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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성경을 보는 눈(44)] 성경은 왜 장자가 실패하고 차자가 성공했다고 증언하는가?(히12:14~17)_2024-10-23(수)

https://youtu.be/Ct9-2m5XzL8

 

1. 들어가며

  성경에 보면 장자가 실패하고 차자가 성공하는 경우가 상당수 나온다. 대표적인 경우가 에서와 야곱의 경우다. 사실 에서는 이삭의 장자로태어났다. 그런데 그는 자신이 마땅히 받아야 할 장자권(장자로서의 권리)도 빼앗기도 장자의 축복까지도 빼앗기도 말았다. 그것은 동생 야곱이 차지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에서는 자신이 아버지였던 이삭의 배다른 자식도 아니었고, 첩의 자식도 아니었다. 이삭이 낳은 쌍둥이 가운데 맏이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만 장자로서 갖는 모든 축복을 잃어버린다. 그럼 우리는 이런 경우를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그것에 대해 히브리서 기자가 답을 주었다. 그것은 에서가 장자의 축복을 경홀히 여겨서 그랬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중에 그 축복을 받으려고 눈물로 아버지에게 간구했지만 이미 축복은 그에게서 떠나버렸고 회개할 기회마저 얻지 못했다고 알려준다(히12:16~17). 그러므로 장자라고 해서 응당 장자의 축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차자로 태어났던 야곱은 장자의 축복을 받게 되었는가? 그래서 이번 시간에는 장자로 태어났지만 장자의 축복을 받지 못하는 사람은 왜 그러한 것이며, 차자로 태어났어도 장자의 축복을 받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사람이 장자로 태어나는 것과 차자로 태어나는 것은 운명적인 것인가?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날 때 누구는 장자로 태어나기도 하도 누구는 차자로 태어나기도 한다. 그럼, 만약 자신이 차자로 태어났다고 하면 나는 차자인지 장자의 축복을 받을 수는 없겠구나 하고 포기하고 살아야 하는가? 아니면 반대로, 나는 장자로 태어났으니 나는 응당 장자의 복을 누리고 살거야라고 하면서 안도하면 되는 것인가? 성경에 나오는 위대한 인물들의 경우를 보면, 장자로 태어나지 않았으나 위대한 인물들이 된 사람들이 나온다. 예를 들어, 아브라함은 데라의 셋째 아들이었다. 이삭은 아브라함의 둘째 아들이었다. 야곱은 이삭의 둘째 아들이었다. 요셉은 야곱의 11째 아들이었다. 다윗은 이새의 8번째 아들이었다(나중에 어떤 형이 죽어서 7번째 아들로 기록이 된다). 그렇다. 이들 중에 메시야의 조상으로서 마태복음의 기자는 아브라함과 다윗을 언급한다. 하지만 아브라함이나 다윗은 장자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는 이들은 영적인 장자가 되었고, 성경에 기록된 위대한 인물들 중에 자기의 이름을 올렸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우리가 비록 장자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고 해서 장자의 축복을 받지 못한다는 법칙은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진정 그가 하늘의 복을 사모하고 찾고 구하면 그러한 복을 허락하시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태어나면서 어떤 복을 가지고 태어나기도 하지만 자기가 그 복을 가지고 태어나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면 하나님께서 열어주시기 때문이다(마7:7~8).

 

3. 예수께서는 마태복음 20장의 포도원 품꾼으로 비유를 통해 무엇을 말씀해주셨는가?

  예수께서는 장자로 태어났다고 해서 그가 응당 장자의 축복을 받는 것은 아니며, 반대로 차자로 태어났다고 해서 장자의 축복을 받지 못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대표적인 이야기가 바로 마태복음 20장에 나오는 '포도원 품꾼'의 비유이다(마20;1~16). 어느날어떤 주인이 자기 포도원에서 일할 사람을 구하러 장터로 갔다. 그리고 이른 아침에 품꾼을 고용했다. 약속은 오전 6시부터 오후 6시까지 12시간 일하는 조건으로 하루우 품삯으로 한 데나리온을 주는 것이었다. 그런데 오전 9시에 나가보니 아직도 고용되지 못해 서성이고 있는 사람을 발견하고는 그에게 그에게 합당한 품삯을 주겠다고 하면서 포도원에 들여보냈다. 그리고 정오에도 그리고 오후3시에도 그렇게 하였다. 그런데 오후5시에 나가보니 여전히 일감을 구하지 못해 종일도록 그 자리에서 서성이라고 있는 이들을 발견하였다. 그래서 물어보았다. 왜 아직도 여기에 있느냐고 말이다. 그러자 그들이 대답했다. "우리를 품꾼으로 고용하는 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포도원 주인은 "너희들도 역시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하고서는 포도원에 들여보냈다. 그리고 오후6시가 되자, 주인은 자기집의 청지기 종에게 품꾼들을 불러서 나중 온 자부터 품삯을 주라고 하였다. 그런데 오후5시에 들어온 자에게 한 데나리온을 주는 것이 아닌가? 그러자 먼저 들어온 자들이 내심 기대를 하였다. 자기들은 더 받을 줄 알았는데 한 데나리온만 주는 것이 아닌가? 그러자 그들은 포도원 주인에게 이렇게 원망하였다.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아니하였는데 그들을 종일 수고하며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그러자 주인은 그들에게 대답한다. "친구여, 내가 너에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않았느냐? 그러니 네 것으로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기 때문에 네가 나를 악하다고 볼 수는 없지 않으냐?"(마20:13~15)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비유를 마치시면서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마20:16)"

  그런데 이 비유 바로 앞에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와 똑같은 말씀을 하셨다. 제자들이 말했다.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라가고 있사온데, 우리가 장차 무엇을 얻을 수 있습니까?" 그러자 예수께서는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마19:28~29). 그리고는 한 마디 더 말씀하셨다. 

마19:30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이 말씀을 헬라어에서 직역하면, "그런데 첫째(먼저)인 이들이 마지막(나중)의 이들로 장차 많이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나중)의 이들이 첫째(먼저)의 이들로 많이 있을 것이다." 놀랍지 아니한가? 나중에 믿었다고 해서 항상 꼴지가 되라는 법은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먼저된 이들이 장차 꼴찌가 될 수 있는데, 그것도 많이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 사람에게 운명지워진 것은 없다. 그것을 그렇게 받아들이는 자에게 그렇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장자로 태어났든지 차자로 태어났든지 상관없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된다면, 하나님께서는 그가 나중된 자였을지라도 먼저 되게 해주신다는 것이다. 이것을 가리켜 '파라독스' 즉 '역설'이라고 말한다. 성경에서는 이렇게 결론이 뒤집어지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4. 성경에서는 먼저 된 자가 나중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 사례를 어떻게 말씀하고 있는가?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먼저 된 자가 나중되고 나중된 자가 먼저 된 사례가 개인에게도 있고 민족에게도 있다. 먼저, 첫째로, 개인의 경우를 보자. 그러한 경우에는 이스마엘과 이삭의 경우이다. 그리고 에서와 야곱의 경우이다. 르우벤과 요셉의 경우이다. 그리고 둘째로, 민족의 경우를 보자. 그것은 이스라엘 민족과 이방인 교회의 경우가 그렇다. 하나님께서는 축복된 민족으로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셨다. 하지만 이 민족은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과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책임과 사명을 거부했고 그것을 경홀히 여겼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장자의 축복을 빼앗아 그 나라의 열맺맺는 믿는 모든 이로 확대하셨다. 그러므로 신약시대에 들어와서 하늘의 장자는 육적인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라 영적인 이스라엘 백성 곧 이방인 교회가 된 것이다.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라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축복을 받게 된 것이다.

 

5. 나오며

  그렇다. 자신이 먼저 믿었거나 혹은 먼저 선택을 받았다고 해서 그것이 자랑할 것이 못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먼저 믿거나 선택을 받았어도 그 책임과 사명을 감당하지 못했을 때에는 장자로서 받을 축복을 잃어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그것을 빼앗아 그 나라의 열매맺는 백성에게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가 지금 갖고 있는 운명에 대해서 우리는 절망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도 지금 하나님께서 쓰임받기를 갈망한다면, 그리고 그것을 위해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준비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얼마든지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셔서 그 시간이 아무리 오후5시라 할지라도 우리를 불러서 귀한 주님의 도구로 쓰실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이요 우리 주님의 마음이시다. 

 

2024년 10월 23일(수)

정보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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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탄명성교회 2024.10.24 14:05

    1. 들어가며

      성경에 보면 장자가 실패하고 차자가 성공하는 경우가 상당수 나온다. 대표적인 경우가 에서와 야곱의 경우다. 사실 에서는 이삭의 장자로 태어났다. 그런데 그는 자신이 마땅히 받아야 할 장자권(장자로서의 권리)도 빼앗기 장자의 축복까지도 빼앗기 말았다. 그것동생 야곱이 차지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에서는 자신아버지였던 이삭의 배다른 자식도 아니었고, 첩의 자식도 아니었다. 이삭이 낳은 쌍둥이 가운데 맏이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만 장자로서 갖는 모든 축복을 잃어버린다. 그럼 우리는 이런 경우를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그것에 대해 히브리서 기자가 답을 주었다. 그것은 에서가 장자의 축복을 경홀히 여겨서 그랬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중에 그 축복을 받으려고 눈물로 아버지에게 간구했지만 이미 축복은 그에게서 떠나버렸고 회개할 기회마저 얻지 못했다고 알려 준다(히12:16~17). 그러므로 장자라고 해서 응당 장자의 축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차자로 태어났던 야곱은 장자의 축복을 받게 되었는가? 그래서 이번 시간에는 장자로 태어났지만 장자의 축복을 받지 못하는 사람은 왜 그러한 것이며, 차자로 태어났어도 장자의 축복을 받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사람이 장자로 태어나는 것과 차자로 태어나는 것은 운명적인 것인가?

      사람 이 세상에 태어날 때 누구는 장자로 태어나기도 하 누구는 차자로 태어나기도 한다. 그럼, 만약 자신이 차자로 태어났다고 하면 나는 차자이니 장자의 축복을 받을 수는 없겠구나 하고 포기하고 살아야 하는가? 아니면 반대로, 나는 장자로 태어났으니 응당 장자의 복을 누리고 살거야라고 하면서 안도하면 되는 것인가? 성경에 나오는 위대한 인물들의 경우를 보면, 장자로 태어나지 않았으나 위대한 인물들이 된 사람들이 나온다. 예를 들어, 아브라함은 데라의 셋째 아들이었다. 이삭은 아브라함의 둘째 아들이었다. 야곱은 이삭의 둘째 아들이었다. 요셉은 야곱의 11째 아들이었다. 다윗은 이새의 8번째 아들이었다(나중에 어떤 형이 죽어서 7번째 아들로 기록이 된다). 그렇다. 이들 중에 메시야의 조상으로서 마태복음의 기자는 아브라함과 다윗을 언급한다. 하지만 아브라함이나 다윗은 장자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이들은 영적인 장자가 되었고, 성경에 기록된 위대한 인물들 중에 자기의 이름을 올렸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우리가 비록 장자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고 해서 장자의 축복을 받지 못한다는 법칙은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진정 그가 하늘의 복을 사모하고 찾고 구하면 그러한 복을 허락하시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태어나면서 어떤 복을 가지고 태어나기도 하지만 자기가 그 복을 가지고 태어나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면 하나님께서 열어 주시기 때문이다(마7:7~8).

     

    3. 예수께서는 마태복음 20장의 포도원 품꾼비유를 통해 무엇을 말씀해 주셨는가?

      예수께서는 장자로 태어났다고 해서 그가 응당 장자의 축복을 받는 것은 아니며, 반대로 차자로 태어났다고 해서 장자의 축복을 받지 못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대표적인 이야기가 바로 마태복음 20장에 나오는 '포도원 품꾼'의 비유이다(마20:1~16). 어느 날 어떤 주인이 자기 포도원에서 일할 사람을 구하러 장터로 갔다. 그리고 이른 아침에 품꾼을 고용했다. 약속은 오전 6시부터 오후 6시까지 12시간 일하는 조건으로 하루 품삯으로 한 데나리온을 주는 것이었다. 그런데 오전 9시에 나가 보니 아직도 고용되지 못해 서성이고 있는 사람을 발견하고는 그에게 합당한 품삯을 주겠다고 하면서 포도원에 들여보냈다. 그리고 정오에도 그리고 오후 3시에도 그렇게 하였다. 그런데 오후 5시에 나가 보니 여전히 일감을 구하지 못해 종일록 그 자리에서 서성이고 있는 이들을 발견하였다. 그래서 물어보았다. 왜 아직도 여기에 있느냐고 말이다. 그러자 그들이 대답했다. "우리를 품꾼으로 고용하는 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포도원 주인은 "너희들도 역시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고서는 포도원에 들여보냈다. 그리고 오후 6시가 되자, 주인은 자기 집의 청지기 종에게 품꾼들을 불러서 나중 온 자부터 품삯을 주라고 하였다. 그런데 오후 5시에 들어온 자에게 한 데나리온을 주는 것이 아닌가? 그러자 먼저 들어온 자들이 내심 기대를 하였다. 그런데 자기들 더 받을 줄 알았는데 한 데나리온만 주는 것이 아닌가? 그들은 포도원 주인에게 이렇게 원망하였다.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아니하였는데 그들을 종일 수고하며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그러자 주인은 그들에게 대답한다. "친구여, 내가 너에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않았느냐? 그러니 네 것으로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기 때문에 네가 나를 악하다고 볼 수는 없지 않냐?"(마20:13~15)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비유를 마치시면서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마20:16)"

      그런데 이 비유 바로 앞에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와 똑같은 말씀을 하셨다. 제자들이 말했다.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라가고 있사온데, 우리가 장차 무엇을 얻을 수 있습니까?" 그러자 예수께서는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마19:28~29). 그고는 한 마디 더 말씀하셨다. 

    마19:30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이 말씀을 헬라어에서 직역하면, "그런데 첫째(먼저)인 이들이 마지막(나중)의 이들로 장차 많이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나중)의 이들이 첫째(먼저)의 이들로 많이 있을 것이다." 놀랍지 아니한가? 나중에 믿었다고 해서 항상 꼴지가 되라는 법은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먼저된 이들이 장차 꼴찌가 될 수 있는데, 그것도 많이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 사람에게 운명지워진 것은 없다. 그것을 그렇게 받아들이는 자에게 그렇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장자로 태어났든지 차자로 태어났든지 상관없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된다면, 하나님께서는 그가 나중 된 자였을지라도 먼저되해 주신다는 것이다. 이것을 가리켜 '파라독스' 즉 '역설'이라고 말한다. 성경에서는 이렇게 결론이 뒤집어지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4. 성경에서는 먼저 된 자가 나중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 사례를 어떻게 말씀하고 있는가?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먼저 된 자가 나중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 사례가 개인에게도 있고 민족에게도 있다. 먼저, 첫째 개인의 경우를 보자. 그러한 경우에는 이스마엘과 이삭의 경우이다. 그리고 에서와 야곱의 경우이다. 르우벤과 요셉의 경우이다. 그리고 둘째민족의 경우를 보자. 그것은 이스라엘 민족과 이방인 교회의 경우가 그렇다. 하나님께서는 축복된 민족으로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셨다. 하지만 이 민족은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과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책임과 사명을 거부했고 그것을 경홀히 여겼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장자의 축복을 빼앗아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믿는 모든 이로 확대하셨다. 그러므로 신약시대에 들어와서 하늘의 장자는 육적인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라 영적인 이스라엘 백성 곧 이방인 교회가 된 것이다.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라 이면적 유대인 유대인이 축복을 받게 된 것이다.

     

    5. 나오며

      그렇다. 자신이 먼저 믿었거나 혹은 먼저 선택을 받았다고 해서 그것이 자랑할 것이 못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먼저 믿거나 선택을 받았어도 그 책임과 사명을 감당하지 못했을 때에는 장자로서 받을 축복을 잃어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그것을 빼앗아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에게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가 지금 갖고 있는 운명에 대해서 우리는 절망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도 지금 하나님쓰임받기를 갈망한다면, 그리고 그것을 위해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준비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얼마든지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셔서 그 시간이 아무리 오후 5시라 할지라도 우리를 불러서 귀한 주님의 도구로 쓰실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이요 우리 주님의 마음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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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보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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