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았다는 것은 좋은 일인가 아니면 걱정해야 할 일인가? 어떤 이는 이스라엘 민족을 부러워한다. 어떻게 수천년전에 하나님을 알고서 하나님을 섬길 수 있었는지, 그들이 참 부럽다고 한다. 그들이 일치감찌 선택을 받았기 때문이다. 오늘날 믿는 이들 중에도 어떤 사역을 위해 먼저 부름을 받고 선택을 받은 이들이 있다. 또는 주님으로부터 다른 이들보다 더 많은 은사와 달란트를 받은 이들도 있다. 그럴 때면 그런 자들에게 부러운 시선을 보내기도 한다. 하지만 정말 그것을 부러워할 것인가? 오순절 이후 믿는 자들은 자신이 범죄해도 당장 자신에게 벼락이 떨어지지 않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므로 범죄한 자라도 회개에 그리 신경쓰지 않는다. 그렇다면 자신이 오순절 이후에 태어난 세대라고 고마워해야 하는가? 아니면 큰 경각심을 가져야 하는가? 오늘은 이러한 비밀에 대해 신구약에서는 어떤 사례가 있는지를 살펴보아 정리하는 시간을 갖자.
1. 들어가며
하나님께서 역사하는 방식을 보면 구약시대에는 잘못하면 가차없이 심판하시곤 한다. 아니 엄격한 잣대를 사용하신 것이다. 아니 한 번 실수를 용납하지 아니할 때도 아주 많았다. 왜 그랬을까? 아니 왜 그래야만 했던 것일까? 좀 더 봐주고 용서해주고 기다려주시면 안 되었을까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예를 들어보자.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 나오자 물이 없다고 불평하기 시작했고 먹을 것이 없다고 불평하였다. 그러다가 자신이 들어가야 할 땅에 정탐꾼을 먼저 보내겠다고 제안해온다. 그래서 허락해주었다. 하지만 10명의 정탐꾼의 부정적인 보고를 받은 후 그들은 완전히 딴 사람이 되어버렸다. 그들은 곧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더 낫겠다고 하나님을 원망했다. 차라리 이 광야에서 죽는 것이 더 낫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셨는가? 그들의 죄를 용서해주셨는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죄를 철저히 물으셨고, 애굽으로 돌아가겠다고 했던 모든 사람들을 남김없이 다 광야에 죽게 했다. 왜 하나님께서는 선택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처럼 엄하게 다루셨는가? 좀 더 관대하게 다루시면 아니 되었는가?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구약시대에 선택받았던 이스라엘 민족과 개인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왜 그렇게도 엄하게 대우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하여 오늘날 복음 안에서 자유를 누리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은 어떠하며 또한 어떻게 대처해야 훗날 땅을 치고 후회하지 않게 될 것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남들보다 더 선택받은 것에 대해 보통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오늘날 우리 믿는 이들 중에서 상당수는 유대인들이나 모태신앙인들을 부러워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선택받은 자들이기 때문이다. 선택을 받았기에 먼저 하나님을 믿을 수 있었고 신앙생활을 더 잘 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짜 그럴까? 하나님으로부터 선택을 받았기에,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더 큰 은혜를 받았을까?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그들이 비록 더 큰 은혜를 받았을른지는 몰라도 그들의 잘못에 대해서는 훨씬 더 엄한 꾸지람를 받았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선택받았다는 것은 구원바도록 예정받았다는 뜻은 아니다. 이는 어떤 민족이나 개인이 하나님으로부터 어떻게 쓰임받을 것인지를 먼저 택정함을 입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3. 하나님께서는 선민인 이스라엘 민족과 개인에게 대해 어떻게 대우하셨는가?
그런데 성경을 읽어보라. 구약시대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선민이기는 하지만 그들의 범죄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용서하지 않고 벌하신다는 것을 자주 발견하게 된다. 예를 들어보자. 먼저 민족적인 차원에서 보자. 민족적인 차원에서 선민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다. 하지만 그들이 범죄했을 때 하나님은 그들을 광야에 쓸어버리셨다. 그리고 개인적인 차원에서 살펴보자. 이스라엘의 영도가 모세도 실수한 적이 있었다. 한 번은 므리바의 반석을 명하여 물을 내라하셨다. 첫번째는 쳐서 물을 내었었다. 하지만 모세가 혈기를 내고 반석을 두 번씩이나 연거푸 친 적이 있었다. 그래서 반석에서 물이 나오긴 했다. 하지만 하나님은 모세의 잘못을 눈감아주지 않았다. 그것 때문에 일평생을 달려온 약속의 땅을 눈 앞에 보고도 그 땅을 밟아보지 못했다. 하나님께서 그의 잘못을 엄하게 물으셨기 때문이다.
어디 그뿐인가? 다윗을 보라. 다윗왕은 하나님께서 선택한 사람이다. 사울왕을 폐하고 다윗을 당신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선택하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윗도 왕이 된 후에 그만 범죄하고 말았다. 우리야의 아내를 범하고 말았으며 그 뒤 우리야장수를 죽이게 사주했다. 하지만 그 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어떻게 하셨는가? 그가 자신의 죄를 깊이 뉘우치고 토설했다. 그러므로 그의 죄를 용서해주시기는 하셨다. 하지만 그의 죄에 대해서 벌하는 것은 멈추지 않고 일평생 집행하셨다(삼하12:7~15). 그것도 아주 엄하게 책임을 물으신 것이다. 다윗은 비록 한 사람을 죽였고 한 여자를 범했지만 그는 자신의 자식중 4명(첫째 암논, 셋째 압살롬, 넷째 아도니아, 밧세밧의 첫아이)을 잃어야 했고, 자신의 후궁들이 자신의 셋째아들 압살롬에게 대낮에 능욕당하는 것을 지켜보아야만 했다. 그것이 바로 구약시대에 선택받은 민족이나 개인에 대한 하나님의 처우였다.
4. 하나님께서는 선민이나 선택받은 개인이 범죄했을 경우 왜 그들을 훨씬 더 엄하게 다루셨을까?
그렇다. 구약시대에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하실 때에 아무나 시키셨는가? 아니다. 민족이나 사람을 특별히 선택하여 그들을 사용하셨다. 하지만 한 번 선택받은 자가 범죄했을 때에 하나님께서 과연 그들의 죄를 눈감아준 적이 얼마나 있었는가? 거의 없었다. 그들에게 엄히 책망하셨고 그들을 벌하셨다. 왜 그랬을까?
첫째, 구약시대까지는 아직까지 메시야가 죄값(벌)을 담당하기 전의 시대이므로, 죄는 용서함을 받을 수는 있었으나, 벌은 면제를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출34:6~7, 삼하12:13~14).
출34:6-7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7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리라 그러나 벌을 면제하지는 아니하고 아버지의 악행을 자손 삼사 대까지 보응하리라
삼하12:13-14 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하매 나단이 다윗에게 말하되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 당신이 죽지 아니하려니와 14 이 일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원수가 크게 비방할 거리를 얻게 하였으니 당신이 낳은 아이가 반드시 죽으리이다 하고
그랬다. 구약시대에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선택하여 사용한 민족이나 사람에게 엄하게 다루셨다.
그리고 둘째, 하나님께서 구약시대에 선택된 백성과 개인을 엄하게 다루신 것은 하나님께서 온 우주에 공의를 세우셔야 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스스로 공의를 세우지 아니하시면, 하늘에서 범죄하고 쫓겨난 사탄과 그의 천사들을 심판하실 수가 없다. 범죄한 자에게는 그 죄의 댓가를 물으시는 것이 하나님이 하셔야 할 일이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일을 하실 때에 당신 혼자 일하지 아니하시고 때로는 어떤 특정한 집단이나 개인을 선택하여 그들로 하여금 일을 하게 하곤 했다. 그것은 그러한 일을 맡아서 수고할 때 아무래도 하나님을 더 잘 알 수 있고 범죄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았다. 자기가 선택받은 것에 대한 특권만을 내세울 뿐 하나님께서 선택한 자들로서 모델이 되지를 못했다. 그러므로 이들의 범죄할 때에 그들의 죄를 그냥 눈감아줄 수는 없었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는가? 사탄은 반드시 자신을 심판할 때 항거할 것이다. 동방의 의인이었던 욥도 참소한 마당에 사탄이 왜 하나님의 공의롭지 아니함을 참소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하나님은 반드시 공의로 심판하셔야 한다(신32:4, 시9:8, 계19:11). 그래서 구약시대에 선택된 백성에 대해 그 책임을 크게 물으신 것이다.
셋째, 하나님께서는 더 많이 준 자에게는 더 많이 달라고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은혜가 클수록 응답해야 할 부분도 많은 것이다. 적게 받은 자는 적게 달라고 하시지만 많이 받은 자는 많이 달라고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에 어울린다. 그러므로 눅12:47~48에서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다.
눅12:47-48 주인의 뜻을 알고도 준비하지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하지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48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할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
5. 신약시대에 달라진 경륜과 그럴수록 신약의 성도들이 힘써야 할 것은 무엇인가?
이것은 신약의 성도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신약의 성도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율법에 어긋난 행동을 하는 자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당장은 아니더라도 반드시 그 죄에 대한 책임을 물으실 것이다. 그러므로 죄를 짓고도 회개하지 않는 자는 반드시 자신이 그 죄값을 치러야 한다. 회개하면 주님께서 골고다 언덕에서 치르신 죄값으로 용서를 받겠지만, 회개하지 않는 자는 그 죄값을 고스란히 자신이 받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약의 성도들 중에서 하나님의 선택받아 쓰임받았던 자들 중에는 자신이 범죄했을 경우 자신에게 징계가 내려지는 것을 보고 기뻐하는 이들도 있었다. 왜냐하면 신약시대에는 당장 징계가 내리지 않는 시대인데도, 하나님께서 징계를 내려주시어 자신을 정신차리게 만들어주니 감사할 일이 되는 것이다.
사실 신약의 성도 가운데 가장 크게 쓰임을 받은 사람이 있다면 그는 누구겠는가? 단연코 사도바울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택하신 하나님의 그릇이었기 때문이다(행9:15~16).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두고두고 더 쓰시고 싶어 하셨기에, 그의 죄값을 더 엄히 물으셔야했다. 아니 그에게 일평생 죄값을 물으셨다. 사실 예수님을 믿기 전에 그는 어떻게 살았던 자였는가? 그는 예수믿는 자를 매우 핍박한 자였고 스데반집사를 죽이는데 앞장선 인물이었다. 그러던 그가 주님께 선택을 받아 사역하게 된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에게 불어닥친 어떤 고생과 고난이라도 결코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을 감사했다. 그것은 이전에 자신이 주님의 몸된 교회를 찢었고 주님의 몸에 고통을 안겨 주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삶은 사실 영욕이 교차하는 삶이었다. 그렇게 위대한 사도로 쓰임을 받았던 사도바울이었지만, 그의 몸에는 죽을 때까지 사탄의 천사 곧 귀신이 살았었다(고후12:7~9). 그리고 그의 사명을 완수할 때까지 고난은 그에게서 떠나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는 죽는 그날까지 감사하며 살았다. 그것마저 없었더라면 그는 교만할 사람이었고, 자신을 높일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회개치 못하면 사도바울이라도 실컷 주님의 일하다가 지옥에 떨어질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사실 신약시대는 율법시대가 아니다. 그러나 율법시대에는 율법규정에 따라 벌을 받아야 하는 시대였다. 잘못하면 벌을 받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바로 그것이 구약시대의 특징이다. 하지만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구속사역을 완성하시어, 율법에 기록된 모든 저주(벌)을 다 받으신 후에는 상황이 달라졌다. 그러므로 오순절 성령강림이후에 출생한 하나님의 자녀들은 범죄해도 즉각적인 처벌이 내리지는 않는 것이 태반이었다. 왜나하면 예수께서 죄인이 받을 벌까지도 대신 담당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순절 이후 믿는 자는 어떠한 죄를 지었든지 회개하면 자신이 지은 죄도 용서받고 벌까지도 면제받을 수가 있었다. 그러나 이것이 오히려 더 큰 문제가 된다. 왜냐하면 자신이 범죄해도 당장 자신에게 하나님의 징계가 내리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신자들 중에는 자신이 범죄해도 회개하지 않는 이들이 있다. 나중에 회개하겠다고 마음만 품고 있을 뿐이다. 당장 자신에게 어떤 처분이 내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그는 죄를 지어도 괜찮은 모양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는 죽는 날, 한꺼번에 지옥형벌이 자신에게 들이닥칠 것임을 잘 모른다.
사실 오순절 이후에는 믿는 자들에게 성령이 오셨기에 구약시대보다는 훨씬 더 자유의지를 잘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러한 자유의지를 죄를 짓는 데에 사용한다면, 자신이 죽는 날 그가 받을 형벌은 어마어마할 것이다. 그러니 지금 현세에 죄를 지었는데도 어려움이 없다고 기뻐하지 말라. 오히려 더 큰 심판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약의 성도들은 범죄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당장 자신에게 처벌이 내리지 않는 것을 두려워해야 한다. 율법에 따라 당장 벌을 받을 자처럼 행동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아니하면 오순절 이후에 탄생한 성도들은 그만 방종한 삶을 살고 말 것이다. 그러다가 오만방자한 행동까지도 행하면서 버젓이 자신은 의로운 자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면 죽을 때에 그는 단번에 지옥행이다. 지옥에 들어가서 비로소 후회하겠지만 그때는 이미 늦은 시간이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말한다. 진리의 지식을 받은 후에 고의로 죄를 짓게 된다면, 다시는 속죄하는 제사가 그에게 없을 것이며, 오직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그를 태울 맹렬한 불만 있을 것이라고 말이다(히10:26~27).
6. 나오며
그러므로 성도들이여, 자신이 남들보다 더 선택받았다고 우쭐대지 말라. 그럴수록 자신에게 심판은 가혹하게 내려질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선택받은 이는 하나의 모델이 되어야 하기에, 작은 실수나 잘못도 엄하게 처분을 받을 수밖에 없다. 더 많이 받은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더 많이 달라고 하신다고 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예수님의 12제자들은 70명의 제자들보다 더 선택받은 자들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같은 3명의 제자는 나머지 9명의 제자들보다 더 선택받은 자들일 것이다. 그런데 그중에 야고보와 요한이 자신의 지위와 신분을 이용하여 예수님에게 영광의 자리를 요구하고 말았다(막10:35~45). 그후 어떻게 되었는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그 장소를 멀리 떠났던 야고보는 다른 모든 제자들보다 먼저 자신의 목숨을 주님을 위해 내어놓아야했다(행12:2). 그렇다. 남들보다 더 많이 선택받을수록 하나님의 심판은 그에게 크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심판의 잣대는 더 엄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선택받은 자일수록 더 두렵고 떨림으로 자신의 사역을 감당해야 한다. 잘못 감당하면 상급은 커녕 천국에 못들어갈 수도 있는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으니 말이다. 건투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