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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투브 주소 https://youtu.be/6xAOE493T4g
날짜 2019-09-29
본문말씀 요한복음 1:1~14(신약 252면)
설교자 정병진목사
주제어 지혜문학,지혜문학의한계,구약의지혜,신약의지혜,지혜의선재성,로고스,헬라철학,말씀의선재성,하나님의성품,한분하나님,삼위일체

1. 들어가며

  예수님은 구약의 지혜문학에 나오는 선재한 "지혜"인가? 아니면 헬라철학에서 언급하고 있는 "로고스(말씀)"인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그렇다"라고 말할 수는 있겠으나, 정확히 말하면 "아니다"라고 대답해야 옳다. 왜 그런가? 그것은 구약의 지혜문학의 "지혜"와 헬라철학에 나온 "로고스"와 예수님은 연속성에 있기도 하고 불연속성에 있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질문이 왜 중요한가? 우리는 이러한 질문이 구약시대에 예수님은 어디에 계셨는가에 대한 답변이 될 수 있으며, 오늘날 자신을 재림 예수 내지는 보혜사 성령을 주장하는 이들에게 그들의 주장이 무엇이 틀렸는지를 이야기해줄 수 있는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과연 예수님의 구약의 지혜문학에 나오는 '지혜'이며, 헬라철학에 나오는 '로고스'인가?

 

2. 구약의 지혜문학과 그 한계는 무엇인가?

  구약의 지혜문학이란 구약성경 중 시가서들 가운데, "욥기, 잠언, 전도서"의 구약성경을 통치하여 일컫는 말이다. 이는 방금 언급한 3개의 구약성경에서 지혜에 관한 말씀이 집중적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지혜는 과연 어디서 온 것인가? 그것은 지혜를 창조하신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지혜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다고 하겠다. 그렇다면 지혜가 임한 자에게 주어지는 축복은 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이 땅에서의 부귀영화의 재물의 축복이다(잠8:12,17~21). 왜냐하면 지혜는 본래 하나님의 창조적인 지혜와 관련되어 있으며, 없는 것을 있게 만들어내는 지혜는 반드시 부를 창출해낼 수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구약성경의 지혜서에 나오는 지혜는 이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얻게 해 주는 지혜이며, 물질적인 풍요를 가져다 주는 지혜다. 그러므로 구약의 지혜는 사람의 영혼을 위한 축복들 곧 죄사함과 구원같은 것을 가져다 주지 못한다. 왜냐하면 구약성경의 지혜서들 속에는 이 세상을 구원하러 오실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의 말씀이 전혀 들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특별히 우리는 예수께서 자신에 관하여 기록된 구약성경을 인용하실 때에, 단 한 번도 구약의 지혜문학에 있는 말씀 곧 욥기와 잠언과 전도서의 말씀을 인용하신 일이 없으셨다. 왜냐하면 장차 죄 가운데 있는 인류를 구원하러 오실 메시야에 관한 예언이나 예표를 구약의 지혜문학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메시야에 관한 구약의 성경말씀들 중에서 인용한 성경은 모세의 율법(토라)와 선지자의 글들(느비임)과 시편 뿐이었다(눅24:44). 고로 구약의 지혜문학의 한계는 구약의 지혜문학 안에서 인류를 구원하러 오실 메시야에 대한 말씀을 찾아낼 수 없다는 것이다.

 

3. 구약의 지혜는 선재하신 그리스도인가?

  그렇다면, 구약성경의 지혜서들 가운데 잠언8장에 나오는 태초 전에 하나님께 함께 있었던 "지혜"는 과연 무엇을 가리키는가? 그것은 과연 신약의 예수께서 선재하신 것을 대신하는 것인가? 어떤 이는 그렇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정확히는 아니라고 해야 한다. 왜냐하면 구약의 지혜에는 오실 메시야에 관한 말씀이 전혀 들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게 하는 일반적인 지혜만 들어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잠언서의 저자인 솔로몬은 그러한 지혜를 한층 높여서, 지혜가 하나님과 함께 창세전에 있었다고 기록해두고 있다(잠8:22~31). 이것을 일컬어 "지혜의 선재성"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구약성경을 연구하는 어떤 신학자도 구약에 나오는 지혜를 신약의 예수님이라고 언급하지 않는다. 구약의 지혜는 일반적인 지혜일 뿐 사람의 영혼을 살리데 필요한 참된 하늘의 지혜 곧 죄사함과 구원을 주는 지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구약의 지혜문학에 나오는 "지혜"는 어떤 것이라고 생각해야 하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많은 속성들 가운데 하나로서의 "지혜"라고 생각해야 한다. 그러므로 구약의 지혜문학서를 읽으면서 거기에서 메시야를 발견하려는 노력은 사실상 하지 말아야 한다.

  그렇다면, 구약시대에 예수님은 어떻게 선재하고 계셨는가? 그것은 하나님으로 선재하고 셨다고 해서 가장 옳은 표현이 될 것이다. 사실 예수님의 선재성에 관한 말씀은 요한복음 8장에서 예수님과 유대인들과의 대화 가운데 고스란히 들어 있다. 그때에 선재하신 그리스도는 이미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존재하고 있었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예수께서는 구약시대에 자신이 "지혜"로 선재하고 있었다고 말하기보다는 하나님으로 선재하고 있었다고 해야 하는 것이다. 아니 정확히 말씀드리자면 예수님은 구약시대 한 분 하나님의 생각과 계획 속에 선재하고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세상 안으로 들어오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기 때문이다(딤전3;16).

 

4. 헬라철학의 "로고스"와 요한복음 1장에 나오는 "말씀"은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헬라철학에서 "로고스"는 어떤 개념이었을까? 그것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이해하고 있는 의미로서 "로고스"가 아니다. 헬라철학에서 있어서 "로고스"는 어떤 "원리" 혹은 "이성"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약성경에서 로고스는 예수님을 대신하는 말로서 발전적으로 쓰이고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되어서 헬라철학에서 온 "로고스"라는 개념이 교회에서는 "예수님"을 지칭하는 용어가 된 것인가?

  신약성경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로고스)"이 육신이 되신 분이라고 언급한다(요1:14). 고로, 요한복음에 나오는 "말씀(로고스)"은 예수님을 대한 또 다른 표현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예수님을 대신하는 용어로서, 특별히 "말씀(로고스)"를 사용하게 된 것은 그 말씀이 구약시대에도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말씀에 따라 모든 만물이 다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즉 구약시대에도 말씀이 있었고, 이 말씀에 따라 천지만물이 다 창조되었는데, 신약성경에 보면, 예수께서도 구약시대에 선재하고 계셨고, 그분에 따라 온 천지만물이 창조되었다고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요1:3).

  그렇다면, 요한복음 1장에 나오는 말씀(로고스)은 과연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뜻하는가 아니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셨던 예수님을 뜻하는가? 요한복음 1:1~4의 말씀을 살펴보자. 거기에 "로고스"는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처럼 나온다. 하지만, 만약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고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과 말씀이 각각 분리되어 있다고 생각하게 되고, 그것은 하나가 아니라 둘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왜냐하면 "함께"라고 번역된 전치사는 어떤 개인이나 하나만을 지칭할 수 없는 전치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말 개역한글성경의 본문처럼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1:1)"는 말씀에 대한 번역은 재고해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존재방식과 그리스도의 선재성을 설명하기에는 조금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냥 한글개역성경만으로 본다면, 하나님은 말씀과 함께 계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말씀도 하나님이시니까, 하늘에는 "하나님" 한 분이 계시고 또한 거기에 함께 "말씀"도 같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과 말씀이신 하나님, 이렇게 둘이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버린다. 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이해다. 하나님은 한 분으로 존재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존재방식에 대해 정확히 이해하고 요1:1을 번역하려는 사람은 "로고스"를 하나님의 별개의 또 다른 존재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나온 말씀으로 본다. 그러므로 하나님으로부터 나왔던 말씀이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렇다. 헬라어원문에 따르면 요1:1에 나오는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분이라고 해석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과 "말씀", 이렇게 둘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과 함께"라는 전치사는 헬라어로 "프로스"라는 단어인데, 이 단어는 뒤에 나오는 대격의 명사와 함께 쓰여, 대부분 "~에게서"라는 번역을 취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성육신하실 때에 예수님은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신 분이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예수께서 성육신하신 것은 하나님의 생각과 계획에 선재하고 있던 바로 그분(한 분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으신 것이다.

 

5. 구약의 "지혜"와 신약의 "말씀(로고스)"는 어떻게 이해하는 것이 옳은가?

  고로, 구약의 지혜서에 나오는 "지혜"이든지 그리고 헬라철학에서 가져왔으나 한층 더 높은 의미로 교회 가운데 사용되었된 "말씀(로고스)"이라는 두 단어는 "선재하신 그리스도"라고 표현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속성의 표현으로 이해한다면 훨씬 더 이해하기 쉬울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구약의 지혜문학에 나오는 "지혜"는 일반적인 지혜만 가리킬 분, "그리스도"를 가리키지 않기 때문이요, 헬라철학에서 가져온 "로고스"는 그 개념이 단지 "원리"나 "이성"이라는 뜻을 훨씬 뛰어넘어서,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님을 가리키는 표현이요, 창조주로서 선재하신 예수님에 대한 한층 더 높여진 표현이기 때문이다.

 

6. 나오며

  지혜는 좋은 것이다. 하지만 구약적 의미로서의 지혜란 결국에 우리에게 많은 부분에서 실망을 가져다 주고 말 것이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우리 죄인들에게 구원을 줄 그리스도에 관한 약속이 전혀 들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헬라철학에서 가져온 "로고스'사상만으로는 성도들이 그것을 통해서 생명을 얻으며, 로고스의 실체가 예수님이라는 것을 발견하기가 힘들다. 그러므로 구약에 나오는 "지혜"라는 개념을 이해할 때, 선재하신 그리스도로 이해하기보다는 하나님의 속성들 중의 하나로 인식한다면 이해하기가 훨씬 좋을 것이다. 그러므로 "로고스"라는 개념도 헬라철학의 작고 단순한 개념이 아니라는 것도 알아야 한다. "로고스(말씀)"라는 개념도 이제는  교회들 가운데서 그 의미가 한층 더 강화되었고 풍성하게 되어서, 그것이 곧 "예수님"이라는 개념으로 발전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약성경에 나오는 "지혜"나 "로고스"는 선재하신 그리스도라고 보기보다는 하나님의 속성들의 다른 표현들이라고 이해하면 좋을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사람들로부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리워졌지만 그분은 하나님 자신의 또 다른 표현이었다는 것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이해는 우리가 장차 천국에 들어갔을 때, 거기에는 하나님께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세 위격으로 존재하지 않고 오직 한 분 하나님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훨씬 이해하기가 쉬울 것이다. 그리고 재림예수나 보혜성령을 사칭하는 이들(이만희, 안상홍, 장길자 등)로부터 그들이 얼마나 궤휼꾼이며 이단인지를 금방 알 수가 있게 될 것이다.

 

2019년 09월 29일(주일)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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