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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칭의란 무엇인가?(눅18:9~14)

 

1. 들어가며

  모든 사람들은 저마다 개인적으로 어떤 선입관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선입관이나 선입견이 무서운 것은 한 번 형성된 선입관은 좀처럼 바뀌지가 않는다는 점이다. 이처럼 어떤 대상이나 진리에 대해 한 번 갖게 된 고정적인 관념이나 견해 등의 폐해는 이 세상의 정치에서만 나타나는 증상이 아니다. 성경의 중요한 교리들 속에서도 속속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칭의와 구원과 천국의 개념에서도 선입관은 매우 크게 작용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어떤 이는 칭의를 얻은 것을 구원을 받는 것과 동일시하기도 하며, 또 어떤 이는 구원을 받는 것과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동일한 것이라고 믿기도 한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사실 칭의나 구원이나 천국은 전부다 "믿음"이라는 공통분모가 있다. 하지만 이것들을 시간적인 순서에 따라 구성해보면 확실히 다른 개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결론적으로, 칭의는 구원여정에 있어서 첫 출발에 해당하지만,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구원여정의 종착지점에 해당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칭의는 이 세상에서부터 받는 것이고 육신도 받는 것이지만,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이 세상을 떠나는 날에 받는 것이고 자신의 영혼이 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칭의를 받는 것과 자신이 구원받아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같은 개념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특히 오늘 우리가 다루게 될 칭의를 얻는 되는 과정도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방법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과연 성경이 말씀하시고 예수님께서 말씀해주신 칭의란 무엇이며, 어떤 자가 그러한 칭의를 얻게 되는지에 살펴보도록 하자.

 

2.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적의 칭의에 대한 생각

  먼저, 우리가 알고 있는 칭의가 어떤 것인지부터 살펴보자. 일반적으로 칭의란 어떤 사람이 실제로는 의롭지 않지만 의롭다고 칭함을 받는 것을 가리킨다. 이때 칭의를 받는 존재는 죄인이며, 칭의를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롬8:33). 그러므로 칭의란 일종의 법정적인 용어인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칭의란 죄인인데도 그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을 받는 것으로서, 구원을 받는 데에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 가운데 하나다. 그렇다면 대체 어떤 사람들이 칭의를 받는 것일까? 그냥 예수님을 믿는 자가 받게 되는 것인가? 아니면 어떤 행함있는 신앙을 보여주어야 받는 것인가? 눅18:9~14에 나오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를 보라. 이 비유에는 누가 과연 칭의를 받으며 누가 과연 칭의를 받지 못하는지를 정확하게 보여준다. 또한 이러한 칭의를 선언하시는 분은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님이시다. 자기의 확신에 따른 것이 아니라 주님이 그렇게 평가해 주셨다는 점이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칭의의 근거는 이상하게도 주님의 말씀에서 상당히 빗나가 있다. 모두들 사도바울이 말하는 칭의를 가지고 자기를 평가하고 있을 뿐이다.

 

3. 오늘날 칭의론의 근간은 바울의 칭의론이다.

  그렇다면, 사도바울은 어떻게 사람이 의롭다고 칭함을 받는다고 말했을까? 사실 오늘날 성도들이 가지고 있는 칭의의 관념이 사도바울의 관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냐하면 칭의를 뒷받침하기 위해 사용된 성경구절이 대부분 다 사도바울이 말하고 있는 성경구절들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대부분의 성도들이 가지고 있는 칭의의 관한 개념을 우선 정리해보자. 대략 2가지 정도다. 하나는 비록 우리가 죄인이며 지금도 여전히 죄를 짓고 있기는 하지만 예수님에 대한 믿음만 가지고 있다면 자기가 의롭다고 칭함받는다는 생각이다. 사도바울은 이것을 롬3장에서 증언하고 있다(롬3:23~26). 그리고 이러한 칭의는 내가 믿어서라기보다는 하나님께서 만세전에 나를 구원하기로 예정하신 뜻에 따라 되어진 것이니, 내가 받는 칭의가 다 주님의 예정이므로내가 받는 칭의는 절대 잃어버릴 수 없다는 생각이다. 사도바울의 증거를 우선 들어보자. "하나님은 미리 정하신(예정하신) 그들을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의롭다고 하시고 의롭다고 하신 그들을 영화롭게 할 것이다"(롬8:30). 또한 사도바울은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해 내어주신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주실 것이다(롬8:32)”고 했으며, 주님께서 한 번 의롭다고 선언한 자를 “누가 감히 정죄할 수 있겠느냐”(롬8:33~34)고 증언했다. 그러므로 로마서나 갈라디아서에 등장하는 칭의론에 관한 말씀을 들은 자는 대부분 이런 칭의론으로 고착되어버리고 만다. 그래서 "내가 비록 죄인이며 지금도 죄를 짓고 있는 더러운 죄인이라 할지라도, 내가 예수님을 믿고 있는 한 나는 의롭다고 칭함받은 의인이며, 이러한 칭의를 받은 나를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구원해주실 것이다!"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과연 이러한 생각이 성경에 근거한 고백일까?

 

4. 바울의 칭의론은 당시 특별한 상황에서 나온 것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사도바울이 말한 칭의론의 중간에 무엇인가가 생략되어있다는 것을 잘 모른다. 그리고 그의 칭의론은 당시의 시대적인 특별한 상황에서 나온 것이므로, 그 시대에는 옳은 주장이었지만 모든 시대에 누구를 막론하고 통용되는 절대적인 진리는 아니라는 사실을 잘 모른다.

  예를 들어보자. 여자성도에게 과연 안수하여 장로직이나 목사직을 맡길 수가 있을까? 이것은 한국교회 중에 감리교단이나 장로교통합측에서는 현재로서는 합법적이다. 하지만 장로교 합동측에서는 이것이 불법이다. 왜냐하면 이들은 바울이 말했던 성경구절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기 때문이다. 특히 고전14:34~35에 나오는 말씀과 딤전2:11~12의 말씀을 절대적인 진리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 말씀들에 의하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해야 한다. 그들이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으며 그들이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되고 만다(고전14:34~35). 더욱이 여자는 일체 순종함으로 조용히 배우기만 해야 한다. 여자임에도 누구를 가르치는 것이나 남자를 주관하는 것은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바울이 증거하고 있기 때문이다(딤전2:11~12).

 

5. 시대와 장소와 대상을 초월하는 칭의는 오직 예수님의 말씀이다.

  하지만 이러한 말씀들은 바울이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서 나온 시대적인 진리라는 사실을 많은 사람들은 잘 모른다. 사실 바울이 말한 것은 일종의 상황신학에 속한다. 상황이 달라지면 다르게 해석해야 할 말씀들도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은 다르다. 예수님의 말씀은 상황이 달라진다고 해서 달라지는 그러한 말씀이 아니다. 그러면 누가 예수님의 말씀이 절대적인 진리라고 믿고 따르겠는가? 그렇다. 오직 예수님의 말씀만이 시대와 장소와 대상을 초월하여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절대적인 진리인 것이다. 그러나 사도바울이 말한 것은 시대적인 상황과 배경을 이해하고 들어야 맞는 말씀이 있다. 이러한 적용은 칭의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사도바울이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 칭의를 말할 때에는 유대교에서 말하는 칭의관 내지는 유대교의 구원관이 잘못 된 것에 대한 반작용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의 칭의론은 유대교의 칭의관 내지는 구원관을 바로잡기 위해 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유대교적인 상황이 아닌 다른 상황에 놓여있는 사람들에게까지 그 말씀만이 절대적인 진리라고 주장해서는 아니 된다.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할 당시에, 유대인들은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까? 그들은 율법의 조항들을 지켜 행함으로 얻는다고 믿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기본적으로 난 지 팔일만에 할례를 행하였고, 안식일을 지켰으며, 음식을 가려서 먹었다. 부정한 음식은 손도 대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은 여러 가지 율법의 여러 가지 조항들 즉 절기를 지키고, 십일조를 드리며, 첫 열매를 바치는 등의 수많은 율법조항들을 지켜 행해야 구원받는다고 생각했다. 유대인들은 사람들이 지켜 행해야 할 율법조항들을 모세오경에서 골라내었는데, 무려 613가지나 되었다고 한다. “하라”는 조항은 248개요, “하지 말라”고 하는 조항은 365가지였다. 하지만 이 세상 어떤 사람이 과연 율법에 기록된 그 모든 조항들을 다 지켜 행할 수가 있을까? 그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최소한 하나만 범한다 해도 율법을 범한 사람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초대 예루살렘교회의 수장이었던 예수님의 친동생 야고보 장로는 이렇게 말했다.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약2:10~11). 예를 들어 보자. 제613번 마지막 조항은 “토라(율법)를 써서 간직하고 있어야 한다.”고 되어 있다. 하지만 구약의 시대에 어느 누가 양피지에 그 많은 분량의 율법말씀 전부를 써서 간직하고 있었겠는가? 그리고 율법규정 자체로는 어느 정도까지 지켜야 그 조항을 지켰다고 인정받을 수 있는지 애매한 조항들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율법의 613가지 조항 중에 제1번 조항은 “생육하고 번성하라(창1:28)”다. 그렇다면 얼마나 자식을 낳아야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계명을 지키는 것이 되는가? 또한 제85번 “안식일에는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는 규정이 있다. 그런데 대체 얼마만큼 움직이면 일이 되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리고 제33번 조항 “부모를 공경하라”는 규정이 있다. 대체 어느 정도까지 섬겨야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되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러므로 율법조항을 지켰는지 안 지켰는지는 랍비가 해석에 주는 정도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한 마디로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가 되는 것이 규정들인 것이다. 그런데 어찌 인간치고 이 모든 것을 하나도 어김없이 다 지켜 행할 수가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렇다.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함을 받으려고 시도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불가능하기에 사도바울은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하심을 받을 육체가 없다고 선언했다. 다만 율법의 규정들을 통해서 자신이 죄를 지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라고 했다(롬3:20).

또한 사도바울이 말하고 있는 칭의론은 칭의에 관한 모든 말씀에 해당하는 칭의론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는 칭의론의 일부만을 말했기 때문이다. 그가 주장한 “비록 내가 의롭지 않아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분의 의가 나에게 전가되어 내가 의롭게 된다는 말씀은 어느 정도 맞는 말씀이다. 하지만 이러한 믿음만으로 예수님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사람들은 잘 모른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칭의에 대해 들려주신 말씀에 의하면, 사람은 믿음만으로 의롭다하심을 얻는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눅18:13~14). 그러므로 사도바울이 말했던 칭의에 관한 말씀은 칭의에 관한 모든 것을 포함하는 말씀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가 말한 칭의는 시대와 장소와 대상을 초월하여 항상 적용되는 절대적인 진리라고 정의내려서는 곤란한 것이다. 그렇다. 성경의 모든 말씀은 항상 예수님의 말씀에 비춰서 해석하고 적용해야 한다. 오직 그분이 진리요 그분이 하신 말씀만이 진리이기 때문이다(14:6, 8:45~46).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사도바울이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 말했던 칭의는 칭의에 대한 모든 것을 포함하는 칭의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칭의에 관한 예수님의 언급이 생략되어 있기 때문이다. 고로 사도바울이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말했던 칭의는 오직 '믿음'만을 칭의의 요소라고 증거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사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전재되지 아니하는 칭의는 있을 수 없다. 예수님의 칭의를 전가받지 아니한 상태에서 얻을 수 있는 칭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예수님에 대한 믿음만으로 칭의를 얻는다는 주장은 칭의에 관한 전체적인 말씀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하며, 조금 있다가 살펴보겠지만 예수께서 언급한 칭의의 요소를 다 포함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6. 예수께서 말씀하셨던 칭의의 중요한 요소는 대체 무엇일까?

  그렇다면 바울의 칭의론에서 생략되어 있는 칭의의 중요요소는 무엇인가? 사람이 칭의를 얻기 위해서는 믿음 외에도 또 다른 무엇이 필요한 것일까?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우리는 사복음서로 가야 한다. 거기에서 절대주권자인 예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것이 바로 18장의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에 등장한다. 예수께서는 이 두 사람의 기도에 관한 비유를 언급하실 때에, 칭의에 관한 아주 중요한 요소를 알려주셨다. 이 칭의의 요소는 사도바울의 칭의론에서는 결코 나오지 않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께서 말씀하고 있는 칭의에 대해서는 들으려고 조차 하지 않고, 오히려 바울의 칭의론만을 진리로 알고 자신은 이미 의롭다함을 받은 자라고 자랑하기도 한다. 아니다. 그렇게 자신을 의롭다고 칭한다고 해서 자기가 칭의받은 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칭의는 하나님께서 선언해주시는 것이어야 한다. 그런데 놀랍게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단 한 사람에 대해서, 그는 이미 칭의를 받은 사람이라고, 아니 완료형으로 말씀해 주셨다(눅18:14). 그는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바로 그 세리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칭의의 개념이 무엇인지를 알아보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의 말씀하신 칭의를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우리에게 칭의를 주시는 분은 바울이 아니라 오직 주 예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를 통해서 칭의에 관해 무슨 말씀을 하셨을까? 예수께서는 사람이 칭의를 얻는 데에 무엇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셨을까? 그것은 놀랍게도 믿음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적어도 2가지였다. 하나는 회개하고 통회하는 마음이었고, 또 하나는 주님의 속죄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칭의는 첫째, 철저히 자기자신의 죄를 시인하고, 자신이 지은 죄 때문에 정말 마음 아파하는 것이었으며 둘째, 그러한 죄는 하나님이 주시는 속죄 이외에 그 어떤 다른 방법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오직 하나님에게만 속죄의 은총을 바라는 마음이 있을 때에 얻게 된다고 말씀하셨다. 이제 주님이 가르쳐준 칭의에 대해 구체적으로 좀 더 들여다보기로 하자.

 

7.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의 차이

  먼저, 바리새인의 기도를 살펴보자(18:9~12). 바리새인은 그날 하나님께 기도하러 나오지 않았다. 그는 "따로" 서서 기도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따로"라는 말은 "자기를 향하여"라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는 그날 하나님을 향하여 기도하러 나온 것이 아니라 자기를 향하여 기도하기 위해 나왔다. 그는 자기의 의가 이 정도라고 자랑하기 위해, 그날 그 장소에 나온 것이다. 그날 그는 율법규정에 하라고 한 규정 및 하지 말라고 한 규정을 잘 실천하고 있다고 자랑했다. 그리고 자기는 그것의 규정들보다도 더 많은 것을 실천하고 있다고 떠벌렸다. 그는 사실 토색하지 않았을 것이고, 불의하지 않았으며, 간음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소득의 십일조를 어김없이 내었을 것이다. 마23:23에 보니, 바리새인들은 십일조에 관한 율법의 규정 외에도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까지 내고 있었다. 또한 그는 이레에 두 번씩이나 금식하고 있었다. 하지만 성경 어디에도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에 대한 율법규정이 없다. 그리고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해야 한다는 규정도 율법에는 없다. 다만 대속죄일에만 금식해야 한다고 규정되어 있을 뿐이다(레23:27). 더군다나 그는 자기를 자랑하고 그리고 자기처럼 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을 멸시하기 위해 거기에 왔다. 특히 세리에 대해서는 증오심마저 감추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기도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하나이다(눅18:11)." 그는 실상으로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 율법의 규정들을 준수하고 있었으며, 자기 자신이 이 정도는 실천하고 있습네 하고 자랑하기 위해서 율법을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더욱이 그는 그것을 이용하여 그렇게 행하지 못하는 자들을 멸시하려고 그렇게 행하고 있었다.

  하지만 세리의 기도는 달랐다(18:13). 그는 성전 안으로 제대로 들어가지도 못하고 멀찍이 서 있었다. 그리고 감히 하늘을 우러러 쳐다보지도 못했다. 그리고 다만 자기의 가슴을 치면서 하나님께 용서를 빌었다. 그는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의 기도를 헬라어 원문에 보면, 의미가 약간 다르다. "하나님, 당신은 죄인인 저에게 속죄를 베풀어주십시오." 라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는 첫째, 자기가 죄인인 것을 철저히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짓고 있는 죄가 얼마나 나쁜 것인지도 잘 알고 있었다. 둘째, 그렇지만 자기의 신분과 직업이 자기를 죄짓게 하고 있었기에 그가 하나님께 바랄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오직 속죄 뿐임을 그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세상 그 어디를 간다 하더라도 자신의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곳이 결코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피멍이 들도록 자신의 가슴을 치면서, “이 못난 죄인은 오직 하나님이 아니시면 절대 용서받을 길이 없으니 오직 하나님의 용서를 바랍니다”고 하면서 통곡하며 기도했던 것이다. 그는 기도에는 2가지가 들어 있었던 것이다. 하나는 자신이 죄인인 것을 시인하고 자신이 지은 죄 때문에 아파하는 마음이 들어 있었다. 이것을 우리는 회개하는 마음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그는 오직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베풀어줄 속죄에 대한 간절한 소원이 있었다. 이것을 우리는 믿음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그의 기도에는 ‘회개’와 ‘믿음’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그의 기도에 어떤 응답을 내려주셨는가? “저 바리새인이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다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눅18:14)”고 말씀해주셨다. 여기서 "의롭다하심을 받고"는 표현은, 완료 수동태 구문이다. 즉 그는 그때 기도를 드리면서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칭의를 받은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지은 죄들을 용서받고 집에 돌아갔던 것이다. 그렇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의로운 행위로서 되는 것이라기보다는 회개와 믿음을 통해서 되는 것이다.

 

8. 나오며 - 진정한 칭의란 무엇인가?

  그렇다. 진정한 회개하는 마음이 없는 칭의는 더 이상 칭의가 아닌 것이다. 자기의 마음을 찟는 회개하는 마음이 없이 주님만을 믿는다는 믿음 하나로 칭의가 그에게 주어지지는 않는다. 자신이 죄인인 철저히 깨닫고, 자신이 지은 죄는 오직 주님의 속죄없이는 절대 용서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주님께 구하는 자가 칭의를 받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들의 칭의를 생각해보라. 자신이 죄인인 것도 인정하지 않는데 어찌 예수님을 믿고 있다고 칭의가 주어질 수가 있겠는가?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해 애통해하지도 않는데, 어찌 예수님을 믿고 있다고 그 이유 하나 때문에 칭의가 주어진다는 말인가? 바울이 말한 칭의론 중 일부만을 가지고 자신은 이미 의롭다함을 입었다고 함부로 말하지 말라. 우리가 칭의를 받았는지에 대한 합당한 판단의 기준은 오직 예수님의 말씀이라야 한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칭의는 통회하는 마음이 동반된 것이었다. 이것이 없는 믿음만으로는 절대 의롭게 될 수가 없는 것이다. 성도들이여, 회개없는 믿음으로 칭의를 얻으려고 시도하지 말라. 철저히 회개가 동반된 믿음이라야 주님으로부터 칭의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라. 칭의에 있어서도 그 핵심이 회개였던 것이다.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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