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삭은 그가 젊었을 때에 하나님께 자신을 번제물로 바친 자다. 그런데 그에게도 어려움이 찾아왔다. 왜 그랬을까? 하나님께 자신을 온전히 바쳤음에도 불구하고 왜 그에게 어려움이 찾아왔던 것인가? 그리고 이삭의 경우와 우리의 경우는 어떻게 같으며 또한 어떻게 다른가? 이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리고 중간에 생략된 영적인 원리들과 최종 승리의 과정을 알아야 한다. 그래야 흔들림없이 이 길을 계속 걸어갈 수 있고 최종 승리를 거둘 수 있기 때문이다.
1. 들어가며
성경의 모든 이야기는 그 이야기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영적 원리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기 위해 기록된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을 때에 그러한 영적인 원리들을 캐낼 수만 있다면 우리는 성경에서 엄청난 보화들을 발견할 수가 있다. 그런데 성경이 우리에게 이러한 영적인 원리들을 가르쳐 주지만 아무에게나 열려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을 구하고 바라고 찾는 자들에게 열려지기 때문이다. 특히 어떤 이야기에는 영적 원리가 중간에 한 대목씩 생략되어 있기도 하며, 다른 것과 비교해 보아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도 있다. 그러므로 성경 이야기는 참으로 흥미진진한 이야기라고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오늘 읽었던 말씀도 그러한 영적 원리들을 포함하고 있는 말씀 중의 하나다. 그것은 바쳐진 삶이 얼마나 축복된 삶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어려움이 왜 있는지를 우리에게 말해 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어려움에 부딪힐 때에 우리는 과연 그것을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가? 그리고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한 자에게 주어지는 참된 축복은 대체 무엇인가?
2. 바쳐진 자에게 주어지는 놀라운 축복은 무엇인가?
창세기의 기자는 분명 하나님께 바쳐진 자의 삶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바쳐진 자는 기본적으로 하나님께서 손대는 일마다 복을 주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바쳐진 자'란 이삭과 같은 자를 지칭하는 표현이다. 이삭은 그의 나이 약 30세(?)가 되었을 때에 모리아의 한 산에서 제물로 바쳐졌던 사람이었다(창22:1~19). 그는 그때 스스로 아버지의 손에 의해 자신의 목숨을 내어 맡겼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한다면 기꺼이 자신을 드리겠다고 하는 각오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이삭이 자신을 드리는 것(바침)을 기쁘게 받으셨다. 그리고 그의 마음만을 받으시고 그를 죽게 하지는 않으셨다. 그러므로 창세기 26장에서 이삭의 삶은 이미 예표론적으로 볼 때, 창세기 22장에서 하나님께 바쳐진 이후의 삶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좀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바쳐진 자는 복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그러한 자가 어떤 일을 하든지 그는 복을 받지 아니할 수가 없다. 왜 그런가? 그 이유는 간단하다. 하나님께 자기 자신을 드린 자의 삶은 그때부터는 그 사람 자신의 삶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신을 하나님께 바쳐 버린 이상 그 사람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삭의 잘됨과 그의 안됨은 이제 더이상 그에게 책임이 있지 않게 된다. 그는 이미 하나님께 드려졌기에 그 사람을 소유하신 하나님에게 그 책임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신에게 자기를 바친 자를 돌보지 아니할 수 없으며, 복을 주지 아니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바쳐진 자의 주인은 이제 본인이 아니라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30살 즈음에 하나님께 바쳐진 이삭의 생애는 잘 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이삭의 삶은 더이상 이삭의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삶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근을 피해 블레셋 민족의 그랄 땅으로 이동하였지만 이삭의 삶은 형통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그해에 이삭이 지은 농사에서 나타난다. 사실 이삭은 농사의 전문가가 아니었다. 그에게는 목축업이 주된 직업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랄 땅에 들어가 보았더니, 그곳의 사람들은 주로 농사를 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이삭도 그랄 땅에 머무는 동안 농지를 개간하여 그곳에 농사를 짓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그해 농사한 것을 거둬들여 보니 무려 100배의 결실을 얻게 된 것이다. 어떻게 농사 한 번 제대로 지어 보지 못했던 이삭이 농사로 풍년을 맞이할 수 있었던 것인가? 그것은 한 마디로 '여호와께서 그에게 복을 주셨기 때문'이었다(창26:12). 왜냐하면 이삭이 짓는 농사는 이삭의 농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농사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이삭이 이미 하나님께 바쳐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 이삭은 농사일에는 초보자였다. 그의 원래 직업이 목축업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해에는 농사도 풍년이었고 목축업도 잘 되었다. 그리하여 이삭은 점점 창대하게 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기에 이른다. 그러니 그 집에는 양떼와 소떼가 가득하고, 종들도 심히 많게 되었다. 이것이야말로 바로 바쳐진 자의 삶이 어떤 것인지를 고스란히 보여 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들 중에도 하나님께 자신을 바치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그런데 그러한 사람들이 전부 이삭처럼 복을 받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는 분들도 더러 있다. 왜 그런가? 그것은 이삭의 경우와 나의 경우는 다를 수 있다는 것을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이삭은 이미 자신의 아버지 대에서부터 저주가 끊어진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들은 어떠한가? 예수님만 믿으면 이미 저주가 끝났다고 믿고는 지은 죄를 회개하지도 않고 있고, 특히 조상들이 지은 죄들에 대해서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있는 것이 현실이 아닌가? 그리하여 조상들이 지은 우상 숭배의 죄값으로 인해 3~4대 후손이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어떤 사람은 앞길을 막는 저주 때문에, 하는 일마다 막히기도 하며, 물질이 들어오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이삭의 경우는 이미 그러한 저주가 끝난 상태에 있었지만, 오늘 우리의 경우에는 저주가 아직 끝나지 않은 상태에 있기도 하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아니 된다. 그런데 회개의 메카니즘을 아직 모르는 사람은 "나는 왜 남들처럼 복을 누리고 살지 못하지?"하고 계속 질문을 던지고 있을 것이다. 빨리 조상들이 지었던 죄와 자신이 짓고 있는 죄를 회개하기를 바란다. 그것도 낱낱이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바쳐진 자라도 항상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3. 바쳐진 자의 삶에도 시기 질투가 나타나는 이유는 무엇이며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하지만 하나님께 바쳐진 자의 삶에도 어려움은 있다. 왜냐하면 바쳐진 자의 축복을 보고 시기 질투하는 사람도 생기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사실 영적으로 볼 때, 블레셋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들이었으므로, 사탄의 나라를 상징한다. 그러니 블레셋 사람들은 악한 자들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얼마 후 이삭에게 와서는 아브라함이 파 놓았고 이삭이 사용하고 있던 우물들을 흙으로 메워 버렸다. 그리고 블레셋 왕 아비멜렉도 찾아와 이렇게 말했다. "네가 우리보다 크게 강성한즉 우리를 떠나가라(창26:16)." 그렇다. 바쳐진 자의 삶은 축복된 삶이요 손대는 모든 일에 복을 받는 삶이 된다. 하지만 이것을 시기 질투하는 세력에 의해 또한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유없이 이러한 고통을 받게 되었을 때 그 사람은 어떻게 대처하는 것이 좋은가?
그것은 이삭처럼 하면 되는 것이다. 이것은 다른 말로 예수님처럼 하면 된다고 정의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삭은 예수님의 예표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어떻게 악한 자들을 대항했는가? 첫째, 악을 악으로 대항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셨기 때문이다. 이삭도 마찬가지였다. 블레셋 사람들이 따라와서는 계속해서 이삭을 힘들게 했다. 그런데 그때 이삭에게는 힘이 있었다. 그의 아버지 때부터 길리운 군사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삭은 악을 악으로 대항하지 않았다. 싸움을 걸어오면 그곳을 내주고 조용히 떠나갔기 때문이다. 둘째, 온유한 마음으로 끝까지 인내하였다는 것이다. 만약 주님께서도 당신을 이유없이 비난하고 정죄하고 심지어 산헤드린공회에서는 거짓으로 모함하여 사형언도를 내렸어도 그것을 묵묵히 받아들이셨다. 이삭도 마찬가지였다. 일궈 놓은 농토와 우물을 내주고 이삭은 그랄 골짜기까지 쫓겨나야 했다. 하지만 이삭은 다시 우물을 팠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그후로도 이삭은 3번이나 옮겨가면서 우물을 팠는데 파는 곳마다 물이 나왔기 때문이다. 바쳐진 자의 삶은 어디를 가든지 형통하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탄 마귀는 직접 공격하면 자기들도 공격을 받으니까 꼭 사람을 이용하여 공격해 온다. 블레셋 사람들을 이용하여 이삭을 괴롭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삭은 그들을 무력으로 대항하지 않았다. 온유한 마음으로 그들을 대했으며, '이곳이 아니라면 다른 곳으로 가서 다시 시작하리라'는 각오를 가지고 그 자리를 양보하고 떠났던 것이다. 그것을 무려 3번이나 했다. 그랬더니 세 번째에 판 우물에 대해서는 더이상 자기들의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세 번째 판 우물이 가장 좋았다. 셋째, 원수갚는 일을 자기가 하지 않고 하나님의 손에 맡겼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에도 원수갚는 일을 하셨다면 열두 영 더 되는 천사들을 시켜 그들을 모조리 죽여 없애버릴 수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주여, 저들은 저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고 하셨다. 이삭도 마찬가지였다. 이삭도 자기 손으로 그들을 해하지 않았다. 오직 하나님의 손에 위탁하고는 그 자리를 물러나왔기 때문이다. 그것은 힘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나를 괜히 트집잡고 힘들게 하는 사람이 있으면 우리는 보통 그를 저주하는 말을 해 버리든지 그렇게 하려고 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그 저주가 그에게 임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리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를 저주하면 아니 된다. 그도 언젠가 회개하게 된다면 그도 얼마든지 천국 갈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도 이렇게 말했다.
롬12:19-21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20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21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4. 이삭이 시기 질투하는 사탄의 시험을 잘 이겨내고 얻은 결과는 무엇이었는가?
우리가 악한 사람을 대항하거나 저주하지 않는 것은 내가 힘이 없어서도 아니며, 내가 그를 저주할 줄 몰라서도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던 다윗은 자기를 원수같이 여기고 죽이려고 하는 사울왕을 죽이려고 하지도 않았으며 저주하지도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도 이 지구상에 존재했던 사람들 중에 최고로 그를 아끼고 사랑하셨던 것이다. 그렇다면, 원수들에 대하여 예수님처럼 살았던 이삭은 어떤 복을 받게 되었는가?
첫째, 원수들의 공격 이후에도 손대는 모든 일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다는 것이다. 우선 추방당해 다른 땅으로 이주해야 했지만 추방당한 그곳에서 우물을 팠는데, 팔 때마다 물이 나왔기 때문이다. 남들은 일평생에 한 번 얻을까 말까 하는 우물을 이삭은 연거푸 게속해서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둘째, 원수들의 공격에도 악을 악으로 대항치 않고 양보했더니 맨 나중에 차지하는 우물은 더 크고 더 좋은 우물을 얻을 수가 있었다는 것이다. 맨 마지막, 세 번째 팠던 우물은 이삭이 추방당하면서 차례대로 팠던 첫 번째 우물('에섹')과 두 번째 우물('싯나')보다 더 크고 훨씬 더 좋은 우물('르호봇')이었기 때문이다. 셋째, 악한 자가 찾아와서는 무릎을 꿇었다는 것이다. 블레셋 사람들은 이삭의 우물을 메워 버렸고 블레셋 왕이 찾아와서 추방령을 내렸다. 이것이 그곳에서 이삭이 당한 경험이다. 하지만 나중에는 어떻게 되었는가? 이삭이 대항치 아니하고 온유한 마음으로 양보하고 참아내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도 이삭이 가는 곳마다 우물을 얻게 하여 복을 받게 하셨다는 것을 듣게 된 아비멜렉은 자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자신의 친구까지 데려와서 이삭과 더불어 평화 조약을 체결하자고 사정사정했기 때문이다(창26:26~33). 그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다(창26:28), "너는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니라(창26:29)." 그렇다. 악은 최종적으로 승리할 수 없다. 오직 예수님처럼 사는 자가 승리하게 되기 때문이다.
5. 나오며
이삭의 생애는 하나님께 바쳐진 자가 어떻게 되는지를 보여 주는 전형적인 삶이라고 하겠다. 과거 하나님께 기꺼이 자신을 내어 바친 이삭이 아니었던가? 하지만 때로는 사람들이 힘들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대적들이 배가 아프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 사탄 마귀가 우리를 대적할 때에는 예수의 이름으로 쫓아버리면 된다. 그러나 사탄은 직접 대항하지 않고 꼭 사람을 써서 우리를 힘들게 하려고 한다. 그러한 경우는 대적이 나를 공격한다고 할지라도, 사람을 내치거나 사람에게 혈기를 부려서는 아니 된다. 그러면 오히려 사탄의 밥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럴 때에는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오직 온유한 마음으로 끝까지 인내하면서, 원수갚는 것도 하나님께 내어 맡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러면 최후 승리가 우리의 것이 되는 것이다. 결국 이삭이 받은 축복은 어떤 것이었는가? 그것은 그가 가는 곳마다 우물을 얻었다는 것이며, 끝내는 원수들이 와서 직접 사과하였을 뿐만 아니라, 진짜 맨 마지막에 가서는 블레셋과 가나안 족속의 경계 지점인 브엘세바를 이삭이 거주할 땅으로 인정받는 놀라운 축복을 얻게 되었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정말로 정확했던 것이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5:5)" 그렇다. 이것이 비단 이삭의 이야기뿐이겠는가? 그리고 비단 이 땅에서 일어날 이야기뿐이겠는가? 그것은 바로 우리의 이야기요, 하늘에서 준비된 땅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겠는가? 이 말씀은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 수 있을 것이다.
2021년 06월 11일(금)
정병진목사
이삭은 그가 젊었을 때에 하나님께 자신을 번제물로 바친 자다. 그런데 그에게도 어려움이 찾아왔다. 왜 그랬을까? 하나님께 자신을 온전히 바쳤음에도 불구하고 왜 그에게 어려움이 찾아왔던 것인가? 그리고 이삭의 경우와 우리의 경우는 어떻게 같으며 또한 어떻게 다른가? 이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리고 중간에 생략된 영적인 원리들과 최종 승리의 과정을 알아야 한다. 그래야 흔들림없이 이 길을 계속 걸어갈 수 있고 최종 승리를 거둘 수 있기 때문이다.
1. 들어가며
성경의 모든 이야기는 그 이야기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영적 원리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기 위해 기록된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을 때에 그러한 영적인 원리들을 캐낼 수만 있다면 우리는 성경에서 엄청난 보화들을 발견할 수가 있다. 그런데 성경이 우리에게 이러한 영적인 원리들을 가르쳐 주지만 아무에게나 열려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을 구하고 바라고 찾는 자들에게 열려지기 때문이다. 특히 어떤 이야기에는 영적 원리가 중간에 한 대목씩 생략되어 있기도 하며, 다른 것과 비교해 보아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도 있다. 그러므로 성경 이야기는 참으로 흥미진진한 이야기라고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오늘 읽었던 말씀도 그러한 영적 원리들을 포함하고 있는 말씀 중의 하나다. 그것은 바쳐진 삶이 얼마나 축복된 삶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어려움이 왜 있는지를 우리에게 말해 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어려움에 부딪힐 때에 우리는 과연 그것을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가? 그리고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한 자에게 주어지는 참된 축복은 대체 무엇인가?
2. 바쳐진 자에게 주어지는 놀라운 축복은 무엇인가?
창세기의 기자는 분명 하나님께 바쳐진 자의 삶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바쳐진 자는 기본적으로 하나님께서 손대는 일마다 복을 주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바쳐진 자'란 이삭과 같은 자를 지칭하는 표현이다. 이삭은 그의 나이 약 30세(?)가 되었을 때에 모리아의 한 산에서 제물로 바쳐졌던 사람이었다(창22:1~19). 그는 그때 스스로 아버지의 손에 의해 자신의 목숨을 내어 맡겼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한다면 기꺼이 자신을 드리겠다고 하는 각오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이삭이 자신을 드리는 것(바침)을 기쁘게 받으셨다. 그리고 그의 마음만을 받으시고 그를 죽게 하지는 않으셨다. 그러므로 창세기 26장에서 이삭의 삶은 이미 예표론적으로 볼 때, 창세기 22장에서 하나님께 바쳐진 이후의 삶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좀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바쳐진 자는 복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그러한 자가 어떤 일을 하든지 그는 복을 받지 아니할 수가 없다. 왜 그런가? 그 이유는 간단하다. 하나님께 자기 자신을 드린 자의 삶은 그때부터는 그 사람 자신의 삶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신을 하나님께 바쳐 버린 이상 그 사람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삭의 잘됨과 그의 안됨은 이제 더이상 그에게 책임이 있지 않게 된다. 그는 이미 하나님께 드려졌기에 그 사람을 소유하신 하나님에게 그 책임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신에게 자기를 바친 자를 돌보지 아니할 수 없으며, 복을 주지 아니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바쳐진 자의 주인은 이제 본인이 아니라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30살 즈음에 하나님께 바쳐진 이삭의 생애는 잘 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이삭의 삶은 더이상 이삭의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삶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근을 피해 블레셋 민족의 그랄 땅으로 이동하였지만 이삭의 삶은 형통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그해에 이삭이 지은 농사에서 나타난다. 사실 이삭은 농사의 전문가가 아니었다. 그에게는 목축업이 주된 직업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랄 땅에 들어가 보았더니, 그곳의 사람들은 주로 농사를 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이삭도 그랄 땅에 머무는 동안 농지를 개간하여 그곳에 농사를 짓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그해 농사한 것을 거둬들여 보니 무려 100배의 결실을 얻게 된 것이다. 어떻게 농사 한 번 제대로 지어 보지 못했던 이삭이 농사로 풍년을 맞이할 수 있었던 것인가? 그것은 한 마디로 '여호와께서 그에게 복을 주셨기 때문'이었다(창26:12). 왜냐하면 이삭이 짓는 농사는 이삭의 농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농사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이삭이 이미 하나님께 바쳐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 이삭은 농사일에는 초보자였다. 그의 원래 직업이 목축업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해에는 농사도 풍년이었고 목축업도 잘 되었다. 그리하여 이삭은 점점 창대하게 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기에 이른다. 그러니 그 집에는 양떼와 소떼가 가득하고, 종들도 심히 많게 되었다. 이것이야말로 바로 바쳐진 자의 삶이 어떤 것인지를 고스란히 보여 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들 중에도 하나님께 자신을 바치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그런데 그러한 사람들이 전부 이삭처럼 복을 받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는 분들도 더러 있다. 왜 그런가? 그것은 이삭의 경우와 나의 경우는 다를 수 있다는 것을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이삭은 이미 자신의 아버지 대에서부터 저주가 끊어진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들은 어떠한가? 예수님만 믿으면 이미 저주가 끝났다고 믿고는 지은 죄를 회개하지도 않고 있고, 특히 조상들이 지은 죄들에 대해서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있는 것이 현실이 아닌가? 그리하여 조상들이 지은 우상 숭배의 죄값으로 인해 3~4대 후손이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어떤 사람은 앞길을 막는 저주 때문에, 하는 일마다 막히기도 하며, 물질이 들어오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이삭의 경우는 이미 그러한 저주가 끝난 상태에 있었지만, 오늘 우리의 경우에는 저주가 아직 끝나지 않은 상태에 있기도 하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아니 된다. 그런데 회개의 메카니즘을 아직 모르는 사람은 "나는 왜 남들처럼 복을 누리고 살지 못하지?"하고 계속 질문을 던지고 있을 것이다. 빨리 조상들이 지었던 죄와 자신이 짓고 있는 죄를 회개하기를 바란다. 그것도 낱낱이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바쳐진 자라도 항상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3. 바쳐진 자의 삶에도 시기 질투가 나타나는 이유는 무엇이며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하지만 하나님께 바쳐진 자의 삶에도 어려움은 있다. 왜냐하면 바쳐진 자의 축복을 보고 시기 질투하는 사람도 생기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사실 영적으로 볼 때, 블레셋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들이었으므로, 사탄의 나라를 상징한다. 그러니 블레셋 사람들은 악한 자들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얼마 후 이삭에게 와서는 아브라함이 파 놓았고 이삭이 사용하고 있던 우물들을 흙으로 메워 버렸다. 그리고 블레셋 왕 아비멜렉도 찾아와 이렇게 말했다. "네가 우리보다 크게 강성한즉 우리를 떠나가라(창26:16)." 그렇다. 바쳐진 자의 삶은 축복된 삶이요 손대는 모든 일에 복을 받는 삶이 된다. 하지만 이것을 시기 질투하는 세력에 의해 또한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유없이 이러한 고통을 받게 되었을 때 그 사람은 어떻게 대처하는 것이 좋은가?
그것은 이삭처럼 하면 되는 것이다. 이것은 다른 말로 예수님처럼 하면 된다고 정의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삭은 예수님의 예표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어떻게 악한 자들을 대항했는가? 첫째, 악을 악으로 대항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셨기 때문이다. 이삭도 마찬가지였다. 블레셋 사람들이 따라와서는 계속해서 이삭을 힘들게 했다. 그런데 그때 이삭에게는 힘이 있었다. 그의 아버지 때부터 길리운 군사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삭은 악을 악으로 대항하지 않았다. 싸움을 걸어오면 그곳을 내주고 조용히 떠나갔기 때문이다. 둘째, 온유한 마음으로 끝까지 인내하였다는 것이다. 만약 주님께서도 당신을 이유없이 비난하고 정죄하고 심지어 산헤드린공회에서는 거짓으로 모함하여 사형언도를 내렸어도 그것을 묵묵히 받아들이셨다. 이삭도 마찬가지였다. 일궈 놓은 농토와 우물을 내주고 이삭은 그랄 골짜기까지 쫓겨나야 했다. 하지만 이삭은 다시 우물을 팠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그후로도 이삭은 3번이나 옮겨가면서 우물을 팠는데 파는 곳마다 물이 나왔기 때문이다. 바쳐진 자의 삶은 어디를 가든지 형통하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탄 마귀는 직접 공격하면 자기들도 공격을 받으니까 꼭 사람을 이용하여 공격해 온다. 블레셋 사람들을 이용하여 이삭을 괴롭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삭은 그들을 무력으로 대항하지 않았다. 온유한 마음으로 그들을 대했으며, '이곳이 아니라면 다른 곳으로 가서 다시 시작하리라'는 각오를 가지고 그 자리를 양보하고 떠났던 것이다. 그것을 무려 3번이나 했다. 그랬더니 세 번째에 판 우물에 대해서는 더이상 자기들의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세 번째 판 우물이 가장 좋았다. 셋째, 원수갚는 일을 자기가 하지 않고 하나님의 손에 맡겼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에도 원수갚는 일을 하셨다면 열두 영 더 되는 천사들을 시켜 그들을 모조리 죽여 없애버릴 수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주여, 저들은 저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고 하셨다. 이삭도 마찬가지였다. 이삭도 자기 손으로 그들을 해하지 않았다. 오직 하나님의 손에 위탁하고는 그 자리를 물러나왔기 때문이다. 그것은 힘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나를 괜히 트집잡고 힘들게 하는 사람이 있으면 우리는 보통 그를 저주하는 말을 해 버리든지 그렇게 하려고 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그 저주가 그에게 임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리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를 저주하면 아니 된다. 그도 언젠가 회개하게 된다면 그도 얼마든지 천국 갈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도 이렇게 말했다.
롬12:19-21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20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21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4. 이삭이 시기 질투하는 사탄의 시험을 잘 이겨내고 얻은 결과는 무엇이었는가?
우리가 악한 사람을 대항하거나 저주하지 않는 것은 내가 힘이 없어서도 아니며, 내가 그를 저주할 줄 몰라서도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던 다윗은 자기를 원수같이 여기고 죽이려고 하는 사울왕을 죽이려고 하지도 않았으며 저주하지도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도 이 지구상에 존재했던 사람들 중에 최고로 그를 아끼고 사랑하셨던 것이다. 그렇다면, 원수들에 대하여 예수님처럼 살았던 이삭은 어떤 복을 받게 되었는가?
첫째, 원수들의 공격 이후에도 손대는 모든 일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다는 것이다. 우선 추방당해 다른 땅으로 이주해야 했지만 추방당한 그곳에서 우물을 팠는데, 팔 때마다 물이 나왔기 때문이다. 남들은 일평생에 한 번 얻을까 말까 하는 우물을 이삭은 연거푸 게속해서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둘째, 원수들의 공격에도 악을 악으로 대항치 않고 양보했더니 맨 나중에 차지하는 우물은 더 크고 더 좋은 우물을 얻을 수가 있었다는 것이다. 맨 마지막, 세 번째 팠던 우물은 이삭이 추방당하면서 차례대로 팠던 첫 번째 우물('에섹')과 두 번째 우물('싯나')보다 더 크고 훨씬 더 좋은 우물('르호봇')이었기 때문이다. 셋째, 악한 자가 찾아와서는 무릎을 꿇었다는 것이다. 블레셋 사람들은 이삭의 우물을 메워 버렸고 블레셋 왕이 찾아와서 추방령을 내렸다. 이것이 그곳에서 이삭이 당한 경험이다. 하지만 나중에는 어떻게 되었는가? 이삭이 대항치 아니하고 온유한 마음으로 양보하고 참아내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도 이삭이 가는 곳마다 우물을 얻게 하여 복을 받게 하셨다는 것을 듣게 된 아비멜렉은 자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자신의 친구까지 데려와서 이삭과 더불어 평화 조약을 체결하자고 사정사정했기 때문이다(창26:26~33). 그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다(창26:28), "너는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니라(창26:29)." 그렇다. 악은 최종적으로 승리할 수 없다. 오직 예수님처럼 사는 자가 승리하게 되기 때문이다.
5. 나오며
이삭의 생애는 하나님께 바쳐진 자가 어떻게 되는지를 보여 주는 전형적인 삶이라고 하겠다. 과거 하나님께 기꺼이 자신을 내어 바친 이삭이 아니었던가? 하지만 때로는 사람들이 힘들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대적들이 배가 아프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 사탄 마귀가 우리를 대적할 때에는 예수의 이름으로 쫓아버리면 된다. 그러나 사탄은 직접 대항하지 않고 꼭 사람을 써서 우리를 힘들게 하려고 한다. 그러한 경우는 대적이 나를 공격한다고 할지라도, 사람을 내치거나 사람에게 혈기를 부려서는 아니 된다. 그러면 오히려 사탄의 밥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럴 때에는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오직 온유한 마음으로 끝까지 인내하면서, 원수갚는 것도 하나님께 내어 맡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러면 최후 승리가 우리의 것이 되는 것이다. 결국 이삭이 받은 축복은 어떤 것이었는가? 그것은 그가 가는 곳마다 우물을 얻었다는 것이며, 끝내는 원수들이 와서 직접 사과하였을 뿐만 아니라, 진짜 맨 마지막에 가서는 블레셋과 가나안 족속의 경계 지점인 브엘세바를 이삭이 거주할 땅으로 인정받는 놀라운 축복을 얻게 되었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정말로 정확했던 것이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5:5)" 그렇다. 이것이 비단 이삭의 이야기뿐이겠는가? 그리고 비단 이 땅에서 일어날 이야기뿐이겠는가? 그것은 바로 우리의 이야기요, 하늘에서 준비된 땅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겠는가? 이 말씀은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 수 있을 것이다. (건투를 빈다. . .삭제요)
2021년 06월 11일(금)
정병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