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오미는 왜 자기를 따라오는 두 자부를 자기의 고국으로 돌려보내려 했을까? 정말 젊은 청춘들이 불쌍해 보여서 그냥 그들을 돌려보내고 싶었던 것일까? 그리고 나오미가 유대땅을 떠나 모압지방으로 들어갔을 때 그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그녀는 가진 재산을 다 잃고 남편과 두 아들들을 다 잃었다. 하지만 나오미가 거기서 나올 때에는 귀한 한 여인을 얻을 수 있었다. 그녀는 바로 '룻'이라는 모압인이었다. 그런데 룻이 나오미를 따라나선 것은 단순히 시어머니와 자부 사이의 인륜 때문만은 아니었다. 거기에는 놀라운 신앙의 신비가 숨어있다.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가 거기에 분명하게 들어있는 것이다. 왜 모압여인 룻은 시어머니를 선택한 것인가? 그 길이 얼마나 험난하고 힘든 길인지를 그녀는 몰랐을까?
1. 들어가며
나오미에게는 남겨진 두 자부가 있었다. 첫째자부는 룻이었고, 둘째자부는 오르바였다. 그런데 둘 자부가 다 일찍 남편을 잃었다. 그래서 둘 다 과부가 되었다. 나오미도 남편을 잃고 나서 두 아들들을 장가보냈으니, 그 집에는 세 과부가 남게 될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나오미에게 기쁜 소식이 들려왔다. 떠나온 유대땅 베들레헴지역에 하나님께서 양식을 주셨다는 말을 들은 것이다. 그러자 나오미는 두 자부와 함께 고국으로 돌아가려고 길을 떠난다. 그런데 길을 가던 나오미가 두 자부에게 말했다. "내 딸들아, 너희는 각기 너희 친정어머니에게로 돌아가거라. 그리고 새 남편을 만나 위로를 받으라." 그러자 두 자부를 울며 그럴 수 없다고 했다. 그러자 두 자부가 더 이상 따라오지 못하도록 이렇게 말했다. "나를 따라와도 너희들에게는 아무런 소망이 없다. 내가 다시 시집을 가서 자식을 낳았다고 치더라도 너희들이 그 아이가 자라기까지 기다린들 자식을 낳을 수 없을 것이니, 그만 돌아가라. 어찌 남편없이 홀로 지내려 하느냐?" 그러자 둘째자부는 시어머니에게 입맞추고 돌아갔다. 이제 남은 것은 첫째자부다. 과연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오늘 이 시간에는 나오미의 뿌리침의 의미가 무엇이었으며, 우리가 이러한 결단의 상황에 직면한다면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지를 살펴보고도록 하자.
2. 나오미는 왜 두 자부를 뿌리친 것인가?
먼저, 나오미가 두 자부를 뿌리친 것의 의미는 무엇인지를 살펴보자. 정말로 나오미는 두 자부들의 청춘이 불쌍해서 그들을 돌려보내려 했던 것일까? 우리는 훗날 나오미가 자신을 끝까지 붙들고 따라온 첫째자부에게 했던 언어와 행동들을 통해서, 그때 나오미가 두 자부를 돌려보내려고 했던 진짜 이유를 짐작해볼 수가 있다. 그것은 그녀가 두 자부에서 아무런 소망이 남아있지 않았다고 한 것은 진실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두 자부가 비록 남편을 잃었고 시어머니로부터 낳은 아들을 기대할 수 없다고 하더라고 한 가지 가능성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나오미의 남편인 엘리멜렉의 친족이 팔아버린 기업을 물어주고, 자부를 취하여 결혼을 하게 되면, 자부도 자식을 낳아 자신의 전남편의 아들로 입적할 수 있을 뿐더러, 새 남편의 가문에도 그 이름을 올릴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일을 행할 수 있는 사람이 베들레헴에 있었던 것이다. 첫번째 우선순위자는 나오지 않지만 두번째 우선순위자는 성경에 나온다. 그는 바로 보아스라는 총각이었다.
그런데 나오미는 자기를 위해 이삭을 주으러 갔던 룻에게 누구의 밭에서 이삭을 주었는지를 물어본다. 그리고 그 밭이 '보아스'의 밭이라고 하자, 그 사람은 자기남편과 가까운 친족이어서 자기남편의 기업을 무를 자 중의 한 사람이라고 말한다(룻2:20). 다시 말해, 베들레헴에는 아직까지 나오미의 남편이 팔아버린 기업을 물어줄 자가 두 명이나 있었던 것이다. 그중의 한 명은 보아스였다. 그런데 룻이 보아스의 밭에서 가서 곡식을 주었다고 하자, 나오미도 자신의 속내를 드러낸다. "룻의 시어머니 나오미가 그녀(룻)에게 이르되, 내 딸아. 내가 너를 위하여 안식할 곳을 구하여 너를 복되게 하여야 하지 않겠느냐? 네가 함께 하던 하녀들을 둔 보아스는 우리의 친족이 아니냐(룻3:1~2)"
3. 나오미의 뿌리침은 진정 누가 복받을 자가 될른지에 대한 하나님의 선별작업이었다.
그랬다. 나오미에게는 한 가닥의 희망이 아직 남아있었던 것이다. 자기남편의 친족으로 기업무를 자가 아직까지 남아있었기 때문이요, 그 중에서도 두번째 순위에 해당하는 사람이 보아스라는 사람인데 그는 아직도 총각으로 지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오미는 그러한 사실을 정말 몰랐을까? 그리고 두 자부에게는 자기에게는 아무런 희망이 없다고 말한 것일까? 아니다. 거기에는 진정 복을 받을 사람이 누군지를 골라서 그 자부에게 복을 받도록 하겠다는 의지가 각오가 들어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그녀가 돌아와서는 자부가 보아스를 만나 그사람과 결혼할 수 있도록 모든 조치를 취했던 것이다. 그렇다. 나오미가 두 자부를 모압지방에 떨어뜨리려 했던 이유는 단지 두 자부의 청춘이 불쌍해서가 아니었다. 누가 과연 여호와 하나님신앙을 붙들어 복을 받게 할 것인지에 대한 나오미의 생각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첫째자부는 그때 어떤 반응을 보였는가?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룻1:16-17 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17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는지라
4. 룻의 아름다운 신앙의 결단
그렇다. 룻의 결단은 비장했다. 시어머니를 따라나서는 것이 어쩌면 고생길이 환히 열리는데도 불구하고, 룻은 기꺼이 그 길을 선택한 것이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오직 한 가지 이유에서다. 시어머니께서 가르쳐주신 여호와 하나님 신앙을 결코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였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는 것이 저의 소원입니다"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자기의 고향도 친척과 부모도 기꺼이 떠나서 베들레헴으로 가자고 했던 것이다. 그것이 자신의 영혼이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인 것을 그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룻은 비록 자신이 베들레헴에 가서 빌어먹는 한이 있더라도 그 길이 바른 길이요 자신의 영혼을 살리는 길이라는 깨달았기에 그 길을 선택했던 것이다. 놀랍지 아니한가? 젊은 여자가 어찌 그러한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특히 그녀는 아직 젊지 아니한가? 비록 이미 결혼한 전력이 있기에 여인이라고 불리울 뿐, 사실 사람들의 눈에 보이기에는 그녀는 처녀로 보였다. 그러니 사람들이 그녀를 칭할 때 "소녀(처녀, 아가씨)"라고 칭했으며(룻2:6), 조금 나이가 있는 사람은 그녀를 "딸"이라고 칭했던 것이다(룻2:8).
5. 우리에게도 선택의 순간이 찾아오면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그렇다. 우리에게 오르바와 룻과 같이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지 결단이 필요한 때가 있을 것이다. 그때에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나오미의 둘째자부 오르바는 합리적인 선택을 하였다. 젊은 시절을 과부로 지내면서 시어머니를 돌보는 자로 살 바에는 차라리 자기 동족에게 돌아가 새 남편을 만나 새 인생을 시작할 수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룻은 합리적인 선택이 눈 앞에 놓여 있었음에 불구하고 그 길을 선택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자기의 동족에게도 돌아가고 새 남편을 만나 행복하게 살 수 있을른지는 몰라도, 자기가 붙들었던 여호와 하나님을 더 이상 섬기기가 어렵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이 선택한 길이 비록 고생길이 된다고 하더라고 그 길을 가겠노라고 결단한 것이다. 그녀의 결단은 무섭기까지 하다. 왜냐하면 그녀는 고국으로 돌아가라는 시어머니의 말에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뭍힐 것이다.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룻1:17)"이라고 대답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나오미는 그녀를 데리고 유대 땅 베들레헴으로 갔다. 나오미의 시험에 룻이 합격한 것이다. 시어머니의 생각에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을 자는 바로 룻이라고 결정한 것이다. 그렇다. 나오미가 두 자부에게 돌아가라고 명령한 것은 그들을 시험하여 하나님께로부터 누가 복을 받을 사람인가를 시험하는 과정이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나오미를 통해 그것을 사용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나오미의 뿌리침은 누가 하나님으로부터 복받을 자인지를 골라내는 하나의 시험과정이었던 것이다.
6. 나오며
저와 여러분에게도 이런 시험은 반드시 올 것이다. 구약의 믿음의 조상이었던 아브라함에게도 그러한 시험이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지 아니한가? 만약 그때에 우리가 그 현장이 있는 자라고 한다면, 우리는 어떤 선택 해야 할 것인가? 당장 쉬워보이고 힘들지도 않으며, 당장 눈에 복으로 보이는 것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지금은 힘들고 어려운 길이라 판단되더라도, 그것이 하나님을 붙드는 길이요, 내 영혼이 영생을 얻는 길이라 한다면, 그 길을 선택할 것인가? 그렇다. 그 길이 참된 영생의 길이라고 한다면 여러 고생쯤은 사서한다 해도 옳지 아니한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은 그냥 쉽게 그렇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룻처럼 그 길이 고생길이 되더라도 하나님신앙을 위해서라면 어떤 것도 포기할 수 있는 선택이었을 때, 하나님께서도 그것을 눈여겨보시는 것이다. 보아스가 훗날 룻을 자기 아내로 맞이해 들인 것이 오직 보아스의 판단만으로 이뤄진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그것을 우연한 일이라고 생각하는가? 하나님의 세계에서는 우연을 가장 필요이 항상 있음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룻은 그때 보아스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께서도 보아스의 마음을 움직여버린 것이다. 그렇다. 합리적인 선택을 할 것인가 아니면 믿음을 선택할 것인가? 그것은 항상 우리 앞에 놓여 있다. 여러분과 여러분의 영혼을 위해서라도 옳은 길을 선택하기를 축원한다. 건투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