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사도행전 강해(01) 사도행전, 어떤 책인가?(01)(행1:1~11)_2022-06-06(월)
https://youtu.be/AnUItRfQzko [혹은 https://tv.naver.com/v/27209740 ]
1. 책 제목이 들려주는 '사도행전'은 어떤 책인가?
사도행전은 헬라어로 '프락세아스 아포스톨론' 즉 '사도들의 행적'을 기록한 책이다. 어떤 행적인가? 그것은 사도들이 예수님의 후계자가 되어서 천국복음을 전파했던 것을 기록한 책이다. 한 마디로 사도들의 복음전파를 기록한 책이 '사도행전'인 것이다. 하지만 사도행전은 단 두 사도에게 촛점을 맞추고 있다. 한 사람은 '베드로'이며 또 한 사람은 '바울'이다. 베드로는 육신을 입고 33년간 이 땅에 사셨던 예수께서 공생애 기간에 선택한 12사도들의 대표자이며,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께서 선택한 사도들 중의 대표자다. 여기서 '사도(아포스톨로스)'라는 말은 '보냄을 받은 자'를 뜻한다. 다시 말해 복음을 전파하도록 예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 곧 사도인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12제자들은 첫 사도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첫 사도들의 대표는 '베드로'이다. 그러므로 사도행전도 딱 두 부분으로 나눠볼 수 있다. 먼저는 사도행전의 전반부인 1~12장까지는 베드로를 중심으로,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에 복음이 전파된 것을 기록하고 있고, 후반부인 13~28장까지는 바울을 중심으로, 복음이 수리아 안디옥과 비시디아 안디옥 그리고 에게해를 건너서 마게도냐(그리스)와 로마까지 복음이 전파된 것을 기록하고 있다.
2. 사도행전의 기록은 어떻게 끝마치고 있는가?
보통 성경책들은 내용상 서론과 본론 그리고 결론이라는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사도행전은 서론과 본론은 있지만, 결론이 없다. 그냥 진행형으로 끝이 난다. 즉 복음이 힘있게 전파되고 있다고 적고 있는 것이다. 그럼, 잠깐 사도행전의 끝 부분을 살펴보자.
행28:30-31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머물면서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31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
그렇다. 사도행전은 바울이 2년을 로마에 있는 자기의 전셋집에 머무르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그리고 거침없이 가르쳤다고 마무리된다. 그런 의미에서 사도행전은 열려있는 책이요, 미완료의 책이라고 할 수 있다. 놀랍게도 이러한 경향은 사도행전 내내 계속된다. 즉 복음전파가 계속해서 열린 문을 통하여 더 확장되어가고 있음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행전은 1차적으로 베드로에 의한 복음전파가 12장까지 나온다. 그리고 그 뒤에 베드로가 어떻게 되었는지 기록하지 않고 그냥 숨겨둔다. 계속해서 어딘가에 가서 복음을 전파하고 있을 것으로 추정하라고 말이다. 그러다가 베드로가 15장에 가서 갑자기 나타난다. 최초의 기독교 예루살렘공회의 때에 그가 예루살렘교회에 다시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또 기록이 없다. 그런데 베드로처럼 바울을 부르실 때에 언제 어디에서 부르셨는지가 분명하다. 사도행전 9장은 바울의 부르심에 관하여 기록하고 있는데, 그는 13장에서부터 전도여행을 떠나난다. 그래서 1차전도여행과 2차 그리고 3차전도여행을 다녀온다. 그리고 로마여행(4차전도여행)을 하여 로마에 도착하였고 거기서 2년동안 열심히 복음을 증거하고 있다고 기록하고 사도행전은 끝을 맺는다. 그 뒤에 그가 로마에서 어떻게 되었는지를 기록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바울이 로마에서 여전히 그리고 담대하게 그리고 거침없이 복음을 전파하고 있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다. 마치 그 뒷부분은 우리들더러 "너희도 바울의 뒤를 이어서 계속해서 복음을 전파해야 되지 않겠느냐"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3. 복음전파에 있어서 사도행전이 알려주는 아주 중대한 교훈은 무엇인가?
우리는 사도행전의 기록을 보면서 자신이 마치 복음전파의 그 현장에 동참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 복음전파의 현장들을 기자가 취재하듯이 사도행전의 저자가 잘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가 사도행전을 볼 때에는, 사도행전의 최대의 분수령이 무엇인지를 볼 수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바로 사도행전 9장의 사건이다. 왜냐하면 사도행전 9장은 첫 번째로 복음전파의 기수였던 베드로가 여전히 살아았고 여전히 복음을 전파하고 있지만 예수께서 두 번째 복음전파의 기수로서 사울(후에 바울)을 부르고 있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육체를 입으셨던 예수께서 공생애 가운데 불러내어 사도로 삼았던 베드로를 제쳐두고 또 다른 사람을 불러내어 복음전파의 새로운 기수로 삼고 있는 것이다. 왜 그랬던 것일까? 우리는 이 부분에 아주 주목해야 한다. 나중에 사도행전 각 장 강해에 들어가서도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하나님께서는 현재 활동하고 있는 베드로를 놔두고 왜 바울을 부르셔야 했었는지를 정확히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한 마디로 복음전파의 '개방성 여부' 때문이다. 그리고 복음전파의 '유연성 여분' 때문이다. 베드로는 여기에 미치지 못했던 것이다. 베드로가 복음을 전파할 때에는 유대인이라는 혈통적인 한계를 벗어나려 해보았지만 그것이 쉽지 않았던 것 같다. 왜냐하면 갈라디아서 2장을 읽어보면, 베드로가 최초의 이방인 교회였던 안디옥 교회에 방문하면서 거기에서 이방인들과 식사를 하고 있었는데, 예루살렘에서 어떤 할례자들이 온다 하는 말을 들었을 때에, 그만 이방인인과의 식사 자리를 피해버렸기 때문이다(갈2:11~12). 그러자 사도 바울은 베드로가 복음의 진리를 따르지 않는 것을 보고는 그를 책망을 엄히 책망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렇다. 베드로는 유대인의 한계를 벗어나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그에게 주어진 사명이 '할례자들의 사도'였기 때문이었으리라는 생각은 든다(갈2:7). 그러나 그렇더라도 베드로가 그때 처신을 올바르게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복음전파에 있어서 개방적이었던 헬라파 유대인인 바울을 불러내어 그를 사용하신 것이다. 히브리파 유대인의 대표였던 베드로가 복음전파에 있어서 여전히 폐쇄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복음전파의 깃발은 바울에게 이어졌고 그로 인하여 복음을 유대인을 넘어서 이제 이방인에게까지 향하게 된다. 그리하여 드디어 복음이 팔레스타인을 넘어 전 세계로 확장되어 가게 된 것이다.
4. 사도행전이 말하는 교훈을 회개와 천국복음이 이어받으려면?
이렇듯 복음전파는 하나님의 뜻과 방향에 촛점이 맞추어져야 한다. 다시 말해 이 땅에 강림하신 하나님의 영의 뜻과 의지에 촛점이 맞추어져야 하는 것이다. 오순절 이후 성령 하나님께서는 유대인 뿐만 아니라 이방인에게까지 천국복음이 전파되기를 원하시고 계신다. 그러므로 먼저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은 자기의 울타리 안에만 갇혀 있어서는 아니 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도 그를 더 이상 쓸 수가 없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뜻과 의지를 알고 그 뜻에 순종하는 자를 쓰시기 때문이다. 그런 자에게로 복음전파의 깃발을 옮기시기 때문이다. 사실 오늘날 "회개와 천국복음"과 같은 엄청난 메가톤급의 복음은 발견하기가 어렵다. 아니 이것이 마지막 때에 전파해야 할 최종적인 복음이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종말이 언제 올 것인지를 묻는 제자들에게 그 답을 알려주셨다. 그것은 '천국복음'이 땅끝까지 증언되는 때라고 하셨다(마24:14). 그러므로 동탄명성교회와 같은 규모가 작은 교회라 할지라도 회개와 천국복음을 깨닫고 복음을 증거한다면 그것이 바로 올바른 복음전파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복음을 우리만 듣고 우리만 천국에 들어오라고 주님께서 먼저 알려주신 것은 아닐 것이다. 만약 그렇게 하여 "회개와 천국복음'을 또한 폐쇄적으로 간직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 교회에 핍박을 주어 흩어버리신 것처럼 우리들도 산산히 흩어버리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받은 회개와 천국복음의 말씀을 우리도 역시 다른 사람에게도 나눠주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회개와 천국복음이 얼마나 가치 있고 능력있는 복음인지를 먼저 자신이 경험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이 경험한 그것을 다른 사람과 지역 그리고 다른 나라와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에게까지 전해주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 일이야말로 참된 복음을 먼저 깨닫고 먼저 믿은 자에게 주어진 특권이자 사명이기 때문이다.
5. 사도행전 1장의 서두에 등장하는 12사도들의 한계는 무엇이었는가?
그런데 사도행전 1장의 첫 부분을 읽어보자. 거기에서 예수께서 승천하기 직전 그 앞에 있는 제자들의 모습이 나온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님에게 던지는 질문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이스라엘 나라(왕국)을 회복하심이 이때니이까?"하는 것이었다(행1:6).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질문이 아닌가? 그러자 주님께서는 그 질문에 대해 어떤 대답을 하지 않으신다. 때와 기한은 그들이 알 바가 아니라고만 말씀하신다. 그리고 그들이 해야할 사명을 말씀하신다. 그것은 성령이 곧 그들 위에 내려오시면 능력을 받아 천국복음을 전파하라고 하신다. 이 말씀은 무슨 뜻인가? 그들이 여전히 모르고 있는 것이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들에게 먼저 천국복음이 전해진 이유를 잘 모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 순간에 이스라엘 나라의 독립이 언제인지를 묻고 있는 것이다. 사실 주님께서 다른 이들보다 먼저 제자들에게 천국복음을 들려주신 이유가 있다. 그것은 그들이 먼저 천국백성의 대열에 동참하게 되고 이어서 이제는 그들이 모든 민족에게 천국복음을 전파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오직 자기 나라의 독립만을 갈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모습은 비단 그들만의 모습인 것일까? 회개와 천국복음도 언젠가는 전세계으로 전파되는 날이 올 것이다. 어느 민족이든지 복음을 듣고 천국에 들어갈 준비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천국에서 들어가서도 존경받는 위치를 차지하도록 도와야 하기 때문이다. 이제는 회개와 천국복음을 통하여 이 마지막 때에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알곡을 추수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끼리만 회개와 천국복음을 듣고 우리끼리만 천국에 들어가기를 힘쓰는 것은 바람직한 것이 아니다. 빨리 그러한 생각에서 빠져나와야 한다. 그리고 회개와 천국복음이 전 세계에 전파될 수 있도록 나도 열린 마음으로 물을 흘려보내야 하는 것이다.
2022년 06월 06일(월)
정병진목사
1. 책 제목이 들려주는 '사도행전'은 어떤 책인가?
사도행전은 헬라어로 '프락세아스 아포스톨론' 즉 '사도들의 행적'을 기록한 책이다. 어떤 행적인가? 그것은 사도들이 예수님의 후계자가 되어서 천국복음을 전파했던 것을 기록한 책이다. 한 마디로 사도들의 복음 전파를 기록한 책이 '사도행전'인 것이다. 하지만 사도행전은 단 두 사도에게 촛점을 맞추고 있다. 한 사람은 '베드로'이며 또 한 사람은 '바울'이다. 베드로는 육신을 입고 33년간 이 땅에 사셨던 예수께서 공생애 기간에 선택한 12사도들의 대표자이며,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께서 선택한 사도들 중의 대표자다. 여기서 '사도(아포스톨로스)'라는 말은 '보냄을 받은 자'를 뜻한다. 다시 말해 복음을 전파하도록 예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 곧 사도인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12제자들은 첫 사도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첫 사도들의 대표는 '베드로'이다. 그러므로 사도행전도 딱 두 부분으로 나눠볼 수 있다. 먼저는 사도행전의 전반부인 1~12장까지는 베드로를 중심으로,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에 복음이 전파된 것을 기록하고 있고, 후반부인 13~28장까지는 바울을 중심으로, 복음이 수리아 안디옥과 비시디아 안디옥 그리고 에게해를 건너서 마게도냐(그리스)와 로마까지 복음이 전파된 것을 기록하고 있다.
2. 사도행전의 기록은 어떻게 끝마치고 있는가?
보통 성경책들은 내용상 서론과 본론 그리고 결론이라는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사도행전은 서론과 본론은 있지만, 결론이 없다. 그냥 진행형으로 끝이 난다. 즉 복음이 힘있게 전파되고 있다고 적고 있는 것이다. 그럼, 잠깐 사도행전의 끝부분을 살펴보자.
행28:30~31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머물면서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31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
그렇다. 사도행전은 바울이 2년을 로마에 있는 자기의 전셋집에 머무르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그리고 거침없이 가르쳤다고 마무리된다. 그런 의미에서 사도행전은 열려 있는 책이요, 미완료의 책이라고 할 수 있다. 놀랍게도 이러한 경향은 사도행전 내내 계속된다. 즉 복음 전파가 계속해서 열린 문을 통하여 더 확장되어 가고 있음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행전은 1차적으로 베드로에 의한 복음 전파가 12장까지 나온다. 그리고 그 뒤에 베드로가 어떻게 되었는지 기록하지 않고 그냥 숨겨둔다. 계속해서 어딘가에 가서 복음을 전파하고 있을 것으로 추정하라고 말이다. 그러다가 베드로가 15장에 가서 갑자기 나타난다. 최초의 기독교 예루살렘 공회의 때에 그가 예루살렘 교회에 다시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또 기록이 없다. 그런데 베드로처럼 바울을 부르실 때에 언제 어디에서 부르셨는지가 분명하다. 사도행전 9장은 바울의 부르심에 관하여 기록하고 있는데, 그는 13장에서부터 전도 여행을 떠난다. 그래서 1차 전도 여행과 2차 그리고 3차 전도 여행을 다녀온다. 그리고 로마 여행(4차 전도 여행)을 하여 로마에 도착하였고 거기서 2년 동안 열심히 복음을 증거하고 있다고 기록하고 사도행전은 끝을 맺는다. 그 뒤에 그가 로마에서 어떻게 되었는지를 기록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바울이 로마에서 여전히 그리고 담대하게 그리고 거침없이 복음을 전파하고 있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다. 마치 그 뒷부분은 우리들더러 "너희도 바울의 뒤를 이어서 계속해서 복음을 전파해야 되지 않겠느냐"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3. 복음 전파에 있어서 사도행전이 알려 주는 아주 중대한 교훈은 무엇인가?
우리는 사도행전의 기록을 보면서 자신이 마치 복음 전파의 그 현장에 동참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 복음 전파의 현장들을 기자가 취재하듯이 사도행전의 저자가 잘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가 사도행전을 볼 때에는, 사도행전의 최대의 분수령이 무엇인지를 볼 수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바로 사도행전 9장의 사건이다. 왜냐하면 사도행전 9장은 첫 번째로 복음 전파의 기수였던 베드로가 여전히 살아 있고 여전히 복음을 전파하고 있지만 예수께서 두 번째 복음 전파의 기수로서 사울(후에 바울)을 부르고 있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육체를 입으셨던 예수께서 공생애 가운데 불러내어 사도로 삼았던 베드로를 제쳐 두고 또 다른 사람을 불러내어 복음 전파의 새로운 기수로 삼고 있는 것이다. 왜 그랬던 것일까? 우리는 이 부분에 아주 주목해야 한다. 나중에 사도행전 각 장 강해에 들어가서도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하나님께서는 현재 활동하고 있는 베드로를 놔두고 왜 바울을 부르셔야 했었는지를 정확히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한 마디로 복음 전파의 '개방성 여부' 때문이다. 그리고 복음 전파의 '유연성 여부' 때문이다. 베드로는 여기에 미치지 못했던 것이다. 베드로가 복음을 전파할 때에는 유대인이라는 혈통적인 한계를 벗어나려 해 보았지만 그것이 쉽지 않았던 것 같다. 왜냐하면 갈라디아서 2장을 읽어 보면, 베드로가 최초의 이방인 교회였던 안디옥 교회에 방문하면서 거기에서 이방인들과 식사를 하고 있었는데, 예루살렘에서 어떤 할례자들이 온다 하는 말을 들었을 때에, 그만 이방인과의 식사 자리를 피해버렸기 때문이다(갈2:11~12). 그러자 사도 바울은 베드로가 복음의 진리를 따르지 않는 것을 보고는 그를 엄히 책망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렇다. 베드로는 유대인의 한계를 벗어나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그에게 주어진 사명이 '할례자들의 사도'였기 때문이었으리라는 생각은 든다(갈2:7). 그러나 그렇더라도 베드로가 그때 처신을 올바르게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복음 전파에 있어서 개방적이었던 헬라파 유대인인 바울을 불러내어 그를 사용하신 것이다. 히브리파 유대인의 대표였던 베드로가 복음 전파에 있어서 여전히 폐쇄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복음 전파의 깃발은 바울에게 이어졌고 그로 인하여 복음이 유대인을 넘어서 이제 이방인에게까지 향하게 된다. 그리하여 드디어 복음이 팔레스타인을 넘어 전 세계로 확장되어 가게 된 것이다.
4. 사도행전이 말하는 교훈을 회개와 천국복음이 이어받으려면?
이렇듯 복음 전파는 하나님의 뜻과 방향에 촛점이 맞추어져야 한다. 다시 말해 이 땅에 강림하신 하나님의 영의 뜻과 의지에 촛점이 맞추어져야 하는 것이다. 오순절 이후 성령 하나님께서는 유대인 뿐만 아니라 이방인에게까지 천국복음이 전파되기를 원하시고 계신다. 그러므로 먼저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은 자기의 울타리 안에만 갇혀 있어서는 아니 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도 그를 더 이상 쓸 수가 없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뜻과 의지를 알고 그 뜻에 순종하는 자를 쓰시기 때문이다. 그런 자에게로 복음 전파의 깃발을 옮기시기 때문이다. 사실 오늘날 "회개와 천국복음"과 같은 엄청난 메가톤급의 복음은 발견하기가 어렵다. 아니 이것이 마지막 때에 전파해야 할 최종적인 복음이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종말이 언제 올 것인지를 묻는 제자들에게 그 답을 알려 주셨다. 그것은 '천국복음'이 땅끝까지 증언되는 때라고 하셨다(마24:14). 그러므로 동탄명성교회와 같은 규모가 작은 교회라 할지라도 회개와 천국복음을 깨닫고 복음을 증거한다면 그것이 바로 올바른 복음 전파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복음을 우리만 듣고 우리만 천국에 들어오라고 주님께서 먼저 알려 주신 것은 아닐 것이다. 만약 그렇게 하여 '회개와 천국복음'을 또한 폐쇄적으로 간직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 교회에 핍박을 주어 흩어 버리신 것처럼 우리들도 산산히 흩어 버리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받은 회개와 천국복음의 말씀을 우리도 역시 다른 사람에게도 나눠 주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회개와 천국복음이 얼마나 가치 있고 능력있는 복음인지를 먼저 자신이 경험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이 경험한 그것을 다른 사람과 지역 그리고 다른 나라와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에게까지 전해 주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 일이야말로 참된 복음을 먼저 깨닫고 먼저 믿은 자에게 주어진 특권이자 사명이기 때문이다.
5. 사도행전 1장의 서두에 등장하는 12사도들의 한계는 무엇이었는가?
그런데 사도행전 1장의 첫 부분을 읽어 보자. 거기에는 예수께서 승천하기 직전 그 앞에 있는 제자들의 모습이 나온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님에게 던지는 질문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이스라엘 나라(왕국)를 회복하심이 이때니이까?"하는 것이었다(행1:6).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질문이 아닌가? 그러자 주님께서는 그 질문에 대해 어떤 대답도 하지 않으신다. 때와 기한은 그들이 알 바가 아니라고만 말씀하신다. 그리고 그들이 해야 할 사명을 말씀하신다. 그것은 성령이 곧 그들 위에 내려오시면 능력을 받아 천국복음을 전파하라고 하신다. 이 말씀은 무슨 뜻인가? 그들이 여전히 모르고 있는 것이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들에게 먼저 천국복음이 전해진 이유를 잘 모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 순간에 이스라엘 나라의 독립이 언제인지를 묻고 있는 것이다. 사실 주님께서 다른 이들보다 먼저 제자들에게 천국복음을 들려주신 이유가 있다. 그것은 그들이 먼저 천국 백성의 대열에 동참하게 되고 이어서 이제는 그들이 모든 민족에게 천국복음을 전파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오직 자기 나라의 독립만을 갈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모습은 비단 그들만의 모습인 것일까? 회개와 천국복음도 언젠가는 전세계으로 전파되는 날이 올 것이다. 어느 민족이든지 복음을 듣고 천국에 들어갈 준비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천국에 들어가서도 존경받는 위치를 차지하도록 도와야 하기 때문이다. 이제는 회개와 천국복음을 통하여 이 마지막 때에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알곡을 추수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끼리만 회개와 천국복음을 듣고 우리끼리만 천국에 들어가기를 힘쓰는 것은 바람직한 것이 아니다. 빨리 그러한 생각에서 빠져나와야 한다. 그리고 회개와 천국복음이 전 세계에 전파될 수 있도록 나도 열린 마음으로 물을 흘려보내야 하는 것이다.
2022년 06월 06일(월)
정병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