14:28). 여기에서 예수께서 아버지가 자기보다 크시다고 하실 때에는 육신을 입고 오신 아들의 측면에서 말씀하신 것이지, 사실 신성의 측면에서 말씀하신 것은 아니다. 사실 예수님은 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이시기에 아버지와 동일하신 분이시다(요10:30). 그렇다. 예수님은 이 땅에 아들로서 오셨다. 그리고 아들로서 사역하실 때에 그분은 아들로서 지켜야 할 본분을 철저히 다 지키셨던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님의 육체로부터 그분의 인성을 분리해낼 수는 없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분은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셨기 때문이다(골2:9). 우리는 그분이 육체를 지니신 것을 보고 그 육체가 곧 인성이라고 말해서는 아니 된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신성이 육체로 거하셨기 때문에, 육체가 곧 인성이라고 말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요한복음 1장에서는 하나님이신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하심으로, 예수께서 취하신 육신이 인성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가 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왜 인성을 취하신 것일까? 다시 말해, 그분은 왜 아들로서 이 세상에 탄생하신 것인가? 그분이 인성을 취하신 것 곧 그분이 아들로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궁극적으로 딱 2가지 목적 때문이다. 하나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을 얻기 위함이요, 또 하나는 하나님의 반역하고 쫓겨난 가운데 인간들을 죄로 유혹하고 있는 마귀를 처단하시기 위함이다. 인간을 구원하시려면 인간의 죄값을 대신해야 하는데, 인간의 죄값은 사망이기에 그분이 죽으시려면 사람이 되셔야 했던 것이다.
또한 이러한 궁극적인 계획은 하나님께서 어느날 갑자기 세우신 것이 아니다. 이러한 계획은 이미 만세전에 하나님의 마음 속에 있었다. 다시 말해,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기도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아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들을 낳고 그들로 하여금 하늘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할 것이라는 뜻을 품고 계셨던 것이다. 엡1장을 보자.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1:3-5)" 하나님의 생각속에는 이미 만세전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아들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들을 얻으시고 그들의 분량에 따라 하늘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하시겠다는 마음을 갖고 계셨던 것이다(엡3:6). 그것도 유대인들 뿐만 아니라 모든 이방인들을 포함하여, 모든 사람들을 하나님의 자녀들이자 상속자들로 품고 계셨던 것이다(엡3:6, 롬8:17).
그렇다면, 그리스도이자 아들은 언제부터 존재한 것인가? 만세전부터 존재한 것인가 아니면 동정녀 마리아의 태를 통해서 태어날 때부터인가? 이것은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의 속성을 모른다면 사실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부분이다. 사실 예수님께서 아들로서 만세전부터 존재하셨는지에 대해서 알려면, 우리가 풀어야 할 수수께끼가 2가지가 있다. 그것은 다윗의 찬양 속에 등장하는 그리스도의 선재성(시110:1)과 예수님의 대제사장적 기도 속에 등장하는 아들의 선재성이 관한 부분이다. 오늘날에 여호와증인이나 삼위일체론자들은 이 구절들을 인용하여 예수께서 만세전에 아들로서 존재하고 있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과연 예수께서는 만세전에 아들이자 그리스도로서 선재하고 계셨던 것일까?
먼저, 다윗의 찬양 속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선재성에 관한 부분을 살펴보자.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시110:1)" 여기에 나오는 "내 주"란 그리스도를 가리킨다고, 훗날 예수께서 직접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셨다(마22:43~45). 그렇다면 실로 놀라운 찬양이 아닐 수 없다. 다윗은 예수께서 태어나기 천 년 전의 사람인데, 어찌 이 모습을 볼 수 있었다는 말인가? 사실 그리스도께서 만물이 창조하기도 전에 선재하셨다고 주장하는 성경구절은 이것뿐이다. 단 한 개의 성경구절이 이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요한복음 17장에 나오는 아들의 대제사장적인 기도를 살펴보자.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요17:5)" 여기에 보면, 아들이신 예수께서 이미 창세전에 아버지와 함께 계신 것같은 표현이 등장한다. 그래서 여호와증인이나 삼위일체론자들은 이 구절을 들이대면서, 예수께서는 이미 만물이 창조되기도 전에 그리스도 내지는 아들로 선재하셨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 수수께기를 풀려면, 오늘 전했던 말씀의 서두를 잠깐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 아버지가 되셨는가? 분명한 사실은 아들이 이 땅에 탄생할 때부터였다. 그 전까지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자 그의 이름이 여호와로서만 존재하셨다. 그 전까지 하나님은 아버지로 존재하신 것이 아니다. 아들이 있어야 아버지가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전재적인 내용과 다윗의 찬양 및 예수님의 기도를 보면서, 이 두 가지 사실을 어떻게 조화롭게 풀 수가 있을지를 생각해보자. 여기에 그 해답의 실마리가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전지전능성과 무소부재성이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그분은 무소부재하신 분이요 전지전능하신 분이시다. 사실 그분은 천지만물이 창조되기 전에는 그분 홀로 계셨다. 그분만이 자존이 가능하신 분이셨다. 그러나 그분이 천지만물을 창조하심으로인하여 그때부터 그분은 어떤 존재인지 그리고 그분이 만세전에 어떤 계획을 품으셨는지를 알 수 있게 되었다. 또한 하나님께서
창조사역을 감당하심으로 말미암아 시간과 공간이라는 것도 생겨났음을 알 수 있다. 만약 그분이 창조사역을 하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왜 하늘들과 지구를 지었고, 그 지구 안에는 사람을 지었으며, 사람 안에 영을 지었는지를 알 수가 없다(슥12:1). 그런데 이러한 창조의 이야기는 모두가 다 시간 속에서 펼쳐지게 된다. 그렇다고 무소부재하시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시간에 제한받는 분은 아니시다. 시간을 한 눈으로 찍어보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그분에게는 과거도 현재이며, 미래도 현재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만이 처음이요 마지막이며, 시작과 끝이며, 알파와 오메가이시기 때문이다(사41:4,44:6,48:12, 계1:17,21:6,22:13). 그분은 시간을 창조하시고 시간밖에 계시는 전능하신 분이기에 시간을 언제든지 되돌려볼 수도 있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시간밖에 거하시는 그분의 관점을 우리는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러한 관점에서 볼 때, 장차 인류구원을 위한 그리스도 혹은 아들이라는 존재는 이미 있었던 것이다. 아직 존재하지는 않았지만 하나님의 생각 속에는 이미 그리스도가 존재하고 있었고, 아들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아들이나 그리스도가 언제부터 존재했느냐는 질문에 대해 우리는 인간의 관점이 있다는 것과 하나님의 관점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인간의 관점에서 볼 때에, 아들은 지금으로부터 2천년전에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서 탄생하실 때에 존재하게 되었다. 하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아들은 이미 만세전에 하나님의 생각 속에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불러내신다. 또한 아직 존재하지 않아도 존재하는 것처럼 보여주실 수 있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이러한 관점에서 시편110:1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다윗은 예수님이 탄생하시기도 전에, 그리스도이자 아들이신 예수님을 볼 수 있었는지를 말이다. 그것은 시간을 한 눈으로 찍어보시는 하나님께서 미래에 일어날 일을 다윗에게 미리 보여주셨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생각속에는 이미 그리스도께서 지상의 사역을 마치고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계시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다윗이 본 것은 그리스도의 실제를 본 것이 아니라 미래의 일을 본 것이다. 이 일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전능하심에 기인한다. 그렇다. 하나님의 생각 속에는 이미 그리스도가 지상의 사역을 마치고 부활하시어 하나님의 우편(승리)에 계셨던 것이다. 그분의 생각 속에는 자신이 이 땅에 아들이라는 신분으로 오시어 피흘림의 속죄사역을 완성하신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측면에서 볼 때 아들이신 예수님은 동정녀마리아의 태에서 탄생하실 때에 비로소 존재하게 된다. 인성의 측면에서 볼 때 아들은 이처럼 시작이 있으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아들은 끝도 있을 것이다. 아직 한 가지 사역을 끝마치지 않았기 때문에 그때까지 아들은 아들로서 존재하실 것이다. 그 일은 바로 원수마귀를 처단하는 일이다. 하나님을 대적하였을 뿐만 아니라 인간을 죄짓도록 유혹했던 루시퍼와 그의 졸개들을 심판하셔야 아들로서 사역이 끝이난다. 그 날은 언제일까? 그것은 아들이 재림하시는 날이다.
이제 오늘 읽었던 말씀(고전15:22~28)을 살펴보자. 이 말씀은 예수님과 성도들의 부활 및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한 말씀이다. 이때 사도바울은 아들의 사역이 언제 끝마칠 것인지에 대해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다. 그것은그리스도께서 원수마귀를 멸하시고 모든 만물을 자기의 발아래에 두실 때에, 아들 자신도 만물을 복종케 하신 하나님께 복종하심으로써,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계실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 예수께서는 그리스도이자 아들로서 해야 할 2가지 사역이 두 가지가 있었던 것이다. 하나는 인간을 하나님의 자녀이자 상속자가 되게 하는 일이었고, 또 하나는 원수마귀와 그의 세력들을 멸하는 일이었다. 전자의 일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구속사역을 행하심으로 성취되었다. 그래서 그날 예수께서는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다(요19:30). 인류를 위한 구속사역을 완성하셨다고 선언하신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가 더 남아있다. 그 일은 예수께서 재림하신 직후에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한 가지 의문이 들 것이다. 왜 하나님께서는 원수마귀를 지금 당장 멸하지 아니하시고 그때까지 두시려 한다는 것인지 말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를 생산하는 데에 사탄마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원수마귀가 있어야 인간이 자유의지로서 마귀를 선택할 것인지 하나님을 선택할 것인지를 결정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이제 그 날이 머지 않았다. 그러므로 시간밖에 계시는 하나님, 시간의 시작이요 마침이신 그분께서 원수마귀를 지옥에 쳐넣으시고 새 하늘과 새 땅을 만드실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 하나님께서는 또 다시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실 것이다(계21:8) "(다)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계21:8)" 이때에, 또 다시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심은 원수마귀까지 다 처단하심으로 다 이루셨다는 말씀하신 것이다.그러면 아들이라는 신분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할렐루야.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여호와 외에 다른 신은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것이다. 그분만이 홀로 하나님이시며 온 천지만물을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창조사역의 핵심은 인간에게 있었다. 장차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하고 상속자가 되게 하려는 데에 창조의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마귀의 유혹 때문에 넘어지고 말았다. 하지만 또한 하나님의 생각 속에는 이미 하나님 자신이 아들로서 이 세상에 오시어 인간의 죄를 대속하고 죽으실 것도 들어 있었다. 그리고 인간구속을 위한 사역을 완성하시고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 있을 것임(영적 의미)도 들어 있었다(시110:1). 이제 얼마 안 있으면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어 원수마귀를 멸하실 것이다. 그러면 더 이상 아들의 존재는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때에는 더 이상 하나님도 아버지이니 혹은 아들이니 하고 불리우지 않을 것이다. 그때에는 하나님께서 다시 원래의 모습 오직 한 분으로 계실 것이니 말이다. 건투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