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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투브 주소 https://youtu.be/xfBww296ALU
날짜 2020-09-20
본문말씀 사도행전 14:19~23(신약 212면)
설교자 정병진목사
주제어 바울의회심,바울의회개,바울이지은죄,신성모독죄,살인죄,바울의회개의특징,의지적인회개,생활회개,충성함으로회개,고난받음으로회개,일평생회개

바울은 회심했는가 아니면 회개했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바울이 다메섹도상에서 회심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그는 회개하지는 않았단 말인가? 고로 우리는 "회심"과 "회개"가 무슨 차이를 가지고 있는지를 좀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그가 회개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성경에서 어떻게 확인해 볼 수 있는가? 그리고 그의 회개를 통해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회개의 교훈들은 대체 어떤 것들이 있는가?
 

1. 들어가며

  우리는 지난 주말 금요기도회 시간에 "바울의 회개관(https://dongtanms.kr/64193)"에 대해 살펴보았다. 오늘은 바울이 가르친 회개관이 아닌, 바울이 직접 경험했던 회개가 어떤 것이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바울은 정말 회개했던 자일까?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바울의 회개에 대해서는 잘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바울의 회심"에 대해서는 매우 자주 언급한다. 그것은 그가 다메섹도상에서 부활의 예수님을 만났을 때에 회심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 바울은 회심만 했는가 아니면 그때 회개도 한 것인가? 만약 바울이 회개했다면 그는 대체 무슨 죄를 회개한 것일까? 그리고 그가 진실로 회개한 자였다는 것은 어떻게 증명할 수 있으며, 우리가 그의 회개를 통해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은 무엇인가?

 

2. 바울은 회심했는가 아니면 회개했는가?

  좀 전에서도 살펴보았지만 바울이 회심했다는 것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성도들이 동의하고 인정한다. 하지만 바울이 회개했다는 것에 대해서는 많이 들어보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회심과 회개는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이다. 사실 한글로 살펴 보면 이 두 단어는 그리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이것이 사용된 용례를 보면, 다음과 같은 4가지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첫째, '회심'이 일종의 개종을 의미한다면, '회개'는 어떤 삶과 상태로부터의 돌이킴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타종교에서 기독교로 귀의하면 그를 회심했다고 말하지만, 그가 회개했다고 말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둘째, '회심'이 주로 단회적인 것을 가리킨다면, '회개'는 반복적인 것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사실 회심을 여러 번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거의 다 한 번 경험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개종을 여러 번 하는 사람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회개는 자신이 지은 죄들로부터 돌이키는 것이기에 자주 행하는 편에 속한다. 셋째, '회심'이 회개에다가 믿음까지를 포함하는 개념이라면, '회개'는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돌이키는 것을 가리키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누군가가 회심했다고 했을 때에는 그가 믿는 대상을 바꾸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아닌 우상을 섬기다가 참된 하나님을 섬기게 되었을 때에 그는 회심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낱낱의 지은 죄를 고백하고 용서받을 때에는 회개했다고 말하는 것이지 회심했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회심'이 완전하고 돌이킬 수 없는 전환을 의미한다면, '회개'는 다시 반복해서 행하는 행위를 가리킨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바울이 다메섹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돌이키게 된 것은 회심한 것인가 아니면 회개한 것인가? 그것은 결론적으로 보았을 때, 그는 그날 회심한 것이며 또한 회개를 시작한 것이다. 왜냐하면 회심은 믿는 대상까지 바꾸는 단회적인 행위이기 때문에 그는 그날 분명히 회심한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바울은 그날 회심했을 뿐만 아니라 일평생을 두고 회개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날 회개한 것이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좀더 자세히 살펴볼 것이다. 

 

3. 바울이 회개한 사람인지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오늘날 우리는 바울이 회개한 사람인지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것은 간단하다. 그가 회개를 했다는 정황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 그가 회개하지 않았다면 그는 죄사함을 받지도 못했을 것이며, 구원받지도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죄사함을 받았으며 또한 구원도 받았다. 그는 회개한 것이다. 회개의 결과가 곧 죄사함이며 궁극적으로는 구원을 가져다 주기 때문이다. 사실 바울의 회개론을 살펴보면, 그는 회개가 사람이 구원받기 위한 필수적인 요소로 보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라고 증언했기 때문이다(고후7:10). 그래서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던 자기가 구원받은 것에 너무나 감사하였기에, 바울은 자신을 죄인들 중에 괴수(첫째가는 이)라고 말했던 것이다(딤전1:15).

 

4. 바울은 대체 무슨 죄를 지었는가?

  그렇다면 바울은 대체 무슨 죄를 지은 것인가? 그가 훗날 로마의 감옥에 갇히게 되었을 때, 그가 써보낸 옥중편지 중 하나인 빌립보서에서, 바울은 자기를 이렇게 소개했다. "나는 8일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다(빌3:5~6)". 그렇다. 그가 회심하기 전에 자신이 저질렀던 행동을 말할 때에, 그는 결코 율법의 의의 측면에서 볼 때 흠이 없었다고 고백하였다. 왜 그랬을까? 사실 그는 예루살렘교회의 일곱집사의 하나였던 스데반을 죽이는데 앞장섰던 인물이었다. 그런데 그는 자기가 율법의 측면에서 보았을 때에는 흠이 되는 일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율법에서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는 반드시 돌로 쳐 죽이라고 규정하고 있는데, 돌로 칠 때에는 성밖에서 치라고 되어 있다(레24:13~16). 그런데 바울은 그러한 규정대로 실천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스데반을 돌로 쳐죽이는 현장에서 그 일에 찬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바울은 그때 스데반이 신성모독죄를 저질렀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스데반은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손으로 지은 성전에 계시지 않다고 증언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스데반이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가 믿고 따르는 예수는 선동가요, 미친 사상가요 거짓 선지자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러한 나사렛의 미치광이를 따라다니는 자는 돌로 쳐죽임을 받는 벌을 받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메섹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 바울은 "스데반이 맞았고 자신은 틀렸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가 신성모독죄를 지은 것이 아니라 자신이 신성모독죄를 지었으며, 그가 잘못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핍박자와 폭행자로서 악인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맨 나중에 막삭되지 못한 자처럼 아주 늦게 사도가 된 자신을 가리켜 바울은 "나는 사도들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라고 했다(고전14:9). 뿐만 아니라 그는 자신이야말로 신성모독자요 핍박자와 폭행자였다고 고백하였던 것이다(딤전1:12~13). 

 

5. 바울은 어떻게 해서 회개하게 되었는가?

  그렇다면, 바울은 어떻게 회개하게 되었는가? 그가 다메섹에서 경험했던 것은 사실 회심이면서도 동시에 회개였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만나고 보니 첫째, 여호와 하나님만이 유일한 참 신이라고 믿어왔던 자신이 틀렸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나사렛 예수가 거짓선지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보낸 자를 몰라본 자신에게 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즉 바울은 예수님이야말로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야요 하나님의 아들이실 뿐만 아니라 육체를 입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딤전3:16)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스데반이 신성모독죄를 지은 것이 아니라 자신이 신성모독죄를 지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고 그것을 회개했다. 둘째, 그는 죄없는 의인이었던 스데반을 돌에 맞아 죽게 했다. 이는 그가 살인죄 내지는 살인교사죄를 지은 것을 의미한다. 그가 옳았고 자신이 틀렸던 것이다. 그것은 오직 그날 다메섹도상에서 만난 그분 때문에 알게 된 것이다. 길을 가던 사울은 다메섹도상에서 홀연히 하늘로부터 강렬한 빛을 보게 된다. 그러자 그만 땅에 떨어지고 만다. 그때 그는 그 빛에서부터 나는 소리를 듣게 되는데, 그것은 "사울아 사울와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하는 것이었다. 뜻밖의 음성을 들은 사울은 그분에게 물어보았다. "주여, 당신은 대체 누구십니까?" 그러자 주님께서 그에게 말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이 한 마디의 말에 사울은 완전히 거꾸러질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예수님을 믿는 따르는 자들은 다 미친 자들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자기의 스승을 따르고 좋아하다보니, 이제는 환영을 보고서 미쳐서 돌아다니고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의 말했던 그분이 자기의 눈 앞에 나타난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었다. 그래서 그는 다메섹에 들어가서는 식음을 전폐하고 그 사건의 핵심을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는 예수이야말로 하나님께서 보내셨던 참 메시야였다는 것과, 그분이야말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 믿어지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죽은 자는 절대 다시 살아나거나 나타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고로 그분은 그에게 더이상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자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자 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을 몰라보고 그를 능멸한 신성모독자가 다름이 아니라 자기자신이이라는 사실과 그것을 믿고 따랐던 스데반을 죽인 것이 곧 살인죄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6. 바울의 회개가 가르쳐주는 4가지 회개의 교훈은 무엇인가?

  우리는 바울의 다메섹 체험과 오늘 읽었던 루스드라에서 발생한 사건을 통하여 바울이 깨달았고 실천했던 회개가 어떤 것이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첫째, 회개는 꼭 감정적인 결과로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울이 예수님이 누군지를 몰라보고 있다가 예수님을 직접 본 후에 커다란 충격를 받았다. 그러니 회개는 엄청났을 것이다. 하지만 성경에서는 그가 자신의 죄를 통곡했다는 말은 찾을 수 없다. 하지만 그는 변화된 삶으로서 자신이 회개했다는 것을 말해주었으니, 그는 회개한 자인 것만큼은 틀림없다. 둘째, 회개는 주님께서 부탁하신 사명에 충성하는 것으로도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행9:15). 그때 바울은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만났고 그분 앞에서 거꾸러졌다. 그리고는 그때부터 그는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살아가게 된다. 그것은 곧 주님을 증언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예수께서 자신에게 부탁한 일에 충성하였다. 그것은 그가 이방인들과 왕들과 이스라엘 자손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일평생 그 일에 헌신했다. 셋째, 회개는 고난을 기쁨으로 맞이하면서 감사로도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의 대표적인 예가 바로 루스드라의 돌팔매질 사건이다. 바울은 성령의 지시를 받은후 바나바와 더불어 갈라디아지방에서 복음을 전파하러 떠난다. 그때 처음으로 도착했던 도시들이 바로 "비시디아의 안디옥과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와 더베"였다. 그런데 비시디아의 안디옥에서부터 유대인들은 바울을 집요하게 따라붙었다. 그리고 바울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고니온에서는 하마터면 그들이 던진 돌에 맞을 뻔하였다. 그런데 루스드라에 오니 그들이 그 성 사람들을 선동하는 것이 아닌가? 결국 그들에 의해 바울은 돌에 맞고 쓰러졌다. 만약 하나님께서 그날 돌에 찢어진 바울을 고쳐주시고 또 살려주시지 않으셨다면 바울은 그날 아마도 죽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자신에게 돌에 던졌던 자들을 고소하지도 않았으며,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하나님께서 그저 살려주신 것에 감사할 따름이었다. 그리고 다시 일어나서는 루스드라 성 안에 들어가 복음을 전파하였고 그 다음날에는 일정을 따라 더베에 가서 복음을 전하였다. 그래서 그는 수많은 제자들을 얻을 수 있었다. 고로 바울은 자신이 고난받는 것을 결코 불행한 일이라고 여기지도 않았다는 것과 그러한 일을 당한 것에 대해 결코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동족으로부터 박해를 받았고 죽음의 위협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한 번도 그것에 대해 앙심을 품지 않았으며, 불평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렇게나마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했던 것이다. 넷째, 마지막으로 회개는 한 순간에만 행하는 일이 아니라 일평생을 두고 행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 회개가 어떤 사람에게는 한 순간 통회자복함으로 끝맺게 되어질 수도 있다. 하지만 바울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일평생에 회개를 실천하였으니, 그가 맡겨진 복음전파사역에에 충성한 것부터 시작하여, 핍박을 받아 죽는 현장에까지 가는 것도 결코 마다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회개를 한 순간의 감정적인 것으로만 취급하려고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러한 것은 그에게는 과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빌립보에서는 복음을 전하다가 실컷 두들려 맞고 감옥에 갇히게 되었어도 그는 감옥 안에서 찬송을 부를 수가 있었던 것이다. 

 

7. 바울이 회개한 결과는 어떻게 나타났는가?

  바울은 일평생 주께서 맡겨주신 사명에 충성하는 것과 복음을 전하다가 고난을 받고 박해를 받으면서도 그것을 고난이라고 여기지 않았던 인물이다. 그는 것을 "회개"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쁨으로 그러한 길을 걸어갈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일평생 복음을 전파하고 루스드라에서는 죽임까지 당하는 고통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회개의 길을 걸어가게 된 결과는 무엇으로 나타났을까?

  첫째, 그는 자신의 머리가 깨져서 거의 죽는 일이 발생하였으며 성밖에 쓰레기처럼 버려졌지만 얼마 후 곧 깨어나 다시 살아났는데, 하루도 채 지나지 않은 상태에서 그의 몸이 놀랍게 회복되는 신비한 경험을 하게 된다. 아마도 다른 사람 같았으면 적어도 한 달동안은 머리에서부터 온 몸이 퉁퉁 부어올라서 아마 움직이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바로 당일에 혼자 일어날 수 있었고, 성 안으로 들어갔으며 그 다음날부터는 더베에 가서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둘째, 그가 고난을 달게 받음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도 그에게 선물을 안겨주었으니, 하나님께서 '디모데'를 제자로 주셨던 것이다. 디모데는 사실 루스드라 사람으로서 2차전도여행 때부터는 바울전도팀에 합류하여 바울을 일평생을 도운 목회자로서 세움받았다. 또한 선한 일꾼으로 쓰임받은 인물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셋째, 마지막으로 그의 충성과 고난의 회개는 결국 유럽 뿐만 아니라 미국와 한국에 이르까지 온 세상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전해주는 초석이 될 수 있었다. 그렇다. 한 사람의 회개는 온 세상을 이렇게 바꿀 수가 있었던 것이다. 

 

8. 나오며

  우리는 바울의 회개를 통하여서, 사람이 회개하는 데에는 꼭 감정적인 것만을 회개라고 하지 아니하고, 행동으로 나타나는 회개도 있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진정한 회개는 한 순간으로 끝나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 일평생을 걸쳐 시행된다는 것을 살펴볼 수 있었다. 또한 회개라는 것이 통회자복하는 것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자신에게 부여하신 사명에 충성하면서 고난과 핍박 가운데서도 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라는 사실도 살펴보았다. 그렇다. 바울에게 있어서 고난은 하나의 회개 과정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고난 중에서 기뻐하며 즐거워할 수 있었고, 감사할 수 있었으며 찬송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회개가 결국 기적을 낳게 되었고 사람을 바꾸게 되었으며, 온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가 되게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어떻게 회개하고 있는가? 한 번 한 순간에 회개했다고 회개는 다 했다고 하면서, 더이상 회개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고 살아오지는 아니했던가? 아니다. 회개는 일평생에 걸쳐서 해야 할 성질의 것이지 한 순간으로 끝내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주여, 우리의 어리석음과 강퍅한 마음과 게을음을 용서하소서!

 

2020년 09월 20일(주일)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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