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2026. 06. 28. (일) · 「회개와 천국복음을 온 세상에 전하는 교회」 동탄명성교회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첨부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첨부
Extra Form
유투브 주소 https://youtu.be/ORs7JQa6VQE
날짜 2024-05-29
본문말씀 에베소서 1:3~6
설교자 정보배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바른 구원(07)] 하나님께서는 만세전에 예정하신 사람만 구원하시는가?(엡1:3~6)_동탄명성교회 정보배목사 
https://youtu.be/ORs7JQa6VQE

 

1. 들어가며

  구원론은 성도가 반드시 분명히 붙들어야 할 가장 기초적인 진리다. 그러나 기초라는 말은 쉽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구원론이 흔들리면 신앙 전체가 흔들린다. 구원을 너무 가볍게 여기면 회개가 사라지고, 구원을 너무 불안하게만 여기면 복음의 기쁨을 잃는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구원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알아야 하고, 동시에 그 구원을 끝까지 지켜야 한다는 경고도 함께 들어야 한다.

  많은 성도는 “한 번 구원받으면 반드시 끝까지 구원받는다”는 말을 들어 왔다.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구원하기로 예정하신 사람은 반드시 천국에 들어가고, 멸망하기로 예정된 사람은 결국 멸망한다고 배운 사람도 많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더 정밀하게 묻는다. 하나님께서 정말 어떤 사람은 태어나기도 전에 멸망으로 정하시고, 어떤 사람만 구원으로 정하셨는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의 길을 정하시고, 누구든지 회개하고 믿으면 구원받도록 하셨는가?
  이 질문을 피하면 안 된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생명책에서 이름이 지워질 수 있음을 암시하는 말씀을 하셨기 때문이다(계 3:5).
계 3:5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이 말씀은 구원론을 안일하게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성도에게 깨어 있게 한다. 주님은 이기는 자에게 흰 옷을 입히시고, 생명책에서 그 이름을 지우지 않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렇다면 성도는 “나는 이미 예정되었으니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고 말할 수 없다. 주님의 말씀은 믿음과 회개와 이김의 삶을 요구한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이 불안정하거나 부족하다는 뜻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구원은 영원한 구원으로 주신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그 구원을 귀히 여기지 않고, 죄 가운데 머물며, 회개하지 않고, 믿음에서 떠나면 그 이름이 생명책에서 지워질 수 있다는 것이 성경의 엄중한 경고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예정하신 구원이 무엇이며, 생명책에서 이름이 지워지지 않는 이기는 자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생명책에서 이름이 지워질 수 있다는 말씀은 무엇을 뜻하는가?

  요한계시록 3장 5절은 사데 교회에 주신 말씀이다. 사데 교회는 이름은 살았으나 실상은 죽은 교회였다. 겉으로는 신앙의 모양이 있었지만, 주님 앞에서는 온전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주님은 그들에게 깨어나라고 하셨고,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건하게 하라고 하셨다. 이 배경 속에서 주님은 이기는 자의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우지 않겠다고 약속하셨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생명책이 실제적 심판의 책이라는 사실이다. 생명책은 단지 상징적 장식이 아니다. 요한계시록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가 불못에 던져진다고 말한다(계 20:15).
계 20:15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
  그러므로 생명책에서 이름이 지워진다는 문제는 구원의 핵심과 연결된다.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 속한 생명을 받은 자라는 뜻이며, 이름이 지워진다는 것은 그 생명의 자리에서 떨어져 나가는 심판을 뜻한다. 주님은 이 문제를 가볍게 말씀하지 않으셨다. 사데 교회처럼 겉으로는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죽어 있는 신앙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성도는 교리보다 먼저 말씀 앞에 서야 한다. 어떤 교리가 “생명책에 이름이 한 번 기록되면 결코 지워질 수 없다”고 말한다 해도, 주님께서 “이기는 자는 지우지 않겠다”고 말씀하셨다면, 우리는 그 말씀을 그대로 받아야 한다. 성경은 하나님이 아무 이유 없이 변덕스럽게 이름을 지우신다고 말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는 분이다. 그러나 끝까지 회개하지 않고 죄를 붙들며 주님을 떠나는 자에게는 심판이 있다.
  모세도 생명책과 관련하여 자기 이름을 지워 달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하나님은 범죄한 자를 그 책에서 지우겠다고 말씀하셨다(출 32:32~33).
출 32:32~33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게 범죄하면 내가 내 책에서 그를 지워 버리리라
  또한 사데 교회에 주신 말씀은 단지 불신자에게 주신 말씀이 아니다. 이미 교회 안에 있는 자들에게 주신 말씀이다. 그들은 주님의 이름을 알고 있었고, 교회라는 공동체 안에 있었으며, 신앙의 형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주님은 그들에게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했다”고 하셨다. 이것은 교회 안에 있다고 해서 자동으로 안전한 것이 아님을 보여 준다. 신앙의 이름은 있으나 회개와 순종의 실제가 없으면, 주님 앞에서 죽은 자로 판정될 수 있다.
  그래서 생명책의 문제는 “처음부터 기록되었느냐 아니냐”만의 문제가 아니다. 기록된 이름을 끝까지 지키느냐의 문제이기도 하다. 주님은 알곡과 가라지를 구분하시고, 양과 염소를 구분하시며, 슬기로운 처녀와 미련한 처녀를 구분하신다. 이 구분은 교리적 구호가 아니라 실제 삶의 열매와 관계된다. 생명책의 이름도 이 실제와 무관하지 않다.
  이 말씀을 종합하면, 생명책은 구원과 심판을 가르는 하나님의 책이며, 이름이 지워질 수 있다는 경고는 성도에게 회개와 이김을 요구하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생명책의 약속은 방심의 근거가 아니라 깨어 있음의 근거다. 성도는 자기 이름이 기록되었다는 사실에 감사해야 하지만, 동시에 그 이름이 지워지지 않도록 흰 옷을 더럽히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한다.

 

 

3. 한 번 구원은 왜 방종의 근거가 될 수 없는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은 가벼운 선물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값 주고 사신 구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처음부터 불완전한 구원을 주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은 영원한 생명으로 주신다. 문제는 사람이 그 구원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있다. 하나님은 영원한 구원으로 주셨지만, 사람이 믿음을 버리고 회개를 거부하면 그 구원을 잃을 수 있다.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는 말이 바르게 쓰이려면, 그 말은 성도에게 감사와 거룩함을 낳아야 한다. 그러나 그 말이 “나는 이미 구원받았으니 죄를 지어도 괜찮다”는 방종의 근거가 된다면, 그것은 복음이 아니라 미혹이 된다. 구원은 죄를 계속 지을 수 있는 허가증이 아니다. 구원은 죄와 사망에서 건짐받아 하나님께 속한 자로 사는 새 생명의 시작이다.
  바울도 죄에 계속 거할 수 없다고 말했다(롬 6:1~2).
롬 6:1~2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은혜가 크다고 해서 죄를 가볍게 여기는 것은 은혜를 모르는 태도다. 예수님의 피가 귀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죄를 가볍게 여기지 않는다. 죄를 짓고도 아무렇지 않다면 양심이 무디어진 것이다. 죄를 짓고도 회개하지 않는다면 영적 감각이 마비된 것이다. 성도는 넘어질 수 있지만, 넘어진 자리에서 머물러서는 안 된다. 회개하고 돌이켜야 한다.
  히브리서는 은혜를 받은 뒤에도 뒤로 물러가 멸망에 이를 수 있음을 경고한다(히 10:38~39).
히 10:38~39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이 말씀은 믿음의 길을 끝까지 가야 함을 보여 준다. 성도는 뒤로 물러가면 안 된다. 믿음은 한순간의 고백으로 끝나지 않는다. 믿음은 주님께 속한 자로 계속 살아가는 것이다. 회개도 한 번의 감정적 눈물로 끝나지 않는다. 회개는 죄에서 돌이켜 하나님께로 방향을 바꾸는 삶이다.
  여기에서 “구원을 잃는다”는 표현을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약속을 어기신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를 버리기 원하신다는 뜻도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며 돌이킬 기회를 주신다. 그러나 사람이 계속해서 성령의 책망을 거절하고, 죄를 합리화하고, 회개를 미루며, 주님보다 세상과 육체의 욕망을 사랑하면 그 사람은 스스로 생명의 길에서 멀어진다. 이때 성도에게 필요한 것은 예정론을 붙들고 자기 죄를 변호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 앞에서 자신을 낮추고 즉시 돌이키는 것이다.
  참된 구원의 확신은 죄를 덮어 주는 자기 위로가 아니다. 참된 구원의 확신은 예수님의 피를 의지하여 죄를 미워하고, 다시 주님께 돌아가게 하는 성령의 역사다. 그러므로 구원의 확신은 회개를 없애지 않는다. 오히려 참된 확신은 더 깊은 회개를 낳는다. 은혜를 아는 사람은 죄를 가볍게 여기지 않고, 십자가를 아는 사람은 죄값이 얼마나 무거운지를 안다.
  그러므로 “구원을 잃을 수 있다”는 말은 하나님이 불신실하시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시다. 문제는 사람이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멸시하고 죄를 사랑할 수 있다는 데 있다. 주님은 우리를 끝까지 붙들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성도는 그 붙드심 안에 머물러야 한다. 포도나무이신 예수님께 붙어 있어야 열매를 맺는다(요 15:6).
요 15:6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구원은 방종의 근거가 아니라 거룩의 부르심이다. 은혜는 죄를 덮어 두는 천이 아니라 죄에서 건져 내는 능력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구원의 확신을 가져야 하지만, 그 확신은 회개 없는 안일함이 아니라 말씀에 순종하는 믿음 위에 세워져야 한다.

 

 

4. 예지와 예정은 성경적으로 어떻게 다른가?

  예정의 문제를 바르게 이해하려면 먼저 예지와 예정을 구분해야 한다. 예지는 하나님께서 미리 아시는 것이다. 헬라어로 예지를 말할 때 사용되는 중요한 단어는 프로기노스코다. 이는 미리 안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시간 밖에 계시는 분이므로 장차 될 일을 아신다. 하나님이 마지막 심판과 새 하늘과 새 땅까지 요한계시록에 보여 주신 것도 그분이 처음과 끝을 아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미리 아신다는 것과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믿지 못하게 정해 멸망시키신다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니다. 부모가 자녀의 성향을 알고 어떤 선택을 할지 미리 예견할 수 있다고 해서, 부모가 자녀의 죄를 강제로 시킨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아신다는 사실이 곧 인간의 자유의지를 제거한다는 뜻은 아니다.
  예정은 헬라어 프로오리조와 연결된다. 이 말은 미리 정하다, 앞서 경계를 정하다는 뜻을 가진다. 성경에서 예정은 주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정하신 구원의 목적과 길을 가리킨다. 하나님은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고, 우리로 거룩하고 흠 없게 하시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시려고 예정하셨다(엡 1:4~5).
엡 1:4~5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여기서 핵심은 “그리스도 안에서”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밖의 어떤 개인을 임의로 천국과 지옥으로 나누셨다고 말씀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의 길을 정하셨다. 그리스도 안에 들어오는 자는 거룩하고 흠 없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도록 정하셨다. 이것이 성경적 예정의 핵심이다.
  에베소서 1장에서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표현은 매우 중요하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장소가 그리스도 안이라는 뜻이다. 노아 시대에 방주 안에 들어간 자가 홍수 심판을 면한 것처럼, 마지막 구원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 주어진다. 방주 밖에 있으면서 “나는 안전하기로 예정되었다”고 말할 수 없듯이, 그리스도 밖에 있으면서 구원을 주장할 수 없다. 예정은 그리스도 밖에서 인간이 마음대로 붙드는 표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오라는 하나님의 초청과 목적이다.
  그러므로 예정은 먼저 하나님의 뜻을 말한다. 하나님은 구원받은 자들이 거룩하고 흠 없게 되기를 뜻하셨다. 그 뜻은 사람의 방종을 허락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정하신 목적지가 거룩함이라면, 그 길을 가는 사람도 거룩함을 향해 걸어가야 한다. 죄 가운데 살면서도 자신은 예정되었으니 괜찮다고 말하는 것은 에베소서의 예정 목적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예정을 잘못 이해하면 하나님을 불의한 분처럼 만들 수 있다. 태어나기도 전에 어떤 사람은 멸망으로, 어떤 사람은 구원으로 정하셨다고 말하면, 인간의 책임과 회개와 믿음의 부르심이 약해진다. 그러나 성경은 계속해서 믿으라고 말하고, 회개하라고 말하며, 끝까지 견디라고 말한다. 하나님이 이미 모든 것을 개인별로 강제 결정하셨다면, 이러한 부르심은 형식이 되고 만다.
  예수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말씀하셨다(눅 13:24).
눅 13:24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이 말씀은 성도의 책임을 부정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구원의 길을 여셨으니, 사람은 그 길로 들어가야 한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아들들이 되게 하시려고 예정하셨으니,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한다. 예지는 하나님의 전지하심을 말하고, 예정은 하나님의 구원 경륜을 말한다. 이 둘을 혼동하면 하나님을 악의 조성자로 오해하게 된다.

 

 

5. 아담 안에서 사망에 놓인 인류를 하나님은 어떻게 구원하셨는가?

  인간의 운명을 이해하려면 에덴동산으로 돌아가야 한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명령하셨다.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고 하셨다(창 2:16~17).

창 2:16~17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이것이 인류에게 주어진 첫 번째 경계였다. 하나님은 선악과를 통해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다. 인간이 사랑으로 하나님께 순종할 것인지, 자기 판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할 것인지 선택할 수 있게 하셨다. 그러나 아담은 뱀의 미혹을 받아 말씀을 어겼고, 그 결과 죄와 사망이 인류 안으로 들어왔다.
  바울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다고 말했다(롬 5:12).
롬 5:12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아담 안에서 모든 인류는 사망 아래 놓였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어떤 개인을 처음부터 지옥으로 정하셨다는 뜻이 아니다. 인류의 대표인 아담이 범죄함으로 인간 전체가 죄와 사망의 질서 안으로 들어간 것이다. 그러므로 인류의 기본 상태는 안전한 중립이 아니라 사망 아래 있는 상태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을 버려두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창세기 3장 15절에서 여자의 씨를 약속하셨다.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며, 뱀은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창 3:15).
창 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이것이 구원의 시작이다. 하나님은 범죄한 인간을 즉시 영원한 멸망으로 확정하고 끝내지 않으셨다. 뱀에게 속아 타락한 인간에게 회복의 길을 여셨다. 그 길은 사람이 스스로 죄값을 갚는 길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친히 아들로 오셔서 죄값을 담당하시고, 피를 흘려 대속을 이루시는 길이었다.
  죄의 삯은 사망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생을 은사로 주셨다(롬 6:23).
롬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구약의 제사 제도도 이 사실을 보여 준다. 죄인은 흠 없는 제물을 가져와 안수함으로 자기 죄를 전가했고, 그 제물이 대신 죽었다. 그러나 짐승의 피 자체가 완전한 구원을 이룬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장차 오실 그리스도의 피를 미리 보여 주는 그림자였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십자가의 길을 준비하셨다. 사람이 스스로 의로워져서 천국에 들어가는 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대속하시는 길을 열어 놓으셨다.
  그러므로 구원은 인간의 공로가 아니다. 그러나 공로가 아니라고 해서 인간의 응답이 필요 없다는 뜻은 아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유월절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발라야 했듯이, 사람은 하나님이 준비하신 구원의 피를 믿음으로 받아야 한다. 피가 준비되었어도 그 피 아래 들어가지 않으면 심판을 피할 수 없다. 이것이 은혜와 책임이 함께 있는 성경의 구원이다.
  여기에서 예정의 참 의미가 드러난다. 하나님은 인간을 멸망시키려고 예정하신 것이 아니라, 아담 안에서 사망 아래 놓인 인간을 그리스도 안에서 살리시려고 구원의 길을 정하셨다. 구약의 제사 제도는 이 대속의 그림자였고, 예수님의 십자가는 그 실체였다. 한 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아들로 오셨고, 인자 되심 안에서 피를 흘리셨으며, 부활하심으로 생명의 길을 여셨다.
  그러므로 성경적 예정은 절망의 교리가 아니라 대속의 복음이다. 하나님은 이미 사망 아래 놓인 인간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살 길을 여셨다. 이제 사람은 그 길을 거부할 수도 있고, 회개하고 믿음으로 들어갈 수도 있다. 구원은 강제 프로그램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믿음의 응답이다.

 

 

6. 하나님은 정말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시는가?

  성경은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신다고 분명히 말한다. 이것은 예정론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기준이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들을 처음부터 멸망시키기로 기뻐하셨다면,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신다는 말씀은 설명하기 어렵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마음을 분명하게 드러낸다(딤전 2:4).

딤전 2: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바울은 이어서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신을 대속물로 주셨다고 말한다(딤전 2:6).
딤전 2:6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대속물로 주셨으니 기약이 이르러 주신 증거니라
  예수님의 대속은 예정된 소수만을 위한 폐쇄적 사건이 아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신을 주셨다. 물론 모든 사람이 자동으로 구원받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구원의 길은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다. 누구든지 회개하고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 이 “누구든지”를 축소하면 복음의 넓이를 잃어버린다.
  베드로도 주께서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신다고 말했다(벧후 3:9).
벧후 3:9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주님의 오래 참으심은 구원받을 자가 이미 정해져 있으니 나머지는 버리신다는 뜻이 아니다. 주님은 회개를 기다리신다. 오래 참으신다. 그러므로 오늘 심판이 지연되는 것은 하나님의 무관심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 때문이다. 하나님은 죄인을 즉시 멸하지 않으시고 돌이킬 기회를 주신다.
  요한복음 3장 16절도 같은 진리를 말한다.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고,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셨다(요 3:16).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서 “믿는 자마다”라는 표현은 구원의 문이 믿음 안에서 열려 있음을 보여 준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셨고, 독생자를 주셨으며,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셨다. 그러므로 성도는 복음을 전할 때 어떤 사람이 멸망으로 예정되었는지 아닌지를 먼저 따질 필요가 없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신다는 말씀을 붙들고 복음을 전해야 한다.
  동시에 이 말씀은 인간의 책임도 보여 준다. 하나님은 독생자를 주셨지만, 사람은 그를 믿어야 한다. 하나님은 회개하기를 원하시지만, 사람은 회개해야 한다. 하나님은 구원의 잔치를 준비하셨지만, 사람은 그 초청을 거절할 수도 있다. 마태복음 22장의 혼인 잔치 비유에서 청함을 받은 자들이 오기를 싫어했다는 말씀이 그것을 보여 준다(마 22:3).
마 22:3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이 진리는 전도와 선교의 근거가 된다. 만약 어떤 사람은 처음부터 멸망으로 확정되어 있다면, 복음을 전하는 성도의 마음은 쉽게 식어 버린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믿으면, 우리는 어느 영혼도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 무당의 집안에서 태어난 사람도 회개하면 살 수 있고, 우상숭배의 죄가 깊은 가문에 속한 사람도 예수의 피로 씻기면 새 길이 열린다. 죄의 뿌리가 깊어도 하나님의 구원의 길은 닫혀 있지 않다.
  동시에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신다는 말은 모든 사람이 결국 자동으로 구원받는다는 뜻이 아니다. 보편적 구원 의지와 보편 구원론은 다르다. 하나님은 모두가 회개하기를 원하시지만,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자를 억지로 천국에 넣지는 않으신다. 천국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의 나라다. 하나님을 거절하고 죄를 붙들며 빛을 미워하는 자는 스스로 생명의 나라를 거절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멸망의 원인은 하나님의 사랑 부족이 아니다. 멸망의 원인은 사람이 빛보다 어둠을 사랑하고, 회개를 거부하고, 믿음을 저버리는 데 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강제로 회개시키고 강제로 사랑하게 하지는 않으신다. 사랑은 자유의지 안에서 응답되어야 한다.

 

 

7. 에서와 야곱의 이야기는 개인의 천국과 지옥 예정인가?

  예정론을 말할 때 자주 인용되는 본문이 에서와 야곱의 이야기다. 리브가의 태중에 쌍둥이가 있었고, 하나님께서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길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을 두고 어떤 사람은 “에서는 멸망으로, 야곱은 구원으로 예정되었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창세기 본문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리브가에게 두 국민이 그의 태중에 있다고 하셨고, 두 민족이 그의 복중에서부터 나누어질 것이며,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길 것이라고 하셨다(창 25:23).
창 25:23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본문은 두 개인의 천국과 지옥을 말하지 않는다. 두 민족의 장래와 쓰임을 말한다. 에서 개인이 태어나기도 전에 지옥으로 정해졌다는 말이 아니다. 야곱 개인이 어떤 삶을 살아도 무조건 천국이라는 말도 아니다. 하나님은 두 민족의 역사적 위치를 말씀하셨다.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긴다는 말은 곧 지옥과 천국의 판결문이 아니다.
  로마서 9장에서 바울은 이 본문을 인용한다. 또한 말라기의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는 말씀을 함께 인용한다(롬 9:12~13).
롬 9:12~13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시간의 차이다.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는 말씀은 창세기 25장의 말씀이고,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는 말씀은 훗날 말라기서의 말씀이다. 말라기서는 에서의 후손 에돔의 역사와 그들의 교만을 배경으로 하나님의 평가를 말한다(말 1:2~3).
말 1:2~3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그러므로 이 말씀을 태어나기도 전에 에서 개인을 지옥으로 정하셨다는 뜻으로 읽으면 안 된다. 에서는 장자권을 경홀히 여겼다. 그는 팥죽 한 그릇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팔았다. 히브리서는 이것을 망령된 일로 경고한다(히 12:16~17).
히 12:16~17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없도록 살피라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그가 그 후에 축복을 이어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
  에서의 문제는 하나님이 그를 아무 기회도 없이 버리셨다는 데 있지 않다. 그는 장자권을 가볍게 여겼고, 복을 경홀히 여겼으며, 자기 선택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업신여겼다. 이것이 성경의 경고다. 반대로 야곱은 부족한 사람이었지만 장자권의 가치를 사모했다. 그는 넘어지고 속이고 도망가는 연약한 인생이었으나, 하나님의 복을 붙들려는 갈망이 있었다.
  로마서 9장은 하나님의 주권을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주권은 불의한 독단이 아니다. 토기장이가 진흙을 빚을 권세를 가진 것처럼 하나님께는 사람을 쓰실 권세가 있다. 하지만 그 권세는 하나님의 의와 긍휼과 오래 참으심 안에서 행사된다. 바울은 같은 로마서에서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가 불순종 아래 갇혔으나, 하나님께서 모두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신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로마서 9장을 읽을 때에도 로마서 전체의 구원 경륜 속에서 읽어야 한다.
  에서와 야곱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두려운 교훈을 준다. 복을 받은 자리에 태어났다고 해서 복을 끝까지 누리는 것이 아니다. 장자권을 가졌다고 해서 자동으로 상속자가 되는 것도 아니다. 에서는 배고픔이라는 순간의 욕망 앞에서 장자권을 팔았다. 오늘의 성도도 세상의 작은 유익과 육체의 만족 때문에 천국의 기업을 경홀히 여길 수 있다. 그러므로 이 본문은 예정론의 안일함이 아니라 장자권을 지키라는 경고로 읽어야 한다.
  그러므로 에서와 야곱의 이야기는 개인을 태어나기 전부터 천국과 지옥으로 나누었다는 본문이 아니다. 이 이야기는 하나님의 약속을 귀히 여기는 자와 경홀히 여기는 자의 차이를 보여 준다. 성도는 에서처럼 은혜를 가볍게 여기면 안 된다. 이미 받은 복을 잃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장자권을 귀히 여기지 않으면, 나중에 눈물을 흘려도 회개의 기회를 얻지 못할 수 있다.

 

 

8.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된 성도는 어떻게 이기는 자가 되는가?

  에베소서 1장은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다고 말한다. 이 말씀은 예정론의 핵심 본문이다. 그러나 본문을 자세히 보면, 하나님께서 개인들을 임의로 천국과 지옥으로 나누셨다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고,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예정하셨다(엡 1:4).

엡 1: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된 성도의 목표는 거룩함이다. 그러므로 예정은 방종의 근거가 아니라 거룩의 목적이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셨기 때문에 아무렇게나 살아도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정하셨기 때문에 거룩하고 흠 없는 자로 세워져야 한다. 이 목적을 버리면 예정의 의미를 잃어버린다.
  에베소서는 또한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시려고 예정하셨다고 말한다(엡 1:5).
엡 1: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여기서 아들들은 단지 구원받은 신분만을 말하지 않는다. 아버지의 생명과 성품과 기업을 이어받을 자들을 뜻한다. 그러므로 성도는 아들의 신분에 합당하게 살아야 한다. 죄를 사랑하고 세상을 붙들며 악한 영에게 끌려다니는 삶은 아들의 삶이 아니다. 성도는 회개를 통해 죄의 근거를 제거하고, 예수의 피로 정결하게 되며, 말씀과 성령 안에서 이기는 자로 세워져야 한다.
  요한계시록은 이기는 자에게 보좌의 약속을 준다(계 3:21).
계 3:21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이기는 자는 단지 교리적으로 예정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아니다. 이기는 자는 회개하고, 믿음을 지키고, 죄와 싸우고, 악한 영을 대적하고, 끝까지 주님 편에 서는 사람이다. 구원은 시작이고, 이김은 그 구원의 열매다.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자는 그 이름이 지워지지 않도록 흰 옷을 지켜야 한다. 흰 옷은 예수의 피로 씻음받은 정결한 상태를 가리킨다. 요한계시록은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이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는다고 말한다(계 22:14).
계 22:14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그들이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받으려 함이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된 성도는 회개하는 성도다. 회개는 구원받기 전 한 번만 하는 의식이 아니다. 회개는 주님 앞에서 계속 자신을 씻는 삶이다. 죄를 자백할 때 예수의 피가 역사하고, 죄의 근거를 붙들고 있던 악한 영들이 합법적 권세를 잃는다. 회개 없는 예정론은 성도를 잠들게 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의 예정은 성도를 깨워 거룩한 길로 이끈다.
  이기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회개를 실제로 해야 한다. 회개는 히브리어로 슈브의 의미를 가진다. 슈브는 돌아가다, 돌이키다라는 뜻이다. 헬라어 메타노이아는 생각과 마음의 방향 전환을 뜻한다. 그러므로 회개는 입술의 사과만이 아니다. 하나님을 등지고 가던 방향을 돌이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다. 죄를 사랑하던 마음에서 죄를 미워하는 마음으로 바뀌는 것이다. 그리고 그 죄를 다시 짓지 않으려는 실제적 결단과 싸움이 따라야 한다.
  또한 이기는 자는 예수님의 피를 의지해야 한다. 사람은 자기 의로 죄의 기록을 지울 수 없다. 오직 예수의 피만이 죄를 씻는다. 그러나 그 피는 회개하는 자에게 적용된다. 빛 가운데 행하고 죄를 자백하는 자에게 예수의 피가 역사한다(요일 1:7~9).
요일 1:7~9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성도는 또한 말씀을 따라가야 한다. 교리는 말씀을 설명하는 도구일 뿐이다. 교리가 말씀을 덮어서는 안 된다. 특히 예수님의 말씀은 최종적 권위를 가진다. 주님께서 깨어 있으라고 하셨다면 깨어 있어야 한다. 주님께서 회개하라고 하셨다면 회개해야 한다. 주님께서 이기는 자에게 약속하셨다면 이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
  결국 예정의 바른 결론은 이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도록 부르셨고, 거룩하고 흠 없는 아들들로 세우시려 하셨다. 성도는 그 은혜에 믿음으로 응답해야 하며, 회개로 옷을 빨아야 하고, 끝까지 이기는 자로 살아야 한다.

 

 

9. 나오며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예정하신 구원의 뜻이 무엇인지를 살펴보았다. 성경적 예정은 어떤 개인을 임의로 멸망시키는 결정이 아니다. 아담 안에서 사망 아래 놓인 인류를 그리스도 안에서 살리시려는 하나님의 구원 경륜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시고, 우리로 거룩하고 흠 없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시려고 예정하셨다.

  그러므로 성도는 예정론을 방종의 근거로 삼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은 영원한 구원으로 주어진 것이지만, 사람이 믿음을 버리고 회개를 거부하면 생명책에서 이름이 지워질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주님은 이기는 자의 이름을 지우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으므로, 성도는 이기는 자의 길을 걸어야 한다.
  또한 성도는 예지와 예정을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미리 아신다는 사실이 사람의 책임을 없애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의 길을 정하셨다는 사실은 우리를 게으르게 만드는 말씀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머물러 거룩하게 살도록 부르는 말씀이다.
  에서와 야곱의 이야기도 바르게 이해해야 한다. 그 이야기는 한 개인이 태어나기도 전에 천국과 지옥으로 확정되었다는 말씀이 아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귀히 여기는 자와 경홀히 여기는 자의 차이를 보여 주는 경고다. 에서는 장자권을 가볍게 여겼고, 그 결과 복을 잃었다. 그러므로 성도는 자신에게 주어진 구원과 생명책의 이름과 천국 기업을 가볍게 여기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신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신을 대속물로 주셨다. 그러나 사람은 그 은혜를 거절할 수도 있고, 회개와 믿음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의 사랑을 멸시하지 말고, 오늘도 회개와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 머물러야 한다.
  마지막 시대의 성도는 말씀 위에 서야 한다. 교단의 전통이나 사람이 만든 논리보다 성경이 우선되어야 한다. 특히 예수님의 말씀 앞에서 정직해야 한다. 생명책에서 이름이 지워지지 않는 자, 흰 옷을 더럽히지 않는 자, 보좌에 함께 앉는 자는 끝까지 이기는 자다. 성도는 바로 그 길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그리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된 구원의 은혜를 끝까지 지키고, 회개와 믿음으로 생명책의 이름이 지워지지 않는 이기는 자가 되어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2024년 05월 29일(수)
정보배 목사

 

 

[설교핵심]

이 설교는 구원의 영원성과 예정론에 대한 기존 신학적 통념에 의문을 제기하며, 성경의 본질적인 가르침은 인간의 자유의지와 회개에 있음을 강조합니다. 정보배 목사는 한 번 얻은 구원이 영원히 유지된다는 교리 대신, 생명책에서 이름이 지워질 수 있다는 경고를 바탕으로 신앙의 긴장감을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특히 하나님은 특정 개인을 멸망으로 예정하신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시며, 인간이 스스로 복음을 거부하고 회개하지 않을 때 구원에서 탈락하게 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결과적으로 이설교는 교리라는 틀에 갇히기보다 성경 원문의 의미를 정직하게 탐구하여,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끝까지 믿음을 지키는 삶을 살 것을 촉구하는 목적을 지닙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11 [바른 구원(10)] 사람이 정말 구원받지 못하는 또 다른 이유는 무엇인가?(마22:8~14)_2024-06-02(주일) 갈렙 2024.06.03 1594
10 [바른 구원(09)] 사람이 구원받지 못하는 2가지 진짜 이유는 무엇인가?(마22:1~14)_2024-05-31(금) file 갈렙 2024.05.31 1176
9 [바른 구원(08)] 하나님께서 만세전에 진짜로 예정하신 것 3가지는 무엇인가?(엡1:3~6)_2024-05-30(목) file 갈렙 2024.05.30 2561
» [바른 구원(07)] 하나님께서는 만세전에 예정하신 사람만 구원하시는가?(엡1:3~6)_2024-05-29(수) file 갈렙 2025.10.06 283
7 [바른 구원(06)] 구원은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해주시는가 인간이 해야 할 몫이 있는가?(마22:1~14)_2024-05-28(화) 1 file 갈렙 2024.05.28 3216
6 [바른 구원(05)] 구원의 문제, 무엇부터 다시 점검해야 하는가?(막1:14~15)_2024-05-27(월) 1 file 갈렙 2024.05.27 1309
5 [바른 구원(04)] 내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계3:20)_2024-05-26(주일) 1 file 갈렙 2024.05.26 2069
4 [바른 구원(03)] 생명책에서 그 이름이 지워지면 다시 기록될 수 있는가?(히6:4~8)_2024-05-24(금) file 갈렙 2024.05.24 1926
3 [바른 구원(02)] 생명책에 기록된 이름이 지워지는 이유와 그 싯점은 언제인가?(출32:30~35)_2024-05-23(목) file 갈렙 2024.05.23 2408
2 [바른 구원(01)] 사람이 구원을 얻는 시점과 구원을 잃어버리는 시점은 언제인가?(히10:26~31)_2024-05-22(수) file 갈렙 2024.05.22 3515
1 [결론] 바른 성경적인 구원론이란?(요일4:8~12)_2026-03-13(금) file 갈렙 2026.03.13 89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Next
/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