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9-07(수) 수요기도회
제목: 요한복음강해(12) 헐면 사흘 만에 일으시키겠다던 성전, 대체 무엇을 가리킴인가(요2:13~25)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VmXmYzIyJrw [혹은 https://tv.naver.com/v/29089470 ]
1. 들어가며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에 그분이 맨 처음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을 때는 언제였을까? 그때는 절기상으로 유월절이었다. 그렇다면 왜 예수께서는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야 했는가? 그리고 그때에 성전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가? 요한복음 2장에 보면, 그분이 그때 행하신 일은 성전을 청소하는 일을 하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자 이 일에 화가난 유대인들이 예수님에게 묻는다. 대체 무슨 권위로 이러한 일을 행하는 것이며 그럴 자격이 있다면 어떤 표적이라도 보여보라고 말이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당신들이 이 성전을 허물라. 그리하면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킬 것이다'라고 말씀하신다. 예수께서는 이것이 바로 '표적'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말씀하신 '표적'이란 대체 어떤 것을 가리키는가? 그리고 유대인들이 생각하고 있던 '표적'이란 대체 무엇을 가리키는 것이었을까?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예수께서 행하신 성전 청결기사를 통하여 왜 예수께서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셨고 또한 성전 청결을 하셔야 했는지 그리고 표적을 보여달라고 하던 유대인들에게 왜 예수께서는 자신과 죽음을 부활이 표적이라고 예언적으로 말씀하셨는지를 살펴보려고 한다. 그래서 '표적'의 진정한 의미와 그 목적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한다.
2. 왜 예수께서는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으며 그때 성전을 청결케 하셨는가?
왜 예수께서는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는가? 예수께서도 이스라엘의 20세 이상의 모든 성인 남자들이 절기가 되면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절기를 지켜야 한다는 율법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것인가?(출23:17)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일은 그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그때 예루살렘에 올라가시어 어떤 일을 수행하셨기 때문이다. 그것은 성전을 깨끗히 청소하는 일을 하신 것이다(14~16절). 그 일은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신 다음, 성전 안에서 장사하는 사람들과 소들과 양들을 전부 쫓아내시고, 돈바꾸는 자들의 상을 둘러 엎으셨으며, 비둘기 파는 자들에게 그것을 가져가라고 명령하신 것이다. 그리고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계속] 만들지 말라"고 말씀하셨다(16절). 이는 장차 유월절 양으로 죽으실 예수께서 아버지의 집을 깨끗히 청소하기 위한 것임을 뜻한다. 왜냐하면 성전은 아버지의 집인데, 아버지의 집이 더럽혀져 있었기 때문이다. 율법상 유대인들이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는 집안에 있는 누룩을 다 제거해야 했다. 그리고 유월절 양을 준비하되 그 양이 흠이 있는지 없는지 4일동안 점검해야 했다(출12:3~6,19절). 그런데 유월절 양을 잡는 성전이 그만 돈벌이로 인하여 매우 더럽혀져 있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매우 분노하셨다. 그 분노는 시편69:9의 말씀처럼, 주의 전의 열심이 예수님을 삼켜버릴 정도였다. 그렇지만 교권을 가진 그 어떤 사람도 예수님의 행위를 제지하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과 성전을 이용하여 장사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비둘기와 양과 소들을 비싼 값으로 팔아 이윤을 남기고 있었으며, 환전상들은 무려 12,5%라는 환전수수료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그런 일이 발생할 수 있었는가? 그것은 모든 성인 남자들이 해야 할 일이 있었고 그것을 제사장들이 돈벌이 수단으로 이용하였기 때문이다. 즉 해마다 절기가 되면 이스라엘 성인 남자들은 성전에 와서 2가지 일을 해야 했다. 하나는 반 세겔의 성전세를 내야 했고, 또 하나는 희생제물을 가지고 제사를 드려야 했다. 그런데 머나먼 이방지역에서 살던 이들이 성전세를 내려 할 때에는 자기들의 사용하던 돈으로 성전세를 낼 수가 없었다. 성전세는 오직 성전에서만 통용되는 성전세겔(은화)로 바꾸어 성전세를 내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한 권한은 당시 제사장들이 쥐고 있었다. 그리고 제물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멀리 살던 백성들이 가지고 온 제물들은 어찌하든지 꼬투리를 잡아 제물로 드릴 수 없게 했고, 오직 성전에서 파는 희생제물만은 아무런 하자없이 통과시켜주었기 때문이다. 기록에 의하면, 비둘기는 무려 12배를 남겨먹었다고 한다. 그렇다. 종교지도자들이 타락하면 이렇게 추하게 되는 것이다. 돈에 눈이 멀면 하나님까지도 떠나버리게 되는 것이다.
3. 무슨 권위로 그러한 일을 행하는지 물으면서 표적을 보여달라는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은 어떤 대답을 해주셨는가?
그러자 유대인들이 몰려왔다. 그들은 제사장들과 레위인들 그리고 성전에서 매매하는 자들과 환전상의 일을 하는 사람들과 매우 연관이 있는 자들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흥분하여 예수께 말했다. "당신이 이런 일들을 행하는 것으로 인하여, 당신은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여주겠소?"(2:18). 이는 예수께서 대체 무슨 권세로 제사장들이 하는 일들을 방해하며, 그럴만한 권위를 가지고 있는지 표적을 통해서 증명해 보이라는 것이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답변하셨다. "당신들이 이 성소를 [단번에] 허물어뜨리시오. 그러면 내가 세 날들 동안에 그것을 [장차] 일으켜 세우겠소"(2:19). 그러자 그들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 "이 성소는 무려 46년동안 건축된 것이오. 그런데 당신이 세 날들 안에 그것을 장차 일으키겠단 말이오?"(1:20). 그랬다. 그 당시에는 아무도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 무슨 뜻으로 말씀하신 것인지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 심지어 그의 제자들마저도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를 알지 못하고 있었다(22절). 예수께서 부활하시고 난 후에야 예수께서 말씀하셨던 '성소'라는 것을 당시 건물인 '성전'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몸인 성소를 의미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4. 성소를 헐고 다시 일으키시겠다는 말이 왜 표적이 될 수 있는가?
우리는 여기서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표적'과 유대인들이 요구하던 '표적'의 개념이 각각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유대인들은 기적으로서의 표적을 요구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할 수 없는 그것을 행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이 보낸 사람이라고 인정하겠다는 것은 당시 그들의 생각이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성전을 청결케 하는 일을 행하시자 그들은 그분에게 표적을 보여달라고 요구했던 것이다. 하지만 예수께서 생각하는 표적은 그러한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표적'이란 그것을 통해 예수께서 누구신지를 알게 해주는 표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행하신 표적들은 요한복음에 기록된 것으로는 총 7가지다. 하지만 실제 예수께서는 7가지 이외에도 수없이 많은 기적들을 행하셨다(20:30).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 사람이 하늘로부터 왔다는 것을 증명해줄 수 있는 기적들을 가리켜 '표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예수께서는 그러한 표적은 그들에게 보여줄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눅11:29). 다만 그분이 보여줄 수 있는 표적은 '요나의 표적' 밖에 없다고 하셨다. 그것이 바로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2:19)"는 말씀이다. 왜냐하면 '성전을 헐라'는 말은 '예수님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는 말은 '죽은지 3일만에 다시 살아날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예수님의 그 말씀은 정확히 요나가 말했던 바로 그 표적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이때 누가복음의 저자는 요나의 표적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눅11:29-30 무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세대는 악한 세대라 표적을 구하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나니 30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적이 됨과 같이 인자도 이 세대에 그러하리라
그렇다. 요나 시대에는 요나 자신이 표적이었다. 요나의 기적이 표적이 아니라 요나 자신이 표적이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다가 3일만에 다시 살아나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와서 니느웨 성에 가서 외치기를, 회개하지 않으면 앞으로 40일 후에 멸망한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당시 니느웨성 사람들은 회개를 하여 40일 후에 멸망을 당하지 아니했다. 하지만, 요나 대신 와서 표적 자체가 되신 예수님의 시대에는 달랐다. 그분이 오셔서 죽으셨다가 3일만에 다시 살아나셨고 회개할 것을 외치셨지만, 그때에는 아무도 그분의 소리를 경청하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40년만에 이스라엘이 완전히 멸망을 당해 지구상에서 나라가 사라진다. 그렇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표적'이란 어떤 기적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었다. 예수님 자신과 그분의 삶이 곧 표적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누가복음의 저자는 예수께서 사내아이로 탄생한 것 자체부터가 '표적'이라고 했다(눅2:10~12). 왜냐하면 아기이자 아들로 오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요 영존하시는 아버지시라는 이사야 9:6의 예언의 말씀이 예수님에게서 그대로 성취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눅2:10-12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11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12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5.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는 말의 본 뜻은 무엇인가?
예수께서는 왜 표적을 보여달라고 하는 유대인들에게 "이 성전을 헐라"고 말씀하셨던 것일까? 그것은 당시 물질적인 성전 안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멀리 외국에 사는 이들은 절기가 되면 하나님의 집을 찾아오고 있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물질적인 성전이 더럽혀 있는 것을 두고 볼 수는 없으셨다. 하나님과 성전을 그만 돈벌이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는 이들을 그냥 놔두고 볼 수만은 없으셨던 것이다. 그래서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신 후에 성전을 청결하게 하셨다.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그곳에 계시지 않았다. 특히 남유다의 므낫세 왕 즈음으로 추정되는 어느 시기에, 지성소의 법궤 가 이미 다른 장소로 이동되었기에, 솔로몬의 성전 안에는 그 뒤로 법궤가 없었다. 그리고 바벨론 포로 후에 돌아와서 지었던 스룹바벨 성전 안에도 역시 법궤는 없었다. 당연이 예수님 시대에 헤롯 성전 안에도 법궤는 없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분명하게 법궤의 속죄소의 두 그룹 사이에 계시겠고 거기에서 사람을 만나고 말씀하시겠다고 하셨다(출25:22). 그러므로 사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 당시 성전과 함께 일하는 그들과 함께 하지 않으셨다. 그러므로 예수님 당시에 하나님이 계시는 장소는 거기가 아니라 딴 곳에 있었다. 그곳은 바로 '예수님의 몸'이었다(21절). 왜냐하면 예수께서 이 땅에 들어오실 때에 혼자 오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와 함께 오셨기 때문이다(요8:29). 그러므로 예수 안에 아버지가 계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몸이 바로 진정한 성전이었던 것이다. 예수님 안에 아버지께서 계셨기 때문이다. 왜 사람들이 성전을 방문하려고 하는가? 그것은 성전이 아버지의 집이기 때문이요, 그곳에서 아버지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 더럽혀진 물질적인 성전 안에는 아버지가 계시지 않았다. 아니 그곳에서 아버지를 만날 수도 없었다. 아버지는 예수님을 통해서만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요14:6).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진짜 어디에 아버지가 계시는지를 그들로 하여금 알 수 있도록, 자신의 몸을 헐라고 말씀하신 것이다(19절). 왜냐하면 예수 안에 아버지가 계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중에 아버지를 보여달라고 하는 빌립에게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요14:9-10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10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그랬다. 예수님 당시에 아버지께서는 물질적인 성전 안에 계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 안에 계셨던 것이다. 예수님 안에 계셨기에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아버지가 어디 계신지를 알려주고 싶으셨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예수께서 말씀하시려는 진정한 '표적'이었다. 그리고 그 '표적'은 예수님 자신이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그 일을 이루시기 위해 3년 뒤 자신을 산 제물로 그들에게 내어주셨다. 그리고 죽은지 3일만에 다시 살아나셨다. 죽었다가 스스로 살아날 수 있었던 것은 그분에게는 정작 죄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40일 뒤에 승천하셨다. 그리고 하늘로 가셔서 약속한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셨다. 그러므로 믿는 이들 속에 성령이 들어오시게 되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이제 성령의 전이 되었다. 그러므로 이제 성도들의 몸은 하나님의 집(성전)이 된 것이다. 왜냐하면 믿는 이들 속에 성령으로 아버지께서 들어오시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전3:16~17)
고전3:16-17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17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이제는 예수믿는 자들 곧 교회가 하나님을 모시고 있는 성전(성소)이라는 것이다. 그곳에 하나님의 영이 거주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안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모시고 있는 전을 함부로 더럽혀서는 아니 될 것이다. 만약 그래도 자신의 성전을 더럽힌다면 예수께서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신후에 그들을 쳐 내버려 불못에 던져버리실 것이기 때문이다.
6. 예수께서 사람을 신뢰하여 그들에게 자신을 맡기지 않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예수께서는 유월절과 무교절 기간에 예루살렘에 계셨다(23절). 그리고 거기에서 많은 기적을 행하셨다. 그러나 그것은 거기에 있던 자들에게는 표적으로 보였겠지만 예수님 자신이 누군지를 설명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진정한 표적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므로 그러한 표적을 보고 예수님을 믿었던 자들이 온전한 신앙을 가졌다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표적은 예수님이 누군지를 알게 해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유월절과 무교절 기간에 행하셨던 것들은 그러한 표적들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예수께서 행하시는 기적만을 보고 믿었던 자들에게 자신을 의탁하지 않으셨다(24절).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님의 기적을 보고 예수님을 따랐던 것이지, 표적을 통해 예수님이 누군지를 진정으로 알고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나중에 배우겠지만 요한복음 6장에 나오는 오병이어의 기적도 일종의 기적이면서 동시에 표적이었다. 하지만 당시 군중들이 예수님을 따랐던 이유는 표적을 보고 예수님을 하늘 아버지의 생명을 주려 오셨던 분으로 믿은 것이 아니었다. 단지 떡을 먹고 배부르기 때문에 예수님을 따랐던 것이다. 그랬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혔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요6:26)" 그러므로 사람의 모든 속을 다 헤아리고 계셨던 예수께서는 당신자신을 사람들에게 맡기지 않으셨디. 또한 그들의 증언을 기다리지도 않으셨다. 왜냐하면 그들 속에 아버지가 계시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예수님을 따랐던 목적이 예수님의 기적을 보고 따랐을 뿐 예수님이 진정 누군지를 믿으려고 따른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23~26절).
7. 나오며
오늘 우리는 성전청결사건을 보고 표적을 보여달라고 하는 유대인들에게 성전을 헐면 사흘 동안에 일으키겠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들었다. 그런데 이 말씀이야말로 예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표적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것이다. 즉 예수께서 일으키신 기적들 중에 '표적'이라는 낱말을 붙일 수 있는 것은 기적 가운데서도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려 줌으로 인하여, 그것을 믿는 자들이 영생을 받는 것이라야 한다(요12:37). 요한복음은 예수께서 참으로 많은 표적들을 행하셨고 또한 기사(기적들)도 행하셨다고 증언한다(요12:37,20:30). 그런데 예수께서 행하셨던 표적들은 그리 단순한 기적이 아니라, 예수님이 누군지를 알려주어 그분을 구주와 그리스도로 믿게 하고 그분을 믿는 자들에게 영생을 주게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단지 사람으로서 할 수 없는 어떤 신비한 기적 같은 일을 '표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예수께 줄기차게 '표적'을 보여달라고 요청을 한 것이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그들이 성전을 헐면 사흘 만에 일으켜 세을 것이라는 말씀을 통하여, 자신의 삶이 곧 표적이며, 그 표적의 핵심은 '요나의 표적'과 같은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는 요나 당시에 요나 자신이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적이 된 것처럼, 예수님 당시에도 예수께서 그들에게 표적이 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분의 죽음과 부활이야말로 예수께서 누군지를 알려주는 표적 중의 표적이며, 그것을 믿는 자들은 곧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길이 된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갈릴리 가나에서 물을 포도주를 만들었을 때에 제자들이 그분을 믿었다고 하는데(2:11), 이는 제자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자 구주로 믿었다는 것을 가리킨다. 그리고 이 사건의 핵심은 바로 그분의 죽음에 있다. 곧 예수께서 피흘려 죽으심으로 그분을 믿는 자들에게 영생을 주시겠다는 데에 그 핵심이 있는 것이다. 그것을 겉으로 표출된 것이 당시 '포도주'였다. 그렇다면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지금 무엇을 믿고 따라가고 있는가? 그분이 날마다 우리에게 기적을 일으켜 주시어, 우리의 삶이 윤택하게 되는 것 때문에 그분을 믿고 따라가야 하는가? 아니다. 그래서는 아니 된다. 우리가 그분을 믿고 따라가는 것은 그분이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구주이자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다. 그 일이 우리를 죄로부터 용서받게 해 주며 그것만이 우리를 아버지로부터 생명을 받게 해주며, 우리를 저 하늘나라로 들어갈 수 있게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2022년 09월 07일(수)
정병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