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며
회개는 너무나 중요한 신앙의 영역이다. 만약 성경에 나오는 모든 것을 다 믿고 거기에 기록된 모든 것을 다 체험했다고 하더라도 만약 그가 회개하지 못했다면 그 사람의 영혼은 지옥에 떨어지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우리가 살고 있을 때에 가장 시급한 것은 바로 회개인 것이다. 회개할 때에 우리의 삶의 문제들이 풀려지기 시작하며, 회개해야 자신의 영혼도 죄와 죽음과 사탄마귀로부터 벗어나 천국에까지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참된 회개란 대체 어떤 것이어야 할까? 어떻게 회개해야만이 참된 회개를 했다고 말할 수 있으며, 어떻게 회개해야 하나님께서 인정해주시는 회개인 것인가?
2. 회개의 과정과 회개의 결과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참된 회개란 지정의가 수반되는 회개여야 한다고 말이다. 물론 그 주장은 틀린 말이 아니라 맞는 대답이다. 참된 회개란 먼저 자신이 지은 죄를 시인하고 인정하는 것이 있어야 하고(지적인 영역), 두번째로는 통회 자복하는 것이 있어야 하며(정적인 영역), 마지막으로 가던 길을 돌이키는 것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의지적인 영역). 하지만 이것은 회개의 과정을 설명해주는 것이다. 진정한 회개란 회개의 과정과 더불어서 회개에 합당한 결과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세례요한은 이것을 "회개에 합당한 열매(마3:8)"라고 말했고, 예수님의 친동생 야고보는 "행함이 수반되는 믿음(약3:14)"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과정이 아니라 결과론적으로 보았을 때, 참된 회개란 대체 어떤 것일까?
3. 회개는 꼭 지정의가 포함되어야 하는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가? 그분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시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이 믿었고 이삭이 따라갔으며 야곱을 변화시킨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어야 할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는식대로 믿어서는 되는 하나님이 아니다. 만약 그러한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그는 지금 우상숭배를 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반드시 아브라함과 이삭의 야곱의 하나님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도 자신을 "나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출3:6).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하나님을 믿을 것이 아니라,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 곧 아브라함과 만났고 이삭이 따라갔으며 야곱을 변화시킨 바로 그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이 세 사람이 기록된 창세기의 기록에서 자기자신의 잘못을 통회자복했다고 하는 곳을 발견할 수 없다. 그들이 자신의 잘못을 시인했다는 장면도 발견하기가 어렵다. 다만 그들이 자신의 잘못을 깨달은 다음에 그들이 돌이킨 흔적들은 발견할 수 있다. 그들은 자신의 잘못이 무엇인지를 깨달은 순간 다시는 과거의 전철을 밟지 않았다는 것이다.
4. 아브라함은 과연 어떤 회개를 했는가?
예를 들어보자.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만났던 인물이다. 처음에 그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지만 나중에는 직접 사람의 몸을 입고 나타나신 하나님을 만나보기까지 했다(창18장). 하지만 그도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지 못해 자신의 성질대로 처리하는 성급함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믿는다는 것일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을 만났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믿었더니 그 말씀이 내게 역사하여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었다는 뜻이다. 그런데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자기 성질대로 행할 때가 있었다. 약속한 아들을 참고 기다리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어느날에는 자기 아내의 말을 듣고 첩을 들여서 아들을 보았다. 그렇게 해서 태어난 아들이 바로 '이스마엘'이다. 그런데 이스마엘 탄생 이후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만나보지도 못했다. 뿐만 아니라 그분의 음성마저 들을 수 없었다. 그렇게 세월도 13년이 흘러갔다. 그런데 어느날 하나님께서 그에게 문득 나타나셨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육신을 따라 행했던 죄를 회개하는 의미에서 자신의 고추의 포피를 잘라내버리라고 하였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유대인들의 할례의 시작이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께서 비로소 그에게 아들을 주셨다. 그가 바로 '이삭'이다. 그런데 이삭이 장성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더러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라고 했다. 하지만 한 번 공과를 배웠던 아브라함은 두번 다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그는 즉시 아들과 함께 제물잡을 칼과 나무를 가지고 3일길이나 떨어진 모리아산으로 갔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기꺼이 자신의 아들 이삭을 번제물을 바치려고 칼을 들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를 급히 말리셨다. 그리고는 "이제야 네가 나를 경외한 줄을 알았다"고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물어보자. 아브라함은 이때 과연 회개를 했는가? 혹시 육신을 따라 행했던 자신의 잘못을 뉘우쳤다면 대체 그는 어떻게 뉘우쳤던 것일까? 창세기를 자세히 읽어보라. 그래도 당신은 그가 통회자복했다는 장면을 찾아낼 수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그가 그 일 뒤로 두 번 다시 동일한 죄를 반복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나서 그는 하나님의 말씀만을 따라갔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된다. 이는 곧 하나님께서 그가 회개한 것임을 인정하셨다는 뜻이다.
5. 회개의 표준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다.
그렇다. 회개라는 것이 지정의의 모든 영역에서 다 일어나면 더 좋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그러한 과정은 다 일어나지 않을 수 있다. 또한 반대로도 생각해볼 수 있다. 얼마나 많은 젊은이들이 찬양집회가 가서 눈물을 흘리며 회개를 하는지 모른다. 그리고 그들의 회개가 거짓이라고 보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의 회개는 말짱도루묵의 회개다. 왜냐하면 찬양집회를 마치고 난 후 그들의 모습은 옛날과 똑같기 때문이다. 맥주를 마시고, 담배를 피며, 심지어는 남녀가 음행을 저지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비록 눈물을 흘리며 회개했다고 하지만 사실 회개는 회개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그 뒤에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회개란 회개의 과정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회개로 말미암아 나타난 여러가지 합당한 열매들이 있느냐 하는 것이다. 만약 회개에 합당한 열매들이 없다면 그 사람의 회개는 더이상 회개라고 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는 사람들이 무엇을 회개해야 하는지를 살펴보자. 회개를 한다는 것은 회개자체를 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가 진정 죄에 대한 인식을 바꾸고 새로운 삶을 시작했느냐가 중요하다. 지은 죄를 죄로 인식하고 그 죄를 미워하며, 그 죄로부터 떠났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다시 말해, 회개라는 것은 입술로만이 아니라 죄 자체를 죄로 인식하고 그것을 미워하며, 그 죄로부터 떠나는 결과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회개했다는 사람이 다시 옛날의 삶으로 돌아가 짓던 죄를 또 짓고 있다면, 그 사람은 회개를 하지 않은 것으로 봐야 한다. 그렇다면 대체 참된 회개란 과연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6. 참된 회개에 대한 정의
성경을 통틀어 참된 회개를 종합해보면, 회개란 인생의 목표가 바뀌고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가 변화된 것을 의미한다. 이전에 인생의 목표는 세상 것이었던 사람이 이제는 하나님이 귀중히 보시는 것으로 바뀌어버린 것이다. 다시 말해, 이전까지는 이 세상의 많은 소유물이 인생의 목표였고, 자신의 명예가 아주 중요한 가치였다면, 이제는 하나님을 알고 영적인 것을 소중히 여기고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인생의 최대목표가 되는 것이다. 이전까지는 하나님보다 세상의 친구가 더 소중했는데, 뒤바껴버리는 것이다. 그렇다. 사람이 진짜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만나고 나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다 아침 안개와 같이 허망한 것임을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이 세상에 있는 재물은 아무것도 아니며, 이 세상의 명예나 인기도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나중에는 이 세상의 귀한 친구도 하나님과는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결국에 그는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것은 오직 영적인 것이며, 하나님이신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렇게 변화된 사람, 이 사람이 진정 회개한 사람인 것이다.
이제 회개한 사람의 대표적인 예를 찾아보다. 구약의 인물은 다윗이며 신약의 인물은 사도바울이다. 이번에는 사도바울에 대해 잠깐 살펴보자. 그는 행9장의 싯점에서 놀라운 변화를 겪게 된다. 다메섹 도상에서 그만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이다. 그전만 해도 그의 인생의 목표는 세상적인 성공이었다. 그것도 랍비로 성공해보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의 이 야망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아끼지 않고 실행하였다. 심지어 사람을 죽이는 일에도 앞장섰으며, 나중에는 예수믿는 자들을 잡아가두는데, 다른 지역에까지 손을 뻗치는 자가 되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가 다른 지역까지 손을 뻗치려 했을 때에 그를 정지시키셨다. 하늘에 계신 한 분 하나님 다시 말해 부활승천하시어 보좌에 앉아계셨던 예수님께서 그에게 찾아오셔서 그를 막으신 것이다. 그것은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를 깨닫게 해 주신 것이다. 그때 그는 삼일동안이나 눈이 멀어 있었다. 그리고 삼일 후에야 비로소 눈을 떴다. 그런데 놀랍게도 인생의 목표가 바뀌어 있었다. 그전에는 세상에서의 성공을 인생의 목표로 삼았던 그가, 이제는 다메섹에서 만난 예수님을 알고 그분을 전하는데 인생의 목표로 전환하였던 것이다.
7. 나오며
그렇다. 사실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기 전까지 대부분의 인생의 목표는 거의 동일하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이요, 세상의 명예와 인기를 가지는 것이며, 세상의 재물과 쾌락을 즐기는 것이다. 하지만 전능하신 하나님, 영원하신 하나님을 만나는 순간, 갑자기 사람은 자신이 보지 못했던 것을 보기 시작한다. 영적인 눈이 떠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육체를 즐겁게 하고 육체를 위해 살던 것을 멈추고, 그후부터는 자신의 영혼을 위해 살아가려 하는 것이이다. 그래서 자신의 영혼이 죽어서 지옥에 떨어지게 된 것이 실패한 인생임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이 바라보는 그곳에 자신의 시선을 맞추고 그 길을 걸어가는 것이다. 당신은 지금 어떤 길을 가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이제는 우리의 시야를 떠나 하나님께서 바라보시는 그곳을 바라보는 성도가 되고 싶지 아니한가? 그러면 당신도 이제 회개에 눈이 떠진 것이요 참된 회개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건투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