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묵상입니다.
제목: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종말론자들이 알레고리적으로 잘못 해석하면 어떻게 되는가?(마24:32~39)_2020-03-04(수)
1. 비유와 알레고리는 어떤 차이가 있나요?
"비유"란 어떤 실체를 일상생활에서 흔히 접하는 어떤 것으로 빗대어서 설명하는 수사법입니다. 그것의 특징으로는 비유는 실체의 어떤 한 면만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한다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비유 자체를 가지고 또 다른 의미를 또 찾아가면 안 됩니다. 그 본문에서 실체가 무엇인지를 파악한 뒤에 그 실체를 설명하기 위해 어떤 비유를 썼는지를 확인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알레고리"는 이와 다릅니다. 알레고리는 화자(저자)가 원래 생각하고 있는 실체에 대한 비유가 아니라, 그 비유에 대한 그림자를 다른 비유를 가지고 설명하는 것이기 때문에, 화자가 그 비유의 의미를 설명해주지 않으면 결코 알기 어려운 수사학적인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나오는 비유는 반드시 설명에 첨가되어 있습니다(마13장에 나오는 "씨뿌리는 자의 비유"와 "곡식과 가라지의 비유" 등). 그러므로 설명이 나와있지 않은 비유는 단순한 비유일 뿐 알레고리가 아니라고 보시면 됩니다.
2. 예수께서 당신이 재림하실 때를 위해 사용하신 "무과과나무의 비유(마24:32)"는 비유일까요 알레고리일까요?
어떤 비유가 단순한 비유인지 아니면 알레고리적인 비유인지는 사실 처음 볼 때에는 문맥을 보아야 알 수 있습니다. 어떤 특별한 설명이 없이 어떤 요점을 보다 더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고 있다면 그것은 단순한 비유입니다. 하지만 그것에 대한 화자의 설명이 부가적으로 나올 경우에는 알레고리적인 비유인 것입니다. 그럼, 마24:32에 나오는 "무화과나무의 비유"는 어떤 것입니까? 결론적으로 그것은 단순한 비유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주님께서 주님이 다시 오시마고 약속한 때가 되면 여러가지 징조들이 나타나게 될 것인데, 만약 주님께서 말씀하신 징조들이 쭉 나타나는 것을 볼 때면 주님의 재림의 때가 가깝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드신 비유이기 때문입니다. 그 비유는 이렇습니다.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것의] 가지가 연하여지고(부드러워지고) 잎사귀를 내면(잎사귀들이 움트고 있을 때에는) 여름이 가까운 줄을 [너희가] 아나니(마24:32), 이와같이 너희도 [역시] 이 모든 일[들]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문 앞에 이른 줄(있다는 것을) 알라(알고 있으라)(마24:33)" 그렇습니다. 이 비유에 있어서 실체는 "이 모든 것들"이며, 그 실체를 설명하기 위해 사용한 비유가 "무화과나무"일 뿐입니다.
3. 그럼, 무화과나무의 실체는 무엇인가요?
그러므로 무화과나무의 실체는 "이 모든 일들"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무화과나무가 싹을 내는 것은 곧 "이 모든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본문에는 "무화과나무"에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일들의 성취"를 통해서 주님의 재림의 때가 가깝다는 것을 알아차리라는 데에 있습니다. 주께서는 그것을 자연현상을 통해서 설명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일들이 성취가 되는 것을 보면 인자가 문 앞에 있다는 것을 알라"는 것에 대한 비유가 바로 "무화과나무가 잎을 내는 것"입니다. 고로, 이 본문은 우리는 무화과나무에서 어떤 심오한 뜻을 찾아내려고 힘쓸 것이 아니라, 주님이 말씀하신 "이 모든 일들"의 성취를 살펴봄으로서 그 날이 가까이 왔음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 "이 모든 일들"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본문의 윗부분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징조들(마24:5~29)을 가리킵니다. 그러한 징조들로서는 "거짓그리스도의 출현(5절)", "난리와 난리의 소문(6절)', "민족간, 국가간의 전쟁, 기근과 지진(7절)","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받는 핍박(9~10절)", "거짓선지자의 출현과 미혹(11절)", "불법의 성행과 사랑의 식어짐(12절)', "천국복음의 온 세상 전파(13절)",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서는 것"(15절)과 "유대인들의 도망(16~20절)", "큰 환난(21~22절)", "재림예수의 출현(23,26절)", "거짓그리스도, 거짓선지자의 출현과 미혹(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까지 미혹하는 것)(24절)", "전쟁으로 인한 엄청난 시체들(28절)", "해와 달과 별들의 이상 및 하늘의 권능들의 흔들림(29절)". 고로 이러한 일들이 발생하면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가 가까이 왔다고 알라는 것입니다.
4. 그럼,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들이 다 일어나리라(마24:34)"는 말씀의 뜻은 무엇인가요?
그럼, 주님께서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말씀하신 후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들이 다 일어날 것이다"고 하신 말씀의 뜻은 무엇입니까? 여기서, "이 세대"는 무엇을 가리키는 것입니까? 안타까운 일은, 시한부종말론자들이나 세대주의자들은 "무과화나무가 싹이 나는 것"을 알레고리로 해석해버린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무화과나무"의 단어에 대한 짝을 찾아서 무화과나무의 실체를 밝히려고 시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렘24:5~7의 말씀을 가져와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이라고 되어 있으니, "무화과나무가 싹을 내는 것"은 "이스라엘의 독립"이라고 해석해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로부터 "한 세대"를 계산합니다. 고로 이스라엘이 1948년 5월 14일에 독립했으니, 그때로부터 한 세대를 계산하는 방식이죠. 지금까지 해석해온 바 한 세대는 "첫째는, 광야40년이다(1988년). 둘째는, 희년50년이다(1998년). 셋째는, 남유다의 바벨론포로생활 70년이다(2018년). 넷째는, 노아의 홍수 100~120년이다(2048~2068년)"라고 해석한 것입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해석은 엄청난 잘못입니다. 왜냐하면 33절에 나오는 "이 모든 일들"이 성취되는 것에 대한 비유로서, 무화과나무를 말하고 있을 따름이기 때문입니다. 고로 "무화과나무"는 "이 모든 일들"에 대해 비교되는 단순한 비유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무화과나무"를 알레고리로 해석하여 "이스라엘"이라고 해석한 것을 가지고, 누군가 한 세대를 계산하였으니, 문맥에서 벗어나도 한참을 벗어나게 된 것입니다. 아닙니다. "무화과나무가 싹을 내는 것"은 자연현상을 비유로 든 것일뿐 "무화과나무" 자체에 어떤 뜻이 숨겨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무화과나무"에 어떤 뜻이 숨겨져 있었다면, 누가복음의 평행본문의 말씀은 과연 어떻게 해석해야 한다는 것일까요? 즉 "무화과나무와 모든 나무들을 보라. 싹이 나면 너희가 보고 여름이 가까운 줄을 자연히 아나니(눅21:29~30)". 그럼, "모든 나무"도 알레고리로 풀어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닙니다. 자연에 있는 나무들이 가지가 부드러워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summer)이 가까이 온 것을 사람들이 아는 것처럼, "그 모든 일들"이 성취되는 것을 보면 예수님의 재림의 날이 가깝다는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5. 알레고리의 해석의 위험성은 무엇인가요?
그러므로 단순한 비유의 말씀을 알레고리적으로 해석해버리면 이렇듯 큰 낭패를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재산과 생명과도 관계된 것이라면 더 큰 일들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신천지가 바로 성경말씀을 알레고리로 해석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교리를 만들어 사용합니다. 그러니 그들은 너무나 위험스러운 시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알레고리 해석은 과거에도 살펴보았지만 해석하는 자가 자신의 입맛대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있기에, 신천지 이만희는 그것을 잘 알고서, 알레고리적인 해석인 "비유풀이"와 "짝풀이"로 성경을 해석하는 것을 고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신천지식의 알레고리 해석이 오늘날 기독교 내에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종말론"성경해석입니다. 이것을 알레고리로 해석하여 교리로 만든 자들이 바로 "세대주의자들"이요, "환난전 휴거론자"입니다. 이들은 환난전휴거는 마24장에는 나오지 않지만 숨겨져 있다고 주장합니다. 분명히 예수께서는 "환난 후에" 오시겠다고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마24:29), 이것을 깡그리 무시하고, 도둑이 은밀하게 와서 보석을 훔쳐가는 것처럼 은밀하게 공중으로 재림하실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알레고리 해석을 가지고 교리를 만들면 이와같은 대참사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참된 길을 가려는 우리는 결단코 이러한 우를 범해서는 아니 되겠습니다.
2020년 03월 04일(수)
정병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