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신앙은 대체 무슨 효력을 가져다주는 것일까? 지금의 시대야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것이 별로 어렵지 않는 시대이지만, 초대교회 당시만해도 이것은 목숨을 각오한 결단이어야했다. 왜냐하면 그때 당시 "예수님은 주님이십니다"는 신앙고백이란 "예수님이야말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이요 구약의 여호와이십니라"는 고백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단지 입술로 예수를 주로 시인했다고 해서 그 사람의 구원이 유효하다고는 할 수는 없을 것이다(롬10:9). 당시 순교를 각오한 현장에서의 고백과는 사뭇 다르기 때문이다. 이제는 예수님을 나의 주님이십니라고 고백하는 이 선언의 의미가 무엇이며, 이러한 신앙고백을 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은 대체 무엇인지 차근차근 살펴보도록 하자.
1. 들어가며
오늘날 우리는 흔히들 "주 예수님"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말하기도 한다. 이것은 우리에게 어색하거나 힘든 말이 결코 아니다. 하지만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이 말은 목숨을 담보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말이었다. 그러기에 롬10:9에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라는 말씀을 구원의 표지로 말하는 초대교회의 신앙을 다시금 되돌아보아야 한다. 과연 나는 초대교회성도들처럼 "예수님은 주님이십니다"라고 고백하고 있는지를 말이다. 그리고 그러한 고백이 어떻게 되어서 초대교회 성도들에게는 구원에 이르는 조건이라고 말하게 되었는지를 들여다보아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초대교회 성도들처럼 "예수님이 주님이십니다"라고 고백하게 된다면, 과연 오늘날 우리 성도들은 과연 어떤 은총을 받게 되는지를 함께 살펴보도록 하자.
2. "예수께서 주님이십니"라는 신앙고백의 의미는 무엇인가?
우선, 초대교회가 고백한 "예수님은 주님이십니다"라는 신앙고백이 어떤 의미가 들어있는지부터 살펴보도록 하자. 초대교회가 "예수님이 주님이십니다"라고 고백한 것은 오늘날 우리의 고백과는 그 의미에 있어서는 상당히 차이가 난다. 왜냐하면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이 주심이십니다"라는 말의 의미는 대부분 "예수께서는 이제 내 인생의 주인이십니다"라는 의미로 쓰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이러한 고백은 순교를 각오한 고백이었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초대교회가 "예수님이 주님이십니다"라는 고백을 하게 되면, 그들은 유대인들과 로마정부로부터 핍박을 받아야 했고, 죽임을 당해야 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초대교회 성도들에 대해 신성모독죄로 정죄하였고, 이어 회당에서 출당조치를 취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있어서 주님이라고 불리울 수 있는 유일한 존재는 오직 여호와 한 분 뿐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유대인들은 성경책에 나오는 하나님의 이름 곧 여호와라는 글자를 그대로 쓸 는수 있었다. 하지만 그대로 읽을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십계명의 제3계명의 주의사항에 따라 여호와의 이름을 잘못 일컫다가 돌에 맞아 죽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여호와라는 글자는 쓰기는 썼지만 그것을 읽을 때에는 다른 말로 바꾸어서 사용했다. 그것은 바로 "아도나이(나의 주님)"이라는 용어다. 그러므로 주님이라고 칭함을 받을 수 있는 분은 오직 여호와 한 뿐이었다(신6:4, 사41:10).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그렇게 거룩한 용어를 인간 예수에게 사용할 수 없다고 여겼기에, 그렇게 고백하는 기독교인들을 저주했고 또한 핍박했으며 나중에는 출당조치까지 시행하였다. 그리고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그들을 로마정부에 고발하여 죽게도 하였다.
그렇다면, 당시 로마정부는 어떠했을까? 로마의 제11대 황제였던 도미시안(A.D.81~94)은 황제권 강화를 위해 자신을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르도록 명령했다. 하지만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었던 기독교 신자들은 예수님 이외에 다른 존재에 대해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그것이 신성모독죄여서가 아니라, 자신의 신앙고백을 살아있는 일반적인 사람에게 붙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인간으로 오셨지만 동시에 하나님이셨던 예수님에게만 그 칭호를 사용하려고 한 것이다. 그러다보니, 오직 기독교인들만이 사자밥이 되거나 화형으로 죽임당해야 했다. 이것이 초대교회의 산 역사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주 예수님" 혹은 "예수님은 주님이십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고 해서 그것을 함부로 사용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이러한 신앙고백을 좀 더 엄중히 그리고 경건하게 사용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3. 구약의 여호와께서 인류를 구원하시러 오신 것이 곧 예수님의 사역이다.
한편, 신약의 사도들과 성경기자들은 구약시대에는 오직 여호와에게만 사용했던 "주님(퀴리오스)"라는 칭호를 그대로 예수님에게 사용했을 뿐만 아니라, 구약의 '여호와'라는 단어 대신 "주님"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예수께서 구약시대의 여호와심을 그대로 믿고 따랐다. 예를 들어보자. 예수님의 제자 마태는 예수님의 오실 길을 준비하고 있던 세례요한의 사역을 사40:3에 대한 성취로 보았는데, 사40:3에 의하면, 주의 길을 준비하라는 말씀은 "여호와의 길을 준비하라"는 말씀이었다. 곧 구약의 여호와께서 예수님으로 지금 오고 있음을 선포한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예수께서 드디어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마지막으로 그의 사역을 감당하시려 하실 때에 사람들은 종려나무가무를 흔들며 주님을 맞이했는데, 그때 부르는 찬송은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였다(마21:9). 그런데 이 말씀은 시118:25~26에 대한 성취로서, 시편에 의하면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호쉬안나) 여호와여 우리가 구하옵나니 이제 형통하게 하소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러 오실 것이라는 예언인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예언을 예수께서 그때 성취하고 있다고 외쳤던 것이다. 곧 여호와가 예수님이신 것이다. 사실 "예수"라는 뜻은 "여호와께서 구원하신다"는 말씀이 아니던가! 그러므로 초대교회가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고 했을 때, 이 때 주의 이름은 예수님이었다. 그런데 이 말씀에 대한 구약성경구절을 보면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욜2:32)"고 되어 있다. 주님이 곧 여호와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초대교회가 "주 예수"라고 불렀던 것은 그 의미가 "여호와이신 예수"였던 것이다.
4.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자들이 얻게되는 축복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하게 될 때 우리는 어떤 혜택을 누릴 수가 있는 것인가? 그것은 4가지 정도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예수님이 주님이시다"는 고백 곧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구약의 하나님이요 여호와이시다는 고백을 통해서 누구나 구원을 얻는다(롬10:9~10,13). 여기서 주의 이름은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는 이름이다.
둘째, 예수님은 "주여"라고 부르는 것으로 인하여, 모든 사람은 주님으로부터 기도의 풍성한 은혜를 얻는다(롬10:12). 요한복음 14장에 보면, 예수님을 본 자는 아버지를 본 자요, 예수님의 음성은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하신 말씀이기에, 예수님을 주님으로 부르게 될 때,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주시는 것이다. 다시 말해, 주 예수를 찾고 구하게 됨으로 풍성한 삶을 얻을 수가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여호와께서 육신을 입고 오신 한 분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이때 주의 이름은 기도응답의 이름이 된다.
셋째, 예수님의 이름을 사용하여 모든 믿는 자는 귀신을 제어하는 권세를 얻는다. 그렇다. 예수님으로부터 전능자의 이름의 권세를 위임받아 파송받은 70명의 제자들이 기뻐돌아왔을 때에 그들은 이렇게 고백했다. "주여,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항복하더이다(눅10:17)" 그렇다. 예수님을 하나님이요 여호와로 믿는 자는 전능자와 창조주의 권세와 능력을 힘입어 귀신을 제어할 수 있는 것이다. 이때 주의 이름은 권세와 능력의 이름이 된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는 자는 이단의 위험성에 빠지지 않게 된다. A.D.325년 니케아종교회의 전까지 하나님은 사실 한 분으로 고백하고 있었다. 예수님에 대해서 주 예수님이라고 고백했기 때문이다. 이 고백은 정확히 여호와이신 예수님이라는 뜻이었다. 그러므로 신약의 성도들은 하나님이 한 분이라는 것을 철저히 믿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니케아종교회의 결과 하나님을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구별하여 고백함에 따라 하나님은 갑자기 세 분처럼 여겨지게 되었다. 문제는 이 땅에서 하나님은 세 분으로 나타나셨지만 천국에서 하나님은 한 분이시라는 점이다. 하지만 훗날 삼위일체론자들은 천지만물을 창조하기전부터 하나님이 성자께서 성부로부터 나시고,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셨다고 정의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만세전부터 세 분으로 계셨고, 그중에서 아들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다고 가르쳤다. 하지만 이것은 절반은 틀린 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오신 것이지 아들 하나님이 성부와 인격적으로 따로 존재해 있다가 육신을 입으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딤전3;16). 오늘날에 왜 이단이 우후죽순처럼 일어나고 있는지 아는가? 그것은 하나님을 두 분 내지는 세 분으로 보려고 하기 때문이다. 아버지 하나님이 계시고 아들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니까, 하나님의 교회서는 어머니 하나님도 계시다고 하지 않는가? 그리고 천주교에서는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하나님 그리고 하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있다고 하지 않는가? 아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사람이 되어 아들의 신분으로 오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나를 본 것은 아버지를 본 것(요14:9)"이라고 말씀하셨고, "나와 아버지는 하나(요10:30)"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어머니라 부르고 있는 장길자라는 여자는 결코 하나님이 되실 수가 없다. 예수님께서 단 한 번도 나는 장길자와 하나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으시기 때문이다. 나를 본 것은 장길자를 본 것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뿐만 아니라 천주교에서는 그와 중간의 형태의 고백을 하고 있는데, 이것도 잘못된 것이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어머니는 될 수 있겠지만 하나님의 어머니는 아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육신은 마리아의 태중에서 만들어졌지만 예수님의 영은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예수님의 신성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며, 예수님의 인성은 동정녀마리아로부터 온 것이다. 그러므로 마리아는 인성을 취하신 예수님의 어머니는 될 수 있지만, 신성을 취하신 하나님의 어머니가 될 수 없는 것이다.
5. 나오며
그렇다. 예수님이 주님이시라는 고백은 초대교회의 매우 중요한 신앙고백이었다. 이러한 고백없이는 어느 누구도 세례를 받지 못했다. 그것을 구원의 표지처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다. 예수께서 주님이시다는 고백은 예수께서 하나님이시요, 예수께서 구약의 여호와이시다는 고백이었다. 그러므로 이것 때문에, 참된 믿음의 성도들이 유대인들과 로마정부로부터 온갖 핍박고 고초를 겪어야 했고 그리고 때로는 죽임을 당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초대교회는 이러한 신앙고백을 오직 예수님께만 돌렸다. 이것이 초대교회의 신앙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야말로 구약의 여호와께서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오신 하나님이신 것을 우리도 믿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런 고백을 하는 자가 구원을 받을 수 있고, 기도해서 풍성한 삶을 영위할 수 있으며, 악한 영들을 제어하고 살며, 여러 이단들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으며 살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니케아종교회의 이전에 가졌던 초대교회의 신앙을 그대로 갖기를 바란다. 아니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대로 믿어, 예수님이 하나님이요 구약의 나타나신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내 목숨이 끝나는 그날까지 사수할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