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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투브 주소 https://youtu.be/rTJLMimO5MA
날짜 2020-07-26
본문말씀 누가복음 18:9~14(신약 125면)
설교자 정병진목사
주제어 칭의와구원,시작으로서의칭의,인침으로서의칭의,완성으로서의칭의,칭의의완성,아브라함의칭의과정,바울의칭의,예수님의칭의관,불안한칭의,온전한칭의,완전한칭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칭의를 어떻게 받느냐고 물어보면, 대부분은 "믿음"으로 얻는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칭의관이 아니라고 한다면 어떻게 반응할까? 우리는 성경읕 볼 때 한쪽 면만을 보아서는 아니 된다. 통전적으로 성경을 보아야 한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칭의는 믿음으로 받는 것이 맞지만 과연 믿음으로만 받는 것인가? 여기, 진정 성경적인 답변이 있다. 온전한 칭의, 바로 그것은 무엇인가?

 

1. 들어가며

  칭의란 무엇인가? 칭의란 보편적으로 우리 인간은 의롭지 아니하지만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하여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해주심으로 우리를 의롭다고 칭해주시는 것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칭의는 과연 언제 얻게 되는가? 또한 칭의는 오직 믿음으로 얻는 것인가 아니면 다른 요소가 더 있어야 하는 것인가? 그리고 칭의는 언제 하나님께서 인정해주시는 상태가 되는가? 그리고 내가 칭의를 받았다는 것은 무엇으로 확인할 수 있는가? 그래서 오늘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성경적인 답변을 찾아서 정리해 보고자 한다. 과연 칭의는 오직 믿음으로 얻는 것인가?

 

2. 바울의 칭의관은 어떤 것인가?

  바울은 그의 서신인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사람의 의롭게되는 것(칭의)에 관하여 이렇게 말했다. 

롬3:28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갈2: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그러므로 이 말씀만을 들었던 사람은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되는 줄로 믿어버린다. 특히 갈2:16에서는 "오직 믿음"이라는 말이 나오고 있으므로, 칭의는 오직 믿음으로 되는 줄로 알 것이다. 그러나 갈2:16를 헬라어원문으로 보면 "오직"이라는 단어가 실은 없다. 그렇지만 한글성경만을 본 사람은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오직 믿음으로 되는 줄 안다. 

  그렇다면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어떻게 함으로 의롭게 되는가?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하여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됨으로 의롭다함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게 되는 데에는 그리스도 없이는 불가능하다. 오직 그리스도의 속량으로 인하여 죄있는 우리가 죄없다고 칭함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서 의롭다함을 얻을 육체는 없다(롬3:20). 그렇다면 단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칭의는 다 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더 이상 다른 그 어떤 요소도 필요없는가?

 

3. 예수님의 칭의관은 어떤 것인가?

  우리는 바울의 칭의관을 살펴볼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는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데에 예수께서는 어떠한 말씀을 하셨는가? 그것은 놀랍게도 믿음만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다른 요소 한 가지를 더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대부분으로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을 간과하고 있을 것이다. 칭의는 믿음으로써 얻는 것이 분명하지만 그것만으로서는 온전하다고 할 수 없음을 예수께서 가르쳐준 칭의관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사람이 어떻게 칭의(의롭다함)을 얻게 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는가? 그것은 누가복음 18장에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 가운데 나온다(눅18:9~14).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있고 다른 사람은 멸시하는 바리새인들에게 들으라고 예수께서 한 비유를 들으셨다. 그것은 두 사람의 기도에 관한 것이었다. 그중 한 사람은 바리새인이었다. 그는 따로 서서 거만하게 기도하고 있었다. "하나님이여, 나를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하는 자들과 같이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눅18:11~12)" 실로 이 사람의 행위는 틀린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는 율법에 하지 말라고 하는 규정을 너무나 잘 준수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금식과 십일조도 잘 드리고 있었다. 아니 율법의 규정들보다 더 많은 것을 행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율법에는 금식하라는 규정은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율법에는 다만 7월 10일 속죄일에 "스스로 괴롭게 하라"는 말씀만 나와 있다(레23:27). 그렇지만 유대인들은 이 말씀을 금식하라는 말로 해석하여 지금도 실천한다. 그런데 비유에 등장하는 바리새인은 그것 말고도 이레(일주일)에 두 번씩이나 금식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소득의 십일조도 드리고 있었다. 그러나 율법규정에 의하면, 곡식과 과실의 십일조와 우양의 십일조를 드리라는 규정은 있어도, 소득의 십일조까지 전부 다 드리라는 규정은 없다(레27:30~33). 그런데 당시 바리새인들은 회향와 박하와 근채의 십일조까지 드리고 있었던 것이다(마23:23). 그러니 율법에서 규정하고 있는 이상의 행위들을 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실로 거만하게 행동했다. 으시댔다. 그리고 그것을 하지 못하는 자들을 멸시했다. 자기는 매우 의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가 기도하고 있는 내용을 들어보면, 그는 자기를 자랑하려고 기도하러왔는지, 하나님께 기도하러 왔는지 알 수가 없다.

  그런데 세리는 어떠했는가?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한 채 가슴을 치면서 기도하고 있었다. 그는 통회하는 심정으로 기도하고 있었고, 얼굴을 들지 못한 채 죄인된 마음으로 기도하고 있었다. 그는 이렇게 기도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속죄를 베풀어 주십시오).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18:13)" 그의 기도의 내용을 살펴보면, 그것은 2가지였다. 첫째는 "오직 하나님만 내 죄를 용서해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곧 내게 속죄를 베풀어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은 오직 주님 뿐이십니다."라고 믿었던 것이다. 둘째는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 솔직하게 고백했다. 그렇다. 그는 속죄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자신의 죄를 겸손히 고백하는 회개의 기도를 드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주님의 평가는 어떠했는가? 저 바리새인이 아니라, 이 사람 세리가 의롭다하심을 입은 채로 그의 집으로 내려갔다고 말씀하셨다(눅18:14). 그렇다. 자신을 의롭다하고 믿고 있는 바리새인이 의롭다 함을 입은 것이 아니었다. 자신은 죄인이라는 것을 겸손히 고백하고 용서를 빌었던 세리가 의롭다하심을 받고 집으로 돌아간 것이다. 우리는 이상의 사실을 통하여, 칭의가 믿음만으로 받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것도 예수께서 직접 들려주신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렇듯 예수께서는 회개없는 칭의는 온전하지 않음을 분명하게 말씀하신 것이다. 칭의에는 반드시 진실한 회개가 뒤따라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칭의관은 하나님만이 자신의 죄를 용서해줄 수 있다는 믿음과 겸손히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회개가 있어여 한다는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4. 바울의 칭의관은 예수님의 칭의관과 다른 것인가?

  그렇다면, 바울의 칭의관과 예수님의 칭의관은 다른 것인가? 얼핏 보기에는 바울이 실수한 것 같이 보인다. 사실 어떤 누구라도 예수님의 말씀을 능가할 자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보지 못한 것이 한 가지 더 있다. 그것은 사도바울도 로마서 4장에서, 회개가 동반될 때에 칭의가 하나님께서 인정해주시는 칭의가 된다는 것을 언급했다는 사실이다. 그 말씀은 로마서 4:11에 나온다. 

롬4:11 그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그들도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렇다. 사도바울도 아브라함이 99세 때에 할례를 받은 것은 그가 85세 때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라고 분명히 언급하였다. 아브라함이 부르심을 받고 75세 때에 갈대아우르를 떠나 왔지만, 그의 나이 85세 때에 비로서 그의 믿음을 의로 인정받게 되었다. 그러한 사실은 창세기 15장에 나오는데, 그는 그때 자손과 땅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받기는 받았지만 10년이 넘도록 자식이 없게 되자, 자신의 종 다메섹사람 엘리에셀을 양자로 삼으려고 시도하였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될 것이다(창15:4)"라고 말씀해주셨다. 그리고는 그를 밖으로 끌고 나가 하늘의 별을 보게 하셨다. 그리고 말씀하셨다.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창15:5)" 그러자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그 말씀을 곧이곧대로 믿음으로 받아들였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으로 의로 여기셨다(창15:6). 그리하여 비로소 아브라함의 의롭다하고 칭함을 받게 된 것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 이상은 기다리지 못했다. 그리하여 첩 하갈을 들여 자식을 낳아버렸기 때문이다. 그러자 하나님은 그를 무려 13년동안이나 떠나셨다. 그리고 13년이 지난 후에(아브라함의 나이 99세 때에) 나타나셔서 "너는 내 앞에서 완전하라"고 하셨다. 그리고 그에게 2가지를 주문하셨다. 첫째는 그의 이름을 바꾸라고 하셨다(창17:5). 그리고 둘째는 할례를 받으라고 하셨다(창17:10~11). 그러자 아브라함은 하갈을 통해 낳았던 이스마엘과 자기의 종들을 다 데려다가 함께 할례를 행했다. 다시는 육체를 따라 가지 아니할 것이며, 그후부터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100% 순종하겠다는 것을 행동으로 보여준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할례를 받은 것은 회개의 표시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바울도 나중에 할례가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세례라고 해석하였다골2:11~12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의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12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그렇다. 세례는 죄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를 상징하는 것이다(막1:4). 고로 육을 따라 살던 삶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겠다는 결단의 표로서 아브라함이 행했던 할례는 곧 그의 회개의 표시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바울은 믿음으로 얻은 의를 그때 비로소 인칠 수 있었다. 고로 우리는 칭의가 오직 믿음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라, 회개를 통하여 인쳐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로 우리는 예수님의 칭의관과 바울의 칭의관이 서로 일치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또한 확인할 수 있다. 


5. 아브라함의 칭의는 어떻게 성장하고 완성되었는가?

  이제 우리는 예수께서 언급하시고 바울이 다시 확증했던 칭의에 관해, 아브라함이 걸어간 길을 통해서 다시 정리해보기를 원한다. 아브라함은 그의 나이 85세 때에 그의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해 주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써 의를 얻게 되었다(창15:6). 하지만 그때 그의 의는 불안전한 것이었다. 금새 그는 자신의 아내 사래의 말을 듣고 몸종 하갈을 통하여 아들을 낳아버렸기 때문이다. 그러자 하나님은 그가 잘못되었음을 13년간 교제를 끊으심으로 뉘우치게 하셨다. 그리고 99세에 나타나서는 아브라함더러 할례를 받으라고 하셨다(창17:10~11). 그것은 육체를 따라 사는 삶을 청산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사는 삶을 살라는 것이었다. 일종의 회개의 표시였던 것이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즉시 순종함으로 할례를 행했다. 그는 그때 비로소 회개를 통해서 자신이 받은 의를 인칠 수가 있었다. 

  그러자 이제 그의 칭의는 더욱 견고해졌다. 그러므로 그후에 더이상 흔들림은 없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믿고 따라가는 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더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를 마지막으로 시험해보고자, 그의 나이 125세(유대고대사 요세푸스의 증언) 혹은 137세(미드라쉬와 야살의 책) 때에 자신의 아들 이삭을 모리아산에서 번제로 바치라고 하셨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전혀 주저하지 않고 독자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고 3일 길을 걸어갔고 이윽고 칼을 들었다. 하나님의 천사가 그를 말리지 않았더라면 그의 칼이 이삭의 심장을 찔렀을 것이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여호와의 천사를 통해 말씀하셨다. 

창22:15-18 여호와의 사자(천사)가 하늘에서부터 두 번째 아브라함을 불러16 이르시되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17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18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이것을 두고 신약시대 예수님의 친동생이었던 야고보는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바침으로서 비로소 그의 칭의가 온전케 되고 완성되었다고 말했다(약2:21~24). 

약2:21-24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행위들)으로[부터]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22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행위들)과 함께 일하고 행함(행위들)으로[부터]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완성되었느니라) 23 이에 성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채워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24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행위들)으로[부터]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 

  고로 우리는 아브라함의 85세 때에 믿음으로 시작된 칭의가, 99세 때에 회개함으로 인침을 받았고, 125세(혹은 137세) 때에 완성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가 있었다. 그렇다. 칭의는 어느 한 순간에 다 완성되는 것이 아닌 것이었다. 칭의도 발전하고 성장하고 온전케 되는 성질을 가진 것이다. 믿음만을 가지고 있을 때 받았던 칭의는 하나님께 인정되는 칭의가 아닐 수도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회개를 통해 인정받은 칭의는 행동을 통하여 그것이 증명되기 시작한다. 고로 예수께서도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을 "믿음"과 "회개"라고 말씀하셨는데, 바울도 그렇게 말했던 것이다. 그리고 야고보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행동을 통해서 칭의가 완성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참으로 놀라운 말씀이 아닐 수 없다. 

 

6. 나오며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이나 칭의를 얻는 여정은 다 처음에는 믿음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사람은 자신이 죄인인 것을 인정하고서 주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시작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때부터 칭의를 얻은 성도는 성화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 이것이 출애굽세대들에게 있어서는 광야생활과 같은 것이다. 이것은 죄를 씻어내는 기간을 가리킨다. 고로, 이미 믿음으로 칭의를 얻은 자는 회개함으로 칭의가 더 견고해져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그의 믿음이 인침을 받아야 한다. 그러면 그는 순종의 삶을 통하여 칭의를 받은 자로서 그가 합당한 자 인지가 증명이 되고 확인이 되는 것이다. 당신은 지금 칭의의 어떤 단계로 도달해 있는가? 시작으로서의 칭의단계인가 아니면 인침으로서 칭의단계에 와 있는가? 아니면 행동으로 통해 칭의가 완성되고 있는가? 우리 모두는 완성의 칭의를 통해 구원얻어 천국에도 들어가고 그것에도 상도 받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2020년 07월 26일(주일)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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