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곱은 자식들에게 유언을 남긴 것인가 아니면 그들에게 예언을 선포한 것인가? 임종을 앞둔 야곱의 영성은 사실 최고조에 달해 있었다. 왜냐하면 그가 남긴 유언은 100% 그대로 성취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가 12아들들에게 남긴 유언은 아주 놀라운 영적인 비밀들을 알려준다. 그것은 한 마디로 '복'에 관한 것이다. 거기에는 5가지 원리가 들어있다. 오늘 내가 복을 받고 있는 이유가 있다면 여기에 들어있으며, 앞으로 어떻게 해야 복을 받을 수 있는지도 여기에 들어았다. 그 반대도 여기에 그 이유가 있다.
1. 들어가며
향년이 가까워진 야곱은 먼저 요셉과 요셉의 두 아들들인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축복하였다. 곧이어 야곱은 자신의 12아들들을 불러 모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힘을 다해 그들을 축복한다. 우리는 창세기 49장의 기록을 통해 야곱이 정확히 12아들들을 축복했다는 사실을 보게 된다. 왜냐하면 그가 했던 유언이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언은 자기의 어떤 것을 유산으로 물려준다는 말은 없으며, 다만 그들의 미래를 예언처럼 말하고 있을 뿐이다. 아니 야곱은 자기들의 아들들에게 "너희가 후일에 당할(겪을) 일을 내가 너희에게 이르리라"고 말한 것이다(창49:1). 그렇다면 야곱은 12아들들에게 무엇을 유언했을까? 그리고 그가 12아들들에게 유언한 내용들은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는가?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야곱이 12아들들을 축복했던 내용을 분석하여, 야곱의 축복의 특징들을 살펴볼 것이다. 그것은 5가지 정도로 압축할 수 있다. 이것들 중에서 3가지는 오늘 새벽기도회 시간에 전했기에 거기에다가 2가지 것을 더 추가로 말씀드리고자 한다. 아무쪼록 이 예언의 말씀을 통하여 야곱의 12아들들의 미래가 곧 우리의 미래가 될 수 있음을 알고 참된 축복의 주인공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2. 야곱의 유언(예언적 선포)의 5가지 특징은 무엇인가?
우리는 이전 시간에 야곱의 유언 5가지 중에서 3가지를 살펴보았다. 오늘은 그 세 가지 것에다가 2가지 것을 더 살펴보고자 한다. 혹시 앞의 3가지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분들을 위해 앞의 것 3가지도 여기에 간단히 정리해 본다.
1)태어날 때부터 복을 가지고 태어난 자도 있다는 것이다.
야곱의 유언의 첫 번째 특징은 태어날 때부터 사명을 가지고 태어난 자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이런 경우는 아주 특별한 경우에만 해당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종류의 대표는 바로 야곱의 11번째 아들인 '요셉'이다. 그는 이 땅에 태어나기 전에 하늘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사명이 주어진 후에 이 땅에 보내어진 사람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만약 그가 충성되이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완수한다면 그는 축복된 미래가 예비되어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정말로 요셉은 그 길을 묵묵히 잘 걸어갔다.
2)대부분은 이 땅에 와서 자신의 행함을 통해 복이 결정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 이 땅에 온 후에 자신의 행한 행동을 따라서 복이 결정된다. 요셉을 제외한 나머지 11명의 형제들이 다 이러한 경우에 해당한다. 그런데 이 땅에 와서 자신이 행한 대로 복을 받게 된 자들은 크게 3가지 유형이 있다. 그것은 자신이 받을 복이 '상승'과 '축소'와 '탈락'이라는 방면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신앙생활을 잘 마치게 되면 자기에게 어떤 복이 예비되어 있는지를 알기를 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어떤 사람에게 있어서 그가 받을 복이 이미 결정되어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다 이 땅에서 사는 방식과 태도에 따라 그것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복이 자신의 행함에 따라 올라가는 자가 있는가 하면, 내려가는 자도 있고, 아예 이러한 복에서 탈락하는 자도 있다. 예를 들어, 유다는 '상승'하는 복을 받은 사람이다. 왜냐하면 그는 장자가 아니었다. 그는 넷째 아들이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해야 할 일 아니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했다. 그러자 그의 위치는 제일 앞으로 나아갔다. 지금 천국에서 유다는 24장로의 자리에 앉아있는 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이 받을 상급이 '축소'된 자도 있다. 그는 바로 '르우벤'이다. 그는 장자로서 3가지 복을 타고 태어났다. 르우벤은 왕직과 제사장직과 기업을 두 배로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왕직은 유다에게, 제사장직은 레위에게, 두 배의 기업은 요셉에게 넘겨주고 말았다. 왜 그랬는가? 왜냐하면 그가 하나님과 아버지에게 큰 죄를 범죄했기 때문이다. 서모 빌하와 통간을 한 것이다. 음행을 저지른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장자가 받을 3가지 복을 다 빼앗기고 말았다. 그는 그의 천국에서의 위치는 한참 뒤로 밀려나고 말았다. 그리고 자신이 받을 복에서 '탈락'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 예는 '단'같은 경우다. 단은 이스라엘 백성을 심판하는 지위까지 올라갈 수 있었다(창49:16). 그런데 그는 뱀과 독사가 되어 말굽을 물어서 그 탄자를 뒤로 떨어지게 하였다. 신약시대로 친다면 가룟 유다와 같은 자다. 그는 귀신들과 사탄에게 사로잡혀 그들에게 쓰임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천국에 있는 이긴 자의 명단에서 그의 이름이 빠지고 말았다(계7:5~8).
3)과거에 사명이 있는 채로 태어났든지 그렇지 않든지 상관없이 자신의 현재의 삶이 장차 도래할 미래의 자신의 위치와 신분과 상급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요셉처럼 사명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이든지 아니면 그렇지 않든지 상관없이 현재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현재의 삶이 미래에 받을 복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즉 지금 충성하는 자가 장차 천국에서 위치와 신분과 상급에 있어서 복을 받기 때문이다. 자기가 이 세상에 태어날 때에 자신은 사명 없이 태어났으니 자신은 받을 복이 없다고 생각해서는 아니 된다. 그것은 게으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사랑믈 보내실 때에 사명이 없었던 자라도 이 땅에 살면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깨닫고 충성하는 자를 눈여겨보고 계시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맡겨진 일이 없지만 하나님께서 요셉이나 신약의 사도 바울의 경우처럼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아 일하는 자와 함께 충성되이 일할 때 그도 역시 그가 충성한 만큼 상을 주시기 때문이다(마10:41~42). 하나님은 오늘도 복음을 듣고 주와 복음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자를 눈여겨보시며, 하늘에서 상을 주신다는 것을 기억하자.
4)영적인 세계에도 빈익빈 부익부의 법칙이 엄연히 존재한다는 것이다.
영적인 세계에서도 빈익빈 부익부가 존재한다는 것은 야곱의 축복 속에서도 고스란히 발견된다. 왜냐하면 야곱의 12아들들의 축복의 내용과 그 분량을 보면 거기에 나와 있기 때문이다. 야곱의 12아들들 중에서 유다와 요셉을 제외하면 그들을 향한 축복은 두 개의 절의 분량을 넘어가는 아들이 하나도 없다. 그중에 그 복의 분량이 한 줄 뿐인 아들도 있다. 그들은 스불론, 갓, 아셀, 납달리, 베냐민이다. 그리고 그 복의 분량이 두 줄인 아들 뿐인 이들도 있다. 그들로는 르우벤, 시므온, 레위, 잇사갈, 단이 있다. 그런데 두 줄 분량의 복을 받았더라도, 한 줄은 거의가 책망과 저주의 말 뿐이다. 그러므로 이들에게 축복을 발견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유다와 요셉은 이와는 전혀 다르다. 전부 다 축복의 말씀으로만 이루어져 있는데, 그것도 무려 다섯 절에 걸쳐서 풍성하게 복이 주어지고 있다. 빈익빈 부익부의 법칙이 그대로 통용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영적인 세계에서 빈익빈 부익부가 존재한다는 말씀이 이처럼 구약성경에도 나와 있지만 그것을 알아차리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신약에 들어와서 예수님께서도 그것을 언급하심으로 우리 모두에게 이러한 영적인 비밀이 알려지게 되었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마25:29)" 그렇다. 우리는 예수님의 달란트 비유를 통하여 착하고 충성된 자가 주인으로부터 어떤 상을 받게 되는지를 보게 된다.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열심히 일하여 다섯 달란트를 더 남겼고, 두 달란트를 받은 자는 열심히 일하여 두 달란트를 더 남겼다. 그런데 한 달란트 받았던 자는 악하고 게을러서 그것을 땅을 파고 그곳에 감추었다가 주인이 오자 그것을 내놓았다. 그러자 주인은 그들을 어떻게 결산하였는가? 한 달란트 가진 자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다섯 달란트 더 남긴 자에게 주셨다(마25:28). 그렇다. 빈익빈 부익부가 된 것이다. 이 땅에서 충성된 자는 하늘나라에 갔을 때에 더 큰 상을 받을 수 있겠지만 이 땅에서 충성하지 않고 게을렀던 자는 하늘에 갔을 때에 가지고 있던 상도 빼앗길 수 있다.
5)책망과 저주마저도 축복의 한 영역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야곱이 유언 가운데 참으로 놀라운 사실이 하나 있다. 그것은 야곱의 유언은 분명 축복이어야 하는데, 야곱은 자식에게 축복만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야곱의 12아들들 가운데 축복만이 주어진 아들은 유다와 요셉이다. 갓과 납달리는 조금 있을 정도다. 르우벤은 책망이 주어졌고, 시므온과 레위는 저주가 선언되었다. 그리고 잇사갈이나 단에게는 그들의 미래가 고통이나 불행이 될 것이라고 선포되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이 하나 있다. 그것은 저주 위에 저주가 선포된 시므온과 레위이지만 훗날 그들의 인생이 완전히 바뀐 일이 발생하였기 때문이다. 분명히 야곱은 시므온과 레위를 저주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의 동생 디나가 세겜 땅의 세겜 추장에 의해 겁탈을 당하자 그 속에서 복수심이 불타올라서 악한 일을 행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분노와 혈기가 강한 자들이었다(창49:6). 그리하여 그들은 비열한 방법을 써서 세겜 족속을 몰살시켰으며, 심지어 여자들과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최소한 그들의 소 떼와 양 떼는 남겨놓아야 했음에도 오히려 소의 발목의 힘줄까지 끊어버리는 잔인함을 보여주었다. 그러므로 야곱은 그들이 가진 혹독하고 맹렬한 분노와 혈기로 인하여 야곱 중에서 그들을 나눌 것이라고 하였고 이스라엘 중에서 그들을 흩어버릴 것이라고 하였다(창49:7). 그런데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 아는가? 그중에서 시므온은 야곱의 유언대로 흩어지고 없어지고 말았다. 그들의 지파가 나중에 여호수아에 의해 땅을 분배받을 때에 시므온 지파는 독립적인 땅이 주어지지 않았다. 시므온 지파는 유다 지파의 땅에 흩어져서 살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시므온 지파는 유야무야 되어 나중에 흩어져서 정말 없어지고 말았다. 그런데 레위는 달랐다. 레위도 야곱의 유언대로 12지파들의 땅으로 흩어져야 했다. 레위 지파는 각 지파별로 흩어졌으니 총48개 성읍에 흩어져서 살았다. 하지만 레위 지파는 모세 때에 그들이 가진 약점을 장점으로 승화시켜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일이 있었다. 그것은 모세가 율법을 돌판을 받으러 시내산에 올라갔을 때에 일어났다. 그때 산 아래에서는 시내 광야에서 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광란의 파티를 즐기고 있었다. 하나님의 분노는 그들을 한꺼번에 불에 태워 죽일 만큼 컸다. 그런데 그때에 모세가 하나님의 분노를 대신 내었다. 그리고 여호와 편에 있는 자는 누구든지 모세에게로 와서 광란의 춤을 추는 자들을 죽이라고 했다. 그러자 레위 자손이 일어나 모세의 편에 가담하여, 우상숭배에 빠져있는 자들을 칼로 쳐 죽였으니 무려 3,000명이나 죽어야 했다. 그런데 그중에 가기의 가족 곧 형제 자매도 들어 있었다. 그러나 그 일을 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레위 지파가 영원한 제사장의 축복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다. 그래서 장자가 누릴 축복의 하나였던 제사장직을 레위 지파가 받아서 누리게 되었으니, 북이스라엘 10개 지파가 망하고 없어졌어도 남유다에서 레위 지파는 계속해서 살아남았다. 즉 남유다에서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 외에도 제사장 지파로서 레위 지파가 살아남은 것이다. 레위 지파는 한 마디로 저주를 축복으로 바꾼 지파가 되었다. 자신의 단점을 승화시켜 장점으로 바꾸었으니, 이는 자신이 가진 혈기와 분노를 악한 자 사탄 마귀와 귀신들에게 쏟아붓는 일을 한 것이다. 그렇다. 책망과 저주도 크게 볼 때에는 축복의 도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3. 나오며
어떤 사람은 말한다. 모든 사람에게는 어떤 '운명'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사주팔자대로 살아가고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러한 말은 성경에 반대되는 말이다. 왜냐하면 비록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어떤 사명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하더라도 요셉처럼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많지 않기 때문이요. 또한 사명 없이 이 땅에 태어났다고 할지라도 이곳에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충성하는 사람과 함께 충성하게 되면 하늘에서 놀라운 상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이 땅에서 충성된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하늘에서 면류관과 천국집과 보좌자리를 예비해 놓고 계신다. 고로 우리의 인생은 우리가 개척하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어떤 사람에게는 특별한 안배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자는 거의 없다. 대부분은 이 땅에 태어나서 복음을 듣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결정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오늘 이 말씀을 듣고 있는 자도 바로 이러한 자들에 해당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우리의 미래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지금 내가 어떻게 하느나에 따라서 미래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악하고 게으르게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착하고 충성되게 살아갈 것인가는 우리가 결정하는 것이다. 그렇다. 오늘도 나 자신은 부모로부터 받은 것이 없고 저주만 물려받았다고 원망하고 불평하면서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저주를 없애는 것이야말로 자신에게 주어진 과업으로 생각하며 살 것인가는 자신이 결정하는 것이다. 나도 아브라함처럼 저주를 끝내고 내 후손에게 있어서 만큼은 손대는 모든 일에 복을 받게 할 것인가는 자신이 결정하는 일이다. 이 모든 것이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는 것이다. 자신이 요셉처럼 태어났다고 해서 만사가 형통한 것이라고 착각하지 말라. 창세기에서 요셉 이야기는 우리에게 무엇을 들려주는가? 사명자라도 정말 하나님께 올바르게 쓰임받기까지는 환난과 역경을 통과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지 아니한가? 고난 없는 영광이 어디 있겠으며, 희생 없는 상급이 어디에 존재하겠는가? 하지만 이 모든 일들은 정말 우리가 도전할 가치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하늘에서 우리가 받아 누릴 영광은 정말 세세무궁토록 우리가 누릴 영광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건투를 빈다.
2021년 07월 30일(금)
정병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