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요한계시록강해보완(48)] 사데 교회의 예를 통해서 배우는 이기는 자가 되는 법(계3:1~6)_2023-12-11(월)
https://youtu.be/4UIBLbGGGc8
1. 들어가며
사데 교회는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소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들 가운데 다섯 번째로 소개되고 있는 교회다. 그런데 이 교회는 예수님께 칭찬을 듣는 것이 하나가 없는 교회다. 오직 책망만 있는 교회다. 그러한 측면에서 보면 일곱 번째 교회인 라오디게아 교회와 비슷하다. 주님께서는 이 교회는 죽어 있는 교회라고 하셨다. 이 교회에는 온전한 것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 교회에서 사역하고 있는 주의 종이 죽어 있는 교회요, 성도들도 역시 죽어 있는 교회였기 때문이다. 대체 이 교회는 왜 이 지경이 되었을까? 그리고 이러한 교회가 되었다고 할지라도 이러한 상태에서 벗어나 천국에 들어가려면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가?
2. 사데 도시와 사데교회의 특징은 무엇인가?
사데 즉 현재 사르디스는 난공불락의 요새와 같은 곳에 위치한 도시다. 그래서인지 그 도시는 유사 이래 딱 두 번의 침입을 받았다고 한다. 한 번은 페르시아 제국의 고레스 왕 때였고 또 한 번은 헬라 제국의 알렉산더 대왕 때였다. 그리고 이 도시 옆으로 강이 흘러가고 있었는데 그 강에서는 사금을 채취할 수 있었고, 양털을 가공하여 산업을 육성했기에 부유한 도시였다고 한다. 지금도 터키에 성지순례를 가 보면 18m짜리 거대한 기둥 2개를 만나게 된다. 왜냐하면 B.C.330년 당시 알렉산더가 이 도시의 수호신인 풍요의 여신 시벨레를 없애고 그 자리에 같은 종류의 여신 아데미 신전을 세웠는데, 그것이 파괴되어 기둥 총78개 가운데 2개만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교회는 정말 평탄한 교회가 아니었는가 싶다. 왜냐하면 이 도시는 거의 전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유대인들이나 로마 황제에 의한 핍박도 없었다. 그리고 에베소교회와 버가모교회가 겪어야 했던 이단적인 가르침인 니골라당의 가르침이나 발람의 가르침도 없었고, 두아디라 교회에 침투한 이세벨의 가르침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데라는 지역이 특성상 돈이 많았고, 음란한 도시였기에 교회도 역시 돈과 쾌락에 물들어 점점 세속화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 교회의 문제는 교회의 지도자나 성도들이 자기들이 세속화되어가고 있는지를 도무지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주의 종이 죽어 있는 교회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령께서 그 시에 말씀하시는 음성도 모르고 있는 교회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 교회를 소개하고 있는 예수께서 자신이 누군지를 말씀하셨을 때에 그 음성으로 알 수 있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이 교회는 예수께서 오른손에 일곱 별들을 쥐고 계시고, 일곱 영들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교회는 말은 살아 있다고는 하나 죽어 있는 교회였다. 왜냐하면 온전한 것을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세속화된 교회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이 교회의 주의 종이나 이 교회의 성도들 중에는 천국에 들어갈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왜냐하면 자기들 생각으로는 흰옷을 입고 있다고 생각했으나 사실은 더러운 옷을 입고 있었고, 생명책에 자기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실제로는 천국에 있는 생명책에서 그들의 이름이 지워지고 있던 상태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대로 계속 있으면 사데교회의 주의 종이나 성도들은 똑같이 새 예루살렘 성 안에 입성하지 못한 채, 성밖이나 불못에 던져질 것이 뻔했다.
3. 주님께서 이 교회에 대해서 어떤 처방전을 내리셨는가?
그러자 주님께서는 이들이 살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셨다. 그것은 3가지였다. 첫째 그들이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를 기억해 보라고 하셨다. 그리고 둘째, 그때 받았던 것과 그때 들었던 것을 지켜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지금 단호하게 회개해야 한다고 하셨다. 고로 이 교회의 지도자들이나 성도들은 처음에 이미 사도들에게 들었던 말씀을 잊어버린 상태에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이 죽어가고 있는지도 모르고 있었고, 그들이 온전한 상태에 있지 않다는 것도 역시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이 처음에 사도들로부터 들었던 말씀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예수님의 오리지널 말씀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불순물이 하나도 섞이지 않은 순수한 말씀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것이었고 충성하라는 것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과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세워진 사도들이 바로 그러한 말씀을 증거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본질적인 신앙으로 회복하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이들은 자신들이 지금 어떠한 상태에 놓여 있는지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 아마도 그들은 그 도시에서 핍박도 받지 않았고 이단에 노출되지 않았기 때문에 세속화의 길을 걷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그 도시가 다산의 여신을 숭배하고 있었고 돈도 많이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데에 위치해 있는 교회도 음란에 물들고 있었고 맘몬 신에 물들고 있었을 것이다. 세상이 주는 쾌락과 유흥과 향락마저 주님이 주시는 복이라고 알고 향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4. 소수의 이기는 자들에게 주께서 주시겠다고 하는 상이 말하는 경고는 대체 무엇인가?
그런데 이 사데 교회 안에는 소수이지만 또 한 부류의 성도들이 있었다. 사데 교회 안에 또 다른 작은 교회가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과 사도들의 가르침을 그대로 순종하고 있는 자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 교회가 원래 받았던 예수님과 사도들의 가르침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날마다 회개하면서 자신의 겉옷을 빨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흰 겉옷을 입고 있었다(계3:4). 그러자 주님께서는 이 교회에 출석하고 있지만, 참된 신앙의 길을 걷고 있는 소수의 사람들을 격려해 주셨다. 그리고 이들이 장차 죽으면 그들은 흰옷을 입고 주님과 함께 천국에서 걸어다닐 것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끝까지 이기는 자들이 되라고 격려하셨다. 그리고 이기는 자들이 받을 복에 대해 말씀해 주셨다. 그런데 이기는 자들에 대한 주님의 축복이 의미심장하기만 하다. 왜냐하면 이것을 거꾸로 적용한다면, 지금 사데교회 안에 있는 대부분의 성도들은 지고 있었다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끝까지 이기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3가지 복이란 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첫째로, 죽은 후에 흰옷을 입게 될 것이라고 했다(계3:5a). 둘째로, 그들의 이름이 생명책에서 결코 지워지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다(계3:5b). 셋째로, 그들의 이름이 심판대 앞에서 의로운 자로 인정받게 될 것이라고 했다(계3:5c). 그런데 처음에 받았던 대로 지키지도 않고 회개하지도 않으면 어떻게 되는가? 그것은 첫째로, 그들의 옷은 더럽혀진 채 있을 것이다. 둘째, 죽는 날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는 그들의 이름이 지워지고 말 것이다. 셋째, 심판대 앞에서 그들의 의로움이 인정받지 못할 것이다.
5. 사데교회는 지금 한국 교회의 현실과 어떤 연관성이 있는가?
그렇다면 지금 한국 교회의 현실은 어떠한가? 아마도 주님께서 지금 우리 가운데 나타나신다면 우리에게도 동일한 책망을 하지 않을까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지금 잘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잘 하고 있지 않다. 왜냐하면 우리 교회가 지금 선포하고 있고 알고 있는 사실들은 종교개혁의 전통 가운데 서 있는 교리들이다. 하지만 이러한 교리들 중에 약점들이 있다. 그러므로 이것만을 추구해서는 아니 된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말씀했는지를 중심으로 파악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도들이 어떻게 말씀했는지도 살펴보아야 한다. 그리고 이에 반한 것들은 과감히 제거하는 수술을 단행해야 한다. 예를 들어,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 아닌데 영원한 구원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종교 개혁자 루터의 외침처럼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치는 것이다. 그러나 루터는 처음에는 믿음과 지속적인 회개가 있어야 구원받는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에게도 약점이 있었다. 그것은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야고보의 각르침을을 거부한 것이다. 왜냐하면 루터는 중세시대의 공로 사상이 너무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믿음을 강조하다 보니 놓친 부분이 있었던 것이다. 그는 믿음에 따른 행위가 뒤따라와야 제대로 된 믿음이라는 것을 말할 수 없었던 것이다.
또한 그의 뒤를 이은 칼빈은 어거스틴이 주장했던 절대적인 작정에 의한 구원관을 들고 나온다.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예정에 따라 되어진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의 예정론은 절대 구원과 절대 멸망을 함께 말하는 '이중예정론'이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어느 교회에서도 절대적인 멸망이 예정되어 있다는 것을 알려 주는 목회자는 없다. 절대 구원만을 외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절대 구원의 측면만을 강조하다 보면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은 강조될 것이다. 하지만 절대 멸망을 선포하면, 하나님의 잔인함과 난폭성도 함께 부각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면 이중예정론이 어딘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은 이러한 폭군이 절대 아니시라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공의로운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중예정론은 처음부터 잘못된 것이다. 단지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구원에 관한 모든 준비를 완성해 놓으시고 우리를 구원 안으로 초청하고 계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시대에 우리에게 잘못 가르쳐지고 있는 가르침과 교리들을 점검해 보아야 한다. 그래서 무엇이 처음으로부터 멀어져 있는지 그리고 무엇이 처음과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를 파악해야 한다. 그리고 처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예수님과 사도들의 가르침을 따라가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죽었을 때에, 하늘의 생명책에서 자신의 이름이 지워지지 않게 해야 한다. 그래서 그날 성밖이나 불못에 떨어진 채 슬피 우는 일이 없어야 한다.
2023년 12월 11일(월)
정보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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