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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며

  현재 우리나라 영화관에서 상영하는 영화 중에 <산상수훈>이라는 영화가 있다. 이 영화가 특별한 것은 스님이 만든 기독교영화라는 점이다. 이 영화는 2017년 올 해 러시아 소치국제영화제에 참가하여 남우주연상(백서빈)을 수상한 바 있다. 세계 4대 영화제에 참가하여 당당히 가치있는 영화로 인정을 받은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 영화를 불교의 중진인사인 스님이 만들었다는 점이다. 대해스님(본명 유영의)이라는 분께서 경전으로서의 성경을 가지고서, 불교에서 말하는 인생의 본질에 관한 의문점들을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풀어보려고 만든 영화인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가 어떤 종교인지를 잘 모르는 사람이 이 영화를 본다면, 기독교에서 추구하려는 것이 무엇인지를 제3자적인 입장에서 살펴볼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는 있을 것이다. 그리고 타종교인 기독교를 이해하려는 불교의 폭넓은 입장을 반영하려고 애쓴 흔적은 높이 살만한 영화라고 보여진다. 하지만 실제 이 영화 속으로 들어가서보면, 이 영화는 오늘날 기독교가 원리의 예수님의 가르침으로부터 잘못 나가고 있음을 질타하는 영화다. 그리고 맨 마지막에 가서는 실제 성경이 말하고 있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기독교의 가르침과는 상당히 차이가 나는 결론을 내리고 있어, 기독교영화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다시 말해, 대해수님(유영의)은 산상수훈을 통해서 말씀하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통하여, 오늘날 한국의 기독교가 예수님의 가르침과는는 좀 거리가 멀어졌고 빗나가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리새 할 수만 있으면 예수님의 참된 가르침에 따라 참된 기독교를 회복하기를 바라는 간절히 마음이 반영되어 있는 영화이다. 하지만 대해스님은 정말 성경이 말씀하고 있고 예수께서 가르쳐준 그 가르침에는 접근하지 못하신 것 같다. 왜냐하면 성경을 하나의 타종교의 경전을 읽어서 얻을 수 있는 지식과 실제적인 신앙은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스님이 바라보는 기독교가 과연 인간의 본질의 문제를 어떻게 풀려고 하는지를 살펴보면서, 진정 스님이 말하는 기독교의 관점과 실제의 성경적인 관점은 얼마나 차이가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스님은 기독교를 어떻게 보았으며 어떻게 이해했을까?

  스님은 이 영화에서 인간이 갖는 근본적인 5가지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기독교에서 말하는 해결책을 나름대로 제시하려고 노력한다(그러나 사실은 하나님의 영인 성령을 받지 못한 탓에, 불교인의 한계가 여실히 나타난다). 스님이 알고 있는 기독교는 실제 기독교하는 많이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으로서 성경을 접하고 최대한 거기에 기록된대로 인생의 질문에 답해보려 노력은 박수를 쳐줄만하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스님이 이 영화를 통해서 풀어가고 있는 기독교적 해결책이라는 것은 실제 기독교의 가르침과는 많이 다르다는 것을 말이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그동안 인간이 갖고 있다는 하는 근본적인 5가지 질문 중에서, 네번째 질문과 다섯번째의 질문에 대한 답을 함께 나누려고 한다. 첫째와 둘째와 셋째 질문은 사실 지난 월요일, 화요일, 수요일, 목요일에 새벽기도회 시간을 통해서 그 답을 제시한 바 있다. 그래서 오늘은 네번째와 다섯번째의 질문에 대한 해답을 같이 나누려고 한다. 하지만 그래서 첫번째에서 세번째의 질문에 대하여 기독적으로 정확한 답을 듣지 못한 분들을 위해 간단하지만 그것을 조금 정리하고, 네번째와 다섯번째 질문에 답하고자 한다.

 

3. 인간의 실존에 관한 5가지 물음에 대하여 스님이 풀어내고 있는 기독교의 답안들은 어떤 것이었을까?

  대해스님은 인간의 근본적인 5가지 질문을 던진다. 첫째, 신앙생활의 궁극적인 목적은 진짜 장소적인 어떤 천국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며, 그것은 과연 믿기만 하면 들어갈 수 있는 곳인가 하는 것이다. 둘째, 사람에게 선악과는 무엇인가 정말 선악과는 꼭 있어야 할 것이인가 하는 것이다. 사실 하나님께서 산악과를 만들지만 안했다면 사람은 죄를 짓지도 않았을 테고, 그러면 형벌로서 온갖 괴로움과 고통과 질병과 파멸과 지옥형벌을 받지도 않았을 텐데, 하나님께서 괜히 선악과를 만들어놓아서 인간을 힘들게 하고 죄짓게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셋째,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희생이 왜 오늘날 나의 죄까지 사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넷째,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신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한 것인가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인가 하는 것이다. 다섯째, 하나님과 인간은 과른 다른 존재인가 하나가 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다.

 

가. 과연 믿기만 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가?

  이제 이 5가지 질문들 가운데에서 첫번째 질문에 대해서 답을 한 번 찾아보자. 과면 믿기만 하면 천국에 들어가는가 하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는 아니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말씀이 기록된 산상수훈에 보면, 믿음만으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행위가 뒷받침되어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셨다고 지적하기 때문이다(마7:21). 다시 말해, 예수님더러 주여 주여라고 주의 이름을 부른다고 해서 그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다만 아버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인들 중에 "믿기만 하면 천국에 들어간다"라고 알고 있는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사실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는데, 믿기만 하면 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예수님이 누구시며 무슨 일을 하셨는지를 그날 듣고 그분의 믿고 회개한 다음 그 당일날 공장 죽는다면 그 사람은 아마 천국에 들어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는 날 죽지는 않는다. 그래서 그때에는 정작 이런 질문을 던질 수도 없다. 그러므로 이 말을 잘못 받아들이면, 사람이 "믿기만 하면 모든 죄를 사함받고 천국에 들어간다는 주장하는 것은 한 판의 도박과도 같다." 참으로 의미심장한 말이다. 기독교의 이신칭의를 비롯한 믿음만을 강조하는 얄팍에 개인주의 신앙에 경종을 울리는 이야기다.

  그런데 대해스님의 답안제시는 틀렸다. 왜냐하면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믿고 회개함으로 들어가는 것이지(막1:15) 행위로 들어가는 것이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행위는 다면 예수님을 제대로 믿은 자인지를 확인해주는 도구이자, 심판의 잣대로서 그 역할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려면,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오셔서 하신 일을 내 속죄를 위한 일로 믿어야 하고, 자신의 죄들을 자백하고 자신이 죄인인 것을 고백해야 한다. 그렇게 살다가 어느날 죽을 무렵에 되었을 때 자기의 뒷안길을 바라보았을 때, 열매들이 있는 것을 본다면, 그 사람은 회개하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나. 사람에게 있어서 선악과는 존재하지 말았어야 할 과일이었는가?

  그리고 두번째 질문을 살펴보자. 사람에게 있어서 과연 선악과는 불필요한 요소인가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말한다.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만드시지 았다면 사람이 죄를 지었을 리가 없고 그러면 죄 인하여 온갖 괴로움과 질병과 죽음까지도 겪지 않았으리라고 말이다. 그렇다면 정말 선악과는 하나님께서 만들지 말았어야 했을까? 우선 불교에서는 선악과에 대해 어떤 해석을 내놓고 있을까? 대해스님은 선악과는 있기는 하지만 그것을 버려야 할 존재로 생각하는 것 같다. 왜냐하면 선악과를 인간의 "고정된 생각"으로 보기 때문이다. 내가 어떤 것을 두고 그것이 좋고 나쁘다고 하는 고정된 생각을 갖게 되면 인간은 거기에 헤어나올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어떤 문제를 두고도 "아, 이건 할 수 없어!"라고 고정된 생각을 가져버리면 절대 그것을 뚫을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정말 선악과는 고정된 생각일까?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기독교에서는 선악과를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기독교에서는 선악과는 꼭 있어야할 과일이라고 믿는다. 왜냐하면 선악과를 통해서 인간의 본질 2가지를 깨닫도록 도와주는 도구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무한한 잠재적인 능력과 지혜를 가진 존재로 창조되었다. 그것들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만이 자유의지를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무엇인가를 내가 행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자신의 의지로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 인간에게만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만들어놓으시고 그것을 따먹지 말라 따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을 통해서 인간은 "내게 무한한 능력이 주어져 있지만, 어떤 것을 할 수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로구나. 그리고 자유의지는 내 맘대로 사용할 수는 있지만 그것에 대한 책임은 나 자신이 져야하는구나"하는 것을 알 수 있게 해는 나무의 열매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두번째로 선악과는 인간이 비록 무한한 잠재적인 능력과 지혜를 가졌어도 여전히 하나님에 비해서는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려주는 도구라는 것이다. 사실 인간은 다른 피조물에 비해 뛰어난 존재이기는 하자만 여전히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 피조물에 불과하다. 인간의 피조물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가 없다. 그래서 다른 것을 인간의 자유의지를 따라 행할 수도 있고 행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선악과만큼은 따먹지 말라는 명령을 통해서 자신이 피조물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 선악과는 인간이 누군지를 알려줌과 동시에 인간의 한계가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귀한 도구다. 그러므로 인간에서 있어서 선악과는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그것은 어쩌면 꼭 필요한 도구인지도 모른다.

 

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희생이 과연 인류의 죄를 용서할 수 있는가?

  이제는 세번째 질문을 살펴보자.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십자가의 희생이 어떻게 내 죄를 용서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다. 얼핏 보면 당연히 그러한 질문을 던져야 한다. 아니 던질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이 어떻게 되어서 내 죄를 용서할 수 있는지가 분명히 드러나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교에서는 자신의 수행으로 자신이 해탈을 경험할 뿐 남의 해탈까지 영향을 미칠 수 없다는 것을 잘 안다. 내가 받을 업보를 남이 지게 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불교에서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희생이 우리 인간의 죄를 사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만약 예수님처럼 죽어서 부활하고 천국에 들어가려면 모든 사람 각자가 하나님의 법과 뜻대로 살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부지런히 도를 닦고 부지런히 수행에 정진할 것을 권면한다. 하지만 진짜 그럴까? 우리가 도를 닦고 부지런히 수행에 정진하면 죄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것인가? 아니다. 그것은 기독교를 잘못 이해한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죽음이 곧 내 죽음이요, 예수님의 부활이 곧 내 부활이 되어, 예수님의 희생으로 내 죄가 용서되기 때문이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분명하게 가르쳐주고 있다. 사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3가지 원리를 알아야 한다. 첫째는 대표성의 원리요 둘째는 공의(권선징악)의 원리요, 셋째는 대속의 원리가 그 안에 들어있는 것이다.

  첫째는 대표성의 원리가 들어있다. 어떤 사람은 말한다. 죄는 아담이 지었는데 왜 우리가 고통을 받아야 하는가하고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잘못 알고 하는 이야기다. 왜냐하면 그날 아담이 범죄할 때 우리가 같이 그 범죄에 동참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물을 것이다. 그때는 내가 아직 이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았을 때인데, 어떻게 아담의 범죄에 내가 동참했는가 하고 말이다. 하지만 그 대답은 히브리서에 나온다. 창세기에 보면, 아브라함이 조카 롯을 구출하고 돌아올 때에,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와 영접하고 축복하는 멜기세덱왕에게 십일조를 드리게 된다. 이때 멜기세덱은 제사장이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4대손자 중 네째 레위가 제사장이었는데, 아브라함이 제사장 멜기세덱에서 십일조를 바칠 때에, 레위 제사장도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친 것이라는 것이다(히7:4~10). 왜나하면 아브라함의 허리에 레위로 씨로서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담의 범죄는 곧 나의 범죄가 되는 것이다. 우리도 아담이 범죄할 때에 그의 허리에 씨로서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로마서 5장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러므로 한 사람을 통해서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그 죄를 통하여 죽음이 들었다. 그리하여 한 사람의 범죄로 인하여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고 죽음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다(롬5:12)" 그렇다. 아담의 범죄가 곧 우리의 범죄였던 것이다. 아담은 인류의 대표자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찬가지로 예수님에게도 적용된다. 한 사람의 범죄로 인하여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된 것처럼 한 사람의 의로운 행위가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할 수가 있는 것이다(롬5:18). 그것은 세번째로 말할 대속의 원리 때문이다.

  둘째는 공의의 원리가 들어있다. 여기서 공의를 원리라는 벌을 받을 행동을 한 자에게 벌을 주고, 상받을 행동을 한 자에게는 상을 주어야 한다는 원리다. 이것이 하나님의 공의다. 만약 하나님께서 반대로 행하신다면 하나님은 공의롭지 못하다. 그러면 사탄을 심판할 수가 없다. 사탄이 반항할 것이고 자신이 존재하는 한 하나님을 비난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공의롭게 행동해야 한다. 한마디로 권선징악의 심판을 내려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아무리 인간을 사랑하신다고 해도, 인간이 범죄했는데도, 인간을 벌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공의는 무너지도 만다. 아니 하나님께서 분명 선악과를 따먹으로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했는데, 죽이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스스로 자신이 할 말을 뒤집는 것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인간의 범죄를 절대 눈감아 줄 수가 없다. 하나님은 반드시 인간의 범죄를 심판하여 그에게 죽음을 선고해야 한다.

  셋째는 대속의 원리가 들어있다. 인간은 대표성의 원리에 따라, 이미 아담과 함께 범죄에 동참한 공범죄인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공의의 원리에 따라 반드시 형벌을 받아 죽어야 하고(일차적으로 육체의 죽음)과 그리고 이어서 영원한 죽음(이차적으로 하나님과의 영원한 분리)를 경험해야 한다. 하지만 그렇게 해 버리고 나면 아담의 후손인 모든 인류는 다 지옥에 가서 형벌을 영원히 받아야 한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는 기회를 한 번 주시기로 작정하신다. 왜냐하면 인류의 시조 아담이 범죄했을 때에 스스로 범죄한 것이 아니라 사탄과는 달리 뱀의 꾀임을 받아 범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기회는 육체를 가지고 있을 때로 제한하셨다. 그리하여 육체를 가지고 있을 때에 인간은 영의 세계를 눈으로 볼 수 없다(예외적인 경우가 가끔씩은 있기는 하다). 그러므로 사람은 육안으로 천국을 볼 수도 없고, 귀신을 볼 수도 없으며, 하나님을 볼 수도 없다. 다만 결과를 통해서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계시고 천국이 있으며 천사가 있고, 예수님이 하나님이신 것을 믿을 수 있게 해 놓았다. 그러나 그것을 믿을 것인가 믿지 않을 것인가는 인간의 몫이다. 어찌되었든 그렇다면, 어떻게 인간은 자신이 지은 죄를 용서받고 다시 원래의 상태로 되돌아갈 수 있는가? 지은 죄는 다 과거의 일인데 어떻게 그것을 돌릴 수가 있다는 말인가? 그러나 하나님은 하실 수가 있다. 그것은 공의의와 원리요 대속의 원리를 통하여 죄를 사하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 대신 누군가가 대신 벌을 받는 것이다. 죄는 내가 지었지만 남이 내 죄값을 대신 치러줌으로 내가 용서받을 수 있는 방법을 마련해두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대속의 법을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제사법의 형태로 가르쳐주셨다. 다시 말해, 사람이 죄를 지었어도 용서받을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신 것이다. 인류의 죄가 어떻게 되어서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에 의해 용서되는지에 관하여서는 다음의 설교를 참고하기를 바란다.

(https://dongtanms.kr/xe/board_EMib14/25353, 제목: 천국가는 믿음이란 무엇인가?)

  결국 인간은 대표성의 원리와 공의의 원리와 대속의 원리를 통해서 죄사함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려졌다. 그것을 알려주는 것이 바로 복음전파인 것이다. 인간은 죄를 지어서 마땅히 죽어서 지옥형벌을 받아야 했는데, 하나님께서 죄없는 사람이 되어 오셔서 그 벌을 대신 담당하신 것이다. 그때 인류의 대표자였던 세례요한의 안수를 통해 인류의 죄가 예수님에게 전가되었고 그후 예수께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심으로 인류가 죄가 대신 처리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속죄사역을 믿는 자는 대속의 원리에 따라 죄사함을 받을 수가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이 영화에서는 자신의 해탈을 위해서는 자기의 고행이나 수행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주장하는데, 이것은 기독교의 가르침과는 정반대의 가르침인 것을 알 수 있다.

 

라. 인간은 누구를 위해 살아가는 존재인가?

  넷째로, 인간은 누구를 위하여 살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다. 이 문제에 대해 "산상수훈"의 작가는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의 질문을 던지고 있다. 사람은 과연 누구를 위해 살아가는 것인가? 자기자신을 위해 살아가는 것인가 아니면 남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인가? 특히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이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라고 한다. 과연 인간은 자기를 위해서는 살아서는 아니 되고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가? 결론적으로 기독교에서는 인간더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라고 강제하지는 않는다. 다만, 자신이 어떻게 지옥형벌을 면할 수 있게 되었는지를 제대로 아는 자라면 당연히 예수님께 감사를 돌릴 수밖에 없고 하나님께서 영광을 돌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아담의 범죄와 함께 이미 지옥형벌을 받게 되어있었다. 그것은 변할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 죄값을 받게 하지 않으시고, 당신이 직접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그 죄값을 대신하셨다. 창조주께서 피조물이 되셔서 인류의 죄값으로 대신 죽고 음부(지옥)에까지 내려가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인류를 위해 하신 일을 알게 된다면, 그분앞에 엎드릴 수밖에 없고, 영원히 그분께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께서 우리 인류를 위해 행하신 일에 감사하며 그분을 위해 사는 자는 하나님이 인류를 위해 행하신 일을 무엇인지를 이해하고 있는 자이기 때문에, 결국 하나님의 준비해놓으신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결국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자는 하나님을 위해 하는 것이지만 나중에는 자신의 영혼이 구원받아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되는 것이니, 자신을 위한 가장 안전한 투자를 하는 셈이 된다.

 

마. 사람은 결국 신이 될 수 있는가?

  이제 마지막으로, 과연 하나님과 인간은 하나가 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살펴보자. 불교에서 가장 바라는 것은 성불하는 것이다. 자신도 수행을 통해 인간의 생노병사와 업보와 윤회를 벗어나 열반에 들어가는 것이다. 다시 말해 나도 부처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과연 우리 예수믿는 자들이 예수님이 될 수 있는 것인가? 사회참여를 강조하는 곳에서는 우리도 작은 예수가 되자고 말하기도 한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소외되고 약하고 병든 자를 돌보아주자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예수님의 삶의 일부분을 따라가는 것일 뿐 예수님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다르다. 불교에서는 누구든지 참선을 통해서 이 세상의 모든 번뇌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말하며, 그런 자는 부처가 된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기독교인들도 그것을 알고 불교의 경우처럼 그렇게 해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성경도 그것을 지지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고전6:17의 말씀이다. 그런데 과연 사람이 하나님이 될 수가 있는 것일까?

  고전6:17의 말씀을 우선 한글성경으로 읽어보자.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고전6:17)" 이 말씀에 보면, 주님과 합하는 자는 주의 영과 하나가 된다는 뜻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그러나 이 본문을 헬라어원문으로 보면 그러한 뜻이 아니며, 또한 이 문장을 앞뒤의 문맥을 통해서 보면 우리도 주님과 같이 될 수 있다는 뜻이 아니다. 첫째로, 헬라어원문으로 보자. 헬라어 원문에 따라 이 문장을 직역하면 이렇다. "그러나 주님에게 [지금도 계속해서] 결합되어지고 있는(분사현재수동태) 자는 하나의 영과같은 것이다(고전6:17)." 우선 헬라어원문에 의하면, 이 말씀대로 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왜냐하면 계속해서 주님과 결합되어진 채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나오는 동사 '콜라오'라는 동사는 '아교로 붙히다,결합하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주님에게 아교풀처럼 붙는 것을 가리키는데, 현재분사수동태문장이다. 다시 말해 계속해서 붙어있되, 그것도 붙혀지는 것일 뿐 내가 붙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살게 될 때에 하나님에 의해 그렇게 되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문구대로 살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그리고 둘째로 그 다음이 문제다. "한 영이 된다"는 뜻이 아니다. "한 영이다"는 뜻도 아니다. "하나의 영과 같은 것이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영'이라는 단어에 정관사가 붙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정관사가 붙어 있으면, 이 영은 정확히 주님의 영을 가리킨다. 하지만 이 영은 정관사가 붙어있지 않다. 그러면 '영적 존재, 영과 같은 의미'라는 뜻이다. 이것을 해석해보면, 지금도 계속해서 주님에게 결합되어지고 있는 자는 주님의 영인 것처럼 그 사람도 주님처럼 영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이 문장에 대한 문맥에서 그렇게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앞구절을  보자. "창녀와 [현재 계속해서] 결합되어있는 자는 한 몸과 같은 것인줄을 알지 못하느냐? 왜냐하면 이르기를, 둘이 한 몸과 같은 것이 될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고전6:16)" 그러므로 고린도전서 기자는 이 다음구절에서 음행할 피할 것을 권면하고 있다. 왜냐하면 믿는 자라고 계속해서 음행을 하게 되면 당연히 그 사람은 영에 속한 사람이 되지 못하고 육에 속한 사람이 될 것이고, 그러면 성령을 근심하게 할 것이고, 그러면 결국 버림받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그러모르 예수께서도 자신의 영안에서 성령을 따라 살았던 것처럼 우리들도 성령과 결합되어진 채 있는 우리의 영을 따라 살아갈 때에 육체의 소욕을 이기는 자들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고전6:17의 말씀은 사람이 하나님이 될 수 있다는 말씀도 아니며, 사람이 곧 하나님이라는 말씀도 아니다. 사람도 예수님처럼 자신의 생각을 영 안에 두어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살아갔던 것처럼 우리의 생각을 육체(몸)에 두지 말고 영에 두고 살아가라는 권면의 말씀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이 영화는 사람이 하나님이 될 수 있는 영지주의적 해석과도 비슷하며, 뉴에이즈사상과도 접목되어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사람은 결고 하나님과 하나가 될 수 없다. 아니 하나님처럼 될 수 없다. 하나님이 될 수 없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건너올 수 없는 영역들이 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지만 우리 인간은 그렇지 못하다. 하나님께서는 무소부재하시지만 우리는 그렇지 못하다. 하나님은 동시존재가 가능하지만 우리는 그렇지 못하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이 될 수 있다, 사람이 수행하여 득도하면 하나님이 된다는 사상은 무서운 잘못된 사상이다. 피조물이 하나님이 되려다가 쫓겨난 것이 루시퍼사건이 아닌가?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이 우리에게 행하신 일에 감사하고 찬양하여 영광을 돌릴 수 있는 존재이기 하나님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4. 나오며

  그렇다. 영화 "산상수훈"은 어쩌면 좋은 영화다. 불교가 타종교와 더불어 함께 공생하기를 원한다는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으며, 불교는 타종교를 배타적으로 보지 않고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에서 대해서 배태적인 의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기독교가 무엇인지를 어느정도 알려줄 수 있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영화의 스님은 기독교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않다. 신앙을 통해서 성령을 받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결국 이 영화는 기독교의 근본적인 가르침과는 상반된 것을 향하도록 기독교를 권면하고 있다. 참된 진리의 말씀 안으로 들어오지 못한 채, 인간이 해석할 수 있는 최선의 해석을 가지고서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을 훈계하고 있는듯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아니다. 그것은 스님이 잘못 이해할 것이다. 기독교는 스님이 이해한 수준의 그러한 종교가 아니다. 기독교는 경전만을 가지고 연구해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경과 성령을 통하여 온전한 이해를 가질 때에, 전체가 보이고, 안이 들여다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스님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스님이 정말 성경을 이해할 수 있도록, 회개하고 예수님을 마음 속에 영접하라고 권면하고 싶다. 그래서 성령을 선물로 받으라고 권면하고 싶다. 그래야 제대로 기독교를 이해하고, 기독교를 제대로 이해한 다음에 진짜 기독교영화를 만들 수 있을 테니 말이다.

 

 

2017년 12월 29일(금)

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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