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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 해주어야 할 만큼 전적으로 타락한 상태에 있는 것일까? 아니면 비록 스스로 선을 행하기에는 역부족이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고 성령이 역사하시면 거기에 반응할 정도로 심각하게 타락해 있는 것일까? 또한 사람이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인가 아니면 믿음과 행함을 통해서인가? 이것도 그것도 아니라 믿음과 회개를 통해서인가? 오늘은 인간의 상태와 구원에 관한 바른 성경적인 관점을 살펴보도록 하자.

 

  먼저, 첫째,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했는지 아니면 심각하게 타락했는지부터 살펴보자. 그동안 우리에게 알려진 바에 의하면,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해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대로 놔두면 인간은 반드시 멸망으로 들어갈 만큼의 타락한 상태에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알아서 다 해주어야 인간이 회복이 되는지에 대해서는 한 번쯤 다시 생각해보아야 한다. 칼빈주의자들(이중예정론과 견인교리를 주장하는 자들)은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했기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회개할 마음을 주시지 않으면 회개할 수조차 없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예수님에 대한 믿음도 하나님께서 그에게 그러한 믿음을 주셔야 믿음도 갖게 된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한 상태이므로 아무것도 행할  수 없는 상태여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처우만을 기다는 것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정말 이 주장은 맞는 것일까?

  범죄한 아담 이후 모든 인간은 스스로는 절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할 만큼 타락해 있는 것은 분명하다(롬3:23). 하나님 앞에서 의인은 있지 않되 하나도 있지 않기 때문이다(롬3:10). 어떤 사람은 이 말을 들으면서 자신은 죄인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자들도 있다. 아마도 자신은 감옥에 가는 죄를 짓지도 않았고 또한 나름대로 선하게 살아왔다고 자부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알아야 한다. 사람의 죄가 행동으로 옮긴 것만 죄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말로되 짓는 죄도 죄이며, 마음으로도 짓는 죄가 죄이기 때문이다. 사실 예수님이 오시 전까지 유대인들에게는 율법이라는 헌법과 같은 잣대가 있었다. 하지만 율법은 사람의 말과 마음까지도 정죄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그런데 예수께서 오셔서 우리 인간의 상태가 얼마나 심각한 상태인지 알도록 하기 위해, 사람의 죄를 행위에서 마음과 말로까지 확대하셨다. 그러므로 비록 자신이 감옥에는 가지 않았다 하더라도 말과 마음으로는 많은 죄를 범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죄인이 아닌 사람은 없다. 조금 더 생각해보면, 우리는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을 때 같이 범죄한 것이다. 모든 인류는 그때 다 아담의 허리에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담의 범죄는 곧 모든 인류의 범죄이며, 아담의 타락은 모든 인류의 타락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이미 아담이 지었던 범죄의 결과를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난다. 이것을 일컬어 신학적인 용어로, 인간은 '원죄' 즉 죄된 본성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정의한다. 그렇다. 사람은 원죄의 영양 아래에서 태어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세상 사람치고 사망이 왕노릇하지 아니할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했기 때문이다(롬6:23).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을 같이 우리도 같이 범죄했음을 잊지 말라. 

  그렇다면, 아담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인간 안에 내재되어있는 죄된 본성은 도무지 회복불능의 상태에 있는 것인가? 아니면 어떤 측면에 있어서는 회복이 가능한 상태에 있는 것인가? 칼빈주의자들은 인간은 아무것도 할 수도 없는 전적인 무능의 상태에 빠져 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전적으로 무능한 인간은 오직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베풀어주시는 은혜로서만이 구원받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것도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다 하나님께서 해주셔야만 구원받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과연 인간의 상태를 어떻게 진단하셨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첫째, 예수님은 사람은 이미 타락한 본성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은 매우 심각한 상태에 있다고 진단하셨다(마15:17~20). 사람의 입을 통해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속에서부터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고 있다고 말씀하셨다(마15:11). 그렇다면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곧 악한 생각 곧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거와 비방이다(마15:19~20). 둘째, 그러나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한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역사에 반응하게 되면 회복으로 나아갈 수 있을 만큼 타락했다고 진단하셨다(마12:18~21). 예수께서는인간의 이러한 상태에 대해 "인간은 상한 갈대요 꺼져가는 심지"라고 구약의 말씀을 인용하셨다(마12:20). 즉 인간을 자연상태 그대로 방치하게 되면 반드시 죽고 마는 상태라는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가 다가 와서 그를 다시 싸매어주고 붙들어 주면 다시 되살릴 수 있는 상태에 있다고 말씀하셨다. 만약 인간이 전적으로 타락해서, 하나부터 열까지 다 하나님께서 알아서 해 주셔야 하는 상태에 있다고 한다면, 구원의 전과정은 인간의 참여없이 오직 하나님이 다 알아서 해주셔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게 된다. 구원의 과정에 있어서 인간이 해야 할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이것이 진정 사실이라면 심판대 앞에서 과연 하나님의 공의가 제대로 설 수가 있을지를 생각해보라. 만약 어떤 사람이 멸망으로 들어가기로 만세전에 예정된 사람이라고 가정해보자. 그가 심판대에 나아가 하나님께  말하기를 "왜 당신은 나에게는 다른 사람과 같이 자비를 베푸시지 아니하시고, 만세전에 나를 버리기로 작정하셔서 나를 이 멸망으로 들어가게 하십니까? 당신의 처사는 매우 불공평하십니다."라고 했을 때, 하나님은 무슨 말로 그를 심판할 수 있을까? 이것을 거꾸로 생각해보면, 하나님께서 심판대에서 인간을 심판하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모든 인간에게 구원받을만한 공평한 기회를 주셨다는 것을 가정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는 누구든지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구원의 기회를 공평하게 제공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이 스스로 그 기회를 거부했기 때문에 그에 대한 심판은 공의로운 심판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받는 데에 있어서 인간은 그 어떤 것도 참여하지 않는다고 말해서는 아니 된다. 어떤 측면에서는 최소한의 무엇인가가 필요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구원을 위한 어떤 행위를 해서 구원을 얻게 된다는 뜻은 아니다. 적어도 하나님께서 베푸시려는 구원의 은총에 인간은 최소한 어떤 반응조치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구원의 은총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기뻐하고 그것에 감사하되, 자신은 원래 그 구원에 참여하기에 전혀 합당치 않는 사람인 것을 시인하는 것쯤은 필요한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은 하나님이 전적으로 마련해 두신 구원 안으로 자기자신을 초청해 주신 것에 대해 감사하며 기뻐하되, 그동안 자신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했던 것과 죄를 짓는데 빨랐던 사실을 겸손히 고백하는 것쯤은 필요한 것이다. 이 말은 인간이 하나님이 베푸실 구원에 대해 감사하며 자신의 죄된 모습을 회개하는 것 정도의 기본적인 예의는 갖추어야 함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베풀어주시는 구원의 은총에 대해 우리 인간은 자신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로서 조금은 반응해야 하는 것이다. 즉 머리로서는 하나님에 베풀어주시려는 구원의 과정을 들어서 알아야 하고, 마음으로는 그것을 즐거워하며 기뻐해야 하며, 의지적으로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받아들이겠다는 결단의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해야 할 최소한의 예의다.

  그리고 잘 생각해보라. 하나님에 베푸시는 은총에 반응하는 것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하나님이 베풀어주시는 구원의 은총에 결코 하나님이 대신 반응해주시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우리 인간이 해야 할 몫이기 때문이다. 이것까지 하나님이 대신 해 주는 것은 아니다. 즉 하나님이 대신 믿어주고 대신 감사하며 대신 결단해주는 것은 아닌 것이다. 그러나 칼빈주의자들은 이것까지도 다 하나님께서 해 주시는 것이라고 말한다.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한 나머지 너무 많이 나가고 말았다. 자, 마22장에 나오는 임금이 자신의 아들을 위해 마련한 천국혼인잔치의 비유를 보라. 여기에서 나오는 것처럼 잔치에 참여하는 손님은 적어도 임금이 마련해준 혼인잔치의 예복을 착용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사실 그 혼인잔치에 참여하게 된 자는 원래 초청받은 사람들은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소외되고 가난하고 병들어 그 누구도 거들떠 보지도 않던 유대인들이 참여했으며 또한 성밖에 지나가는 행인들 곧 이방인들이 참여하게 된 것이었다. 또한 그때 이들은 임금의 아들의 혼인잔치에 참여할 만한 어떤 준비를 하고 있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 잔치에 참여할 많안 어떤 자격도 갖추고 있지 않았다. 사실 잔치도 다 임금이 마련했던 것이요, 그날 잔치자리에 참여하기 위해서 필요한 예복도 다 임금이 마련해서 그들에게 건네 준 것이다. 그러므로 그날 손님이라면 적어도 그 잔치에 참여할 자격은 없지만 그 잔치에 불러준 임금의 호의에 감사할 줄 알아야 하며, 직접 자신의 발을 이용하여 그 잔치에 참여하는 의지는 보여야 하지 않겠는가? 또한 그 집에 들어갈 때에 임금이 준비해서 입혀 준 혼인잔치의 예복은 꼭 착용하고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 예복을 입고 있지 않게 된다면, 그날 그 잔치는 임금의 아들의 잔치가 아니라 거지들의 잔치가 되어버릴 것이고, 행인들의 잔치가 되어버릴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적어도 그 잔치에 참여한 손님이라면 항상 주인이 입혀준 그 예복을 입고 있어야 한다. 만약 그것을 주의하지 않고 있는 손님이라면, 그 사람은 임금이 베푸는 혼인잔치에 참여하는 자로서 최소한 예의마저 지키는 않는 자임에 분명하다. 그렇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다 준비해서 주시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들의 해야 할 몫이 하나도 없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그 잔치에 들어갈 수 있도록 허락해주신 주인되신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그 잔치 앞으로 나아가야 하며, 그분이 우리에게 준 의의 옷을 주의해야 한다. 어떤 이는 이것마저 행위구원이라고 매도하는 데, 이것은 행위구원이 아니다. 우리가 행위가 아무리 올바르다 해도 우리는 천국잔치를 준비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만 그것은 혼인잔치에 참여하는 자의 최소한의 예의인 것이다.

  그렇다. 인간이 타락한 것은 분명히 맞다. 아담의 범죄로 인해 인간 내면에는 모두가 악한 본성이 들어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인간이라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은혜베푸시고 성령이 역사했을 때에 거기에 반응을 할 수 있을 정도로 타락한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은 타락하기는 했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전적 무능한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니다. 심각하게 타락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초청해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그 잔치에 참여할 수 없다. 하지만 그 잔치에초청하면 그 잔치에 참여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결정할 수 있을 정도로 타락해 있는 것이다. 만약 하나님의 초청이 없이 그대로 놔두게 된다면 인간은 반드시 죽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의 역사와 우리 믿는 이들의 중보가 필요하며, 우리들의 사랑과 관심이 필요하다. 그래서 그들을 주님 앞으로 인도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도 하나님이 무료로 마련해둔 천국잔치에 함께 참여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그렇다. 인간이 심각한 타락한 상태에 있기는 한다. 그래서 스스로 천국혼인잔치에 참여할 수는 없다. 우리에게는 그런 잔치가 있다는 것도 모를 수 있으며 또한 그 잔치에 들어가면서 입을 옷도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구든지 하나님이 준비해두신 호의에 반응하기만 하면 인간은 다시 회복될 수 있을 정도는 된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인간의 타락의 상태인 것이다.

 

  둘째, 그렇다면 사람이 구원받으려면 무엇이 필요한가에 대해 살펴보자. 그동안 종교개혁자들은 오직 믿음만을 강조했다. 왜냐하면 로마카톨릭이 그동안 믿음을 강조하지 않고 행위구원만을 주장해왔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최근에는 사람이 구원을 받으려면 믿음에다가 행위가 있어야 한다는 분들도 더러 있다. 과연 무엇이 올바른 것인가?

  로마카톨릭은 사실 행위구원을 외치는 곳이다. 그곳에서 말하는 구원의 조건은 적어도 2가지 정도는 된다. 하나는 누구든지 반드시 교회에서 주는 세례(영세나 유아세례)를 받아야 하고, 또 다른 하나는 구제나 재정적인 기부를 해서 선행을 많이 쌓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이러한 선행이 천국에 들어가기에 조금이라도 부족하게 되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그들은 말한다. 그래서 지옥에는 떨어질 정도는 아니나 천국에 못 들어가는 성도들은 '연옥'에 들어가게 된다고 가르친다. 그런데 이러한 로마카톨릭의 교리 가운데 더욱 가관인 것은, 연옥에 있는 영혼을 위해서 누군가가 대신 공덕을 그에게 넘겨주게 되면 그도 연옥으로부터 천국으로 옮겨지게 된다고 가르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로마카톨릭 신도들 중에는 연옥에 있을지도 모를 자신의 부모를 천국에 들여보내기 위해 많은 공덕을 대신 쌓는 자가 많이 있다. 또한 이런 이유 때문에 천주교인들은 자신이 죽을 때에 자신의 재산 모두를 기부하는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자신을 구원할 만한 공덕이 부족하지 않기 위해서다. 그리고 혹시 자신을 구원하고도 남을 공덕이 있다고 한다면, 그 잉여공로를 연옥에 있는 자신의 다른 가족에게도 나눠주어 그들도 연옥에서 천국으로 옮기기 위함이다. 이것이 바로 '행위구원'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로마카톨릭의 반작용으로 나온 종교개혁자들은 사람의 구원은 자신의 선행과 같은 행위로서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서 받는 것이라고 주장하게 되었다. 인간이 아무리 선행을 많이 쌓는다 하더라도 그 선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의롭다함을 얻을만한 육체는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또한 아무리 선행을 많이 한다고 할지라도 사람은 그 누구도 자신의 죄된 본성을 이기지 못하며, 결국에는 죄를 짓고 마는 연약한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종교개혁자들은 사람이 구원받는 것은 자신을 구원할 만한 어떤 행위가 있어서가 아니라 오직 믿음을 통하여 구원을 얻게 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로마카톨릭에서 말하는 행위로 구원받는다는 것은 확실히 잘못된 것임에 분명하다. 왜냐하면 오직 율법을 다 지켜 자신의 행위로 구원받을만한 육체가 하나도 없다고 성경도 선언하고 있기 때문이다(롬3:20).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이 세상에 속죄제물로 보내심으로 그의 피를 통한 죄사함을 믿는 자를 구원하시기로 결정하셨기 때문이다(롬3:24).

  그렇다면, 구원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얻는다고 가르치는 것이 과연 옳은 주장일까? 어떤 사람이라도 오직 믿음만 있으면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일까? 로마카톨릭에 비하면 이러한 주장이 전적으로 틀린 것은 아니라고 하겠지만 이러한 주장에는 매우 치명적인 위험도 같이 들어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과거에 한 번 예수님을 믿기로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한 것 때문에 미래의 죄까지도 용서받을 수 있을까? 그러므로 종교개혁자들의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은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또한 종교개혁자들이 외치는 오직 믿음이라는 것도 과연 어떤 믿음인지에 대해서도 살펴보아야 한다. 단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요 메시야이신 것을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께서 인류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예수님을 화목제로 삼으신 것을 믿어야 구원을 받는 것인지에 대해서 살펴보아야 한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에 대한 인간의 신앙고백이 정말 자신이 죄인인 것을 철저히 시인하지도 않으면서도 자신은 오직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구원받은 것이라고 생각하는지에 대해서도 살펴보아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분명 모든 인류의 죄를 씻어줄 보배로운 피를 흘리셨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하지만 자신이 정말 죄인인지도 모르고 있는 자들을 용서해 줄 수는 없는 것이다. 또한 아직 짓지도 아니한 미래의 죄까지도 용서해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에 있어서는 현재가 중요한 것이다. 그래서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은 항상 현재진행형이다. 지금 내가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믿느냐 그리고 그분이 나를 위해 무슨 일을 하셨는지를 계속해서 믿고 있느냐가 중요하다. 그리고 자신이 행여 주님의 뜻을 따라 행하지 아니한 것을 지금도 계속 회개하고 있느냐가 중요하다. 만약 과거에 자신이 한 번 예수님을 믿었던 것이 지금도 똑같이 유효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과거에 예수님을 믿었던 자라 할지라도 만약 지금 믿음생활을 하고 있지 않다면 그의 믿음은 결코 유효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만약 자신이 지금 짓고 있는 죄를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의 죄는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죄는 자신의 마음과 입술로 고백할 때 용서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요즘 들어와서 한 번 믿음으로 영원히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는 주장이 많이 대두되고 있다. 상당히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고 믿음에다가 행위가 있어야 구원받는다고 주장해서도 아니 될 것이다.  구원이 믿음과 행함으로 주어지는 것이라고 한다면, 만약 죽기 전에 회개한 사람은 회개에 합당한 행위가 하나도 없기에 구원받을 수가 없다는 결론이 나오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시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리고 구원에 관하여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에 주목해야 한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때가 찾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1:15)." 그렇다.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서는복음만 믿는 것으로는 불충분하다. 회개하는 삶이 동반되어야 한다. 현재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죄를 용서받을 길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 사람이 구원받으려면 믿음과 더불어 반드시 회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자신이 죄인인지도 모르고 있고,  자신이 무슨 죄를 지었는지도 모르는 그리스도인들은 구원받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믿음과 회개를 통해서 구원을 받는 것임을 알라.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받는다고 주장해서는 위험하다. 왜냐하면 한 번 믿음이 영원한 믿음은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 어떻게 믿고 있느냐가 중요하며, 지금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고 있느냐가 구원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혹시 자신이 과거에 질 믿었던 자라도 지금 믿음생활을 하고 있지 않으면 그는구원받을 수 없다. 누구든지 그날도 여전히 신앙고백을 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의 죄를 회개해야 한다.

  하지만 행위의 열매는 구원의 여정을 길을 가는 자에게 자신이 제대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인가에 대하여 매우 중요한 판별기준이 된다. 그래서 회개하고 믿은 자의 행함의 열매들은 다음과 같이 2가지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하나는 그것을 통해 진정 구원을 향한 믿음의 노정에서 자신이 바르게 달리고 있는지를 확인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도 내 뒤안길을 돌아볼 때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열매들이 없다면 나는 진정 구원받은 사람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만약 그가 진정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음을 알고 믿고 있으며 자신의 삶을 반성하고 회개하는 삶을 살고 있다면,  그의 인생의 뒤안길에는 무수한 회개의 열매들이 맺혀 있을 것이다. 또 하나는 행함의 열매들은 그 사람이 장차 구원의 반열에 들어갈 경우에는 전부 다 상급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라는 점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달려갈 길을 다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니(딤후4:7~8)"라고 말이다. 그렇다. 그는 죽는 그날까지 믿음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으며, 주님께서 자신에게 부여한 사명완수를 위해 부지런히 달려갔던 것이다. 그러자 그는 자신의 죽음이 임박한 시간에 천국에서 자신을 위해 의의 면류관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고백할 수 있었다. 결국 천국에 들어가는 자에게만이 행위의 열매가 유용한 것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받을 수 있는 가장 큰 복은 천국에 들어가는 복이요, 두번째의 복은 천국에서 들어가서 상급을 받는 복이다.

  정리해보자. 구원은 믿음으로만 받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구원은 믿음과 행위로 받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의 행위를 달아볼 때, 자신의 행위로서 구원받을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과 사도들의 말씀에 따라 구원은 회개와 믿음으로 받는 것임을 인정해야 한다(막1:15). 우리는 "때가 찾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주님의 음성을 다시금 주목해야 한다. 그리고 부활승천하신 후 육십년이 지난 다음에 아시아에 있는 일곱교회에게 주신 말씀에도 주목해야 한다(계2~3장). 그 교회들 중에서 칭찬받았던 서머나교회와 빌라델비아 교회를 제외하고는 모든 교회에게 주님은 회개하라고 외치셨다. 이미 교회생활을 하고 있는 자라도 회개해야 구원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예수님을 믿을 때에도 회개하고 믿어야 하지만, 믿고 난 다음에도 날마다 자신이 지은 죄를 회개해야 한다. 그러면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러면 우리의 구원은 보다 더 확실해질 수가 있는 것이다. 당신에게 믿음이 있는가? 그리고 회개생활이 있는가? 그러면 이제는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있는지를 뒤돌아보라. 그래서 늘 자신을 점검하라.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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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을 멈추지 말라(고전14:14~18) file 갈렙 2015.02.01 2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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