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며
창세기가 시작의 책이라면 요한계시록의 결론의 책이다. 그런데 요한계시록 그 어디에서도 성령하나님을 찬양하라는 대목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보좌에 계신 이와 어린 양께서는 찬송과 영광을 돌리라고 몇 번이고 말한다. 하지만 성령께는 찬송과 영광을 돌리라는 말이 나타나지 않는다. 아니 성경 전체를 통해서도 단 한 번도 그러한 명령이나 권면이 없다. 무슨 이유에서인가? 또한 바울을 비롯한 여러 명의 신약의 성도들이 기록했던 신약의 서신서를 보라. 서두 인삿말에 성령 하나님이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모두가 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라고 되어 있다. 성령 하나님은 거기에 빠져 있다. 대체 무슨 이유에서일까? 오늘 이 시간에는 왜 구약의 여호와 하나님이나 신약의 예수님에게는 찬송과 경배를 드리며 영광을 돌리라고 하나, 성령님께는 왜 그러한 명령이나 권면이 없는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2. 요한계시록과 신약의 서신서에 등장하는 찬송의 비밀
먼저, 성경의 마지막 책으로서, 성경의 결론의 책이자 완성의 책인 요한계시록을 살펴보자. 과연 요한계시록에서는 누구에게 찬양할 것을 명령하고 권면하고 있을까? 누구에게 영광을 돌리라고 명령하고 권면하고 있을까?
계4:11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
계5:12 큰 음성으로 이르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
계5:13 내가 또 들으니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피조물이 이르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하니
계14:7 그가 큰 음성으로 이르되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의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 하더라
계19:4-5 또 이십사 장로와 네 생물이 엎드려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 경배하여 이르되 아멘 할렐루야 하니 5 보좌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시되 하나님의 종들 곧 그를 경외하는 너희들아 작은 자나 큰 자나 다 우리 하나님께 찬송하라 하더라
그렇다. 주 하나님과 어린양께서는 찬송과 영광을 돌리는 것이 합당하고 천사들이 외치고 있다. 그리고 보좌에 계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영광을 돌리라고 거듭 말한다. 그리고 한 분이신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명령은 구약성경에도 고스란히 등장한다(시146:1, 148:7, 렙20:3, 시68:4, 시113:1, 135:3, 시47:6, 98:1, 135:1~3). 심지어 사탄마귀와 그들이 거주하는 바다라도 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시148:7).
시146:1 할렐루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양하라
시98:1 새 노래로 여호와께 찬송하라 그는 기이한 일을 행하사 그의 오른손과 거룩한 팔로 자기를 위하여 구원을 베푸셨음이로다
시148:7 너희 용들과 바다여 땅에서 여호와를 찬양하라
3. 왜 성경에는 성령님께 찬송하고 그분을 경배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는 말이 등장하지 않는 것일까?
그런데 왜 성령님께는 찬송하는 말이 없을까? 우선 결론의 책인 요한계시록을 통해서, 성령님께는 왜 찬송과 영광을 돌리도록 명령하지 않았는지부터 알아보자.
우선 요한계시록에서 성령님은 하나님의 보좌 앞의 일곱등불이시다(계4:5). 그리고 하나님의 영이자(계4:5) 또한 온 땅에 보내심을 받아 온 땅을 감찰하시는 예수님의 눈이시다(계5:6). 또한 성령님은 하나님의 영이요 예수님의 눈이시지만, 일곱 영이요 일곱 눈이시다(계5:6). 여기서 우리는 성경에 등장하는 숫자의 개념에 대해 조금 알 필요가 있는데, '일곱(7)'이라는 숫자는 이 땅에서의 완전수를 가리키고, '열둘(12)'이라는 숫자는 하늘에서 완전수를 가리킨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곱 영이나 예수님의 일곱 눈이라는 표현은 한 분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성령께서 이 땅의 모든 것을 완전히 다 감찰하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성령님이란 한 분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보내신 당신 자신의 영을 가리킨다고 봄이 가장 타당하다.
사실 하나님은 만세전부터 홀로 한 분으로 계셨다. 그분은 지금까지도 높이 들린 보좌에 앉아계신다. 그러나 그분의 모습은 그분이 영광(빛)에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볼 수가 없다. 다만 그분이 계심을 영으로서 아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사람의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적이 있으셨다. 지금으로부터 2천년전의 일이다. 그분이 바로 유대땅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신 우리 주 예수님이시다. 하지만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이심도 알아야 한다. 곧 하나님은 동시존재가 가능하시므로, 하나님은 하늘 보좌에 앉아계시면서도 또한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실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죽을 수도 없고 흘릴 피도 없으시다. 하지만 인류를 구속하기 위해서는 대신 죽어야하고 피를 흘려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부득이한 조치로 사람이 되시기로 하신 것이다(사9:6). 그래서 이땅에 아들의 신분으로 오신 하나님은 구속사역을 완성하시고 하늘로 돌아가셨는데, 요한계시록 7장에 보면 그분이 바로 발에 끌리는 흰 옷을 입으시고 일곱 금촛대 사이에 거느시는 분이시며, 그분이 바로 하늘에 높이 들린 하나님의 보좌에 앉아계신다(계7:14~17).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은 한 분이시지만 육신을 입으신 적이 있으시기에 우리에게 영원한 간증이 되신다. 그래서 어린양은 지금도 천국에서 천사들과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만나볼 수 있는 분으로 존재한다. 하지만 예수님이라도 그분이 보좌에 앉아계시면 그분은 한 분이신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성령님은 바로 한 분이신 '하나님의 눈'이라는 것이다. 온 땅을 감찰하시고 계신 완전한 눈이신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에서는 단 한 번도 하나님의 눈을 찬양하라고 말하지 않고 있다. 만약 어떤 사람이 글씨를 잘 써서 대회에 나가 상을 받았다고 치자. 어느 누가 그의 손을 찬양하겠는가? 전부 다 그 사람을 높이는 것이다. 이렇듯 하나님의 영도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분으로서 온 땅을 감찰하시는 역할을 감당하고 있으므로, 성령 하나님 자체를 찬양하라고 말씀하지 않는 것이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영인 성령님을 보내어 만물을 지으셨다(창1:2, 시104:30). 그러므로 보냄을 받은 영을 찬양하라고 하지 않는 것이다. 보낸 분을 찬양하라고 한다. 또한 인간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보좌를 버리시고 종의 형체를 입으시고 사람이 되셔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행하신 예수님을 찬양하라고 한다. 그러므로 구약과 신약에서는 하나님과 예수님을 찬양하라고 하지만 성령님을 찬양하라고는 말하지 않는 것이다.
4. 우리가 하나님과 예수님을 찬양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제 마지막으로 우리가 왜 하나님과 어린양되신 예수님을 찬양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살펴보자. 왜 우리는 하나님과 어린양을 찬양해야 할까? 그 이유는 너무나도 많지만 대개 2가지로 요약해 볼 수 있다.
첫째, 그분이 모든 만물을 창조하셨기 때문이다(계4:11, 시100:3, 시97:7). 그분이 모든 만물이 그분에 의해 지음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음을 받은 모든 피조물은 다같이 하나님께 찬양과 영광을 돌려야 한다(계14:7).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에는 보이지 않는 영적 피조물로서 천사들이 있고(시97:7), 보이는 피조물로서 자연만물과 사람들이 있다. 그러므로 구약성경에서는 모든 만물들이 주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권면하고 있다.
둘째, 그분이 바로 우리 인간을 구원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출15:21, 렘20:13, 시103:1~5,8~12). 우리 인간은 인류의 시조인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타락했다. 그 벌은 죽음에 이르는 것 곧 하나님과의 영원히 단절되어 지옥에 떨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받은 우리 인간이 지옥에 떨어지는 것을 차마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로 결정하셨다. 이것은 만세전부터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일이다. 그래서 인류를 구원하시려는데, 먼저 하나님은 샘플로서 노아의 물심판 사건을 통해 구원의 과정을 보여주셨고, 롯의 불심판 사건을 통해서 또한 구원의 과정을 보여주셨다. 하지만 이것은 가족에 대한 구원의 예표다. 그 다음으로 하나님께서는 B.C.1446년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초자연적으로 구출해 내셨다. 민족 다시 말해 대집단을 이끌어내신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을 광야로 이끌어내셨고, 40년동안 시험하신 후에, 그들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들어가게 하였다. 이것이 바로 인류구원에 대한 하나님의구속 역사의 그림들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정말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종의 형체를 입으셨고 이 세상에 오셨다. 그리하여 대속제물로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빌3:6~8). 그러므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보좌에 계신 이와 어린양에게 찬송과 영광을 돌려야 한다. 그것은 그분이 우리를 구원하러 오셨고, 그 일을 위해 모든 것을 다 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이미 구원받아 천국에 올라가 있는 성도들은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있도다(계7:10)" 그렇다. 이제는 우리가 그분을 노래하며 그분께 존귀와 위엄과 영광을 돌려야 하겠다. 건투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