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 가운데 유다서는 평신도가 쓴 책이다. 그렇지만 평신도가 쓴 편지가 어떻게 정경 안에 들어왔는지 생각해볼 때, 아마도 그가 예수님의 친동생이라는 것도 한 몫 했을 것이다(물론 신약정경에 포함된 모든 성경책은 다 통일성, 영감성, 사도성, 회람성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유다는 예수님의 친동생이었지만 그는 예수님에 대해 "[만물의] 주재" 즉 "하나님"이라는 칭호를 사용했다(유1:4). 왜냐하면 초대교회 성도들은 이미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유다서에 의하면, 초대교회 성도들은 하나님에 대해 "구주(구원자)"라는 칭호를 사용하고 있음을 살펴볼 수 있다(유1:25). 그런데 사실 예수님에 대해서 "[만물의] 주재", 하나님에 대해서 "구주"라는 칭호는 뒤바뀐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렇다면 왜 거꾸로 이런 명칭을 사용하고 있는 것인가? 이제, 초대교회 성도들이 가졌던 신관에 대한 차근차근 살펴보자.
1. 들어가며
예수님은 누구신가? 공생애기간에 고백되어진 신앙고백은 베드로의 신앙고백이다. 그는 주님을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다(마16:16). 하지만 주님은 육신을 입은 채 계속 이 세상에 계시지 않았으며 구속사역을 완성하신 뒤에는 하늘로 올라가셨다. 그분은 이제 무소부재한 주 하나님이시요 전능자가 되신 것이다. 그러므로 부활하신 예수님의 신분을 하나님의 아들로서만 가둬놓을 필요는 사실상 없다. 그분의 실제를 그대로 표현하는 것이 옳은 것이다. 그렇다면 A.D.70~80년경, 평신도였던 예수님의 친동생 유다는 예수님에 대해 어떤 칭호를 사용하고 있었던 것일까? 그는 예수님의 육신의 친형제 중 한 사람이다. 아마도 그는 예수님의 셋째 내지는 넷째 동생이었을 것이다(마13:55,막6:3).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예수님을 자신의 형으로 결코 말하지 않았으며, 그분의 종이라고도 자신을 말했다. 그렇다면 유다는 A.D.70~80년 당시 예수님을 어떤 존재로 믿고 있었으며, 하나님은 또 어떤 존재로 믿고 있었는지를 낱낱이 살펴보고자 한다.
2. A.D.70~80년 당시 초대교회는 "예수님"을 누구라고 고백했는가?
A.D.70~80년 당시 초대교회는 예수님을 어떤 분이라고 고백했을까? 예수님의 친동생 유다는 예수님에 대해서 놀라운 칭호를 사용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초대교회 성도들이 알고 있던 예수님에 대한 신앙고백이었을 것이다. 유다는 육적으로 볼 때 예수님이 자신의 형님이었지만, 그는 예수님을 "홀로 하나이신(유일하신) 주재"라고 불렀다(유1:4). 여기서 "주재"라는 말은 헬라어로 "데스포테스"라는 단어로서, "소유주(owner)"라는 뜻이다. 즉 유다는 자신의 형님에 대해, 만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주인이자 주권자라고 칭했던 것이다. 그런데 사실 이러한 칭호는 원래는 예수님에게 사용할 수 있는 칭호가 아니었다. 그것은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에게만 사용하던 칭호였기 때문이다(눅2:29, 행4:24, 계6:10). 하지만 초대교회 성도들은 예수님을 "만물의 주재"라고 표현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보자. 눅2장에 보면, 시므온선지자가 아기예수님을 안고서 하나님을 찬송하면서, "주재(데스포테스)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편안히 놓아주시는도다"라고 기도했다(눅2:29).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주재"라고 표현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예수님의 12사도들도 감옥에서 풀려나와 기도하면서 이렇게 기도했다. "대주재(데스포테스)여, [당신은] 천지와 바다와 그[것들] 가운데[있는] 만물을 지으신 이시요(행4:24)". 더욱이 예수님 부활승천 이후 천국에 들어간 성도들도 천국의 제단 아래에서 기도할 때에, 보좌에 앉아계신 하나님을 향하여 이렇게 기도했다.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데스포테스)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갚아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계6:10)" 그렇다. 원래, "주재"라는 호칭은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에게만 사용할 수 있는 칭호였는데, 초대교회 성도들은 그 칭호를 예수님에게 사용하는 데에 주저하지 않았던 것이다. 왜 그랬을까? 그 이유는 초대교회 성도들이 예수님을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이자, 다스리시는 주권자로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하나, 우리가 유다서를 읽을 때에 충격받을 내용이 하나 더 있다. 그것은 유1:5에 나온다. 이 말씀에 따르면,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출하신 분이 "주님"이라고 쓰여 있다. 우선 개역개정성경을 살펴보자. "주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시고(내신 후에), 후에(두번째로)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멸하셨으며(유1:5)" 그런데 헬라어원문(네슬-알란트28판)을 의하면,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출해 내신 분은 "주님"이 아니라, "예수님"이시다. 즉 "예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시고..."라고 되어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후대 사본에는 "예수님"이라는 단어대신에 "주님" 혹은 "하나님"으로 바뀌어 있다.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출했던 분은 여호와이셨기에, 누군가 "예수님"을 거기에서 빼내고 거기에 "주님" 혹은 "하나님"이라는 칭호로 바꿔치기 한 것이다. 특히 이 편지가 히브리어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여호수아"로 바뀐 것도 더러 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히브리어로는 "예슈아"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예수"라고 번역할 수 있고, "여호수아"라고도 번역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확히 찾아낸 권위있는 초기사본에 의하면, 그분은 바로 "예수님"이라고 되어 있다.
그렇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자기들이 믿었던 예수님을 하나님을 대신하는 호칭인 "주재"라고 부르기에 마다하지 않았으며, 구약성경에 나오는 "여호와"가 곧 "예수님"이었다고 하는 것에 대해 주저하지 않았던 것이다. 왜냐하면 초대교회는 하나님을 한 분으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신데, 그분이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여호와라고 자신을 계시하셨고, 신약시대에는 육신을 입고 아들의 신분으로 오셨다는 사실을 알고 이었기 때문이다.
3. A.D.70~80년 당시 초대교회는 "하나님"을 누구라고 고백했는가?
A.D.70~80년 당시 초대교회는 하나님을 어떤 분이라고 고백했을까? 유다서에서 유다는 하나님을 "구주(소테르, Saviour=구원자)"라고 고백하고 있했다. 초대교회는 하나님을 "우리[의] 구주 홀로 하나이신(유일하신) 하나님(유1:25)"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그런데 좀 이상하지 않는가? "구주(구원자)"라는 호칭은 아들이신 예수님에게 사용해야 할 호칭인 것이지, 아버지 하나님에게 붙혀서 사용할 호칭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구주"라는 호칭을 천사가 태어나실 아기 예수께 붙혀준 신성한 호칭이 아니었던가?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소테르)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눅2:11)"
그런데 특이한 점은 구주(구원자)로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직접 보고 만져보았던 사도들은 "구주"라는 호칭을 예수님에게만 사용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하나님에게 "구주"라는 명칭을 사용한 적이 없다. 특히 베드로는 단 한 번도 "구주"라는 호칭을 하나님에게 붙혀서 사용한 일이 없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그러한 호칭을 사용했을 뿐이다(벧후1:1,11,2:20,3:2,18).
벧후1:1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며 사도인 시몬 베드로는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함께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벧후1:11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
벧후2:20 만일 그들이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
벧후3:2 곧 거룩한 선지자들이 예언한 말씀과 주 되신 구주께서 너희의 사도들로 말미암아 명하신 것을 기억하게 하려 하노라
벧후3:18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그에게 있을지어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달랐다. 그는 "구주"라는 호칭을 예수님(엡5:23,빌3:20,딤후1:10,딛1:4,2:10,13,3:6)에게도 사용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딤전1:1,2:3,4:10,딛1:3,2:10,3:4)에게도 동시에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는 그의 서신서에서 무려 6번이나 "구주"라는 호칭을 하나님에게 사용했다.
딤전1:1 우리 구주 하나님과 우리의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딤전2:3 이것이 우리 구주 하나님 앞에 선하고 받으실 만한 것이니
딤전4:10 이를 위하여 우리가 수고하고 힘쓰는 것은 우리 소망을 살아 계신 하나님께 둠이니 곧 모든 사람 특히 믿는 자들의 구주시라
딛1:3 자기 때에 자기의 말씀을 전도로 나타내셨으니 이 전도는 우리 구주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내게 맡기신 것이라
딛2:10 훔치지 말고 오히려 모든 참된 신실성을 나타내게 하라 이는 범사에 우리 구주 하나님의 교훈을 빛나게 하려 함이라
딛3:4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이 나타날 때에
왜 사도바울은 "구원자(구주)"라는 명칭을 인류를 구원하러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님에게만 사용하지 않고,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에게도 동시에 사용했던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그가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 이미 부활승천하시어 무소부재한 상태에 계신 예수님을 만나뵈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행9장). 그리고 그는 구약성경을 통탈하고 있는 자였기에, 구약의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호칭으로 "구주(구원자)"라는 명칭이 사용되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에게도 "구주(구원자)"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않았을까 추측해 본다.
4. 예수님에게 "[만물의] 주재"라는 칭호가, 하나님에게는 "구주"라는 칭호가 사용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그럼, 예수님에게는 만물의 주재, 하나님에게는 구주라는 칭호가 사용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위에서 열거한 사실을 종합해보면, 우리는 예수님과 하나님에게 사용했던 칭호가 혹시 서로 엇갈린 것이 아닌가 생각할 수 있다. 즉 예수님에게만 "구주"라는 칭호가 사용되어야 하고, 하나님에게만 "[만물의] 주재"라는 칭호가 사용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상호교차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초대교회 성도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고백을 주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구약의 여호와께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예수님으로 오셨기에, 여호와에게도 "구주"라는 명칭을 사용한 것이다. 그러므로 초대교회 성도들은 출애굽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을 구출하신 분을 여호와라고 말하지 않고, 예수님이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5. 나오며
우리는 하나님의 칭호에 대해서도 통전적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 구약시대에는 홀로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계시하실 때에는 언제였을까? 그것은 출애굽시대로서(출6:2~3) 그때에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여호와"라고 계시해 주셨다(출3:14~15). 그러나 출애굽 이전까지 하나님은 자신을 "전능자"라고 말씀하셨고 사람들도 그렇게 불렀다(창17:1,28:3). 하지만 그분의 칭호로서 출애굽시대 이후에는 "구원자"로도 계시하셨다(사43:3,11,44:6,49:26). 그러다가 정말 전능자께서 인류를 구원하시러 사람으로 오신 것이다(사9:6). 아니 아들로 오신 것이다. 그러므로 아들에게는 당연히 "구주(구원자)"라는 칭호가 붙혀지게 되었다. 하지만 아들이 육신을 입고 있을 때, 그분에 대한 대표적인 칭호는 구주, 메시야,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하지만 그분이 죽고 부활했을 때에 제자들은 그분이 무소부재하시는 "주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곧바로 알게 되었다(요20:28). 그러므로 초대교회 성도들은 예수님에게도 "[만물의] 주재"라는 표현을 주저하지 않고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여호와나 예수님이나 다 하늘에서는 한 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구약의 여호와라는 이름 대신에, 예수님이라는 이름을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A.D.325년 니케아회의와 381년 콘스탄티노플회의를 거치면서 하나님은 아버지로, 예수님은 아들로 명명되셨다. 그러자 그 뒤로는 예수님을 여호와라고 부르지 못했다. 다만, 예수님을 하나님과 같은 분이라고 인정하고 불렀을 뿐이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초대교회의 신앙을 회복해야 한다. 천국에서는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만 계신다. 다만 우리 인류를 구원하러 이 세상으로 들어오시면서 아버지와 아들로 분리하여 나타나 사역하셨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한 분이셨기에, 나를 본 자를 아버지를 본 자요(요14:9), 나와 아버지는 하나라고 말씀하셨다(요10:30). 그러므로 A.D.90년경 사도요한은 아들을 시인하는 자는 아버지도 가지고 있는 것이며, 아들을 부인하는 자는 아버지도 가지고 있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던 것이다(요일2:23).
천국에 가면 우리는 결코 두 분 하나님을 만나지 않는다. 한 분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사실 하나님은 영이기에 때문에 우리는 그분을 영원히 볼 수 없다. 하지만 우리 가운데 나타나셨던 하나님이 곧 예수님이시고 다시 하늘에 가신 분이 예수님이시니, 우리가 천국에서 하나님을 보게 된다면 그분은 바로 예수님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보좌가 한 중앙에 있고, 그 보좌 오른편에 예수님의 보좌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상상이다. 천국에는 하나님의 보좌가 단 한 개 뿐이기 때문이다(계22:1,3). 그리고 거기에 예수님께서 앉아계시기 때문이다(계21:5~6,22:13,16). 요한계시록에 보면, 다시 오실 분은 전능하신 주 하나님이라고 나온다(계1:8). 하지만 그분이 곧 예수님이라고 말씀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계22:20~21).
2019년 1월 27일(주일)
정병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