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룟유다, 그는 가장 불쌍한 사람 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는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더 좋을 뻔 했을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가 자신의 스승을 팔아넘긴 배신자의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왜 그는 자신의 스승을 팔아넘기려 한 것일까? 그리고 난 후에 그는 분명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뉘우쳤는데, 왜 궁극적으로 자살을 선택한 것인가? 그리고 그는 죽어서 대체 어디로 간 것인가? 지옥인가? 아니면 다른 곳인가? 성경이 들려주는 그의 최후의 운명은 과연 어디인가? 그리고 오늘날 자살하는 모든 사람은 다 지옥으로 가는 것인가? 여기 그 대답이 들어있다.
2022-06-12(주일) 주일찬양예배
제목: 사도행전 강해(07) 가룟유다, 그는 지옥에 떨어졌을까?(가룟유다의 최후와 맛디아 선출)(행1:15~26)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WSg0zLks3gk [혹은 https://tv.naver.com/v/27323630 ]
1. 들어가며
가룟유다는 죽어서 과연 어디로 갔을까? 그는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선택받은 12사도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스승인 예수를 팔아넘기고 말았다. 나중에 자신이 저지른 일을 자책하던 가룟 유다는 자기의 목숨을 스스로 끊는다. 그럼, 그의 영혼은 어디로 갔을까? 곧바로 지옥으로 갔던 것일까? 성경에서는 "제 곳으로 갔다"고 되어 있는데(행1:25), 제 곳으로 갔다는 말의 뜻은 대체 무엇인가? 이와 더불어 우리가 생각해봐야 할 것은 "성도가 자살하면 무조건 지옥에 떨어지는가?" 하는 것이다. 인공호흡기로 연명하던 어떤 노인이 인공호흡기를 제거했다고 치자. 그러면 그것도 자살이라고 봐야 하는가? 오늘은 가룟 유다의 자살을 좀 더 들여다보고자 한다. 가룟유다는 예수님을 팔아넘긴 죄가 잘못 되었음을 본인이 직접 시인했다. 그리고 그 죄에 대해 심히 아파했다. 뉘우쳤던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자신의 죄를 왜 용서받지 못한 것일까? 한편 가룟유다 대신에 보선하여 들어온 '맛디아'라는 인물은 대체 누구이며, 베드로는 왜 궐이 난 가룟 유다의 자리 대신에 굳이 새로운 사람을 보선하려고 했는지에 대해서도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2. 자살하면 무조건 지옥에 떨어지는가?
자살하면 무조건 지옥인가? 원칙은 맞다. 왜냐하면 자살도 일종의 살인죄에 해당하는데, 자살하게 되면 자신이 자신을 살인한 죄를 용서받을 기회가 없기 때문이다. 다른 죄들은 회개함으로 용서받을 수 있어도, 자살한 죄에 대해서만큼은 용서받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게 자살한 자는 결단코 새 예루살렘 성 곧 천국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다(계21:8). 고로 자살에 대한 결과로서 천국 아니면 지옥이라는 이분법적인 구분으로 분류한다면 가룟유다는 분명 지옥에 떨어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다음의 경우는 어떠한가? 서두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인공호흡기로 연명하던 어떤 노인이 잠깐 깨어나서 자기의 인공호흡기를 스스로 떼어버렸다고 치자. 그리고 얼마 후 숨을 거두었다고 치자. 이 노인은 자살한 것인가? 물리적으로는 그랬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면 이 노인은 자기가 자기를 죽인 죄 때문에 지옥에 떨어져야 하는가? 이럴 때에는 쉽게 단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최근에 들어와서 성경에 대한 새로운 조명을 얻게 되었다. 그것은 사람의 운명이 마태복음과 요한계시록에 보니 새로운 장소가 있는 것이다. 그곳은 바로 '성밖(바깥 어두운데)'이라는 장소다(마25:10, 계22:15). 성도가 죽었을 때에 새 예루살렘 성 안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성밖으로 밀려나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그럼, 새 예루살렘 성밖은 지옥인가 천국인가? 우리는 이 문제를 놓고 한 때 심각하게 고민했었다. 그래서 결론이 난 것은 성밖을 결코 '천국'이라고 정의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곳은 슬피 울며 이를 가는 곳이기 때문이다(마25:30). 실제로 주님께서도 결코 그곳에는 심방을 가지 않는 곳이기 때문이다. 어떤 곳에서는 형벌을 받기도 한다(마24:51). 그러므로 그곳을 '천국'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을 두고 무조건 그를 가리켜 "지옥에 떨어졌다"라고 말하는 것에 대해서는 조금 조심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지옥'이라는 말은 불과 유황이 타는 못 곧 불못을 가리키는데, 믿는 이들 중에 죄를 해결하지 못해 성밖으로 가는 이들도 있기 때문이다(막9:43). 그리고 마태복음과 요한계시록을 보면, '불못'(계21:8)과 '성밖'(계22:15)은 분명 다른 곳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자살한 이들에 대해서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런 사람은 결단코 새 예루살렘 성 안 곧 천국에는 못 들어간다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이 자신을 죽인 죄에 대해서 용서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니 회개할 기회를 스스로 박탈시켜 버림으로 자신이 지은 살인죄가 여전히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살한 자는 최소한 천국에는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3. 가룟유다는 죽어서 어디로 갔는가?
그렇다면 가룟유다는 죽어서 어디로 갔을까? 성경은 그의 죽음과 관련하여 2가지 사실을 알려준다. 첫째, 그가 자살을 했다는 것이다(마27:3~5, 행1:18~19). 그는 예수께서 유죄선고를 받았다는 것을 안 후에 스스로 뉘우쳐 자기가 예수님을 넘겨준 값으로 받은 은 30냥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갔다 주었다(마27:3). 그리고 말했다. "내가 무죄한 자의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마27:4) 하지만 그들은 그것이 자기들에게 무슨 상관이냐고 하면서 그가 당하라고 말했다. 그러자 유다는 은 30을 성소 안으로 던져버린 후에 스스로 물러가서 목을 매어 죽음을 선택한다(마27:5). 그런데, 사도행전 1장에서는 베드로가 이후에 되어진 일들에 대해서 더 자세한 정보를 알려준다. 그것은 그가 목을 매단 이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흘러나와서 죽었다는 것이다(행1:18). 아마도 그가 목을 매단 나무가 부러졌든지 아니면 끈이 떨어졌든지 그가 나무에서 떨어졌고 그때 받은 충격이나 어떤 요인으로 인해 배가 터졌으며 그래서 그 안에 있는 장기들이 쏟어져 나왔다는 것이다. 비참한 죽음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그와 같은 사실은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다고도 했다(행1:19). 그러자 대제사장들이 성소에 던져버린 그 돈으로 밭을 샀는데, 그 밭의 이름을 "아켈다마(피밭)"라고 부르며, 나그네의 묘지로 삼았다는 것이다(행1:19).
둘째, 그가 자살한 후 자기의 직무로부터 [떠나] 자기 자신의 자리(장소) 안으로 가기 위하여 옆으로 걸어갔다는 것이다(행1:25). 이 말은 무슨 뜻인가? 자신이 이땅에 보내어질 때 그에게도 어떤 사명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봉사의 직무와 사도의 직무였을 것이다(행1:25). 그리고 그가 그것을 성실히 감당했다면 그는 하늘에 이미 준비된 그의 보좌 자리를 앉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 직무를 버린 것이다. 그리고 자기자신이 선택한 자리(장소) 안으로 가게 된 것이다. 그것은 최소한 '성밖'이요 더 나아가서는 '불못'이 될 수 있을 것이다.
4. 가룟유다는 후회만했는가 회개도 했는가?
그렇다면 가룟유다는 자기의 스승을 판 죄에 대해서 어떻게 여겼는가? 제일 처음 그는 대제사장들을 찾아가서, 자기의 스승을 그들에게 넘겨줄 테니까 얼마나 주겠는지 흥정을 하였다(마26:14~16). 그리하여 그들로부터 은 30을 받고 주님을 넘겨주게 된다. 그러나 '은 30'이라는 돈은 노예 1명 값어치 수준 밖에 안 되기 때문에, 그가 돈이 탐이 나서 스승을 팔아넘긴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아마도 다른 뜻이 있지 않았을까 싶다. 그것의 한 예를 들자면 다음과 같다. 가룟유다는 자신이 스승의 능력과 권세와 지혜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던 제자였다. 그러다 보니 예수님 정도 되면 로마에 대항하여 싸워서 얼마나 새로운 나라를 건설할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러한 일에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이다. 그러자 가룟유다는 예수님을 자극시키고자 일부러 대제사장들에게 넘겨주려 했다는 것이다. 그러면 예수께서 분연히 일어나 대제사장들과 또한 이들과 결탁한 로마에 대항하여 싸울 것이로 그리하여 새 나라를 건설할 것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 세상 나라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으시고 오히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에게 순순히 붙잡혀 죽으러 가시는 것이었다. 그러자 그는 자신의 판단이 잘못 되었음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스승을 팔아넘긴 죄에 대해 자책하게 되었고, 씻을 수 없는 죄를 저지른 것에 대해서 자기가 그 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고는 그만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에 대해 다른 가설을 세워볼 수도 있다. 그가 예수님을 팔아넘긴 이유는 그가 구약성경에 나오는 배반 예언을 성취하기 위함이었다고 말이다. 누군가는 예수님을 팔아넘겨야 하는데, 가룟유다가 그 일을 감당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예수님을 넘겨서 죽게 한 것은 잘 한 일이요 상 받을 일이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는 그는 자신의 스승을 팔아넘긴 죄책에 시달리게 되었고 자신의 양심의 참소를 이기지 못해 자살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가 지옥에 갔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메시야에 대한 구약 예언을 이룬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어떠한가? 그럴듯 해 보이지 아니한가? 하지만 이것은 거의 궤변수준이 아닌가 판단된다. 가룟유다는 예언을 성취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 대한 기대가 허물어져지자 예수님을 자극해서라도 자신의 기대에 부응하는 스승이 되도록 조종하려 했다고 보는 것이 훨씬 더 가능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과연 스승을 팔아 넘긴 죄를 가룟유다가 회개를 했느냐 하는 것이다. 사실 그가 자살하여 죽은 시점은 아직 예수님께서 죽지 않은 시점이었다. 예수께서 잡혀서 시위대 뜰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때라도 가룟유다는 회개할 기회가 있었던 것이다. 그때도 늦지 않았던 것이다. 그때라도 예수님께 나아가서 자신의 잘못을 고하고 용서해주시기를 청했으면 그는 아마 용서를 받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그는 자신이 예수님을 팔아넘긴 죄를 후회까지는 했지만, 회개는 안 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회개라는 것은 첫째, 자신의 죄를 시인하고 둘째, 그것에 대해 스스로 뉘우쳐 그 죄에 대해 아파하는 것이며, 셋째, 그 죄값에 대해서 하나님께 나아가 자신의 처우를 하나님께서 맡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룟유다는 둘째 단계까지 행했지만 셋째 단계까지 나아가지 못했던 것이다. 고로 그는 후회는 했지만 회개는 안 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자살은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를 의미없게 만들어버린 격이 된 것이다. 예수께서는 우리 죄를 대신하여 죽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것이다. 그리고 인류의 죄값을 담당하시기 위해 죽으신 것이다. 그러나 가룟유다는 그 죄값을 예수님께 돌리지 않고 오히려 자신이 받으려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해 가룟유다는 자신이 처리하려고 했을 뿐 그 문제를 주님께 가져간 후 주님의 처분을 기다리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이 죄인 것이다. 고로 그는 후회는 했지만 회개는 안 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돌아온 탕자'의 비유를 통해서도 확인이 된다. 돌아온 탕자가 어떻게 되어서 자신이지은 죄를 용서받았는지를 살펴보자. 그는 첫째, 그는 자신의 죄를 지었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했다.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그리고 둘째, 그는 스스로 자신의 잘못된 것을 뉘우쳤다. 그리고 셋째, 그리고 나서는 아버지께 돌아가 아버지의 처분을 기다렸다는 것이다. 이것이 생각과 감정와 의지를 동원한 회개의 3요소가 다 들어있는 회개인 것이다. 그런데 가룟유다는 처음 2가지 것들은 행했지만 마지막 세 번째 것은 행하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결국 그는 성밖이나 혹은 불못에 떨어지고 만 것이다.
5. 왜 베드로는 죽은 가룟유다 대신에 다른 사도를 보선해야 했는가?
왜 베드로는 그 중요한 기도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새 사도를 보선하려고 했던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예수님으로부터 혹은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특별한 지시를 전달받은 것이 있지 않았었나 추측이 된다. 왜냐하면 가룟유다가 궐이 나자 그때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다른 사도를 보선했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이후에는 어떤 사도들이 죽더라도 사도회에서는 다른 이를 보선하지 않았다. 그런데 베드로는 가룟유다 대신에 다른 사도들을 보선하려고 하였다. 다른 사도들을 보선하라는 지시를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서였을까? 그것은 아마도 천국의 12기초석 위에 새겨질 이름이 가룟유다 대신에 다른 사도의 이름이 필요해서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왜냐하면 천국은 새 예루살렘 성을 가리키는 것인데, 그 성의 기초석은 12개로서 이 기초석 위에 어린양의 12사도들의 이름이 기록되어야 기 때문이다(계21:14). 그런데 한 사람의 이름이 지워진 상태가 되었으므로 그 이름 대신에 들어갈 새로운 이름이 필요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왼다.
6. 새 사도인 '맛디아'는 어떤 인물인가?
그리하여 베드로가 일어나 새로운 사도 한 명을 제비뽑아서 보선할 것을 제안한다(행1:21~22). 그리고 그 조건으로서 2가지를 제시한다. 하나는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부터 그분이 승천하신 날까지 12사도들과 함께 해온 자들 가운데서 한 명을 선택하자고 제안하였다. 그리고 또 하나는 예수님의 부활하의 증인이 될 자를 선택하자고 제안했으니, 이는 예수께서 부활하신 것을 직접 목격한 자라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공생애 동안 예수님 곁에 있었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을 직접 눈으로 목격한 자들 중에 다른 새 사도를 선출하게 된 것이다. 그러자 두 명이 천거되었는데, 한 사람은 '요셉'이었고 또 한 사람은 '맛디아'였다. 그런데 요셉은 그 이름이 여러 개였다. 하나는 '바사바(바르사밧)'였다. 이는 '바르'라는 단어 '아들'과 '샤밧'이라는 단어 '안식일'이 서로 합쳐진 말로서, 히브리어로는 그 뜻이 '안식일의 아들'이다. 그리고 '유스도'도 그의 이름이었는데 이는 로마식(라틴어) 이름으로서 '의로운 자'라는 뜻이다. 그리고 요셉은 그의 히브리식의 이름이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이 천거되었으니 그는 바로 '맛디아'였다. 그 이름의 뜻은 "여호와의 선물"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맛디아에 대해서는 더 다른 자료들이 없다. 다만 알려진 바에 의하면, 그는 에디오피아로 가서 선교하였고 거기에 순교했다고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그는 현재 천국에서 높은 지위의 보좌에 앉아 있다. 그러므로 우리도 천국복음 전파에 늦게 합류했든지 아니면 처음부터 합류했든지 상관없이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에 최선을 다해 살아가나면 주님 앞에 섰을 때에 나도 칭찬을 들을 수있는 성도가 되어있을 것이다.
7. 나오며
가룟유다의 죽음처럼 안타까운 죽음이 또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가룟유다가 자기 스승을 자기 나름대로 일깨우기 위해 어떤 작전을 벌인 것 같은데, 그만 그 일이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자, 그는 자책감에 못이겨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렸기 때문이다. 다만 그에게 아쉬움이 남는 것은 아직 예수께서 살아계실 때에 그분 앞에 나아가 자신의 잘못을 고하고 그분의 처분을 기다렸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아마도 사탄이 들어가서 그런 것 같다). 오히려 자신의 죄만을 자책한 나머지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리는 비참한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죄를 짓고도 그냥 뻔뻔스럽게 살아가고 있는 오늘날의 우리들의 모습보다는 더 양심적이 아닌가 하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은 잘못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육신을 입고 오신 목적, 곧 그분이 자신의 목숨을 우리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로 주려고 한 것이 아무 소용없는 일이 되기 따문에. 우리는 어떤 죄를 지었더라도 주님 앞으로 나아가 죄를 고백하고 그분의 처우를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아니 그렇게 해야만 한다. 그래야 주님의 죽음이 의미가 있게 되기 때문이다. 주님의 피의 가치를 더 높아지기 때문이다. 가룟유다는 죽었다. 그런데 그가 어디로 갔는지 성경에서는 명확하게 나와 있지는 않다. 다만 그는 자기 자신의 자리 안으로 가기 위하여 옆으로 걸어갔던 것만큼은 확실하다. 그러므로 그의 운명은 최소한 '성밖'으로 보이며, 더 크게 보면 '불못'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주장이 맞는 주장인지는 나중 새 예루살렘 성안(천국)과 성밖(지옥의 일부분) 그리고 지옥(완전지옥)으로 가서 확인해 볼 수 있을 것이다.
2022년 06월 12일(주일)
정병진목사
가룟 유다, 그는 가장 불쌍한 사람 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는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더 좋을뻔 했을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가 자신의 스승을 팔아넘긴 배신자의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왜 그는 자신의 스승을 팔아넘기려 한 것일까? 그러고 나서 그는 분명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뉘우쳤는데, 왜 궁극적으로 자살을 선택한 것인가? 그리고 그는 죽어서 대체 어디로 간 것인가? 지옥인가? 아니면 다른 곳인가? 성경이 들려주는 그의 최후의 운명은 과연 어디인가? 그리고 오늘날 자살하는 모든 사람은 다 지옥으로 가는 것인가? 여기 그 대답이 들어 있다.
1. 들어가며
가룟 유다는 죽어서 과연 어디로 갔을까? 그는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선택받은 12사도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스승인 예수를 팔아넘기고 말았다. 나중에 자신이 저지른 일을 자책하던 가룟 유다는 자기의 목숨을 스스로 끊는다. 그럼, 그의 영혼은 어디로 갔을까? 곧바로 지옥으로 갔던 것일까? 성경에서는 "제 곳으로 갔다"고 되어 있는데(행1:25), 제 곳으로 갔다는 말의 뜻은 대체 무엇인가? 이와 더불어 우리가 생각해 봐야 할 것은 "성도가 자살하면 무조건 지옥에 떨어지는가?" 하는 것이다. 인공호흡기로 연명하던 어떤 노인이 인공호흡기를 제거했다고 치자. 그러면 그것도 자살이라고 봐야 하는가? 오늘은 가룟 유다의 자살을 좀 더 들여다보고자 한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팔아넘긴 죄가 잘못 되었음을 본인이 직접 시인했다. 그리고 그 죄에 대해 심히 아파했다. 뉘우쳤던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자신의 죄를 왜 용서받지 못한 것일까? 한편 가룟 유다 대신에 보선하여 들어온 '맛디아'라는 인물은 대체 누구이며, 베드로는 왜 궐이 난 가룟 유다의 자리 대신에 굳이 새로운 사람을 보선하려고 했는지에 대해서도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2. 자살하면 무조건 지옥에 떨어지는가?
자살하면 무조건 지옥인가? 원칙은 맞다. 왜냐하면 자살도 일종의 살인죄에 해당하는데, 자살하게 되면 자신이 자신을 살인한 죄는 용서받을 기회가 없기 때문이다. 다른 죄들은 회개함으로 용서받을 수 있어도, 자살한 죄에 대해서만큼은 용서받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게 자살한 자는 결단코 새 예루살렘 성 곧 천국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다(계21:8). 고로 자살에 대한 결과로서 천국 아니면 지옥이라는 이분법적인 구분으로 분류한다면 가룟 유다는 분명 지옥에 떨어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다음의 경우는 어떠한가? 서두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인공호흡기로 연명하던 어떤 노인이 잠깐 깨어나서 자기의 인공호흡기를 스스로 떼어 버렸다고 치자. 그리고 얼마 후 숨을 거두었다고 치자. 이 노인은 자살한 것인가? 물리적으로는 그랬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면 이 노인은 자기가 자기를 죽인 죄 때문에 지옥에 떨어져야 하는가? 이럴 때에는 쉽게 단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최근에 들어와서 성경에 대한 새로운 조명을 얻게 되었다. 그것은 마태복음과 요한계시록에 보니 사람의 운명이 가는 새로운 장소가 있는 것이다. 그곳은 바로 '성밖(바깥 어두운데)'이라는 장소다(마25:10, 계22:15). 성도가 죽었을 때에 새 예루살렘 성 안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성밖으로 밀려나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그럼, 새 예루살렘 성밖은 지옥인가 천국인가? 우리는 이 문제를 놓고 한 때 심각하게 고민했었다. 그래서 결론이 난 것은 성밖을 결코 '천국'이라고 정의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곳은 슬피 울며 이를 가는 곳이기 때문이다(마25:30). 실제로 주님께서도 결코 그곳에는 심방을 가지 않는 곳이기 때문이다. 어떤 곳에서는 형벌을 받기도 한다(마24:51). 그러므로 그곳을 '천국'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을 두고 무조건 그를 가리켜 "지옥에 떨어졌다"라고 말하는 것에 대해서는 조금 조심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지옥'이라는 말은 불과 유황이 타는 못 곧 불못을 가리키는데, 믿는 이들 중에 죄를 해결하지 못해 성밖으로 가는 이들도 있기 때문이다(막9:43). 그리고 마태복음과 요한계시록을 보면, '불못'(계21:8)과 '성밖'(계22:15)은 분명 다른 곳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자살한 이들에 대해서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런 사람은 결단코 새 예루살렘 성 안 곧 천국에는 못 들어간다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이 자신을 죽인 죄에 대해서 용서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니 회개할 기회를 스스로 박탈시켜 버림으로 자신이 지은 살인죄가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살한 자는 최소한 천국에는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3. 가룟 유다는 죽어서 어디로 갔는가?
그렇다면 가룟 유다는 죽어서 어디로 갔을까? 성경은 그의 죽음과 관련하여 2가지 사실을 알려 준다. 첫째, 그가 자살을 했다는 것이다(마27:3~5, 행1:18~19). 그는 예수께서 유죄 선고를 받았다는 것을 안 후에 스스로 뉘우쳐 자기가 예수님을 넘겨준 값으로 받은 은 30냥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었다(마27:3). 그리고 말했다. "내가 무죄한 자의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마27:4) 하지만 그들은 그것이 자기들에게 무슨 상관이냐고 하면서 그가 당하라고 말했다. 그러자 유다는 은 30을 성소 안으로 던져버린 후에 스스로 물러가서 목을 매어 죽음을 선택한다(마27:5). 그런데, 사도행전 1장에서는 베드로가 이후에 되어진 일들에 대해서 더 자세한 정보를 알려 준다. 그것은 그가 목을 매단 이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흘러나와서 죽었다는 것이다(행1:18). 아마도 그가 목을 매단 나무가 부러졌든지 아니면 끈이 떨어졌든지 그가 나무에서 떨어졌고 그때 받은 충격이나 어떤 요인으로 인해 배가 터졌으며 그래서 그 안에 있는 장기들이 쏟아져 나왔다는 것이다. 비참한 죽음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그와 같은 사실은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다고도 했다(행1:19). 그러자 대제사장들이 성소에 던져버린 그 돈으로 밭을 샀는데, 그 밭의 이름을 "아켈다마(피밭)"라고 부르며, 나그네의 묘지로 삼았다는 것이다(행1:19).
둘째, 그가 자살한 후 자기의 직무로부터 [떠나] 자기 자신의 자리(장소) 안으로 가기 위하여 옆으로 걸어갔다는 것이다(행1:25). 이 말은 무슨 뜻인가? 자신이 이땅에 보내어질 때 그에게도 어떤 사명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봉사의 직무와 사도의 직무였을 것이다(행1:25). 그리고 그가 그것을 성실히 감당했다면 그는 하늘에 이미 준비된 그의 보좌 자리에 앉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 직무를 버린 것이다. 그리고 자기 자신이 선택한 자리(장소) 안으로 가게 된 것이다. 그것은 최소한 '성밖'이요 더 나아가서는 '불못'이 될 수 있을 것이다.
4. 가룟 유다는 후회만 했는가 회개도 했는가?
그렇다면 가룟 유다는 자기의 스승을 판 죄에 대해서 어떻게 여겼는가? 제일 처음 그는 대제사장들을 찾아가서, 자기의 스승을 그들에게 넘겨줄 테니까 얼마나 주겠는지 흥정을 하였다(마26:14~16). 그리하여 그들로부터 은 30을 받고 주님을 넘겨주게 된다. 그러나 '은 30'이라는 돈은 노예 1명 값어치 수준 밖에 안되기 때문에, 그가 돈이 탐이 나서 스승을 팔아넘긴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아마도 다른 뜻이 있지 않았을까 싶다. 그것의 한 예를 들자면 다음과 같다. 가룟 유다는 자신이 스승의 능력과 권세와 지혜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던 제자였다. 그러다 보니 예수님 정도 되면 로마에 대항하여 싸워서 얼마든지 새로운 나라를 건설할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러한 일에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이다. 그러자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자극시키고자 일부러 대제사장들에게 넘겨주려 했다는 것이다. 그러면 예수께서 분연히 일어나 대제사장들과 또한 이들과 결탁한 로마에 대항하여 싸울 것이고 그리하여 새 나라를 건설할 것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 세상 나라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으시고 오히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에게 순순히 붙잡혀 죽으러 가시는 것이었다. 그러자 그는 자신의 판단이 잘못 되었음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스승을 팔아넘긴 죄에 대해 자책하게 되었고, 씻을 수 없는 죄를 저지른 것에 대해서 자기가 그 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고는 그만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에 대해 다른 가설을 세워볼 수도 있다. 그가 예수님을 팔아넘긴 이유는 그가 구약 성경에 나오는 배반 예언을 성취하기 위함이었다고 말이다. 누군가는 예수님을 팔아넘겨야 하는데, 가룟 유다가 그 일을 감당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예수님을 넘겨서 죽게 한 것은 잘한 일이요 상 받을 일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스승을 팔아넘긴 죄책감에 시달리게 되었고 자신의 양심의 참소를 이기지 못해 자살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가 지옥에 갔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메시야에 대한 구약 예언을 이룬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어떠한가? 그럴듯해 보이지 아니한가? 하지만 이것은 거의 궤변 수준이 아닌가 판단된다. 가룟 유다는 예언을 성취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 대한 기대가 허물어지자 예수님을 자극해서라도 자신의 기대에 부응하는 스승이 되도록 조종하려 했다고 보는 것이 훨씬 더 가능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과연 스승을 팔아넘긴 죄를 가룟 유다가 회개를 했느냐 하는 것이다. 사실 그가 자살하여 죽은 시점은 아직 예수님께서 죽지 않은 시점이었다. 예수께서 잡혀서 시위대 뜰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때라도 가룟 유다는 회개할 기회가 있었던 것이다. 그때도 늦지 않았던 것이다. 그때라도 예수님께 나아가서 자신의 잘못을 고하고 용서해 주시기를 청했으면 그는 아마 용서를 받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그는 자신이 예수님을 팔아넘긴 죄를 후회까지는 했지만, 회개는 안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회개라는 것은 첫째, 자신의 죄를 시인하고 둘째, 그것에 대해 스스로 뉘우쳐 그 죄에 대해 아파하는 것이며, 셋째, 그 죄값에 대해서 하나님께 나아가 자신의 처우를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룟 유다는 둘째 단계까지 행했지만 셋째 단계까지 나아가지 못했던 것이다. 고로 그는 후회는 했지만 회개는 안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자살은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를 의미없게 만들어버린 격이 된 것이다. 예수께서는 우리 죄를 대신하여 죽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것이다. 그리고 인류의 죄값을 담당하시기 위해 죽으신 것이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그 죄값을 예수님께 돌리지 않고 오히려 자신이 받으려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해 가룟 유다는 자신이 처리하려고 했을 뿐 그 문제를 주님께 가져간 후 주님의 처분을 기다리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이 죄인 것이다. 고로 그는 후회는 했지만 회개는 안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돌아온 탕자'의 비유를 통해서도 확인이 된다. 돌아온 탕자가 어떻게 되어서 자신이 지은 죄를 용서받았는지를 살펴보자. 그는 첫째, 그는 자신의 죄를 지었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했다.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그리고 둘째, 그는 스스로 자신의 잘못된 것을 뉘우쳤다. 그리고 셋째, 그러고 나서는 아버지께 돌아가 아버지의 처분을 기다렸다는 것이다. 이것이 생각과 감정와 의지를 동원한 회개의 3요소가 다 들어 있는 회개인 것이다. 그런데 가룟 유다는 처음 2가지 것들은 행했지만 마지막 세 번째 것은 행하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결국 그는 성밖이나 혹은 불못에 떨어지고 만 것이다.
5. 왜 베드로는 죽은 가룟 유다 대신에 다른 사도를 보선해야 했는가?
왜 베드로는 그 중요한 기도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새 사도를 보선하려고 했던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예수님으로부터 혹은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특별한 지시를 전달받은 것이 있지 않았었나 추측이 된다. 왜냐하면 가룟유다가 궐이 나자 그때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다른 사도를 보선했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이후에는 어떤 사도들이 죽더라도 사도회에서는 다른 이를 보선하지 않았다. 그런데 베드로는 가룟 유다 대신에 다른 사도들을 보선하려고 하였다. 다른 사도들을 보선하라는 지시를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서였을까? 그것은 아마도 천국의 12기초석 위에 새겨질 이름이 가룟 유다 대신에 다른 사도의 이름이 필요해서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왜냐하면 천국은 새 예루살렘 성을 가리키는 것인데, 그 성의 기초석은 12개로서 이 기초석 위에 어린양의 12사도들의 이름이 기록되어야 하기 때문이다(계21:14). 그런데 한 사람의 이름이 지워진 상태가 되었으므로 그 이름 대신에 들어갈 새로운 이름이 필요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6. 새 사도인 '맛디아'는 어떤 인물인가?
그리하여 베드로가 일어나 새로운 사도 한 명을 제비뽑아서 보선할 것을 제안한다(행1:21~22). 그리고 그 조건으로서 2가지를 제시한다. 하나는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부터 그분이 승천하신 날까지 12사도들과 함께해 온 자들 가운데서 한 명을 선택하자고 제안하였다. 그리고 또 하나는 예수님의 부활의 증인이 될 자를 선택하자고 제안했으니, 이는 예수께서 부활하신 것을 직접 목격한 자라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공생애 동안 예수님 곁에 있었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을 직접 눈으로 목격한 자들 중에 다른 새 사도를 선출하게 된 것이다. 그러자 두 명이 천거되었는데, 한 사람은 '요셉'이었고 또 한 사람은 '맛디아'였다. 그런데 요셉은 그 이름이 여러 개였다. 하나는 '바사바(바르사밧)'였다. 이는 '바르'라는 단어 '아들'과 '샤밧'이라는 단어 '안식일'이 서로 합쳐진 말로서, 히브리어로는 그 뜻이 '안식일의 아들'이다. 그리고 '유스도'도 그의 이름이었는데 이는 로마식(라틴어) 이름으로서 '의로운 자'라는 뜻이다. 그리고 요셉은 그의 히브리식의 이름이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이 천거되었으니 그는 바로 '맛디아'였다. 그 이름의 뜻은 "여호와의 선물"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맛디아에 대해서는 더 다른 자료들이 없다. 다만 알려진 바에 의하면, 그는 에디오피아로 가서 선교하였고 거기에서 순교했다고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그는 현재 천국에서 높은 지위의 보좌에 앉아 있다. 그러므로 우리도 천국복음 전파에 늦게 합류했든지 아니면 처음부터 합류했든지 상관없이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에 최선을 다해 살아가면 주님 앞에 섰을 때에 나도 칭찬을 들을 수 있는 성도가 되어 있을 것이다.
7. 나오며
가룟 유다의 죽음처럼 안타까운 죽음이 또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가룟 유다가 자기 스승을 자기 나름대로 일깨우기 위해 어떤 작전을 벌인 것 같은데, 그만 그 일이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자, 그는 자책감을 못 이겨 스스로 목숨을 끊어 버렸기 때문이다. 다만 그에게 아쉬움이 남는 것은 아직 예수께서 살아계실 때에 그분 앞에 나아가 자신의 잘못을 고하고 그분의 처분을 기다렸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아마도 사탄이 들어가서 그런 것 같다). 오히려 자신의 죄만을 자책한 나머지 스스로 목숨을 끊어 버리는 비참한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죄를 짓고도 그냥 뻔뻔스럽게 살아가고 있는 오늘날의 우리들의 모습보다는 더 양심적이 아닌가 하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육신을 입고 오신 목적, 곧 그분이 자신의 목숨을 우리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로 주려고 한 것이 아무 소용없는 일이 되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죄를 지었더라도 주님 앞으로 나아가 죄를 고백하고 그분의 처우를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아니 그렇게 해야만 한다. 그래야 주님의 죽음이 의미가 있게 되기 때문이다. 주님의 피의 가치가 더 높아지기 때문이다. 가룟 유다는 죽었다. 그런데 그가 어디로 갔는지 성경에는 명확하게 나와 있지 않다. 다만 그는 자기 자신의 자리 안으로 가기 위하여 옆으로 걸어갔던 것만큼은 확실하다. 그러므로 그의 운명은 최소한 '성밖'으로 보이며, 더 크게 보면 '불못'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주장이 맞는 주장인지는 나중 새 예루살렘 성안(천국)과 성밖(지옥의 일부분) 그리고 지옥(완전 지옥)으로 가서 확인해 볼 수 있을 것이다.
2022년 06월 12일(주일)
정병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