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며
아가서의 말씀들은 사실 실제했던 사건을 기록한 것이지만 동시에 이 책에 등장인물과 배경들은 다 어떤 함축적인 뜻을 내포하고 있는 영적인 책이다. 그러므로 아가서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영을 사용해 좀 더 깊이 들여다보아야 한다. 특히 아가서에 나오는 각종 나무와 꽃들 그리고 동물들과 숫자까지도 다 의미가 들어있음을 알 수 있으며 특히 등장인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특히 등장 인물들이 누군지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한데, 그들 중에는 "예루살렘의 딸들"로 지칭되는 '처녀들'이 있다. 그리고 솔로몬의 아내로서 왕후(왕비)와 비빈(후궁)과 시녀들도 등장한다. 그런데 술람미 여인이 예루살렘에 살 때에 만났던 사람들도 나온다. 그들은 바로 '성 안의 순찰자들'과 '성벽의 파수꾼들'이다. 오늘은 이들이 과연 누구인지 왜 이들은 술람미 여인을 도와주지 않았거나 혹은 못했는지 그리고 나중에 이들은 왜 술람미 여인을 모욕하는 자들이 되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우리가 어떤 말씀을 들을 때에는 나에게 주시는 말씀을 듣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리고 어떤 것은 우리의 과제와 기도제목으로 들을 수 있어야 한다.
2. 술람미 여인이 청혼 후 임시로 거주했던 예루살렘 성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가?
술람미 여인을 귀하게 본 솔로몬이 어느날 그녀에게 청혼을 한다(아2:10~14). 그리고 임시로 예루살렘 성 안에 머물게 한다(아3:1~3). 그런데 솔로몬이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술람미 여인은 밤에 고민을 하다가 꿈 속에서 예비신랑인 솔로몬을 찾아 나선다. 하지만 그녀는 꿈 속에서도 솔로몬을 만나지 못한다. 이에 꿈에서 깨어난 술람미 여인은 그밤에 성안을 돌아다니며 마음에 사랑하는 자 솔로몬을 찾아서 거리들과 큰 광장들로 나간다. 하지만 또한 만나지 못한다. 그때 그녀는 성안에서 성안을 순찰하는 자들을 만난다. 그리고 그들에게 자신이 마음으로 사랑하는 자를 보았는지를 묻는다. 하지만 그들은 대답해주지 못한다. 그런데 그때 그들을 지나치자마자(사라지자마자) 솔로몬을 만나게 된다. 솔로몬이 그녀 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렇다면 왜 성안을 순찰하는 자들은 솔로몬을 찾는데 도와주지 못했던 것인가? 그리고 그들이 지나가자마자 왜 솔로몬이 그녀 앞에 문득 나타나게 된 것인가?
3. 결혼 후에 또 한 번 신랑을 잃어버리는 일이 일어났다. 대체 무슨 이유 때문이었는가?
그런데 술람미 여인은 결혼 후에도 신랑을 한 번 잃어버린 일이 있었다(아5:2~7). 그런데 이번에는 남편을 찾기가 예전의 경우보다 훨씬 힘들었다. 왜 그랬을까? 그 일은 어느날 밤에 일어났다. 그녀가 침소에 든지 오래 지난 시각이었다. 그런데 새벽녘이 되어서야 남편이 들어온 것이다. 그런데 남편의 머리에는 밤이슬이 가득하였다. 그러자 그녀는 핑계를 대면서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아마도 다른 여인의 품에 있다가 이제야 들어오느냐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싶다). 핑계는 그녀가 옷을 벗은 상태였기 때문에 어찌 다시 입을 수 있겠으며, 발을 씻었는데 어찌 다시 더럽히겠느냐고 하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사랑하는 자가 문틈으로 그의 손을 내밀었다. 그런데 그때 그의 손으로부터 몰약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아5:4~5,13). 그러나 그녀는 일어나서 자신의 남편을 위하여 문을 열어 준다. 그녀가 문빗장을 만졌을 때에 자신의 손에서도 남편에게서 나온난 몰약즙이 떨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남편은 이미 벌써 돌아가버리고 그 자리에 없는 상태였다. 아차 싶었지만 이미 때는 늦은 것이었다. 그러자 그녀는 곧장 남편을 찾아나선다. 하지만 만날 수 없었으며, 그를 불러보았지만 응답도 없었다. 그러자 옷을 주섬주섬 입고 밖으로 나가 찾아본다. 그리고 성안에서 또 다시 성안을 순찰하는 자들을 만났는데, 이번에 그들은 그녀를 때려서 상하게 하고 가버렸다. 그리고 이어서 성벽을 파수하는 자들을 만났는데 그들도 역시 그녀의 겉옷을 벗겨서 가져가버렸다. 그러자 그녀는 예루살렘의 딸들에게 남편을 찾을 수 있도록 하소연을 한다. 그러자 그들이 그녀에게 말했다. "네가 사랑하는 자가 다른 사랑하는 자보다 나은 것이 무엇인가?" 그러자 그녀는 자신의 남편이 얼마나 희고도 붉은지 만인 중에 뛰어나다고 말했다(아5:10). 그리고 남편의 머리부터 다리까지 남편의 아름다움을 그들에게 들려주었다(아5:11~16). 그가 바로 자신이 사랑하는 자요 자신의 친구라고 말이다. 그러자 예루살렘의 딸들도 그녀와 함께 그를 찾는 데에 도와주겠다고 한다. 그리고 얼마 못가 그녀는 자신의 남편을 그의 동산에서 만난다. 그는 이미 동산으로 돌아가 양떼를 먹이고 있었고 백합화를 줍고 있었다. 그럼, 왜 이번에 술람미 여인은 남편을 쉽게 만나지 못하고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는가? 그리고 왜 성안 순찰자들과 성벽 파수꾼들에게 수모를 당해야 했는가?
4. 두 번의 사건 속에 등장하는 '예루살렘'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이러한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우선 2가지를 고려해야 한다. 첫째, 그녀가 거주하던 '예루살렘'이 대체 어떤 곳인지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녀가 나중에 신랑을 발견한 장소였던 바, 솔로몬이 양떼를 먹이고 있는 동산이 어떤 곳인지를 알아보아야 한다. 그리고 둘째, 두 사건 속에 등장하는 성안의 순찰자들이 누구인지도 알아보아야 한다. 왜 성안의 순찰자들과 성벽의 파수꾼들은 그녀가 솔로몬을 찾는데 첫 번째에도 도움을 주지 못했으며, 뿐만 아니라 나중에는 오히려 그녀를 때리고 그녀의 겉옷까지 빼앗아가는 일을 저지른 것인가?
먼저, 그녀가 처음에 남편을 찾았던 장소와 그리고 순찰자들을 만났던 장소가 어디였는지부터 정리해보자. 그곳은 "성안"이었다. 여기서 성이란 '예루살렘' 성을 가리킨다. 왜냐하면 솔로몬 왕은 예루살렘에서 왕노릇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루살렘 성이란 왕이 거주하고 다스리는 도성을 가리킨다. 그런데 그녀가 첫번 째의 경우에는 예루살렘 성 안에서는 예비신랑을 만났지만, 나중에는 성안에서 그를 만나지 못했고 그의 동산에서 만나게 된다. 그러므로 이 본문에 대한 영적인 해석을 할 때에 우리는 예루살렘 성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잘 해석해야 한다. 어떤 이는 예루살렘 성은 '천국'을 의미한다고 말하지만, 그렇게 단순하게 해석해서는 아니 된다. 왜냐하면 예루살렘 성은 남편의 임재를 잃어버릴 수도 있는 공간이었고, 신부가 성안의 순찰자들에게 모욕을 당할 수도 있는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에루살렘 성은 오늘날로 치자면 양과 염소가 혼재되어 있는 '교회'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주님은 지상에 있는 교회 안에도 계시지만 진정 주님이 계시는 공간은 주님이 일하는 일터 곧 자기 동산에 계시기 때문이다. 그렇다. 그분은 교회 안에 계신다. 하지만 교회 전체가 다 거룩한 공간은 아니며, 거기에는 그리스도의 신부를 위하는 사람만 있는 것도 아니다.
또한 여기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그녀가 두 번 다 솔로몬을 찾아나선 시간이 어느 때였는가 하는 것이다. 그런데 둘 다 밤 시간이었다고 나온다. 그런데 아가서에서 밤 시간이란 두려움이 임하는 시간이다. 그러므로 솔로몬도 결혼을 위하여 술람미 여인을 모셔오도록 자신의 가마를 보낼 때에 이스라엘의 용사 60명을 딸려보냈었다. 그 용사들은 다 칼로 무장한 사람들이었고 싸움에 익숙한 사람들이었다(아3:7~8). 왜냐하면 그들도 밤의 두려움(위험)으로 인하여 각기 자기의 허리에 칼을 차야 했기 때문이다. 그럼, 솔로몬이 가마를 지키라고 보낸 용사들은 누구인가? 우선은 솔로몬이 보낸 왕의 군사들을 가리킨다. 그리고 좀 더 영적으로 들어간다면, 귀신들의 공격으로부터 신부인 술람미 여인을 보호하도록 주님이 보낸 천사들 곧 칼을 찬 수호천사들이라고도 할 수 있다.
5. 두 번의 사건 속에 등장하는 성안의 순찰자들과 성벽의 파수꾼들은 누구를 가리키는가?
이제 우리는 오늘 메시지의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서 '성안의 순찰자들'과 '성벽의 파수꾼들'의 정체에 대해서 알아본 시간이 되었다. 그럼 이들은 천사들을 가리키는가 아니면 사람들을 가리키는가? 그것은 둘 다 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다. 먼저, 이들을 사탄마귀와 귀신들로 해석한다고 할지라도 무방한 해석이 된다. 왜냐하면 아가서에서는 기본적으로 짐승들 곧 포도밭을 허는 여우(아2:16)와 사자와 표범(아4:8)은 사탄마귀와 귀신을 지칭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여우'는 신약성경에서 예수님께서 '왕'을 지칭할 때 사용한 표현이요(눅13:32), '사자'와 '표범'은 다니엘서 7장과 요한계시록 13장에 보면, 세상제국의 왕들을 가리키며, 그들의 실제는 그들을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는 악한 영들(귀신들)을 가리키키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아무래도 사람으로 해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하겠다. 고로 예루살렘의 딸들, 술람미 여인의 의붓오빠들, 그리고 성 안의 순찰자들과 성벽의 파수꾼들은 일차적으로는 그때 술람미 여인의 주변에 있던 사람으로 해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렇다면, 술람미 여인에게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고, 오히려 나중에는 술람미 여인을 모욕하고 상처를 주고 겉옷까지 빼앗아갔던 성안의 순찰자들과 성벽의 파수꾼들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에 대해서는 2가지 견해가 있다. 첫째는 "사탄의 무리들"로 보는 견해다. 이렇게 해석하는 분은 히브리어 원어를 성경을 해석하는 체데크 성경원어 신학대학원장 송광현박사의 경우다("원어로 풀어보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야기 아가서/체테크"책을 참고하기 바란다. p.202.). 그리고 둘째는 교회를 지키도록 감독의 직분을 맡아 임무를 수행하는 자들로 보는 견해다. 이러한 견해는 총신대를 졸업하시고 칼빈대와 총신대의 교수를 역임하신 하문호 박사가 주장했다("아가서"/도서출판 그리심. p.413). 하문호박사는 그 직분자를 오늘날 교회의 목사와 장로, 더 나아가서는 권사나 구역장이나 교사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했다. 상당히 새겨들어야 할 해석이라고 보인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천국에 들어가는데 가장 방해하는 존재들이 바로 당시 종교지도자들이라고 호되게 지적하셨던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마23:33~34).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모두 천국에 들여보내야 할 자들이 오히려 천국문을 가로막고 있다고 책망하셨다(마23:13). 그러므로 술람미 여인이 신랑을 만나는데 방해하고 해코지하고 모욕을 준 자들은 교회의 지도자들일 수도 있다. 특히 여기서 '성안을 순찰하는 자들'은 성안에 있는 사람들을 지켜주는 자들로서 교회의 목회자와 지도자들 가리킬 수 있다. 그리고 '성벽을 파수하는 자들'은 외부의 세력의 침입을 경고하는 자들로서, 신학자들이나 이단감별사들을 가리킬 수 있다. 사실 이들은 성도들을 지켜주어야 하고, 이들이 신랑되신 예수님을 찾아가는데 도움을 주어야 하는 자들이다. 그런데 오히려 방해꾼들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 성도들은 혹시 자신이 섬기는 교회에 이러한 지도자들이 있을 때에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때는 그분을 위해 기도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목회자의 모든 삶이 다 그러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요, 어느 목회자치고 자신의 양무리를 때리고 힘들게 하고 양떼들의 것을 갈취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십만분의 일이라도 그러한 일이 있다면 성도들은 적극적으로 기도해야 할 것이다. 나를 인도하는 목회자가 예수님과 같은 선한 목자로서 양무리를 천국으로 잘 인도하는 목회자가 될 수 있게 해 달라고 말이다.
6. 나오며
오늘 말씀은 정말 주의해서 들어야 할 말씀 중의 하나다. 잘못 설교했다가는 오늘날 교회의 목회자들을 비난하는 말씀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목회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러한 말씀만큼 새겨들어야 할 중요한 말씀은 또 없을 것이다. 예수님을 찾을 수 있게 도와주어야 하고 예수님을 만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할 자가 오히려 주님과의 만남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거나 오히려 주님과의 만남을 방해하는 존재가 되어서는 아니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정말 자신이 섬기고 있는 목회자들을 위해 기도를 많이 해야 한다. 아무리 부족한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영적인 부모님을 함부로 대해서는 아니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에베소 교회에게 주신 말씀의 핵심사항이기 때문이다(계2:2~5). 그렇다. 목회자는 교회 안에서 성도를 지키고 보호하는 존재가 되어야 하며, 외부의 이단세력이나 귀신의 세력으로부터 방어해주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더욱이 목회자는 성도들로 하여금 주 예수님을 만나게 도와주고 성도들로 하여금 천국에 잘 들어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잘 감당해야 한다. 하지만 이것이 정상적으로 집행되지 못했을 때에, 아가서의 말씀은 오늘날의 목회자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말씀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성도의 입장에서는 자신을 목양하는 목자를 위해 기도해야 할 기도제목을 발견하는 순간이 된다. 그러면 술람미 여인으로 하여금 솔로몬을 만나는데 실제적으로 방해하는 자는 누구인가? 그것은 사탄마귀와 귀신들이다. 이들이 배후에서 다 조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을 미워하려고 하지 말고 귀신들을 미워하라. 그리고 사람을 위해서는 기도하라. 이것이 성도들의 바른 삶인 것이다.
2021년 10월 24일(주일)
정병진목사
1. 들어가며
아가서의 말씀들은 사실 실제했던 사건을 기록한 것이지만 동시에 이 책에 등장인물과 배경들은 다 어떤 함축적인 뜻을 내포하고 있는 영적인 책이다. 그러므로 아가서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영을 사용해 좀 더 깊이 들여다보아야 한다. 특히 아가서에 나오는 각종 나무와 꽃들 그리고 동물들과 숫자까지도 다 의미가 들어있음을 알 수 있으며 특히 등장인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특히 등장인물들이 누군지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한데, 그들 중에는 '예루살렘의 딸들'로 지칭되는 '처녀들'이 있다. 그리고 솔로몬의 아내로서 왕후(왕비)와 비빈(후궁)과 시녀들도 등장한다. 그런데 술람미 여인이 예루살렘에 살 때에 만났던 사람들도 나온다. 그들은 바로 '성안의 순찰자들'과 '성벽의 파수꾼들'이다. 오늘은 이들이 과연 누구인지 왜 이들은 술람미 여인을 도와주지 않았거나 혹은 못했는지 그리고 나중에 이들은 왜 술람미 여인을 모욕하는 자들이 되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우리가 어떤 말씀을 들을 때에는 나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듣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리고 어떤 것은 우리의 과제와 기도 제목으로 들을 수 있어야 한다.
2. 술람미 여인이 청혼 후 임시로 거주했던 예루살렘 성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가?
술람미 여인을 귀하게 본 솔로몬이 어느 날 그녀에게 청혼을 한다(아2:10~14). 그리고 임시로 예루살렘 성안에 머물게 한다(아3:1~3). 그런데 솔로몬이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술람미 여인은 밤에 고민을 하다가 꿈속에서 예비 신랑인 솔로몬을 찾아 나선다. 하지만 그녀는 꿈속에서도 솔로몬을 만나지 못한다. 이에 꿈에서 깨어난 술람미 여인은 그 밤에 성안을 돌아다니며 마음에 사랑하는 자 솔로몬을 찾아서 거리들과 큰 광장으로 나간다. 하지만 또한 만나지 못한다. 그때 그녀는 성안에서 성안을 순찰하는 자들을 만난다. 그리고 그들에게 자신이 마음으로 사랑하는 자를 보았는지를 묻는다. 하지만 그들은 대답해 주지 못한다. 그런데 그때 그들을 지나치자마자(사라지자마자) 솔로몬을 만나게 된다. 솔로몬이 그녀 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렇다면 왜 성안을 순찰하는 자들은 솔로몬을 찾는데 도와주지 못했던 것인가? 그리고 그들이 지나가자마자 왜 솔로몬이 그녀 앞에 문득 나타나게 된 것인가?
3. 결혼 후에 또 한 번 신랑을 잃어버리는 일이 일어났다. 대체 무슨 이유 때문이었는가?
그런데 술람미 여인은 결혼 후에도 신랑을 한 번 잃어버린 일이 있었다(아5:2~7). 그런데 이번에는 남편을 찾기가 예전의 경우보다 훨씬 힘들었다. 왜 그랬을까? 그 일은 어느 날 밤에 일어났다. 그녀가 침소에 든 지 오래 지난 시각이었다. 그런데 새벽녘이 되어서야 남편이 들어온 것이다. 그런데 남편의 머리에는 밤이슬이 가득하였다. 그러자 그녀는 핑계를 대면서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아마도 다른 여인의 품에 있다가 이제야 들어오느냐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싶다). 핑계는 그녀가 옷을 벗은 상태였기 때문에 어찌 다시 입을 수 있겠으며, 발을 씻었는데 어찌 다시 더럽히겠느냐고 하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사랑하는 자가 문틈으로 그의 손을 내밀었다. 그런데 그때 그의 손으로부터 몰약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아5:4~5,13). 그러나 그녀는 일어나서 자신의 남편을 위하여 문을 열어 준다. 그녀가 문빗장을 만졌을 때에 자신의 손에서도 남편에게서 나온 몰약즙이 떨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남편은 이미 벌써 돌아가 버리고 그 자리에 없는 상태였다. 아차 싶었지만 이미 때는 늦은 것이었다. 그러자 그녀는 곧장 남편을 찾아 나선다. 하지만 만날 수 없었으며, 그를 불러 보았지만 응답도 없었다. 그러자 옷을 주섬주섬 입고 밖으로 나가 찾아본다. 그리고 성안에서 또 다시 성안을 순찰하는 자들을 만났는데, 이번에 그들은 그녀를 때려서 상하게 하고 가버렸다. 그리고 이어서 성벽을 파수하는 자들을 만났는데 그들도 역시 그녀의 겉옷을 벗겨서 가져가 버렸다. 그러자 그녀는 예루살렘의 딸들에게 남편을 찾을 수 있도록 하소연을 한다. 그러자 그들이 그녀에게 말했다. "네가 사랑하는 자가 다른 사랑하는 자보다 나은 것이 무엇인가?" 그러자 그녀는 자신의 남편이 얼마나 희고도 붉은지 만인 중에 뛰어나다고 말했다(아5:10). 그리고 남편의 머리부터 다리까지 남편의 아름다움을 그들에게 들려주었다(아5:11~16). 그가 바로 자신이 사랑하는 자요 자신의 친구라고 말이다. 그러자 예루살렘의 딸들도 그녀와 함께 그를 찾는 데에 도와주겠다고 한다. 그리고 얼마 못 가 그녀는 자신의 남편을 그의 동산에서 만난다. 그는 이미 동산으로 돌아가 양 떼를 먹이고 있었고 백합화를 줍고 있었다. 그럼, 왜 이번에 술람미 여인은 남편을 쉽게 만나지 못하고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는가? 그리고 왜 성안 순찰자들과 성벽 파수꾼들에게 수모를 당해야 했는가?
4. 두 번의 사건 속에 등장하는 '예루살렘'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이러한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우선 2가지를 고려해야 한다. 첫째, 그녀가 거주하던 '예루살렘'이 대체 어떤 곳인지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녀가 나중에 신랑을 발견한 장소였던 바, 솔로몬이 양 떼를 먹이고 있는 동산이 어떤 곳인지를 알아보아야 한다. 그리고 둘째, 두 사건 속에 등장하는 성안의 순찰자들이 누구인지도 알아보아야 한다. 왜 성안의 순찰자들과 성벽의 파수꾼들은 그녀가 솔로몬을 찾는데 첫 번째에도 도움을 주지 못했으며, 뿐만 아니라 나중에는 오히려 그녀를 때리고 그녀의 겉옷까지 빼앗아 가는 일을 저지른 것인가?
먼저, 그녀가 처음에 남편을 찾았던 장소와 그리고 순찰자들을 만났던 장소가 어디였는지부터 정리해 보자. 그곳은 '성안'이었다. 여기서 성이란 '예루살렘'성을 가리킨다. 왜냐하면 솔로몬왕은 예루살렘에서 왕 노릇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성이란 왕이 거주하고 다스리는 도성을 가리킨다. 그런데 그녀가 첫 번째의 경우에는 예루살렘 성안에서는 예비 신랑을 만났지만, 나중에는 성안에서 그를 만나지 못했고 그의 동산에서 만나게 된다. 그러므로 이 본문에 대한 영적인 해석을 할 때에 우리는 예루살렘성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잘 해석해야 한다. 어떤 이는 예루살렘성은 '천국'을 의미한다고 말하지만, 그렇게 단순하게 해석해서는 아니 된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성은 남편의 임재를 잃어버릴 수도 있는 공간이었고, 신부가 성안의 순찰자들에게 모욕을 당할 수도 있는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성은 오늘날로 치자면 양과 염소가 혼재되어 있는 '교회'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주님은 지상에 있는 교회 안에도 계시지만 진정 주님이 계시는 공간은 주님이 일하는 일터 곧 자기 동산에 계시기 때문이다. 그렇다. 그분은 교회 안에 계신다. 하지만 교회 전체가 다 거룩한 공간은 아니며, 거기에는 그리스도의 신부를 위하는 사람만 있는 것도 아니다.
또한 여기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그녀가 두 번 다 솔로몬을 찾아 나선 시간이 어느 때였는가 하는 것이다. 그런데 둘 다 밤시간이었다고 나온다. 그런데 아가서에서 밤시간이란 두려움이 임하는 시간이다. 그러므로 솔로몬도 결혼을 위하여 술람미 여인을 모셔오도록 자신의 가마를 보낼 때에 이스라엘의 용사 60명을 딸려 보냈었다. 그 용사들은 다 칼로 무장한 사람들이었고 싸움에 익숙한 사람들이었다(아3:7~8). 왜냐하면 그들도 밤의 두려움(위험)으로 인하여 각기 자기의 허리에 칼을 차야 했기 때문이다. 그럼, 솔로몬이 가마를 지키라고 보낸 용사들은 누구인가? 우선은 솔로몬이 보낸 왕의 군사들을 가리킨다. 그리고 좀 더 영적으로 들어간다면, 귀신들의 공격으로부터 신부인 술람미 여인을 보호하도록 주님이 보낸 천사들 곧 칼을 찬 수호천사들이라고도 할 수 있다.
5. 두 번의 사건 속에 등장하는 성안의 순찰자들과 성벽의 파수꾼들은 누구를 가리키는가?
이제 우리는 오늘 메시지의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서 '성안의 순찰자들'과 '성벽의 파수꾼들'의 정체에 대해서 알아본 시간이 되었다. 그럼 이들은 천사들을 가리키는가 아니면 사람들을 가리키는가? 그것은 둘 다 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다. 먼저, 이들을 사탄 마귀와 귀신들로 해석한다고 할지라도 무방한 해석이 된다. 왜냐하면 아가서에서는 기본적으로 짐승들 곧 포도밭을 허는 여우(아2:16)와 사자와 표범(아4:8)은 사탄 마귀와 귀신을 지칭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여우'는 신약성경에서 예수님께서 '왕'을 지칭할 때 사용한 표현이요(눅13:32), '사자'와 '표범'은 다니엘서 7장과 요한계시록 13장에 보면, 세상 제국의 왕들을 가리키며, 그들의 실제는 그들을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는 악한 영들(귀신들)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아무래도 사람으로 해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하겠다. 고로 예루살렘의 딸들, 술람미 여인의 의붓오빠들, 그리고 성안의 순찰자들과 성벽의 파수꾼들은 일차적으로는 그때 술람미 여인의 주변에 있던 사람으로 해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렇다면, 술람미 여인에게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고, 오히려 나중에는 술람미 여인을 모욕하고 상처를 주고 겉옷까지 빼앗아 갔던 성안의 순찰자들과 성벽의 파수꾼들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에 대해서는 2가지 견해가 있다. 첫째는 '사탄의 무리들'로 보는 견해다. 이렇게 해석하는 분은 히브리어 원어를 성경을 해석하는 체데크 성경원어 신학대학원장 송광현 박사의 경우다('원어로 풀어보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야기 아가서/체테크'책을 참고하기 바란다. p.202.). 그리고 둘째는 교회를 지키도록 감독의 직분을 맡아 임무를 수행하는 자들로 보는 견해다. 이러한 견해는 총신대를 졸업하시고 칼빈대와 총신대의 교수를 역임하신 하문호 박사가 주장했다('아가서'/도서출판 그리심. p.413). 하문호 박사는 그 직분자를 오늘날 교회의 목사와 장로, 더 나아가서는 권사나 구역장이나 교사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했다. 상당히 새겨들어야 할 해석이라고 보인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천국에 들어가는데 가장 방해하는 존재들이 바로 당시 종교지도자들이라고 호되게 지적하셨던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마23:33~34).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모두 천국에 들여보내야 할 자들이 오히려 천국 문을 가로막고 있다고 책망하셨다(마23:13). 그러므로 술람미 여인이 신랑을 만나는데 방해하고 해코지하고 모욕을 준 자들은 교회의 지도자들일 수도 있다. 특히 여기서 '성안을 순찰하는 자들'은 성안에 있는 사람들을 지켜주는 자들로서 교회의 목회자와 지도자들을 가리킬 수 있다. 그리고 '성벽을 파수하는 자들'은 외부 세력의 침입을 경고하는 자들로서, 신학자들이나 이단 감별사들을 가리킬 수 있다. 사실 이들은 성도들을 지켜 주어야 하고, 이들이 신랑되신 예수님을 찾아가는데 도움을 주어야 하는 자들이다. 그런데 오히려 방해꾼들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 성도들은 혹시 자신이 섬기는 교회에 이러한 지도자들이 있을 때에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때는 그분을 위해 기도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목회자의 모든 삶이 다 그러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요, 어느 목회자치고 자신의 양 무리를 때리고 힘들게 하고 양 떼들의 것을 갈취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십만 분의 일이라도 그러한 일이 있다면 성도들은 적극적으로 기도해야 할 것이다. 나를 인도하는 목회자가 예수님과 같은 선한 목자로서 양 무리를 천국으로 잘 인도하는 목회자가 될 수 있게 해 달라고 말이다.
6. 나오며
오늘 말씀은 정말 주의해서 들어야 할 말씀 중의 하나다. 잘못 설교했다가는 오늘날 교회의 목회자들을 비난하는 말씀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목회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러한 말씀만큼 새겨들어야 할 중요한 말씀은 또 없을 것이다. 예수님을 찾을 수 있게 도와주어야 하고 예수님을 만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할 자가 오히려 주님과의 만남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거나 오히려 주님과의 만남을 방해하는 존재가 되어서는 아니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정말 자신이 섬기고 있는 목회자들을 위해 기도를 많이 해야 한다. 아무리 부족하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영적인 부모님을 함부로 대해서는 아니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에베소 교회에게 주신 말씀의 핵심 사항이기 때문이다(계2:2~5). 그렇다. 목회자는 교회 안에서 성도를 지키고 보호하는 존재가 되어야 하며, 외부의 이단 세력이나 귀신의 세력으로부터 방어해주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더욱이 목회자는 성도들로 하여금 주 예수님을 만나게 도와주고 성도들로 하여금 천국에 잘 들어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잘 감당해야 한다. 하지만 이것이 정상적으로 집행되지 못했을 때에, 아가서의 말씀은 오늘날의 목회자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말씀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성도의 입장에서는 자신을 목양하는 목자를 위해 기도해야 할 기도 제목을 발견하는 순간이 된다. 그러면 술람미 여인으로 하여금 솔로몬을 만나는데 실제적으로 방해하는 자는 누구인가? 그것은 사탄 마귀와 귀신들이다. 이들이 배후에서 다 조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을 미워하려고 하지 말고 귀신들을 미워하라. 그리고 사람을 위해서는 기도하라. 이것이 성도들의 바른 삶인 것이다.
2021년 10월 24일(주일)
정병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