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언은 성령의 은사인가 아니면 귀신의 장난인가? 방언은 사람은 알아들을 수 없는 영의 언어인가 아니면 사람이 배워서 말할 수 있는 외국어인가? 최근 들어와 방언무용론 내지는 방언중지론 혹은 방언폐기론이 등장하여 한국교회를 흔들고 있다. 그들은 이렇게 주장한다. 방언은 성령의 은사가 아니라 표적일 뿐이며, 악령의 장난이고 고린도운동일 뿐이다. 성경이 증거하는 방언은 외국어이며,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말하고 있는 방언 곧 알아들을 수 없는 영의 언어는 헛소리이며 귀신방언이라는 것이다. 과연 이들의 주장이 옳은 것일까? 방언은 사도시대가 끝나면서 그쳤으며, 성경이 완성됨과 동시에 사라지고 말았는가? 그리고 그들이 그렇게 주장하는 가장 중요한 근거로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방언 곧 오순절 마가다락방에 모여서 간절히 기도하는 120명의 예수님의 제자들도 성도들이 받았던 방언은 과연 외국어방언이었을까? 이것에 대해 우리 주 예수께서는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으며, 사도바울은 또 어떻게 언급하고 있는가?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방언이 과연 헛소리인지 아니면 외국어인지 아니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인지를 좀 더 소상히 들여다보고자 한다.

 

1. 들어가며

  최근 들어와서 방언에 대해 부쩍 늘어난 주장들 중의 하나는 방언이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헛소리"에 불과하며, 고린도현상일 뿐이며, 진짜 성경이 말하는 방언이란 결코 아니다고 주장한다. 성경이 말하는 방언은 "외국어"라고 한다. 그래서 행2장의 예루살렘교회, 행10장의 고넬료가정과 행19장에 나오는 에베소교회 성도들의 입에서 나온 방언은 전부다 외국어였던 것이지 결코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이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과연 그들의 주장은 옳은 것인가? 방언은 정말 배워서 할 수 있는 지방언어에 해당하는 것인가? 이것에 대해 여러 학자들이 저마다 자신의 주장을 펼치고 있다. 그러니 지금에 와서는 무엇이 성경에 나오는 방언인지 헷갈려하는 분들이 참 많아졌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진짜 방언이라는 것은 무엇이며, 그것은 어떻게 하는 것이며, 어떤 유익한 결과가 발생하는지를 살펴보려고 한다.

 

2.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말했던 방언은 어떤 것이었는가?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자신이 직접 말하고 있는 방언의 은사에 대해 언급한다. 그는 고전12장에서 성령의 9가지 은사들을 언급하면서(고전12:10), 더욱 더 큰 은사들을 사모할 것을 주문한다(고전12:31). 그러나 아무리 훌륭한 은사들을 가졌다고 할지라도 즉 예언의 은사나 방언의 은사나, 지혜와 지식의 말씀의 은사같은 훌륭한 은사를 가졌다고 할지라도 주님이 재림하시게 되면 그러한 은사들이 더 이상 필요없을 것이므로 모든 은사에는 반드시 사랑의 은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고전13:1~13). 그러면서 그는 이어서 고린도성도들로 하여금 그들이 사랑의 은사를 추구하되 영적인 것을 사모하라고 명령한다(고전14:1). 그리고 고전14장에서 방언을 특히 예언의 은사에 대해 말한다(고전14:1~40). 이것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그것은 성도들에게 있어서 더욱 더 큰 영적인 은사는 방언과 예언의 은사라는 것이며, 그중에서도 더욱 더 큰 은사는 예언의 은사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방언의 은사가 곧 성령의 은사요 더욱 더 큰 은사들의 하나에 속한다는 것을 분명히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최근들어,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의 은사는 성령의 은사가 아니며 단지 표적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분들이 나타났다. 그것은 악령의 장난이며 고린도운동의 하나라는 것이다. 사도바울도 알아들 수 없는 방언을 은사로 생각했다가 나중에 생각을 바꾸었다는 것이다. 또한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모든 방언의 은사는 모두가 다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가 아니었고 다 외국어였으며, 각 세계로 복음이 전파됨에 따라 사라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즉 사도시대가 끝나고 성경기록이 완성됨에 따라, 더이상 외국어 방언을 말하는 시대도 같이 끝났다는 것이다. 또한 이 주장을 하는 분은 고넬료집안에 있었던 방언이나 에베소교회의 방언은 외국어로소 표적이었지만 이방인들을 위한 표적도 아니었고, 고넬료집안에 있었던 방언은 할례받은 유대인들을 위한 표적이었고, 에베소교회의 방언은 사도바울이 사도인 것을 증언해주는 표젹이었을 뿐이며, 그날 나타났다가 그날 사라진 것이지 평생 활용할 수 있는 은사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누가 이러한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일까? 딱히 누구라고 말하기는 곤란하지만 인테넷을 검색해보면 금방 알 수 있는 분이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이러한 주장을 하는 분을 따라가며 추구하는 분들이 우리나라에 수 천명이 훨씬 넘는다는 사실이다. 만일 이들이 주장이 옳다면 지금 현재 대한민국의 성도들 중에서 약 250만명이 말하고 있는 방언은 그쳐야 할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그것이 진정 성령의 은사인 것이 맞다면 그들은 성령을 훼방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말하고 있는 방언이란 어떤 것이었는가? 정말 그들이 말하는 것처럼, 고린도교회의 방언은 이상한 헛소리이자 악령의 장난이며 귀신들이 주는 방언에 불과한 것인가? 그리고 거짓사도들과 궤휼의 역군들이 유포한 거짓방언이었던 것인가? 결론적으로 말씀드리자면 그들이 지금 잘못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도바울은 고전12장부터 성령의 은사들 가운데 방언의 은사를 언급하고 있으며, 방언의 은사를 예언의 은사와 더불어 더욱 더 큰 영적인 은사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다 방언을 말하기를 원하지만 이미 방언을 말하는 자는 그것보다 더 큰 은사인 예언의 은사를 사모하라고 하였기 때문이다(고전14:5). 그리고 사도바울 자신도 방언의 은사를 활용하여 더 적극적으로 방언으로 말해왔으며(고전14:18), 다른 사람들이 방언말하는 것을 금하지 말라고까지 하였다(고전14:39).

 

3. 사도바울은 방언에 대해서 어떻게 말했는가?

  그렇다면, 사도바울은 고전14장에서 방언(헬, 글로사)을 무엇이라고 말하였는가? 그것은 크게 2가지다. 첫째, 방언으로 발설하는 자는 사람에게 발설하지 않고 하나님께 하는 것으로서, 영으로 비밀들을 발설하는 것이라고 했다(고전14:2직역). 이로써 우리는 방언이란 사람의 영이 [성령과 더불어] 하나님께 비밀한 것들을 아뢰는 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방언무용론을 주장하는 분들은 고전14:2의 말씀을 이상하게 해석한다. 그것은 방언을 말하는 자는 말을 사람에게 하지 않고 하나님께 한다고 하기 때문에 알아듣지도 못하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고, 그것은 자기들의 영이 비밀을 말하고 있는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라는 것이다. 즉 고전14:2은 부정적인 본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고전14:2의 헬라어원문은 부정문도 아니며, 그러한 뜻도 아니다. 이제 헬라어를 26년이상 공부해온 사람으로서 고전14:2을 바르게 번역해 본다.

고전14:2[직역] 왜냐하면 방언으로 발설하고(입으로 말하고) 있는 자는 사람들에게 발설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하나님께 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가] 영으로 비밀들을 발설하는 것이다.

고전14:2[고영민역] 방언으로 말하는 사람은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고 하나님께 말씀드립니다. 이것을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영으로 신비스러운 것들을 말합니다.

  둘째, 방언은 [거듭난 성도가] 자신의 영으로 하는 기도다(고전14:14). 고전14:14은 이렇게 증언한다.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한다면, 나의 영이 기도하는 것이다. 그런데 나의 마음은 열매없이 있느니라(헬라어직역)" 그렇다. 방언은 거듭난 자의 영이 하나님께 비밀들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영이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인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도 해야 하겠지만 영으로 드리는 기도도 필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그러면 어떻게 할까? 내가 [장차] 영으로 기도할 것이다. 그런데 역시 [내가] [장차] 마음으로 기도할 것이다. 내가 [장차] 영으로 찬송할 것이다. 그런데 역시 [내가] [장차] 마음으로 찬송할 것이다.(고전14:15 헬라어직역)"

  그렇다. 방언이란 첫째로, 자신의 영이 하나님에게 비밀들을 발설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로서는 그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다(그래서 알아듣기 위해 방언통역이나 예언이 필요한 것이다). 이것이 방언에 대한 첫번째 정의다. 또한 둘째로, 방언은 내 영이 드리는 기도다. 방언은 영이 말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방언은 영이 드리는 기도이기도 한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방언을 영이 드리는 기도만으로 알고 있는데, 실제적으로는 2가지 일을 하는 것이다. 영이 말도 하는 것이며 기도도 하는 것이다. 실제적으로 방언통역해 보면, 약 90%는 영이 말하는 것이며, 약 10%는 기도하는 것 같다. 이것은 한 사람이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방언전체를 놓고 볼 때 그렇다는 것이다. 어떤 이는 처음부터 끝까지 영이 말하는 방언을 하기도 한다.

  혹 당신은 방언을 하거나 방언을 들어보았는가? 우리가 귀로 듣는 것으로는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를 확인할 수가 있는데, 그것은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가 아니라 영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귀에 들리는 것만으로는 그 말이 무슨 말인지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다. 즉 방언은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말하고 있는 언어(지방말, 외국어)가 결코 아닌 것이다. 하지만 방언을 통역해보면 그것이 단지 몇 개의 단어를 반복하고 있다거나 심지어 "랄랄랄"이라고 말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내용은 각기 다른 내용으로 영이 말하고 있고, 영이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 방언은 영이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는 것이며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방언통역을 한 번 유심히 들어보라(유튜브에 올린 것을 참고하기 바람). 영의 말 혹은 영의 기도로서 방언은 결코 사람의 누군가에게 부탁하는 내용이 하나도 없다. 방언은 오직 영이 하나님에게(성령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영과 더불어 아버지에게) 하는 말이요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인 것이다. 그러므로 영의 말이나 영의 기도는 하나도 나쁜 것이 없다. 다 좋은 것들만 있다. 그러므로 방언기도를 금해서는 결코 아니 된다.  

 

4. 최초로 오순절날 마가다락방에서 행해진 방언은 외국어였는가 아니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었는가?

  그렇다면, 오순절날 마다락방에서 120명의 예수님의 제자들과 성도들이 했던 방언(글로싸)은 과연 외국어였을까 아니면 고전14장에 나오는 것처럼 사람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었을까? 오늘날까지 이 부분에 있어서 사람들의 의견이 갈린다. 왜냐하면 오순절날에 일어났던 방언을 듣고 놀란 사람들 곧 외국(15개국)에서 살다가 왔던 디아스포라(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들의 언어(디아렠토)로 방언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순절날 당일에 터져나온 방언만은 특수한 방언형태로서 외국어방언이었고, 나머지 모든 방언들(고전14장의 사도바울의 방언, 행10장의 고넬료가정의 방언, 행19장의 에베소교회의 방언, 고전14장의 고린도교회의 방언)은 사람이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이었다고 주장하는 분들도 있다. 또한 방언무용론자 내지 방언폐기론자들은 그날 마가다락방의 방언은 외국어방언이었다고 강력히 주장한다. 그러니 얼마후 외국어방언은 사라졌으며 지금은 그러한 방언이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오늘날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을 말하는 것은 다 가짜방언, 귀신방언을 받은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오순절날 마가다락방에서 텨져나온 방언은 과연 어떤 언어였을까? 외국어였을까 아니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었을까? 우선 이 문제에 들어가기 전에 개인적으로 본다면, 방언은 영이 살아난 자들에게 외적으로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세례를 받을 때(행11:15~17)에 일어나는 성령의 초자연적인 은사(선물)이므로, 그날 120명의 성도들이 외국어방언으로 말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도 충분히 생각한다. 하지만 사도행전2장의 헬라어원문과 문맥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날 120명 성도들의 방언도 역시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을 했을 것이 분명하다. 그 근거는 다음과 같다.

  첫째, 오순절날 마가다락방에서 말했던 자들의 입에서 터져나온 방언은 "디아렉토(외국어)"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고, "글로싸(방언)"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행2:4). 만약 그 말이 "글로싸(방언)"가 아니라, 외국어(디아렠토)라고 했다면, 그렇게 그날 터진 방언은 외국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렇게 기록되어 있지 않다. 행2:4의 원문을 다시 들여다 보라. 그들이 했던 말은 "글로싸"로서, 예수님께서 믿었던 자들에게 따라온다고 하는 바로 그 표적이자(막16:17), 성령의 은사(선물)로서(행11:17) "글로싸(알아들을 수 없는 말)"인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120명의 성도들이 말했던 글로싸(방언)를 들었던 자들이 자기 나라의 말 혹은 자기가 태어난 곳의 언어(디아렠토)로 들었던 것 뿐이다.

  둘째, 그날 15개국에서 몰려들었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들었던 언어는 자기들이 난 곳의 방언(디아렠토)으로 분명하게 또렷히 들었다고 간증하고 있으며(행2:6,8), 더불어 120명이 말했던 방언에 대해 들었던 자들의 평가가 "새 술에 취하였다"라고 말했기 때문이다(행2:13). 먼저, 15개국 유대인들이 들었다는 말은 또렷히 자기나라의 언어(외국어)였다고 말하고 있다. 이는 그들의 귀에 자기나라의 말로 들려진 것이지 자기나라의 말을 찾아서 들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120명의 성도들이 한 곳(가서 보니 그리 크지 않는 공간이었다)에 모여 간절히 기도했는데, 지나가던 자가 그들의 기도소리를 들을 때에 자기나라의 언어로 또렷히 들을 수 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왈왈왈거리는 소리만 밖으로 나왔을 것이다. 함께 120명의 성도들이 함께 큰 소리로 기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어떤 이는 이렇게 말했다. 120명의 성도들이 하나님의 큰 일들을 발설하고 있는 것을 자기들이 듣고 있다고 말했으며, 또 어떤 이는 새 술에 취했다고도 말했다. 하지만 그날 기도는 아침 9시경의 기도였다. 그래서 사도베드로는 자기들이 술에 취한 것이 아니라고 했다. 만약 120명의 성도들이 외국어로 방언을 하고 있었다고 하면, 그들이 술에 취해 있었다고 표현하지 않았을 것이다. 잘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말했기 때문에, 이것이 술취한 것인지 아닌지 구분이 안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순간 하나님께서 15개국에서 몰려왔언 헬라파 유대인들에게 자기들의 고국의 언어로 듣게 하신 것이다. 그러니, 말하는 120명으로 성도들은 알아들 수 없는 말로 방언을 말한 것이며, 들었던 자들은 성령의 초자연적인 개입으로 자기들의 고국의 언어인 외국어로 들었던 것이다.

 

5. 방언과 방언통역과 예언의 은사는 어떻게 같고 어떻게 다른가?

  좀 전에도 말했다시피 방언은 초자연적인 성령의 은사로서 거듭난 사람이 자신의 영으로 말하는 것이자 자신의 영이 드리는 기도다. 그렇지만 이것은 사람에게 하는 말이 아니므로 사람으로서는 알아들을 수가 없다. 다만 하나님만 알아들으신다. 그런데 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방언, 글로싸)을 알아듣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또 다른 초자연적인 성령의 은사를 받은 자들인데, 그것은 예언의 은사와 방언통역의 은사를 받은 자들이다. "예언의 은사"란 자기가 말하는 방언(알아들을 수 없는 영의 언어)을 자기가 알아듣고 말하는 은사이며, "방언통역의 은사"란 남이 방언하는 것을 자기가 알아듣고 자기의 말로 말하는 은사이다. 그런데 예언보다는 방언통역이 더 큰 은사인 것 같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알 수 없는 방언으로 계속 말하기보다는 자기가 하는 방언을 알아들을 수 있도록 예언의 은사를 더 사모하라고 명령하였다. 그래야 답답하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방언통역의 은사는 무식한 자들(성령의 은사를 거부하는 자들?)이나 불신자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성도들을 보고 미쳤다고 말하지 않기 위해 필요한 은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방언을 말하는 자는 예언의 은사를 간구할 것이며(고전14:4~5), 방언통역의 은사를 얻기 위해 기도하라(고전14:13)고 한 것이다.

 

6. 방언은 만사형통의 기도인가? 방언의 위험성은 없는가?

  사도바울은 방언이 자기를 건축하는 데에 매우 유익하다고 분명하게 말했다(고전14:4). 그러므로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행하여 "나는 너희가 다 방언말하기를 원한다"고 하였다(고전14:5). 앞에서도 살펴보았지만 방언은 예수께서 성령으로 우리의 영과 더불어 말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도 버릴 것이 없다.

  그렇짐나 사도바울은 다만 교회 안에서 무분별한 방언 사용과 교회에서의 혼란을 막기 위해서 방언사용을 조심할 것도 함께 부탁하였다. 특히 [통역이 없을 경우] 자기와 하나님께 개인적으로 방언하라고 하였다. 그리고 공적으로 모일 때에는 방언사용을 조심하고,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의 말을 하는 것이 더 낫다고 했다(고전14:19). 만약에 교회에 통역하는 자가 없다면, 무식한 자들(성령의 은사를 거부하는 자들?)과 불신자들이 들어와서는 그것이 무슨 말인지 잘 알아 듣지 못할 수 있으므로 미쳤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고전14:23). 그래서 바울은 교회가 공적으로 모일 때에는 통역을 하여 방언하고, 통역이 없을 때에는 공적인 예배에서는 잠잠하라고 말했던 것이다(고전14:27~28). 그러므로 이것은 교회에서 방언을 하지 말라는 명령이 결코 아니다. 단지 유창한 방언을 말하는 자들이 자기를 자랑할 목적으로 사용하는 방언사용의 혼란을 막고, 불신자들이 와서 교회의 성도들이 미쳤다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조심하라고 한 것이었다.

 

 

7. 방언을 말하는 자가 주의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그렇다. 방언의 은사는 만사형통의 은사가 아니다. 방언은 어쩌면 나에게 미래에 되어질 일들을 하나님의 영의 도움을 받아 내 영이 미리 기도하고 있고, 성령께서 내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을 미리 아시고 장래 우리에 대한 기대를 간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이 방언을 말하고 있다고 해서 만사형통이 자동적으로 되어지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방언을 많이 말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자신의 영성을 하나님께서 원하는 것으로 만들어주지는 않는다. 그것은 우리의 철저한 회개생활이 같이 들어가야 하며, 말씀에 대한 순종(특히 십계명 순종)이 있어야 한다. 정결과 충성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감사생활과 보은생활이 계속되어져야 방언도 효력을 발휘하게 된다. 그러므로 방언이 회개를 대신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며, 방언이 감사를 대신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또한 방언이 자신의 성품을 자동적으로 바꾸어 줄 것이라고도 생각하지 말라. 방언은 미래의 나를 위한 소원의 간구에 해당하므로, 우리의 철저한 성결과 충성이 같이 가게 될 때에 비로소 이뤄지는 것들이다.

  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먼저 통성으로 회개기도부터 해야 한다. 그리고 감사와 성품변화를 위한 기도를 먼저 해야 한다. 그리고나서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간구해야 한다. 그리고 나서 방언기도에 들어가라. 미래에 나의 되어질 모습을 내 영이 기도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어야 한다. 그리하여 철저한 성결과 충성이 합쳐진 나의 방언 혹은 나의 방언기도는 결국 나의 미래를 든든히 세워주고 아름답게 건축하며, 더욱 더 아름답게 보장해주는 것이다.

 

8. 나오며

  방언이 무슨 말인지를 통역해보지 않은 사람은 방언의 무용론 내지는 방언폐지론을 더 주장할 확률이 높다. 제대로 된 방언통역자를 못 만나보았을 확률이 크다. 그러나 지금 이 시대에도 많지는 않지만 그래도 참된 방언통역자들이 더러 있다. 우리는 그들을 통해서 방언이 사람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내 영이 비밀을 말하는 것이며, 내 영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임을 확인할 수가 있다. 방언은 거듭난 성도들에게 믿은 즉시 혹은 믿은 후에 주어지는 성령세례의 선물의 하나다. 마치 어린아이가 태어나면 "응애응애"하면서 말을 하기 시작하듯, 내 영이 거듭 태어남으로 말을 하기 시작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처음에는 어눌하고 "랄랄랄"같은 말만 되풀이하여 나오더라도 계속해서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을 멈추지 말라. 그리하여 계속해서 방언으로 말하다 보면 좀 더 유창한 방언으로 바뀌어질 것이다. 혹 유창한 방언으로 바뀌지 않은 방언이라고 해도 결코 실망하지 말라. 자신의 영은 지금 유창한 말로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고 있거나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을 테니 말이다. 건투를 빈다.

 

2019년 3월 17일(주일)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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