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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URL https://youtu.be/-mowGZMd8mQ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창세기강해(71) 아브라함의 조상과 그 가문에 왜 저주가 들어왔을까?(창11:27~32)_2022-10-31(월)

https://youtu.be/-mowGZMd8mQ

 

1. 들어가며

  이제 창세기 2부가 시작된다. 창세기 1부는 창세기 1장에서 11장까지의 이야기인데, 이 이야기는 아담부터 아브라함 이야기의 직전인 데라까지 총19대 사람들의 이야기를 수록해 놓은 것이다. 창세기 1~11장에 있는 이야기의 핵심은 인간창조와 타락 그리고 노아의 홍수 및 바벨탑 사건이다. 그런데 오늘부터는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시작할 것이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으로 잘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 그렇다면 왜 창세기 12장은 부르심을 받은 아브라함의 이야기로 시작되는가? 그래서 오늘은 아담과 노아의 가문에 왜 아브라함이 출현할 수밖에 없었는지 그 이유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태어날 당시 아브라함의 가문에 이미 드리워진 채 있었던 저주는 대체 무엇이며, 그러한 저주들이 어떻게 아브라함의 가문에 들어오게 되었는지 또한 그것을 아브라함은 어떻게 해결하려 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아브라함은 어떤 인물인가?

 창세기 2부의 시작은 창세기 12장이요 그것은 아브라함의 이야기다. 그런데 서론 부분은 11장 후반부에 나와 있다. 여기에는 아브라함은 어떻게 출생하게 되었으며,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게 되었는지 그 배경을 말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대체 어떤 인물이었는가? 간단히 정리해 보면, 아브라함은 노아의 10대 직계후손이었다. 그리고 아담부터 치자면 그는 아담의 20대 직계 후손으로서 데라의 셋째 아들로 태어난 자다. 우리는 그동안 창세기 강해를 통하여, 창세기 1~11장에 나오는 아담의 족보가 혈통적으로가 신앙의 직계로 이어져 내려왔음을 살펴보았다. 만약 창세기가 혈통적인 직계들의 이야기만을 수록해 놓았다면, 창세기의 이야기는 지금과는 많이 달라져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창세기의 이야기는 혈통적인 직계의 이야기를 쓴 것이 아니라, 신앙의 직계 자손들의 이야기를 쓴 것이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로서, 아담의 뒤를 이은 2대 자손은 셋째 아들 셋이었고, 아담의 11대손을 이은 셈의 아들 역시 첫째 아들 엘람이 아니라 셋째 아들인 아르박삿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19대손 데라의 후손도 첫째 아들 하란이 아니라 셋째 아들 아브람으로 이어져갔기 때문이다. 

 

3. 아브라함은 데라의 장자인가 셋째 아들인가?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아브라함(창세기 17장 이전까지는 '아브람')을 데라의 장자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예전부터 익히 그렇게 들어왔고 또한 그렇게 공부해 왔기 때문이다. 또한 성경 말씀을 보더라도 꼭 아브라함이 장자인 것처럼 표현되어 있었다. 물론 이러한 사실은 원문을 한글로 번역한 성경에서 그렇다는 것이지 실제 히브리어 원문이 그렇게 쓰여졌다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히브리어 성경 원문에서는 아브라함이 데라의 장자로 기록되어 있을까?

  히브리어 성경 원문을 보면, 아브라함은 혈통적인 장자가 아니다. 그는 분명 셋째 아들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러한 근거는 조금 더 성경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알 수 있다. 먼저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가 세 명의 아들을 낳은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창11:26~27). '아브라함과 나홀과 하란'이 아브라함의 아들들이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하란에서 205세를 향수하고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창11:32). 그리고 아브라함은 아버지가 죽고 난 후 하란을 떠나게 되는데 그때가 75세였다고 기록되어 있다(창12:4).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태어난 시기는 데라의 향년의 나이 205세에서 아브라함의 나이인 75세를 뺀 것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데라가 130세에 낳은 아들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데라가 첫째 아들을 70세에 낳았고, 둘째 아들은 120세에, 셋째 아들은 13세에 낳았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기독교인은 아브라함을 장자로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그 이유는 첫째, 성경 번역가들의 실수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창세기 11:26의 말씀을 보면, 데라가 70세에 아브라함을 낳은 것처럼 번역해 놓았기 때문이다. 즉 "데라는 70세에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더라(창11:26)" 그런데 히브리어 성경을 보면, "데라는 70세를 살았다. 그리고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다"로 되어 있다. 그러니까 창세기 11:26의 말씀만으로는 아브라함이 장자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것이다. 둘째, 창세기의 다른 곳에서 나홀이 아브라함의 동생처럼 번역되어 있기 때문이다(창24:15, 27, 48). 그러므로 나홀이 데라의 둘째 아들으로 번역해놓았으니, 아브라함을 장자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히브리어 성경에 나오는 '형제'라는 단어를 보면 그것은 '아흐'라는 것으로서, 이 단어가 형인지 동생인지 알 수 없다. 왜냐하면 '아흐'라는 단어는 문맥과 상황에 따라서 '형'으로도 번역되기도 하 고, '동생'으로도 번역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글 개역성경에서는 창세기 24장의 '아흐'를 전부 '동생'이라고 번역해 놓았다. 즉 '아브라함의 동생 나홀'이라고 번역한 것이다. 그러나 실제는 '아브라함의 형제 나홀'이라고 해야 한다. 왜냐하면 실제는 아브라함은 나홀의 동생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막내아들이었다는 것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것은 창세기 11장에 나오는 데라의 족보에 나와 있다.

  창세기 11장의 족보에 따르면, 데라는 세 아들(아브라함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는데, 그들 중에서 '하란'은 아들 '롯'을 낳았고, 딸들로서 '밀가'와 '이스가'도 낳았다(창11:29). 여기서 '밀가'와 '이스가'가 과연 롯의 누나였는지 아니면 여동생이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하지만 밀가가 자신의 삼촌 나홀과 결혼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밀가는 최소한 롯보다는 먼저 태어났을 것으로 추정된다. 우선 하란의 딸 밀가가 데라의 둘째 아들 나홀과 결혼했으니, 데라는 하란을 낳은 뒤 한참 뒤에 둘째 아들인 나홀도 낳았을 것이다. 그리고 데라는 130세에 비로소 아브라함을 낳게 된다(창11:32,12:4). 결국 창세기의 나머지의 기사까지 종합해서 보면, 데라는 70세에 장자 하란을 낳은 것이고 그리고 약 50년 뒤에 둘째 아들 나홀을 낳았으며, 그때로부터 10년 뒤 곧 데라의 나이 130세 때에 셋째 아들인 아브라함을 낳은 것이다. 

 

4. 아브라함의 가문에 어떤 저주가 찾아왔는가?

  이제는 아브라함의 가문에 어떤 저주가 타고 들어왔는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아브라함이 탄생하고 자랄 당시 아브라함의 주변 환경은 좋지 않았다. 노아의 홍수 이후 가장 빨리 그것도 150세도 채우지 못하고 아브라함의 조부였던 나홀이 148세로 죽었기 때문이다(창11:22~23). 이것은 당시 아브라함의 윗대 5대 조상들이 적어도 200살대 초반까지 살았으니, 아브라함의 조부 나홀은 다른 사람들보다 한 100년 정도 일찍 죽은 결론이 난다. 이것은 일종의 저주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데라의 장자인 '하란'조차도 100세를 채우지 못하고 매우 일찍 죽었기 때문이다. 데라의 아버지도 일찍 죽었고 데라의 장자인 하란도 일찍 죽은 것이다. 왜 아브라함의 가문에 일찍 죽은 사람이 이렇게 나타났는가? 그리고 저주가 어디 그것 뿐인가? 데라는 70세에 비로소 자식을 낳게 되었으니 그는 자식을 낳기까지 쉽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왜냐하면 나머지 사람들은 거의가 다 30세에 첫째 아들을 낳았기 때문이다). 또한 데라의 아들 아브라함도 100살 때까지 자식을 낳지 못했다. 고로 자손 중에 일찍 죽는다든지 아니면 자식을 낳지 못했다는 것은 다 저주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데라가 저주를 받은 것일까? 그것은 윗대 조상들에 비해 더 우상숭배의 죄를 지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브라함의 윗대의 조상들은 거의가 다 30세 전후로 첫째 아들을 낳았지만, 데라는 70세가 되기까지 아들을 낳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자식을 많이 낳지도 못했다. 이는 아브라함의 이전의 조상들 곧 역사적으로 추적해 보면 벨렉의 시대부터 우상숭배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귀신의 공격을 받아 점차 자손이 귀한 집안이 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들은 여호수아의 설교 가운데에 등장한다(수24:2~3). 즉 데라가 유브라데강 저편인 갈대아 우르에 살았을 때에 그의 윗대 조상들처럼 다른 신들(우상)을 섬기고 살았다는 것이다. 

수24:2-3 여호수아가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옛적에 너희의 조상들 곧 아브라함의 아버지, 나홀의 아버지 데라가 강 저쪽에 거주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 3 내가 너희의 조상 아브라함을 강 저쪽에서 이끌어 내어 가나안 온 땅에 두루 행하게 하고 그의 씨를 번성하게 하려고 그에게 이삭을 주었으며 
  그리고 데라 이전 조상들이 어떤 거짓말을 하고 살았는지 잘 알 수는 없지만, 구약성경을 이해하는데 참고할 만한 책으로서 야살의 책을 보면, 데라부터 이 가문이 거짓말을 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데라의 아들 아브라함도 그리고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도 거짓말을 잘 했다. 더욱이 아브라함의 손자였던 야곱의 때에는 거짓말이 엄청나게 늘어났다. 거짓말은 바로 데라가 시작했지만, 그의 3대 후손인 야곱에게서 그 결과가 엄청나게 불어난 것이다.  

 

5. 어떻게 되어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의 조상이 될 수 있었는가?

  다음 시간에 더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아브라함은 저주가 시작된 가문의 사람으로 태어났던 것이다. 그런데 저주라고 해서 항상 첫째 아들에게로만 넘어가는 것은 아니다. 그 집안에 태어난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저주의 대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수많은 영적인 정보를 종합해 보면, 의지가 약하거나 착한 사람에게 저주가 내려가는 일이 더 많다. 어찌되었든 아브라함은 최소한 사람이 일찍 죽는 단명의 저주, 우상숭배의 저주 및 거짓말의 저주 가운데 놓여 있었던 사람이다.

  그런데 야살의 책을 보면, 데라가 어떤 사람이었고 어떤 일을 했는지를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야살의 책은 성경이 아니기 때문에 절대적인 진리의 말씀리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최소한 참고할 만한 책은 된다. 이 책을 보면, 데라는 당시 함의 증손자로서 바벨탑사건을 주동했던 인물이었던 니므롯의 오른팔이었던 사람이라고 나온다. 그는 니므롯의 군대 장관이었던 것이다. 창세기 14장을 보면, 아브라함이 318명의 사람들을 데리고 가서 갈대아 우르를 중심한 네 나라의 연합군을 무찌른 장면이 나온다. 고로, 아브라함은 그 아버지의 그 아들이라고 할 수 있을 만하다. 그런데 어느 날 아브라함이 태어났고 그것을 축하하기 위해 자기 집에 왔던 니므롯의 모사들과 술사들이 밤하늘의 광경을 보게 된다. 한 커다란 별이 나타나더니 다른 커다란 별 4개를 삼켜 버리는 것이었다. 그것은 아마도 창세기 14장의 사건을 미리 보여준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어찌되었든지 이 소식은 니므롯의 귓가에 들어갔고 니므롯은 데라를 불러다가 자신의 아들(아브라함)을 죽이라고 명한다. 3일 간의 말미를 달라 하며 집에 돌아온 데라는 가족들과 상의 끝에 아브라함을 살리기로 결정한다. 대신 자신의 시녀의 아들을 니므롯에게 보낸다. 그러자 시녀의 아들은 니므롯에 의해 땅에 던져져 머리가 깨져 죽는다. 이때 데라는 아브라함을 노아와 셈의 집에 피신을 시킨다(그러나 노아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2년 전에 죽었으므로 실제는 셈의 집에 피신시켰을 것이다). 

  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갈대아우르에게 불러낸 것인가? 그것은 첫째, 그의 집안이 우상숭배에 찌들어 있었고 심지어 자기의 아버지가 니므롯의 부하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에서 유일 신앙을 지키기란 거의 불가능한 상태였을 것이다. 둘째, 그의 아버지가 거짓말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데라는 니므롯에게 갖다 바친 아들은 아브라함이 아니었다. 그는 거짓말을 하고서 다른 아기를 바쳤던 것이다. 셋째, 아브라함은 어려서부터 셈과 같은 믿음의 조상에게 가서 신앙의 유산을 배웠기 때문이다. 야살의 책 뿐만 아니라 미드라쉬 등의 참고할 만한 책을 보면, 아브라함은 우상숭배에 빠져 있는 아버지의 집안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고민했다고 한다. 그리고 아버지가 우상의 제조업자였기에 매우 슬퍼하고 통분했다는 장면도 나온다. 그래서 그는 믿음의 조상에게 가서 들으면서, 사람이 누구를 믿고 누구를 의지해야 하는지를 배웠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상숭배 등의 죄 가운데서 고민하고 있는 아브라함을 하나님이 보시고 그를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내신 것이다. 

 

6. 나오며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들은 자기 자신에게 찾아온 저주를 어떻게 끝낼 수 있는가? 그것은 첫째, 자기나 자기의 후손들 중에 누군가가 그 죄의 댓가(결과)를 받는 것이다. 둘째, 그렇지 아니면 자기와 자기의 집안 사람들 중에 누군가가 회개하여(혹은 대신 회개하여) 그 저주를 없애는 것이다. 오늘날에는 이미 예수께서 십자가 상에서 그 저주까지 감당하신 상태에 있으므로 후자의 선택도 가능한 시대가 되었다. 물론 우리의 회개가 뒤따라야 하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구약시대에는 그 저주를 고스란히 자기와 자기의 후손들 중에 누군가는 받아야 한다. 그러므로 데라의 윗대부터 시작된 우상숭배의 저주와 단명의 저주 그리고 데라 때부터 시작된 거짓말의 저주를 누군가는 끊어내야 했고 그리고 끝내야 했다. 계속 놔두어서는 경건한 셈의 가문이 저주에 묻혀서 약속의 씨를 낳지 못하고 소멸할 위기에 처하기 때문이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내셨다. 거기에 있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을 저주 가운데 그대로 놔두지 않고 불러내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린다. 그리고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전 우리를 저주 가운데로부터 속량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시어 그 저주의 값을 대신 치러 주신 우리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올려드린다. 

 

2022년 10월 31일(월)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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