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인간이 처리해야 할 죄에는 2가지가 있다. 하나는 원죄라 불리우고 있는 죄된 본성이며, 또 하나는 낱낱의 범죄들이다. 이 두 가지는 죄는 그것 자체의 의미와 분야가 전혀 다를 뿐더러 그것을 처리하는 방법도 전혀 다르다. 오늘 이 시간에는 죄된 본성이 어떻게 우리 안에 들어오게 되었는지와 죄된 본성을 처리하는 방법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우선 첫째로, 우리 안에 어떻게 죄된 본성이 자리잡게 되었는지부터 살펴보자.
사실 아담이 타락하기 전에 아담 안에는 죄된 본성이 하나도 없었다. 또한 아담의 범죄할 때에 사탄이 죄된 본성을 우리 몸안에 주입한 것도 전혀 아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되어서 사람 안에 죄된 본성이 들어오게 된 것일까? 그것은 에덴동산의 시대로 거슬로 올라가야 한다. 아직 아담이 타락하기 전의 시대로 말이다. 그때에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 고스란히 아담에게 들어 있었다. 하지만 악한 자요 사탄인 뱀의 꾀임으로 말미암아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선악과를 따먹게 된다. 그러자 아담에 주어진 하나님의 형상은 깨져버렸으며, 악한 본성이 아담 안에 자리를 잡게 된다. 다시 말해 사람이 죄된 본성을 가지게 된 원인은 아담이 선악과의 열매를 따먹은 것 때문인 것이다. 만약 우리가 이 선악과를 먹기 전에 생명나무의 실과를 먼저 먹었더라면, 아마도 모든 사람은 선과 악이 자기 안에 함께 들어있다 하더라도 악은 버리고 선을 취할 수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담은 생명과를 먹기 전에 그만 선악과를 먼저 먹어버렸다. 그래서 선과 악이 동시에 인간의 몸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선과 악이 우리 안에 동시에 들어왔을 때에, 사람이 과연 선과 악 중에서 과연 어떤 것을 따르느냐 하는 것인데, 사람은 누구나 악한 쪽을 따라가더라는 것이다. 이러한 비근한 예는 아담의 장자인 가인에게서 발견할 수가 있다. 어느날 때가 되자, 하나님께서는 가인과 아벨의 제사를 드리라고 하셨다. 그런데 그때 하나님은 믿음과 정성과 회개가 빠진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다. 그리고 믿음과 정성과 회개가 들어간 아벨의 제물을 받으셨다. 그러자 가인은 분노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에게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아는가?
창4: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그랬다. 이미 가인에게는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선악과가 들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선과 악이 동시에 존재하고 있던 가인에게서 나온 것은 분노였다. 악이었던 것이다.
둘째로, 우리 안에 들어와 있는 죄된 본성을 어떻게 하면 처리할 수 있는지를 알아보자.
사실 죄된 본성은 육체 안에 들어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육체 안에서 죄된 본성만을 빼낼 수는 없을까? 결론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자, 바울의 탄식을 한 번 들어보라.
롬7:18-20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19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20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렇다. 우리의 육체 안에 들어있는 죄된 본성은 우리의 육체가 죽는 날 같이 죽게 되는 것이지 우리가 살아있을 때에 죄된 본성만을 빼어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영영 죄된 본성의 노예가 되어서 살아야 하는 것일까? 그래서 죄짓고 회개하고 또 죄짓괴 회개하고를 반복해야 하는 것일까? 아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려 하실 때에 이런 상태로 우리를 구원하시려 하지는 않으셨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처리하는 방법에는사실 2가지가 있다. 하나는 우리가 지은 낱낱의 죄들을 처리하는 방법인데 그것은 오직 예수님의 피를 통한 속죄의 방법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흘림으로 말미암아 그 피가 우리가 지은 죄를 자백하고 회개할 때 우리의 낱낱의 죄들을 씻어내는 것이다. 또 하나는 우리 안에 들어있는 죄된 본성을 처리하는 방법이 있는데, 그것은 예수님의 피로 처리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것으로부터 우리가 탈출하는 방법을 사용하신다. 일명 그것으로부터 벗어남(해방)의 방법을 쓰는 것이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죄된 본성은 우리가 죽을 때까지 우리가 가지고 가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죄된 본성을 처리하려면 죄된 본성이 갖고 있는 힘보다 더 강력한 힘으로 그것을 제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방법이 곧 성령의 욕구을 사용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낱낱의 죄들을 사하시기 위해 사람이 되어 피흘려 죽으셨다. 이것이 1차적으로 죄를 이기는 방법이요, 그리고 죽고 부활하여 승천하신 후에 성령을 보내주셨다. 이것이 죄를 이기는 2차적인 방법이다. 사실 죄된 본성은 피조물에 속한 것이지만, 성령은 창조주이시지 않는가! 그러므로 창조주만이 피조물을 이길 수 있듯이, 우리 안에 들어오신 성령께서 우리의 죄된 욕구를 이길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죄된 본성에서 탈출하려면 우리는 반드시 성령님의 인도를 받아 성령의 욕구대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갈5:16-17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그리고 부수적으로 소극적인 방법도 우리는 알고 실천해야 한다. 그것은 죄된 본성을 가진 우리의 육체를 날마다 아니 매순간마다 십자가에 못박는 일이다(갈2:20). 사실 십자가의 의미는 2가지다. 하나는 우리의 사명이나 고난을 의미한다. 그러나 또 하나는 우리의 죄된 본성을 죽음을 넘긴다는 뜻이다. 십자가는 고난과 사명의 도구임과 동시에 끝내는 도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죄된 본성으로 벗어나려면 적극적으로는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야 한다. 뿐만 아니라 소극적으로는 우리의 죄된 본성을 지닌 육체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음에 넘기는 것이다. 이것은 영적인 일이다. 그러므로 실제적으로 우리의 육체를 십자가에 못박으려면 우리의 생각을 바꿔나가야 한다. 그것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실 때에 우리의 죄된 육체도 함께 못박혔다고 믿고 여기고 선포하는 것이다(롬6:11). "이와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있는 자로 여길지어다(롬6:11)"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렇다. 죄된 본성에서 벗어나고 싶은가? 그러면 우리 안에 들어오신 성령님께 여러분 자신을 맡기라. 그리고 그분의 음성에 순종하며 살아가라. 그리고 죄된 본성이 올라올 때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음을 상기하라. 그리고 그렇게 여기고 선포하라. 그러면 점차로 우리는 죄된 본성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다. 롬8:1~2의 말씀처럼,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줄 것이다. 건투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