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교회는 어떻게 되어서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하는 신앙고백을 그렇게 중요하게 여겼을까?(롬10:9,고전12:3) 그것은 예수께서 가르쳐주시거나 명령하신 것이 아니었는데도 말이다. 하지만 A.D.325년 니케아종교회의 전까지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신앙고백은 매주 중요한 신앙고백이었다. 아쉽게도 오늘날에 들어와서 예수님이 주님이라고 하는 신앙고백의 참된 의미가 사라져버렸다. 단지 예수님을 주인으로 섬겨야 한다는 정도로 이해하고 있을 뿐이다. 아니다.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했던 초대교회의 성도들의 신앙고백은 그 정도의 신앙고백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초대교회는 대체 무슨 뜻으로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했던 것일까?
1. 들어가며 - 예수님에 대한 2가지 신앙고백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 이들의 신앙고백의 표준은 무엇인가? 대부분 '사도신경'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도신경은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신앙고백에 해당한다. 그리고 그것의 기원이 명확하지도 않다. 하지만 우리 교회는 분명한 신앙고백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성경에 기록된 신앙고백이다. 그것은 2가지다. 하나는 마16:16에 나오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이요, 또 하나는 요20:28에 나오는 도마의 신앙고백이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육체를 입고 계셨을 때의 예수님에 대한 신앙고백이요, 도마의 신앙고백은 죽고 부활하신 이후의 예수님에 대한 신앙고백이다. 그렇다면 초대교회는 어떤 신앙고백을 했을까? 오늘 이 시간에는 초대교회가 구원얻기 위해 사용했던 신앙고백이 무엇이었는지를 살펴보면서, 도마의 신앙고백의 중요성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하여 초대교회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했다는 말의 진정한 뜻이 무엇이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초대교회는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하는 신앙고백을 왜 사용하게 된 것일까?
먼저, 초대교회가 했던 예수님에 대한 신앙고백이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어떤 신앙고백을 듣고 그들에게 세례를 주었는지를 살펴보자. 초대교회는 대부분 롬10:9에 나와있는 신앙고백을 했고, 그러한 신앙고백을 한 자에게 세례를 주었다. 그러면, 초대교회가 고백했던 예수님에 대한 신앙고백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롬10:9)"였다. 초대교회는 예수님에 대한 신앙고백을 2가지로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는 예수님을 주님(퀴리오스)라고 시인하는 것이었으며, 또 하나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역사적인 사실과 그 의미를 고백하는 것이었다.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시인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바울이 고전12:3에 한 번 더 증거하고 있고,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관한 역사적인 사실과 의미에 대해서는 고전15:3~4에 한 번 더 언급하고 있다.
고전12: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고전15:3~4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
그렇다.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신앙고백하는 것은 초대교회 성도들의 신앙고백에 있어서 매우 중요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는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신앙고백하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또 실천하고 있을까? 일반적으로 교회에서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시인하는 문제에 대해 그리 중요성을 두지 않는 것 같다. 다들 평소 때에 그렇게 고백하고 또한 그렇게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3. 예수님을 주님이라는 고백은 대체 무슨 뜻인가?
그런데 최근 들어와 춘천에 있는 한마음교회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시인하는 문제를 아주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는 것에 대해 상당히 감사를 느낀다. 사실 예수님의 주되심에 관한 문제는 사영리나 선교단체에서는 자 언급하는 문제였지만, 지교회에서는 잘 다루지 않는 문제였다. 그런데 춘천에 있는 한마음교회가 이 문제를 심각하고 앞으로 가지고 나왔다. 구원의 문제와 예수님을 주로 시인하는 문제를 같이 언급했던 것이다. 춘천한마음교회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렇다. 춘천한마음교회에서는 예수님을 주인으로 믿지 아니하면 구원이 없다고까지 가르친다. 누구든지 구원을 받으려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전능자요, 창조주로 고백해야 할 뿐만 아니라 그분을 자신의 인생의 주인으로 모셔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죽고 부활하신 이유가 바로 산 자와 죽은 자들의 주인이 되게 하기 위함이었다고 가르치기 때문이다(롬14:7~9). 그리고 성경이 말하고 있는 구원을 받으려면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믿어야 할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자신의 주인으로 믿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해석과 동일한 것일까? 아니다. 그것은 성경에서 그리고 초대교회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시인하는 것의 의미와 많은 거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초대교회에서는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시인하는 것이 단지 예수님을 주인으로 섬기라는 것이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예수님을 자신의 인생의 주인으로 섬기지 말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초대교회가 그러한 의미로 그것을 쓰지는 않았다는 것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4. 초대교회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한 것은 무슨 뜻이었을까?
그렇다면, 초대교회는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시인하는 신앙고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실천하고 있었던 것이었을까? 또한 초대교회는 어떤 말씀을 근거로 하여 예수님에 대한 신앙고백을 "예수님은 주님이십니다"라고 했던 것일까? 우선적으로 공생애시기에 예수께서는 당신에게 대한 신앙고백을 주님이라고 고백하라고 명령하거나 가르쳐주신 적은 없으셨다. 단지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던 하루 전날에 간접적으로 당신이 주님이자 선생이신 것을 말씀하신 적은 있으셨다(요13:13~14). 공생애 시절에 주님께서는 베드로와 마르다로부터 신앙고백을 받으셨는데, 그것은 주님께서 첫째, 구약성경에 약속된 메시야 곧 그 그리스도라는 것과 둘째,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었다(마16:16, 요11:27).
그렇다면 왜 초대교회는 구원얻기 위한 신앙고백이자 세례를 주기 위한 신앙고백으로서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을까? 그것은 유대인들이 믿고 삶 속에 부르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에서 찾아볼 수 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유대인들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주님이라고 시인했는데,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그들이 고백했다는 것은 초대교회가 예수님을 여호와 하나님으로 고백한다는 뜻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한 것은 예수께서 자신의 인생의 주인이라고 고백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춘천한마음교회의 주장과는 거리가 멀었던 것이다. 이와같은 신앙고백은 예수님을 한 분 하나님 자신으로 인정하는 신앙고백이기 때문이다.
5. 유대인들은 어떻게 되어서 "여호와"를 "주님"이라고 바꿔 부르게 되었을까?
그렇다면 어떻게 되어서 유대인들은 여호와에 대한 호칭으로 여호와를 쓰지 않고, 주님이라고 사용하게 된 것일까? 유대인들은 십계명을 받은 이후 하나님에 대한 호칭을 그대로 쓸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십계명 중의 제3계명이 바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것이었고, 만약 그렇게 말하는 자가 있다면 결코 죄가 없다고 간주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출20:7). 사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는 전능의 하나님이라고 자신을 소개하셨을 뿐이다(출6:3). 하지만 모세시대에 들어와서 비로소 모세가 하나님의 이름에 대해 물어보자, 그때 자신의 이름을 여호와라고 가르쳐주셨다(출3:14~15). 하지만 십계명의 제3계명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글자(신명사문자, 요오드 헤 와우 헤)로 쓰기는 했지만 실제로 여호와라고 부르기를 꺼려했던 것이다. 그러자 랍비들이 궁여지책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때에는 "아도나이"로 발음하도록 했다. 그리고 그 뜻은 "나의 주님"이라는 뜻이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사람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글자로 쓸 때에는 여전히 똑같이 기록하기는 했지만, 부를 때에는 '아도나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그러다가 어느시점에 이르자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음가(발음)마저 잊어버리게 되었다. 그래서 글자만 있되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실제적인 음가는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러던 중에 A.D.8세기경, 구약성경을 집대성하여 편찬하려던 맛소라 학자들이 비로소 자음만 있던 히브리어성경말씀에가 모음을 첨가하게 되었는데, 그때에 신명사문자에도 모음을 집어넣게 되었다. 그런데 그때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모음 음가를 '아도나이'에 있는 음가를 신명사문자 안에다가 집어넣게 된다. 또한 하나님의 발음에 '아'라는 발음이 그들에게는 금기사항이었으므로, '아'를 '여'로 바꾸어, '여호와'라고 기록하게 되었고 또한 발음하게 된다. 그것이 영어성경에서는 1530년 틴데일이라는 사람이 'Jehouah(예호아흐)'라고 기록하게 되었고, 점차적으로 'Jehovah(예호와흐)'로 정착되어, 오늘날의 '여호와'가 된 것이다. 그러므로 '아도나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이름인 여호와에 대한 차용어였던 것임을 알 수 있다.
6. 신약의 유대인 성도들이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했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한편, 주전 2세기경에 흩어진 유대인들 즉 이방지역에 살던 유대인들을 위해 당시 통용되던 헬라어로 히브리어성경을 번역하게 되는데, 그때 유대랍비 72명이 참여하여, 히브리어성경을 헬라어성경으로 번역하게 된다. 이것을 70인역(LXX)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때도 하나님의 호칭을 어떻게 번역할 것인가가 문제가 되었다. 결국 '여호와' 대신에 '아도나이'라고 썼던 하나님의 이름을 그들도 헬라어인 '퀴리오스(주,주님)'라고 번역하게 된다. 그뜻은 '주님"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72명의 성경번역자들이 그렇게 번역하면 안 되는 것이었다. 이제는 '여호와'라고 정확히 번역해주어야 했지만,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않기 위해, 음가도 잘 몰라서 그렇게 했겠지만, 헬라어구약성경마저 '아도나이'의 뜻과 같은 '퀴리오스'로 번역해 버린 것이다. 또한 구약성경을 인용하려는 신약성경의 기록자들 예를 들어, 마태나 마가나 누가나 요한 그리고 사도바울이 구약성경을 인용할 때에도 여전히 70인역을 인용하다보니, 여호와라는 이름 대신에 전부 "주님(퀴리오스)"라는 번역하게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신약성경에 나오는 모든 구약인용구절에서 여호와는 다 '퀴리오스(주님)'라고 번역되어 있다. '여호와'가 '주님'으로 바뀌어버린 것이다.
이제 결론이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나의 주님(아도나이)라고 고백했다는 것은 사실 예수님을 주인이라고 고백했다는 의미가 아니라(물론 그러한 의미도 포함되어 있었겠지만) 예수님을 구약의 여호와라고 고백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도마의 신앙고백은 단순한 신앙고백이 아니었던 것이다. 예수께서 부활하기 전까지 도마에게 예수님은 한 명의 사람이었고 형님같은 스승이었다. 하지만 죽고 부활하신 후 예수님은 달라지셨다. 문이 닫혔으나 순간에 나타나셨을 뿐만 아니라, 구멍뚫인 손과 발 그리고 옆구리를 그대로 보여주실 때에, 도마는 예수님이 그들과 함께 하셨던 스승이나 형님임에는 분명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래서 "아, 이제 더이상 이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로구나. 구약에 자신을 여호와로 계시한 바로 그분이로구나"라고 고백하게 된 것이다.
7.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한 도마의 신앙고백은 무슨 뜻이었는가?
그렇다.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신앙고백하는 것은 단지 예수님을 자신의 인생의 주인으로 받아들인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 이상의 의미가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유대인들만의 신앙에서 찾아볼 수 있으니, 그것은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이름에 대신에 사용한 차용어로서, 예수님을 여호와로 신앙고백하는 행위였던 것이다. 그렇다. 예수님은 구약에서는 여호와로 자신을 계시하신 한 분 하나님이지만, 신약에서는 자신을 아들의 신분으로 계시하신 한 분 하나님 자신이다. 그러므로 초대교회 성도들은 예수님과 여호와를 따로 분리한 것이 아니라 한 분 하나님으로 여겼던 것이다. 하지만 A.D.313년 기독교가 공인되고, A.D.325년 니케아종교회에서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을 삼위일체 하나님이라고 고백하게 되자, 예수님을 여호와로 고백하는 신앙은 퇴색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에는 "예수님이 주님이시다"는 신앙고백을 "예수님이 주인이시다"라는 정도로 해석하고 있을 뿐이다. 아니다. 그것은 주님에 대한 본래적인 의미가 아니다.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예수님을 주인으로 고백하는 차원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분을 하나님으로, 여호와로, 한 분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일인 것이다.
8. 나오며
어느덧 세월이 흘러, 칼빈의 개인구원예정론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이제는 어느정도 기독교인들에게 회자되고 있다. 하지만 앞으로 얼마나 시간이 걸려야 초대교회가 고백했던 예수님이 주님이시다는 신앙고백의 본래적인 의미가 되살아날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유대인이었던 도마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더 이상 사람이신 메시야나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을 "나의 주님(아도나이)"이자,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했던 것이다. 이는 그가 예수님을 여호와이자 하나님으로서 고백한 것이었다. 그렇다. 예수님은 주님이시다. 예수님은 구약시대로 치자면 구약시대에 나타난 여호와이시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다. 그렇다. 예수님은 한 분이신 하나님이시다. 왜나하면 지금 저 천국에 계신 예수님은 더 이상 사람으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분은 이제 하나님으로 계신다. 그래서 천국에 가면 하나님을 보게 될 것인데,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때문에 볼 수는 없지만 사람의 형상으로 나타나셨던 예수님을 우리가 보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천국에 하나님의 보좌가 둘이나 셋이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그 보좌는 신구약성경에서 공히 한 개임을 증거하고 있다. 그 보좌에 바로 우리 주 예수님이 앉아 계시는 것이다(계3:21,7:15~17, 2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