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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묵상입니다.

제목:[바른 구원(06)] 구원은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해주시는가 인간이 해야 할 몫이 있는가?(마22:1~14)_2024-05-28(화)

https://youtu.be/XRly06AcjFo

 

1. 들어가며

  구원은 하나님께서 절대 주권을 가지고 이뤄가시는가? 아니면 우리 인간에게도 어느 정도의 책임이 있는 것인가? 그동안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며, 구원은 하나님의 절대 작정과 예정에 따라 성취된다고 주장하는 이들에 의해서, 구원은 하나님께서 절대 주권을 가지고 성취하시기 때문에, 사람은 은혜로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렇다면 성경은 구원에 관하여 어떻게 말씀하고 있으며, 또한 예수께서는 어떻게 말씀하셨는가? 그래서 이번 시간에는 구원에 관해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은 무엇이며, 인간편에는 그 구원을 어떻게 이뤄가는 것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성경을 따를 것인가 교리를 따를 것인가?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과연 구원을 받았는지를 먼저 확인하고 정립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신앙생활은 구원을 받은 삶에서부터 출발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구원에 관하서 성경에 기초를 두지 않고 다른 것을 두고 그것을 따라간다면 아직 시작도 못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에 입각하여 바른 구원관을 정립해야 한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는 바른 구원관이란 대체 어떤 것인가? 

  자신이 성경에 의한 구원관을 제대로 정립하기 위해서는 2가지를 바로 세워야 한다. 첫째는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구원관을 제대로 파악하는 것이다. 여기서 '성경'이라고 함은 성경 66권을 가리킨다. 다시 말해, 바울 사도가 말한 것만을 간추려서 구원관을 정립해서는 아니 된다는 뜻이다. 우리에게 주신 66권의 성경을 검토해서 거기에 합당한 구원관을 정립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의 가르침과 예수님의 가르침이 충돌되는 듯한 말씀이 있다면, 우리는 항상 예수님의 가르침을 먼저 우선 적용해야 한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직접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기 때문에 그분의 말씀은 시대를 초월하여 그리고 장소를 초월하여 항상 절대적인 진리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도 바울이나 베드로, 요한과 같은 경우는 그들의 편지가 비록 성경에 되었고 할지라도 그들이 남긴 것들은 다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고 기록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을 가장 먼저 우선순위에 두어야 한다.

  예를 하나 들어 보자. 사도 바울은 사람의 구원은 은혜로 된 것으로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엡2:8~9).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은 어떠한가?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에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셨다(마7:21). 그렇다면 누구의 말을 따라갈 것인가? 그때ㅂ에는 무조건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가야 한다.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말씀은 예수님의 말씀의 다음 순위에 속하기 때문이다. 사실 바울의 편지는 어떤 상황 속에서 각 교회나 교회의 지도자에게 보낸 편지였다. 바울이 그것을 성경을 기록한다는 마음으로 기록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바울의 편지는 어떤 상황이 들어있다. 처녀들에 대해서는 임박한 환난으로 인하여 시집가지 말고 그냥 지내는 것이 좋다고 하였다(고전7:26).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은 어떠한가?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한 것이다. 그럼 사도바울은 왜 그냥 지내라고 했는가? 그것은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쓰고 있을 때에는 주님의 재림이 자기의 시대에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고 곧 대환란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처녀는 시집가지 않는 것이 좋다고 말한 것이다. 

  둘째, 자신의 구원관이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라 교리를 따르고 있는지를 확인해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자신의 구원관이 성경에 입각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성도들은 본의 아니게 자신이 들어왔던 구원관 그리고 자신이 속해 있는 교단의 가르침에 영향을 받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바른 구원관을 정립하기 위해서는 각 교단에서 가르치는 교리를 먼저 염두에 둘 것이 아니라, 그것이 과연 성경 66권의 가르침과 일치하는지를 확인하는 절차를 가져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교리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일치하는지를 확인해 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구원관에 있어서 2가지 교리가 정면으로 충돌한다는 점이다. 그중의 하나는 칼빈주의다. 칼빈주의는 주로 장로교가 채택하고 있는데, 그 교리의 핵심은 칼빈의 기독교강요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들어 있다. 그리고 그 교리의 핵심은 한 번 구원받으면 영원히 구원받은 것임을 채택하고 있으며, 사람의 구원은 만세전 예정에 따른 것이자, 하나님께서 절대적으로 베풀어주시는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또 하나가 있는데, 그것은 알미니안주의 내지는 웨슬리안주의다. 이 교리는 주로 감리교에서 채택하고 있는바, 이는 한 번 받은 구원이라도 얼마든지 중도에서 탈락할 수 있으며, 구원도 만세전 예정이 아니라 하나님이 베푸신 구원의 은총을 자신이 수용할 것인지 여부에 따라 달려있다고 가르친다. 그런데 장로교나 감리교는 둘 다 정통교단에 속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구원관에 관한 교리는 두 교단이 대부분 반대의 노선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옳고 누가 틀리다는 말인가? 그러므로 교리가 우리의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누가 틀렸고 누가 옳은지를 무자르듯이 잘라내서 하나는 정통이라고 말하고 하나는 이단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둘 다 성경적 가르침에 어긋난다면 우리가 그 교리를 따라가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3. 구원은 하나님께서 다 해 주시는가? 인간이 해야 할 몫은 없는가?

  그렇다면 구원은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해 주시는 것인가? 아니면 인간이 해야 할 몫이 따로 있는 것인가? 성경은 둘 다를 지지한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정확히 말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에 절대 주권적으로 관여하고 계시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는 강제로 구원시키지 아니하시고 우리의 선택을 기다리신다는 뜻이다. 사람이 구원받는데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다 알아서 해주시고. 우리 인간은 그것에 대해 그 어떤 것도 할 것이 없다면, 예수께서 말씀하신 바, 구원의 모든 준비를 다 해 놓으신 후에 인간이 선택하기를 기다리고 계신다고 하는 말씀은 성경에서 삭제해야 한다.

  예를 들어보자. 요한계시록 2~3장을 보면, 마지막 시대의 교회의 모습으로 등장하는 라오디게아 교회가 있다. 그런데 이 교회는 성도들이 믿는 자들이기는 했으나 그 속에 예수님의 생명이 아직 없는 상태였다. 왜냐하면 그 교회는 책망만 받았던 교회로서, 예수님을 문 밖에 오랫동안 서 계시게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 주님께서는 이들이 구원받을 수 있도록 처방책을 내놓으셨는데, 그중의 하나는 바로 라오디게아 성도들이 자신의 마음의 문을 열고 예수님을 받아들이라고 했다는 것이다(계3:20). 만약 구원에 관한 모든 것을 다 하나님께서 주관하시고 결정하신다면, 왜 인간으로 하여금 마음의 문을 열기까지 주님은 기다리고 있다고 말씀하고 있는가? 또한 예수께서도 공생애 가운데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말한 바)와 같이 그[의]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라고 말씀하던 것이다(요7:37). 이는 누구든지 구원받기를 원하는 자는 주님께로 나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구원받을 자만을 위해 생수의 강으로서 성령을 주시는 분이 결코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누구든지 복음을 듣고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며, 예수님을 자신의 마음 속에 인격적으로 받아들인다면 그도 구원받도록 하시는 분이 우리 하나님이신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 매 마지막장에서 성령과 신부도 예수님처럼 말씀하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계22:17). 그러므로 누구든지 복음을 듣고 그것을 믿을 뿐만 아니라 그 일을 이루신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받아들이면 그도 언젠가는 구원을 받게 될 것이다. 

 

4. '은혜'와 '믿음'으로 구원얻는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 2:8~9에서, 사람은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로 믿음을 통해서 구원을 받는다고 한 말과 구원은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는 말씀은 대체 무슨 뜻인가? 한 번 구원은 영원히 구원받은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은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은 자기의 구원을 위해 어떤 노력도 기울여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만약 구원을 위해 어떤 노력이라도 기울인다면 그는 행위로 구원을 얻으려고 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에베소서 2:8~9에 대한 정확한 해석이 아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은 이렇게 분명하게 말했기 때문이다.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은 한 편으로는 은혜에 속한 것이지만 또 한 편으로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은혜'라는 말은 우리 인간이 구원을 위해 아무것도 할 것이 없다는 뜻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의 구원을 위해 모든 것을 다 행하셨다는 뜻이다. 즉 구원을 위한 모든 준비를 하나님께서 다 마련해 주셨다는 뜻이다. 그리고 더불어 누구든지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모두에게 기회를 주신다는 뜻이다. 고로 은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서 구원하신다는 뜻이 아니다. 고로 은혜란 하나님께서 만세전에 구원받을 자를 예정한 사람을 불러내서 구원하신다는 뜻이 아니다. 은혜란 하나님께서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도록 모든 준비를 다 해 놓으시고 우리들을 구원 안으로 초청하여서, 누구든지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해 놓으셨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어서 사도 바울은 믿음을 통해서 구원을 얻는다고 했다. 여기서 앞의 '은혜'라는 것이 하나님이 베풀어주시는 은총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한다면, '믿음'이란 인간이 해야 할 일을 가리킨다. 즉 하나님이 완벽하게 준비해 놓으신 구원의 소식을 들었을 때에 사람이 그것을 받아들일 것인지 받아들이지 않을 것인지는 스스로 결정하라고 주님이 요구하는 것이 믿음인 것이다. 즉 구원의 기쁜 소식을 들은 후에 그것을 믿을 것인지 아니 믿을 것인지는 인간의 선택에 맡겨두신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이란 하나님이 베풀어주시는 절대적인 은혜를 인간이 믿음을 가지고 그대로 수용함으로 비로소 이뤄지게 된다. 믿는 것은 하나님이 대신 믿어주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믿어야 하는 영역인 것이다. 

 

5. 개인구원예정이 성경에 있는가?

  어떤 사람들은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은 만세전에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 대해 구원을 예정하신 작정을 따라 구원받는다고 말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사실 단 한 사람도 만세전에 그 사람을 개인적으로 구원하시겠다고 예정하신 일은 없으시다. 누구든지 복음을 듣고 받아들이는 자를 구원하시겠다고 예정해 놓으셨을 뿐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복음의 기쁜 소식을 듣고도 그 복음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한다면 그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 사람이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은 만세전에 그를 구원하기로 작정을 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가 구원의 기쁜 소식을 듣고도 그것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구원작정은 인류를 구원하시겠다는 작정인 것이지 어떤 개인을 구원하시겠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는 개인 구원 예정이 단 하나도 나오지 않는 것이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천국에 들어가서 살아야 할 사람에 대한 숫자를 다 알고 계신다. 하지만 그 숫자에 바로 그 사람이어야 한다는 예정은 없다. 누구든지 복음을 듣고 그것을 수용하면 그가 구원받을 수 있도록 문을 열어놓으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혹시 개인에 관한 예정이 있다면 그것은 개인을 구원하시겠다는 예정이 아니라 그 사람을 어떤 용도로 쓰시겠다는 사역적 예정만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하늘에서부터 특별히 성숙한 사람을 보낼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을 반드시 구원받시겠다는 보장은 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그 사람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목적에 따라 살아가기를 결정하고 살아간다면 그는 구원을 받을 가능성이 더 있을 수는 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사역자로 이 땅에 보내셨다는 이유 때문에 그가 반드시 구원받아야 하는 이유는 없는 것이다. 이렇듯 하나님은 공평하신 하나님이시다. 어떤 사람들이든지 복음을 듣고서 예수님을 믿기로 결단하다면 하나님께서 그를 구원하는 것이지 하늘에서부터 그를 이 땅에 사역자로 보냈다고 해서 그를 반드시 구원하시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그 사람의 선택의 몫인 것이다. 

 

6. 구원에 있어서 자유의지는 어떤 역할을 수행하는가?

  고로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께서는 결코 인간의 자유의지를 침해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결코 사람을 결코 강제로 구원 안으로 끌고 들어가서 주리를 틀어서라고 그를 구원시키지는 않으신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모든 준비를 다 해 놓으신 후에, 우리의 자유의지에 따라 구원받을 수 있도록 그의 결단과 선택을 기다리시는 것이다. 마음 문 밖에서 기다리면서 우리들로 하여금 구원받을 수 있도록 우리의 마음의 문을 노크하시는 것이다(계3:20). 그래서 우리가 우리의 자유의지로 당신을 구원자로 영접하여 구원받을 것을 권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 사람치고 자신의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의 강제하심에 의해 구원받는 사람은 없다. 즉 자신의 마음은 전혀 아닌데도 어쩔 수 없이 주님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하여 구원받는 사람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자유의지는 아무 쓸데 없다고 말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누구든지 구원의 기쁜 소식들을 듣고 구원으로 초청하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때에 구원이 이뤄지기 때문이다.

 

7. 마치며

  마태복음 22:1~14에 나오는 어떤 임금의 아들의 혼인잔치의 비유는 바로 이러한 구원의 과정을 우리에게 정확히 설명해주는 비유이다. 이 비유에서 '왕'은 하나님을 상징하고 '아들'은 예수님을 가리킨다. 드디어 아들의 혼인잔치 날이 다가왔을 때에 왕은 자기의 종들을 보내어 그 잔치에 청함받은 채 있는 자들을 오라고 하였다. 여기서 '그의 종들'이란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보낸 종들로서 구약시대에는 족장들이나 선지자들일 것이다. 그리고 신약에 있어서는 세례요한이자, 사도들이며, 70명의 제자들이며,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부터는 복음전파의 일꾼들일 것이다. 그런데 원래 청함을 받았던 자들이 그만 거절하고 만다. 오기를 싫어한 것이다. 그것은 이들의 자유의지에 따른 결정이다. 그러자 왕은 다시 종들을 보내면서 그들에게 다시 그때에 이렇게 말하라고 한다.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잔치에 오소서"(마22:4) 그렇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류의 구원을 위해 모든 것을 준비하였다. 그리고 구원으로 초청하고 있다. 그러므로 지금의 시대에는 그분의 초청에 응해야 하는 때인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두고서 행위구원론을 외치는 자는 잘못된 것이다. 구원의 모든 준비를 주께서 행하시고 우리들을 불러내실 때 우리는 그분의 음성에 응답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미 십자가에서 이루어놓으신 구원의 놀라운 사실을 믿고 이제는 스스로 예수님을 자기의 마음 속에 영접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그도 구원을 받을 수가 있는 것이다. 

 

2024년 05월 28일(화)

정보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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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탄명성교회 2024.05.28 20:44

    1. 들어가며

      구원은 하나님께서 절대 주권을 가지고 이뤄가시는가? 아니면 우리 인간에게도 어느 정도의 책임이 있는 것인가? 그동안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며, 구원은 하나님의 절대 작정과 예정에 따라 성취된다고 주장하는 이들에 의해서, 구원은 하나님께서 절대 주권을 가지고 성취하시기 때문에, 사람은 은혜로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렇다면 성경은 구원에 관하여 어떻게 말씀하고 있으며, 또한 예수께서는 어떻게 말씀하셨는가? 그래서 이번 시간에는 구원에 관해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은 무엇이며, 인간편에는 그 구원을 어떻게 이뤄가는 것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성경을 따를 것인가 교리를 따를 것인가?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과연 구원을 받았는지를 먼저 확인하고 정립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신앙생활은 구원을 받은 삶에서부터 출발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구원에 관서 성경에 기초를 두지 않고 다른 것을 두고 그것을 따라간다면 아직 시작도 못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에 입각하여 바른 구원관을 정립해야 한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는 바른 구원관이란 대체 어떤 것인가? 

      자신이 성경에 의한 구원관을 제대로 정립하기 위해서는 2가지를 바로 세워야 한다. 첫째는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구원관을 제대로 파악하는 것이다. 여기서 '성경'이라고 함은 성경 66권을 가리킨다. 다시 말해, 바울 사도가 말한 것만을 간추려서 구원관을 정립해서는 아니 된다는 뜻이다. 우리에게 주신 66권의 성경을 검토해서 거기에 합당한 구원관을 정립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의 가르침과 예수님의 가르침이 충돌되는 듯한 말씀이 있다면, 우리는 항상 예수님의 가르침을 먼저 우선 적용해야 한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직접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기 때문에 그분의 말씀은 시대를 초월하여 그리고 장소를 초월하여 항상 절대적인 진리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도 바울이나 베드로, 요한과 같은 경우는 그들의 편지가 비록 성경에 기록되었다고 할지라도 그들이 남긴 것들은 다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고 기록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을 가장 먼저 우선순위에 두어야 한다.

      예를 하나 들어 보자. 사도 바울은 사람의 구원은 은혜로 된 것으로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엡2:8~9).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은 어떠한가?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셨다(마7:21). 그렇다면 누구의 말을 따라갈 것인가? 그때에는 무조건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가야 한다.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말씀은 예수님의 말씀의 다음 순위에 속하기 때문이다. 사실 바울의 편지는 어떤 상황 속에서 각 교회나 교회의 지도자에게 보낸 편지였다. 바울 그것을 성경을 기록한다는 마음으로 기록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바울의 편지는 어떤 상황이 들어 있다. 처녀들에 대해서는 임박한 환난으로 인하여 시집가지 말고 그냥 지내는 것이 좋다고 하였다(고전7:26).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은 어떠한가?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것이다. 그럼 사도 바울은 왜 그냥 지내라고 했는가? 그것은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쓰고 있을 때에는 주님의 재림이 자기의 시대에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고 곧 대환란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처녀는 시집가지 않는 것이 좋다고 말한 것이다. 

      둘째, 자신의 구원관이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라 교리를 따르고 있는지를 확인해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자신의 구원관이 성경에 입각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성도들은 본의 아니게 자신이 들어 왔던 구원관 그리고 자신이 속해 있는 교단의 가르침에 영향을 받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바른 구원관을 정립하기 위해서는 각 교단에서 가르치는 교리를 먼저 염두에 둘 것이 아니라, 그것이 과연 성경 66권의 가르침과 일치하는지를 확인하는 절차를 가져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교리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일치하는지를 확인해 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구원관에 있어서 2가지 교리가 정면으로 충돌한다는 점이다. 그중의 하나는 칼빈주의다. 칼빈주의는 주로 장로교가 채택하고 있는데, 그 교리의 핵심은 칼빈의 기독교 강요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들어 있다. 그리고 그 교리의 핵심은 한 번 구원받으면 영원히 구원받은 것임을 채택하고 있으며, 사람의 구원은 만세전 예정에 따른 것이자, 하나님께서 절대적으로 베풀어 주시는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또 하나가 있는데, 그것은 알미니안주의 내지는 웨슬리안주의다. 이 교리는 주로 감리교에서 채택하고 있는 바, 이는 한 번 받은 구원이라도 얼마든지 중도에서 탈락할 수 있으며, 구원도 만세전 예정이 아니라 하나님이 베푸신 구원의 은총을 자신이 수용할 것인지여부에 따라 달려 있다고 가르친다. 그런데 장로교나 감리교는 둘 다 정통 교단에 속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구원관에 관한 교리는 두 교단이 대부분 반대의 노선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옳고 누가 틀리다는 말인가? 그러므로 교리가 우리의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누가 틀렸고 누가 옳은지를 무 자르듯이 잘라내서 하나는 정통이라고 말하고 하나는 이단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둘 다 성경적 가르침에 어긋난다면 우리그 교리를 따라가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3. 구원은 하나님께서 다 해 주시는가? 인간이 해야 할 몫은 없는가?

      그렇다면 구원은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해 주시는 것인가? 아니면 인간이 해야 할 몫이 따로 있는 것인가? 성경은 둘 다를 지지한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정확히 말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에 절대 주권적으로 관여하고 계시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 강제로 구원시키지 아니하시고 우리의 선택을 기다리신다는 뜻이다. 사람이 구원받는데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다 알아서 해 주고, 우리 인간은 그것에 대해 그 어떤 것도 할 것이 없다면, 예수께서 말씀하신 바, 구원의 모든 준비를 다 해 놓으신 후에 인간이 선택하기를 기다리고 계신다고 하는 말씀은 성경에서 삭제해야 한다.

      예를 들어 보자. 요한계시록 2~3장을 보면, 마지막 시대의 교회의 모습으로 등장하는 라오디게아 교회가 있다. 그런데 이 교회는 성도들이 믿는 자들이기는 했으나 그 속에 예수님의 생명이 아직 없는 상태였다. 왜냐하면 그 교회는 책망만 받았던 교회로서, 예수님을 문 밖에 오랫동안 서 계시게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 주님께서는 이들이 구원받을 수 있도록 처방책을 내놓으셨는데, 그중의 하나는 바로 라오디게아 성도들이 자신의 마음의 문을 열고 예수님을 받아들이라고 했다는 것이다(계3:20). 만약 구원에 관한 모든 것을 다 하나님께서 주관하시고 결정하신다면, 왜 인간으로 하여금 마음의 문을 열기까지 주님은 기다리고 있다고 말씀하고 있는가? 또한 예수께서는 공생애 가운데,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말한 바) 같이 그[의]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말씀하셨다(요7:37). 이는 누구든지 구원받기를 원하는 자는 주님께로 나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구원받을 자만을 위해 생수의 강으로서 성령을 주시는 분이 결코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누구든지 복음을 듣고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며, 예수님을 자신의 마음속에 인격적으로 받아들인다면 그도 구원받도록 하시는 분이 우리 하나님이신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 마지막 장에서 성령과 신부도 예수님처럼 말씀하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계22:17). 그러므로 누구든지 복음을 듣고 그것을 믿을 뿐만 아니라 그 일을 이루신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받아들이면 그도 언젠가는 구원을 받게 될 것이다. 

     

    4. '은혜'와 '믿음'으로 구원얻는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 2:8~9에서, 사람은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로 믿음을 통해서 구원을 받는다고 한 말과 구원은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는 말씀은 대체 무슨 뜻인가? 한 번 구원은 영원히 구원받은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은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은 자기의 구원을 위해 어떤 노력도 기울여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만약 구원을 위해 어떤 노력이라도 기울인다면 그는 행위로 구원을 얻으려고 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에베소서 2:8~9에 대한 정확한 해석이 아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은 이렇게 분명하게 말했기 때문이다.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은 한편으로는 은혜에 속한 것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은혜'라는 말은 우리 인간이 구원을 위해 아무것도 할 것이 없다는 뜻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의 구원을 위해 모든 것을 다 행하셨다는 뜻이다. 즉 구원을 위한 모든 준비를 하나님께서 다 마련해 주셨다는 뜻이다. 그리고 더불어 누구든지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모두에게 기회를 주신다는 뜻이다. 고로 은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서 구원하신다는 뜻이 아니다. 고로 은혜란 하나님께서 만세전에 구원받을 자를 예정한 사람을 불러내서 구원하신다는 뜻이 아니다. 은혜란 하나님께서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도록 모든 준비를 다 해 놓으시고 우리들을 구원 안으로 초청하여서, 누구든지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해 놓으셨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어서 사도 바울은 믿음을 통해서 구원을 얻는다고 했다. 여기서 앞의 '은혜'라는 것이 하나님이 베풀어 주시는 은총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한다면, '믿음'이란 인간이 해야 할 일을 가리킨다. 즉 하나님이 완벽하게 준비해 놓으신 구원의 소식을 들었을 때에 사람이 그것을 받아들일 것인지 받아들이지 않을 것인지 스스로 결정하라고 주님이 요구하는 것이 믿음인 것이다. 즉 구원의 기쁜 소식을 들은 후에 그것을 믿을 것인지 아니 믿을 것인지는 인간의 선택에 맡겨 두신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이란 하나님이 베풀어 주시는 절대적인 은혜를 인간이 믿음을 가지고 그대로 수용함으로 비로소 이뤄지게 된다. 믿는 것은 하나님이 대신 믿어 주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믿어야 하는 영역인 것이다. 

     

    5. 개인 구원 예정이 성경에 있는가?

      어떤 사람들은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은 만세전에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 대해 구원을 예정하신 작정을 따라 구원받는다고 말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사실 단 한 사람도 만세전에 그 사람을 개인적으로 구원하시겠다고 예정하신 일은 없으시다. 누구든지 복음을 듣고 받아들이는 자를 구원하시겠다고 예정해 놓으셨을 뿐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복음의 기쁜 소식을 듣고도 그 복음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한다면 그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 사람이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은 만세전에 그를 구원하기로 작정을 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가 구원의 기쁜 소식을 듣고도 그것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구원 작정은 인류를 구원하시겠다는 작정인 것이지 어떤 개인을 구원하시겠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는 개인 구원 예정이 단 하나도 나오지 않는 것이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천국에 들어가서 살아야 할 사람에 대한 숫자를 다 알고 계신다. 하지만 그 숫자에 바로 그 사람이어야 한다는 예정은 없다. 누구든지 복음을 듣고 그것을 수용하면 그가 구원받을 수 있도록 문을 열어 놓으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혹시 개인에 관한 예정이 있다면 그것은 개인을 구원하시겠다는 예정이 아니라 그 사람을 어떤 용도로 쓰시겠다는 사역적 예정만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하늘에서부터 특별히 성숙한 사람을 보낼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을 반드시 구원받도록 보장은 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그 사람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목적에 따라 살아가기를 결정하고 살아간다면 그는 구원을 받을 가능성이 더 있을 수는 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사역자로 이 땅에 보내셨다는 이유 때문에 그가 반드시 구원받아야 하는 이유는 없는 것이다. 이렇듯 하나님은 공평하신 하나님이시다. 어떤 사람들이든지 복음을 듣고서 예수님을 믿기로 결단다면 하나님께서 그를 구원하는 것이지 하늘에서부터 그를 이 땅에 사역자로 보냈다고 해서 그를 반드시 구원하시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그 사람의 선택의 몫인 것이다. 

     

    6. 구원에 있어서 자유의지는 어떤 역할을 수행하는가?

      고로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께서는 결코 인간의 자유의지를 침해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결코 사람을 결코 강제로 구원 안으로 끌고 들어가서 주리를 틀어서라 그를 구원시키지는 않으신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모든 준비를 다 해 놓으신 후에, 우리의 자유의지에 따라 구원받을 수 있도록 우리의 결단과 선택을 기다리시는 것이다. 마음문 밖에서 기다리면서 우리들로 하여금 구원받을 수 있도록 우리의 마음의 문을 노크하시는 것이다(계3:20). 그래서 우리가 우리의 자유의지로 당신을 구원자로 영접하여 구원받을 것을 권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 사람치고 자신의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의 강제하심에 의해 구원받는 사람은 없다. 즉 자신의 마음은 전혀 아닌데도 어쩔 수 없이 주님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하여 구원받는 사람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자유의지는 아무 쓸데없다고 말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누구든지 구원의 기쁜 소식들을 듣고 구원으로 초청하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때에 구원이 이뤄지기 때문이다.

     

    7. 마치며

      마태복음 22:1~14에 나오는 어떤 임금의 아들의 혼인잔치의 비유는 바로 이러한 구원의 과정을 우리에게 정확히 설명해 주는 비유이다. 이 비유에서 '왕'은 하나님을 상징하고 '아들'은 예수님을 가리킨다. 드디어 아들의 혼인잔치 날이 다가왔을 때에 왕은 자기의 종들을 보내어 그 잔치에 청함받은 채 있는 자들을 오라고 하였다. 여기서 '그의 종들'이란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보낸 종들로서 구약시대에는 족장들이나 선지자들일 것이다. 그리고 신약에 있어서는 세례 요한이자, 사도들이며, 70명의 제자들이며,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부터는 복음 전파의 일꾼들일 것이다. 그런데 원래 청함을 받았던 자들이 그만 거절하고 만다. 오기를 싫어한 것이다. 그것은 이들의 자유의지에 따른 결정이다. 그러자 왕은 다시 종들을 보내면서 그들에게 다시 그때에 이렇게 말하라고 한다.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잔치에 오소서"(마22:4) 그렇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류의 구원을 위해 모든 것을 준비하다. 그리고 구원으로 초청하고 있다. 그러므로 지금의 시대에는 그분의 초청에 응해야 하는 때인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두고서 행위 구원론을 외치는 자는 잘못된 것이다. 구원의 모든 준비를 주께서 행하시고 우리들을 불러내실 때 우리는 그분의 음성에 응답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미 십자가에서 이루어 놓으신 구원의 놀라운 사실을 믿고 이제는 스스로 예수님을 자기의 마음속에 영접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그도 구원을 받을 수가 있는 것이다. 

     

    2024년 05월 28일(화)

    정보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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