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세비우스의 교회사 by 유세비우스 팜필루스, 엄성옥 번역
THE ECCLESIASTICAL HISTORY OF EUSEBIUS PAMPHILUS, translated by SUNG-OK UM, 1990 Eun Sung Seoul, Korea
Eusebius of Caesarea, Eusebius Pamphili, AD 260/265 - 339/340
호겐 : 유세비우스의 교회사 또한 ‘순교자들의 책’ 이라는 타이틀을 걸어야 할 것이다. 존 폭스의 순교사화가 [로마가톨릭 vs. 개신교] 의 순교사를 다루고 있다면, 유세비우스의 교회사는 [로마제국 vs. 초대교회] 의 구도를 잡고 있다. 먼저 유세비우스의 교회사를 읽고 나서 존 폭스의 순교사화를 읽어보면, 신실했던 교회가 어떻게 부패하게 되었고, 선택받은 회중이 가라지들 사이에서 어떻게 갈라져 나왔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유세비우스의 교회사 by 유세비우스 팜필루스, 엄성옥 번역
THE ECCLESIASTICAL HISTORY OF EUSEBIUS PAMPHILUS, translated by SUNG-OK UM, 1990 Eun Sung Seoul, Korea
이 시기에 디오클레티안이 시작하여 10년 동안 계속된 박해가 절정에 이르렀다. 이 박해 기간 중에 당시 가이사랴 교회의 장로였던 유세비우스는 계속 그 도시에 머물면서 많은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순교하라고 권면하고 가르쳤다. 그리하여 순교한 사람들 중 한 사람이 아피아누스 Aphianus 였다. 그가 순교하면서 보여준 훌륭한 태도는 팔레스틴의 순교자들에 관한 유세비우스의 저서에 기록되어 있다. 유세비우스는 이 박해 기간 중에 아마도 긴급한 일로 인해서 두로 Tyre 에 갔던 것 같다. 그런데 그는 그곳에 머무는 동안 5명의 이집트 신자들의 훌륭한 순교를 목격했다 (이것은 유세비우스의 <교회사> 제9권 제7장에 기록되어 있다). 또 후일 그가 이집트와 테바이스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서도 박해가 진행되고 있었는데, 여러 명의 남녀 순교자들의 훌륭한 신앙의 절개를 목격하기도 했다 (이것은 <교회사> 제8권 제9장에 기록되어 있다). p10 같은 시기에 유세비우스는 히에로클레스 Hierocles 를 반박하는 글을 썼다. 히에로클레스는 박해가 시작되어 니코메디아의 모든 교회가 고통을 받고 있을 무렵, 기독교 신앙을 대적하는 두 권의 책을 발행했다. 그는 그 책에서 아폴로니우스 티아네우스 Apollonius Tyaneus 가 그리스도보다 더 위대한 일들을 행했다고 주장했다. 유세비우스는 마치 히에로클레스의 인물됨과 주장이 전혀 중요치 않다는 듯이 지극히 짧은 책으로 그에 대해 답변했다. p11
이 무렵 박해가 종식되고 교회에 평화가 찾아왔다. 그리고 가이사랴의 감독 아가피우스가 사망했으므로 유세비우스는 만장일치로 가이사랴의 감독에 임명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AD 314년에 개최된 안키라 Ancyra 종교회의에 참석하여 서명한 아그리콜라 Agricola 가 아가피누스의 후임 감독이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바로니우스 Baronius 는 그의 <연보 Annals> 에서, 그리고 블론델루스 Blondellus 도 이렇게 주장했다. 블론델루스는 유세비우스가 315년경 아그리콜라가 사망한 뒤에 가이사랴 교회를 다스렸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이러한 감독들의 서명은 오직 라틴 법규집에만 남아 있으므로, 우리가 판단할 때에 그다지 신뢰할 수 없다고 생각된다. 그것은 헬라어판이나 디오니시우스 엑시구스 Dionysius Exiguss 의 라틴어판에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그리고 유세비우스는 박해가 치열하게 진행되었던 주요 교구의 감독들을 언급하면서 가이사랴의 아가피우스에게서 끝을 맺었다 (유세비우스의 <교회사> 제7권 32장). 그는 기록하길, 아가피우스는 박해기간 중에 자신이 맡은 교회의 유익을 위해 대단히 노력했다고 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가피우스가 박해가 종식될 때까지 감독으로 있었다고 추측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유세비우스는 박해가 끝난 직후에 감독으로 승진했다. 교회에 평화가 깃들게 된 뒤, 두로의 감독 파울리누스 Paulinus 는 유세비우스 및 여러 성직자들을 성전 헌당식에 초청했고 (유세비우스의 교회사 제10권 4장), 유세비우스는 그곳에서 대단히 훌륭한 연설을 했다. 이 일은 AD 315년 리시니우스가 콘스탄틴에게 반역을 꾀하기 이전에 있었으며, 이 무렵 유세비우스는 <복음적 논증과 준비 Evangelic Demonstration and Preparation> 라는 책들을 저술했다. 이 책들은 니케아 종교회의 이전에 저술되었음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이 책들은 이 종교회의 이전에 저술된 <교회사>에서 언급되기 때문이다. p12
한편 제국의 동쪽지방을 다스리던 리시니우스가 갑자기 돌변하여 기독교인들, 특히 성직자들을 박해하기 시작했다. 그는 성직자들이 자기보다는 콘스탄틴에게 호감을 갖고 있고, 또 콘스탄틴을 위한 기도를 더 많이 드린다는 의심을 품었다. 그리하여 콘스탄틴은 두 번의 전쟁에서 그를 패배시키고 굴복시켰으며, 따라서 동쪽 국가의 기독교인들은 평화를 되찾았다. 그러나 이 시기에 기독교인들 자체 내에 심각한 소동이 발생했다. 즉 당시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장로였던 아리우스 Arius 가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불경한 교의를 공개적으로 개진했다. 알렉산더 감독의 거듭된 권면에도 불구하고 아리우스와 그의 동료들은 이 이단을 고집했으므로 결국 그들은 파문되었다. 이에 대단히 진노한 아리우스는 인근 도시의 모든 감독들에게 자신의 신앙을 설명한 서신을 보냈다. 그 서신에서 그는 자신이 동부지방의 다른 성직자들이 주장하는 것과 동일한 교리를 주장했다는 이유로 알렉산더가 부당하게 그를 파직시켰다고 불평했다. 많은 감독들이 이 술책에 넘어갔으며, 또 공개적으로 아리우스파를 옹호하던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 도 강력하게 그들을 선동했다 (호겐 : 본서의 저자인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 와 혼동하지 말도록). 그리하여 그들은 알렉산드리아의 감독 알렉산더에게 아리우스를 변호하는 서신을 보내 그가 과거에 교회에서 지니고 있던 직위를 돌려달라고 요구했다. 우리가 언급하고 있는 유세비우스도 이들 중의 한 사람이었는데, 그가 알렉산더에게 보낸 서신이 제7차 총공의회 the Seventh Ecumenical Synod 결의서에 수록되어 있다. 곧이어 라오디케아 교회의 감독 데오도티우스 Theodotius, 두로의 감독 파울리누스 Paulinus 도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의 본을 좇아 알렉산더에게 아리우스를 복위시키라고 중재했다. p13
그 서신으로 인해 아리우스는 더욱 교만해졌다. 그는 이처럼 훌륭한 인물의 권위를 빌어 많은 사람들을 자기의 이단적 사상으로 끌어들였다. 그리하여 알렉산더는 동부의 나머지 감독들에게 아리우스와 그의 동료들을 축출한 것이 공정한 일임을 이해해달라는 서신을 쓰게 되었다. 알렉산더가 쓴 2개의 서신이 지금도 남아 있다. 하나는 콘스탄티노플의 감독 알렉산더에게 보낸 것인데, 그는 이 서신에서 3명의 시리아 감독들에 대해 불평하면서 싸움을 진정시켜야 할 사람들이 아리우스에게 동조하여 오히려 싸움의 불길을 더 높이 치솟게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아리우스가 니코메디아의 감독 유세비우스에게 보낸 편지를 근거로 해볼 때, 이 세 사람이란 유세비우스와 데오도티우스와 파울리누스이다. 소크라테스는 알렉산더가 전 세계의 모든 감독들에게 보낸 또 하나의 서신을 그의 첫 번째 책에 기록했다. 동부지방의 거의 모든 감독들이 이 알렉산더의 편지에 서명했는데, 그 중 유명한 인물로는 안티오크의 감독 필로고니우스 Philogonius, 베레아의 유스타티우스 Eustathius, 예루살렘의 마카리우스 Macarius 가 있다. 아리우스파를 찬성한 감독들, 특히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는 알렉산더가 서신에서 자기들을 가혹하게 취급했다고 생각했으므로 더욱 격하게 아리우스를 옹호했다. 그러나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 파트로필루스 Patrophilus, 파울리누스, 그리고 시리아의 여러 감독들은 알렉산더 감독에게 순종했다. 그러면서도 아리우스에게 장로로서 회의를 개최할 권리, 그리고 화해와 교회와의 유대를 탄원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리하여 감독들도 알렉산더를 지지하는 감독들과 아리우스를 지지하는 감독들로 나뉘어져 분쟁은 더욱 심각해졌다. p14
그리하여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콘스탄틴 황제는 로마제국 전역의 감독들을 비티니아 Bythinia 의 니케아 Nicaea 에 소집하여 종교회의를 개최했는데, 이것은 그 이전에는 한 번도 없었던 일이다. 이 대규모의 감독회의에서 우리의 유세비우스는 어느 편에도 서지 않았다. 그는 오른편 첫줄에 자리를 잡았고, 전체 종교회의의 이름으로 콘스탄틴 황제에게 청원했다. 황제는 양편으로 나뉘어 앉은 두 진영의 사이에 놓인 황금의자에 앉아 있었다. 이것은 유세비우스가 <콘스탄틴의 생애> 라는 책에서 직접 확증한 사실이며, 소조멘 Sozemen 도 그의 <교회사> 에서 확증했다. 니케아 회의에 참석한 교부들은 “참되신 하나님의 참 하나님, 피조되지 않고 탄생하신 분, 성부와 동일한 본질을 가지신 분” 이라는 말을 첨가하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또 하나님의 아들은 존재하지 않는 물질로 지음을 받았으며 또 그가 존재하지 않으셨던 때가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 대한 저주도 첨가했다. 유세비우스는 처음에는 “삼위일체” consubstantial (ομοουσιοs ‘동일한, 본질의’ 이라는 의미) 라는 용어를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감독들이 그 단어의 의미를 설명해주자 그도 여기에 동의하여 그 신조에 서명했다. 이것은 그가 자신의 교구인 가이사랴 교회에 보낸 편지에 기록되어 있다. p15
니케아 회의 이후 아리우스파는 황제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잠시 잠잠히 지냈다. 그러나 교묘하게 황제의 환심을 산 그들은 다시 용기를 내어 보편교회의 성직자들을 박해하기 위해 모든 방법과 방안을 동원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처음으로 공격한 대상은 안티오크의 감독 유스타티우스 Eustathius 였다. 유스타티우스는 훌륭한 신앙고백, 그리고 니케아 신앙의 옹호인들 사이에서 누린 지위로 인해 유명했다. 그들은 유스타티우스가 사벨리우스의 이단을 주장했으며, 또 황제의 모친인 헬레나 아우구스타 Helena Augusta 를 중상했다고 황제에게 고발했다. 그리하여 안티오크에는 수많은 감독들이 소집되었는데, 그 회의는 그 분파의 우두머리인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 가 주재했다. 이 회의에서 베레아의 감독 키루스 Cyrus 는 유스타티우스에게 사벨리우스의 불경한 교리를 주장했다는 죄목 외에도 음란하다는 죄목도 추가했다 (이것은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의 선동을 받은 멜레티아인들이 만들어낸 중상으로서 아타나시우스가 콘스탄틴에게 행한 <변증> 에 기록되어 있다). 그리하여 결국 그는 자신의 교구에서 축출되었다. 이런 이유로 안티오크에서는 큰 소요가 일어났다. 신자들은 두 파로 나뉘었는데, 한 파에서는 안티오크 교회의 감독직을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에게 수여해야 한다고 요구했고, 또 다른 파에서는 유스타티우스에게 감독직을 돌려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만일 그들이 황제의 권위를 두려워하지 않았고 또 판사들이 예방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폭력을 사용했을 것이다. p16
마침내 소요는 종식되고 유스타티우스는 추방되었다. 그러나 우리의 유세비우스는 안티오크 주민들과 그곳에서 개최된 회의에 참석한 감독들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안티오크 교회의 감독직을 거절했다. 그리하여 감독들은 콘스탄틴에게 서신을 보내어 자신이 의결하고 신자들이 동의한 사항을 전했다. 그리고 유세비우스도 역시 황제에게 서신을 보냈다. 황제는 그에 대한 회신에서 유세비우스의 결심을 크게 칭찬했다. 이리하여 330년 유스타티우스가 해임되었다. 그러자 아리우스파에서는 분노를 아타나시우스에게 쏟아놓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첫째로 그의 성직서품이 부당하며, 둘째로는 그가 지방민들로부터 린넨옷에 대한 세금을 부과했다는 것 (우상에게 제물을 드리는 일), 셋째로는 그가 성배를 깨뜨렸다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그가 아르세니우스 Arsenius 라는 감독을 살해했다고 황제에게 고소했다. 이처럼 상대방을 괴롭히려는 목적으로 제기한 고소로 인해 지친 콘스탄틴 황제는 두로에 공의회를 개최하도록 한 뒤, 아타나시우스 감독에게 그곳으로 출두하여 자신을 변론하라고 명령했다. p17
이 회의가 끝난 뒤, 두로에 모였던 감독들은 황제의 명령에 따라 콘스탄틴 황제가 그리스도를 기념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건축한 거대한 교회의 헌당식에 참가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갔다. 그곳에서 우리의 유세비우스는 훌륭한 설교를 행하여 그 의식을 더욱 빛나게 해주었다. 그리고 황제가 모든 감독들에게 아타나시우스에게 행한 부정한 소송행위에 대해 황제 앞에서 해명하라는 엄한 편지를 보냈을 때, 유세비우스도 다른 다섯 감독과 함께 콘스탄티노플로 가서 모든 일의 전말에 대해 황제에게 보고했다. 그는 이번에도 궁전에서 연설했는데 황제는 그 설교를 대단히 흡족한 마음으로 경청했다. 그러나 유세비우스는 그 설교를 하면서 전혀 황제를 찬양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을 찬양했다. 이 설교는 유세비우스가 왕궁에서 행한 두 번째 설교였다 (콘스탄틴의 생애에 관한 저서 제33장). 그는 그 이전에도 그곳에서 주님의 무덤에 관한 설교를 한 적이 있었다. 그 때 유세비우스는 거듭 황제에게 황제를 위해 마련된 좌석에 앉으라고 간청했다. 그러나 황제는 하나님에 관한 설교는 서서 경청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선 채로 설교를 경청했다. 콘스탄틴 황제가 유세비우스를 얼마나 사랑했는지는 지금까지 이야기한 사실들 및 그밖의 다른 여러 가지 상황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그는 황제로부터 많은 편지를 받았고, 또 자주 궁전으로 불려가 함께 식사를 하며 친근하게 대화를 나누는 영광을 누렸다. 콘스탄틴 황제는 유세비우스에게 자신이 막센티우스를 대적하여 원정에 나섰을 때에 보았던 십자가 환상을 이야기해 주었다. 유세비우스의 말에 의하면 (De Ecclesiastica Theologia 제14장) 황제가 그 십자가의 형상을 본 따서 만들라고 했던 군기도 그에게 보여주었다. 또 콘스탄틴은 유세비우스의 성경지식이 탁월함을 알고 있었으므로 그에게 성경을 필사하여 사본을 만드는 일의 관리와 감독을 맡겼다. 콘스탄틴 황제는 자신이 콘스탄티노플에 세운 교회에 비치하기 위해 그 사본들을 원했었다. 또 유세비우스는 콘스탄틴에게 부활절에 관한 책을 선물로 헌정했는데, 황제는 크게 기뻐하여 즉시 그것을 라틴어로 번역하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유세비우스에게 편지하길 가능한 한 빨리 이 책들을 성경연구에 관여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전하길 원한다고 요청했다. p20
거의 같은 시기에 유세비우스는 또 하나의 작은 책을 콘스탄틴 황제에게 헌정했는데 그 책은 예루살렘 교회와 그곳에 헌납된 선물들에 대한 묘사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책과 그가 <콘스탄틴의 생애> 라는 책 말미에 첨가했던 설교는 남아있지 않다. 유세비우스는 마르셀루스 Marcellus 를 반박하여 5권의 책을 저술했는데, 그 중에서 마지막 3권 <De Ecclesiastica Theologia> 는 안티오크의 감독 플라킬루스 Flaccillus 에게 헌정했다. 플라킬루스는 AD 335년 콘스탄티우스와 알비누스가 두로 회의를 소집하기 직전에 감독이 되었다. 유세비우스는 그의 첫 번째 책에서 교회가 마르셀루스를 정죄한 것은 합당한 일이었다고 분명히 표현했다. 마르셀루스는 AD 335년에 콘스탄티노플에서 개최된 회의에서 콘스탄틴이 세운 예루살렘 교회의 헌당식에 참석했던 감독들에 의해 정죄되었다. 소크라테스는 유세비우스가 마르셀루스를 반박하여 저술한 3권의 책, 즉 <De Ecclesiastica Theologia> 만 인정했으나, 유세비우스가 마르셀루스를 반박하여 저술한 책은 모두 5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유세비우스가 최후로 저술한 책은 콘스탄틴의 생애에 관한 4권의 책인 듯하다. 그 책들은 콘스탄틴 황제가 사망한 뒤에 저술되었으며, 유세비우스는 콘스탄틴 황제보다 그다지 더 오래 살지 못했다. 그는 콘스탄티우스 아우구스투스의 통치가 시작될 무렵, 콘스탄틴 2세가 사망하기 얼마 전에 사망했다. 소크라테스의 두 번째 저서의 증언에 의하면 그것은 아킨디누스 Acindynus 와 프로쿨루스 Proculus 가 총독으로 있던 AD 340년의 일이었다고 한다. p21
우리는 유세비우스의 <교회사> 에 관해 몇 가지 논평을 하려 한다. 유세비우스는 정통적이고 보편적인 교회의 교화와 기독교 신앙의 진리를 확실히 하기 위해 유대인과 이교도들을 반박하는 글을 썼다. 그의 모든 책들 중에서 가장 탁월한 것이 <교회사> 이다. 물론 유세비우스 이전에도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를 변론하는 책을 썼으며, 지극히 만족스러운 논증에 의해 유대인들과 이교도들을 논박했었다. 그러나 유세비우스 이전에는 교회에 있던 사건들의 기사를 후세에 전해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그러므로 유세비우스는 이러한 역사서를 서술한 최초의 인물이며 또한 그 일을 지극히 완전하게 수행했으므로 크게 찬양받을 인물이다. 유세비우스 이후 많은 사람들이 그의 본을 받아 교회에서 발생한 사건들의 기사를 제공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유세비우스의 시대 이후에서부터 역사서를 기록하기 시작했으며, 또 유세비우스를 그가 독보적인 역사가로 존재했던 시대의 확실한 보증인으로 남겨두었다. 따라서 오직 유세비우스에게만 교회사의 시조 始祖 라는 명칭을 부여할 수 있다. p22
제1권
제1장 본서의 주제
나의 목적은 우리 주님의 시대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어온 거룩한 사도들의 일을 기록하는 것이다. 즉 교회사에 있어 발생한 많은 중요한 일들, 지극히 중요한 지역의 교회를 관할하고 다스린 인물들, 저서를 통해서나 또는 저서는 집필하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한 각 시대의 인물들에 대해 자세히 언급하려 한다. 그리고 혁신을 바라는 욕망의 선동을 받고는 지극히 큰 오신 誤信 을 창도하고서 거짓된 주장을 선포하는데 있어서 지도자로 자처하며 무서운 늑대처럼 무자비하게 그리스도의 양떼들을 공격한 시대, 사람들, 그리고 특성을 서술하려 한다. 또 주님을 해치려는 음모를 꾸몄던 유대민족에게 신속히 임한 재앙도 묘사하려 한다. 즉, 하나님의 말씀은 어느 시대에 어떤 방법으로 얼마나 빈번하게 그 민족의 적대행위를 대적하셨는지를 기록하며, 또 그처럼 피와 고통으로 얼룩진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을 위해 끝까지 인내하며 싸운 인물들에 대해, 그리고 우리 시대에 있었던 순교를 기록하고자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 주님의 은혜롭고 자비로운 섭리도 서술하려 한다. 이러한 주제들을 다루기 위해서 본인은 우리의 주님이시며 구세주이신 그리스도의 시대의 기원과 최초의 도입부터 언급하고자 한다. p42
그러나 이 저서를 흠잡을 데 없이 완전하게 저술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임을 인정하며, 또 특히 우리는 이러한 주제를 다루는 일에 착수한 최초의 사람으로서 전혀 흔적도 없고 발자취도 없는 길을 더듬어보려는 것이므로 자칫하면 제멋대로 하게 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솔직히 인정한다. 그러나 비록 우리에게는 앞서 간 사람들의 발자취조차 발견할 능력이 없지만 우리의 안내자가 되시는 하나님을 기도로 의지하며 그리스도의 능력이 우리의 도움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만일 그렇게 되지 못한다면 우리는 다만 희미한 지식밖에 소유하지 못할 것인바, 그것은 그들이 살았던 시대에 대한 부분적인 이야기를 통해 우리에게 전해 내려온다. 그들은 멀리서 비춰주는 횃불처럼 우리 앞에서 음성을 높이며, 전망이 좋은 고지에서 내려다보듯이 우리에게 어떤 길을 걸어야 하며 어떤 방향으로 행해야 안전하고 확실한지 소리치고 권면해준다. 그러므로 우리는 역사적 서술에 의해 제시된 주제에 유익하다고 생각되는 모든 것들을 간결한 통일체로 정리하려 한다. p43
이 목적을 위해 우리는 선조들이 흩어놓은 자료들을 수집했고 고대 작가들의 저서들로부터 적절한 부분을 발췌 인용했다. 이 작업을 수행하면서 우리는 오늘날도 대단히 훌륭하다고 여겨지고 있는 교회에서 봉사했음에도 불구하고 망각되어 있는 주님의 사도들의 계승자들을 일부나마 다시 찾아내게 되길 바란다. 생각건대 이것은 지극히 필요한 일이다. 나는 아직껏 이 분야에서의 완벽한 저술을 위해 노력한 교회사가를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나는 그것이 고도로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하며 또한 역사적 연구를 갈망하는 사람들에게 그만큼 유익하리라고 믿는 바이다. 나는 내가 이미 제작한 연대표에서 이 문제들에 대한 개요를 제시한 바 있다. 그러나 본서에서는 보다 자세하게 서술하려 한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나는 이 논문을 모든 인간의 창안물을 능가하는 탁월하고 고귀한 신성 神性 의 교리와 섭리, 즉 구세주이신 그리스도에 관한 서술로부터 시작하려 한다. 후손들에게 교회사를 소상하게 전해주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리스도의 시대의 기원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이것은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신성한 시대이다. p43
제2장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 神性 과 선재 先在 에 대한 개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존재양식은 두 가지다. 하나는 육체로 비유하자면 머리와 같은 것으로서 그리스도의 신성 神性 을 나타낸다. 또 하나는 육체로 말하자면 발足과 같은 것으로서, 바로 이것에 의해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우리와 마찬가지로 연약한 본성 (육신) 을 취하셨다. 그러므로 그에 따르는 내용을 보다 완벽하게 기술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생애에 있어서 주요하고 중요한 점들에 대한 언급으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동시에 이 방법을 사용함으로서 세례명이라는 제도가 전에는 없었으며 최근에 생겨난 외래의 풍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그것이 예부터 전래된 제도로서 신적 권위가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줄 수 있다. 그리스도의 본질과 본성, 위엄 및 근원은 말로는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 그러므로 성령께서도 예언서에서 말하길 “누가 그의 탄생을 선포할 것인가?” 라고 말했다. 왜냐하면 성자 외에는 성부를 아는 자가 없고, 또 성자를 탄생시킨 성부 외에는 아무도 성자를 완전히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세상이 존재하기 전부터 존재하고 있던 빛, 곧 지적이고 실질적인 지혜, 그리고 보이는 것이나 보이지 않는 모든 산물과 피조물들이 생겨나기 이전, 즉 태초부터 성부와 함께 거했던 살아계신 말씀, 하나님의 장자인 동시 외아들이신 아들, 불멸하는 신령한 천군들의 왕자이며 지도자, 강대한 공의회의 사자, 아버지의 은밀하신 뜻을 집행하는 대리인, 성부와 함께 만물을 창조하신 분, 성부 다음가는 우주의 조물주, 성부의 참된 외아들, 만물의 주이시며 임금이요 하나님으로서 스스로의 신성으로부터 능력을 부여받으시고 지배하시며 성부로부터 능력과 영광을 받으신 분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는 분은 오직 성부 하나님뿐이다. 이 모든 사실은 그의 신성 神性 을 언급한 심오한 말씀 안에 잘 드러나 있다. p45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 1:1)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요 1:2)
가장 고대의 선지자인 위대한 모세도 성령의 감화를 받아 만물의 창조와 정돈을 묘사했고, 우주의 창조자이시며 조성자께서 그리스도, 즉 최초로 잉태하신 말씀에게 모든 부수적인 만물의 형성을 양도하셨으며 인간의 창조와 관련하여 그와 의논하셨다고 전해주고 있다. 그는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 라고 기록했다 (창 2:26). 또 어느 선지자는 자신의 찬양 속에서 하나님을 언급하여 설명하되 “그가 명하시매 지음을 받았음이로다” 고 했다 (시 148:5). 그는 성부이신 창조주는 만물의 지배자이시며 지고한 권력을 가지고 명령하시는 분이시며, 거룩한 말씀은 아버지의 곁에서 그의 명령에 따라 집행하신다고 소개하고 있다. 그도 역시 인간의 창조 이래로 의와 경건에 있어서 모든 것을 능가했다고 말해진다. 하나님의 종 모세, 아브라함과 그의 자녀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등장한 많은 의로운 예언자들은 순결한 마음의 눈으로 주님을 묵상했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분께 합당한 예배를 드렸다. 성자께서도 성부께 대한 예배에 결코 무관심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분은 만민에게 성부에 관한 지식을 가르치라는 명령을 받고 있다. p45
그러므로 주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마므레 상수리 수풀 근처에 있을 때에 평범한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셨다. 아브라함은 분명히 사람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즉시 땅에 엎드려 그를 하나님을 맞아 영접했다. 또 그는 그분이 누구인지를 알고 있다는 것을 말로 고백했으니, 즉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공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 라고 말했다. 만일 전능하신 하나님의 피조된 본질을 지닌 유령으로 나타나 보는 자의 눈을 속인다고 가정하는 것이 완전히 비합리적인 일이듯, 성경이 이처럼 거짓된 일을 꾸며냈다고 가정하는 것도 역시 비합리적인 일이다. “온 땅의 심판주로서” 인간의 형상을 입고 나타나셔서 “심판을 하시는 주 하나님” 을 우주의 창시자라고 부르는 것이 타당치 못하다면 그의 유일하신 선재 先在 하시는 말씀이라고 불러야 하지 않겠는가? 시편에서는 그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분께서 자신의 말씀을 보내어 그들을 고치시며 멸망들에서 그들을 건지셨도다” (시 107:20). 모세는 “주께서 하늘 곧 주에게로서 유황과 불을 비같이 소돔과 고모라에 내리사” 라고 말해 그가 성부 다음가는 제2인자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또 성경은 야곱에게 인간의 모양으로 나타나셨던 분을 하나님이라고 칭하고 있다.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창 32:28). 그리하여 야곱은 그곳 이름을 브니엘이라고 이름했으며,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고 했다 (창 32:30). p46
이러한 신의 출현을 하위 천사들이나 하나님의 종들의 출현으로 생각하는 것은 용납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하위 천사들이나 종들의 출현이 있을 때마다 성경은 분명히 그들이 하나님이나 주 YHVH 가 아니라 사자들이라고 불렸다고 명칭을 밝히고 있다. 이것은 성경에서 무수하게 찾아볼 수 있다. 모세의 후계자인 여호수아는 그를 거룩한 천사들과 천사장들의 지도자, 높은 곳에 있는 능천사 能天使 들의 지도자,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으로서 만물을 다스릴 제2의 주권을 가진 자, “주 YHVH 의 군대장관” 이라고 불렀다. 여호수아의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다. “여호수아가 여리고 옆에 왔을 때에 눈을 들어 보니, 보라, 한 남자가 칼을 빼어 손에 들고 마주 섰으므로 여호수아가 그에게 나아가 이르되, 너는 우리 편이냐? 우리 대적들의 편이냐? 하매, 그가 이르되, 아니라. 나는 지금 주의 군대의 대장으로 왔느니라, 하니 여호수아가 얼굴을 땅에 대고 경배하며 그에게 이르되, 내 주께서 자신의 종에게 무슨 말씀을 하려 하시나이까? 하매, 주의 군대의 대장이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하매 여호수아가 그대로 행하니라” (수 5:13-15). 여기에서 우리는 이 분이 모세에게 말씀하셨던 바로 그분임을 직감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을 보면 동일한 분에 대해 동일한 표현을 했기 때문이다. “그가 보려고 옆으로 가는 것을 주께서 보시고 하나님께서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이르시되, 모세야, 모세야,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거늘, 그분께서 이르시되, 여기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나는 네 아버지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하시니라. 모세가 하나님 뵙기를 두려워하였으므로 자기 얼굴을 숨기니라” (출 3:4-6). p48
창조 이전에 성부 하나님께서 모든 피조물을 조성하실 때에 그분을 도운 살아있고 스스로 존재하는 본질이 있었으니,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지혜라고 불린다는 사실은 이미 개진한 여러 가지 증거들 이외에도 지혜가 솔로몬을 통해서 스스로에 대해 분명히 말하며 우리에게 자신의 비밀을 전해준 말을 통해 알 수 있다. “나 지혜는 분별과 함께 거하며 재치 있는 창안물들에 대한 지식을 찾아내나니.... 내게 능력이 있으므로, 나를 통해 왕들이 통치하며 통치자들이 정의를 포고하고, 나를 통해 통치자들과 귀족들 곧 땅의 모든 재판관들이 다스리느니라” (잠 8:12-16). 이 말씀 뒤에는 또 다음과 같은 말씀이 이어진다. “주께서 그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일하시기 전에 나를 가지셨으며 만세 전부터, 상고부터, 땅이 생기기 전부터 내가 세움을 입었나니 아직 바다가 생기지 아니하였고 큰 샘들이 있기 전에 내가 이미 났으며, 산이 세우심을 입기 전에, 언덕이 생기기 전에 내가 이미 났으니 하나님이 아직 땅도 들도 세상 진토의 근원도 짓지 아니하셨을 때에라 그가 하늘을 지으시며 궁창으로 해면에 두르실 때에 내가 거기 있었고 그가 위로 구름 하늘을 견고하게 하시며 바다의 샘들을 힘 있게 하시며 바다의 한계를 정해 물로 명령을 거스리지 못하게 하시며 또 땅의 기초를 정하실 때에 내가 그 곁에 있어서 창조자가 되어 날마다 그 기뻐하신 바가 되었으며 항상 그 앞에서 즐거워 했느니라” (잠 8:22-30). 그러므로 거룩한 말씀은 창세 이전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으며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최소한 몇 사람들에게 나타난 바 있음을 간단하게 증명해 보았다. p49
복음이 보다 빨리 선포되지 않은 이유
복음이 옛날에 모든 민족, 모든 백성들에게 선포되지 않은 이유는 앞으로 전개될 고찰을 통해 드러날 것이다. 고대인들의 생활은 그리스도의 교리와 지혜와 가치를 완벽하게 받아들일만한 상황 속에 있지 못했다. 태초에 행복한 상태 속에 거하던 최초의 인간은 하나님의 명령을 무시했으므로 오늘 우리와 같이 필멸 必滅 의 고통스러운 상태로 전락했으며, 이전에 누렸던 거룩한 즐거움을 저주 아래 놓인 세상과 바꾸어 버렸다. 그 후 이 세상을 가득 채운 이 첫 인간의 후손들은 몇 명을 제외하고는 더욱 악해졌고 야만적이고 무질서한 생활을 시작했다. 그들에게는 도시나 국가가 없었고 예술이나 과학도 없었으며, 그런 개념조차 가지고 있지 못했다. 그들은 법, 정의, 덕, 철학 등이라는 명사도 알지 못했다. 그들은 전혀 법이 없이 마치 사납고 무서운 야생짐승들처럼 사막을 방황하면서 인간의 지적인 능력을 파괴했고, 과도한 악을 행하며 온갖 불의에 완전히 굴복함으로서 이성의 씨앗과 인간 지성의 수련을 근절했다. 이리하여 그들은 때로는 죄악된 교제에 의해 서로를 타락시키고, 혹은 살해하며, 때로는 인간의 육체를 먹기도 했다. 그들은 방자하게도 감히 하나님과 전쟁을 하려 했으며, 사람들은 용사들의 싸움을 축하했다. 또 그들은 이 세상을 하늘로부터 방어하려고 담을 쌓아올리려 했으며, 패역한 마음으로 인해 높으신 하나님을 공격할 준비를 하기도 했다. p50
전능하신 하나님은 이처럼 사악한 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홍수와 큰 불을 내리셨다. 하나님은 영혼의 두렵고 완고한 질병을 가혹한 형벌로 진압하시려는 듯이 연속적인 기근, 역병, 전쟁, 번개 등으로 그들을 죽이셨다. 마치 술에 취하면 인간의 정신이 흐려지고 어두워지듯이, 과도한 악의가 거의 모든 세상을 지배하게 되었을 때, 만물이 피조되기 전부터 존재하셨던 말씀이시며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지혜께서는 인간에 대한 넘치는 사랑 때문에 그의 종들에게 때로는 천사들의 형상으로, 혹은 친히 나타나셨다. 그분은 하나님의 능력으로서 다른 방법으로는 사람에게 나타날 수 없었기 때문에 옛 경건한 사람들에게 인간의 형상으로 나타나셨다. 그리고 이 경건한 사람들에 의해 경건의 씨앗이 수많은 인류들에게 뿌려졌으며, 고대 히브리인들이 자기의 조상이라고 주장하는 민족은 계속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헌신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아직도 과거의 타락된 관습의 영향을 받고 있는 이 백성들에게 모세를 통해 안식일과 할례를 상징하는 형상과 표적들, 그리고 그 밖의 영적인 원리에 대한 가르침을 전해주셨다. 그러나 아직 직접적 개입이라는 특전을 하사하시지는 않았다. 율법은 그들 사이에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고, 마치 향기로운 냄새처럼 모든 사람들 속에 퍼지게 되었다. 각처의 철학자들과 입법자들은 이 율법을 사용하여 이방인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의 성품을 개선시켰다. 이들 철학자들과 입법자들은 그들의 거칠고 야만적인 잔인성을 완화시켜 안정된 평화와 우정과 상호교제를 즐기게 했다. p50
그리하여 온 세상 모든 사람들이 성부에 대한 지식을 받아들일 준비가 갖추어진 뒤 지극히 선하신 성부의 대리인, 고귀하신 주님, 거룩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친히 다시 나타나셨다. 그는 본질적으로 우리와 똑같은 본질을 가진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로마제국의 초기에 세상에 오셨다. 그리고 하나님이신 동시에 인간 人間 이시며 놀라운 이적의 창시자께서 이 세상에 거하시면서 모든 민족들에게 아버지께서 인정하실 경건을 가르치는 교사로서 활동하실 것이라는 예언에 따른 일들을 행하시고 겪으셨다. 이 예언들 속에는 그의 탄생, 새로운 교리, 놀라운 사역에 관한 특별한 사실들이 예고되었으며 또한 그의 죽음의 방법, 죽은 자들에게서의 부활, 그리고 하늘나라로의 복귀 등도 예언되었다. 선지자 다니엘은 성령의 감화를 받아 그의 나라를 예견하고서 자기가 본 환상을 인간의 능력에 맞추어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
“그 왕좌들이 무너져 내릴 때까지 내가 보매 옛적부터 계신 이가 앉아 계시는데 그분의 옷은 눈같이 희고 그분의 머리털은 순결한 양털 같으며 그분의 왕좌는 맹렬한 불꽃같고 그분의 바퀴들은 타오르는 불같더라. 불같은 시내가 그분 앞에서 흘러나오고 천천이 그분을 섬기며 만만이 그분 앞에 서 있더라. 그분께서 심판을 베푸시는데 책들이 펴져 있더라” (단 7:9-11). “내가 밤의 환상들 속에서 보는데, 보라,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하늘의 구름들과 함께 와서 옛적부터 계신 이에게 나아가니 그들이 그를 그분 앞에 가까이 데려가니라. 그분께서 그에게 통치와 영광과 왕국을 주시니 이것은 모든 백성들과 민족들과 언어들이 그를 섬기게 하려 함이라. 그의 통치는 영존하는 통치요, 없어지지 아니할 통치며 그의 왕국은 멸망하지 아니할 왕국이라” (단 7:13-14). 이 말씀들은 분명히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육신을 입으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리운바 말씀이신 하나님 God Word, 즉 우리의 구세주를 언급한 것이다. 그러나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예언적 선포의 말씀들은 이 주제에 대한 <주해서> 에 이미 수록되어 있으며, 주님에 관한 계시들은 모두 다른 저서에서 보다 논증이 가능한 형태로 개요를 간추렸으므로, 본서에서는 이 주제에 대해서 이 만큼만 언급하기로 한다. p52
제3장 고대 영감을 받은 선지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을 알고 존경했다
과거 경건한 선지자들은 예수라는 이름, 그리스도라는 명사를 존중했다. 모세는 자신에게 선포된 신탁에 (“너는 삼가 이 산에서 네게 보인 식양대로 할지니라”) 따른 전형들과 신비한 형상들을 말하면서 “그리스도” 라는 명사가 얼마나 장엄하고 찬란한 것인지 암시했다. 그는 자신이 과거에 하나님의 대제사장이라고 불렀던 분을 그리스도라고 부르고 있다 (그리스도와 메시야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의미를 가진 칭호이다). 그는 아울러 사람들 중에서 가장 탁월한 제사장에게 영광과 영예로서 “그리스도” 라는 명사를 부여했다. 그러므로 그는 분명히 “그리스도” 는 거룩한 존재임을 깨닫고 있었다. 모세는 성령의 감화로 말미암아 “예수” 라는 명사도 예견하고 있었으며, 이것에게도 두드러진 특전을 부여했다. 이 명사를 최초로 사용한 사람은 모세로서, 그는 자기의 사후 이스라엘 백성을 다스리게 될 자신의 후계자에게 하나의 전형과 상징으로서 이 이름을 주었다. 그의 후계자는 이전에는 예수 (여호수아라는 명사가 전와 轉訛 되어 유세비우스는 그를 Auses 라고 불렀다. 예수 Jesus 는 희랍어 형태이며 보다 히브리어에 가까운 것은 여호수아 Joshua 이다) 라는 이름을 갖지 않았었고 그의 부모가 지어준 이름인 “호세아” Oshea 라고 불렸으나, 모세에 의해 여호수아 (예수) 라고 불리게 되었다 (민 13:17).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모세의 뒤를 이을 유일한 후계자였으며, 모세를 통해 주어진 상징적 예배의 완성으로서 순결하고 더럽혀지지 않은 종교적 통치로서 모세의 뒤를 이어야 할 사람이었다는 점에서 구세주와 흡사한 점이 있었다. 따라서 그에게는 어느 왕관보다 더 훌륭한 이 이름이 수여된 것이다. p53
결국 모세는 우리의 구세주의 이름인 예수 그리스도라는 명칭을 두 사람에게 큰 영예로서 부여했는데, 이들 두 사람의 영광과 덕은 모든 사람을 능가했다. 그는 ‘그리스도’ 라는 이름은 대제사장에게, “예수” 라는 이름은 자기의 뒤를 이어 다스릴 사람에게 부여했다. 그러나 그 후에 활동한 선지자들도 ‘그리스도’ 를 지명하여 공표했으며, 동시에 그를 해치려는 유대인들의 음모, 그리고 그를 통해 이방인들을 부르실 것도 예언했다. 예레미야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증거했다. “우리 콧구멍의 숨 곧 주의 기름 부음 받은 이가 그들의 구덩이에 빠졌으니 그는 우리가 말하기를, 우리가 그의 그늘 밑에서 열국들 가운데 살리라, 하던 이로다” (애 4:20). 다윗도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어찌하여 이교도들이 격노하며 백성이 헛된 일을 꾀하는가? 땅의 왕들이 스스로 나서며 치리자들이 함께 의논하여 주와 그분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며 이르기를” (시 2:1-2). 그는 이 노래의 마지막에서는 스스로를 그리스도의 입장에 세우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주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이 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내게 구하라. 내가 열방을 네게 상속물로 주고 네 소유가 땅끝까지 이르리로다” (시 2:7-8). p54
히브리인들은 제사장에게 사용할 목적으로 제조된 기름을 바른 제사장들을 존경하기 위해서만 ‘그리스도’ 라는 명사를 사용한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에서는 왕들에게도 기름을 부었는데, 성령의 감화를 받은 선지자들에 의해 기름 부음을 받은 왕은 상징적 그리스도들이었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유일하고 참되신 그리스도의 주권과 만물을 지배하시는 거룩하신 말씀을 나타내는 그림자였기 때문이다. 그밖에도 선지자들 중에도 기름 부음을 받은 상징적 그리스도들이 있다는 기록이 있다. 결국 이들은 모두 참되신 그리스도, 거룩하신 하늘의 말씀, 만민을 다스리시는 유일하신 대제사장, 모든 피조물들을 지배하시는 유일한 임금, 선지자들 중에 뛰어난 성부 하나님의 선지자와 관련이 있다. 그 증거로는 과거에 기름 부음을 받았던 제사장이나 임금이나 선지자 중 그 누구도 유일하고 참되신 그리스도이신 우리의 구세주 예수만큼 거룩하고 탁월한 능력을 얻지 못했다는 것을 들 수 있다. 이들은 비록 오랜 세월동안 자기 백성들에게서 존경과 영광을 받았지만 그들의 신민들은 그들의 이름을 좇아 ‘크리스찬’ 이라고 불리지 않았으며, 또 그들의 백성들은 결코 그들에게 신적인 경의를 표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이 죽은 뒤에 한 사람도 존경했던 고인 故人 을 위해 죽으려 한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그 당시 현존하고 있던 사람과 관련하여 이 세상의 국가에서 그처럼 큰 소동이 일어난 일이 없었다. 단지 하나의 전형의 힘으로는 우리 구주께서 나타내신 실재만큼의 효과를 나타낼 수 없기 때문이다. 주님은 그 누구에게서도 제사장의 휘장이나 표를 받지 못했으며, 제사장 혈통에서 태어나지도 않았고, 근위병들의 호위 하에 제국을 얻은 것도 아니며, 또 과거의 임금들처럼 선지자를 임명하지도 않았고, 유대인들에게서 특별한 고위직을 얻은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부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것들의 전형이나 상징이 아닌 실재를 그에게 부여해 주셨다. p55
비록 주님은 그 당시에는 앞에서 언급된 영광들을 얻지 못했지만 분명히 그리스도라고 불릴 권리가 있다. 그리고 그분은 하나님의 유일하고 참된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에 온 세상을 참으로 장엄하고 거룩한 이름, 즉 “크리스찬들” Christians 이라는 이름으로 채우셨다. 주님은 이 크리스찬들 속에 들어온 사람들에게는 전형이나 비유가 아니라 숨김없는 덕과 거룩한 생명의 진리를 나누어 주신다. 주님은 물질적인 본질로 이루어진 기름으로 부음을 받은 것이 아니다. 그는 피조된 것이 아닌 성부의 신성에 참여하심에 의해 신에 어울리는 것, 즉 성령의 부음을 받으셨다. 이것은 이사야에 의해 설명되었는데, 그는 스스로를 그리스도의 위치에 두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주 YHVH 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주께서 내게 기름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사 61:1). 이사야 뿐만 아니라 다윗도 역시 주님을 가리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가 영영하며 주의 나라의 홀은 공평한 홀이니이다. 왕이 정의를 사랑하고 악을 미워하시니 그러므로 하나님 곧 왕의 하나님이 즐거움의 기름으로 왕에게 부어 왕의 동류보다 승하게 하셨나이다” (시 45:6-7). 이 시편의 첫째 절에서 다윗은 그분을 하나님이라 불렀고, 둘째 절에서는 왕의 홀이 그에게 속하는 것으로 노래했으며, 세 번째 절에서는 그를 물질적인 기름이 아닌 거룩한 즐거움의 기름으로 부음을 받은 그리스도라고 표현했다. 또한 그는 그 이전에 물질적인 기름으로 부음을 받은 상징적인 전형들을 크게 능가하는 그의 탁월함도 나타냈다. 다윗은 다른 곳에서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주 YHVH 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 주 YHVH 는 맹세하고 변치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길 너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시 110:1-4). p56
여기에서 멜기세덱이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을 언급한다. 멜기세덱은 물질적인 본질을 가진 기름으로 부음을 받지 않았으며 유대인들의 세습 혈통에 의해 제사장직을 승계하지도 않았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주이신 그리스도는 자기 자신의 반차를 좇아 그리스도와 제사장이 되신 것이지 상징이나 휘장을 받은 사람들의 반차를 좇아 그리스도와 제사장이 된 것이 아니라고 맹세하고 있다. 또한 역사적으로도 주님은 유대인들 사이에서 육체적으로 기름 부음을 받거나 제사장의 가문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새벽별이 뜨기 전에 친히 하나님에게서 나와 존재하게 된 것으로 나타내고 있다. 다시 말해서 주님은 세상이 조성되기 이전에 불멸의 제사장직을 얻었으며 영원토록 유한한 세상의 연약함에 예속되지 않는 분이시다. 그의 안에 비육체적인 거룩한 능력이 존재한다는 크고 확실한 증거는 오늘날까지 존재했던 모든 사람들 중에서 오직 그분만이 온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라는 칭호로 알려져 있으며 야만인이나 헬라인들 모두가 그에게 이 칭호를 부여하고 기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오늘날도 전 세계에 있는 그의 지지자들은 그를 임금으로 예우하고 있다. 그는 선지자 이상으로 존경을 받고 있으며 유일하고 참된 하나님의 대제사장으로 찬양을 받고 있다. 그밖에도 그는 만세 전부터 존재하셨던 선재 先在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시며 예배를 받아오신 하나님으로서 경배를 받고 있다. 그러나 가장 놀라운 사실은 우리가 말과 소리로만 그분께 헌신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의 모든 사랑을 다해 그분께 헌신하고 있으며, 따라서 자신의 생명을 보전하기보다 오히려 그분을 증거하길 원한다는 사실이다. p57
제4장 그리스도께서 모든 민족에게 전파한 신앙은 결코 예기치 않았거나 이상한 신앙이 아니었다
역사가 있기 이전에 이미 이러한 일들은 전제되었으므로 아무도 우리 주님이 육신을 입고 사람들에게 나타나신 날짜를 기준으로 하여 그분을 신참자라고 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본장에서는 그의 교리가 최근에 생겨난 새롭고 기이한 것이라거나 또는 다른 사람들이 주장한 교리와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이 점에 대해 간략하게 살펴보기로 한다. 우리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출현이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지면서 단기간 내에 하나의 새로운 국가가 갑자기 존재하게 되었다. 그 국가는 분명히 작지도 않고 연약하지도 않으며, 지구의 한쪽 끝에 자리잡지도 않았다. 그 국가는 모든 국가 중에서 가장 인구가 많고 가장 경건한 국가이며, 따라서 그만큼 불멸하는 무적의 국가였다. 왜냐하면 그 나라는 하나님의 능력의 도움을 받아왔기 때문이다. 불가해한 지혜가 정해놓은 시간에 등장한 이 나라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찬양을 받는 나라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영의 눈으로 이 나라가 일어날 것을 예견하고 크게 놀라 다음과 같이 외쳤다. “이러한 일을 들은 자가 누구이며 이러한 일을 본 자가 누구이요, 나라가 어찌 하루에 생기겠으며 민족이 어찌 순식간에 나겠느냐?” (사 66:8, 호겐 : 그리스도의 왕국과, 기독교가 모든 이방에 널리 퍼져 크리스찬들이 증가하는 놀라운 기적을 묘사). 또 그는 장차 소개될 이름을 암시하기도 했다. “너는 주 YHVH 의 입으로 정하실 새 이름으로 일컬음이 될 것이라” (사 62:2). p58
진실로 우리는 새로운 백성이며, 이 “크리스찬” 이라는 새 이름은 근래에야 모든 민족들에게 알려졌다. 그러나 이 백성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는 경건한 관습과 보행과 대화와 경건의 원리들은 최근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류가 처음 생겨났을 때부터 경건한 사람들의 양심 속에 세워 놓으셨던 것이다. 이것을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증명해보려 한다. 히브리 민족이 새로운 민족이 아니며 모든 민족들이 그 민족의 전통을 존경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 민족의 저서나 문학은 숫적으로 희귀하고 극소수이지만 경건과 의와 모든 덕에 있어서는 탁월한 옛사람들과 관련되어 있다. 그리고 노아의 홍수 이전에도 덕이 높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홍수 이후에 살았던 노아의 자손들 중에서 아브라함은 히브리인들이 자기 민족의 창시자이며 선조로 존경하는 인물이다. 만일 아브라함에게서부터 거꾸로 최초의 인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의의 증거를 가진 사람들을 이름만이 아닌 실질적인 크리스찬이라고 단언한다 해도 그다지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크리스찬이란 그리스도의 교리와 지식을 받아 온유하고 의로우며 인내하며 고결하고 강건하며 유일하고 참되고 높으신 하나님을 향한 신앙심을 고백하는 사람을 말하기 때문이다. p59
그들도 우리 못지않게 열심히 이러한 성품들을 배양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할례를 소중히 여기지 않았고 안식일을 지키지 않았으며, 우리도 역시 그들처럼 행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모세가 상징과 전형으로서 삼가라고 전해준 어떤 음식물을 삼가지 않으며 또 어떤 명령들은 소중히 여기지 않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크리스찬에게 속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분명히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고, 이삭과 함께 사귀시고, 야곱에게 말씀하셨으며, 모세와 그 후의 선지자들과 교제하신 하나님의 그리스도가 이미 보여졌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우리는 이 경건한 사람들이 그리스도라는 명칭으로 존경을 받았다는 사실을 다음과 같은 말씀을 통해 알 수 있다. “이르시기를 나의 기름 부은 자를 만지지 말며 나의 선지자를 상하지 말라” (시 105:15). 따라서 최초이며 최고 最古 의 신앙, 아브라함과 관련된 경건한 사람들이 지녔던 신앙은 최근에 그리스도의 교리 속에서 우리에게 전파된 바로 그 신앙이었다고 가정할 수 있을 것이다. 아브라함은 할례를 행하라는 명령을 받기 이전에 이미 믿음으로 의롭다는 증거를 받았다. “아브라함이 주 YHVH 를 믿으니 주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창 15:6). 참으로 하나님은 할례를 행하기 이전에 이미 이 성품을 가지고 있던 아브라함에게 나타나 그와 교제하셨다. 장래 모든 사람들이 이와 비슷한 방법으로 의롭다함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분은 하나님의 말씀, 즉 그리스도이셨다. p60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창 22:18)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를 인하여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 (창 18:18)
우리는 이것이 우리 안에서 성취된 것에 의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아브라함은 실제로 자기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말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의해 의롭다함을 얻었다. 그리고 그는 조상들이 섬겨오던 미신과 과거의 잘못된 생활을 버린 뒤 유일하신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고백하고 고결한 행위로 하나님을 섬겼다. 그는 후일 모세의 율법에서 명령된 것과 같은 의식으로 하나님을 섬긴 것이 아니다. 그리하여 그를 통해서 이 세상 모든 족속과 민족들이 복을 받게 될 것이라고 선포되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좇은 신앙의 길은 지금껏 크리스찬들에 의해, 말보다는 행위에 의해 보다 효과적으로 닦여온 것으로 나타난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를 좇는 우리와 과거에 살았던 경건한 사람들에게 동일한 생활과 행동의 원리, 동일한 경건의 길이 적용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그리스도의 가르침 속에서 우리에게 전해진 종교는 결코 낯선 것이 아니며 새로운 교리가 아님이 분명하다. 그것은 최초의 유일한 참 종교이다. p61
제5장 구세주가 인간사회에 나타나신 시대
앞에서는 <교회사> 에 필요한 서론을 다루었다. 본장에서는 진리를 서술하는데 있어서 말씀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과 계시되어진 구세주이시며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돕고 함께 일해 주시기를 기원하는 바이다. 아우구스투스 Augustus (아구스도) 황제의 재위 42년, 톨레미 왕조의 종식을 가져온 이집트의 정복 및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가 죽은지 28년 되던 해에 우리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는 예언된대로 유대 땅 베들레헴에 탄생하셨다. 그 해에 최초의 인구조사가 실시되었고, 퀴리니우스 Quirinius 가 시리아의 총독으로 있었다 (퀴리니우스는 누가복음에 언급된 구레뇨 Cyrenius 와 동일인이다. 전자는 로마식 명칭이고 후자는 희랍어에서 전이된 라틴어 명칭이다). 유명한 히브리 역사가 플라비우스 요세푸스 Flavius Josephus 도 이 인구조사를 언급한 바 있다 (호겐 : 유대고대사 제18권 1:1). 요세푸스는 거의 같은 시기에 일어난 갈릴리인들의 분파에 관한 기사도 언급했으며, 누가도 사도행전에서 이것을 언급했다. “그 후 조세 등록할 때에 갈릴리의 유다가 일어나 많은 백성을 빼내어 자기를 따르게 하였으나 그도 망하매 그에게 순종하던 자들이 다 흩어졌느니라” (행 5:37). 이것은 요세푸스의 <유대고대사 Antiquities> 제18권의 기록과 일치한다. “원로원에 소속되어 여러 가지 직책을 맡았던 퀴리니우스는 승진을 거듭했으며 마침내 황제는 그를 집정관에 임명했다. 그는 작은 군대를 이끌고 시리아로 왔으며, 그들의 재산평가를 위해 백성들에게 사법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고올 Gaulonite 사람 유다 Judas 가 가말라 Gamala 시에서 일어나 바리새인 사두쿠스 Sadducus 와 함께 백성들의 폭동을 주도했다. 그는 인구조사가 분명히 그들을 노예로 삼기 위한 것이라고 말하면서 백성들에게 자유를 수호하라고 권했다” 요세푸스는 <유대전쟁사 The History of the Jewish War> 제2권에서도 역시 이 유다에 대해 언급했다. “이 무렵에 갈릴리 사람 유다 Judas 가 주민들로 하여금 반역하도록 선동하면서 그들을 꾸짖어 말하길 그들은 조공을 바치는 것을 용납하고 있으며 하나님을 주로 섬기고 있으면서도 인간들이 그 주권을 찬탈하도록 허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p63
제6장 예언되었던대로 주님의 시대에는 세습적으로 유대민족을 다스리던 유대인 통치자가 끊어지고 최초로 외국인 헤롯이 그들을 다스렸다
최초의 외국인 임금인 헤롯이 유대 백성을 통치하게 됨에 따라 과거 모세의 예언이 성취되었다.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길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창 49:10). 이것은 모든 국가들의 기대하는 바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은 모세로부터 아우구스투스 Augustus 의 통치 시대에 이르기까지 계속 동족 통치자의 다스림을 받았으므로 이 예언은 아직 성취되지 않았다. 헤롯은 아우구스투스 밑에서 유대인들을 다스린 최초의 외국인이었다. 요세푸스가 기록한 바에 의하면 헤롯의 부친은 이두매인이었고 모친은 아라비아인이었다. 그러나 역시 유명한 작가인 아프리카누스 Africanus 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
“그에 대해 보다 정확하게 저술한 사람들은 그가 안티파테르 Antipater 의 아들이었고, 안티파테르는 아스칼론에 있는 아폴로 신전의 사제인 헤롯 Herod 의 아들이라고 말했다. 이 안티파테르는 어렸을 때에 이두매인 강도들에게 사로잡혔는데 가난한 그의 아버지는 그의 몸값을 지불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는 이두매인들과 함께 살았다. 그리하여 그는 이두매인들의 관습 속에서 자라났으며, 후일 유대의 대제사장 힐카누스 Hyrcanus 의 돌봄을 받았다. 그의 아들이 바로 우리 주님의 시대에 활약한 헤롯이다. 이처럼 유대인들의 통치권이 이러한 인물에게 넘어갔기 때문에 국가들은 예언의 성취를 기대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헤롯의 통치를 계기로 모세의 시대로부터 이어온 통치자들과 군왕들의 왕위계승이 끝이 났기 때문이다. 포로가 되어 바빌론으로 끌려가기 전 유대인들은 사울과 다윗을 왕으로 섬겼고, 이들 왕이 등장하기 전에는 사사라고 불리는 치안판사의 다스림을 받았다. 사사들은 모세와 그의 후계자 여호수아의 시대가 끝난 후 등장한 인물들이었다. 바빌론에서의 포로생활을 마치고 귀환한 뒤에도 그들은 과두 寡頭 정치와 귀족정치의 형태를 그대로 유지했다. 그리하여 로마의 지방총독인 폼페이우스 장군이 무력으로 예루살렘을 함락시켜 거룩한 곳을 더럽히고 성전의 지성소에 들어가기까지 대제사장들이 국사를 관리하고 있었다. 그 당시 정통적 왕위계승에 의한 왕이면서 동시에 대제사장직을 맡고 있었던 아리스토불루스 Aristobulus 는 자녀들과 함께 로마로 압송되었으며, 대제사장직은 그의 형 힐카누스에게 넘어갔다. 이 사건이 있는 후로 유대인들은 로마인들에게 조공을 바쳐야만 했다. p64
그러나 세습에 의해 임명된 최후의 대제사장인 힐카누스는 얼마 안 되어 파르티아 인들에게 잡힌바 되고 말았고,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로마 원로원과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헤롯에게 유대의 통치권을 수여했다. 이 무렵 그리스도의 강림이 임박하여 예언에 선포된 대로 민족들이 기대해 온 구원이 이루어지고 이방인들도 구원에의 초대를 받게 되었다. 또 이 시대로부터 유다의 왕들과 통치자들, 즉 유대인의 국가는 끊어졌으며, 옛날부터 혈연관계에 따라 계승되어온 제사장 제도도 혼란을 겪게 되었다. 요세푸스도 이것을 증거하고 있다. 그의 증언에 따르면 로마인에 의해 유대인의 왕으로 임명된 헤롯은 고대로부터 이어온 제사장의 혈통을 지닌 사람을 제사장으로 임명하지 않고 미천한 사람들에게 그 직책을 맡겼다. 그의 아들 아켈라우스도 대제사장을 임명하는 데 있어서 아버지 헤롯과 비슷한 절차를 밟았다. 그리고 그 후 유대인들의 통치권을 자기들의 수중에 넣은 로마인들도 역시 유사한 조처를 취했다. 요세푸스는 헤롯이 대제사장의 거룩한 제복을 감추고 봉인해두어 대제사장들이 마음대로 그것을 입지 못하게 했다고 말하고 있다. 그의 아들 아켈라우스와 로마인들도 헤롯과 동일하게 행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등장과 더불어 종식된 또 다른 예언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언급한 것으로 충분하리라고 생각된다. 다니엘서는 이러한 일들이 종식된 후에 유대인들 중에서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완전히 끊어져 없어질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런데 이것은 분명히 구주가 탄생하신 때에 이루어졌음이 증명된다” p65
제7장 왜 그리스도의 족보에 대한 복음서의 기록이 일치하지 않는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기록된 그리스도의 족보가 각각 다르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 복음서의 진술이 전반적으로 일치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진리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모든 신자들이 이 기록을 설명하기 위해 연구하고 조사해 왔으므로 우리도 또한 우리에게 전해내려온 기사를 추가할 가능성이 있다. 우리는 복음서에 기록된 족보들의 일치성에 관해 아프리카누스 Africanus 가 아리스티데스 Aristides 에게 보낸 서신 속에 기록되어 전해내려오는 이야기를 참조하고 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의 의견들은 부자연스럽고 거짓된 것이라고 배격한 뒤 자기가 친히 확인한 기사를 제시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이스라엘에서는 한 세대의 집안의 명칭을 혈통을 따르거나 법에 따라 정하는 관습이 있었다. 혈통을 따르는 것은 합법적인 자손의 계승에 의한 것이며, 법에 따른느 것은 자식이 없이 죽은 형제의 혈통을 이어주기 위해서 다른 형제가 죽은 형제의 이름으로 자녀들을 양육하는 것을 말한다. 당시에는 아직 부활의 소망이 분명히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이미 죽은 사람의 이름을 영속시키려는 의도에서 일종의 육체적 부활에 의해 반드시 있어야 할 약속을 모방했다. 따라서 이 족보에는 본래 서로 부자관계인 사람들이 삽입되기도 하고, 또 혈통적으로는 다른 사람의 자녀이지만 법적으로 다른 가문의 이름을 취한 사람들이 삽입되었다. 즉 진정한 조상과 조상으로 간주된 조상들이 함께 기록되었다. 그러므로 복음서에 기록된 족보는 혈통을 따른 것이거나 또는 법에 따른 족보로서 결코 허위 기록이 아니다. 예를 들어 솔로몬의 후예와 나단의 후예는 자식을 낳지 못하고 죽은 인물의 자리에 대신 입적하거나 재혼하여 죽은 자의 자손을 양육함으로서 서로 뒤섞였으므로 동일한 인물들이 어떤 면에서는 솔로몬의 혈통에 속할 수도 있고, 어떤 면에서는 나단의 혈통에 속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누가복음과 마태복음의 족보는 양자가 모두 옳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복잡하게도 그것은 요셉의 진정한 조상과 입적된 조상을 수록하고 있기는 하지만 지극히 정확한 족보라 할 수 있다. 이것을 분명히 밝히기 위해 각 세대 별로 서술하려 한다. p67
마태복음의 족보에 의하면 다윗에서 시작하여 솔로몬을 거쳐 맛단에 이르는데, 맛단은 요셉의 아버지 야곱을 낳은 인물로서 거꾸로 세어올라가면 마지막에서 세 번째 세대가 된다. 그러나 누가복음의 족보를 따르면 다윗의 아들 나단에서 시작하여 멜기에 이르며, 멜기의 아들은 요셉의 아버지인 헬리의 아버지가 됨으로, 멜기가 끝에서부터 세 번째 세대가 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적하고 있는 대상인 요셉에 관해, 우리는 어째서 솔로몬의 혈통인 야곱과 나단의 혈통인 헬리 Eli 가 그의 부친으로 기록되었는지 설명해야 한다. 그리고 야곱과 헬리가 어찌 형제간이 될 수 있는지, 더 나아가 이들의 부친인 맛단과 멜기가 각기 다른 가문의 사람임에도 어떻게 요셉의 할아버지가 될 수 있는지 증명해야 한다. 맛단과 멜기는 연이어 동일한 여인과 결혼하여 자녀를 낳았다. 당시에는 이혼을 하거나 남편과 사별한 과부의 재혼을 금하지 않았으므로 이들의 자녀는 한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형제간이 되었다. 그리하여 솔로몬의 혈통인 맛단이 먼저 에스타 Estha (이것은 전승에 의해 전해 내려오는 이름이다) 와 결혼하여 야곱을 낳았다. 그러나 맛단이 죽은 뒤, 맛단과 같은 지파에 속했으나 다른 가문 출신이었던 나단의 후손 멜기가 다시 맛단의 아내와 결혼하여 아들 헬리 Eli 를 낳았다. 이리하여 한 어머니에게서 각기 다른 가문의 아들인 야곱과 헬리가 탄생했다. 이들 형제 중에서 헬리가 죽었으므로 야곱은 그의 미망인과 결혼하여 요셉의 아버지가 되었다. 요셉은 혈통적으로는 야곱의 아들이었다. 따라서 ‘야곱은 요셉을 낳았다’ 고 기록되었다. 그러나 법적으로 야곱은 헬리의 동생이었기 때문에 요셉은 헬리의 자손으로 양육된 헬리의 아들이었다. 그런고로 마태복음의 ‘야곱은 요셉을 낳았다’ 고 한 족보도 틀린 것이 아니다. p68
그런데 누가는 ‘사람들의 아는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 요셉의 이상은 헬리요, 그 이상은 멜기요’ 라고 기록했다. 그들의 법적인 족보를 분명하게 표현하는 일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그는 ‘그가.... 낳고’ 라는 표현을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 그는 전체 세대를 거꾸로 거슬러 하나님에게까지 올라가고 있다. 이것은 증명이 불가능한 것이거나 무용한 추측이 아니다. 주님의 육체의 친척들의 훌륭한 뿌리를 나타내 보이거나, 혹은 단지 사실을 나타내거나 그들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전해주기 때문이다 : 즉, 이두매인 강도들은 팔레스틴의 성읍 아스칼론을 공격하여 안티파테르를 사로잡았고 성벽 가까이에 건설되어 있던 아폴로 신전에서 다른 물건들도 노략해갔다. 안티파테르는 그 신전의 사제였던 헤롯의 아들이었다. 그러나 이 사제는 아들의 몸값을 지불할 능력이 없었다. 그리하여 안티파테르는 이두매인들의 관습 속에서 성장했으며, 나중에는 유대의 대제사장 힐카누스의 총애를 받았다. 그 후 그는 힐카누스의 사절로 폼페이에게 파견되었다. 그리고 아우인 아리스토불루스의 침입을 받고 있던 왕국을 힐카누스에게 되찾아주었으므로 안티파테르는 팔레스틴의 징세관으로 임명되는 행운을 잡았다. p68
그러나 안티파테르는 그의 행운을 시기하는 사람들에 의해 살해되었고 그의 아들 헤롯이 그의 뒤를 이었다. 그는 후일 안토니와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원로원의 칙령에 의해 유대인의 왕이 되었다. 그의 아들로는 헤롯과 다른 분봉왕들이 있었다. 이 유대인들의 이야기는 헬라인들의 이야기와 일치하고 있다. 그 당시까지 히브리인들과 고대 개종자들, 예를 들면 암몬사람 아키오르 Achior 와 모압여인 룻, 그리고 이집트에서 떠나올 때에 이스라엘인들과 뒤섞인 사람들의 족보는 대체로 문서기록보관소에 보존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인들의 혈통이 헤롯에게는 아무 유익을 주지 못했으므로 그는 자신의 비천한 혈통에 대한 열등감 때문에 자기 가문에 대한 기록을 불에 태워버렸다. 그는 아무도 공문서에서 족장들이나 개종자들, 또는 타국인들의 혈통을 찾아낼 수 없게 된다면 자신의 혈통이 고귀한 것처럼 보이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이름들을 기억하거나 또는 필사하여 개인적으로 기록을 소유하고 있었던 사려깊은 극소수의 사람들은 자신의 고귀한 혈통을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랑으로 여겼다. 이들 중에서 위에서 언급된 사람들은 우리 주님의 가문과 인척이라는 이유로 desposyni 라고 불렸다 (일반적으로 desposynos 라는 단어는 주인에게 예속된 자라는 의미를 지닌다. 본서에서는 초대교회에서 사용하던 의미를 그대로 적용하여 육체적으로 주님의 친척들을 지칭하는 단어이다). 이들은 유대의 나자라 Nazara 와 코카바 Cochaba 마을로부터 여러 지역으로 가서 공문서에서 발췌한바 앞에서 말한 족보를 가능한 한 충실히 설명했다. 그러므로 사태가 실제로 이러했는지 아니면 달랐는지, 나를 비롯한 모든 불완전한 재판관으로서는 다만 아무도 보다 명백한 설명을 발견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이 주제에 관한 논의는 이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비록 그것을 뒷받침할 증거가 없더라도 우리는 이것보다 더 훌륭하고 진리에 가까운 것을 개진할 수 없기 때문이다” p69
아프리카누스는 이 서신의 마지막에 다음과 같이 덧붙여 기록했다. “솔로몬의 후손인 맛단은 야곱을 낳았고, 맛단이 죽은 뒤 나단의 혈통인 멜기가 맛단의 미망인과 결혼하여 헬리를 낳았다. 그러므로 헬리와 야곱은 한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형제간이다. 그런데 헬리가 자식을 남기지 못하고 죽었으므로 야곱은 아이를 낳아 헬리의 호적에 입적시켰으니 그가 곧 요셉이다. 그러므로 요셉은 본래는 야곱의 소생이지만 법적으로는 헬리의 아들이다. 따라서 요셉은 이들 두 사람의 아들이 된다” 이제까지 요셉의 혈통을 추적해보았다. 그런데 마리아도 역시 같은 지파의 여인임을 증명할 수 있다. 왜냐하면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다른 지파와의 결혼은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모세는 같은 혈족, 같은 가문 안에서 서로 결혼하라고 명령함으로서 한 지파의 기업이 다른 지파에게로 넘어가지 못하게 했다. p70
제8장 신생아들에게 행한 헤롯의 잔인한 행위 및 그의 비참한 종말
그리스도는 예언에 따라 계시된 시대에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다. 이 소식을 들은 헤롯은 크게 놀랐다. 별을 보고 그 별을 따라 하나님이신 아기를 경배하려는 열심을 품고 오랫동안 여행해 온 동방의 박사들이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고 물었을 때, 헤롯은 자기의 왕국이 위험하게 되지 않을까 크게 염려했다. 그리하여 그는 나라의 율법박사들에게 그리스도가 어디서 태어나겠느냐고 물었으며, 그곳이 베들레헴이 될 것이라고 선포한 미가의 예언을 확인했다. 그는 동방박사들에게서 확인한 시간을 기준으로 하여 계산하여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역에 있는 두 살 이하의 남자 아기들을 모두 죽임으로서 예수도 죽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한 천사가 아기의 부모에게 나타나 바야흐로 일어날 일을 말해주어 이집트로 피신하게 했으므로 아기는 이 함정을 피할 수 있었다. 이 사실은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다. 그리스도와 아기들에게 행한 잔인하고 방약무인한 행위로 인해 헤롯이 어떤 보응을 받았는지도 살펴볼 가치가 있다. 하나님의 공의는 한시도 지체함이 없이 그에게 임했다 : 그가 죽기 전에 이미 죽은 뒤에 그에게 임할 형벌의 서막이 전개되었다. 그의 재위 기간 중에 있었던 연속적인 가정의 불상사들, 아내와 자녀의 학살 및 가장 가까운 친척들의 학살로 말미암아 그의 통치의 기쁨이 얼마나 훼손되었는지는 여기에서 이야기할 수 없다. 온갖 비극적 표현들을 무색케 하는 이 특별한 사건들은 요세푸스가 기록한 역사 속에 상세히 다루어져 있다. 그러나 죽을 때까지 계속하여 그를 채찍질한 하나님의 징계를 알기 위해서는 요세푸스가 <유대고대사 Antiquities> 제17권에 기록한 그의 종말에 귀를 기울여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p71
“하나님께서 헤롯이 범한 죄로 인해 그에게 가하신 형벌인 질병은 나날이 악화되었다. 그의 육체가 내면에서 쇠진해감에 따라 계속하여 미열이 발생했다. 그리고 그는 끊임없이 음식을 먹으려 했는데 그 욕망은 누구도 꺾을 수 없었다. 게다가 창자에 종기가 생겼는데 특히 결장의 고통이 심했다. 그의 두 발은 축축한 체액으로 덮여 있었다. 심장 주변에도 비슷한 증세가 있었으며, 썩은 하복부에는 벌레가 생겼다. 그리고 호흡이 빨라지고 악취가 났기 때문에 호흡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또한 그의 온 몸에 극복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한 경련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러므로 거룩한 일들을 알고, 지혜가 있어 그런 일들을 선포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왕의 큰 불경함 때문에 이런 형벌을 내리셨다고 말했다”
이 기사는 요세푸스가 <유대고대사> 에 기록한 내용이다. 그는 그의 <역사서> (유대전쟁사) 제2권에서도 헤롯에 관해 거의 동일한 내용을 기록했다. “그의 질병은 온 몸에 퍼져 여러 가지 고통으로 그의 육체를 괴롭혔다. 그의 열병은 더욱 치열해졌고, 온몸에 퍼진 옴은 참을 수 없을 정도였고, 하복부의 고통도 계속되었다. 그의 두 발은 수종으로 고생하는 사람의 발처럼 혹이 생겨 있었다. 그의 후두 venticle 에서 염증이 생기고 썩어 벌레가 생겼다. 그밖에도 호흡이 거칠어 곤란했고 사지에 경련이 일곤 했다. 하나님의 행위를 의뢰하는 사람들은 이것을 형벌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는 이처럼 많은 고통과 싸우면서도 생명에 집착해 회복의 희망을 버리지 않고 계속 새로운 치료법을 강구했다. 그리하여 그는 요단강 건너편 갈리르호에 Callirhoe 근처에 있는 온천을 이용했다. 이 온천은 사해로 흘러들어가지만, 물맛이 좋아 마실 수 있었다. 이곳의 의사들은 그의 고통을 완화시키기 위해 몸에 연고를 발라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으므로 그는 기름을 가득 채운 목욕통 안에 들어가 미지근한 기름으로 목욕을 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의 시력이 약해지기 시작했고 온 몸은 마치 죽은 사람처럼 되었다. 이것을 본 하인들이 놀라서 소리를 질렀으며, 그 소리에 그는 의식을 회복했다. p72
이 일이 있은 후 그는 병의 치료를 포기했다. 그는 군사들에게 약 50드라크마를 나누어주며, 또 그의 장군들과 친구들에게도 상당한 금액을 나누어주라고 명령했다. 돌아오는 길에 그는 여리고에 이르렀다. 절망과 죽음의 위협에 사로잡힌 그는 이곳에서 대단히 사악한 대관식을 행했다. 그는 유대 전역의 귀족들을 불러모아 전차 경기장에 가두었다. 그리고나서 사람을 보내 자기의 누이 살로메와 그의 남편 알렉산더를 불러왔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죽으면 유대인들은 기뻐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대들이 내 명령대로만 행해준다면 사람들은 나의 죽음을 슬퍼해주고 훌륭한 장례식을 거행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내가 숨을 거두면 곧 지금 군사들이 가두어 지키고 있는 이 사람들을 빨리 죽이라. 그러면 온 유대와 모든 집들은 자기들의 의도와는 달리 내 죽음으로 인해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배고픔과 발작적인 기침으로 괴로워하던 그는 고통에 지쳐서 자기의 운명을 생각했다. 그는 사과를 하나 손에 들고는 칼을 가져오라고 명했다. 그는 항상 사과를 칼로 베어먹곤 했다. 그리고나서는 혹시 그곳에 자기를 방해하는 사람이 있을까 염려하여 주위를 둘러보면서 마치 자기 자신을 찌르려는 듯이 오른팔을 쳐들었다” 요세푸스는 여기에 덧붙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는 죽기 전에 또 한 명의 아들을 살해했다. 이것으로 그는 세 명의 아들을 살해했다. 이 일이 있은 후 곧 그는 큰 고통 중에서 숨을 거두었다” 헤롯의 종말은 이러했다. 그는 주님을 제거하려는 의도에서 베들레헴의 아기들을 죽이는 죄를 범했으므로 그 죄에 합당한 형벌을 받은 것이다. 헤롯이 죽은 후 천사가 이집트에 피난해 있는 요셉의 꿈에 나타나 아기의 목숨을 찾던 자가 죽었으니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돌아가라고 지시했다. 복음서 기자는 이 기사에 다음과 같은 말을 곁들였다. “그러나 아켈라오가 그 부친 헤롯을 이어 유대의 임금됨을 듣고 거기로 가기를 무서워하더니 꿈에 지시하심을 받아 갈릴리 지방으로 떠나니라” (마 2:22). p74
제9장 빌라도의 시대
요세푸스는 헤롯의 사후 그의 뒤를 이은 아켈라우스 Archelaus (아켈라오) 의 통치에 관한 기사에도 동의한다. 아켈라우스가 부친 헤롯의 유언과 아우구스투스 Augustus 황제의 확인에 의해 유대왕국을 통치하게 되었으나, 10년 후 왕국의 통치권을 상실했고 그의 형제인 빌립과 헤롯 2세는 리사니아스 Lysanias 와 함께 4개의 왕국을 통치했다. 요세푸스는 <고대사 Antiquities> 제18권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57년 동안 황위에 있던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된 티베리우스 Tiberius (티베리오) 의 통치 12년에 본디오 빌라도 Pontius Pilate 는 유대의 총독으로 임명되어 티베리우스 황제가 사망할 때까지 10년간 그곳을 다스렸다” 근래 주님을 대적하는 거짓된 조처들을 유포시키고 있는 사람들의 위선과 거짓은 분명히 증명된다. 이 사실에서 그들이 산정한 연대가 거짓임이 증명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티베리우스의 즉위 7년에 그러한 일이 발생했다고 말하고 있으나, 실제로 그 당시에는 아직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임명되지 않았었다. 요세푸스가 <고대사> 에 기록한 바에 의하면 빌라도는 티베리우스 황제의 통치 12년에 유대의 총독으로 임명되었다고 한다. p75
제10장 그리스도께서 복음을 전파하시던 시기에 활동한 대제사장들
복음서에 의하면 티베리우스 황제가 즉위한지 15년 되던 해이며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있은지 4년이 되는 해, 헤롯, 리사니아스 Lysanias (루사니아), 빌립이 분봉왕으로 유대의 나머지 지방을 통치하고 있을 때에 30세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는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하셨다. 성경에는 주님의 공생애는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던 시대에 이루어졌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따라서 주님의 사역이 그들이 대제사장으로 있던 시기에 종식되었음을 암시해 준다. 왜냐하면 안나스의 임기부터 시작하여 가야바의 임기까지의 기간은 4년이 못되기 때문이다. 그 시대 이후로 율법의 의식들은 폐지되었고, 아울러 제사장의 특권, 즉 평생 동안 제사장으로 봉사하며 대를 이어 물려받는 제도도 폐지되었다. 로마 총독의 통치 하에서 때에 따라 여러 인물들이 대제사장으로 임명되었는데, 그들의 임기는 1년을 넘기지 못했다. 요세푸스는 안나스로부터 가야바에 이르기까지 4명의 대제사장이 있었다고 서술한다. 그는 <고대사> 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발레리우스 그라투스 Valerius Gratus 는 안나스의 대제사장직을 박탈하여 밥피 Baphi 의 아들 이스마엘 Ishmael 에게 넘겨주었다. 그러나 얼마 후 다시 그를 제거하고 전에 대제사장이었던 안나스의 아들 엘리아자르 Eleazar 를 임명했다. 그러나 1년 후 또다시 그를 해임하고 카미투스 Camithus 의 아들 시몬 Simon 을 대제사장으로 임명했으나, 그 역시 1년이 못 되어 가야바 Caiaphas 라는 성을 가진 요세푸스에게 직책을 양도했다” 그러므로 주님의 사역기간이 온전한 4년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 증명된다. 안나스에서부터 가야바에 이르기까지 4명의 대제사장이 각기 1년씩 그 직책을 수행했는데 복음서의 기록에 의하면 주님의 고난이 끝나던 해의 대제사장은 가야바였다. 이 기록과 지금 관찰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사역 시기는 일치하는 것으로 증명된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공생애를 시작하신 후 얼마 안 되어 12사람을 택하셨으며, 그들의 지위를 다른 제자들보다 높여 사도들이라고 부르셨다. 또 이들 외에도 칠십문도를 택하셔서 둘씩 짝을 지어 주님이 친히 가고자 하는 모든 도시와 성읍으로 앞서 보내시기도 했다. p76
제11장 세례 요한과 그리스도에 관한 증언
이 일이 있기 얼마 전 세례 요한이 헤롯 3세 (헤롯 안디바 Antipas) 에 의해 참수되었다. 이 사실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으며, 요세푸스에 의해 확인되었다. 요세푸스는 헤로디아 Herodias 의 이름을 거론했으며, 헤롯의 형제 빌립의 아내였던 그녀가 헤롯과 결혼하게 된 상황을 분명히 기록했다. 헤롯 안디바 Antipas 는 먼저 합법적으로 결혼한 아내와 이혼했다. 그녀는 아라비아 페트레아 Arabia Petraea 의 왕 아레타스 Aretas 의 딸이었다. 그는 남편이 살아있는데도 헤로디아를 강탈했고, 그로 인해 세례 요한까지 살해했다. 그리고 그는 아레타스의 딸에게 모욕을 주었기 때문에 아레타스와 전쟁을 하게 되었다. 이 전쟁에서 헤롯의 군대는 완전히 패했는데 그가 이렇게 참패한 것은 요한을 살해한 죄 때문이라고 요세푸스는 말한다. 요세푸스는 이 기록 속에서 요한은 지극히 의로운 사람이었다고 서술했으며, 요한에 대한 복음서의 기록이 진실임을 증명하고 있다. 결국 헤롯은 헤로디아 때문에 왕국을 잃고 그녀와 함께 추방되어 골 Gaul 지방에 있는 비엔나 Vienna 에 유배되었다. 요세푸스는 이러한 사실들을 <고대사> 제18권에 기록했는데, 그는 여기에서 요한에 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
“일부 유대인들은 헤롯의 군대는 하나님께서 멸망시켰다고 여겼다. 하나님은 이처럼 공의롭게 세례 요한의 원수를 갚으셨다. 헤롯은 선한 사람으로서 유대인들에게 덕을 실천하고 의와 경건을 좇아 세례를 받으라고 권면한 요한을 살해했다. 이 세례는 사소한 죄들을 피하려는 목적이 아니다. 마음이 먼저 의로 말미암아 정결케 되면 육체도 정결케 된다는 목적으로 전해진 것처럼 보인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설교를 듣기를 기뻐해 몰려들었으므로, 헤롯은 혹시 그가 사람들을 선동해 반란을 일으키지나 않을까 염려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요한이 제안하는 것이라면 무슨 일이라도 할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헤롯은 혁명이 일어나 어려움에 봉착한 뒤에 후회하기보다 차라리 요한이 어떤 개변을 시도하기 전에 대책을 세워 그를 없애는 것이 좋으리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헤롯의 의심 때문에 요한은 마케루스 Machaerus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그곳에서 죽임을 당했다” 요세푸스는 역시 같은 저서에서 그리스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거의 같은 시기에 예수라는 사람이 활동했다. 그를 사람이라고 불러도 좋을지 모르겠으나 어쨌든 그는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이었다. 그는 참으로 특별한 행동을 했으며, 사람들을 가르쳤는데 그들은 기쁨으로 그의 가르침을 받아들였다. 그는 많은 유대인들과 헬라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 사람이 그리스도였다. 빌라도는 유대 주요 인사들의 고발을 받아 그를 십자가에 처형했으나 그를 따르던 사람들은 그 후에도 여전히 그를 사랑했다. 왜냐하면 그는 거룩한 선지자들이 예언한대로 사흘 만에 살아났기 때문이다. 선지자들은 그에 관해 예언하길 이 일을 비롯해 수많은 놀라운 일이 있을 것을 선포했다. 그의 이름을 따서 크리스찬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지금까지도 계속 존속하고 있다” 히브리 출신의 역사가가 세례 요한과 구세주에 관해 이렇게 증언했으므로 이들 두 분을 대적하는 조처를 강구했던 사람들은 철면피라는 비난을 면치 못할 것이다. p78
요세푸스의 예수 그리스도와 세례 요한에 대한 언급
고대사 p224, 246 http://blog.naver.com/oyashiki/100189684685
전쟁사 p409-410, 412-413, 414-416 http://blog.naver.com/oyashiki/100185190662
제12장 주님의 제자들
주님의 제자들의 이름은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으므로 누구나 분명히 알고 있다. 그러나 칠십문도의 목록은 어디에도 제시되어 있지 않다. 바나바 Barnabas 는 칠십문도 중 한 사람이었다고 하는데, 그에 대해서는 사도행전과 갈라디아서에 분명한 기록이 있다. 사도 바울과 함께 고린도교회에 편지를 보낸 소스데네 Sosthenes 도 칠십문도 중 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클레멘트는 <Hypotyposes> 또는 <강요 Institutions> 제5권에서 게바 Cephas 를 거론했다. 사도 바울도 “게바가 안티오크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할 일이 있기로 내가 그를 면책했노라” 라고 하면서 그를 언급했다. 클레멘트는 사도 베드로와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이 칠십문도 중에 있었으며, 가룟 유다를 대신해 사도의 일원이 된 맛디아 및 그와 함께 사도의 후보로 올랐던 사람도 칠십문도라고 부를 가치가 있다고 언급했다. 그리고 다대오 Thaddeus 도 칠십문도였다고 하는데, 앞으로 그에 관해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를 기록하겠다. 그런데 사도 바울의 증언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주님에게는 70명 이상의 제자들이 있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묻히셨다가 성경 기록대로 셋째 날에 다시 살아나시고, 게바에게 보이시고 다음에 열두 제자에게 보이셨다는 것이라. 그 뒤에 그분께서 오백여 형제에게 한 번에 보이셨는데 그 중의 대다수는 지금까지 살아있고 어떤 사람들은 잠들었느니라. 그 뒤에 그분께서 야고보 (그는 주님의 제자인 동시에 주님의 형제였다) 에게 보이시고 다음에 모든 사도에게 보이셨으며, 맨 마지막에는 만삭되지 못하여 태어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고전 15:4-8). 사도들에 관한 기사는 이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그러나 다대오에 관해서는 다음 장에서 이야기하겠다. p80
제13장 에뎃사 Edessa 의 임금
예수 그리스도께서 능력으로 이적을 행하신 결과 주님의 신성은 사람들 사이에 널리 알려졌다. 외국과 유대 먼 지방에 있는 사람들까지도 질병과 고통을 치료하려는 희망에서 주님을 따랐다. 유프라테스 건너편에 있는 국가를 다스리고 있었으나 사람의 힘으로는 고칠 수 없는 질병으로 고생하고 있던 아그바루스 Agbarus 도 예수의 이름과 많은 사람들이 한결같이 증거하는 그의 이적에 관한 소문을 들었다. 그는 주님에게 사람을 보내어 자기의 질병을 고쳐달라고 간청했다. 그러나 주님은 그 당시에는 그의 호출에 따르지 않았으며, 자기 제자를 보내어 질병을 고쳐주겠다는 편지를 보냈다. 그리고 그와 그의 모든 친척들의 구원을 약속하셨다. 오래지 않아 이 약속은 성취되었다. 주님께서 부활하여 승천하신 후 열 두 제자의 한 사람인 도마는 거룩한 충동을 받아 칠십문도의 한 사람인 다대오를 그리스도의 복음전파자요 전령으로서 에뎃사로 보냈다. 그리하여 다대오의 활동에 의해 주님의 약속은 완전히 성취되었다. 이 사실은 당시 이 왕이 다스리고 있던 에뎃사의 공문서에 기록된 내용이 증명해준다. 고대 역사와 아그바루스의 의사록을 담고 있는 공문서에는 그에 관한 자세한 내용이 보존되어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고대문서에서 취한 서신들 자체를 그대로 들려줄 수는 없다. 다음은 시리아어로 기록된 서신을 번역한 것이다. p80
아그바루스왕이 예수께 보낸 서신 (이 서신은 특사인 아나니아가 예루살렘의 예수께 전했다)
“에뎃사의 임금 아그바루스는 예루살렘 변경에 출현한 탁월한 구세주 예수께 문안합니다. 나는 당신이 약이나 약초를 사용하지 않고서 병자를 고쳤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당신은 눈먼 자를 보게 하고, 저는 자를 걷게 하며, 오랫동안 고생해온 문둥병자를 깨끗케 하여 주고, 죽은 자를 살렸다고 합니다. 당신에 관한 이런 소문을 듣고서 나는 마음속으로 다음과 같이 생각했습니다. 즉 당신은 하나님으로서 하늘에서 내려오셔서 이러한 일을 행하시는 것이거나, 아니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당신이 나를 방문하여 나를 괴롭히고 있는 질병을 고쳐주시길 간청합니다. 나는 또 유대인들이 당신에게 불평하고 있으며, 당신을 해치려는 음모를 꾀하고 있다는 소문도 들었습니다. 나는 비록 작지만 고귀한 국가를 소유하고 있으니, 이것은 우리 두 사람을 위해 충분할 것입니다” 그는 신적 진리의 빛의 조명을 받아 이 서신을 썼다. 예수께서 역시 동일인을 통해 그에게 보낸 답신의 내용도 알아둘 가치가 있다. 이 서신은 짧지만 문체에 힘이 있다. p81
예수께서 아그바루스왕에게 보낸 답신
“오, 아그바루스여! 나를 보지도 않고서도 믿는 그대에게 복이 있습니다. 기록되기를 나를 본 자는 나를 믿지 않을 것이며, 나를 보지 못한 자가 나를 믿고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당신을 방문해 달라는 요청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나는 이곳에서 반드시 이루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내가 이곳에 온 것도 바로 그 일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내가 이것을 이루어 나를 보내신 그분의 영접을 받아 하늘로 들려올라간 뒤에, 나는 당신에게 내 제자 한 사람을 보내드리겠습니다. 그가 당신의 질병을 고쳐주고, 당신 및 당신과 함께 있는 사람들에게 생명을 줄 것입니다” p82
이 문서에는 역시 시리아어로 다음과 같은 내용이 추가되어 있다. “예수께서 승천한 뒤, 도마라고도 불리는 유다는 칠십문도의 한 사람인 사도 다대오 Thaddeus 를 그에게 보냈다. 에뎃사에 도착한 다대오는 토비아 Tobias 의 아들의 집에 머물렀다. 그가 도착했다는 소문이 퍼지고 그가 행한 기적이 널리 알려졌으며, 예수께서 편지했던 대로 그의 제자가 그곳에 이르렀다는 소식이 아그바루스에게 전해졌다. 다대오는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 온갖 질병을 고치기 시작했으므로 모든 사람이 크게 놀랐다. 다대오가 행한 놀라운 행위와 기적들, 그리고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병자를 고친다는 소문을 들은 아그바루스는 이 사람이 바로 예수께서 약속하신바 ‘내가 들려 영접함을 받은 뒤에 내 제자를 보내리니 그가 당신의 질병을 고쳐줄 것입니다’ 라고 한 그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다대오와 함께 거하고 있는 토비아를 불러서 그에게 말했다. ‘나는 예루살렘에서 온 능력있는 분이 그대의 집에 머물면서 예수의 이름으로 많은 질병을 고치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소’ 라고 왕이 말하자 토비아는 ‘폐하, 그렇습니다. 한 이방인이 와서 우리 집에 머물면서 많은 이적을 행하고 있습니다’ 라고 했다. 왕은 ‘그를 나에게 데려오시오’ 라고 말했다. 토비아는 다대오에게 가서 말하길, 아그바루스왕이 그를 왕에게 데려와 왕의 질병을 고치게 하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다음날 아침 토비아는 다대오를 왕에게 데려갔다. p82
그가 도착했을 때 그곳에는 모든 귀족들이 모여 서 있었다. 그가 그곳에 들어설 때에 아그바루스는 다대오의 얼굴에서 무엇인가 특별한 것을 보았으므로 그에게 경의를 표했다. 그러나 주위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왜냐하면 그들은 아그바루스가 본 것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그바루스는 다대오에게 그가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제자로서 ‘내가 당신에게 내 제자를 보내리니 그가 당신의 질병을 고쳐주고 당신과 당신의 모든 친척들에게 생명을 줄 것입니다’ 라고 약속하셨던 사람이냐고 물었다. 다대오는 ‘당신이 나를 이곳에 보내신 주 예수를 크게 신뢰하고 있으므로 나는 보내심을 받아 당신에게 왔습니다. 만일 당신이 큰 믿음으로 그분을 믿는다면 당신의 마음으로 간구하는 것들을 당신의 믿음대로 허락하실 것입니다’ 라고 대답했다. 아그바루스는 대답하기를 ‘나는 그분을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분을 십자가에 못박은 유대인들을 멸하기 위해 군대를 일으킬 결심을 했었습니다. 그러나 로마제국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에 그 결심을 억제했습니다’ 라고 말했다. 다대오는 ‘우리의 주님이시며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성부의 뜻을 이루셨으며, 그 뜻을 이루셨으므로 다시 성부께로 돌아가셨습니다’ 라고 말했다. 아그바루스는 ‘나는 그분과 그분의 아버지를 믿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다대오가 말했다. ‘그렇다면 나는 동일하신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당신에게 안수하겠습니다’ 그리하여 그가 안수하자 즉시 왕의 질병과 모든 고통이 나음을 받았다. 아그바루스는 자신이 예수에 관해 소문을 들었던 것과 똑같이 그의 제자 다대오를 통해 행위가 이루어졌으므로 크게 놀랐다. 다대오는 약이나 약초를 사용하지 않고서 아그바루스와 통풍으로 고생하는 그의 아들 압다스 Abdas 를 치료해 주었다. 압다스는 다대오에게 나아와 그의 발 앞에 엎드려 안수를 받고 병이 나았다. p84
이 도시의 많은 사람들이 다대오로 말미암아 병 나음을 받았다. 다대오는 놀랍고 큰일을 행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했다. 이 일이 있은 뒤에 아그바루스는 다대오에게 말했다. ‘당신은 하나님의 권능에 의해 이러한 일을 행하고 있으며, 우리는 놀라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일들 외에 예수께서 어떻게 탄생하셨으며 우리가 소문으로 들은 일들을 어떤 능력으로 행하셨는지 가르쳐주시길 바랍니다’ 다대오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말씀을 널리 전파하기 위해 보내심을 받았으므로 당신에게만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 내일 모든 시민들을 불러 모으십시오. 그러면 나는 그들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일과 그의 사명, 아버지께서 그를 이 땅에 보내신 목적 등에 관한 생명의 말씀을 그들에게 전하겠습니다. 그리고 그가 행하신 권능과 세상에 선포하신 비밀, 또 어떤 능력으로 이런 일을 행하셨는지를 말씀드리고, 또 그가 말씀을 전하신 방법, 그의 낮고 천한 신분, 겸손한 외모에 대해서도 전파하겠습니다. 그가 얼마나 자신을 낮추셨으며 어떤 죽음을 당하셨으며 자신의 신성을 낮추셨는지, 그리고 그가 유대인들로부터 받은 고난, 십자가에 못 박혀 지옥에 내려가셨다가 이제까지 한 번도 깬 적이 없는 그 죽음의 빗장을 열고 다시 살아나셨으며 여러 세대 동안 잠자던 죽은 자들과 함께 부활하신 일도 가르치겠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 오실 때에는 홀로 오셨지만 다시 승천하실 때에는 허다한 천군들과 함께 성부에게로 올라가셨으며, 하늘나라의 영광중에서 성부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아 계시며, 장차 영광과 능력으로 다시 오셔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것 등을 전파하겠습니다’ 아그바루스는 모든 백성들에게 아침 일찍 나아와 다대오의 가르침을 들으라고 명했다. 이 일을 마친 뒤 그는 다대오에게 금과 은을 주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다대오는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의 것을 그대로 두고서 어찌 남의 것을 취할 수 있으리오?’ 라고 말하면서 그것을 받으려 하지 않았다” 이것은 340년에 정리되었으며, 시리아어로부터 번역된 것으로서 우리에게 많은 도움을 주리라고 기대한다. p85
제2권
서언 : 본 <교회사> 의 서두를 장식해야 할 것으로서 구원의 말씀의 신성 神性, 우리가 가르치고 있는 교리의 유래 및 기독교인들이 영위하고 있는 복음적 생활의 유래에 관한 자세한 항목들에 관해서는 이미 제1권에서 논의했다. 아울러 주님께서 인간세상에 오심, 주님의 고난, 제자들을 택하신 상황 등도 논의했고 그 증거들도 제시했다. 제2권에서는 주님의 승천 이후의 상황을 살펴보려 하는 바 이에 관련된 성서의 증거 및 기타 언급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는 다른 문서들을 제시하겠다.
제1장 그리스도의 승천 이후 사도들의 행적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후 사도들은 먼저 배반자 유다의 자리를 채우기 위해 제비뽑기에 의해 맛디아를 사도로 선출했다.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맛디아는 주님의 제자 중 한 사람이었다. 또 사도들은 공적인 업무를 맡기기 위해 일곱 사람에게 안수하고 기도하여 집사의 직책을 맡겼다. 스테판은 이 일곱 집사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마치 순교를 위해 집사로 임명된 사람인 듯이 임명되던 때에 주님을 죽인 살인자들이 던진 돌에 맞아 순교했다. 그리하여 그는 최초로 그리스도의 순교자라고 불리는 영광의 면류관을 받았다. 그의 뒤를 이어 요셉의 아들이라고도 불리기 때문에 주님의 형제라고 불리던 야고보가 순교했다. 훌륭한 덕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의인이라는 별명을 지녔던 이 야고보는 예루살렘 교회의 최초의 감독이었다. 클레멘트는 <강요 Institutions> 제6권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주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았던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주님이 승천하신 후 명예를 얻기 위해 경쟁하지 않고 의인 야고보를 예루살렘의 감독으로 선출했다” 클레멘트는 역시 같은 저서 제7권에서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주님은 부활하신 뒤에 의인 야고보와 요한과 베드로에게 지식의 은사를 주셨다. 이들은 그것을 다른 사도들에게 전했고, 또 그들도 그것을 칠십문도에게 전했다. 바나바 Barnabas 도 칠십문도의 한 사람이었다” 야고보라는 이름을 가진 인물은 둘이었다. 한 명은 의인이라고 불리는 인물로서 성전의 익면 翼面 에서 밀려 떨어져 축융업자의 몽둥이에 맞아 죽었으며, 또 다른 야고보는 참수되었다. 사도 바울도 그의 서신에서 의인 야고보를 언급했다. “주의 형제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했노라” (갈 1:19).
요세푸스가 언급하는 야고보의 순교, 유대고대사 제20권 9:1 p482-484 http://blog.naver.com/oyashiki/100189684685
이 무렵에 주님께서 오슬헤니아 Osrhoenians 의 임금에게 약속하셨던 일이 이루어졌다. 즉, 도마는 거룩한 감화를 받아 그리스도의 교리를 전파할 전령이요 복음전도자로서 다대오를 그곳으로 파견했다. 이에 대해서는 그곳에서 발견된 공문서를 인용하여 이미 설명했다. 다대오는 그곳에 이르러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아그바루스를 치료하고 특이한 이적을 행해 모든 주민들을 놀라게 했다. 그는 자신의 사역에 의해 그들이 마음을 충분히 다듬어 그리스도의 권능을 찬양하도록 이끈 뒤에 구주의 교훈을 따르는 제자들로 삼았다.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에뎃사는 온전히 그리스도의 이름에 헌신하고 있으며 구주께서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셨다는 특별한 증거를 나타내고 있다. 이것에 대해서는 고대 문서에 기록된 기사를 인용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이제 다시 성경으로 돌아가기로 하자. 스테판의 순교 이후 예루살렘 교회에 대한 최초의 큰 박해가 일어나 열 두 사도를 제외한 모든 제자들은 유대와 사마리아로 흩어졌다. 성경에 의하면 어떤 제자들은 멀리 베니게 (페니키아) 와 키프러스 (구브로) 와 안티오크 (안디옥) 에까지 이르렀으나 아직 믿음을 그들 국가에 전파할 상황이 아니었으므로 유대인들에게만 전파했다. 이 기간에 바울은 교회를 파괴하며 신자들의 집을 습격해 남녀 신자들을 끌어내 감옥에 가두었다. p90
집사로 임명되었던 빌립도 다른 제자들과 함께 흩어져 사마리아로 내려갔다. 그는 성령으로 충만하여 그곳의 주민들에게 처음으로 거룩한 말씀을 전파했다. 하나님의 은사가 그와 더불어 크게 활동하여 시몬 마구스 Simon Magus 를 비롯한 많은 사람이 그의 설교에 매료되었다. 시몬은 그 당시 대단히 존경받는 인물로서 그의 마술에 현혹된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고 있었으며, 사람들은 그를 위대한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여겼다. 시몬은 빌립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행하는 비상한 이적들을 보고서 교활하게도 그리스도를 믿기로 작정하는 체하여 세례를 받았다. 놀랍게도 오늘날도 그의 지극히 더러운 이단을 채택하는 사람들은 동일한 일을 행하고 있다. 그들은 자기들이 믿는 이단의 창시자가 행한 방법을 좇아 교회의 환심을 사며, 페스트나 문둥병처럼 교인들을 지극히 부패한 것으로 감염시킨다. 그들은 은밀하고 치료하지 못할 치명적인 독을 교인들에게 주입한다. 이들 중 많은 사람은 이미 그 사악함 때문에 교회로부터 축출되었다. 시몬 자신도 그 악함이 베드로에게 발각되어 그에 합당한 벌을 받았다. 하나님의 섭리로 말미암아 구세주의 복음은 나날이 더욱 널리 전파되었다. 당시 관습적으로 여왕이 다스리고 있던 에디오피아의 권세자가 그곳으로 왔다가 이방인으로서는 최초로 빌립에게서 거룩한 말씀의 비밀을 받고 믿게 되었다. 빌립은 환상의 지시를 받아 그를 가르쳤다. 그는 전 세계 신자들 중 첫 열매가 되었으며, 조국으로 돌아가서는 하나님의 지식과 우리 구주께서 사람들 가운데 거하신다는 사실을 전파한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를 통해 이사야의 예언이 성취되었다. “세바 Sheba 의 모든 사람들이 금과 유향을 가져와서 주의 찬양을 전하리라” (이사야 60:6). 이후에 사람에 의해 택함을 받은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성부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 선택된 바울이 사도로 임명되었다. 그는 환상 중에 부르심을 받고 하늘로부터 들려오는 계시의 음성을 들었다. p91
제2장 빌라도로부터 그리스도에 대한 보고를 받은 티베리우스 Tiberius 는 얼마나 감명을 받았는가?
주님의 부활과 승천에 관한 소문은 널리 퍼졌다. 고대 국가 통치자들의 관습에 따르면 어떤 일이든 기이한 일은 빠짐없이 황제에게 전하게 되어 있었다. 따라서 본디오 빌라도는 주님이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신 일과 관련된 자세한 상황을 티베리우스 Tiberius 황제에게 보고했다. 그것은 이미 팔레스틴 전역에 퍼져있는 일에 대한 기사였다. 그는 이 보고서에서 그리스도에 관한 여러 기적들을 자신이 조사하여 확인했으며, 또 그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했으므로 대다수의 백성들이 그를 하나님으로 믿고 있다고 알렸다. 티베리우스는 이 문제를 원로원에 맡겼다. 그러나 그들은 표면적으로는 자기들이 그 문제를 먼저 심의하지 않았기 때문에 원로원의 투표와 포고에 의하지 않고는 어떤 사람도 신으로 추대될 수 없다는 고대 로마법에 따라 이 제안을 거부했다고 한다. 그러나 사실상 복음의 유익한 교리는 인간들의 확인과 협동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는다. 로마 원로원은 우리 구주의 교리를 이처럼 배격했으나 티베리우스 황제는 여전히 전과 마찬가지 생각을 품고 있으므로 그리스도의 교리를 대적하는 비합리적인 계획을 세우지 않았다. 이것은 터툴리안의 증언이다. 터툴리안은 로마법을 정확히 알고 있었고 여러 면에서 탁월했으며, 특히 로마의 저명인사들에게 잘 알려졌던 유명한 사람이다. 그는 로마어로 저술되었고 후일 헬라어로 번역되기도 한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변증> 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고대 로마법에 의하면 황제는 원로원의 승인 없이 어떤 사람을 신으로 정할 수 없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알부르누스 Alburnus 라는 우상에 관해 이렇게 행했다. 티베리우스가 다스리던 시기에 그리스도의 이름은 전 세계에 퍼졌다. 이 교리의 발상지인 팔레스틴으로부터 전파된 교리를 접한 티베리우스는 그 교리를 흡족하게 여겼으므로 원로원과 의논했다. 그러나 원로원은 자기들이 그 법안을 제안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것을 거부했다. 그러나 티베리우스는 자신의 의견을 고집하면서 기독교인을 비난하는 사람을 죽이겠다고 위협했다. 이처럼 거룩한 섭리로 인해 그의 마음에 복음이 주입되었기 때문에 복음은 처음부터 그다지 제한을 받지 않고 전세계로 전파될 수 있었다" p93
호겐 : 빌라도 보고서가 필요하다. 여기서 잠깐 <최신 성서고고학 신약편> 에 나온 본디오 빌라도에 관한 설명과 그의 보고서를 읽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최신 성서고고학 신약편 by 원용국
본디오 빌라도 Pontius Pilate
사복음 전체 (마 27:2-65, 막 15:1-44, 눅 23:1-52, 요 18:29-19:38) 에 본디오 빌라도에 대해 기록되어 있는데, 그는 주후 26년에서 36년까지 유대의 총독으로 있으면서 예수님을 처형할 것을 명령한 자이다. 그의 이름이 들어있는 비문이 이태리 고고학자들에 의해 가이사랴 근처에서 발견되었다. 이 가이사랴는 하이파에서 남방 약 10마일 지점에 있는 지중해안 항구이다. 그의 이름이 든 비문의 수확은 고고학자와 역사가들에게 귀중한 사료이다. 그 빌라도의 성격은 유대 역사가인 요세푸스와 철학자로 알렉산드리아에 거주하던 유대인 필로 Philo 가 잘 기록하고 있는데, 빌라도는 “강탈자”, “폭군”, “흡혈귀” 라고 지탄했으며, 어떤 곳에서는 “방탕한 자” 로 기록되고 있다. 이것은 그가 유대인을 통치하는 기간에 뇌물거래, 음탕, 도적질, 억압과 비참한 짓을 그치지 아니했다는 것이다 (Keller. Bible as History, p355). 또 누가복음 13:1에도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제물에 섞은 것이나 여리고 도성의 강도 만난 자에 관한 예수님의 비유 등은 그것을 입증하고 있다. 그 뿐만 아니라 그가 군중의 위협과 외침에 못 이겨 예수님을 사형에 내어준 것은 그의 그릇된 성격의 한 단면이요, 자기의 과거가 바르지 못한 데 대한 공포심의 발로라 할 수 있다. 또 로마 군인들이 예수님을 심문한 것은 빌라도 치세의 사회적 한 모형이다. 그가 예수님을 심문하고, 채찍질한 반석은 아직도 남아 있어서 그 당시를 다시 회상하게 만들며, 그것을 말하고 있다. 여기서 반드시 생각해야 할 것은 가시관이다. 예수님의 머리에 씌운 가시관의 자료는 거칠고 작은 가시나무이다. 10-15피트로 자라는 시리아 식물인데, 흰 빛이 도는 굵은 가시 돋힌 나무로 옛날 예루살렘 주위에 많이 자라고 있었다. p168
빌라도의 보고서
이 보고서는 예수님 시대에 법정에서 만들어진 공문서로서, 현재 터키의 성聖 소피아 사원 寺院 에 소장되어 있다. 50권으로 되어 있는 이 원고는 서기관의 손으로 쓰여졌으며, 각 권은 2x4피트로 되어 있는 것으로 전문을 옮긴 것이다. 로마사가 발레우스 파테르쿨루스의 주에 의한 원명은 <예수의 체포, 심문과 처형에 관해 카이사르에게 보낸 빌라도의 보고서> 로 되어 있다. 예수가 태어났을 때 이 사가는 19세였는데 그의 작품은 모두 소멸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사가 프리시안과 타키투스의 글로 미루어보면 그는 캄파니아 출신으로 카이사르의 친한 벗이며 16년 동안 로마군을 지휘했고, 그 후 로마에 돌아와 <로마사> 집필을 끝낸 후 집정관의 정책에 오랫동안 머물렀다고 전해진다. 사가 발레리우스 그 자신이 유대 지방에서 만난 ‘나사렛 예수’ 는 그가 만난 인물 중 가장 독특한 성격의 소유자로서 자신은 전 군대보다도 예수를 더 두려워했다고 기록했다..... (구영재 역, 빌라도 보고서, 아가페 말씀사, 1977년, p5-6). 빌라도의 보고서를 인용하면 아래와 같다. p169
로마의 황제, 티베리우스 카이사르 각하에게
각하에게 문안드립니다. 최근 수년 동안에 제가 다스리는 지역에서 일어난 사건은 너무나 독특한 일이어서, 시간이 흐름에 따라 우리나라의 운명까지 변하게 할지도 모르는 일이기 때문에 사건이 일어난 대로 소상히 알려드리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최근에 발생한 사건을 보면 모든 다른 신神들과는 조화될 수 없는 일같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발레리우스 그라투스 Valerius Gratus 를 계승해 유대 총독이 된 날을 저주하고 싶을 정도입니다. 부임한 이래로 제 생활은 불안과 근심의 연속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 도착하자마자 저는 직위를 인수하고 큰 연회를 베풀 것을 명하고 갈릴리의 영주들과 제사장들, 그리고 그의 부하 직원들을 초청했습니다. 그런데 정해진 시간이 되어도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 사실을 저와 제가 속한 정부 전체에 대한 일종의 모욕으로 간주했습니다. 며칠 후 대제사장이 저를 방문했습니다. 그의 거동은 엄숙했으나 외식에 가득 찬 것이었습니다. 나는 그들이 종교가, 그와 그의 추종자들이 로마사람들과 자리를 함께 하는 것이라든지 먹는 것이라든지 마시는 것을 금지한다는 것을 그의 안색으로도 알 수 있었습니다. 나는 그의 변명을 받아들이는 것이 정략 政略 이라고 생각했습니다만, 그 순간부터 피정복자는 정복자를 적敵으로 간주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신했으며, 로마인에게는 이 나라의 제사장들을 요주의 要注意 할 것을 경고해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p169
그들은 자신의 벼슬과 호사스러운 생활을 위해서는 그들의 어머니라도 배신할 자들입니다. 제가 통치하는 도시 가운데서도 예루살렘은 가장 다스리기 힘든 도시라고 여겨집니다. 백성들은 매우 거칠어서 제 자신은 매 순간마다 폭동의 두려움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저는 폭동을 진압할만한 군대를 거느리고 있지 않습니다. 단지 저의 지휘 하에 한 명의 백부장 百夫長 과 그가 거느린 군대가 있었을 뿐입니다. 그리하여 저는, 자기의 통치지역을 방어할 만한 충분한 군대를 거느리고 있다고 알려온 시리아의 사령관 司令官 에게 증원군을 요청했습니다. 우리들이 이미 획득한 영토를 방어하는 일을 등한히 한다면, 우리 제국의 확장을 꾀하는 지나친 욕심은 결국 우리 정부 전체의 붕괴를 초래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운 생각이 듭니다. 저는 가능한 한, 대중들을 가까이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그들 제사장들이 폭도들에게 어떠한 영향력을 행사할 지도 모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될 수 있는 대로 백성들의 마음과 입장을 탐지하려고 노력했던 것입니다. p170
제 귀에 들려온 여러 가지 소문들 중에 특별히 제 주의를 집중시킨 사건이 한 가지 있었습니다. 그것은 한 젊은 청년이 갈릴리 지방에 나타나 그를 보내신 하나님의 이름으로서 새로운 법을 고귀한 열정으로 가르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그의 목적하는 바가 민중을 선동하여 로마 제국에 대항하고자 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해 보았습니다만 제 근심은 곧 걷히게 되었습니다. 나사렛 예수는 유대인들에게보다는 오히려 로마인에게 더 친근하게 말했습니다. 어느 날 큰 군중이 모여 있는 실로라는 곳을 지나다가, 한 젊은이가 군중 속에서 나무에 기대어 선 채로 조용하게 군중을 향해 연설하고 있는 것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예수라고 누군가가 일러주었습니다. 그는 그의 연설을 듣고 있는 군중과 현저한 차이를 보여주고 있어서 저는 그를 쉽게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그는 30세가량으로 보였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그렇게도 마음을 잡아끄는 평온한 얼굴을 본 일이 결코 없었습니다. 예수와 그의 말을 경청하고 있는 저 검은 턱수염과 황갈색의 안색을 가진 우리들을 어떻게 대조할 수가 있겠습니까? 제가 온 것이 예수에게 방해가 되게 하지 않으려고 저는 계속 걸었으나, 제 부관 副官 에게는 군중 속에 들어가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보라고 지시했습니다. 제 부관의 이름은 마르쿠스로서 그는 카타린을 잡으려고 에트루리아에 주둔한 적이 있는 공작 대장의 손자입니다. 마르쿠스는 유대 지방에 오랫동안 거주한 고로 히브리 말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제게 충성하여 저의 신임을 받고 있었습니다. 총독청에 들어서자 저는 먼저 와 있는 마르쿠스를 발견했으며, 그는 실로에서 예수가 한 말을 저에게 들려주었습니다. p171
제가 읽어본 어떤 철학자의 작품에서도 예수의 말에 비교될 만한 것은 읽어본 적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예루살렘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반항적인 유대인 중의 하나가 카이사르에게 세稅를 바치는 것이 옳은 것인가고 그에게 물었을 때, 그는 대답하길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라” 고 했다는 것입니다 (마 22:15-22, 막 12:13-17, 눅 20:20-26). 제가 그렇게 많은 자유를 그 나사렛 젊은이에게 허용한 것은 이와 같은 그의 지혜로운 말 때문이었습니다. 저에게는 그를 체포하여 폰투스 Pontus 로 추방시킬 수 있는 권한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만일 그렇게 했다면 그것은 지금까지 사람을 다루는 로마 정부의 관례와는 반대되는 일이 되었을 것입니다. 이 젊은이는 선동적이거나 반항적인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저는 아마 예수 자신도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은밀하게 보호의 손길을 그에게 뻗쳐 주었습니다. 그는 자유롭게 말하고 행동했으며, 사람들을 모아서 연설하거나 또 제자를 선택하는 일에 있어서 어떠한 관청의 제재 制裁 도 받지 않았던 것입니다. 제가 생각하기로는 우리 조상의 종교도 예수의 종교로 대치될 것이며, 이 숭고한 관용은 로마제국을 허망하게 붕괴시킬 것입니다. 그리고 가련한 저는 유대인의 말을 빌린다면 하나님의 섭리요, 우리의 말대로 한다면 운명의 도구로 쓰여진 것일 것입니다. 예수에게 허용된 무제한의 자유는, 가난한 사람이 아닌 부유하고 권세 있는 유대인을 자극했습니다. 예수가 후자들에게 가혹하게 대한 것은 사실이지만 제가 그 나사렛 젊은이의 자유를 제한하지 않은 것은 정략적인 이유에서였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여” 그는 그들을 향해 말했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들은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음이 가득하다” (마 23:27). p171
또 한 번은 부자가 헌금을 내고 뽐내는 것을 보고 한탄하며, 가난한 자의 한 푼이 하나님 목전 目前 에서는 더욱 빛나는 것이라고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예수의 오만한 언동에 대한 항의가 날마다 총독청에 줄을 이어 들어왔습니다. 저는 예수에게 어떤 불행한 일이 닥치게 될지도 모른다는 정보를 입수했습니다. 예루살렘에서는 선지자로 불리는 자들에게 돌을 던지는 일이 처음 있는 일은 아니었습니다. 한 진정서가 카이사르에게 제출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제 처사는 원로원에서 재가를 받았고 파르티안 전쟁이 끝나면 제게 증원군을 보내주기로 약속되어 있던 것입니다. 폭동을 진압하기에는 너무도 미약한고로, 저는 힘없이 물러섬으로써, 총독청의 체면을 손상시키는 것보다는 차라리 조용히 성城의 평온을 되찾는 방안을 강구하기로 했습니다. 저는 예수에게 글을 써 보내 총독청에서 한 번 만날 것을 요구했습니다. 예수가 왔습니다. 황제께서는 저의 혈관에는 로마인의 피에 서반아의 피가 섞여 흐르는 혈통을 지닌 사람으로서 두려워하는 따위의 유약한 감정은 모르는 사람인 줄을 아실 것입니다. 그 나사렛 사람이 모습을 나타냈을 때 저는 저의 접견실에서 거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 다리는 쇳덩이로 된 손으로 대리석 바닥에다 붙여놓은 것처럼 꼼짝할 수가 없었으며, 그 나사렛 젊은이는 아무렇지도 않게 조용히 서 있는데도 저는 마치 형사범처럼 사지 四肢 를 떨고 있던 것입니다. 비록 그는 한마디의 말도 하지 않았으나 제 앞에까지 다가와 서서 “내가 여기 왔나이다” 라고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한참동안 저는 이 비범한 사람을 존경과 두려움으로 응시했고, 그는 모든 신神들과 영웅의 형상을 그린 수많은 화가들도 아직 그려내지 못한 유형의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겐 그러한 특징에 있어서 결함이 될 만한 것은 조금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너무나 두렵고 떨려서 그에게 접근할 수 없었습니다. p172
“예수여” 하고 드디어 저는 말문을 열었습니다. “나사렛 예수여, 지난 3년 동안 나는 그대에게 말할 수 있는 자유를 허락하였소. 그러나 이 일에 대해 나는 조금도 유감이 없소. 그대의 말은 현인 賢人의 말이오. 나는 그대가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을 읽어보았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알기로는 그대의 설교는 다른 철학자들의 그것을 능가하며 단순하고도 장엄한 것 같습니다. 이에 대하여는 황제께서도 알고 계시며, 그를 대표해 이 나라에 와 있는 나는 그대가 훌륭한 말을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허락한 것을 기쁘게 생각하고 있소. 그러나 나는 그대의 설교가 강력하고도 원한 깊은 적대자를 만들고 있음을 알려드려야겠소. 이것은 놀라운 사실은 아니오. 소크라테스도 그의 대적이 있었으며, 결국에는 그들의 증오의 희생제물이 되었소. 그대의 경우는 그대의 설교가 그들에게 매우 가혹하다는 것과, 내가 그대에게 자유를 허락함으로써 그들이 나를 반대한다는 것 때문에 설상가상으로 시끄러워지고 있소. 그들은 로마정부가 그들에게 허용한 작은 권리마저도 나와 그대가 손을 잡고 그들로부터 빼앗으려고 한다고 고소까지 하고 있소. 내가 그대에게 지금 말하려고 하는 것은 명령이 아니라 부탁으로서, 이제부터는 그대가 설교할 때에 좀 더 신중하고 온화한 말로 하며, 그들을 고려하여 대적들의 자존심을 상하게 함으로써 그들이 어리석은 군중들을 충동하여 그대를 대적하지 않도록 하고 또 나로 하여금 법의 도구 노릇을 하지 않도록 해 달라는 것이오” 그 나사렛 사람은 조용히 입을 열었습니다. “땅의 군주여, 그대의 말은 참된 지식에서 나온 말이 아닙니다. 격류 激流 에게 명해 산골짜기에 머물러 있으라고 말해 보십시오. 그러면 계곡의 나무들은 뿌리째 뽑혀 버릴 것입니다. 그 급류는 자연과 창조주의 법칙에 순종한다고 그대에게 답할 것입니다. 하나님 한 분만이 그 급류가 어디로 흘러가는지 알고 계십니다. 진실로 그대에게 이르노니 샤론의 장미가 피기 전에 정의의 피가 엎질러질 것입니다” p173
“당신의 피는 엎질러지지 않을 것이오” 하고 저는 깊은 감동을 받고 대답했습니다. “당신의 지혜는 로마정부에 의해 허용된 자유를 남용하는 거칠고 오만한 모든 바리새인보다 더욱 값진 것이오. 그들은 카이사르에 대한 음모를 꾸며, 카이사르는 폭군으로서 그들의 멸망을 도모하고 있다는 말로 무식한 자들을 충동하여 황제의 관대하심을 공포로 조작시키고 있소. 오만무례하고 철면피 같은 인간들이오 !!! 그들은 악한 계획을 도모하기 위해서 때로는 양의 털가죽을 쓰는 티베르 강의 여우임을 그들 자신은 모르고 있소. 나의 총독 관저는 밤낮을 불문하고 그대에게 도피처로 제공될 것이오” 예수는 관심 없는 듯이 머리를 저으며, 근엄하고 숭엄한 미소를 띠면서 말했습니다. “때가 이르면 그 때는 땅 위나 땅 아래 어느 곳에도 인자를 위한 도피처는 없을 것입니다. 의義의 도피처는 저기에 있습니다” 라면서 하늘을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선지자들의 책에 기록된 말씀은 성취되어야 할 것입니다” “젊은이여” 하고 저는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습니다. “그대는 나의 요청을 명命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오. 나의 통치 하에 있는 지방의 안전이 그것을 요구하고 있소. 당신은 설교할 때 좀 더 온전한 태도를 취하도록 해야 할 것이오. 나의 명을 어기지 않도록 하시오. 그렇지 않으면 결과가 어떠할 지를 그대도 잘 알 것이오. 와 주어서 고맙소. 잘 가시오” “땅의 군주여” 하고 예수가 입을 열었습니다. “나는 이 세상에 전쟁을 일으키려고 온 것이 아니라 평화와 사랑과 자비를 주려고 왔습니다. 나는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가 로마세계에 평화를 주던 바로 그 날에 태어났습니다. 핍박은 나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다른 사람으로부터의 핍박을 예상하고 있으며, 나에게 길을 보여주신 내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그 핍박을 잘 감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대의 세상적인 사려분별과 지각을 삼가십시오. 성막에 희생제물을 잡아놓는 것은 그대의 권력에 속한 것이 아닙니다” 이와 같은 말을 한 후 그는 투명한 영혼처럼 접견실 휘장 뒤로 사라져 갔습니다. p174
저는 그 젊은이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던 중압감에서 해방되어 안도의 한숨을 쉬었습니다. 예수를 대적하는 자들은 그 당시 갈릴리 지방을 다스리고 있던 헤롯에게 편지를 써서 그 나사렛 사람에 대한 원한을 풀어달라고 했습니다. 만일 헤롯이 그의 성격대로 했다면 그는 예수를 당장 잡아 사형에 처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비록 왕의 위엄을 자랑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중의원에 대한 그의 영향이 무시당할지도 모르는 행동을 범하는 데 주저했으며 또 저처럼 예수를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로마의 관리로서 한 유대인 때문에 겁을 집어먹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전에 헤롯은 총독청으로 저를 방문했으며 얼마간 가벼운 대화를 나눈 후, 떠날 즈음에 나사렛 사람에 대한 제 견해가 어떠한지 물었습니다. 저는 대답하길 예수는 가끔 위대한 민족이 드물게 배출해 내는 위대한 철인 중의 한 사람으로 그의 교훈은 결코 처벌받을 만한 것이 아니므로 로마정부는 그 자신의 행동으로 정당화하고 있는 언론의 자유를 그대에게 허용키로 했다고 말했습니다. 헤롯은 음흉하게 웃어 보이면서 마지못해 하는 투로 인사하고는 떠났습니다. 유대인의 큰 축제가 다가오고 있었으며 백성의 여론은 유월절 의식 儀式 에서 항상 감정을 표명하는 일반 백성의 환희에 편승하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은 그 나사렛 사람의 죽음을 시끄럽게 요구하는 소란한 군중들로 술렁이고 있었습니다. 제가 파견한 밀사 密使 는 성전의 금전이 군중들을 동원하는 데 사용되고 있다고 전해 왔습니다. 위험은 점점 더 가중되었으며 한 로마의 백부장은 멸시와 모욕을 당했습니다. p174
저는 시리아의 사령관에게 편지를 보내 100명의 보병과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기병을 보내달라고 요청했으나 그는 거절했습니다. 저는 반역하는 성城 한 가운데서 얼마도 되지 않는 정병 精兵 들과 함께 외톨이가 된 것 같았으며 폭동을 진압하기에 너무 약한 탓으로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들을 너그럽게 대해 주는 수밖에는 별다른 도리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를 붙들고 있었으며 선동적인 폭도들은 총독청에 대하여는 조금도 두려움 없이 그들의 상전 上典 의 명령만 믿고 있었으며, 제가 그들의 요구가 무엇인지를 말해보라고 눈짓을 했을 때 그들은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 라고 고래고래 고함치기를 계속했습니다. 그 때는 세력 있는 세 당이 예수를 대적하기 위해 일심동체가 되었습니다. 첫째로 헤롯당 (막 3:6, 마 22:16, 막 12:13) 과 사두개파 (행 23:8, 막 12:18) 로서 그들의 선동적인 행동은 두 가지의 동기, 즉 그들은 그 나사렛 사람을 미워했으며, 로마의 속박을 참을 수가 없는 데에서 나온 것 같았습니다. 그들은 제가 로마 황제의 형상이 새겨진 기旗를 가지고 거룩한 성에 들어왔다는 것 때문에 저를 결코 용서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 경우에 있어서는 비록 제가 치명적인 실수를 범했다고 해도 그들의 눈에는 신성모독죄보다는 덜 흉악하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불만의 씨가 그들의 가슴 속에 사무쳐 있었습니다. 저는 성전의 은금 銀金 의 일부를 공공건물을 건축하는 데 사용하자고 제안했습니다. 그러나 제 제안은 무시당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공공연하게 예수의 대적임을 자처하고 다니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정부 같은 것은 아랑곳하지도 않는 자들로서 그 나사렛 사람이 지난 3년 동안 그가 가는 곳마다 바리새인을 혹독하게 질책한 것에 대해 끔찍한 원한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들만의 힘으로 행동하기에는 너무도 두렵고 약하다는 것을 알고 헤롯당과 사두개파와의 불화를 이용했던 것입니다. 이들 세 당 외에도 저는 언제나 소요에 끼어들기 잘하며 무질서와 혼란을 일으키는 데는 한 몫을 잘 담당하는 분별없고 야비한 군중들과 싸우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p175
예수는 대제사장 앞에 끌려와 사형으로 정죄되었습니다. 대제사장 가야바가 중재 仲裁 를 부탁해 온 때가 바로 그 때였습니다. 그는 예수의 유죄 판결을 확인한 후 처형해 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나는 그에게 예수는 갈릴리 사람이요 그 사건은 헤롯의 관할 지역에서 일어난 것이니 거기로 보내라고 명을 내렸습니다. 교활한 그 영주는 겸양을 표시하는 척하면서 카이사르의 대리자인 저의 명령을 거절하고 그 사람의 운명을 저의 손에 위탁했습니다 (마 27:15-26, 막 15:6-15, 눅 23:1-25, 요 18:39-19:16). 곧 저의 관저는 포위된 성보 城堡 의 형세를 띄웠고 매 순간마다 불만에 가득 찬 터질 듯한 군중들은 그 수가 증가되었습니다. 예루살렘은 나사렛 산지 山地 에서 몰려온 군중들로 넘쳤으며, 전 유대인들이 모두 예루살렘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장래의 운명을 내다본다는 까울 지방의 여자를 아내로 두고 있습니다. 아내는 제 발치에 엎드려 몸을 맡기고 울면서 말했습니다. “조심하십시오. 조심하십시오. 저 사람에게 손을 대지 마십시오. 그는 거룩하신 분입니다. 어젯밤, 저는 환상 중에서 그를 보았습니다. 그는 물 위로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또 바람의 날개를 타고 날아다니고 있었습니다. 그가 폭풍과 호수의 물고기에게 말했는데 그 모든 것들이 그의 말에 복종했습니다. 보세요. 기드론 골짜기는 피로 물들어 붉게 흐르고 있었고 카이사르의 조상 彫像 은 대량학살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중간 기둥들은 퇴락했고 태양은 무덤 측의 제녀 齊女 처럼 슬픔 속에 면사포로 가리고 있었습니다. 오, 빌라도여, 악惡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만일 당신이 당신의 아내인 제 애원을 듣지 않으신다면 로마 중의원이 받을 저주가 두렵고 카이사르가 당할 괴로움이 두렵습니다” p176
이때는 이미 몰려온 군중들의 무게로 층층대의 대리석 계단이 삐걱거렸습니다. 그들은 그 나사렛 사람을 다시 제게 데리고 왔습니다. 저는 위병들의 호위를 받으며 재판하는 장소로 나아가서 엄격한 어조로 그들의 요구가 무엇인지 물었습니다. “그 나사렛 사람의 죽음이오” 하고 그들은 대답했습니다. “무슨 죄 때문인가?” “그는 참람한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을 모독하고 성전의 황폐를 예언했으며 그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면서 유대인의 왕 ‘메시야’ 라고 주장했습니다” “로마의 법은” 하고 저는 말했습니다. “그러한 죄를 사형에 처하지는 않는다”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 냉혹한 폭도들이 소리를 질렀습니다. 분노한 폭도들의 고함소리는 관저의 기초까지 흔들어 놓았습니다. 군중 속에는 오직 한 사람만이 침착하게 조용히 서 있었습니다. 그 나사렛 사람이었습니다. 무자비한 핍박자들로부터 예수를 보호하려고 여러 번 시도했으나 헛수고로 돌아가고 저는 마침내 그 순간 예수의 생명을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것으로 생각된 방법을 취하기로 했습니다. 즉 이러한 명절에는 죄수 한 사람을 놓아주는 것이 그들의 관례였으므로 저는 예수를 자유롭게 놓아 소위 그들이 일컫는 속죄 염소 (레위기 16:20-34, 고후 5:21) 로 삼자고 제안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고 고집하는 것이었습니다. p176
그리하여 저는 그들에게 형사재판에서 유죄판결을 내리기 위해서는 하루를 온전히 금식하지 않고서는 판결을 내릴 수 없다는 그들 자신의 법을 들어, 앞뒤가 맞지 않는 그들의 주장의 모순성을 지적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유죄 선고는 산헤드린 (마 26:58-67) 의 동의를 얻어 의장의 서명을 받아야 하며 또 어떠한 범죄자일지라도 형의 확정 선고를 받은 당일에는 그 형을 집행할 수 없으며 다음날에 집행한다 할지라도 집행 전에 산헤드린이 전 경과를 검토해 보아야 하며, 또 그들의 법에 따라서 한 사람이 기를 갖고 재판정 문에 서 있는 동안 다른 사람은 말을 타고 좀 떨어진 곳에서 범죄자의 이름과 죄명과 증인의 이름을 소리 높여 외쳐, 혹시 누가 그를 변호할 사람이 있을지의 여부를 알아봐야 하며, 형집행 도중 번인이 세 번 뒤를 돌아보아서 새로운 사실로 자신에게 유리한 변호를 할 권리가 있다는 것을 그들에게 깨우쳐 주었습니다. 저는 이러한 구실을 말해줌으로써 그들이 두려운 마음으로 복종하길 바랐으나 여전히 그들은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 라고 소리 질렀습니다. 저는 그들의 마음을 충족시켜 줄 생각에서 예수를 채찍질하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군중의 분노를 증가시켰을 뿐이었습니다. 저는 대야를 가져오라고 하여 소란스러운 군중 앞에서 제 손을 씻음으로서 나사렛 예수를 죽음에 내어주는 데 대해서는 아무런 책임도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만 그것도 허사였습니다. 이 철면피 같은 군중들이 갈구하는 것은 바로 예수의 생명이었던 것입니다 (마 27:1-26, 막 15:1-15, 눅 23:1-25, 요 18:28-19:16). 저는 가끔 시민폭동에서 노도한 군중을 목격해 왔으나, 이번처럼 격렬한 폭동은 본 적이 없었습니다. 마치 지옥의 모든 유령들이 예루살렘으로 모여든 것과 같았다고 밖에는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군중들은 걸어다닌다기 보다는 갑자기 땅에서 불쑥불쑥 솟아나는 것 같았으며 총독 청사의 입구에서부터 시온산까지 이르는 군중들은 넘실거리는 파도를 따라 움직이는 소용돌이처럼 보였고, 판노니아의 공회소의 소동이나 폭동에서도 결코 들어볼 수 없는 가지가지의 해괴한 소리를 지르며 모여들었습니다. p177
겨울날 황혼 무렵처럼 날이 어두워지자, 저 위대한 줄리어스 시이저가 죽었을 때처럼 적막했습니다. 마치 3월 보름날 같았습니다. 모반을 일삼는 이 성의 위임받은 통치자로서, 저는 접견실 기둥에 기대어 서서 그 죄 없는 ‘나사렛’ 젊은이를 처형하려고 끌고 다니는 어두컴컴한 지옥의 악마 같은 저들의 무서운 계략을 꺾을 방안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제 주위의 모든 것이 황량하게 보였습니다. 예루살렘은 그 주민들을 게모니카로 가는 장례문을 통해 모두 토해 냈습니다. 황막하고 쓸쓸한 분위기가 제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습니다. 저의 위병들은 기병과 백부장이 가세한 가운데 무력에 의한 질서유지에 전력을 기울였습니다. 저는 홀로 남았으며, 그 때 잠깐 동안 지나간 그 순간은 마치 제 자신이 꿈 속에서 살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바람결을 타고 골고다에서 들려오는 큰 부르짖음 소리는 일찍이 인간의 귀로는 들어본 적이 없는 고통의 소리를 발하고 있었습니다. 검은 구름이 성전 꼭대기 위에 드리워졌으며 마치 면사포를 가린 것처럼 예루살렘을 덮고 있었습니다. 하늘과 땅에 나타난 징조들은 너무도 두려운 것이었습니다. 마치 디오니시우스가 “창조주가 고통을 당하고 있든지 우주가 떨어져 나가고 있든지 둘 중 하나다” 라고 크게 소리 질렀듯이 말입니다. 이러한 가공할 자연현상이 일어나는 동안 이집트에서는 무서운 지진이 일어났으며, 모든 사람들은 두려움으로 떨고 있었으며, 미신에 사로잡힌 유대인들은 거의 죽음의 공포에 직면해 있었습니다. 안티오크 사람인 나이 많고 학식이 풍부한 발도살이라는 한 유대인은 이 지진 소동이 있은 후 시체로 발견되었습니다. 그가 놀라서 죽었는지 아니면 슬픔으로 죽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는 그 나사렛 사람의 절친한 친구였습니다. p178
그날 밤 첫 시간이 되기 전에 저는 외투를 걸치고 성안으로 들어가 골고다로 향하는 문으로 가보았습니다. 그 제물은 죽어 있었습니다. 군중들은 아직도 흥분하고 있었으나 실상은 침울하여, 말없이 절망에 빠진 상태로 집에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목격한 사실은 그들을 공포와 양심의 가책으로 몰아넣었던 것입니다. 저는 또 저의 적은 로마병정의 일단이 슬픔에 잠긴 채 지나가는 것을 보았으며 기수는 슬픔의 표시로서 독수리표 깃발로 얼굴을 가리고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또 병정의 일부는 무엇인가 혼잣말을 하면서 지나갔지만 저는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신神들의 뜻을 쫓는 로마인들을 당황케 하는 기적들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가끔 한 무리의 남녀들이 걸음을 멈추고는 뒤돌아서서 움직이지도 않고 어떤 새로운 경이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갈보리 언덕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p178
저는 허탈한 마음과 슬픔에 차서 총독청에 돌아왔습니다. 그 나사렛 사람의 피가 아직 얼룩져 있는 계단을 오르다가 저는 문득 한 늙은이가 무엇을 탄원하는 듯한 태도로 서 있는 것과 그 노인 뒤에서 몇 명의 로마 사람들이 눈물을 지으면서 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내 발 앞에 몸을 굽히고 크게 통곡했습니다. 늙은 노인이 울고 있는 것을 보니 마음이 아팠으며, 비록 외국인이기는 하지만, 함께 있는 로마 사람과 같이 제 마음은 슬픔으로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날 제가 본 많은 사람들의 눈에는 눈물이 글썽거리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렇게 격한 감정을 가져본 적이 없었습니다. 예수를 반역해 판 사람들이나 그렇게도 반대증언을 하고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십시오. 그의 피 값을 우리에게 돌리시오” 하고 큰 소리쳤던 무리들은 비겁한 똥개같이 쑥 들어가버려, 그들의 이빨을 식초로 씻을 듯 시침을 떼고 있었습니다. 제가 들은대로 예수가 죽은 후에 부활하리라는 그의 가르침이 사실이라면 이 가르침은 많은 군중 가운데서 실현될 것이라고 저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영감님” 저는 감정을 억제하고 그 노인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누구시며 바라는 바 요구가 무엇입니까?” “저는 아리마대의 요셉이라고 합니다” 하고 그 노인은 대답했습니다. “저는 나사렛 예수를 장사지내고 싶습니다. 그것을 허락해 달라고 간청하려고 당신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마 27:57-61, 막 15:42-47, 눅 23:50-56, 요 19:38-42). “당신 소원대로 하십시오” 하고 저는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저의 부관 마르쿠스에게 명해 병정 몇 사람을 대동하고 가서 매장하는 것을 감독하고 불경스러운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라고 지시했습니다. p179
며칠 후 그의 무덤은 비어 있었으며, 그의 제자들은 각처로 다니면서 예수가 자신이 말한 대로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고 전파했습니다. 이 사건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던 사건보다 더 큰 혼란을 일으켰습니다. 이 사실에 대해서 확실히 말할 수 없지만 어느 정도 제 나름대로 조사해 보았습니다. 황제께서도 헤롯을 시켜 조사해 보시면 제게 잘못이 있는지의 여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요셉은 자신의 묘실에 예수를 매장했습니다. 그가 예수의 부활을 예상했는지 아니면 또 다른 묘실을 준비하려던 것이었는지 저도 알 수 없습니다. 예수가 매장된 다음날 제사장 한 사람이 총독청으로 와서 제게 말하길 예수의 제자들이 그의 시체를 훔쳐 숨긴 후 그가 생전에 예언한대로 살아난 것처럼 꾸미려고 한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 제사장을 친위대장인 마르쿠스에게 보내어 무덤을 지키기에 충분한 수대로 병정을 데리고 가서 배치하라고 한 후, 만일 무슨 사건이 발생한다면 그들의 책임이지 로마정부의 책임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무덤이 비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큰 흥분이 일어났으며 저는 더 큰 근심에 싸이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슬람이라는 사람을 보내어 자초지종을 조사하게 했는데 그는 제가 다음과 같은 상황을 연상할 수 있도록 자세히 말해주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무덤 위에 부드럽고 아름다운 빛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처음에 그는 여자들이 그들의 풍속대로 예수에게 발라드릴 향유를 가지고 왔는가 하고 추측했습니다. 그러나 곧 그는 여자들이 파수꾼을 통과할 수 없으리라는 데 생각이 미쳤습니다. 이러한 여러 생각이 그의 마음에 스쳐가는 동안 이상하게도 온 주위가 환하고 밝게 비추고 거기에 이미 죽었던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수의 壽衣 를 입은 채로 서 있는 것 같았다고 했습니다 (마 27:52-56). 그들 모두가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기쁨에 충만하여 환호하는 듯 했으며 동시에 그 주위와 위로부터 그가 들어본 적이 없는 아름다운 음악이 들려왔으며 온 누리에 하나님을 찬양하는 소리가 가득차고 넘치는 것 같았다고 합니다. p179
이런 것을 보고 듣는 동안 땅을 기고 헤엄치는 것 같았고 그는 토할 것 같이 힘이 없어 일어설 수가 없었다고 했습니다. 대지는 그 아래서 헤엄치는 듯하여 그의 감각은 마비되고 그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정신이 돌아왔을 때 어떻게 되었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있었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의 현기증이 잠에서 깨어나 너무 갑자기 일어남으로 흔히 있는 것 같은 그런 경우가 아니었는가 물었습니다. 그는 말하길, 잠들은 것이 아니라, 마치 임무수행 중에 잠을 잤기 때문에 사형선고를 받아 죽는 경우와 같았다고 했습니다. 또 말하기를 병정들은 서로 교대로 잠을 잤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그 광명은 얼마 동안이나 계속되었는지 물었습니다. 그는 대답하길 확실하게는 모르지만 약 한 시간 쯤 되지 않았나 짐작한다고 했습니다. 또 정신이 돌아온 후 그 무덤에 가 보았느냐고 물었으나 못 갔다고 대답했고 그 이유는 교체병이 오자마자 그들이 숙소로 가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제사장들에게 질문을 당했느냐고 물었더니 그렇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내용인즉 제사장은 밤에 일어난 사건이 지진이었으며, 파수꾼이 모두 잠들었을 때 제자들이 예수의 시체를 훔쳐간 것이라고 말한다면 그에게 돈을 주겠다고 하였다는 것이었습니다 (마 28:11-15). 그러나 그는 거기서 한 사람의 제자도 보지 못했으며 시체가 없어졌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었으며, 누군가의 말을 듣고 후에 알았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가 함께 대화한 제사장들의 예수에 대한 견해가 어떠하더냐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는 대답하길 제사장의 더러는 예수는 남자도 사람도 아니며 마리아의 아들도 아닐뿐더러 베들레헴의 처녀의 몸에서 탄생된 그 사람이 아니라고 말했다고 대답했습니다. p180
제가 생각하기로는 만일 유대인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다음과 같은 결론을 지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마치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듯이 모든 것이 그 사람의 손에 있다는 사실이 그를 따르는 자들이나 배척자들에 의해 알려지고 증거된 것처럼 그 모든 사실이 그 사람의 생애와 조화되기 때문입니다. 그는 물을 포도주로 만들 수 있었습니다 (요 2:1-11). 그는 바다를 잠들게 하고 폭풍을 멈추게 하고 (마 8:23-37, 막 4:36-41, 눅 8:22-25), 고기를 잡아 그 입에서 은전을 얻어낼 수 있던 분입니다 (마 17:24-27, 막 12:13-17). 만일 모든 유대인들이 증거하는 것처럼 그가 했다고 하는 많은 일들을 그가 할 수 있었다면 그를 대적하게 했던 그의 모든 주장은 사실일 수밖에 없다고 저는 감히 말씀드립니다. 그는 범죄함으로, 어떤 법을 어김으로, 또 누구를 그릇되게 함으로 비난을 산 적이 없었습니다. 이 모든 사실은 그를 저지했던 사람 뿐 아니라 그를 대항했던 수많은 사람들까지도 인정하고 있습니다. 십자가 옆에서 마르쿠스가 말한 것처럼 나는 진실로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고 말하고 싶습니다 (막 15:39). 각하여, 이것은 제가 할 수 있는 한 사실대로 기록한 것입니다. 이번 사건에 있어서 안티파테르가 제게 관한 여러 가지 가혹한 평을 했다고 들었습니다. 황제께서 사건의 전모를 아신 후 제가 취한 행동에 대해 바른 판단을 내려 주시도록 자세히 쓰느라고 많은 애를 썼습니다. 각하의 건승 健勝 을 빕니다. 저는 각하의 가장 충실한 신하입니다. 본디오 빌라도. (Ibid, p7-21)
이 본디오 빌라도가 퇴임한 후에 그의 뒤를 이어 마르셀루스 (주후 36-37) 가 계승해 통치했다. p181
호겐 : 다시 유세비우스의 교회사로 넘어간다.
제3장 기독교 교리가 신속하게 전세계로 퍼질 수 있었던 배경
구세주의 교훈은 거룩한 하늘의 감화와 협동 하에 마치 햇빛처럼 신속하게 전세계를 비추었다. 곧 거룩한 예언이 성취되어 영감을 받은 복음전도자와 사도들의 소리가 전세계로 퍼졌고 그들의 말은 세상 끝까지 전파되었다. 어느 도시 어느 마을에서나 마차 곡식이 가득찬 창고처럼 많은 지체들로 가득한 교회들을 발견할 수 있게 되었다. 조상 대대로 전해내려온 미혹된 생각들 때문에 우상숭배적인 미신에 사로잡혀 있던 사람들이 주님의 능력을 받은 사자들의 가르침과 기적으로 말미암아 자유를 얻게 되었다. 그들은 마치 무시무시한 주인에게서 구출되고 지극히 잔혹한 속박에서부터 자유를 얻은 듯이 한편으로는 수많은 신들과 악마들을 버리며 또 한편으로는 만물의 창조주이신 유일하고 참된 한 분 하나님만 존재한다고 고백했다. 그들은 우리 구주께서 사람들 사이에 심어주신 영감되고 합리적인 예배의 감화 밑에서 참으로 경건한 의식으로 하나님을 찬양했다.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은사는 다른 모든 국가들에게도 주어졌다. 고넬료는 팔레스틴에 있는 가이사랴의 주요인물로서 환상과 베드로의 행위를 통해 온 가족과 더불어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 안티오크의 많은 헬라인들도 스테판의 순교로 인해 흩어진 사람들이 전파한 복음으로 말미암아 역시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 안티오크 교회는 번창하여 교인수가 많아졌으며 많은 교사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이곳으로 모여왔다. 그중에는 바나바와 바울 및 많은 형제들도 있었다. 마치 고맙고 비옥한 토양과 같은 이곳에서 최초로 “크리스찬” 이라는 명칭이 생겨났다. 그 때에 아가보 Agabus 라는 예언자가 임박한 흉년에 대해 예언했으며, 사람들은 형제들의 궁핍함을 돕기 위해 구호금을 걷고 바울과 바나바에게 구제의 전권을 위임했다. p94
제4장 티베리우스의 뒤를 이어 황위에 오른 가이우스 Gaius (칼리굴라) 는 헤롯을 추방하고 아그리파를 유대의 왕으로 임명했다
티베리우스는 약 22년간 제국을 통치했다. 그가 사망한 뒤 황제가 된 가이우스 Gaius (가이오 칼리굴라) 는 유대의 통치권을 아그리파에게 부여했으며, 그를 분봉왕 빌립과 리사니아 Lysanias 를 다스릴 왕으로 임명했다. 또 얼마 후 그는 분봉왕 헤롯의 많은 범죄로 인해 헤롯과 헤로디아를 추방했고 헤롯이 다스리던 왕국까지도 그에게 주었다. 헤롯은 우리 주님의 수난과 관련된 인물이다. 요세푸스는 이 사실들을 증거하고 있다. 이 가이우스 황제의 재위 기간 중에 필로 Philo 가 유명해졌다. 필로의 학식은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해외의 사람들에게도 알려져 있었다. 그는 히브리인의 자손으로서 가문과 혈통 면에서 알렉산드리아의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그가 거룩한 성경과 조국의 제도에 관해 얼마나 연구했는지는 그의 저서가 잘 나타내주고 있다. 또 그가 외국의 철학과 인문과학에 대단히 조예가 깊었음은 재삼 거론할 필요조차 없다. 그는 플라톤과 피타고라스학파의 추종자로서 당대의 모든 사람들보다 탁월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p95
제5장 필로는 유대인을 변호하기 위한 사절로 가이우스 황제에게 파견되었다
필로는 5권의 책 속에서 가이우스 황제의 통치 하에서 유대인들이 겪은 환난에 관한 기사를 제공한다. 그는 또 가이우스 황제의 광기도 거론했는데, 가이우스는 스스로를 신이라고 칭했고 권력을 이용해 지독한 학정을 베풀었다. 필로는 가이우스 통치 하에서의 유대인들의 비참한 상태 및 알렉산드리아에 거하고 있는 동포들을 위해 로마로 파견되어가서 수행한 자신의 대사직을 언급했다. 그는 가이우스 황제 앞에서 자기 조상들의 율법과 관례를 옹호했는데, 가이우스는 그를 비웃고 조소했으며, 자칫하면 그는 목숨까지 잃을 뻔했다. 요세푸스도 <고대사> 제18권에서 이 일들을 언급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p95
“알렉산드리아에 거하고 있는 유대인들과 헬라인들 사이에 분쟁이 일어났으므로 각 파에서 선정된 3명의 대표자들이 가이우스 황제 앞에 출두하게 되었다. 알렉산드리아인들의 대표자인 아피온 Apion 은 유대인들을 비방하는 말을 많이 했다. 그중에는 유대인들이 카이사르의 숭배를 경멸한다는 내용도 있었다. 로마제국에 예속된 다른 모든 국가들은 카이사르를 기리기 위해 제단과 신전을 건축하며 여러 면에서 그를 신으로 여기고 있는데 반해, 오직 유대인들만은 카이사르의 흉상을 세우고 그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것을 수치로 여긴다는 것이었다. 아피온이 가이우스의 진노를 자아낼 목적으로 지독한 비난을 한 뒤, 유대인들의 대표자인 필로는 이 비난에 맞서 유대인들을 변호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그는 모든 면에서 훌륭했으며 당시의 알라바크 Alabarch (알렉산드리아에 거하는 유대인들의 원수였다) 였던 알렉산더의 형제로서 특히 철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그러나 황제는 그에게 퇴장을 명했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뜻대로 변론하지 못했다. 가이오는 대단히 격노했기 때문에 분명히 유대인들에 대한 지극히 악한 일을 꾀할 것이었다. 필로는 모욕을 당하고 떠났다. 그는 자기와 동행했던 유대인들에게 말하길, 가이우스가 그들에게 격노하고 있지만 사실은 이미 하나님께 도전한 것과 같으므로 위안을 삼으라고 했다” p96 이상은 요세푸스의 기록이다. 필로 자신도 자신이 행한 대사의 직무를 묘사하면서 당시 그들이 그에게 행한 일들을 상세하고 정확하게 기록했다. 본서에서는 이 일을 언급하지 않겠으며, 다만 그리스도께서 범한 일들로 인해 곧이어 유대인들에게 발생했음이 분명하다고 독자들이 느끼게 될 일들만 언급하려 한다. 첫째, 티베리우스 시대에 로마에서는 당시 티베리우스의 총애를 받고 있던 세야누스 Sejanus 가 유대민족을 완전히 멸절시키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리고 유대에서는 주님께 온갖 범죄를 가하도록 방조했던 본디오 빌라도가 예루살렘 성전에 대해 유대인들 사회에서 인정되지 못할 일을 꾀했으므로 이에 흥분한 유대인들은 큰 폭동을 일으켰다. p96
제6장 그리스도께 무엄한 일들을 행한 유대인들에게 임한 재난
티베리우스가 사망한 뒤 통치권을 이어받은 가이우스는 많은 사람들에게 무수한 폭정을 행했으며, 특히 유대 민족에게 많은 고통을 주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역시 필로의 저서를 통해 알 수 있다. 그는 이렇게 기록했다. “모든 민족, 특히 유대민족을 향한 가이우스의 행동은 지극히 변덕스러웠다. 그는 유대인들을 극도로 미워했기 때문에 알렉산드리아를 비롯한 모든 성읍에 있는 유대인들의 예배장소를 자기를 섬기는 장소로 바꾸고 자기의 조상 彫像 과 초상으로 가득 채웠다. 이전에는 다른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황제 자신의 세상을 세우는 것을 허락했었는데 이제는 그것들을 세우라고 절대적인 명령을 내리기 시작했다. 그는 거룩한 성읍에 있는 성전, 이제까지 아무도 건드리지 못했고 신성불가침한 도피처로서의 특권을 부여받고 있던 성전을 자신의 신전으로 바꾸어 ‘눈에 보이는 주피터, 가이우스 2세의 신전’ 이라고 부르도록 했다 (επφανουs Διοs)” 가이우스 황제의 재위 기간 중에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들에게 임한 많은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재앙들을 필로는 자신의 두 번째 저서 <On the Virtues> 에 기록했다. 요세푸스도 필로와 의견을 같이 하여, 유대민족의 재앙들은 빌라도의 시대에 주님께 범한 죄악에 그 기원을 둔다고 암시한다. 그가 <유대전쟁사 The Jewish War> 제2권에 기록한 것을 살펴보기로 하자. “티베리우스 황제에 의해 유대의 총독으로 임명된 빌라도는 밤중에 카이사르의 신상을 눈에 띄지 않도록 덮어서 성전으로 운반했다. 이튿날 이 일로 인해 유대인들은 소요를 일으켰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가까이 다가가서 자기들의 율법적 제도에서 경멸하며 타락으로 여기는 광경을 보고 당황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성읍에 다른 신상을 세우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p98
이 기사를 복음서 기자들의 기록과 비교해보면, 빌라도의 통치를 받고 있던 유대인들이 자기들에게는 카이사르 외에 다른 임금이 없다고 외쳤던 그 선언이 그대로 임했음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요세푸스는 곧이어 그들에게 또 다른 재앙이 임했음을 기록하고 있다. “이런 일들이 있은 후 그는 (빌라도) 고르반 Corban 이라고 불리는 봉납물 奉納物 을 수로 水路 건설에 사용해 또 다시 소요가 일어났다. 이 수로는 길이가 거의 300스타디엄이나 되었다. 유대 군중들은 이로 인해 대단히 상심했으므로 빌라도가 예루살렘에 왔을 때 그들은 총독을 에워싸고 소리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빌라도는 이미 그들의 소요를 예상했으므로 무장한 병사들에게 유대인과 똑같은 옷을 입혀 백성들 사이에 섞어 놓았다. 그는 그들에게 칼을 사용하지 말고, 시끄럽게 떠드는 사람들을 곤봉으로 치라고 명령했다. 그가 심판석에서 신호를 함에 따라 많은 유대인들이 곤봉에 맞아 죽었고, 또 많은 사람들은 도망치다가 동료 백성들의 발에 밟혀 죽었다. 결국 이 학살에 의해 군중들은 진압되어 조용해졌다” 요세푸스는 이밖에도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많은 소요를 기록했다. 그 이후로도 폭동, 전쟁, 악한 음모가 유대의 모든 도시에서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으며 결국 베스파시안이 포위하여 그들을 진압했다고 기록했다. 이와 같이 거룩한 공의는 그리스도에게 행한 범죄로 인해 유대인들에게 이런 식으로 임했다. p99
제7장 빌라도의 자살
가이우스 Gaius 황제 시대에 주님을 십자가에 처형했던 유대의 총독 빌라도가 스스로의 목숨을 끊음으로서 자신의 사악함에 보복했다는 사실도 살펴볼만한 일이다.
하나님의 공의는 그의 형벌을 그리 오래도록 미룬 것 같지는 않다. 이것은 올림피아기紀와 당시의 의사록을 기록한 희랍 역사가들이 진술하고 있다. p99
제8장 클라우디우스 시대에 발생한 기근
가이우스 Gaius 황제가 다스린 기간은 4년이 못 된다. 그의 뒤를 이어 제국의 주권을 차지한 사람은 클라우디우스 Claudius (클라우디오) 황제이다. 그의 통치 기간 중에 전세계적으로 흉년이 들었다. 이것은 전혀 우리와 신앙이 다른 역사가들이 기록해 전해내려 오는 사실로서, 사도행전에 기록된 바 천하가 크게 흉년이 들리라고 한 예언이 성취된 사건이다. 누가는 사도행전에서 클라우디오 때에 기근이 있을 것이라고 진술한 뒤에 안티오크 교회의 형제들이 각기 자기의 능력대로 부조를 몰아 바나바와 바울 편에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보냈다고 기록했다. p100
제9장 사도 야고보의 순교
“그 때에 (클라우디우스 시대) 헤롯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 몇 사람을 해하려고 하여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 (행 12:1-2). 클레멘트는 조상들로부터 전해받은 전승에 따라 기록한 <강요 Institution> 제7권에 야고보에 대한 주목할만한 이야기를 첨가했다. 그의 기록에 의하면 야고보를 재판정으로 데리고 가던 사람은 야고보가 믿음을 증거하는 것을 보고서 감동을 받아 자신도 신자라고 고백했고, 그리하여 이 두 사람은 함께 형장으로 끌려갔다고 한다. 그는 도중에 야고보에게 자신을 용서해달라고 간청했다. 야고보는 잠시 생각한 뒤에 “그대에게 평화가 있길 기원하노라” 고 대답하고 그에게 입을 맞추었다. 이들은 함께 참수되었다. 성경의 기록에 의하면 유대인들이 야고보의 처형을 기뻐하는 것을 본 헤롯은 베드로도 잡아 옥에 가두었다. 만일 밤중에 천사가 나타나 그를 감옥에서 구해내 복음을 전파할 수 있도록 해주지 않았다면 헤롯은 아마 베드로까지도 살해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베드로를 위해 섭리를 베푸셨다. p100
제10장 사도들을 박해한 헤롯 아그리파에게 임한 하나님의 심판
사도들을 핍박하려는 헤롯왕의 시도들에 대한 심판은 그다지 오래 미루어지지 않았다. 곧 사도들에게 가한 음모에 대한 거룩한 공의가 그에게 임했다. 사도행전의 기록을 보면 그는 가이사랴로 가서 명절에 찬란한 왕의 옷을 입고서 심판석 앞 상석에 앉아 백성들에게 열변을 토했다. 백성들은 마치 그의 말이 인간의 소리가 아니라 신의 소리인듯이 그를 찬양했다. 그러나 성경은 기록하길 “주의 사자가 곧 치니 충이 먹어 죽으니라” 고 했다 (행 12:23). 흥미로운 것은 이 기이한 사건에 관한 성경의 기록과 요세푸스가 기록한 역사가 일치한다는 것이다. 요세푸스는 <고대사 Antiquities> 제19권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여 진리를 증거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헤롯) 3년간 온 유대를 통치한 뒤 가이사랴로 갔다. 가이사랴는 과거에는 스트라토 Strato 의 망대라고 불렸다. 그곳에서 그는 카이사르 (황제) 를 기리는 대중 집회를 개최하고서, 그것을 일종의 자기 안전을 위한 축제라고 여겼다. 이 축제에는 그 지역 전체에서 권력과 지위가 높은 사람들이 많이 모였다. 축제가 시작된 지 이틀째 되는 날 헤롯은 새벽 동틀 무렵 훌륭한 옷감으로 만들어 은으로 세공을 한 제복을 입고 강당으로 나아갔다. 그곳에 섰을 때 그의 옷을 장식한 은은 아침 햇빛을 받아 반짝여 관중들에게 대단히 훌륭하고 장엄한 광휘를 나타냈다. 아첨꾼들은 각기 여러 가지로 소리를 쳤다. 그들은 그를 신이라고 부르며 다음과 같은 말로 그의 자비를 구했다. ‘우리는 지금까지 당신을 인간으로 경외했으나 이제부터는 인간의 본성을 초월한 분임을 고백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에게 유익한 것은 아니었다. 왕은 그들을 꾸짖지 않았으며, 그들의 불경한 아첨을 거부하지도 않았다. p101
잠시 후 자리에서 이러선 그는 자기 머리 위쪽에 천사가 앉아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과거에는 이것이 자기의 성공의 원인이었으나 이번에는 재앙의 원인이 될 것이라고 직감했다. 그는 갑자기 가슴에 통증을 느꼈고, 또 창자에 통증이 밀려와 그를 크게 괴롭히기 시작했으므로 그는 사람들에게 말했다. ‘당신들의 신神인 나는 이제 이 세상을 떠나라는 명령을 받고 있다. 곧 운명은 나에 대한 당신들의 거짓된 주장의 오류를 증명할 것이다. 당신들이 불멸하는 신이라고 부른 나는 이제 어쩔 수 없이 죽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정해 주신대로 자기의 운명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는 이렇게 말하면서도 점점 심해지는 고통으로 인해 몹시 괴로워했다. 사람들은 황급히 그를 궁전으로 데려갔다. 왕이 곧 죽을 것이라는 소문이 백성들에게 퍼졌다. 많은 군중들은 국가의 관습대로 부인과 자녀들을 데리고 베옷을 입고 앉아 왕을 위해 하나님께 탄원했다. 도처에 슬픔과 눈물이 가득했다. 그러나 왕은 높은 곳에 있는 방에 기대어 앉아 땅에 엎드린 백성들을 내려다보면서 눈물을 흘렸다. 결국 나흘 동안 계속된 창자의 통증으로 인해 그는 통치한지 7년이 되는 해 5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가이우스 Gaius 황제 밑에서 4년째 되는 해에 헤롯의 분봉왕국의 통치권을 받았고, 그 후 3년 동안 클라우디우스 황제 밑에서 유대를 다스렸다“ 이것은 요세푸스의 기록이다. 그의 기록은 성경과 놀랍도록 일치한다. p102
제11장 사기꾼 드다 Theudas 와 그의 추종자들
누가는 사도행전에서 가말리엘을 소개했는데, 가말리엘은 사도들에 관해 협의하면서 말하길 “이전에 드다 Theudas 가 일어나 스스로 자랑하매 사람이 약 사백이나 따르더니 그가 죽임을 당하매 좇던 사람이 다 흩어져 없어졌고” 라고 했다 (행 5:36). 이제 동일한 사건에 대한 요세푸스의 증언을 살펴보자. 그는 이미 앞에서 인용했던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상세하게 진술하고 있다. “파두스 Fadus 가 유대총독으로 있을 때에 드다라고 하는 사기꾼이 일어나 많은 사람들을 선동하며 그들에게 모든 소유를 가지고 자기를 따라 요단강으로 오라고 권면했다. 그는 자기는 선지자로서 자기가 명령하면 요단강이 둘로 갈라져 쉽게 그 사이로 지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러한 약속으로 많은 사람들을 미혹했다. 그러나 파두스는 사람들이 어리석은 짓을 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는 일단의 기마병을 파견했으며, 병사들은 불시에 그들을 기습해 많은 사람을 살해하고 생포했다. 그들은 드다를 사로잡은 뒤 그의 머리를 베어 예루살렘으로 가져왔다” 요세푸스는 이밖에도 클라우디우스 Claudius 시대에 발생한 흉년에 대해서도 기록했는데 그것은 다음 장에서 언급하겠다. p104
제12장 오슬헤니아 Osrhoenians 의 여왕 헬렌
호겐 : 유대고대사 제20권 2장 1-5 p420-430 http://blog.naver.com/oyashiki/100189684685
이 무렵 유대에 큰 기근이 들었다. 여왕 헬렌은 이집트로부터 상당한 돈을 주고 곡식을 구입해 궁핍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 진술은 사도들에 관한 사도행전의 기록과 일치한다. 사도행전에는 안티오크의 형제들이 각기 능력대로 부조를 모아 유대에 있는 형제들에게 보내기로 결정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들은 이 결정대로 시행했으며, 바나바와 바울 편에 그것을 장로들에게 보냈다. 요세푸스가 언급한 이 헬렌 Helen 여왕의 기념비를 오늘날 일리아 AElia 라고 불리는 시 (예루살렘) 의 교외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그녀는 아디아베니 Adiabeni 의 여왕이었다고 한다. p104
제13장 시몬 마구스 Simon Magus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이 널리 사람들에게 퍼졌으므로 제국의 중심지를 장악할 계획을 강구하던 구원의 원수는 시몬을 그곳으로 보냈다. 시몬에 대해서는 이미 앞에서도 언급한 바 있다. 그는 교활한 술책으로 많은 로마 시민들에게 접근하여 그들을 미혹했다. 이 사실은 유명한 저술가인 저스틴 Justin 에 의해서도 증명되었다. 저스틴은 사도시대 직후에 활동한 인물로서, 그에 대해서는 앞으로 적절한 곳에서 이야기하겠다. 그는 안토니누스 Antonine 에게 보낸 첫 번째 기독교 신앙 변론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우리 주님께서 승천하신 후 어떤 사람들은 악마의 대리인으로 활동하면서 스스로 신이라고 했다. 이들은 아무런 박해도 받지 않았으며, 심지어 사람들은 그들을 존경해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사마리아의 기돈 Githon 출신의 시몬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클라우디우스 황제 시대에 악마들의 조종을 받아 많은 마술을 행했고, 제국의 수도 로마에서는 그를 신으로 여겼다. 당신들은 티베르 강에 있는 두 개의 다리 사이에 그의 신상을 세워놓고 기리고 있었다. 그 신상에는 라틴어로 Simoni Deo Sancto 라고 새겨져 있는데, 이것은 ‘거룩하신 하나님, 시몬에게’ 라는 뜻이다. 그리고 거의 모든 사마리아 사람들 및 소수의 다른 민족들도 그를 예배하며 그를 높으신 하나님이라고 고백했다. 또 과거 페니키아의 두로에서 창녀생활을 하던 헬렌이라는 여자도 시몬에게 가담했는데, 그녀는 그에게서 발현한 최초의 이데아 Idea 라고 불렸다” p105
이것은 저스틴의 증언이다. 이레니우스 Irenaeus 도 그의 저서 <이단을 반박함 Against Heresics> 제1권에서 동일한 진술을 했다. 그는 이 저서에 시몬의 불경함과 타락한 교리에 대한 기사도 첨가했다. 그러나 이것에 대한 자세한 진술은 앞서 말한 시몬뿐 아니라 이레니우스의 저서에서 전반적으로 다루어진 모든 이교 창시자들의 기원, 생애 및 거짓교리들, 그리고 그들 모두의 주장과 제도들을 알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나 필요한 것이지 우리에게는 필요가 없는 일일 것이다. 어쨌든 우리는 시몬을 모든 이단의 선도자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의 시대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의 이단을 좇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지극히 순결한 생활을 한 기독교인들의 겸손한 철학에 악영향을 끼쳤다. 그들은 이것을 떠나 다시 우상과 미신을 섬기기 시작하여 시몬과 앞에서 말한 헬렌 (창녀, 13장) 의 초상화와 조각상 앞에 엎드려 경배했다. 그들은 분향과 제물과 제주 祭酒 로서 그들을 예배했다. 이것 외에 그들이 비밀로 하는 일들은 신탁의 말과 함께 사용되는데, 그것들을 조금만 언급해도 사람들은 깜짝 놀라고 당황할 것이다. 그것들은 참으로 놀랍고 어리석고 광기로 가득 차 있어서 차마 그것들을 기록할 수 없으며, 그들의 지나친 비열함과 음탕함은 입에 담을 수도 없을 정도이다. 이 지극히 가증스런 이단은 온갖 종류의 악에 물든 불쌍한 여인들을 유혹하는 분파로서, 가능한 한 모든 사악한 타락행위들을 실천했다. p106
제14장 로마에서 복음을 전파하는 베드로
악의 세력, 즉 모든 선의 원수이며 인류 구원의 방해자의 악함은 대단히 컸으며, 따라서 시몬을 이 시대의 조상이며 창시자로 옹립했다. 마치 그를 구세주와 사도들의 거룩한 목적에 맞설 크고 강한 대적자로 삼으려는 듯했다. 그러나 거룩하신 하늘의 은혜는 종들과 협력하여 곧 이 악한 자가 붙인 불길을 꺼버렸으며, 그것들 사이로 다니며 하나님의 지식에 맞서 스스로 높아진 모든 산을 낮추고 부쉈다. 시몬이나 당시에 존재하던 그 누구의 음모로도 사도시대를 대적해 아무런 영향을 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진리가 널리 선포되어 모든 사람을 압도했으며, 거룩한 말씀이 하늘로부터 인간을 비추어 이 세상에서 활약하고 사도들과 함께 거하며 모든 반대와 맞서 이기고 번성했기 때문이다. 이 마술사는 과거에 유대에서 사도 베드로로부터 사악함을 정죄 받았을 때 초자연적이고 신적인 광휘 때문에 영적 눈이 멀었으므로 서쪽으로 도피하는 것이 자신의 마음대로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해 바다를 건넜다. 그가 로마에 도착했을 당시 그곳에는 악한 정신이 자리잡고 있었으므로 그의 계획은 곧 크게 성공을 거두었고 그는 그 도시의 시민으로부터 신으로 숭배를 받았으며 그의 신상이 세워졌다. 그러나 이 성공은 그다지 오래가지 못했다. 왜냐하면 클라우디우스 때에 하나님의 자비하고 은혜로운 섭리에 의해 능력있고 위대한 사도로서 용감하게 모든 사람들을 인도한 베드로가 이 인류를 해치는 페스트를 없애기 위해 로마로 왔기 때문이다. 그는 마치 하나님의 귀한 사령관처럼 거룩한 갑옷으로 무장하고 계시된 빛이라는 귀중한 상품을 가지고 서방으로 와서 사람들에게 그 빛과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유익한 교리를 선포했다. p107
제15장 마가복음
거룩한 말씀이 로마인들 사이에 자리잡게 되자 시몬과 그의 세력은 곧 파괴되어 사라지고 말았다. 반면에 베드로가 전하는 신앙의 광채는 모든 청취자들의 마음을 밝혀주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복음의 교리를 한 번 듣거나 받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었으므로 베드로의 동반자인 마가에게 구전으로 전해진 교리를 기록으로 남겨달라고 끈질기고도 간곡히 청했다. 결국 그들의 끈질긴 설득에 마가는 굴복했다. 그리하여 오늘날 마가복음이라고 불리는 역사서가 기록되었다. 성령의 계시를 받아 이 일을 알게 된 베드로는 이 사람들의 열심히 인해 기뻐했고, 그 역사서는 그의 재가를 얻어 교회 내에서 읽혀지게 되었다. 이것은 클레멘트 Clement 가 그의 저서 <Institutions> 제6권에 기록한 것으로서 그의 증언은 히에라폴리스 Hierapolis 의 주교 파피아스 Papias 의 증언에 의해 확증된다. 베드로는 그의 첫 번째 서신에서 마가를 언급했다. 베드로전서는 로마에서 작성되었다고 하는데, 그는 로마를 바빌론이라는 특이한 호칭으로 불러 이 사실을 나타냈다. “함께 택하심을 받은 바빌론에 있는 교회가 너희에게 문안하고 내 아들 마가도 그리하느니라” (벧전 5:13). p108
제16장 마가가 최초로 이집트 주민에게 기독교를 전파하다
마가는 최초로 이집트로 파견되어 그곳에서 자신이 거룩한 복음을 전파했으며 알렉산드리아에 처음으로 교회들을 세웠다고 한다.
그곳에는 처음부터 수많은 남녀 신자들이 모였으며, 극도로 철학적인 훈련을 하고 엄격한 생활을 했다.
그리하여 필로 Philo 는 그들의 일, 모임, 환대, 즉 그들의 모든 생활 태도를 기록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p108
제17장 이집트의 금욕주의자들에 관한 필로의 기록
제18장 현재까지 전해내려오는 필로의 저서들
필로는 가이우스 Gaius 시대에 로마로 왔는데, 클라우디우스 시대에는 가이우스의 불경함에 관해 저술한 <덕에 관하여 On the Virtues> 라는 제목의 저서를 로마원로원 앞에서 낭독했다고 한다. 원로원은 그의 낭독에 크게 경탄해 이 논문을 도서관에 비치할 가치가 있다고 여겼다. 이 가간 동안에 바울은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한 여행을 마치고, 다시 일루리곤 Illyricum 으로 돌아갔으며, 클라우디우스는 로마에서 유대인들을 추방했다 (행 18:2). 이 때 아굴라 Aquila 와 브리스길라 Priscilla 가 다른 유대인들과 함께 로마를 떠나 아시아로 갔다. 그들은 그곳에서 사도 바울과 함께 거했는데 바울은 이미 자신이 세워놓은 교회의 교인들의 신앙을 튼튼히 하고 있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들을 사도행전을 통해 분명히 알 수 있다. p117
제19장 유월절에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에게 임한 재난
클라우디우스가 로마제국을 통치하고 있을 때에 유월절을 즈음하여 예루살렘에서 큰 폭동이 일어났다. 그 와중에 성전 문밖으로 밀려나오던 유대인들 중에 삼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서로에게 밟혀죽었다. 그리하여 이 절기는 온 국가와 모든 가정에서 눈물과 애도의 절기가 되고 말았다. 이것은 요세푸스가 기록한 기사를 거의 그대로 옮긴 것이다. 한편 클라우디우스는 아그리파의 아들 아그리파 2세를 유대인의 왕으로 임명했고, 펠릭스 Felix 를 모든 사마리아와 갈릴리 및 요르단 건너편 지역의 총독으로 임명했다. 클라우디우스는 13년 8개월 동안 통치했고, 그의 사후에는 네로가 황위에 올랐다. p117
제20장 네로 시대에 예루살렘에서 행해진 일
요세푸스는 <고대사 Antiquities> 제20권에서 네로 시대에 펠릭스가 유대의 총독으로 있을 때 발생한 제사장들의 폭동을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예루살렘에서는 대제사장들에 대항하는 제사장들과 백성들의 지도자들의 폭동이 있었다. 그들은 각기 지극히 대담하고 반감을 품은 사람들을 모아 그들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들은 서로 욕설을 하고 돌을 던지며 싸웠다. 이러한 소요의 와중에서 모두가 그들을 비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일은 통치자가 없는 상태에서 지극히 방종하게 행해졌다. 대제사장들은 부끄러움도 모르고 뻔뻔스럽게도 자기 하인들을 창고로 보내어 마땅히 제사장들에게 돌아가야 하는 십일조를 탈취했다. 가난한 제사장들은 자기들이 곤궁해 죽게 되었다. 이처럼 당파들의 폭력이 모든 공의로운 방법보다 우선했다” 요세푸스는 거의 같은 시기에 예루살렘에 어떤 종류의 강도들이 생겨났다고 서술했다. “그들은 밝은 대낮에 예루살렘 한복판에서 사람들을 살해했다. 그리고 특히 명절에는 옷 속에 단검을 숨긴 채 군중 속에 섞여 있다가 고관들을 찔렀다. 살인자들은 고관들이 땅에 쓰러질 때에 주위의 구경꾼들과 분노하는 체하여 신뢰를 얻었으므로 발각되지 않았다. 최초로 대제사장 요나단 Jonathan 이 살해되었고 뒤이어 매일 많은 사람들이 살해되었다. 이 일이 주는 경악감이 그 해악 자체보다 더 컸다. 모든 사람들은 마치 전쟁터 한복판에 있는 것처럼 죽음을 예상하고 지냈다” p118
제21장 사도행전에 언급된 이집트인
요세푸스는 여러 가지 사실들을 기록한 뒤에 순서에 따라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런 일들보다는 이집트인 사기꾼 때문에 보다 큰 피해를 입었다. 이 사람은 유대에 들어와 선지자로 행세하며 약 3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유혹해 자기에게로 끌어들였다. 그리고 나서 그는 그들을 사막에서 인도하여 감람산으로 이끌어갔다. 그는 무력으로 로마군 수비대를 정복한 뒤 예루살렘에 입성하고 자기의 추종자들을 호위병으로 사용해 백성들을 다스리려 계획했다. 그러나 펠릭스 Felix 는 그의 공격을 예상하여 로마군대를 이끌고 나가 그와 교전했고 모든 백성들도 그에 합세했다. 그리하여 전쟁에 패배한 이 이집트인은 몇 사람과 함께 도망했고 대부분의 추종자들은 죽거나 생포되었다” 이것은 요세푸스의 역사서 (유대전쟁사) 제2권에 기록된 기사이다. 이 이집트인에 관한 기사에 사도행전에 언급된 내용을 곁들이는 것도 가치가 있을 듯하다. 사도행전을 보면 유대인의 무리가 바울을 대적하여 폭동을 일으켰을 때에 펠릭스 휘하의 백부장은 “네가 이전에 난을 일으켜 삼만의 자객을 거느리고 광야로 가던 이집트인이 아니냐” 라고 말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어쨌든 이것은 펠릭스가 총독으로 있을 때에 있었던 사건들이다. p120
제22장 바울은 로마로 압송되었으나 자신을 변론하여 무죄선언을 받았다
네로는 펠릭스 Felix 의 후임으로 베스도 Festus 를 총독으로 임명했다. 바울은 베스도의 치하에서 자신을 변론한 뒤 죄수의 몸이 되어 로마로 압송되었다. 이 때 아리스타르쿠스 Aristarchus 도 그와 동행했다.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그를 동료죄수라고 부르고 있다.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는 바울이 로마에서 꼭 2년 동안 죄수생활을 했으며 아무 제한도 받지 않고 복음을 전파했다고 기록하고서 자신의 기록을 마감하고 있다. 바울은 자신을 변론한 뒤에 다시 복음 전파사역에 나서게 되었으며 두 번째로 로마시를 방문했을 때 순교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죄수생활을 하는 동안 디모데후서를 기록했다. 이 서신에서 그는 자신의 첫 번째 변론과 임박한 죽음을 언급했다. 여기에서 바울이 자신에 관해 증거한 내용에 귀를 기울여 보자. “내가 처음 답변할 때에 아무도 나와 함께하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이 나를 버렸으나 그것을 그들의 책임으로 돌리지 아니하시기를 하나님께 기도하노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를 강건하게 하셨으니 이것은 나로 말미암아 전도의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모든 이방인들이 듣게 하려 하심이라.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져졌느니라” p120
“처음에 전도의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게 하기 위해 사자의 입에서 건져졌다” 는 말에서 사자는 잔인한 네로를 암시한다. 그는 “그가 나를 사자의 입에서 구하실 것이다” 라는 표현을 덧붙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죽음이 임박해 있음을 영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고로 그는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져졌느니라” 라고 말한 뒤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라고 덧붙여 자신이 순교할 것임을 나타내고 있다. 그는 그 서신의 다른 곳에서는 자신이 순교할 것을 더욱 분명히 표현해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이 왔도다” 라고 말했다. 사실 바울이 디모데후서를 쓸 당시에는 누가만이 그와 함께 있었으나, 바울이 첫 번째 서신을 쓸 때에는 누가마저 없었음을 나타내고 있다. 아마도 누가는 그 무렵에 사도행전을 기록했으며 자신이 바울과 함께 있었던 시기까지의 이야기를 계속 적어갔을 가능성이 있다. 지금까지 바울의 순교는 누가가 그의 역사서를 기록하던 대, 즉 그가 로마에 머물렀던 시기에 발생하지 않았다는 것을 설명했다. 사실 네로는 초기에는 다소 온화한 정치를 했으므로 사도 바울의 교리 전파가 보다 쉽게 용납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네로가 의를 버리고 극단적으로 악하게 됨에 따라 바울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을 박해하기 위해 강구된 조처들의 효과를 경험하게 되었다. p121
제23장 주님의 형제 야고보의 순교
바울이 황제에게 상소했기 때문에 베스도 Festus 는 그를 로마로 압송했다. 따라서 자신이 놓은 덫으로 그를 잡으려는 희망이 좌절된 유대인들은 당시 사도들에 의해 예루살렘의 감독에 임명되었던 주의 형제 야고보를 공격했다. 그들이 야고보에게 가한 악한 조처들은 다음과 같다. 그들은 야고보를 공공장소로 데리고 가면서 그에게 사람들 앞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부인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의 생각, 기대와는 달리 그는 단호한 목소리로 군중들 앞에서 자신의 소신을 말했고, 또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구세주라고 고백했다. 덕이 많고 경건하여 사람들 중에서 가장 의롭다고 여겨지는 이 사람의 증언을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었던 그들은 당시 무정부 상태로 인해 야기된 파격적인 기회를 이용해 그를 살해했다. 왜냐하면 이 무렵 유대의 총독 베스도 Festus 가 사망하여 이 지방에는 총독이나 수장이 없었기 때문이다. 야고보가 어떻게 죽었는지에 대해서는 이미 클레멘트 Clement 가 언급한 바 있다. 그는 성전의 익면 翼面에서 밀려 떨어져 곤봉에 맞아죽었다. 사도 시대 직후에 활동한 헤게시푸스 Hegesippus 는 자신의 주석서 제5권에 야고보에 관해 가장 정확한 기사를 제공하고 있다. p122
“당시 같은 이름의 인물이 여럿 있었으므로 의인 야고보라고 불렸던 주의 형제 야고보는 주님의 시대로부터 사도들과 함께 교회의 통치를 맡고 있었다. 이 사도는 어머니의 복 중에 있을 때부터 하나님께 바쳐졌다. 그는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않았으며, 생명이 있는 음식을 삼갔다. 또 머리에 삭도를 대지 않았고, 기름을 바르지 않았고 또 목욕도 하지 않았다. 오직 야고보만이 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이 있었다. 그는 결코 털옷을 입지 않고 베옷을 입었다. 그는 홀로 성전에 들어가는 습관이 있었는데, 종종 무릎을 꿇고 백성들을 용서해달라고 간구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처럼 쉬지 않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했기 때문에 그의 무릎은 마치 낙타의 발처럼 딱딱해졌다. 그리고 선지자들이 그에 대해 선포한 것과 같이 그는 지극히 경건했기 때문에 의인, 또는 오블리아스 Oblias (또는 Zaddick, Ozleam) 이라고 불렸다. 오블리아스란 공의와 백성들의 보호를 의미한다. 나의 주석서에 언급된 일곱 분파의 사람들 중 어떤 이들이 그에게 예수에게로 이르는 문은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그는 ‘그분이 구세주라는 사실’ 이라고 대답했다. 이 대답을 듣고 어떤 사람들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었다. 그러나 앞서 언급된 이단들은 부활, 그리고 장차 그가 모든 사람의 공로에 따라 상급을 주러 오실 것을 믿지 않았다. p123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야고보 때문에 그렇게 믿었다. 통치자들 중 많은 사람들이 믿게 되자, 유대인들과 서기관, 그리고 바리새인들은 소요를 일으켰으며 백성들이 예수를 메시아로 기대하게 될 위험이 있다고 말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함께 야고보에게 와서 말했다. ‘백성들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기대하여 그를 좇음으로 빗나가고 있습니다. 부디 그들을 제지해 주십시오. 우리는 유월절을 지키러 오는 모든 사람에게 예수에 관해 올바르게 권면해 주시기를 당신에게 간청합니다. 우리는 모두 당신을 신뢰하고 있습니다. 우리와 모든 백성들은 당신이 의로운 사람이며 사람을 중히 여기지 않는다고 확신합니다. 그러니 높은 곳, 당신의 모습이 뚜렷이 보이고 모든 사람들이 당신의 음성을 쉽사리 들을 수 있도록 성전의 익면 翼面 에 서십시오. 모든 지파의 백성들과 이방인들이 유월절을 지키려고 모여들 것입니다’ 이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야고보를 성전 익면에 세우고 그에게 소리쳤다. ‘오, 그대 의인이여, 우리는 모두 당신을 믿습니다. 백성들은 십자가에 처형된 예수를 좇아 잘못된 길로 가면서 우리에게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가 문이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p123
그러자 야고보는 큰 소리로 대답했다. ‘왜 당신들은 나에게 인자이신 예수에 관해 묻습니까? 그는 지금 하늘나라에서 전능자의 오른편에 앉아 계시며, 장차 하늘 구름을 타고 오실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야고보의 증언에서 확신을 얻고 영광을 돌리며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 라고 외쳤다. 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은 서로에게 말했다. ‘우리는 예수에 대해 그러한 증언을 제공하게 만드는 잘못을 범했습니다. 그러니 저리로 올라가서 그를 내던집시다. 그러면 사람들은 무서워서 그를 믿지 못할 것입니다’ 그들은 ‘오, 오 !!! 저스투스 Justus 는 미혹되었도다’ 라고 외쳤다. 이사야서에 기록된 바 ‘너희는 의인에게 복이 있으리라 말하라. 그들은 그 행위의 열매를 먹을 것임이요. 악인에게는 화가 있으리니 화가 있을 것은 그 손으로 행한대로 보응을 받을 것임이니라’ 는 말씀이 성취되었다. 그들은 성전으로 올라가서 이 의인을 밀어 떨어뜨리고 ‘의인 야고보를 돌로 치자’ 고 말했다. 그들은 야고보가 땅에 떨어졌으나 죽지 않았으므로 그에게 돌을 던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야고보는 몸을 돌려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오, 주 하나님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시옵소서, 저들은 자신들이 하는 행위를 알지 못하고 있나이다’ 이렇게 야고보에게 돌을 던지고 있을 때 예레미야가 말한 레갑 Rechab 의 자손인 제사장이 소리치며 말했다. ‘그만 두시오. 당신들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습니까. 의인은 지금 당신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 때 어느 축융업자가 피륙을 두드릴 때 사용하는 곤봉으로 의인의 머리를 쳤다. 이리하여 야고보는 순교했으며 사람들은 그를 성전 옆에 매장했다. 이곳에는 아직도 그의 비석이 남아있다. 야고보는 유대인들과 헬라인들에게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충실히 증거한 증인이 되었다. 이 일이 있은 직후 베스파시안 Vespasian 이 예루살렘을 공격해 장악했다” p124
이것은 헤게시푸스의 증언으로서 클레멘트의 증언과 완전히 일치한다. 야고보는 참으로 훌륭한 사람이었고 그의 공의로움은 모든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다. 따라서 지혜로운 유대인들은 이 사건이 그 직후에 있은 예루살렘의 포위의 원인이라는 견해를 취했다. 이것은 다름 아닌 야고보에게 행한 그들의 범죄 때문에 그들에게 일어난 일이었다. 요세푸스도 그의 저서에 다음과 같은 증거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이 일들은 의인 야고보를 죽인 죄에 대한 보복으로서 유대인들에게 발생했다. 야고보는 그리스도라 불리는 사람의 형제로서 지극히 의로운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그를 살해했다” p125
요세푸스는 <고대사> 제20권에서 야고보의 죽음을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베스도 Festus 가 사망했음을 안 황제는 알비누스 Albinus 를 유대의 총독으로 보냈다. 그런데 앞에서 언급했던 바 제사장직을 얻은 아나누스 Ananus 2세는 성질이 특히 과격하고 무모했다. 그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재판을 시행하는데 있어서 유대인들 중에 가장 무자비한 분파인 사두개인이었다. 이런 성품을 지니고 있었던 아나누스는 때마침 베스도는 사망하고 알비누스는 아직 부임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 판사들의 회의를 소집했다. 그리고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의 형제 야고보를 비롯한 몇 사람들을 그곳으로 데려와 그들이 율법을 범했다고 고발했다. 그리고 그들을 돌로 쳐 죽이라는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율법을 지키는 데 있어서 지극히 온건하고 정확했던 그 도시의 사람들은 이 일로 인해 크게 분노했으며, 은밀히 왕에게 사람을 보내어 아나누스의 행동은 합법적인 것이 못되니 이런 일을 행하지 못하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또 어떤 사람은 알렉산드리아를 떠나 부임하러 오는 도중에 있는 그를 만나 아나누스가 그에게 알리지 않고 산헤드린을 소집한 것은 불법이라고 알려주었다. 이 설명을 들은 알비누스는 격노하여 아나누스에게 그 일에 대한 책임을 묻겠다는 경고의 편지를 보냈다. 한편 아그리파 왕도 같은 이유로 그의 제사장직을 박탈했다. 결국 아나누스는 3개월 동안 제사장으로 있었으며, 담매우스 Dammaeus 의 아들 예수가 그의 후임이 되었다” 이 기사들은 야고보에 관한 것이다. p126
제24장 안니아누스 Annianus 가 마가의 뒤를 이어 알렉산드리아 초대감독으로 임명되다
네로의 통치 8년에 안니아누스 Annianus 는 사도이며 복음전도자인 마가의 뒤를 이어 알렉산드리아 교회를 다스리게 되었다.
그는 특히 경건한 사람이었으며 모든 면에서 훌륭한 인물이었다. p126
제25장 네로의 박해 때에 바울과 베드로는 로마에서 순교했다
제26장 유대인들은 많은 재난을 당했고, 마침내 로마인과 전쟁에 돌입했다
요세푸스는 자신의 저서에서 유대민족에게 임한 큰 환난들을 기록하면서 플로루스 Florus 가 수많은 상류층의 유대인들을 예루살렘에서 채찍으로 때리고 십자가에 못박았다고 서술했다. 플로루스는 네로의 통치 12년에 전쟁이 시작되었을 당시 유대의 총독으로 있던 인물로서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유대인들이 일으킨 반란에 맞서 시리아 전역의 주민들이 무서운 소동을 일으켰다. 모든 도시의 주민들은 무자비하게 유대인들을 학살했다. 그리하여 도시에는 매장되지 못한 시체들이 가득했는데, 그 중에는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 노인과 아이, 그리고 부인들의 시신들이 뒤섞여 있었다. 참으로 온 나라가 말로 형언할 수 없는 환난으로 가득했다. 그러나 앞으로 있으리라고 예상되는 환난은 이미 그들이 겪은 것들보다 훨씬 더 컸다” 이상은 요세푸스의 기록으로서 그 당시의 유대인들의 처지를 잘 나타내준다. p129
제3권
제1장 사도들이 복음을 전파한 지역
이 무렵 유대인들이 처한 상태는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다. 한편 사도들 및 주님의 제자들은 전세계로 흩어졌다. 전승에 의하면 도마는 자신이 사역할 지역으로 파르티아 Parthia (카스피 해 남동쪽에 있던 나라) 를 배당받았다고 한다. 안드레는 시디아 Scythia (카스피 해 북방에 있던 나라) 를 배당받았다. 요한은 아시아를 활동지역으로 배당받아 그곳에서 얼마동안 사역하다가 에베소에서 사망했다. 베드로는 본도 Pontus, 갈라디아, 비두니아 Bithynia, 가파도키아, 아시아 등지에 널리 흩어져 살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한 듯하다. 그는 마지막으로 로마로 가서 스스로의 원에 의해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처형되었다. 예루살렘에서 일루리곤 Illyricum 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다가 마침내 네로의 박해를 받아 로마에서 순교한 바울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이에 대한 기사는 오리겐이 창세기 주해 제3권에서 제공한다. p132
제2장 로마교회를 다스린 최초의 인물
바울과 베드로가 순교한 후 리누스 (리노 Linus) 가 최초로 로마의 감독직을 맡았다. 바울은 로마에서 디모데에게 보낸 서신의 말미에서 그를 언급했다.
“유불로 Eubulus 와 부덴 Pudens 과 리노 Linus 와 클라우디아 Claudia 와 모든 형제들이 네게 인사하느니라” (딤후 4:21). p133
제3장 사도들의 서신
제4장 사도들의 초대 후계자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으로부터 멀리 일루리곤 Illyricum 에까지 다니며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고 교회들을 세웠다는 사실은 바울 자신의 말과 사도행전에 기록된 누가의 증언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리고 베드로가 어느 지역에서 그리스도의 교리, 새 언약의 교리를 선포했는지는 베드로 자신의 기록에서 드러나며, 앞에서 언급했던바 그가 본도, 갈라디아, 가파도키아, 아시아, 비두니아에 흩어져 살고 있는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것으로서 정경으로 인정된 서신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들 중에서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이 진정한 열심으로 일했으며, 사도들이 세운 교회들을 먹이기에 합당하다고 판단되었는지를 나타내주는 것은 바울의 저작물에 나타난 자료 밖에 없다. 바울은 교회 내에 많은 동료 사역자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동료 군사들을 데리고 있었다. 바울은 서신 속에서 이들 중 많은 사람들에게 안부를 전하며 칭찬했다. 그의 서신에는 그들에 관한 영원한 증언이 제공되어 있다. 누가도 사도행전에서 그의 친구들의 이름들을 불러가며 그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디모데는 최초로 에베소교회의 감독직을 받았으며, 디도는 크레테 Crete 교회의 감독으로 임명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p135
누가는 안티오크 태생의 의사로서 바울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고, 나머지 사도들과도 친숙히 알고 지냈다. 그는 자신이 그들에게서 얻은 신령한 치료의 기술의 개요를 두 권의 영감된 책으로 우리에게 남겨 주었다. 그 중 한 권이 누가복음이다. 그는 이 복음서에서 자신은 “처음부터 말씀의 목격자가 되고 일꾼된 자들이 전해준 그대로” 기록했고 모든 일에 있어서 그들을 좇았다고 증언했다. 또 한 권의 저서는 사도행전이다. 이것은 그가 다른 사람들로부터 들은 일이 아니라 친히 목격한 일들을 기록한 것이다. 사도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특정한 복음을 이야기하면서 “나의 복음” 이라고 말했는데, 이것은 일반적으로 누가복음을 언급한 것이라고 한다 (호겐 : 마가복음은 베드로, 누가복음은 바울이 그 출처). p135 바울은 자신과 동행했던 여러 사람들 중에서 크레스켄 Cresceas 을 고올 Gaul 지방으로 보냈다고 언급한다. 바울은 디모데후서에서 자신이 로마에 있을 때 함께 있던 동료가 리노 Linus 라고 말했다. 리노는 베드로의 뒤를 이어 최초로 로마의 감독직을 맡았다. 바울은 로마교회의 제3대 감독이었던 클레멘트가 자신의 동역자와 동료군사였다고 증거했다. 이밖에도 사도행전을 보면 바울이 아레오바고에서 아테네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한 뒤에 처음으로 믿은 아레고바고 사람 디오니시우스 Dionysius 는 고대 고린도교회의 목회자였던 또 다른 디오니시우스에 의해 아테네 교회의 초대감독이 되었다고 한다. 보다 상세한 사도들의 계보 및 그들이 사도직을 계승한 방법은 앞으로 언급될 것이다. p136
제5장 그리스도의 사망 이후에 있었던 유대인에 대한 마지막 포위공격
네로는 약 13년 동안 통치했고 그 뒤 갈바 Galba 와 오토 Otho 가 약 1년 6개월 동안 제국을 통치했다. 한편 유대인들과의 전쟁에서 유명해진 베스파시안은 유대에서 군주로 선포되었고 그곳의 군대로부터 황제의 칭호를 받았다. 그 후 그는 즉시 로마로 귀환하면서 유대인들과의 전쟁을 자신의 아들 티투스 Titus 에게 맡겼다. 주님께 악을 행했던 유대인들은 주님이 승천하신 후에는 그의 사도들을 해치기 위해 끊임없이 악한 일을 계획했다. 그들은 처음에는 스테판을 돌로 쳐죽였고, 다음에는 세베데의 아들이며 요한의 형제인 야고보의 목을 베어 죽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주님이 승천하신 뒤 최초의 예루살렘의 감독인 주님의 형제 야고보도 앞서 설명했던 방법으로 살해되었다. 사도들을 멸망시키려는 의도를 가진 유대인들로부터 무수한 방법으로 괴롭힘을 당한 사도들은 유대 땅으로부터 쫓겨나 “너희는 가서 내 이름으로 모든 민족에게 가르치라” 고 하신 그리스도의 도움을 의지해 모든 민족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러 갔다. 그리고 예루살렘 교회는 전쟁이 있기 전 신앙이 인정된 사람들에게 주어진 신적 계시에 따라 예루살렘을 떠나 요르단 강 건너 펠라 Pella 라는 마을로 옮겨갔다. 이리하여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모두 예루살렘에서 떠나 거룩한 사람들이 이 왕도와 온 유대 땅을 완전히 버렸을 때에, 그리스도와 그의 사도들에게 가한 유대인들의 죄악으로 인한 하나님의 공의가 유대인들에게 임해 그 악인들의 세대를 땅에서 완전히 멸망시켰다. p137
온 백성에게 임한 재앙의 횟수, 특히 유대의 거민들에게 임한 참혹한 불행으로 인해 부인들과 아이들이 칼에 찔려 죽거나 굶주림으로 쓰러지거나 그 밖의 다른 원인으로 죽게 된 일, 유대의 많은 도시들이 공격을 받았다는 사실, 예루살렘을 안전한 장소로 여겨 그곳으로 피했던 사람들이 겪은 엄청난 고통, 아울러 그 전쟁의 행정 行程 과 자세한 상황, 그리고 마침내 예언자들이 선포했던 대로 예부터 그처럼 경배해온 하나님의 성전 안에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세워지게 된 사실 및 그 성전이 화재로 인해 완전히 멸망하게 된 것 등은 요세푸스가 기록한 역사서에 정확히 기록되어 있다. 또 유월절을 맞아 유대 모든 지방에서 모여든 30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마치 감옥에 갇히듯이 예루살렘에 갇히게 되었던 일도 진술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유대인들이 만민의 구세주이신 그리스도에게 수난을 가한 바로 그 시대에 하나님께서 공의를 나타내셔서 멸망이 그들을 덮쳐 마치 감옥에 갇히듯이 그곳에 갇히게 된 것은 참으로 공정한 일이었다. 그들에게 임한 특별한 재앙들, 예를 들자면 그들이 칼이나 그 밖의 여러 방법으로 당한 고난 등은 언급하지 않겠으나, 기근으로 인해 겪은 재난은 기록해야 한다고 생각된다. 그리하면 본 역사서를 읽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에게 불의를 행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보복이 지체하지 않고 곧 임했음을 어느 정도 알 수 있을 것이다. p138
제6장 유대인들을 괴롭힌 흉년
요세푸스의 역사서 (전쟁사) 제5권에 기록된 비극적인 사건들을 검토해보기로 한다. “부유한 사람들조차도 살아남기가 어려웠다. 왜냐하면 황폐한 상태를 구실로 하여 어느 부자가 사람들에 의해 살해되었기 때문이다. 폭도들의 광기는 기근과 더불어 더욱 증대했으며, 이 두 가지 재난은 나날이 강력해졌다. 아무 곳에서도 식량을 구할 수 없었으므로 사람들은 양식을 찾아 집집으로 침입했다. 그리하여 혹시 양식을 발견하게 되면 그 소유주에게 매질을 하여 그 양식의 소유권을 부인하게 했고, 양식을 발견하지 못하면 용의주도하게 감추어 두었을 것이라고 하여 그들을 괴롭혔다. 그러나 사람들이 양식을 갖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는 불쌍하고 가련한 사람들의 육체가 증명했다. 그들은 아직 건강한 사람들은 양식을 풍부히 갖고 있다고 추측했다. 그러나 그들은 창백하고 야윈 사람들은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왜냐하면 먹지 못해 곧 죽을 것처럼 보이는 사람을 죽이는 것은 어리석은 일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서 부유한 사람들은 비밀리에 자기의 재산을 밀과 바꾸었고, 그만큼 부유하지는 못한 사람들은 보리와 바꾸었다. 그들은 물을 잠그고 집안 가장 후미진 곳에 숨어서, 어떤 사람들은 굶주린 나머지 곡식을 생으로 먹었고, 또 어떤 사람들은 필요 때문에 또는 두려움 때문에 그것을 구워먹었다. 어느 곳에서도 식탁을 차리는 곳이 없었다. 그들은 불에서 꺼낸 아직 익지 않은 날음식을 여러 조각으로 나누었는데 참으로 그 음식은 보잘 것 없었다. 또 힘이 센 자가 모든 것을 움켜쥐고 연약한 자가 슬퍼하는 광경은 참으로 슬픈 것이었다. p139
기근의 위력은 그 어떤 재앙보다 컸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사람들의 수치심을 파괴했다. 전에는 지켜지던 것들이 기근으로 인해 무시되었다. 아내들은 남편의 입에 있는 음식을 빼앗고 자녀들은 부모의 것을 빼앗았다. 무엇보다 비참한 것은 어머니가 자기 아기의 입에서 음식을 빼앗아 먹었다는 것이다. 지극히 사랑하는 자녀들이 자기 팔에 안겨 쇠약해가고 있는데도 아무런 가책도 없이 자식들의 생명을 지탱해 주는 몇 방울의 양식을 빼앗아갔다. 이렇게 음식을 먹고 있는 사람들은 반드시 들키게 마련이었다. 왜냐하면 문이 잠겨 있는 것은 사람들이 집안에서 음식을 먹고 있다는 표시였으므로 폭도들은 즉시 문을 열어젖히고 쳐들어가 그들이 음식을 삼키지 못하도록 목을 졸랐다. 음식을 내놓지 않고 버티는 노인들은 구타를 당했고, 손에 음식을 감춘 부인들은 머리카락을 잡아 채였다. 폭도들은 노인이나 아기에게도 동정을 베풀지 않았다. 그들은 몇 조각의 음식을 붙들고 놓지 않는 어린아이들을 땅에 내동댕이쳤다. 그들이 들어올 것을 예상하고서 빼앗기지 않으려고 게걸스레 음식을 먹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마치 큰 잘못이나 한 듯이 잔인하게 굴었다. 그들은 음식이 있는 곳을 찾아내기 위해 무서운 고문방법을 고안해냈다. 그들은 육체를 괴롭게 하는 잔인한 방법으로 불쌍한 사람들을 괴롭혔으므로 사람들은 자신이 겪어야 할 고통에 대한 설명만 듣고서도 무서워 떨며 빵 한 덩이가 있다거나 밀 한 줌을 감추었다고 자백했다. 그러나 이처럼 사람들을 습격하고 괴롭히는 사람들은 실상 곤궁함을 겪지 않았다. 만일 그들이 곤궁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렇게 행했다면 어느 정도 변명거리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다음날을 위해 준비하려고 이런 짓들을 했다. 만일 밤중에 누군가가 풀이나 식용식물을 뜯으려고 로마군의 기지 쪽으로 기어나오면, 폭도들은 기다렸다가 그들이 원수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순간에 그들이 뜯은 것을 강탈해갔다. 죽음을 무릅쓰고 채취한 것이니 조금만 나누어달라고 지극히 엄하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탄원했지만 폭도들은 조금도 주지 않았다. 그들이 양식만 강탈해가고 목숨을 살려주는 것만으로 행운이었다” p140
요세푸스는 몇 가지 사실들을 이야기한 뒤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유대인들은 밖으로 외출하는 일과 안전에 대한 소망이 모두 꺾였다. 흉년은 더욱 깊어져 사람들은 모두 여위어갔다. 집집마다 죽은 여인들과 아이들로 가득 찼고, 골목에는 늙은이의 시체가 즐비했다. 그리고 온몸이 퉁퉁 부은 소년들이나 청년들은 유령처럼 비틀거리며 시장을 헤메다가 병이 걸려 곳곳에 쓰러져 누웠다. 병든 사람들은 죽는 자들을 매장할 수 없었고, 아직 건강하고 힘이 있는 사람들은 시체가 너무나 많은데다 자신의 앞날도 막연했기 때문에 시체를 매장하려 하지 않았다. 죽은 사람을 매장하다가 그 위에 쓰러져 죽은 사람도 많았다. 또 죽음의 공격을 당하기 전에 스스로 무덤으로 가는 사람도 많았다. 지독한 가뭄으로 인해 감정이 메말랐으므로 아무도 눈물을 흘리거나 슬퍼하지 않았다. 죽음과 싸우고 있는 사람들은 눈물마저 말라버린 눈으로 자기보다 먼저 안식에 들어간 사람을 바라보았다. 온 도시에는 깊은 침묵과 죽음의 음침함이 드리워 있었다. 무엇보다 안타까운 일은 가정에 침입하던 강도들이 이제는 무덤에까지 침입해 시체를 약탈하고 수의를 벗어내고서 웃으며 사라졌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자기 칼의 날을 시험해보려고 죽은 시신이나 아직 숨이 붙어있는 사람을 칼로 찌르기도 했다. 그리고 제발 칼로 찌르지 말라고 간청하는 사람들은 멸시하며 내버려두었지만 결국 그들도 굶어죽었다. 사람들은 두 눈으로 성전을 바라보며 숨을 거두었으며, 파당적인 사람들은 그들보다 더 오래 살아남았다. 이들은 처음에는 시체에서 나는 악취를 견디지 못해 시체들을 매장하라고 명령했지만, 더 이상 매장할 수 없게 되자 시체들을 담에서 밑에 있는 수로에 던져버렸다. 티투스 Titus 는 이곳을 돌아다니면서 이 수로들이 시체로 가득 찼으며 썩은 시체 둘레로 핏물이 깊이 흐르는 것을 보고서 깊이 신음하며 손을 들고 하나님께 이것은 자신이 행한 일이 아님을 증거해 달라고 청했다” p141
요세푸스는 몇 가지 의견을 기록한 뒤 다음과 같이 계속했다. “나는 내 감정이 요구하는 것을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밝힐 수 있다. 만일 로마인들이 이 범죄한 불쌍한 백성들을 정복하는 일을 조금이라도 지체했다면, 예루살렘은 지진에 삼켜졌거나 홍수로 뒤덮였거나 아니면 소돔처럼 불로 심판을 받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 예루살렘에는 옛날 이러한 심판을 받았던 백성들보다 훨씬 더 불경한 사람들이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이 불쌍한 사람들의 광기로 인해 모든 백성이 멸망했다” p141
요세푸스는 제6권에서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 도시에서 무수한 사람이 기근으로 인해 죽었다. 그들에게 덮친 불행은 말로 형언할 수 없었다. 식량의 그림자라도 있는 집에서는 의례히 싸움이 있었다. 가장 가까운 친척들까지도 생명을 유지할 양식을 빼앗기 위해 서로 싸웠다. 사람들은 죽어가는 사람을 보면서도 그가 굶주렸기 때문에 죽는 것이라고 믿지 않았다. 강도들은 혹시 사람들이 품안에 양식을 숨겨두고서 죽어가는 체하는 것이 아닐까 하여 아직 숨이 붙어 있는 그들의 몸을 수색했다. 강도들 자신도 음식을 먹지 못해 입을 크게 벌린 채 여기저기로 마치 미친개처럼 비틀거리며 헤매며 술 취한 사람처럼 남의 집 문을 두드리고 다녔다. 또 그들은 분별력을 잃었기 때문에 한 시간에 두 세 번이나 같은 집을 습격했다. 그들은 곤궁했기 때문에 아무 것이라도 먹었다. 음식이 아닌 것, 심지어는 부정한 짐승의 고기까지 탐식했으며 마지막에는 허리끈과 구두까지도 먹으려 했다. 그들은 방패에 씌운 가죽까지 벗겨 먹었고, 어떤 이들은 오래된 밀짚찌기를 음식으로 사용했다. 또 어떤 이들은 곡식밭의 그루터기를 모아다가 팔았는데, 지극히 적은 분량의 그루터기 값이 그리스 화폐로 4드라크마나 되었다 (드라크마 : 드라크마는 약 15센트짜리 주화이다. 어떤 이는 그보다 더 가치가 있다고 추정하기도 한다). 이제 나는 헬라인이나 야만인들은 기록하지 않은 악한 이야기를 서술하려 한다. 그것은 말하기에도 끔찍하고 듣기에는 믿을 수 없는 일이다. 만일 그 사건을 목격한 증인들이 지금까지 살아있지 않다면 나는 이상한 이야기들을 취급한다는 오해를 피하기 위해 이 사건을 취급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내 조국이 실제로 겪은 일을 부주의하게 그냥 지나친다면 나는 내 조국으로부터 비난을 받게 될 것이다. p142
요단강 건너편에 바데조르 Bathezor 라는 마을이 있었다. 바데조르라는 명사는 우슬포의 집이라는 뜻이다. 이 마을에 마리아라는 여인이 엘리아자르 Eleazar 라는 딸과 함께 살고 있었다. 그녀의 가정은 대단히 부유했다. 그런데 그들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피난했다가 그 도시 안에 포위되고 말았다. 폭군들은 그녀가 강 건너편에서부터 가져온 그녀의 재산을 모두 강탈해갔다. 그리고 그녀의 남은 재산 및 그녀가 준비해 둔 식량은 무법자들이 매일 습격해 들어와 탈취해갔다. 이 부인은 무서운 분노에 사로잡혔다. 그녀는 자주 그 강도들을 자극해 그녀를 죽이게 만들 작정으로 욕설과 저주를 퍼부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녀에게 화를 내지 않았고 또 그녀를 동정해 그녀를 죽이려 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양식을 마련하는데 지쳤고, 또 어느 곳에서도 양식을 구할 수 없었다. 굶주림은 창자와 골수에까지 사무쳤고, 분노는 굶주림 그 자체보다 더 격렬하게 타올랐다. 격분과 굶주림 때문에 이성을 잃은 그녀는 아직 품안에 있는 어린 아들을 붙잡고 말했다. ‘불쌍한 아가야 !!! 이 전쟁과 기근과 분쟁의 와중에서 어떻게 너를 보호할 수 있겠느냐? 우리는 로마군에게 포위되어 있기 때문에 살아남는다고 해도 그들의 노예가 될 것이다. 그러나 굶주림은 노예가 되는 것보다 더 견디기 힘들며, 암살자들은 굶주림이나 노예제도보다 더 잔인하단다. 그러니 너는 나의 양식이 되고 암살자들에게 보내는 나의 분노가 되며 유대인들의 불행에 종지부를 찍는 마지막 이야기가 되어다오’ 그녀는 이렇게 말하고서 자기 아들을 죽여서 구운 뒤 절반은 자기가 먹고 나머지는 덮어 두었다. p143
곧 살인자들이 들이닥쳤다. 그들은 그 끔찍한 음식의 냄새를 맡고서 만일 그녀가 음식을 내놓지 않으면 그녀를 죽이겠다고 위협했다. 그녀는 그들을 위해 그 음식을 많이 남겨두었다고 대답하고는 죽은 아들의 시체 중 남은 부분을 덮고 있던 것을 벗겼다. 그 광경을 본 그들은 공포와 놀라움에 사로잡혀 말을 하지 못했다. 그녀는 ‘이 아이는 내 아들이며, 내가 이렇게 했습니다. 나는 이미 이 아이의 살을 먹었으니 당신들도 이것을 먹으시오. 여인이나 어머니보다 더 허약하게 행동하지 마시오. 만일 당신들이 경건한 사람이므로 내가 제공하는 이 음식을 먹지 않는다면, 나는 이미 그 중 절반을 먹었으니 나머지도 내 차지가 될 것이오’ 이 말을 들은 그들은 정말로 벌벌 떨었다. 그러면서도 이 끔찍한 양식을 그 어머니에게 넘기려 하지 않았다. 곧 온 도시는 그 끔찍한 죄에 대한 소문으로 가득 찼다. 사람들은 모두 눈으로 이 사악함을 보면서 마치 그것이 자기가 행한 죄인 듯 공포에 질렸다. 그 이후로 굶주린 불쌍한 사람들은 서둘러 죽으려고 애를 썼다. 이런 불행한 일들을 보거나 듣기 전에 죽은 사람들은 그래도 행복한 편이었다” 지금까지 그리스도께 행한 유대인들의 불경함과 범죄에 따른 하나님의 보복을 기록했다. p144
제7장 그리스도의 예언
지금까지 언급한 기사들 외에 우리 주님의 확실한 예언을 추가하는 것도 적절한 일일 것이다. 주님은 이러한 일이 있을 것을 다음과 같이 예고하셨다. “그 날들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 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 그러나 너희의 도피하는 일이 겨울이나 안식일에 일어나지 않도록 너희는 기도하라. 그때에 큰 환난이 있으리니 세상이 시작된 이래로 이때까지 그런 환난이 없었고 이후에도 없으리라” (마 24:19-21). 요세푸스는 그 때에 살해된 사람들의 통계를 발표하길 11만 명이 굶주림이나 칼에 의해 죽었고, 나머지 사람들, 즉 도당들과 강도들은 포로가 된 뒤 서로를 밀고하여 처형되었다고 했다. 그런데 키가 크고 잘 생긴 청년들은 승리를 기념해 살려주었다. 살아남은 사람들 중에서 17살 이상이 된 사람들은 이집트로 보내어져 광산에서 부역했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들은 여러 지방으로 분산되어 칼로 죽임을 당하거나 경기장에서 사나운 짐승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열일곱이 못 된 사람들은 노예로 팔려갔다. 이들의 숫자만 해도 9만 명이 넘었다. 이 모든 일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예언하셨던 대로 베스파시안이 위에 오른 지 2년이 되는 해에 발생했다. 거룩한 복음서 기자들이 기록한 것을 보면 주님은 자신의 신적 능력에 의해 이런 일이 있을 것을 예견하시고 슬퍼하시며 눈물을 흘리셨다. 주님은 예루살렘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p145
“그분께서 가까이 오사 그 도시를 보시고 그 도시로 인해 슬피 우시며 이르시되, 적어도 이 날 즉 네 날에 만이라도 너 곧 네가 네 화평에 속한 일들을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으리요! 그러나 지금 그 일들이 네 눈에 숨겨졌도다. 날들이 네게 이르리니 그때에 네 원수들이 네 주위에 도랑을 파고 너를 둘러싸서 사면으로 가두며, 또 너와 네 안에 있는 네 자녀들을 땅에 쓰러뜨리고 네 안에서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라. 이는 너를 돌아보는 때를 네가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라, 하시니라” (눅 19:41-44). 또 마치 그 백성들에게 말씀하시듯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오직 그 날들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 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 그 땅에 큰 고난이 있고 이 백성에게 진노가 있으리라. 또 그들이 칼날에 쓰러지고 모든 민족들에게 포로로 잡혀 가며 예루살렘은 이방인들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들에게 짓밟히리라” (눅 21:23-24). “너희가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 그것의 황폐함이 가까이 이른 줄 알라” (눅 21:20). p146
우리 주님의 예언을 그 전쟁을 기록한 역사가의 기록과 비교해볼 때 우리 주님의 진실로 거룩하고 특별한 예언과 예지를 인정하고 경탄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주님의 고난, 그리고 유대인들이 살인강도의 처형을 거부하고 생명의 주님을 죽이라고 외친 일들이 있은 후 유대인들에게 닥친 사건들에 관한 요세푸스의 진술을 추가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그리스도께 범죄한 뒤 40년 동안이나 그들의 멸망을 유예해 주신 지극히 자비하시고 은혜로우신 섭리를 나타내주는 사건들은 마땅히 언급되어야 한다 (호겐 : 그러므로 주의 복수가 40년 안에 당도했으므로 “이 세대가 가기 전에 반드시 그 일이 있으리라” 고 한 예언은 성취되었다). 이 기간 동안에는 많은 제자들과 사도들, 그리고 주의 형제라고 불리는 예루살렘의 초대감독 야고보까지 아직 생존하여 예루살렘에 머물러 튼튼한 방파제 역할을 했다. 하나님의 거룩한 섭리는 아직도 오래 참으시사 그들이 과거 행위를 뉘우치고 용서와 구원을 얻게 될 것인지 알고자 하셨다. 그리고 또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바야흐로 임하게 될 일에 대한 놀라운 징조들을 제공하셨다. 이 모든 것은 요세푸스에 의해 기록되었으므로 독자들의 이해에 도움이 될 것이다. p146
제8장 전쟁 전에 나타난 징조들
호겐 : 이 부분은 요세푸스의 <유대전쟁사> 가 더 박진감 넘치고 뛰어난 묘사력을 뽐낸다.
다음의 원본을 찾아 직접 읽어보는 것이 자세한 사정을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p285-289 http://blog.naver.com/oyashiki/100185190662
독자들은 요세푸스의 저서 중 <역사서> (유대전쟁사) 제6권에 기록된 기사를 읽어보라. “불쌍한 백성들은 사기꾼들이나 하나님을 비방하는 거짓말쟁이들에게 쉽게 설득되어 그들의 말을 믿었다. 그러나 그들은 다가오는 멸망을 예고해주는 의미심장하고 놀라운 사건들에는 주의를 기울이지도 않고 믿지도 않았다. 그들은 오히려 어리석은 사람들이나 또는 아무런 지혜나 안목이 없는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선포를 등한시했다. 한번은 칼 모양의 별이 예루살렘 위에 멈추어 서 있었고, 또 하나의 혜성이 나타나 일 년 동안 계속 보였다. 또 한번은 4월 8일, 무교절에 백성들이 모여 있었는데, 밤 9시쯤 밝은 빛이 성전과 제단 주위를 마치 밝은 낮처럼 비추었다. 이 현상은 약 30분간 계속되었다. 무식한 사람들은 이것을 좋은 징조로 여겼으나 서기관들은 이것이 장차 일어날 사건들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역시 같은 무교절 때에 제사장이 제물로 드리려고 잡은 황소가 성전 한 복판에서 양을 낳았다. 그리로 놋쇠로 만들어진 것으로 대단히 무거워 스무 명의 남자들이 겨우 닫곤 하는 성전의 동편문의 빗장쇠가 땅에 깊숙이 박혀 있었는데 밤 6시에 저절로 열렸다. 무교절이 지나고 얼마 안 된 5월 21일에는 상상을 초월하는 놀라운 광경이 나타났다. 만일 이제부터 내가 말하려는 것이 목격한 사람들이 직접 진술한 것이 아니며, 또 그 뒤에 발생한 재난들이 그 징조들과 일치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하나의 경이로운 일로 보였을 것이다. 태양이 지기 전에 하늘 위에 병거들과 무장한 군대들이 나타나 구름 사이로 행군하며 온 도시들을 에워쌌다. 그리고 오순절에 제사장들이 관습에 따라 예배를 드리러 성전에 들어갔는데 처음에는 어떤 움직임과 소리를 감지했으며 그 후에 ‘우리는 이곳을 떠난다’ 라는 음성을 들었다고 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무서운 일들도 있었다. p147
전쟁이 일어나기 4년 전, 평화롭고 질서가 잘 잡혀 있던 시기에 유대인의 관습대로 하나님을 기리기 위해 성전에서 장막을 만드는 절기를 지키러 온 어느 평범하고 무식한 촌사람, 아나니아의 아들 예수라는 사람이 갑자기 소리치기 시작했다. ‘동쪽에서 소리가 들려오고 서쪽에서도 들려오며 사방에서 소리가 들린다. 예루살렘과 성전, 신랑과 신부들, 모든 백성들을 비난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이 남자는 밤낮으로 온 거리를 돌아다니며 외쳤다. 몇 명의 귀족들은 이 불길한 외침으로 인해 분노하여 이 사람을 잡아다가 가혹하게도 많은 매질을 했다. 그런데도 이 사람은 자신을 위한 말이나 또는 그곳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동일한 외침만 계속했다. 그리하여 그 사람의 내면에 있는 것이 평범한 신적 움직임이 아니라고 판단한 장관은 그를 로마 총독에게로 인도했다. 그는 뼈가 드러날 정도로 매질을 당하면서도 애걸을 하거나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그는 매질을 당할 때마다 지극히 낮고 슬픈 음성으로 ‘슬프도다. 예루살렘이여’ 라고 말했다” 요세푸스는 한층 더 중요한 사실을 기록했다. “거룩한 문서들 속에서 이 무렵에 그 지방 출신의 인물이 온 세상의 주권을 얻게 된다고 선언하는 예언의 말이 발견되었다” 그는 이 예언이 베스파시안에게서 성취되었다고 가정했다. 그러나 베스파시안은 온 세계가 아니라 로마제국만을 다스렸다. 그러므로 공정하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를 언급하는 것일 것이다. 성부께서는 그에게 말씀하시길 “내게 구하라. 내가 열방을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끝까지 이르리라” 고 말씀하셨다 (시 2:8). 바로 이때에 그에 대한 거룩한 사도들의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들의 말씀이 땅 끝까지 이르렀다. p148
제9장 요세푸스, 그리고 그가 남긴 저서
이제까지 우리는 요세푸스의 저서를 인용해왔다. 따라서 이처럼 역사의 연구에 커다란 공헌을 해온 요세푸스가 어떤 가정에서 태어났는지를 살펴보는 것도 옳은 일이 될 것이다. 그는 이것을 자신의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예루살렘의 제사장 맛디아 Mattathias 의 아들 요세푸스는 처음에는 로마인들을 대항하여 싸웠으나 후일 부득이하여 그들의 일에 참여했다” 그는 자기의 동포인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로마인들 사이에서도 대단히 유명한 사람이었다. 따라서 로마인들은 로마에 그의 동상을 세워 그를 기념했고 그가 저술한 책들을 공공도서관에 비치했다. 그는 고대 유대인들의 모든 풍습과 제도 등을 20권의 책으로 기록했고 (유대고대사), 유대인들의 전쟁사를 7권으로 기록했다. 이 저서들은 헬라어로 저술되었는데, 그는 친히 그것들을 자신의 모국어로 번역했다. 물론 이 모든 그의 저서들은 신뢰할 만하다. 또 고대 유대인들에 관한 저서가 두 권이 있는데, 이것들도 역시 읽을 만한 가치가 있다. 이 저서 속에는 그가 당시 유대 백성들을 비방하는 저서를 쓴 문법학자 아피온 Apion 에게 주는 답변이 있다. 그밖에도 유대의 민족적 특성을 비방하려고 시도한 사람들에 대한 반박문도 포함되어 있다. 그는 이 저서 제1권에서 히브리인들이 인정하는 구약 정경의 숫자를 밝혔으며, 그것들을 옛 전승에 의해 전해 내려오는 대로 기술했다. p149
제10장 요세푸스가 성서를 언급한 방법
“우리는 서로 일치하지 않고 상충되는 수많은 책들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역사의 기록을 포함하고 있으며 마땅히 거룩한 작품이라고 여겨야 하는 22권의 책을 갖고 있다. 이 22권 중에서 5권은 모세의 책들로서 율법, 인간의 기원 및 모세 자신의 죽음에 이르기까지에 관한 전승을 포함하고 있다. 이 기간은 거의 3000년에 이른다. 그리고 모세의 시대로부터 페르시아의 왕 크세르크세스 Xerxes (아하수에로) 의 뒤를 이어 왕이 된 아닥사스다 Artaxerxes 가 죽기까지의 기간에 있던 모든 사건들은 모세의 뒤를 이른 선지자들이 13권의 책에 기록했다. 나머지 4권의 책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찬송들, 그리고 인간생활의 규제를 위한 교훈들을 포함하고 있다. 아닥사스다의 시대로부터 우리 시대에 이르기까지 있던 사건들도 모두 기록되어 있으나 이것들은 그 이전의 기록들과 동등한 권위를 지닌 것으로 여길 수 없다. 왜냐하면 이 시대에는 분명한 선지자들이 이어져 내려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 시대의 이 책들을 어떻게 여겨야 하는지는 분명하다. 수많은 세대를 거치는 동안 그 누구도 감히 그것들에 더하거나 제하려 하지 않았고 그것들을 바꾸려하지 않았다. 모든 유대인들에게는 그 민족이 시작될 때부터 그것들은 하나님의 교리로 여기고 그것들을 굳게 지키며 필요하다면 그것을 위해 기꺼이 죽으려는 사상이 심겨져 있었다” p150
나는 이 역사가의 이러한 진술을 여기에 첨부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역시 요세푸스의 작품으로 <이성의 탁월함에 관하여 On the Supremacy of Reason> 이라는 훌륭한 저서가 있다. 이것은 마카바이쿰 Maccabaicum 이라는 사람이 붙인 제목이다. 여기에는 마카비서에 기술된 것과 같이 참 신앙을 위해 용감하게 싸운 히브리인들의 투쟁이 기록되어 있다. 요세푸스는 <고대사> 제20권 말미에서 자신이 하나님과 그의 존재에 관한 4권의 책을 유대민족의 특이한 관점에 따라 저술하려 했으며 또 율법에 관한 책도 저술하여 왜 그들이 어떤 일은 허용하고 어떤 일은 금하는지 기록하려 했다고 했다. 그는 다른 주제들은 그의 저서들 속에서 다루었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가 그에게서 입수한 증거들을 확실히 하기 위해서는 그가 <고대사> 마지막에 사용한 표현들을 여기에 소개하는 것도 도움이 될 것이다. 요세푸스는 그 시대의 역사를 기록하려 했던 티베리아스 Tiberias 의 저스투스 Justus 가 진실을 기록하지 않는다고 비난하면서 저스투스의 여러 가지 잘못을 꾸짖은 뒤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러나 나는 내 저서들에 관해서 당신처럼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그것들을 황제들에게 증정했다. 왜냐하면 그 사실들은 모두 그들의 시대에 발생했기 때문이다. 나는 저술을 하면서 진리를 고수했으며 따라서 그들의 인정을 기대할 수 있었다. 나는 다른 여러 사람들에게도 내 역사서를 주었다. 그 중에서 아그리파 왕과 그의 친척들은 전쟁에 참가했었다” 티투스 황제는 이 사건들이 전 세계에 알려지길 원했으므로 친히 이 책들을 출판하라는 문서를 작성했다. 그리고 아그리파 왕은 이 책들의 진실성을 증명하는 62통의 편지를 썼는데, 그 중 2개의 서신을 요세푸스는 첨가했다. 요세푸스에 관한 설명은 이 정도로 마치기로 하겠다. p151
제11장 야고보의 후임으로 시므온이 예루살렘 교회를 다스렸다
야고보가 순교한 직후 예루살렘이 함락되었다. 보고에 의하면 이후에 당시 생존해 있던 주님의 사도들과 제자들은 육체적으로 주님과 관계가 있는 사람들과 함께 각 지방으로부터 모여 왔다고 한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그때까지 살아있었다. 이들은 야고보의 후계자를 결정하기 위해 함께 의논한 결과 만장일치로 글로바 Cleophas 의 아들 시므온 Simeon 을 적임자로 선출했다. 시므온은 주님의 사촌형제였다고 한다 (외사촌형제.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주님의 모친 마리아는 자매간이었다. 요 29:25). 헤게시푸스 Hegesippus 는 글로바가 요셉의 형제였다고 주장했다. p152
제12장 베스파시안은 다윗의 후손들을 수색해내라고 명령했다
예루살렘을 정복한 뒤, 베스파시안은 다윗의 족속들을 모두 찾아내 유대인들 중에 왕족이 한 사람도 남지 못하게 하라고 명령했다.
그 결과 또 다시 유대인들에 대한 가혹한 박해가 일어났다. p152
제13장 로마의 제2대 감독 아넨클레투스 Anencletus
베스파시안은 약 10년 동안 제국을 다스렸고, 그의 아들 티투스 Titus 가 그의 뒤를 이었다.
티투스의 통치 2년에 약 12년간 로마교회의 감독으로 있던 리누스 Linus (리노) 는 아넨클레투스 Anencletus 에게 그 직책을 넘겨주었다.
티투스 황제는 2년 2개월 동안 황제의 자리에 있었고, 그의 동생 도미티안 Domitian 이 그의 뒤를 이었다. p153
제14장 알렉산드리아의 제2대 감독 아빌리우스 Avilius
도미티안 호아제의 통치 4년에 알렉산드리아의 초대감독으로서 22년간 그 직책을 수행했던 안니아누스 Annianus 가 사망했다.
그리하여 아빌리우스 Avilius 가 그의 뒤를 이어 알렉산드리아의 제2대 감독이 되었다. p153
제15장 로마교회의 3대 감독 클레멘트 Clement
역시 도미티안 황제의 통치 12년에 로마교회의 감독으로 12년간 일해온 아넨클레투스 Anencletus 의 뒤를 이어 클레멘트 Clement 가 감독이 되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그를 자기의 동역자라고 표현했다. “클레멘트 Clement 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 (빌 4:3) p154
제16장 클레멘트의 서신
이 클레멘트의 서신으로 인정된 하나의 서신이 현존하고 있다. 이 서신은 상당히 길고 가치가 있는 것으로서, 고린도 교회에 분쟁이 있었을 때에 클레멘트가 로마교회의 이름으로 쓴 것이다. 이 서신은 과거시대에는 물론 우리 시대에도 대부분의 교회에서 일반적인 유익을 얻기 위해 공개적으로 읽혀지고 있다. 물론 앞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고린도 교회에 분쟁이 있던 시대에도 공개적으로 읽혀졌음은 헤게시푸스가 널리 증거했다. p154
제17장 도미티안 치하에서의 박해
도미티안 Domitian 은 많은 사람들을 잔인하게 취급했다. 그는 로마에서 상당히 많은 귀족들과 저명인사들을 부당하게 살해했고, 아무 까닭도 없이 많은 귀족들의 재산을 압수하고 그들을 추방했다. 마침내 그는 하나님을 미워하고 적대하는 일에 있어 네로의 후계자가 되었다. 그의 부친 베스파시안은 전혀 신자들에게 불리한 일을 시도하지 않았으나 도미티안은 박해를 시도한 두 번째 황제가 되었다. p155
제18장 사도 요한과 계시록
전승에 의하면 이 도미티안의 박해 때에 사도이며 복음서 기자인 요한이 거룩한 말씀을 증거했다는 이유로 밧모 Patmos 섬에 유배되었다고 한다. 이레니우스 Irenaeus 는 <이단을 반박함 Against the Heresies> 제5권에서 요한계시록에 사용된 적그리스도라는 명칭에 관한 추측을 언급했는데, 그는 적그리스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일 그 당시 그 (적그리스도) 의 이름을 밝혀야 할 필요가 있었다면 계시를 받은 사람이 그것을 선포하셨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계시는 바로 우리의 시대, 즉 도미티안의 통치 말기에 받은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믿는다고 고백하는 교리는 대단히 번영했으므로 결코 우리의 신앙에 호감을 갖지 않은 역사가들까지도 자기들의 역사서에 이 박해와 순교를 기록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이들은 그 시기도 정확하게 언급했다. 그들의 기록에 의하면 이 박해는 도미티안 15년에 있었다. 이 박해 때에 당시 로마의 집정관이었던 플라비우스 클레멘스 Flavius Clemens 의 조카인 플라비아 도미틸라 Flavia Domitilla 는 그리스도를 믿었기 때문에 다른 많은 사람들과 함께 폰티아 Pontia 섬에 유배되었다. p156
제19장 도미티안은 다윗의 후손들을 살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도미티안 황제가 옛 전승에 따라 다윗의 자손들을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을 때, 어떤 이단자들은 유다의 후손들을 육체적으로 주님의 형제라고 고발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다윗의 족속이므로 따라서 그리스도의 친척이라는 것이었다. 헤게시푸스는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p156
제20장 주님의 친척들
주님의 가족 중에서 육적으로 주님의 형제라 불리는 유다의 손자들이 아직 살아있었다. 이들은 다윗의 족속으로 알려져 있었다. 에보카투스 Evocatus 는 이들을 도미티안에게로 끌고 갔다. 도미티안 황제는 옛날 헤롯왕처럼 그리스도의 출현을 크게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는 그들이 다윗의 혈통이냐고 물었고 그들은 그렇다고 고백했다. 그러자 그는 그들에게 재산과 돈이 얼마나 있느냐고 물었다. 그들 두 사람은 자기들에게는 9000 데나리온 밖에 없는데 그것도 은화로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소유하고 있는 39에이커의 땅을 돈으로 환산한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들은 이 땅을 경작하여 세금을 내고 자신의 생계를 유지한다고 말했다. 그들은 자신의 노동의 증거로서 끊임없는 노동으로 인해 못이 박힌 손과 단단한 육체를 보여주었다. 그는 그리스도와 그의 나라에 관해 그것이 어떤 본질을 갖고 있으며 언제 어디에 나타날 것이냐고 물었는데 그들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그것은 현세의 나라도 아니고 이 세상 나라도 아니며, 거룩한 천사들의 나라입니다. 그 나라는 이 세상이 끝날 때에 임할 것인데, 그 때에 그리스도는 영광중에 오셔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시며 그들의 행위에 따라 상을 주실 것입니다” 도미티안은 이들의 대답을 듣고는 그들을 멸시하고 아무런 응답도 하지 않았다. 그는 그들을 바보로 취급해 놓아주라고 명령했으며, 박해를 그만두라는 칙령을 내렸다. 이리하여 석방된 그들 두 사람은 주님의 친척이며 증인으로서 교회를 다스렸다. 그들은 그 후 평화가 도래하여 트라얀 Trajan 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살았다. p157
터툴리안 Tertullian 도 도미티안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도미티안도 한 때 그에게 동일한 일을 행하려 했다. 그는 잔인성에 있어서 실질적인 네로의 후계자였다. 그러나 그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 박해를 거두었고, 자신이 추방했던 사람들을 다시 불러들였다. 도미티안이 15년 동안 통치한 뒤 네르바 Nerva 가 그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되었을 때 로마 원로원은 도미티안이 수여한 작위는 취소되어야 하며 과거 부당하게 축출되었던 사람들을 자기 고향으로 귀환시키고 그들의 재산도 되돌려주어야 한다는 명령을 발표했다” 이것은 그 시대의 역사가들의 진술이다. 전승에 따르면 사도 요한이 유배지 밧모섬으로부터 돌아와 에베소에 거하게 된 것도 이 때의 일이라고 한다. p158
제21장 알렉산드리아의 제3대 감독 세르돈 Cerdon
네르바 Nerva 는 약 1년 남짓 제국을 통치했고, 트라얀 Trajan 이 그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되었다.
트라얀 통치 원년에 13년 동안 알렉산드리아 교회를 다스린 아빌리우스 Avilius 의 뒤를 이어 세르돈 Cerdon 이 감독이 되었다.
당시 로마교회에는 바울과 베드로 이후의 초대감독 리누스 Linus (리노), 2대 감독 아넨클레투스 Anencletus 의 뒤를 이어 클레멘트가 제3대 감독으로 있었다. p158
제22장 안티오크 교회의 제2대 감독 익나티우스 Ignatius
안티오크 교회의 초대감독이었던 에보디우스 Evodius 가 사망하자 익나티우스 Ignatius 가 제2대 감독으로 임명되었다.
이 무렵 주의 형제의 뒤를 이어 시므온 Simeon 이 예루살렘의 제2대 감독으로 있었다. p158
제23장 사도 요한에 관한 이야기
이 무렵 예수님의 사랑받는 제자였던 사도이며 복음서 기자인 요한이 아직 살아있었다. 그는 도미티안의 사망을 계기로 유배지에서 귀환한 뒤 아시아의 교회들을 다스렸다. 그가 이 무렵까지 살아있었다는 사실은 두 증인의 증언에 의해 충분히 증명된다. 이들은 교회 안에서 건전한 교리를 주장했으므로 지극히 신용할 수 있는 인물들로서 이레니우스 Irenaeus 와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Clement of Alexandria 이다. 이들 중 이레니우스는 <이단을 반박함 Against Heresies> 제2권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주님의 제자 요한과 함께 협의했던 아시아의 모든 장로들은 요한이 그것을 자신들에게 전해주었다고 증언한다. 요한은 트라얀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그들과 함께 머물렀다” 그는 역시 같은 저서 제3권에서도 동일한 사실을 기록했다. “사도 바울이 세웠고 요한이 트라얀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머물렀던 에베소 교회는 사도들의 전승에 대한 신실한 증인이다” p159
클레멘트도 <부자가 구원을 받는다면? What Rich Man is saved?> 라는 제목의 설교에서 훌륭하고 유익한 것을 즐겨듣는 사람들이라면 기꺼이 받아들일만한 이 시대에 관한 이야기를 첨가했다. 그 책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다. “사도 요한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보라. 그것은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라 예부터 보존되어 전해 내려오는 사실이다. 독재자가 죽은 뒤 밧모섬을 떠나 에베소로 돌아온 그는 청함을 받으면 인근에 있는 이방인들의 지역도 방문했다. 그는 어떤 곳에서는 감독을 임명했고, 어떤 곳에서는 완전히 새로운 교회들을 세웠고, 또 어떤 지역에서는 성령이 지적하는 사람 중 한 사람은 사역자로 임명했다. 그리하여 그는 그다지 먼 거리에 있지 않은 어느 도시를 방문하게 되었다 (어떤 사람은 이 도시의 이름을 밝히기도 한다). 그곳에서 그는 어느 훌륭한 체격에 아름다운 용모와 열렬한 정신을 가진 청년을 보면서 자신이 임명한 주교에게 말했다. ‘나는 교회와 그리스도 앞에서 그를 당신에게 맡깁니다’ 그 주교가 그를 맡고서 약속을 했으며, 요한은 똑같은 말을 되풀이하고서 에베소로 돌아왔다. 장로는 자기가 맡은 청년을 집으로 데리고 와서 그를 사랑으로 교육하고 그의 행동을 규제하여 마침내 그에게 세례를 주었다. 그런데 세례를 주고 난 후로는 그를 완전히 주님의 보호에 맡기기나 한 듯이 전처럼 보호하거나 경계하지 않았다. p160
그런데 불행하게도 게으로고 방탕하며 온갖 악에 물들어 있는 친구들이 이 청년에게 접근해 그를 모든 속박으로부터 풀어놓았다. 그들은 처음에는 값비싼 향응을 제공하여 그를 유혹했다. 그 다음에는 밤에 그를 데리고 나가 함께 도둑질을 했다. 그 다음에는 더욱 큰 악을 행하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차츰 그들의 행동에 익숙해진 그는 옳은 길에서 벗어나기 시작하여, 마치 고삐가 풀린 힘센 말처럼 재갈을 물어뜯으며 더욱 격렬하게 낭떠러지를 향해 달렸다. 결국 그는 하나님의 구원을 부인하는 것이 작은 범죄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자기가 이미 큰 죄를 범해 멸망했으므로 다른 친구들과 마찬가지의 형벌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친구들과 어울려 일단의 강도단을 조직하여 자신은 그 두목이 되었다. 그는 그 누구보다 난폭하고 잔인하며 지독했다. 얼마의 세월이 흐른 뒤 어떤 기회에 이 도시의 사람들이 요한을 다시 청했다. 사도는 자신의 방문 목적이었던 일들을 처리한 뒤 ‘주교님, 내가 당신에게 맡겼던 것을 돌려주십시오. 나와 그리스도는 당신이 다스리는 교회 앞에서 그것을 당신에게 맡겼습니다’ 라고 말했다. 주교는 처음에는 요한이 자기에게 주지도 않은 돈을 요구한다고 생각하고 당황했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그것을 갖고 있는지 아니면 요한의 말을 믿어야 하는지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요한이 ‘나는 그 청년 형제의 영혼을 요구합니다’ 라고 말하자 이 노인은 깊이 한숨을 쉬고 눈물을 흘리며 ‘그는 죽었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왜, 어떻게 죽었습니까’ ‘그는 하나님께 대해 죽었습니다. 그는 악하고 자포자기한 자가 되어 강도가 되었습니다. 그는 이제 교회에 나오지 않고 자기와 비슷한 무리와 함께 산 속에서 출몰하고 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요한은 슬퍼하며 자기 옷을 찢고 머리를 치며 말했다. ‘나는 형제의 영혼을 지킬 훌륭한 관리인을 남겨 두었었습니다 !!! 어쨌든 말과 길을 안내할 사람을 마련해 주시오’ p161
그는 교회를 떠나 말을 타고 시골로 달렸다. 그는 망을 보고 있던 산적들에게 잡혔다. 그러나 그는 도망치려 하거나 저항하지 않고 ‘이것이 내가 여기에 온 목적이다. 나를 너희 두목에게로 인도하라’ 고 소리쳤다. 두목은 무장을 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자기에게로 다가오는 것을 본 순간 그는 부끄러워 뒤돌아 도망쳤다. 요한은 자신의 나이도 잊고서 전력을 다해 그를 쫓아가며 소리쳤다. ‘내 아들아, 왜 너는 무방비 상태의 늙은 아버지에게서 달아나느냐? 나를 불쌍히 여겨다오. 두려워하지 마라. 너에게는 아직도 생명을 얻을 소망이 있다. 내가 너를 위해 그리스도께 기도하겠다. 그리고 만일 필요하다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것처럼 나도 기꺼이 너를 위해 죽겠다. 내가 너를 위해 내 생명을 바치겠다. 멈추거라.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어라’ 이 말을 듣고서 그는 처음에는 눈을 내리뜨고 멈추어 섰다. 그리고나서는 그의 팔을 내리뜨렸다. 그는 자기에게 다가온 노인을 포옹하고는 떨며 크게 슬퍼했다. 그는 자신의 슬픔으로 스스로를 탄원하려 했다. 그는 마치 눈물로 두 번째 세례를 받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그는 자기의 오른손을 감추고 있었다. 그러나 요한은 자신이 기도로서 그리스도에게서 용서를 발견했다고 보증하고 확증했으며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서는 마치 그의 오른손이 모든 불의로부터 정결케 되었다는 듯이 그 손에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다시 그를 데리고 교회로 왔다. 요한은 그가 교회에 복귀하게 될 때까지 그를 떠나지 않았으며 자주 기도하고 끊임없이 금식했고, 여러 가지 위로의 말로 그의 마음을 녹여주었다고 한다. 이것은 참된 회개의 본보기이며 중생의 증거이며 가시적 可視的 부활의 기념비이다” p162
제24장 복음서의 순서
이제 우리는 논란이 없이 확실한 요한의 저서들을 제시하려 한다. 그의 저서 중에서 복음서는 전세계의 교회에 잘 알려져 있으며 무엇보다 먼저 진정한 그의 저작물로 인정되어져야 한다. 그러나 고대인들이 정당한 근거를 기준으로 하여 그것을 네 번째 위치에 놓았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로 보아 명백해질 수 있을 것이다. 영감을 받았으며 진실로 경건한 사람들인 주님의 사도들은 지극히 순결한 생활을 했으며 마음을 온갖 종류의 덕으로 장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에게 하사된 거룩하고 놀라운 힘을 의지했으며 스승의 교리를 솜씨좋고 세련된 문장으로 제출하는 방법을 알지 못했고 그렇게 하려 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다만 자기에게 역사하시는 성령의 증거와 그들을 통해 놀라운 일을 행하시는 그리스도의 능력을 사용해 하늘나라의 지식을 온 세상에 전파했다. 그들은 문체 연구에 관한 염려는 거의 하지 않았으나 인간보다 훨씬 위대한 협조자의 도움을 받아 이 일을 해냈다. 문체를 구사하는데 있어서 가장 유능했고 정서가 풍부했던 바울도 몇 편의 짤막한 서신을 남겼을 뿐이다. 그는 셋째 하늘을 보았고 하나님의 낙원으로 이끌려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듣는 영광까지 누리는 등 사람들에게 전해야 할 많은 신비한 일들이 있었는데도 그러했다. 열 두 사도와 칠십문도 및 다른 많은 주님의 추종자들도 그러한 일을 알지 못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마태와 요한은 우리에게 기록된 의견을 남겨 주었다. 전승에 의하면 그들은 필요했기 때문에 그 일에 착수했다고 한다. 마태는 처음에는 히브리어로 복음을 전파했다. 그러나 그는 다른 나라로 가야 했기 때문에 복음을 모국어로 기록하여 자신이 없는 공백을 그 기록으로 보충해 주었다. p163
한편 마가와 누가가 복음서를 펴낸 뒤, 그 동안 아무것도 기록하지 않고 복음을 전파해 온 요한은 마침내 다음과 같은 이유로 인해 복음서를 기록하기에 이르렀다. 이미 앞서 기록된 3개의 복음서는 사람들에게 유포되었고, 요한에게도 전해졌다. 그는 그 복음서들을 인정했으며 그것들의 진실성을 증거했다. 그러나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최초에 행하신 몇 가지 일과 복음의 시작에 관한 이야기가 부족하다는 것도 증언했다. 이것은 사실이었다. 왜냐하면 이들 3명의 복음서 기자들은 세례 요한이 투옥된 후 1년 동안의 주님의 행적을 기록했으며, 그들의 이야기의 첫머리에서 이것을 알렸다. 마태는 주님께서 40일 동안 금식하시고 유혹을 받은 일을 기록한 뒤에 자기가 기록한 이야기의 시기를 자세히 지적하여 “예수께서 요한의 잡힘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가셨다” 고 기록했다 (마 4:12). 마가는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셨다” (막 1:14) 고 표현했으며, 누가는 예수님의 행적을 기록하기에 앞서 “헤롯은 이 위에 한 가지 악을 더해 요한을 옥에 가두니라” 라고 기록하여 동일한 시기를 나타내고 있다. p164
이런 이유로 인해 복음서 기록에 착수하라는 청을 받은 사도 요한은 앞의 세 기자들이 기록하지 않은 시대의 이야기와 (요한이 투옥되기 전에 발생했으므로) 그들이 지나쳐버린 주님의 행적을 기록했다고 한다. 요한은 이 사실을 “예수께서 이 처음 표적을 행하여” 라고 말한 뒤, 주님의 행적을 다루는 도중에 세례요한을 언급하여 “요한도 예루살렘 가까운 애논 Aenon 에서 세례를 주니” 라고 밝혔다. 그는 또 “요한이 아직 옥에 갇히지 아니하였더라” 고 말함으로서 이 사실을 분명히 밝히기도 했다. 이와 같이 요한은 자기의 복음서에서 세례요한이 감옥에 갇히기 전에 있었던 예수님의 행적을 제시하고 있으나, 나머지 세 복음서 기자들은 그 사건 이후의 상황을 언급하고 있다. 즉 요한복음은 그리스도의 초기의 사건들을 포함하고 있으나 다른 복음서들은 시기적으로 후기에 발생한 이야기를 싣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은 마태와 누가가 주님의 족보를 기록했기 때문에 주님의 족보를 언급하지 않았고, 마치 성령께서 그를 위해 남겨두신 부분이기나 한 듯이 신성 神性 의 교리에서부터 시작했을 가능성이 있다. 요한복음에 관한 이야기는 이 정도에서 그치기로 한다. p164
마가가 복음서를 기록하게 된 동기는 이미 앞에서 이야기한 바 있다. 누가도 역시 자기 복음서의 서두에서 자신이 복음서를 기록하게 된 동기를 나타냈다. 즉 많은 사람들이 이미 누가가 완전히 알고 있는 일들을 경솔하게 저술하는 일에 착수했으므로 그는 자기의 복음서에서 자신이 바울과 함께 거하고 친밀하게 지내면서 알게 된 일들, 그리고 다른 사도들과의 교제를 통해 알게 된 일들을 확실히 기록하여 우리를 다른 사람들의 불확실한 가설에서 해방시키려 한다고 밝혔다. 이런 일들에 관해서는 이만큼만 언급하고 앞으로 적절한 기회에 고대의 작가들의 저서를 인용하여 다른 사람들은 그 거룩한 책들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했는지 서술해 보겠다. 요한의 복음서 외에도 그의 첫 번째 서신은 현대인이나 고대인들 모두가 아무 논란 없이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두 개의 서신들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계시록에 대한 의견들도 크게 나뉘어져 있다. 우리는 앞으로 적절한 시기에 고대인들의 증언을 근거로 하여 이 점에 대한 판단을 내려 보겠다. p165
제25장 진서 眞書 로 인정된 성서와 인정되지 못한 성서
본 장章 에서는 이미 언급된 신약성경의 책들에 관한 설명을 요약해 보려 한다. 먼저 4개의 거룩한 복음서가 앞에 놓여져야 하며, 그 뒤에 사도행전, 그 다음에 바울서신이 언급되어야 한다. 그 뒤에는 진서로 인정을 받고 있는 요한의 첫 번째 서신과 베드로의 첫 번째 서신이 와야 한다. 이 서신들 뒤에 요한계시록이 놓여져야 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적절한 때가 되면 여러 상이한 견해들을 제시할 계획이다. 이 책들은 진서 眞書 로 인정된 책들이다. 그 진위성이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책들 중에서 잘 알려져 있고 많은 사람들의 인정을 받고 있는 책들 중에서 야고보와 유다의 서신은 평판이 좋은 책이다. 그리고 베드로후서, 요한이서와 요한삼서에 대해서는 그것들이 참으로 그 복음서 기자의 저작인지 아니면 동일한 이름을 가진 다른 사람의 저작인지에 대한 논란이 있다. 위서 僞書 에는 <바울행전 The Acts of Paul>, <목회자 Pastor>, <베드로 계시록 The Revelation of Peter> 등이 포함된다. 이 밖에도 <바나바 서신 The Epistle of Barnabas>, <사도들의 강요 The Institutions of the Apostles> 라 불리는 책도 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어떤 이들은 그 정경성을 부인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성경에 포함시키고 있다. p166
어떤 사람들은 <히브리복음서 The gospel according to the Hebrews> 를 여기에 포함시키기도 한다. 그리스도를 영접한 히브리인들은 특히 이 책을 좋아한다. 이것들은 모두 무엇인가 논란이 있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 참되고 진정으로 저자가 기록했으며 충분히 증명된 저작물들과, 많은 교회 저술가들의 인정을 받으면서도 정경에 포함되지 못하고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책들을 구별하기 위해서 이 정경이 아닌 책들의 목록을 첨부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책들, 그리고 이단자들이 사도들의 이름을 사용해 인증한 책들, 예를 들면 베드로복음, 도마복음, 또는 안드레와 요한 그리고 다른 사도들의 이름을 빌린 각종 행전들을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져야 한다. 지금까지 교회 작가들은 자신의 저서에서 이 책들을 전혀 언급하지 않았으며, 이 책들의 문체의 특성도 사도들의 문체와 판이하게 다르며, 그 책에 개진된 사실들의 취지와 의견도 건전한 정통교리와 어긋나 있어 이단적인 사람이 만들어낸 책임을 분명히 증명해준다. 그런고로 그 책들은 위서 僞書로 분류되며, 또 완전히 어리석고 불경한 것으로 여겨 배격되어야 한다. 신약의 책들에 대한 언급은 이만 줄이고 우리의 역사 이야기를 계속하기로 한다. p166
제26장 사기꾼 메난더 Menander
메난더 Menander 는 시몬 마구스 Simon Magus 의 후계자로서 그는 행동으로 자신이 시몬 못지않게 사악한 도구임을 드러냈다. 그도 역시 사마리아인이었다. 그는 자기 스승 못지않게 마술에 능숙하게 된 뒤 한층 오만하게 기적을 행하는 체했다. 그는 자신이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보이지 않는 세계로부터 보냄을 받은 참 구주라고 말했다. 그리고 자신이 전해주는 마술 훈련에 입회하고, 또 자신이 이 목적을 위해 베푸는 세례를 받는 것 외의 방법으로는 하늘나라를 구성하고 있는 천사들을 이길 수 없다고 가르쳤다. 이들 중에서 이 세상에서 영원한 불멸을 얻을 가치가 있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은 죽음을 겪지 않고 이 세상 생활을 계속하면서도 늙지 않아 실제로 불멸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이 기사는 이레니우스의 기록을 통해 쉽게 증명된다. 그러나 저스틴 Justin 은 시므온 Simeon 을 언급하는 곳에서 메난더에 관해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곁들였다. “그러나 사마리아의 카파라태아 Caparattaea 마을 출신으로서 시므온의 제자가 되어 역시 마귀의 선동을 받고 있던 메난더가 안티오크로 와서 마술로 많은 사람들을 미혹케 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는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결코 죽지 않을 것이라고 가르쳤다. 지금도 몇몇 그의 추종자들은 같은 것을 믿고 있다. 이러한 사기꾼들은 기독교인이라는 이름으로 악한 술책을 사용해 위대한 경건의 비밀을 마술에 의해 손상시키려 했고, 영혼의 불멸과 죽은 자의 부활에 관한 교회의 교리를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그리고 이들을 구세주라고 믿은 사람들은 견고한 소망을 잃게 되었다” p167
제27장 에비온종파 Ebionites
고대인들은 이들을 에비온종파라고 불렀으나 (에비온종파 : 에비온 ebion 이라는 히브리어 단어는 “가난한” 이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아마도 이 분파의 견해나 상황을 언급하는 듯하다) 이것은 그리스도에 대해 낮고 천박한 견해를 품은 사람들이라는 뜻이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율법의 준수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이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그에 합당한 생활만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다고 여겼다. 이들은 예수님의 선재 先在 를 인정하지 않고 율법에 따른 의식적인 예배를 열심히 준수했다. 이들은 사도들의 모든 서신들은 마땅히 부인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히브리복음서 Gospel according to the Hebrews> 만을 사용했고 다른 복음서들은 전혀 가치가 없다고 여겼다. 그들은 유대교인들과 마찬가지로 안식일 및 유대인들의 계율을 지키면서 또 한편으로는 우리 기독교인들처럼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여 주의 날들을 축하했다. 그런고로 이런 경로를 밟아 그들도 역시 에비온종파 Ebionites 라는 명칭을 얻게 되어 자기들의 지적인 빈곤을 나타냈다. p168
제28장 이교의 창시자 세린투스 Cerinthus
이 무렵 또 다른 이단의 지도자 세린투스 Cerinthus 가 출현했다. 세린투스는 거짓으로 이적을 행하는 체했다. 그는 주색에 빠져 있었고 지극히 호색적인 사람이었으므로 먹고 마시고 결혼하며 이런 관능적 쾌락들을 보다 우아하게 표현하는 것, 즉 축제와 희생제사, 그리고 희생물을 살해함으로서 자신의 식욕과 정욕을 만족시켰다. 이레니우스는 <이단에 반박함 Against Heresies> 제1권에 이 사람의 은밀히 숨겨져 있던 거짓교리들을 추가했고, 제3권에서는 폴리갑 Polycarp 에게서 받은 전승으로 귀중한 이야기를 제공해 준다. 폴리갑은 말하길, 한번은 사도 요한이 목욕하려고 목욕탕에 들어갔다가 그 안에 세린투스가 있는 것을 알고서 그곳을 뛰쳐나와 도망쳤다고 한다. 그는 그와 같은 지붕 아래 있는 것조차 참지 못했으며, 자기와 함께 있는 사람들에게도 자기처럼 행하길 권면하며 “자, 도망칩시다. 진리의 원수인 세린투스가 목욕탕 안에 있는 한 그 목욕탕은 무너질 것입니다” 라고 말했다. p170
제29장 니콜라우스 Nicolaus 와 그의 추종자들
이 무렵 니골라당 Nicolaites 이라고 불리는 이단이 일어나 잠시 활동했다. 이들에 대해서는 요한계시록에도 언급되어 있다. 이들은 니콜라우스 Nicolaus (니골라) 를 자기들의 창시자로 내세운다. 니콜라우스는 사도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도록 하기 위해 스테판과 함께 임명한 일곱 집사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는 <스트로마타 Stromata> 제3권에서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그에게는 아름다운 아내가 있었다. 주님께서 승천하신 뒤 그를 시기하는 사람들이 그를 꾸짖자 그는 아내를 그들이 모인 한복판에 데리고 와서 아무나 원하는 사람은 그녀와 결혼하라고 했다. 그들은 이것이 ‘그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라는 그의 말과 완전히 일치한다고 말했다. 이리하여 그의 이단 사상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이 말과 본보기를 좇아 문자 그대로 부끄러움도 없이 간음을 했다. 그러나 내가 확인한 바로는 니콜라우스에게는 아내 외에 다른 여인이 없었으며, 그의 딸들은 순결을 지켜 고귀한 생활을 영위했고, 또 아들들도 역시 타락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가 자기 아내를 사람들의 한가운데로 데려온 것은 정욕을 억누르기 위한 행동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처럼 열심히 추구한 쾌락의 억제를 ‘우리가 몸을 욕되게 했다’ 라는 말로 깨우친 것이다” 이제까지 진리를 왜곡시키려 한 사람들, 그리고 알려졌다가 곧 사라져버린 것들에 관해 이야기했다. p171
제30장 결혼생활을 한 사도들
클레멘트는 앞서 인용했던 사실들을 기록한 뒤, 결혼을 파기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계속 결혼생활을 한 사도들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그는 이렇게 기록했다. “그렇다면 그들은 사도들까지 배격해야 할 것이다. 베드로와 빌립에게는 자녀가 있었다. 또 바울은 어느 서신에서 자기의 아내를 조금도 주저함이 없이 언급했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사역을 촉진하기 위해서 아내를 데리고 다니지 않았다” 클레멘트는 역시 같은 저서 <스트로마테우스 Stromateus> 제7권에 계속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거룩한 베드로는 자기의 아내가 처형장으로 끌려가는 것을 보고서 그녀가 본향으로 돌아오라는 부르심을 받았음을 기뻐했다. 그는 아내의 이름을 부르며 위로와 격려의 말을 했다. ‘오, 그대여 !!! 주님을 기억하시오’ 이 복된 사람들은 결혼생활을 했고, 또 가장 사랑하는 친구들을 향한 완전한 애정을 베풀었다” p172
제31장 요한과 빌립의 죽음
요한이 묻힌 장소는 에베소 교회의 감독 폴리갑이 로마의 감독 빅토르 Victor 에게 보낸 서신에 기록되어 있다. 그는 요한, 빌립, 그리고 빌립의 딸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아시아에서도 강력한 권위자들이 숨을 거두었다. 그들은 장차 마지막날에 주님께서 하늘로부터 영광 중에 오셔서 모든 성도들을 다시 모으실 때에 부활할 것이다. 열 두 사도 중 하나인 빌립은 히에라폴리스 Hierapolis 에 잠들어 있다. 늙을 때까지 처녀로서 지낸 그의 두 딸도 역시 그곳에 매장되어 있다. 성령 안에서 생활했던 또 한 명의 딸은 에베소에 매장되었다. 그리고 주님의 가슴에 기대었던 제자이며 성직자복을 입은 제사장이며 순교자요 교사였던 요한도 역시 에베소에 잠들어 있다” 이것은 그들의 죽음에 관한 충분한 자료가 될 것이다. 그리고 앞에서 우리가 언급했던 바 프로클루스 Proclus 를 대적한 논쟁을 기록한 카이우스 Caius 의 대화에도 빌립과 그의 딸들의 죽음에 대해 앞에서 말한 것과 일치하는 기록이 있다. “이 일이 있은 뒤 아시아의 히에라폴리스에서는 빌립의 네 딸이 여선지자로 활동했다. 이들의 무덤과 부친 빌립의 무덤이 그곳에 남아 있다” 그러나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빌립의 딸들이 유대의 가이사랴에 머물러 있었고 예언의 은사를 받은 것으로 이야기했다 : “이튿날 떠나 가이사랴에 이르러 일곱 집사 중 하나인 전도자 빌립의 집에 들어가서 유하니라. 그에게 딸 넷이 있으니 처녀로 예언하는 자라” (행 21:8-9). p173
제32장 예루살렘 감독 시므온의 순교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네로와 도미티안 이후, 지금 우리가 기록하고 있는 시대를 다스린 황제의 시대에도 대중적인 반란으로 인해 여러 도시에서 부분적인 박해가 있었다. 이 박해 때에 예루살렘 교회의 제2대 감독으로 임명되었던 시므온이 순교했다. 이것은 앞에서도 몇 번 인용했던 헤게시푸스 Hegesippus 가 증거하고 있다. 헤게시푸스는 어떤 이단자들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이 무렵에 시므온이 기독교인이라는 고발을 받아 여러 날 동안 고문을 당하면서 판사와 그의 하인들을 크게 놀라게 했으며 우리 주님과 같은 고난을 받아 세상을 떠났다고 덧붙였다. 그가 기록한 내용을 그대로 살펴보는 것이 우리에게는 큰 유익이 될 것이다. “이 이단자들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클레오파스의 아들 시므온이 다윗의 자손이며 기독교인이라고 고발했다. 그리하여 그는 트라얀이 황제로 있고 애티쿠스 Atticus 가 영사로 있을 때에 순교했다” 헤게시푸스는 또 다윗의 족속인 유대인들을 수색할 때에 그를 고발한 사람들이 이 가문의 후손으로 여겨져 감옥에 갇혔다고 했다. 시므온의 수명, 그리고 복음서에서 클레오파스 Cleopas 의 딸 마리아를 이야기하고 있으며, 그의 아들이 시므온이라는 사실에 의해 판단해볼 때 시므온은 주님을 직접 보고 그에게서 말씀을 들은 것을 증명할 수 있는 증인들 중 한 사람이라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헤게시푸스는 주님의 형제라고 여겨지는 유다의 자손들이 체포되어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고백한 뒤에도 살아남아 도미티안 치하에서 증거했다고 말했으니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p175
“또한 순교자이며 주님의 친척들로서 모든 교회를 이끌어나간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온 교회에 평화가 깃들었을 때부터 트라얀 황제 시대에 이르기까지 살았다. 이 트라얀 황제 때에 클레오파스의 아들로서 주님의 친척인 시므온이 이단자들의 공격을 받아 자기와 거의 비슷한 지위에 있는 애티쿠스 Atticus 의 재판을 받았다. 그는 여러 날 동안 고문을 당한 끝에 마침내 순교했다. 그의 불굴의 신앙은 모든 사람을 놀라게 했으며, 재판장 자신도 120세나 된 노인이 그러한 고문을 견뎌내는데 대해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결국 그는 십자가에 처형하라는 선고를 받았다” 헤게시푸스는 그 시대의 사건들을 서술하면서 그때까지 교회는 순결하고 타락하지 않은 처녀로 존속했다고 말했다. 혹시 건전한 구원의 복음의 교리를 왜곡시키려는 사람들이 있다고 해도 그들은 아직 어둡고 후미진 곳에 숨어있었다. 그러나 거룩한 사도들이 사라지고 그들의 거룩한 지혜를 들을 수 있는 특혜를 누렸던 세대들마저 사라지고 나자 거짓교사들의 사기와 미혹에 의해 불경한 오신 誤信 의 복합체가 생겨났다. 이 세상에 사도들이 한 사람도 남지 않게 되었으므로 그들은 부끄러움 없이 진리의 복음을 거슬러 자신의 거짓교리를 전파하려 했다. 이것은 헤게시푸스가 진술한 내용이다. p175
제33장 트라얀 황제는 기독교인 색출을 금지했다
당시 기독교 신앙을 대적하는 큰 박해가 시작되었다. 훌륭한 총독이었던 플리니우스 세쿤두스 Plinius Secundus 는 순교자들의 숫자가 많은 것에 감동을 받았다. 그는 황제와 신앙을 위해 처형을 받게 될 무리들에 관해 서신을 주고받았다. 동시에 그는 황제에게 전하길, 자신이 확인한 바에 의하면 그들은 전혀 악한 사람들이 아니며 법을 범하지도 않으며 다만 아침 해뜰 때 일어나 마치 신에게 하듯이 그리스도를 찬양하는 노래를 부를 뿐이라고 전했다. 또 그들은 간음, 살인, 그리고 죄악된 행동을 혐오하며 모든 일을 법에 따라 행동한다고 전했다. 트라얀은 이 서신에 대한 응답으로 칙령을 발표했다. 이 칙령의 요지는 더 이상 기독교인을 색출하지 말고, 다만 그들이 친히 출두할 때에는 처벌하라는 것이었다. 이 칙령으로 인해 혹독한 박해는 어느 정도 완화된 듯했다. 그러나 우리를 괴롭히려는 사람들에게 유리한 핑계는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다. 여러 지방에서 때로는 백성들이, 때로는 통치자들이 우리를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공격해왔다. 그리하여 눈에 띄는 박해는 없었지만 여러 지방에서 부분적인 박해가 있었으며 많은 신자들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순교했다. 라틴어로 쓰여진 터툴리안의 <변증 Apology> 을 인용해 번역해보면 다음과 같다. “실제로 우리를 잡아들이기 위한 수색은 금지되었다. 이 지방의 총독으로서 과거 몇몇 기독교인들을 정죄하고 그들의 직위를 박탈했던 플리니우스 세쿤두스는 그들의 수효가 상당히 많다는 사실에 당황했다. 그는 자신이 어떤 방침을 추구해야 하는지 의심을 품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기독교인들에게서는 희생제사를 드리려하지 않는 것 외에는 죄를 발견할 수 없었다는 사실을 트라얀 황제에게 보고했다. 또 기독교인들은 아침 해가 뜰 때 일어나 신께 하듯이 그리스도를 찬양하는 노래를 하며 자신들의 계율을 지키기 위해서 간음, 살인, 속임수, 사기 및 그와 유사한 모든 죄를 금지한다고도 했다. 트라얀은 이 서신에 대한 답신에서 더 이상 기독교인들을 수색하지 말되 그들이 자신해서 출두했을 때에는 처형하라고 기록했다” 이것이 이 사건에 얽힌 배경이다. p177
제34장 로마교회의 제4대 감독 유아레스투스 Euarestus
트라얀 3년, 로마교회의 감독 클레멘트는 유아레스투스 Euarestus 에게 감독직을 맡기고 세상을 떠났다. 클레멘트는 거룩한 말씀을 전파하는 일을 9년 동안 수행했다. p177
제35장 예루살렘 교회의 제3대 감독 저스투스 Justus
시므온의 죽음에 대해서는 앞서 언급한 바 있다. 그가 죽은 후 저스투스 Justus 라는 유대인이 그의 뒤를 이어 예루살렘의 감독이 되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유대교로부터 개종하여 기독교인이 되었는데, 저스투스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 p178
제36장 익나티우스 Ignatius 의 서신
이 무렵 아시아에서는 사도들의 허물없이 절친한 제자였던 폴리갑이 활약하고 있었다. 그는 주님의 종들이며 증인인 사람들에 의해 서머나 교회의 감독으로 임명되었다. 당시 파피아스 Papias 가 히에라폴리스 Hierapolis 의 감독으로 있었다. 그는 모든 학문에 조예가 깊었고 성경에 매우 정통했다.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있는 익나티우스 Ignatius 도 베드로의 후계자로서 안티오크 교회의 제2대 감독직을 맡았다. 전승에 의하면 그는 그리스도를 증거했다는 이유로 시리아에서 체포되어 로마로 압송되어가서 사나운 짐승의 밥이 되었다고 한다. 그는 엄격한 감시 하에 로마로 압송되는 도중 머무르게 된 아시아의 여러 도시에서 그곳 교회들의 신앙을 설교와 권면으로 견고하게 했다. 그는 특히 당시 발흥하고 있던 이단들에 주의하라고 권면했으며, 사도들의 전승을 굳건히 믿으라고 권면했다. 그는 또 그것을 글로 적어 증거해야 할 필요를 느꼈다. 그리하여 당시 폴리갑이 감독으로 있던 서머나에 이르렀을 때, 그는 에베소 교회에 보내는 서신을 기록했다. 그는 이 서신에서 오네시무스 Onesimus 가 그 교회의 목사였다고 언급하고 있다. 그는 또 트랄레스 교회에 보내는 편지도 썼는데 당시 그 교회의 감독은 폴리비우스 Polybius 라고 언급하고 있다. 이 편지들 외에도 로마교회에 보내는 편지도 있다. 이 서신들 중에서 몇 부분을 발췌해 인용하는 것도 유익한 일이 될 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편지를 썼다. p179
“시리아로부터 로마로 가는 도중 나는 열 마리의 표범 군인들에게 묶여 있었으면서 육로나 해로에서 밤낮으로 사나운 짐승들과 싸우고 있습니다. 나는 군인들에게 친절하게 대하는데도 그들은 대단히 난폭하게 행동합니다. 그러나 나는 이런 불법 행위의 와중에서도 많은 것을 배우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것 때문에 의롭다함을 얻지는 않습니다. 나를 기다리고 있는 저 짐승들로 인해 유익을 얻게 되길 바랍니다. 또 나는 나를 해칠 짐승들이 빨리 발견되길 기원합니다. 나는 그 짐승들이 나를 해치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신속하게 먹어치우도록 유혹하고 알랑거릴 것입니다. 만일 그런데도 그 짐승들이 나를 해치려하지 않는다면 억지로라도 나를 해치게 만들 것입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나는 순교가 얼마나 큰 유익을 주는지 알고 있습니다. 이제야 나는 제자로서의 첫걸음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를 얻을 수만 있다면, 눈에 보이는 것이나 보이지 않는 것이나 그 어느 것도 나의 야망을 자극하지 못합니다. 내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얻게만 된다면, 화형이나 십자가나 사나운 짐승의 공격이나 또는 내 뼈를 찢고 사지를 부러뜨리며 온 몸에 멍이 들도록 매를 맞는 등 그 어떤 마귀의 괴롭힘도 참고 견디겠습니다” p180
이것은 그가 서머나에서 앞서 언급된 교회들에게 보낸 서신이다. 그는 서머나를 떠난 뒤 드로아에서 필라델피아 Philadelphia 의 교인들과 특히 그곳의 감독이었던 폴리갑에게 권면의 편지를 썼다. 그는 폴리갑이 사도다운 인물이며 선하고 신실한 목자라고 지적하고 그에게 안디옥의 양떼를 맡기면서 교회를 부지런히 감독하라고 요청했다. 그는 서머나 교회에 쓴 편지에 어디에서 입수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예수에 관해 다음과 같은 요지의 글을 썼다. “나는 그가 부활 후에 사람들에게 보이셨으며 또 베드로와 온 사람들에게 ‘나를 만져보아 내가 육체가 없는 영이 아님을 알라’ 고 말하시고 또 그렇게 믿으라고 말씀하셨고 그들이 즉시 그를 만져보고 믿었음을 알고 있으며 또 그렇게 믿고 있다” 이레니우스도 익나티우스의 순교를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서신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사나운 짐승의 밥이 되게 하라는 선고를 받은 어느 신앙인은 ‘나는 하나님의 양식이다. 나는 사나운 짐승들의 이빨에 빻여 순결한 빵이 될 것이다’ 라고 말했다” p180
폴리갑은 필립보 교회에 보낸 서신에서 이 서신들을 언급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들 모두가 복된 순교자인 익나티우스, 루푸스 Rufus, 조시무스 Zosimus 및 여러분의 동료시민 중, 그리고 바울과 여러 사도들에게서 직접 목격한 인내를 여러분 자신도 발휘하며 순종하길 권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들이 헛된 일이 아니라 신실하고 의로운 일이며, 그들은 고난을 받으신 주님께서 그들을 위해 정해 놓으신 곳으로 돌아갔음을 믿으십시오. 그들은 이 세상을 사랑하지 않고 우리를 위해 죽었으나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신 그분만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 뒤에 또 다음과 같이 적었다. “당신과 익나티우스 두 사람 모두 나에게 편지를 보내어 만일 시리아로 가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 편에 당신의 편지를 그곳으로 보내라고 했습니다. 그 일은 장차 적절한 기회에 내가 행하거나, 아니면 지금 내가 당신에게 보내는 사람이 하게 될 것입니다. 당신이 부탁한대로 익나티우스가 우리에게 보낸 서신을 당신에게 보내드립니다. 그 서신은 이 서신 뒤에 동봉되어 있습니다. 당신은 그 서신으로부터 큰 유익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 서신들은 믿음과 인내, 그리고 우리 주님에 관한 모든 교훈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익나티우스에 관해 기록했다. 익나티우스의 뒤를 이어 헤로스 Heros 가 안티오크 교회의 감독이 되었다. p181
제37장 그 시대까지 생존한 복음전도자들
제38장 클레멘트의 서신, 그리고 그의 이름을 도용한 서신들
제39장 파피아스 Papias 의 저작물
제4권
제1장 트라얀 시대에 활약한 알렉산드리아와 로마의 감독들
트라얀 12년에 앞에서 언급된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감독이 세상을 떠났고 프리무스 Primus 가 그곳의 감독직을 맡아 사도들로부터 제4대 감독이 되었다.
같은 시기에 유아레스투스 Euarestus 가 로마의 감독으로서 8년 봉직한 뒤 알렉산더 Alexander 가 바울과 베드로의 뒤를 이은 제5대 감독이 되었다. p190
제2장 이 무렵에 있었던 유대인들의 재난
주님의 교리는 나날이 번성해가고 교회는 끊임없이 증가해갔다. 반면에 유대인들의 재난도 계속 증가하여 잇달아 불행한 일이 일어났다. 트라얀 황제가 즉위해 18년이 되던 해 유대인들이 또 다시 소요를 일으켰으므로 트라얀은 상당수의 유대인들을 죽였다. 알렉산드리아 및 이집트의 나머지 지역, 그리고 구레네 Cyrene 에서 유대인들은 마치 무섭고 난폭한 영의 자극을 받은 듯 그곳에 거하고 있는 헬라인들에게 선동적인 조처들을 취했다. 폭동은 크게 번져 그 이듬해 루푸스 Lufus 가 이집트 전역의 총독으로 있을 때 무시하지 못할 전쟁이 발발했다. 최초의 싸움에서도 유대인들이 헬라인보다 우세했다. 헬라인들은 알렉산드리아로 퇴각하여 그 도시에 있는 유대인들을 눈에 보이는대로 죽였다. 그리고 루쿠아스 Lucuas 의 지휘 아래 있던 구레네 Cyrene 의 유대인들은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했는데도 이집트의 지방을 황폐화시킨 뒤 나아가 도시를 파괴하려 했다. 황제는 이들을 막기 위해 마르시우스 투르보 Marcius Turbo 에게 기병과 보병과 해군을 주어 보냈다. 그는 오랫동안 여러 전쟁터에서 전쟁을 하면서 구레네의 유대인들은 물론 그들과 합류한 이집트의 유대인들과 그들의 지도자 루쿠아스 Lucuas 를 살해했다. 황제는 메소포타미아의 유대인들도 그곳에 있는 헬라인을 공격하리라고 의심해 루시우스 퀴에투스 Lucius Quietus 에게 그 지방의 유대인들을 제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루시우스는 군대를 이끌고 가서 싸워 수많은 유대인들을 살해했다. 황제는 이 전쟁에서 거둔 승리로 인해 그를 유대의 총독으로 임명했다. 당대의 희랍작가들은 이 일들을 거의 비슷하게 기록했다. p191
제3장 아드리안 황제 때에 신앙을 옹호하는 글을 쓴 작가들
트라얀 황제는 20년에서 6개월이 부족한 기간 동안 주권을 장악하고 있다가 일리우스 하드리안 AElius Hadrian 에게 황제의 자리를 넘겨주었다. 당시 악한 사람들은 믿음의 형제들을 괴롭히려고 했으므로 콰드라투스 Quadratus 는 하드리안에게 신앙을 옹호하는 변증의 담화를 썼다. 그 작품은 지금도 몇몇 형제들과 우리의 수중에 있다. 이 책을 통해서 누구나 그의 사도적 신앙과 지성의 증거를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작가는 자신이 살고 있던 시대의 고대인들에 대해 기록했다. “우리 주님의 행위는 항상 여러분 앞에 있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참된 기적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병고침을 받은 사람들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사람들을 보았으며, 이들은 항상 현존해 있었다. 그들은 주님이 세상에 계실 동안은 물론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오랫동안 살아 있었다. 그들 중 어떤 이는 우리 시대에까지 살아남아 있다” 역시 신앙에 신실하게 헌신한 아리스티데스 Aristides 는 아드리안에게 쓴 신앙의 변론을 후손에게 남겼다. 이 작품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들에 의해 보존되어 오고 있다. p192
제4장 아드리안 황제 시대에 활동한 로마와 알렉산드리아의 감독들
아드리안 황제의 통치 3년에 로마의 감독 알렉산더가 10년 동안의 사역을 완수하고 사망했고 지스투스 (또는 식스투스) Xystus 가 그의 후임이 되었다.
거의 같은 시기에 알렉산드리아에서는 프리무스 PPrimus 가 감독이 된지 12년이 되는 해에 사망하고 저스투스 Justus 가 그의 뒤를 이었다. p192
제5장 주님의 시대로부터 이 시대에 이르기까지의 예루살렘 감독들
우리는 예루살렘의 감독들의 연대가 제대로 기록으로 보존되어 있는지 확인할 수 없으며 전승에 의하면 그들은 모두 단명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내가 여러 작가들의 저서를 통해서 확인한 바에 의하면 아드리안 황제가 유대인들을 공격하기까지 15명이 예루살렘 교회의 감독직을 계승했다고 한다. 그들은 모두 히브리인이었으며 순결하고 더럽혀지지 않은 그리스도의 지식을 받았으므로 판단할 능력이 있는 사람들의 판단에 따라 그들은 감독직에 합당하다는 인정을 받았다. 이들의 다스림을 받은 교회는 당시 사도시대로부터 예루살렘이 함락될 때까지 살던 신실한 히브리인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마침내 다시 로마에 반기를 들던 유대인들은 혹독한 전쟁을 치른 뒤 정복되고 포로가 되었다. 그 동안에 순수 유대인 감독들의 시대가 끝났다. 그들을 처음부터 순서대로 다시 열거해보면 다음과 같다. 초대감독은 주님의 형제 야고보였으며, 그가 순교한 뒤 시므온이 제2대 감독이 되었다. 3대 감독은 저스투스 Justus, 4대 감독은 자케우스 Zaccheus, 5대 감독은 토비아스 Tobias, 6대 감독은 벤자민 Benjamin, 7대 감독은 요한, 8대 감독은 마태, 9대 감독은 빌립, 10대 감독은 세네카 Seneca, 11대 감독은 저스투스 Justus, 12대 감독은 레위 Levi, 13대 감독은 에프레스 Ephres, 14대 감독은 요셉, 그리고 마지막 15대 감독은 유다 Judas 였다. 이들은 모두 순수 유대인들로서 사도들의 시대로부터 앞서 언급된 시기까지 (아드리안 황제 때) 의 기간 동안에 활약한 예루살렘의 감독들이다. p193 한편 로마교회에서는 아드리안 황제가 즉위해 12년이 되던 해에 지스투스 Xystus 가 10년간의 감독생활을 마쳤고, 텔레스포루스 Telesphorus 가 로마의 제7대 감독이 되었다. 그로부터 1년 몇 개월이 지난 뒤 알렉산드리아에서는 유메네스 Eumenes 가 11년의 감독생활을 한 전임자의 뒤를 이어 제6대 감독이 되었다. p194
제6장 아드리안 황제 시대에 있던 마지막 유대 공격
유대인들의 반란이 거듭되고 거세어졌다. 유대의 총독 대리였던 루푸스 Rufus 는 황제로부터 더욱 많은 군대를 지원받았으므로 유대인들의 광폭함을 구실로 삼아 무자비하게 수많은 남자, 여인, 어린이들을 살해했다. 그리고 전쟁법에 따라 유대나라를 완전히 식민지로 삼았다. 당시 유대인들은 ‘별’ 이라는 의미의 이름을 가진 바르코케바스 Barchochebas 라는 사람의 유혹을 받고 있었다. 이 사람은 어떤 면에서는 살인자요 강도였다. 노예로 전락한 백성들 속에서 그는 그럴듯한 칭호를 붙이고 자신은 하늘에서 내려온 빛이며 자신의 목적은 학대받는 그들을 기쁘게 해주는 것인체 하고 또 많은 이적을 행하는 체했다. 아드리안 18년, 전쟁은 예루살렘에서 멀지 않은 든든한 요새 비테라 Bitthera에서 절정에 달했다. 포위 공격이 얼마동안 계속되었으며 반란자들은 굶주림과 기근으로 인해 지극한 곤경에 처해 있었다. 결국 반란의 주동자는 응분의 처벌을 받았고, 아드리안 황제는, 유대 민족은 예루살렘 주변의 지방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칙령을 내렸다. 그리하여 그들은 자기 조상들의 땅을 멀리에서조차 보지 못하게 되었다. 이것은 펠라의 아리스토 Aristo 의 진술이다. 유대인들의 도성 예루살렘은 완전히 버림받은 땅이 되어 옛 주민들은 완전히 축출되었고 대신에 이방인들이 그곳에 거주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 도시는 일리우스 아드리안 AElius Adrian 황제를 기념하여 엘리아 Elia 라고 불렸다. 그리고 그곳의 이방인들을 모아 세운 교회에 감독이 임명되었으니 그가 마르쿠스 Marcus 였다. 그는 순수 유대인 감독들이 끊어진 뒤 임명된 최초의 감독이었다. p195
제7장 이 시기에 거짓교리를 가르친 지도자들
제8장 당시에 활약한 교회의 저술가들
당시의 저술가들 중에서 헤게시푸스 Hegesippus 는 탁월한 위치에 있다. 이미 우리는 그의 여러 저서들을 언급한 바 있다. 이 시기에 참으로 건전한 철학을 사랑했던 사람 저스틴 Justin 은 아직 헬라문학을 수학하고 있었다. 그는 안토니누스 Antonine 에게 쓴 <변증> 에서 이 시대를 잘 나타냈다. p198 저스틴은 유대전쟁에 대해 말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추가했다. “우리 시대에 발생한 유대 전쟁에서 유대 반란의 지도자인 바르코케바스 Barchochebas 는 기독교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모독할 때까지 무섭고 가혹한 고문을 하라고 명령했다” 그는 역시 같은 저서에서 자신이 헬라철학을 버리고 기독교신앙을 택한 것은 냉정한 사고와 판단의 결과이며 지극히 타당한 일이었다고 표현했다. “나는 플라톤의 철학을 흡족해했고 기독교인들을 비방하는 소문도 들었다. 그러나 그들이 죽음이나 온갖 무서운 일에 직면해서도 용감하게 행하는 것을 보면서 나는 그들이 악하고 육욕적인 일에 몰두하여 살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쾌락을 즐기거나 절제가 없는 사람, 또는 육신에 신경을 쓰는 사람들이라면 자기 욕망의 대상들을 박탈하려는 죽음을 환영하지 못할 것이며, 행정관의 눈을 피해 살려고 애쓸 것이며, 분명히 죽을 것임을 알면서도 스스로 교인임을 고백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p199
저스틴은 대단히 훌륭한 총독이었던 세레니우스 그라니아누스 Serenius Granianus 가 아드리안 황제에게 기독교인에 관한 편지를 보냈다고 기록했다. 그 편지에서 총독은 단지 대중의 소리에 부응하여 정당한 고발이나 재판절차를 거치지 않고 교인들을 처형하는 것은 정당하지 못하다고 썼다. 또 그는 아시아의 총독 미누시우스 푼다누스 Minucius Fundanus 에게도 편지를 보내어 합법적으로 고발되지 않은 한 아무도 사형에 처하지 말라고 명령했다. 저스틴은 라틴어로 쓰여진 이 서신의 사본을 첨가했으며 그 서두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우리는 지극히 훌륭하신 당신의 부친, 아드리안 황제의 서신을 근거로 하여 우리가 그분에게 요구했던 것은 당신에게도 요구할 정당한 근거를 갖고 있습니다. 즉, 기독교인들에게 정당한 재판의 기회를 주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요청하는 것은 아드리안 황제가 그렇게 명령했기 때문이라기보다 이 요구가 정당한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드리안 황제의 서신의 사본을 첨부합니다. 당신은 우리가 이 서신에서와 마찬가지 진리를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에 그 사본이 있습니다” 저자는 라틴어로 쓰인 서신의 사본을 첨부했는데, 그리고 우리는 최선을 다해 그것을 헬라어로 번역했다. p200
제9장 정당한 재판을 거치지 않고서는 기독교인을 처형하지 말라고 명령한 하드리안의 서신
“미누시우스 푼다누스 귀하. 나는 당신의 선임자였던 훌륭한 세레니우스 그라니아누스 Serenius Granianus 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은 일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 일이 아무런 심문과정 없이 진행되지 않기를 바라며, 그리하여 이 사람들은 괴롭힘을 당하지 않고 밀고자들에게 악의적인 조처를 취할 기회를 주지 않기를 바랍니다. 만일 당신이 다스리는 지역의 주민들이 기독교인들을 고발할 때에는 고발 사유를 분명히 증명해 재판관들 앞에서 답변하게 할 것이며, 단순한 청원이나 기독교인을 비방하는 항의는 받아들이지 마시오. 그리고 고발된 사건을 당신이 심리하여 법에 저촉되지 않는 절차를 밟아 고발을 했음이 증명되면 그 사건을 죄의 경중에 따라 결정하십시오. 그러나 만일 남을 중상하려는 목적에서 고발했다면 그 고발자를 조사하고 그에 대한 처벌을 하도록 하십시오” 이것은 아드리안의 서신 사본의 내용이다. p201
제10장 안토니누스 Antonine 시대에 활약한 로마와 알렉산드리아의 감독
아드리안 황제는 21년간 통치하고 세상을 떠났으며 피우스 Pius 라고 불리는 안토니누스 Antonine 가 로마를 통치하게 되었다. 그가 즉위하던 해에 로마교회의 감독 텔레스포루스 Telesphorus 가 감독으로 일한지 11년만에 세상을 떠났고 히기누스 Hyginus 가 그의 뒤를 이어 로마교회를 맡게 되었다. 이레니우스는 텔레스포루스가 순교로 인해 유명해졌다고 기록했다. 그는 또 히기누스가 로마의 감독으로 있을 때에 특이한 이단의 창시자인 발렌티누스 Valentinus, 그리고 후일 마르시온 Marcion 이 퍼뜨린 이단의 지도자 세르돈 Cerdon 이 로마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고 설명했다. p201
제11장 이 시대에 활약한 이단의 우두머리들
“히기누스가 감독으로 있을 때 로마에 온 발렌타인 Valentine 은 피우스 Pius 시대에 장년기에 들어서 있었고 아니세투스 Anicetus 시대까지 살았다. 그러나 마르시온 이전의 인물인 세르돈 Cerdon 은 제9대 감독 히기누스 Hyginus 밑에서 활동했다. 그는 교회로 들어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서도 그 길로 계속 행했다. 비밀리에 자신의 교리를 가르쳤다가는 다시 그 교리들을 부인했고, 어떤 때에는 왜곡된 교리로 인해 정죄를 받아 형제들의 모임에서 격리되기도 했다” 이상은 이레니우스의 저서 <이단을 반박함 Against Heresies> 제3권에 기록된 내용이다. 이레니우스는 이 책 제1권에서 세르돈에 관해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세르돈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는 시몬의 추종자들로부터 선동을 받은 사람으로서 히기누스가 로마교회의 제9대 감독으로 있을 때, 얼마동안 로마에 머물렀다. 그는 율법과 선지자들이 선포한 하나님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가 아니라고 가르쳤다. 왜냐하면 후자는 계시되어졌으나 전자는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았으며, 전자는 의로웠으나 후자는 선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세르돈의 뒤를 계승한 폰투스 Pontus 출신의 마르시온 Marcion 은 아무 거리낌 없이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여 자신의 무리를 증가시켰다” p202
이레니우스는 발렌티누스의 이단 속에 감싸여져 있는 끝없이 깊은 오류들을 지극히 능숙하게 파헤쳐 마치 뱀처럼 잠복해있는 악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그는 말하길 이밖에도 거의 같은 시기에 마르쿠스 Marcus 라는 이단자가 있었는데 그는 마술에 능통한 사람이었다고 했다. 그는 그들의 타락한 입회의식과 혐오스런 비밀들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그들 중 어떤 사람은 신방을 준비하고 입회자들에게 제시된 형태의 비밀스런 입회의식을 행했다. 그들은 이것이 영적결혼으로서 하늘나라에서의 결혼과 같은 형태를 취한 것이라고 말했다. 어떤 사람은 그들을 물이 있는 곳으로 데려가서 세례를 주며 ‘미지의 우주의 아버지, 만물의 어머니이신 진리, 이 땅에 강림하신 예수의 이름으로’ 라는 말을 되풀이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입회자들을 더욱 혼란케 만들려고 히브리 명사들을 되풀이했다” 히기누스는 4년 동안 감독으로 활동하다가 사망했고 피우스 Pius 가 그의 후임으로 감독이 되었다. 알렉산드리아에서는 유메네스 Eumenes 가 13년의 임기를 채운 뒤 마르쿠스 Marcus 가 감독으로 임명되었다. 마르쿠스는 10년 동안 활동하고 사망했고 셀라딘 Celadin 이 알렉산드리아 교회를 다스리게 되었다. 당시 로마교회의 감독 피우스가 15년간 감독으로 활동하다가 사망했으므로 아니세투스 Anicetus 가 그의 후임으로 로마교회를 다스리게 되었다. 헤게시푸스는 자신이 이 시기에 로마에 있었으며 엘류테루스 Eleutherus 감독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계속 그곳에 머물렀다고 기록했다. p203
이 시대에 활약한 사람들 중에 가장 뛰어난 인물은 저스틴 Justin 이었다. 그는 철학자로 자칭하면서 하나님의 진리를 전파했고 또 자신의 저술을 통해 신앙을 위해 싸웠다. 그는 마르시온을 반박한 저서에서 자신이 그 책을 저술할 당시까지도 마르시온이 살아있었다고 기록했다. 그는 폰투스 Pontus에서 온 마르시온이라는 사람이 자기 추종자들에게 창조주 하나님보다 더 위대한 하나님이 있다고 가르쳤다고 말한다. 마르시온은 악마들과 결합하여 전 세계의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고 만물의 창조주가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심을 부인하라고 권면했다. 그들은 하나님보다 더 위대한 분이 창조주이시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앞에서도 말했던 것과 같이 이들의 추종자들은 모두 기독교인이라고 불렸다. 마치 전혀 공통적인 의견을 갖지 않는 철학자들에게 철학이라는 명사가 적용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는 여기에 덧붙여 “우리는 이제까지 발생했던 모든 이단들을 반박하는 저서를 저술했다. 만일 당신이 그것을 읽길 원한다면 당신에게 주겠다” 라고 말했다. 저스틴은 헬라인을 대적하여 위대한 승리를 거둔 뒤에 신앙을 옹호하는 내용을 담은 또 한 편의 저술을 안토니누스 피우스 Antonine Pius 황제와 로마 원로원에 보냈다. 그는 로마에 거주했다. 그는 자신의 저서 <변증 Apology> 에서 자신이 누구이며 어디 출신인지를 밝혔다. p204
제12장 안토니누스 황제에게 보낸 저스틴의 변증
“티투스 일리우스 아드리안 안토니누스 피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Titus AElius Adrian Antoninus Pius Cesar Augustus 황제, 그의 아들이며 철학자인 오네시무스 Onesimus, 그리고 황제의 친아들이며 피우스의 양자로서 지식에 심취한 철학자 루시우스 Lucius, 그리고 신성한 원로원과 모든 로마 백성들에게 부당하게 미움과 비방을 받고 있는 모든 민족을 위해 보내는 글, 나 저스틴은 플라비아의 박키우스 Bacchius 의 손자이며 프리스쿠스 Priscus 의 아들로서 그들 무리의 한 사람이므로 이 서신과 글을 바칩니다” 아시아의 형제들이 그 지방민들로부터 온갖 피해를 당하고 있을 때에 다른 사람들도 황제에게 서신을 보냈으며, 황제는 아시아의 백성들에게 다음과 같은 법령을 발표했다. p205
제13장 기독교 교리에 관해 아시아 의회에 보낸 안토니누스 황제의 서신
“황제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 아우구스투스 아르메니쿠스, 최고 성직단장, 호민관 XV, 집정관 III 는 아시아의 의회에게 문안합니다. 나는 신들이 스스로 이러한 사람들이 발각되도록 배려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신들을 예배하지 않는 사람들을 처벌하는 일은 당신들보다도 신들에게 속한 일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당신들이 그들로 하여금 폭동을 일으키게 만들면서, 동시에 그들이 불경하다고 고발함으로서 그들의 마음을 더욱 확고하게 만들 뿐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심문을 받을 때에 목숨을 부지하기 보다는 오히려 자기의 하나님을 위해 죽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당신들이 그들에게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지키기 위해 자기 목숨을 바칠 때에 승리하게 됩니다. 전부터 발생해왔으며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지진들과 관련하여 지진이 일어날 때마다 낙심하는 당신들에게 권면하겠습니다. 당신들 자신의 행동과 그들의 행동을 비교해 보십시오. 그들은 이런 일이 있을 때에 더욱 하나님을 찬양하고 즐거워합니다. 그러나 당신들은 이 기간 동안에 정확한 지식을 갖지 못한 채 신들에 대한 의무와 그 밖의 다른 임무, 특히 불멸하시는 분에 대한 예배를 등한히 합니다. 그러나 당신들은 그분을 섬기는 기독교인들을 추방하고 박해하여 사형에 처하고 있습니다. 이 문제에 관해 여러 지방의 총독들이 거룩한 우리 아버지께 편지를 보냈으며 그분은 기독교인들이 로마정부에 반항하려 하지 않는 한 결코 그들을 괴롭히지 말라는 회신을 보냈습니다. 또 나에게도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인들에 관한 편지를 보냈으므로 나도 내 부친께서 행하신 조처에 따라 그들에게 회신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그들을 대적해 말썽을 일으키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의 고발 때문에 심문을 받는 사람을 사면해주고, 오히려 그를 고발한 사람을 유죄로 선고하십시오” 이것은 에베소에서 열린 공식적인 아시아 대표자 회의에서 공포되었다. 이 일은 당시 사르디스 Sardis 의 감독이었던 유명한 멜리토 Melito 가 증명했다. 그가 베루스 Verus 황제에게 보낸 지극히 훌륭한 신앙 변론에 이것이 분명히 나타나 있다. p206
제14장 사도적 교부, 폴리갑
이레니우스는 말하길 이 무렵에 아니세투스 Anicetus 가 로마교회의 감독으로 있었는데 그때까지 생존해 있던 폴리갑은 로마로 와서 유월절에 대한 문제로 아니세투스와 협의했다고 한다. 그는 폴리갑에 관한 다른 기사들도 전해주고 있는데, 이것은 그에 관해 이미 서술된 것에 반드시 추가되어져야 할 것이다. 그것은 이레니우스의 저서 <이단을 반박함 Against Heresies> 제3권에 기록된 것으로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폴리갑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았으며, 그리스도를 친히 목격한 사람들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었고, 사도들에 의해 아시아의 서머나 Smyrna 교회의 감독으로 임명되었다. 우리도 젊었을 때에 그를 본 일이 있다. 그는 대단히 장수했고 노년에 이르러 영광스럽고 훌륭한 순교를 했다. 그는 항상 자신이 사도들로부터 배운 것, 교회가 전해준 것, 그리고 참되고 유일한 교리를 가르쳤다. 모든 교회가 이것을 증명하고 있으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폴리갑의 후계자들, 그리고 발렌타인 Valentine 이나 마르시온 Marcion, 또는 그밖의 왜곡된 교사들보다 훨씬 믿음직한 확실한 증인들도 이것들을 증명해준다. 아니세투스가 감독으로 있는 로마에 도착한 폴리갑은 앞서 말한 이단자들 중 많은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했으며, 자신이 사도들로부터 받은 것, 즉 교회가 전해준 유일하고 참된 신앙을 전파했다. p207
그는 요한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즉 주님의 제자 사도 요한이 에베소에서 목욕탕에 들어갔다가 그 안에 세린투스 Cerinthus 가 있는 것을 보고서는 목욕을 하지 않고 뛰어나와 ‘저 목욕탕 안에 진리의 원수 세린투스가 있다. 그러니 목욕탕이 무너지기 전에 어서 도망치자’ 라고 말했는데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이 지금껏 살아있다. 폴리갑이 한번은 마르시온을 만나러 갔다. 마르시온이 ‘우리를 인정하십시오’ 라고 말했을 때, 그는 ‘나는 인정합니다. 사탄의 맏아들을’ 이라고 대답했다 (초대교회에서는 특히 성찬 때에 이런 표현을 하나의 인사로서 사용했다. 그러므로 ‘나는 당신을 인정합니다’ 라는 말은 ‘나는 당신에게 문안합니다’ 와 같은 의미이다). 사도들 및 그들의 제자들은 이러한 경고를 사용함으로써 진리를 손상시키는 사람들과는 말로도 교제하지 않으려 했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사도 바울의 말에 따른 것이다.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 이러한 사람은 네가 아는 바와 같이 부패해서 스스로 정죄한 자로서 죄를 짓느니라’ (딛 3:10-11 호겐 : 또한 이런 구절도 있다. ‘어떤 사람이 이 교리를 가지지 아니한 채 너희에게 오거든 그를 너희 집에 받아들이지 말고 그에게 축복 인사도 하지 말라. 그에게 축복 인사를 하는 자는 그의 악한 행위들에 참여하는 자니라’ 요한이서 1:10-11). 폴리갑은 빌립보인들에게 훌륭한 서신을 보냈는데 자신의 구원을 원하며 또 거기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은 이 서신을 통해 폴리갑의 믿음의 특성과 진리의 교리를 이해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이레니우스의 기록을 인용해 보았다. 폴리갑이 빌립보인들에게 보낸 서신은 지금도 현존하고 있는데, 그는 이 서신에서 베드로전서의 증언들을 인용했다. 이 무럽 피우스 Pius 라는 성을 가진 안토니누스 Antonine 황제는 22년간의 통치를 끝으로 아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베루스 Marcus Aurelius Verus 에게 양위했다. 베루스 역시 그의 형 루시우스 Lucius 와 함께 안토니누스 Antoninus 라고 불렸다. p208
제15장 폴리갑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서머나에서 순교하다
이 무렵 아시아에 큰 박해가 있었으며, 그로 인해 폴리갑도 순교로서 일생을 마쳤다. 나는 지금껏 여러 저서를 통해 전해져 온 그의 최후를 본 역사서에 기록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감독하던 교회가 폰투스 Pontus 의 교회들에게 보낸 서신이 있는데, 이 서신에는 그에게 닥친 일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서머나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는 필로멜리우스 Philomelius 및 각처에 있는 거룩한 보편교회의 지체들에게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와 평화와 사랑이 더하시기를 기원합니다. 행제들이여, 우리는 당신들에게 순교자들과 복된 폴리갑에 관한 일들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폴리갑은 마치 자신의 순교로서 그것을 인봉하려는 듯 박해에 종지부를 찍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기록하고 나서 폴리갑의 죽음에 관해 기록하기에 앞서 먼저 다른 순교자들의 이야기를 기록하면서 그들이 잔인한 고문을 견뎌내며 확고하게 신앙을 증명했다는 것을 서술했다. p209
“둘러서서 구경하는 사람들은 채찍으로 맞아 찢어진 그들의 온 몸에서 유혈이 낭자하게 흐르며 속살이 드러나고 창자까지 보이게 된 모습을 보고서 지극히 놀랐다. 그 후 그들은 바다조개 껍질이나 땅위에 놓인 창의 끝에 눕혀졌으며, 온갖 종류의 고문을 받은 뒤에 사나운 짐승의 밥으로 던져졌다. 대단히 고귀한 청년 게르마니쿠스 Germanicus 는 특별히 훌륭한 순교자였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힘을 얻어 인간의 마음 속에 있는 죽음에 대한 본성적인 두려움을 극복했다. 지방총독은 그를 설득하려고 노력했으며 그에게 자신의 젊음을 생각하여 스스로를 긍휼히 여겨야 한다고 타일렀다. 그런데도 그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고 오히려 자기를 공격하는 사나운 짐승들을 자극하고 화를 돋구어 마침내 이 불의하고 무법한 세대로부터 자유를 얻었다. 이 사람의 영광스러운 죽음을 본 군중들은 이 경건한 순교자의 용기, 그리고 모든 기독교인들의 강건한 믿음에 놀라 ‘악인들을 제거하라. 폴리갑을 데려오라’ 고 소리쳤다. 이 외침으로 인해 큰 소동이 일어났다. 이 때 프리기아 Phrygia 에서 온지 오래지 않은 브리기아 사람 퀸투스 Quintus 는 사나운 짐승들과 앞으로 가해질 고문에 대한 두려움으로 겁에 질려 마음이 흔들렸으므로 자신의 구원을 포기했다” 이 서신의 내용에 의하면 퀸투스는 다른 사람들과 함게 정숙하지 못하고 얌전치 못한 태도로 고집스럽게 재판정으로 뛰어들었다가 체포되자 모든 사람들에게 이러한 상황에 처해있는 사람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맹목적으로 무모하게 죽음으로 돌진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증거했다고 한다. 이상은 이 순교자들에 관한 기록이다. p210
이 일에 대한 소식을 듣고서도 폴리갑은 처음에는 자신의 확고한 결심을 고집했고, 조금도 동요되지 않았다. 그는 계속 그 도시에 머물러 있기로 작정했다. 그러나 주위의 사람들이 그에게 은밀하게 그 도시를 떠나라고 간청했으므로 그곳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농장으로 피신했다. 그는 몇 명의 친구들과 함께 그곳에 머물면서 밤낮으로 끊임없이 주님께 기도하며 전 세계의 모든 교회들을 위한 평화를 주시기를 간구했다. 이것은 그가 항상 해온 관습이었다. 이런 상황에 있으면서 그는 체포되기 사흘 전날 밤 기도 중에 자기가 베고 자는 베개에 갑자기 불이 붙어 타버리는 환상을 보았다. 꿈에서 깨어난 그는 즉시 그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 꿈을 해석해주었다. 그는 자기 주위의 사람들에게 바야흐로 발생할 사건을 예고하면서 자기는 그리스도를 위해 불길 속에서 목숨을 바치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그를 수색하는 사람들은 그를 찾아내려고 온갖 노력을 다하고 있었으므로, 그는 또다시 형제들에 대한 사랑과 애정에 매여 다른 곳으로 피신했다. 곧 그를 좇는 사람들은 그곳까지 쫓아왔다. 그들은 두 명의 소년을 붙잡아서 그 중 한 아이에게 매질을 하여 폴리갑이 숨어있는 곳을 말하게 만들었다. 해질 무렵 그가 있는 곳으로 들이닥쳤을 때 그는 다락방에서 쉬고 있었다. 그는 그곳에서 쉽게 다른 집으로 도망칠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고 다만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라고 말했다. 그들이 온 것을 안 그는 아래층으로 내려와 쾌활하고 온유한 얼굴로 그들에게 말을 건넸으므로 전에 그를 본 적이 없는 그 사람들은 자신이 기적을 보고 있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들의 눈앞에 선 사람은 굳건하고 장엄한 얼굴을 한 연로한 노인이었으며, 이처럼 훌륭한 노인을 체포하기 위해 자신들이 그처럼 열성적으로 일했다는 사실로 인해 놀랐기 때문이다. 폴리갑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그 사람들을 위해 식사를 준비하라고 하고 그들에게 마음껏 음식을 먹으라고 청했다. 그리고는 그들에게 한 시간동안 방해를 받지 않고 기도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들은 그것을 허락해 주었으므로 그는 윗층으로 올라가서 기도했다. 기도하는 그는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했으므로 그곳에서 그의 기도소리를 듣는 사람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으며 많은 사람들이 그처럼 훌륭하고 경건한 사람을 사형에 처해야 한다는 사실을 유감으로 생각했다. 앞서 언급한 서신에는 폴리갑에 대한 이야기가 다음과 같이 계속된다. p212
“그는 기도하면서 자신과 관련된 모든 사람들, 즉 위대한 사람이나 대수롭지 않은 사람, 귀족이나 미천한 사람, 그리고 전 세계의 모든 교회를 위해 기도했다. 드디어 떠날 시간이 되었으므로, 그들은 폴리갑을 나귀에 태워 서머나시로 데려갔으니, 그 날은 큰 안식일이었다. 폴리갑을 맞은 평화의 왕 (이름 그대로 공공의 평화를 보존한 관리를 의미) 헤롯과 그의 부친 니세테스 Nicetes 는 폴리갑을 자기의 마차에 태운 뒤 자리에 앉으라고 권하면서 ‘카이사르를 신이라고 말하고 그에게 제사를 지내 당신의 목숨을 구하는 것이 무엇이 그리 해로운 일이냐’ 고 말했다. 폴리갑은 처음에는 아무 대구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이 끈질기게 권면했으므로 그는 ‘나는 당신들의 충고대로 할 수 없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그를 설득하는데 실패한 그들은 무서운 말을 하며 그를 마차에서 밀어버렸으므로 그는 허벅다리를 삐었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뜻을 바꾸지 않았으며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열심히 걸어 경기장으로 끌려갔다. 당시 그곳은 너무나 소란스러웠기 때문에 그가 경기장으로 들어갈 때 하늘로부터 폴리갑에게 ‘폴리갑, 강건하며 대장부답게 싸워라’ 라는 소리가 들렸으나 그 소리를 들은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 말을 한 사람이 누구인지는 아무도 보지 못했지만 우리 형제들 중 많은 사람이 그 음성을 들었다. 폴리갑이 앞으로 끌려나갈 때에 그가 잡혔다는 소문을 들은 사람들은 큰 소란을 일으켰다. p212
마침내 그가 앞으로 나아가자 지방총독은 그에게 폴리갑이냐고 물었고 그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총독은 그에게 그리스도를 부인하라고 권면하며 ‘당신의 나이를 생각해 보시오’ 라고 말했다. 그밖에도 그들이 항상 사용하는 표현을 사용해, ‘신이신 황제의 이름으로 맹세하시오. 회개하고 신들을 부인하는 자들은 물러 가라라고 말하시오’ 라고 권했다. 폴리갑은 엄숙하고 진지한 얼굴로 경기장에 모인 모든 무리를 바라보았다. 그는 군중들을 향해 손짓했으며 한숨을 쉬면서 하늘을 바라보면서 ‘불경한 자들은 물러가라’ 고 말했다. 그런데도 총독은 계속 그에게 ‘맹세하시오. 그러면 당신을 풀어주겠습니다. 그리스도를 비난하십시오’ 라고 졸라댔다. 폴리갑은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86년 동안 그분을 섬겨왔는데 그동안 그분은 한번도 나를 부당하게 대우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어찌 이제까지 섬겨온 나의 임금님을 모독할 수 있겠습니까?’ 총독은 그래도 계속 그에게 ‘신이신 카이사르의 이름으로 맹세하시오’ 라고 재촉했다. 폴리갑은 대답했다. ‘당신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는 체하고 있으며, 또 내가 카이사르의 이름으로 맹세하리라는 헛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내 신앙고백을 들어보십시오. 나는 기독교인입니다. 만일 당신이 기독교의 교리를 알길 원한다면 나에게 하루의 여유를 주어 내 말을 들어보십시오’ 총독은 ‘백성들을 납득시키시오’ 라고 말했다. 폴리갑은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당신에게 한 가지 이유를 제시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해가 되지 않는 한 하나님께서 임명하신 행정장관들과 권세자들을 존경하라는 가르침을 받아왔습니다. 그러나 나는 저 사람들 앞에서는 나를 변호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럴만한 대상이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p214
총독은 ‘나는 사나운 짐승들을 준비해두고 있습니다. 만일 당신이 마음을 바꾸지 않으면 당신을 그 짐승들에게 던져 주겠소’ 라고 말했다. 폴리갑은 ‘그 짐승들을 부르십시오. 우리는 선을 버리고 악으로 돌이켜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악에서 돌이켜 덕을 택하는 것이 선한 일입니다’ 라고 말했다. 총독은 다시 ‘만일 당신이 짐승들을 멸시하며 마음을 바꾸지 않는다면 당신을 화형에 처하겠소’ 라고 말했다. 폴리갑은 대답했다. ‘당신은 잠시 붙었다가 곧 꺼져버리는 불로 나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장차 임할 심판과 악인을 위해 예비된 영원한 형벌의 불을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 왜 지체하고 있습니까? 당신이 원하는대로 하십시오’ 이렇게 말하는 그는 확신과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고 그의 얼굴은 은혜로 충만했다. 그는 자신에게 어떤 위협의 말이 가해져도 전혀 용기를 잃지 않았다. 그와는 반대로 놀란 총독은 전령을 경기장 한복판으로 보내어 ‘폴리갑은 자신이 기독교인이라고 고백했다’ 고 선포하게 했다. 전령의 선포를 들은 모든 군중들, 서머나에 거하는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은 소리쳤다. ‘그는 아시아의 교사이며 기독교인들의 교부이며, 또 우리의 신들을 파괴하는 자다. 그는 사람들에게 제사를 드리지 말고 예배하지 말라고 가르쳤다’ 그들은 이렇게 말하면서 아시아 의회원 Asiarch (아시아 지역 의회의 사제로서 그의 직무는 원형경기장에서 공개적인 경기를 벌이는 것이었다) 빌립에게 사자를 풀어놓아 폴리갑을 죽이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빌립은 이미 원형경기장에서의 사냥경기를 마쳤으므로 자기에게는 그럴 권리가 없다고 말했다. 그러자 사람들은 폴리갑을 산채로 태워죽이라고 소리쳤다. 폴리갑이 기도 중에 자기의 베개가 타는 환상을 보고 친구들에게 ‘나는 산채로 타죽게 될 것이다’ 라고 예언했던 그 환상대로 이루어지는 것 같았다. 그들은 서둘러서 이 일을 실천에 옮겼다. 군중들은 상점이나 목욕탕으로 가서 장작과 밀짚을 모아왔다. 특히 유대인들은 이 목적을 위해 마음껏 봉사했다. p215
장작단이 마련된 뒤 폴리갑은 옷을 벗고 거들을 풀었다. 그리고 신을 벗으려 했다. 과거 그의 곁에는 그의 곁에서 기꺼이 경쟁적으로 봉사하는 형제들이 있었으므로 이런 일을 하지 않았었다. 그는 늙기 전에도 모범적인 생활로 인해 큰 존경을 받았었기 때문이다. 이윽고 화형을 위해 마련된 도구들이 그에게 장착되었다. 그들은 그를 큰 못으로 말뚝에 고정시키려 했다. 그러나 그는 ‘나를 이대로 두시오. 나에게 화형을 견뎌낼 힘을 주실 분께서는 당신들이 못을 박지 않아도 장적더미 위에서 움직이지 않고 견딜 능력도 주실 것입니다’ 라고 말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못을 박지 않고 그냥 말뚝에 묶었다. 폴리갑은 마치 많은 양떼들 가운데서 선택된 고귀한 희생물, 전능하신 하나님께 바쳐진 희생제물인 듯, 두 손을 말뚝 뒤로 묶인 채 이렇게 말했다. ‘사랑하는 복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당신에 관한 지식을 주신 아버지시여 !!! 당신 앞에 살고 있는 모든 천사들과 천군들과 피조물, 그리고 모든 의인들의 하나님이시여 !!! 당신께서 오늘 이 시간 나로 하여금 순교자의 반열, 그리고 그리스도의 잔에 참여하게 하시어 내 몸과 영혼이 성령의 썩지 않는 축복 속에서 영생의 부활을 얻기에 합당하다고 여겨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오늘 나는 신실하고 참되신 하나님이신 당신께서 예비하시고 계시하시고 이루신 풍성하고 가납될만한 제물로서 당신이 보시는 앞에서 받아들여지기를 바랍니다. 나는 이 모든 일로 인해 당신의 사랑하는 독생자, 영원한 대제사장을 통해 당신을 찬양하고 감사드리며 영광을 돌리나이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이제부터 영원히 영광이 있을지어다. 아멘’ p216
그가 아멘으로 기도를 마친 뒤 집행인들은 불을 붙였다. 불길이 크게 솟아올랐을 때 우리는 기적을 보았다. 우리 중에 그것을 보는 특권을 누렸던 사람들은 그 사실을 사람들에게 전파했다. 불꽃은 마치 바람을 맞은 돛처럼 오븐의 형태를 이루어 순교자의 육체를 담처럼 에워쌌다. 그 한가운데 선 폴리갑의 몸은 전혀 불타는 육체 같지 않았다. 그는 마치 용광로에서 정련되는 금이나 은 같았다. 우리는 또 귀한 방향제에서 풍기는 듯한 향기를 느꼈다. 마침내 그의 육신이 불로 타지 않는 것을 본 악한 박해자들은 집행인에게 글르 칼로 찌르라고 명령했다. 그리하여 칼로 그의 몸을 찌르자 피가 솟구쳐 불이 꺼져버렸다. 군중들은 택한 자와 불신자의 이러한 차이점을 보고 놀랐다. 서머나 교회의 감독 폴리갑은 택한 자의 한 사람으로서 우리 시대에서 가장 훌륭하고 사도적이며 예언적 교사였다. 그가 말한 것들은 모두 이루어졌거나 장차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나 시기심이 많고 악의에 찬 대적, 모든 의인들의 원수는 그의 순교의 영광, 한결같은 태도와 담화, 그가 불멸의 면류관을 쓰게 된 것, 그리고 분명한 상을 쟁취한 것을 보고서는 우리가 그의 거룩한 육체와 교제하기 위해 그의 시신을 달라고 간절히 요구했지만 내어주지 않았다. p216
어떤 사람들은 헤롯의 아버지이며 달세 Dalce 의 형인 니세타스 Nicetas 를 은밀히 총독에게 보내어 시신을 주지 말라고 했다. 그들은 말하길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들은 십자가에 못 박혔던 사람을 버리고 이 사람을 예배하기 시작할 것이라고 했다. 그들은 우리가 그를 불에서 구출할 준비를 하고 있는 동안 우리를 경계하며 지켜보고 있던 유대인들의 제안과 강권을 받아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가 온 세상으로부터 구원받을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고난 받으신 그리스도를 결코 버릴 수 없으며 다른 신을 예배할 수 없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우리는 그 분을 하나님의 아들로 섬기고 있다. 그리고 순교자들은 자신의 임금이시며 주이신 분께 지극한 사랑을 바친 사람이므로 우리는 그들을 우리 주님의 제자이며 모방자라고 여겨 그에 합당한 사랑을 발휘한다. 우리는 다만 그분의 참된 지기이며 동역자가 될 수 있을 뿐이다. 유대인들의 뜻이 완고한 것을 깨달은 백부장은 그를 불 가운데 세우고 이방인들의 관습에 따라 태웠다. 그리하여 우리는 보석보다 귀하고 금보다 더 정련된 그의 뼈들을 모아 마땅한 장소에 안치했다. 주님께서는 그곳에서 우리가 그가 기쁘고 즐겁게 순교하여 하늘의 생명을 얻은 날을 축하하며 이미 경주를 마친 사람들을 기념하고 앞으로 있을 싸움을 준비하게 하실 것이다” p217
지금까지 인용한 것은 열 두 명의 필라델피아인들과 함께 순교자의 면류관을 쓴 거룩한 폴리갑에 관한 기사이다. 그의 이름은 도처에서 모든 이방인들에 의해 언급되어지고 있다. 서머나의 형제들이 앞에서 언급한 서신에 기록한 기사에 의하면 폴리갑의 종말은 훌륭하고 사도적인 그의 인품에 합당한 것이었다고 여겨진다. 이 서신에는 또한 폴리갑이 순교할 즈음 같은 도시에서 있던 또 다른 순교자들의 일들도 기록되어 있다. 이들 중에는 마르시온의 잘못된 주장을 추종하던 메트로도루스 Metrodorus 가 있었는데 그는 과거 장로였던 일이 드러나 화형에 처해졌다. 그 시대의 순교자들 중에 대단히 훌륭한 인물로는 피오니우스 Pionius 가 있다. 그에 관해 자세히 알고자 하는 사람들은 우리가 엮은 고대 순교자들에 관한 저서 속에 포함된 서신을 참고로 하기 바란다. 그 서신 안에는 그가 백성들과 통치자들 앞에서 거리낌 없이 행한 신앙의 변론, 특별한 신앙고백 등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밖에도 그의 교훈적 권면, 박해의 유혹 앞에서 변절하고 만 사람들에게 주는 강력한 권유, 감옥에 갇힌 그를 만나러 온 형제들에게 행한 위로의 말, 그리고 그가 지독한 고문을 당한 뒤 못으로 말뚝에 고정된 채 장작더미 위에 불변의 자세로 서서 지독한 고통을 겪은 끝에 순교한 일 등도 기록되어 있다. 그 밖에도 아시아의 페르가무스 Pergamus 에서 순교한 사람들에 관한 기록들도 현존하고 있다. 이들 중에는 카르푸스 Carpus 와 파필루스 Papylus, 그리고 아가토니스 Agathonice 라는 여인이 있었다. 이들은 여러 가지 훌륭한 증언을 한 뒤 영광스럽고 일생을 마쳤다. p218
제16장 그리스도의 교리를 증거하며 순교한 현인 賢人 저스틴
이 무렵, 저스틴 Justin 은 앞서 언급된 통치자들에게 우리 신앙을 두 번째로 변론한 뒤 견유학파 Cynic 철학자인 크레센스 Crescens 의 교활한 선동으로 말미암아 거룩한 순교의 면류관을 얻었다. 그는 여러번 많은 청중들 앞에서 크레센스와 토론을 벌였으며 마침내 자신이 확언한 진리 안에서 영예로운 승리를 쟁취했다. 훌륭하고 학식이 많은 저스틴은 앞서 인용된 바 있는 <변증 Apology> 에서 자신과 관련해 발생하게 될 일을 다음과 같이 예언했다. p218
“나는 내가 이미 이름을 밝힌 사람들 중 한 사람의 공격을 받아 고문을 당할 것이라고 예측합니다. 나를 공격할 인물은 저 비철학적이고 허영심이 강한 적 크레센스일 수도 있습니다. 단지 군중들을 호리고 만족시키려는 목적으로 마치 기독교인들이 불신자이며 악한 인물이기나 한 것처럼 자신이 이해하지도 못하는 일을 공공연하게 공격하려는 사람을 철학자 (현인) 라고 부를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는 강력한 망상 하에서 이 모든 일을 저질렀습니다. 만일 그가 그리스도의 교리를 읽어보지도 않고서 우리를 방해한다면, 그는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일들에 대해 거짓 증거하지 않으려고 조심하는 평범한 사람들보다 훨씬 악한 사람이며, 그의 행위는 지극히 사악한 행동입니다. 또 만일 그가 우연히 그리스도의 교리를 읽어보았지만 그 교리의 숭고함을 깨닫지 못했거나, 혹 깨닫고서도 기독교인답지 않은 일들을 행한다면, 그는 그만큼 더 야비하고 극악무도한 사람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저속한 칭찬과 어리석은 두려움의 노예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로 하여금 자신이 실제로 무지하다는 것을 깨닫고 납득하게 하기 위해 그에게 몇 가지 질문을 해보았는데, 유감스럽게도 그 결과는 예상했던대로였습니다. 내가 지금 말한 것이 모두 사실임을 알게 하기 위해서, 혹시 당신이 이 토론의 내용을 입수하지 못했다면 나는 당신 앞에서 이 질문들을 반복할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또한 폐하에게 적합한 일이 될 것입니다. 만일 폐하께서 이 토론에서 제기된 나의 질문들과 그의 답변들을 알게 되신다면 그가 우리 교리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고 있으며 혹시 알고 있다고 해도 자기의 청중들 때문에 그것들을 밝히지 않았다는 것이 분명히 드러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그는 참으로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 즉 철학자가 아니라 허영을 사랑하는 사람임을 스스로 증명합니다. 실제로 그는 ‘진리보다 사람을 선택해서는 안 된다’ 라는 소크라테스의 훌륭한 말조차 소중히 여기지 않습니다” p219
이상은 저스틴의 말이었다. 그런데 타티안 Tatian 에 의하면 저스틴은 이처럼 주저함 없이 크레센스와 맞섰기 때문에 죽음을 초래하게 되었다고 한다. 타티안은 처음에는 소피스트 sophist 로서 헬라인들에게 다양한 문학을 가르쳐 그들에게서 큰 명성을 얻었고 많은 기념비적인 저술을 남긴 인물이다. 그는 <헬라인들에 반박함 Against the Greeks> 이라는 책에서 “훌륭한 저스틴은 앞서 말한 사람들을 강도들이라고 선언했다” 고 말했다. 그리고 이 철학자들에 관해 약간의 논평을 한 뒤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큰 도시 (로마) 에 자리잡고 있던 크레센스는 누구보다도 육욕에 사로잡혀 있었으며, 완전히 금전의 노예가 되어 있었다. 그는 사람들에게는 죽음을 무시하라고 충고하면서도 자기 자신은 죽음을 끔찍이 두려워했다. 그리고 저스틴에게 죽음이라는 큰 재앙을 가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왜냐하면 저스틴은 진리를 전파하면서 철학자들을 폭식가요 사기꾼이라고 증거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저스틴이 순교하게 된 계기였다. p220
제17장 저스틴의 저서에 언급된 순교자들
저스틴은 자신의 투쟁이 있기 이전에 그의 첫 번째 <변증>에서 자기보다 먼저 순교한 사람들에 대해 언급했다. 그는 그 저서에서 능란하게 다음과 같은 진술을 소개하고 있다. “어느 여인에게 폭음을 하는 남편이 있었습니다. 그녀도 과거에는 방탕한 생활을 했었지만 그리스도의 교리를 알게 된 후로 정숙한 생활을 했습니다. 그녀는 남편을 인도하여 고결한 생활을 하게 하려고 애썼습니다. 그리하여 남편에게 기독교의 교리, 그리고 고결한 생활을 하지 않는 사람들을 기다리는 영원한 불의 형벌을 설명했습니다. 그래도 남편은 여전히 음탕한 생활을 계속하고 아내의 사랑을 멀리했습니다. 마침내 아내는 자연법과 예의범절을 벗어나 매사에 육욕을 만족시키는 일에 몰두하는 사람과 함께 사는 것은 악한 일이라고 생각하여 이혼을 고려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친구들은 그녀에게 혹시 남편이 변화될지도 모르니 그대로 남편과 살라고 충고하고 격려해 주었으므로 그녀는 자신의 감정을 억제하고 그대로 살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알렉산드리아로 떠난 남편이 더욱 악한 생활을 한다는 소문이 들려왔습니다. 그리하여 그녀는 자신이 계속 남편과 동반자로 생활한다면 자신도 그의 불의와 불경에 동참하게 될까 염려하여 남편에게 이혼증서를 보내고 헤어졌습니다. 아내는 과거에는 방탕했고 온갖 악을 즐겼으나 이제는 종이나 고용인들과 방탕하게 놀아났던 생활을 버렸으며, 남편도 역시 그러한 생활을 버리기를 원했지만 남편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아내가 떠나자 그는 아내를 기독교인이라고 고발했습니다. 그녀는 황제이신 당신에게 탄원하여 먼저 자신의 가정생활을 조정한 뒤, 그의 고발에 대해 자신을 변론하도록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폐하께서는 이것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나 과거 그녀의 남편이었던 그 사람은 그녀를 비방하는 말은 한 마디도 할 수 없게 되었으므로 그녀에게 기독교 교리를 가르쳐준 교사 톨레미 Ptolemy 를 공격했습니다. 과거 우르비시우스 Urbicius 는 톨레미를 처벌한 적이 있었습니다. p221
그는 백부장에게 자기의 친구 톨레미를 체포해 감옥에 가두고 그가 기독교인인지를 물으라고 했습니다. 진리를 사랑하며 거짓과 속임수를 미워했던 톨레미는 자신이 크리스찬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감옥에 갇혔으며 백부장은 오랫동안 이런 식으로 그를 벌했습니다. 마침내 그가 우르비시우스 Urbicius 앞에 섰을 때에 그에게 제기된 질문은 다만 크리스찬이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교리로부터 모든 행복과 축복이 파생된다고 알고 있었으므로 또 다시 거룩한 덕의 원리들을 믿는다고 고백했습니다. 사람들이 자신이 기독교인임을 부인하는 까닭은 자신이 이 종교를 멸시하기 때문이거나, 또는 자신이 이 종교에 합당치 못하며 그 탁월함에 대해서 이방인임을 의식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신앙을 고백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참 기독교인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르비시우스는 그를 끌고 나가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런데 역시 기독교인이었던 루시우스 Lucius 는 재판이 이처럼 불공정하게 진행되는 것을 보고서 우르비시우스에게 말했습니다. ‘간음자도 아니고 살인자도 아니며 도둑이나 강도도 아니고, 아무 혐의 사실이 없는 사람을 단지 기독교인이라는 이름을 고백했다는 이유로 처벌하다니 대체 이것이 어찌된 일입니까? 우르비시우스, 당신은 우리의 경건한 황제, 카이사르의 철학적인 아들, 신성한 원로원에 어울리는 재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루시우스에게 이렇게 대꾸했습니다. ‘그대도 이 사람들과 같은 사람처럼 보이는구려’ 루시우스는 ‘물론입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우르비시우스는 그도 끌고 나가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러나 루시우스는 그에게 감사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 그는 악한 주인들에게서 해방되어 선한 아버지이시며 임금이신 공평하신 하나님께로 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두 번째, 세 번째 신자들이 나타나 역시 같은 방법으로 처벌을 받을 것입니다’” 저스틴은 이 기사 뒤에 다음과 같은 말을 추가했다. “나는 지금 철학자라고 불리는 사람 중 한 사람의 공격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p222
제18장 우리에게 전해진 저스틴의 저서들
저스틴은 학식이 풍부했고 거룩한 일에 헌신한 사람으로서 모든 면에서 유익한 자료들로 가득찬 지성의 기념물들을 우리에게 많이 남겨주었다. 학구적인 독자들은 이 저서들을 참고로 하기 바라며, 우리는 다만 우리가 알게 된 것들만을 지적하려 한다. 저스틴이 우리의 교리를 옹호하기 위해 안토니누스 피우스 Antonine Pius 와 그의 아들들 및 로마 원로원에 보낸 논문이 있다. 또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후계자인 안토니누스 베루스 Antoninus Verus 황제에게 보낸 것으로, 우리 신앙을 변호하는 저서도 있다. 또 헬라인들을 반박한 저서가 있는데, 그는 이 저서에서 우리와 헬라 철학자들 사이에 논의되는 문제들을 상세히 설명하면서 동시에 악마의 본성에 대해서도 논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에 대해서는 여기에서 더 이상 추가할 필요가 없다. 우리에게 전해진 저서로는 이방인들을 반박하는 것으로서 <반박 Refutation> 이라는 제목의 책이 있다. 또 <하나님의 주권에 관해 On the Sovereignty of God> 라는 저서는 성경뿐만 아니라 희랍인들의 저서까지도 참고로 하여 저술한 책이다. 그는 <시편작가 Psaltes> 이라는 책에서는 그 주제에 관한 여러 가지 문제들을 제시한 뒤 당시 헬라 철학자들 사이에 유행하고 있는 의견들을 덧붙였는데, 그는 또 별도의 저서에서 그것들을 반박하고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겠다고 전제하고 있다. 그는 또 유대인들을 반박하는 대화를 기록했는데, 그것은 당대의 히브리인 중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인 트리폰 Tryphon 과 에베소에서 벌였던 논쟁이다. 그는 이 저서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자극을 받아 자신이 신앙에 관해 이 담화를 하게 되었다는 것, 과거 그가 철학연구에 얼마나 열정을 가지고 있었으며, 또 진리탐구에 얼마나 지칠 줄 모르고 매진했는지를 밝히고 있다. 또한 유대인들이 그리스도의 교리를 박해하기 위해 얼마나 교활한 음모를 꾸몄는지도 서술했다. 그는 트리폰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p224
“당신은 자신의 악한 행위들을 회개치 않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을 선출하여 예루살렘으로부터 온 세상으로 보내어 크리스찬이라는 불신의 무리가 나타났다고 선포하게 하고, 우리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흔히 우리를 대적하여 지껄이는 온갖 거짓말들을 전하게 하고 있다. 그러므로 당신은 당신 자신 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사람들의 불의의 원인이다” 그는 또 자신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교회 안에서 예언의 은사가 빛나고 있었다고 기록했다. 그리고 트리폰과의 토론에서는 요한계시록 (그는 이것을 다만 사도의 저서라고 부르고 있다) 을 언급했다. 또 예언적 말씀들을 기록하면서 유대인들이 그것들을 성서로부터 삭제했음도 밝혔다. 그밖에도 우리 형제들이 소장하고 있는 그의 저서들이 많다. 고대인들은 이 저서들이 대단히 훌륭한 것이며 연구할 가치가 있는 것으로 존중했고, 이레니우스도 종종 그를 인용하곤 했다. 그는 <이단에 반박함 Against the Heresies> 제4권에서 말하길, “저스틴이 마르시온을 반박한 저서에서 ‘만일 주님께서 다른 하나님이나 창조주를 말씀하신다면 나는 주님을 믿지 않겠다’ 라고 말한 것은 옳은 일이다” 고 했다. 그리고 같은 저서 제5권에서도 그를 언급하여 이렇게 말하면서 “저스틴이 ‘우리 주님이 출현하기 이전에는 사탄은 결코 하나님을 모독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는 아직 자신의 정죄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라고 말한 것은 타당한 말이다” 고 기록했다. 우리가 이 책들을 열거한 것은 학구적인 사람들이 이 책들을 부지런히 숙독하도록 자극하기 위한 것이다. p225
제19장 베루스 시대에 활동한 로마와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감독
베루스 Verus 황제의 통치 8년, 11년 동안 로마교회의 감독으로 있던 아니세투스 Anicetus 의 뒤를 이어 소테르 Soter 가 감독이 되었다.
한편 알렉산드리아 교회에서는 14년 동안 교회를 다스려온 셀라디온 Celadion 의 뒤를 이어 아그리피누스 Agrippinus 가 감독이 되었다. p225
제20장 안티오크 교회의 감독
이 시기에 안티오크 교회에서는 데오필루스 Theophilus 가 6대 감독으로 활약했다고 알려져 있다.
헤론 Heron 의 뒤를 이은 코르넬리우스 Cornelius 는 4대 감독이었고, 에로스 Eros 가 5대 감독이었다. p226
제21장 이 시기에 활약한 교회의 작가들
이미 앞에서 인용한 바 있는 헤게시푸스는 이 무렵에 활동했다. 고린도 교회의 감독 디오니시우스 Dionysius, 크레테의 감독 피니투스 Pinytus, 필립, 아폴리나리스 Apollinaris, 멜리토 Melito 도 이 시대에 활약한 인물들이다. 무사누스 Musanus, 모데스투스 Modestus 도 이 시대의 저술가였으며, 마지막으로 이레니우스를 들 수 있다. 이들은 사도들의 전승으로부터 받은 바 신앙에 관한 건전한 견해들을 자신의 저서에 기록하여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다. p226
제22장 헤게시푸스, 그리고 그가 언급한 인물들
헤게시푸스 Hegesippus 는 우리에게 전해내려오는 5권의 주석 속에 자신의 견해를 지극히 완전하게 기록해 놓았다. 그는 이 책에서 서술하길 자신이 로마를 여행하면서 대다수의 감독들과 대화를 나누었으며, 또 모두에게서 동일한 교리를 받았다고 했다. 우리는 그가 고린도 교회에 보낸 클레멘트의 서신 The Epistle of Clement to the Corinthians 에 대해 몇 가지 논평을 한 뒤에 기록한 말을 덧붙여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고린도 교회는 프리무스 Primus 가 감독으로 있을 때까지 참 믿음 안에 머물렀다. 나는 로마로 항해하는 도중 며칠동안 고린도에 머물면서 그와 친밀한 대화를 나누었다. 우리는 서로 참 교리 안에서 새 힘을 얻었다. 로마에 도착한 나는 이니세투스의 집에 머물렀는데 당시 엘류테루스 Eleutherus 가 그의 부제 副祭 로 있었다. 아니세투스의 뒤를 이어 소테르 Soter 가 감독이 되었고, 소테르의 후임으로 엘류테루스가 감독이 되었다. 그러나 어느 감독의 시대, 어디에서나 교리는 율법과 선지자들과 주님이 선포하신 것에 따라 보급되었다” p227
헤게시푸스는 그 당시 발흥했던 이단들의 발단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다루었다. “우리 주님께서 죽으신 것과 같은 이유로 의인 야고보가 순교한 뒤 주님의 삼촌 클레오파스 Cleophas 의 아들 시므온 Simeon 이 제2대 감독에 임명되었다. 그는 주님의 사촌이었으므로 모든 사람이 그를 추천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들은 교회를 처녀라고 불렀다. 왜냐하면 교회는 아직 무익한 설교로 인해 부패하지 않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데부티스 Thebuthis 가 자신이 감독이 되지 못했다는 이유로 은밀히 교회를 타락시키기 시작했다. 그는 유대백성들의 일곱당파 중 한 당파에 속해 있었다. 이 당파에는 시므온 Simeon 에게서 시작된 시몬파 Simonians, 클레오비우스 Cleobius 에게서 시작된 클레오비우스파 Cleobians, 도시테우스 Dositheus 가 창시한 도시테우스파 Dositheans 가 있었으며, 다시 여기서 파생되어 고르테우스 Gorthaeus 가 세운 고르테우스파 Gorthaenians, 마스보테우스 Masbotheus 가 세운 마스보테우스파 Masbothaeans 가 있었다. 다시 여기에서 메난드리안파 Menanadrians, 바실리디안파 Basilidians, 마르시온파 Marcionist, 카르포크라티아파 Carpocratians, 발렌티아파 Valentinians, 사투르닐리아파 Saturnilians 가 생겨났는데, 이들은 모두 나름대로 특이한 견해를 도입하고 있었다. 이들로부터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 거짓 사도들이 나타나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거역하는 타락한 교리들을 소개해 교회의 일치를 깨뜨렸다” p228
헤게시푸스는 자신의 역사서에서 유대인들 사회에 퍼져있던 고대 이단들에 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또한 이스라엘 자손들 사이에는 유다와 메시아 지파, 즉 에세네파, 갈리리인 Galileans, 헤메로밥티스트 Hemerobaptists, 마스보테안 Masbothaeans, 사마리아인, 사두개인, 바리새인들을 대적하여 할례에 대해 다른 견해들이 있었다” 그는 또 다른 여러 가지 일들을 이야기했는데, 우리는 이미 그 중 일부를 인용하고 소개했다. 또 그는 히브리복음서 The gospel of the Hebrews, 그리고 시리아어 및 특히 히브리어로부터 유래된 몇 가지 특이한 사실들을 서술해 자신이 개종한 히브리인임을 나타냈다. 그는 또 유대인들의 전승에서 취한 일들도 기록했다. 헤게시푸스 뿐만 아니라 이레니우스와 모든 고대인들은 <솔로몬의 잠언 The Proverbs of Solomon> 을 ‘모든 덕을 포함하는 지혜’ 라고 불렀다. 헤게시푸스는 위경 僞經 Apocrypha 이라고 불리는 책들에 관해 논하면서 그것들 중 어떤 것들은 그의 시대의 이단자들이 위조한 것이라고 서술했다. p228 호겐 : 헤게시푸스의 시대는 AD 110-180 이다.
제23장 고린도 교회 감독 디오니시우스와 그의 서신들
디오니시우스 Dionysius 는 고린도 교회의 감독으로 임명되어 자기 백성들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의 사람들에게까지 거룩한 사역의 축복을 베풀었다. 그가 교회들에게 보낸 보편적 서신들은 모든 사람들에게 지극히 유익한 것이었다. 그 중에서 라오디케아 교회에 보낸 서신은 참 종교의 교훈들을 포함하고 있으며 평화와 일치를 깨우쳐 준다. 또 아테네인들에게 보낸 편지는 복음이 규정한 믿음과 생활을 격려하고 있다. 그는 이 서신에서 당시에 있던 박해로 푸블리우스 Publius 감독이 순교한 이래 그들이 바른 진리에서 벗어나 거의 타락했음을 밝히고 있다. 또 푸블리우스가 순교한 뒤 감독이 된 콰드라투스 Quadratus 의 노력으로 교회가 평정을 되찾고 신자들의 믿음이 부흥하게 되었음도 증거했다. 또 사도행전에 기록된 바 사도 바울이 전도해 개종한 아레오파고 사람 디오니시우스 Dionysius 가 최초로 아테네 교회의 감독직을 획득한 사실도 서술했다. 현존하는 그의 서신으로 니코메디아 Nicomedians 인들에게 보낸 서신이 있는데, 그는 이 서신에서 마르시온 Marcion 의 이단을 반박하고 신앙의 규칙을 굳건히 지지했다. 그는 고르티나 Gortyna 교회와 크레테의 여러 교회들에 보낸 서신에서 그들의 감독 필립을 칭찬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그의 감독 아래서 교회는 불굴의 정신을 나타냈기 때문이다. 그는 동시에 그들에게 이단자들의 왜곡된 주장을 조심하라고 경고했다. p229 그는 결혼, 그리고 결혼 상태에 들어간 사람이 지켜야 할 순결에 관해 여러 가지를 권했으며, 교회에게는 이단이나 범죄 등에 빠져 타락했다가 다시 돌아오는 사람들을 친절하게 받아들이라고 지시했다. p230 또 디오니시우스는 자신의 서신들이 변조되고 개악되었다고 기록했다. “형제들이 나에게 서신을 보내달라고 요청했기 때문에 나는 서신들을 썼습니다. 그런데 악마의 사도들은 이 서신들 중 어떤 부분을 변조하거나 다른 것들을 추가하여 가라지로 가득 채웠습니다. 그들에게 화가 있을지어다. 이처럼 그들은 주님의 거룩한 책들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는 책들을 변조하려는 시도를 해왔으므로 누군가 주님의 거룩한 책들을 더럽히려고 시도한다고 해도 그다지 놀라운 일은 아닙니다” p231
제24장 안티오크의 감독 데오필루스
제25장 필립 Philip 과 모데스투스 Modestus
제26장 멜리토 Melito, 그리고 그가 기록한 사건들
제27장 히에라폴리스의 감독 아폴리나리스 Apollinaris
제28장 무사누스 Musanus 와 그의 저서들
제29장 이단자 타티아누스 Tatianus
제30장 시리아인 바르데사네스 Bardesanes, 그리고 현존하는 그의 저서들
제5권
서론
로마교회의 감독 소테르 Soter 는 8년간 감독으로 일한 뒤 사망했다. 그의 뒤를 이어 엘류테루스 Eleutherus 가 12대 감독이 되었다. 안토니누스 베루스 Antoninus Verus 황제의 통치 17년, 여러 도시에서 있었던 반란으로 인해 여러 지방에서 우리 형제들에 대해 가혹한 박해가 시작되었다. 단일국가 안에서 발생한 사건들로 인한 싸움으로 인해 무수한 순교자들이 고귀한 면류관을 얻었다. 영원히 기억할만한 이 사건들은 역사의 기록을 통해 후손들에게 전해졌다. 이 사건들에 대한 자세한 기사는 순교자들에 관한 이야기에 밝혀져 있는데 그것은 단순히 역사적인 이야기라기보다 우리의 교화에 도움을 주는 기사이다. 나는 우선 우리의 본서의 목적에 관계된 것만을 여기에 발췌하여 기록하려 한다. 그밖에 역사적 이야기를 이루고 있는 다른 이야기들은 다만 전쟁에서의 승리, 적들의 전승기념비들, 장군들의 호전적인 업적, 용사들의 용맹함 등 피와 무수한 살인으로 얼룩진 이야기일 뿐이다. 본서에는 하나님께 합당한 담화와 행동들이 기록되어 있다. 즉 우리는 궁극적으로 영혼의 평화를 확보하려는 경향을 띠고 있는 지극히 평화적 특성을 지닌 전쟁들과 투쟁들을 기록하려 하며 또한 조국보다는 진리를 위해 용감히 싸운 사람들, 사랑하는 친구들보다도 신앙을 위해 투쟁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영원한 기념비에 새겨 넣으려 한다. 참 신앙을 위해 싸운 용사들의 굳건한 자세, 무수한 시련을 견뎌낸 인내, 광포한 악마의 세력을 극복해 세운 그들의 전승기념비, 보이지 않는 적들과 싸워 얻은 승리, 그리고 이 모든 사람들에게 씌워진 면류관 등은 영원히 잊혀지지 않고 선포되며 영속할 것이다. p242
제1장 신앙을 위해 고난 받은 골 Gaul 지방 사람들
고올 지방은 앞서 언급된 싸움의 무대였다. 이 지방에서도 특히 리용 Lyons 과 비엔나 Vienna 는 다른 도시들보다 뛰어난 수도였다. 이 두 도시 사이로 론 Rhone 강이 흐르고 있어 종교의 흐름을 크게 가로막고 있었다. 그러나 그곳의 훌륭한 교회들은 순교자들의 이야기를 아시아와 브리기아로 전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일어난 사건들을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고올 지방의 리용과 비엔나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의 종들은 같은 믿음과 소망을 갖고 있는 아시아와 브리기아의 형제들에게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화와 영광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그들은 이렇게 인사한 뒤 몇 가지 다른 문제를 서두에서 다루면서 주제를 다루기 시작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교도들이 성도들에게 나타낸 광기와 환란, 그리고 이 지방 순교자들이 겪은 고난이 얼마나 큰지 우리는 충분히 설명할 수 없으며 묘사할 수도 없습니다. 원수는 전력을 다해 우리를 공격하면서 장차 우리에 대한 그의 움직임이 얼마나 난폭할 것인지 그 서막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종들을 대적하여 자기의 종들을 훈련하고 길들이기 위해 온갖 수단을 사용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집, 목욕탕, 시장에서 내쫓겼을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속한 것들은 어느 장소에도 내놓지 못하도록 금지당했습니다. 그러나 은혜로우신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싸우셨고 연약한 자들을 구출하셨으며, 또 마치 굳건한 기둥처럼 인내하며 원수의 폭력을 견뎌낼 인물들을 예비하셨습니다. p243
이 사람들은 온갖 비난과 고문을 견뎌냈습니다. 그들은 과거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을 하찮게 여기고 서둘러 그리스도께로 가려했습니다. 그들은 실제로 ‘이 순간의 고난은 장차 우리 안에 드러날 영광과 비교할 가치조차 없다’ 는 것을 나타냈습니다. 그들은 먼저 들끓는 외침, 구타, 약탈, 강도, 돌던짐, 투옥 및 야만적인 백성들이 원수들에게 즐겨 가하는 온갖 해악을 씩씩하게 견뎠습니다. 그후에 그들은 법정으로 끌려가서 군중들이 참석한 가운데 판사들과 시의 권위자들의 심문을 받았고 총독이 도착할 때까지 감옥에 갇혀 지냈습니다. 나중에 그들은 총독 앞으로 끌려나가 재판을 받으면서 그에게서 온갖 잔인한 일을 당했습니다. p244 순교자의 대열에 참여할 자격이 있는 사람들이 매일 체포되었습니다. 결국 두 교회의 열심있는 신자들과 교회를 세우려고 노력했던 사람들이 모두 체포되었습니다. 총독은 우리들을 철저히 색출해내라고 명령했으므로 우리 형제들이 데리고 있는 이교도 하인들까지도 체포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우리 성도들이 받는 고문을 보고 두려움을 느꼈으며 사탄의 선동을 받았으므로 병사들이 그들에게 요구하는대로 우리가 타이에스티즈 Thyestes (희랍의 전설에 나오는 인물. 그는 펠롭스 Pelops 의 아들이며 아트레우스 Atreus 의 아우이고 아이기스토스 Aegisthus 의 아버지이다. 그는 아트레우스의 처를 유혹하고 아트레우스를 죽이려 했으므로, 아트레우스는 화해하는 체 하면서 타이에스티즈의 세 아들을 죽인 뒤 그 고기를 잔치상에 올려 타이에스티즈에게 먹였다) 축일을 지키며 오이디푸스 (숙명 때문에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아내로 삼은 테베의 왕) 처럼 근친상간을 한다고 고발했습니다. 우리는 이런 죄악들을 말하는 것은 물론 생각하는 것조차 불법이라고 여깁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감히 그러한 죄를 범한다고 믿을 수도 없습니다. p246
이런 소문이 사람들에게 퍼지게 되었으므로 모든 사람들이 우리를 대단히 거칠게 다루었습니다. 그리하여 이전에는 그래도 친근감 때문에 스스로 자제했던 사람들까지도 극도로 잔인하고 사납게 우리를 대적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신바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 하리라’ 하신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이후 거룩한 순교자들은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고난을 당했습니다. 사탄은 전력을 다해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게 만들려고 애를 썼습니다. 미쳐 날뛰는 군중들과 총독과 병사들을 비엔나의 거룩한 집사, 그리고 새로 개종했으나 고귀한 신앙의 용사였던 마투루스 Maturus 를 대적하며 대단히 사납게 날뛰었습니다. 페르가무스 Pergamus 출신으로서 그곳 교회의 기둥이요 기초였던 아탈루스 Attalus 에게도 난폭하게 행했습니다. 또 블란디나 Blandina 도 체포되어 고문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겉으로 보기에 천하고 흉하며 하찮은 것일지라도 그 안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있으면 대단히 훌륭한 것으로 여겨진다는 것을 그녀를 통해 분명히 나타내셨습니다. 블란디나의 몸은 너무 연약했으므로 우리는 물론 역시 용감한 순교자였던 블란디나의 여주인조차도 과연 블란디나가 거리낌 없이 자신의 믿음을 고백할 수 있을지 염려했습니다. 그러나 블란디나에게는 힘이 충만했으므로 밤낮으로 교대해가며 그녀를 고문하던 형리들은 마침내 자기들이 그녀에게 졌으며 더 이상 그녀를 고문할 방법이 없다고 고백했습니다. 온몸이 갈기갈기 찢겼는데도 그녀가 여전히 숨을 쉬고 있음에 놀란 형리들은 다른 사람이라면 이처럼 고통스러운 여러 가지 고문을 하지 않고서 단 한 가지의 고문으로도 목숨이 끊어졌을 것이라고 증거했습니다. 그런데도 이 복된 성도는 마치 씨름선수처럼 신앙고백 속에서 다시 새 힘을 얻었습니다. ‘나는 기독교인입니다. 우리는 전혀 악을 행하지 않습니다’ 라고 되풀이해 말하는 것이 그녀를 고통으로부터 회복시켜 주었고 위안과 안식이 되었습니다. p247
상투스 Santus 도 역시 인간이 고안해낸 다양한 고문들을 초인간적으로 견뎌냈습니다. 악한 형리들은 그에게 계속 끔찍한 고통을 가함으로서 그에게서 그가 해서는 안 될 말을 얻어내려 했지만 그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견뎠습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이 무엇인지, 어느 나라 백성인지, 자신의 고향이 어디인지, 자유인인지 노예인지도 밝히지 않았습니다. 그는 어떤 질문에 대해서나 한결같이 ‘나는 기독교인입니다’ 라고 로마어로 대답했습니다. 그는 자기의 이름, 사는 곳, 국가 및 모든 것 대신에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이교도들은 그에게서 이 말 외에 다른 말은 들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총독과 형리들은 그에게 더욱 큰 고문을 가했습니다. 결국 더 이상 고문할 방법이 없게 되었으므로 그들은 마지막으로 그의 육체 중에서 제일 연약한 부분에 뜨겁게 달아오른 놋판을 붙여놓았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조금도 굴하지 않고 동요하지 않았으며 그리스도에게서 흘러나오는 생명수에 의해 힘을 얻어 자신의 신앙을 굳건히 지켰습니다. 그의 육체는 그가 당한 가혹한 고문을 증거해주었습니다. 그의 육신은 상처투성이였고 난도질을 당해 못 쓰게 되었으므로 외견상으로 볼 때 전혀 사람의 형상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안에서 고난을 받으시면서 기적들을 나타내시며 적을 패하게 하셨고, 남은 사람들에게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는 곳에는 아무 두려움이 없으며 그리스도의 영광이 우세한 곳에는 아무 고통이 없다는 모범을 제시하셨습니다. 불의한 형리들은 또 다시 하루종일 이 순교자를 고문했습니다. 이미 그의 상처들이 부어오르고 염증을 일으켰기 때문에 다시 동일한 고문을 하면 그를 굴복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그가 손으로 건드리는 것조차 견딜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거나 또는 고통으로 죽어가는 그의 모습이 다른 사람들을 겁에 질리게 할 것이라고 생각한 듯합니다. 그러나 결코 이와 비슷한 일조차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여 그처럼 가혹한 고문을 받는 중에 그의 몸은 저절로 일어나 똑바로 섰으며 예전의 형상과 사지를 되찾았습니다. 결국 그가 받은 두 번째 고문은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고통이 아닌 치료가 되었습니다. p248
한편 악마는 이미 신앙을 부인한 일이 있는 비블리아스 Biblias 를 형장으로 끌어냈습니다. 악마는 자기가 이미 그녀를 삼켰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하나님을 모독함으로서 그녀의 정죄를 가중시키려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연약하고 소심하며 쉽사리 굴복하고 마는 성품의 그녀에게 우리를 비방하는 불경한 말을 하라고 강요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오히려 고문을 받으면서 회개하고 정신을 차렸습니다. 그녀는 마치 깊은 잠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자기 앞에 놓인 형벌을 보고서 영원한 형벌을 기억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녀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사람들의 기대와는 다른 말을 했습니다. 그녀는 ‘이성이 없는 동물들의 피를 맛보는 것조차 불법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어찌 어린아이들의 고기를 먹을 수 있겠습니까?’ 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녀는 자신은 기독교인이라고 고백하고 순교자의 대열에 참여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순교자들이 인내하며 폭군들의 모든 고문을 이겨내게 하셨으므로 악마는 다른 음모를 강구했습니다. 그중에는 그들을 어둡고 음침한 감옥에 가두는 방법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발에 차꼬 (이것은 나무토막에 일정한 간격으로 5개의 구멍을 뚫어놓은 것으로서 이 구멍에 두 발을 집어넣게 한 뒤 족쇄와 밧줄로 묶어두는 고문기구이다) 를 채워 놓았습니다. 그밖에도 다른 고문법들이 있었는데 격분한 악의 하수인들은 특히 사탄의 선동을 받았을 때에 흔히 죄수들에게 이 방법들을 사용하곤 했습니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이 주님의 뜻에 따라 질식해 죽어 주님의 영광을 나타냈습니다. 또 그들 중 어떤 사람들은 잔인한 고문을 당했기 때문에 도저히 다시 소생할 수 없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들은 인간의 도움이 전혀 미치지 않는 감옥에 갇혀 있었지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힘을 얻었고 영육간에 충만한 능력을 받아, 나머지 사람들을 격려하고 힘을 북돋아주었습니다. 그러나 새로 개종한 사람들과 체포된 뒤 아직 재판을 받지 않은 사람들은 감옥생활을 견디지 못해 감옥 안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p249
리용의 감독직을 충실히 이행했던 거룩한 포티누스 Pothinus 는 90세가 지난 고령이었고 몸이 무척 약했습니다. 그는 그 당시 정말로 몸이 약해서 간신히 숨을 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영혼은 정열로 가득했고 순교를 갈망했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남은 힘을 모아 스스로 재판정으로 끌려갔습니다. 그의 육신은 고령과 질병으로 거의 사그라져가고 있었지만 그에게는 아직 목숨이 붙어 있었고,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그를 통해 승리를 거두실 것이었습니다. 병사들이 그를 법정으로 호송해 갈 때 마치 그가 그리스도이기나 한 것처럼 관리들이 그와 동행했습니다. 군중들은 그를 대적하여 소리쳤는데, 그는 그들에게 고귀한 증언을 했습니다. 총독은 그에게 기독교인들의 하나님은 어떤 분이며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당신이 알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면 알게 될 것입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말을 한 뒤 그는 끌려가 무자비하게 많은 매를 맞았습니다. 그의 곁에 있는 사람들은 그가 늙은 노인이라는 사실도 고려치 않고 손과 발로 그를 공격했습니다. 그리고 멀리 있는 사람들은 아무 것이든 자기의 손에 들고 있는 것들을 그에게 내던졌습니다. 왜냐하면 만일 그에게 난폭한 욕설을 하지 않는 것은 큰 죄와 불경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겨우 숨이 붙어 있는 그는 감옥에 갇혔으며 이틀 후 그곳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p250
그 때에 놀라운 하나님의 개입이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무한하신 그리스도의 자비는 형제들의 사회에서 거의 일어난 일이 없는 일을 분명히 나타내셨습니다. 이것은 물론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처음 체포되었을 때 신앙을 버렸던 사람들도 감옥에 갇혀 남은 사람들과 함께 고난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신앙을 버린 것은 그들에게 유익이 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기독교인임을 고백한 사람들은 기독교인이라는 죄 때문에 감방에 갇혔으나 그들에게는 다른 죄목은 붙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배교한 사람들은 살인자나 범죄자로 수감되어 다른 사람들보다 배나 혹독한 형벌을 받았습니다. 전자는 순교의 기쁨과 약속의 소망, 그리스도의 사랑, 그리고 아버지의 성령에 의해 힘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후자는 슬프게도 양심의 가책으로 괴로움을 당했습니다. 결국 형장으로 끌려나갈 때에 그들의 차이점은 그들의 얼굴에 분명히 나타났습니다. 전자는 즐거운 마음으로, 은혜와 영광이 뒤섞인 표정으로 나아갔으므로 그들을 묶은 굴레는 고귀한 장신구처럼 보였고, 그들은 마치 많은 황금 팔찌로 치장한 신부처럼 보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향기로운 그리스도의 향기가 충만히 스며 있어 이 세상의 향수로 부음을 받은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후자는 눈을 내리깔고 낙심하고 슬퍼했으며 온갖 수치로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게다가 이교도들은 그들을 비겁한 겁쟁이라고 비난했으며, 또 영광스럽고 존귀하며 생명을 주는 기독교인이라는 명칭을 잃고 살인자라는 죄목을 쓰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남은 사람들은 이러한 결과를 보고 더욱 더 신앙을 굳건히 했습니다. 곧이어 체포된 사람들은 악한 적대자들이 제시하는 것들을 인정하지 않고 신앙을 고백했습니다” p251
그들은 몇 가지를 짤막하게 소개한 뒤 다시 이야기를 계속했다. “이런 일들이 있은 뒤 그들의 순교는 여러 종류로 분류되었습니다. 그들은 다양한 색깔을 가진 온갖 종류의 꽃으로 면류관을 만들어 하나님 아버지께 바쳤습니다. 많은 싸움을 견디고 영광스러운 승리를 거둔 이 고귀한 용사들은 위대한 불멸의 면류관을 쟁취했습니다. 그리하여 마투루스, 상투스, 블란디나, 아탈루스는 원형경기장에 끌려나가 사나운 짐승과 싸워 비인간적인 이교도들의 구경거리가 되었습니다. 악인들은 그들이 짐승과 싸우게 하기 위해 일부러 경기일을 공표했습니다. 마투루스와 상투스는 또 다시 온갖 고문을 겪었지만 전혀 고문을 당한 일이 없던 사람처럼, 혹은 이전에 많은 시련을 당하면서 적을 패배시켰고 이제 면류관을 얻기 위해 싸우는 사람처럼 고문을 견뎌냈습니다. 그들은 또다시 항상 그곳에서 가해지곤 하는 태형 笞刑 (두 줄로 선 사람들 사이로 벌거벗은 죄수를 지나가게 하여 양쪽에서 매질하는 형벌), 그리고 짐승들이 물어뜯고 찢는 형벌을 당했습니다. 그밖에도 미친 듯한 사람들이 여기저기에서 소리치며 요구하는 모든 형벌이 그들에게 가해졌습니다. 마침내 그들의 육체는 뜨거운 쇠의자에 앉혀졌습니다. 그들의 살이 타는 냄새가 진동했는데도 형리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그들의 인내심을 꺾어보려고 작정한 듯이 계속 맹렬하게 고문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상투스로부터 그가 처음부터 고백한 신앙고백 외에 다른 말을 끌어내지 못했습니다” p252
이처럼 큰 싸움을 견뎌내고도 이 두 사람에게는 목숨이 붙어 있었지만 마침내 죽임을 당했다. 그날 그들은 여러 가지 검투경기가 개최되는 곳에서 구경거리가 되었다. 한편 블란디나는 말뚝에 묶인 채 사나운 짐승의 먹이로 매달려 있었다. 그녀는 십자가 형상의 말뚝에 매달려 있으면서 진지하게 기도하여 싸우는 순교자들에게 용기를 주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말뚝에 묶여 있는 그녀를 보면서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받는 사람들은 누구나 살아계신 하나님과 함께 영원한 교제를 누리게 된다는 것을 믿게 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짐승들이 전혀 블란디나를 공격하지 않았으므로 그녀는 말뚝에서 풀려 다시 감옥으로 보내졌으며, 그곳에서 다음번 싸움을 기다리게 되었다. 그녀는 많은 싸움에서 승리를 거두어 교활한 뱀을 정죄할 수 있었다. 비록 작고 연약하며 비천한 여인이었으나 강하고 무적의 투사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었으므로 그녀는 형제들을 격려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이 그녀는 많은 시련 속에서도 원수를 정복했으며 불멸의 면류관을 얻었다. p252
사나운 군중들은 아탈루스를 끌어내라고 요구했다. 아탈루스는 훌륭한 신분을 지닌 사람이었으며 싸움에 임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나아왔다. 그는 기독교의 훈육을 잘 받았으며 항상 우리와 함께 진리를 증거해 온 사람으로서 자신이 전혀 악을 행한 일이 없음을 알고 있었다. 그가 등에 라틴어로 “이 사람은 기독교인 아탈루스이다” 라고 쓴 패를 붙이고 경기장에 끌려왔을 때 사람들은 크게 격분했다. 그가 로마인이라는 것을 안 총독은 그를 다시 감옥에 보내어 다른 사람들과 함께 가두어두라고 명령했다. 총독은 아탈루스의 일로 황제에게 서신을 보내고 그의 결정을 기다렸다. 아탈루스는 그 동안에도 조금도 나태하게 지내지 않았고 함께 갇힌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었다. 그들의 끈질긴 인내에 의해 말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자비가 드러났다. 왜냐하면 아직 살아있는 사람들로 말미암아 죽었던 자들이 소생했기 때문이다. 순교자들은 순교자가 아닌 사람들 (즉 변절한 사람들) 에게 은혜를 베풀었다. 동정녀이신 어머니 (교회) 안에는 큰 기쁨이 생겨났다. 왜냐하면 그녀가 낳았으나 죽었던 자들이 다시 소생하여 생명을 얻었기 때문이다. 이들로 인해 변절했던 많은 사람들이 다시 발길을 돌려 교회 안으로 들어와 다시 생명의 열기를 부여받았고 자신의 신앙을 고백했다. 믿음 안에서 소생해 힘을 얻은 그들은 재판관에게로 갔다. 죄인의 죽음을 원치 않으시며 오히려 모든 죄인들을 회개하라고 청하시는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부드럽게 대해 주셨으므로 그들은 다시 총독의 심문을 받게 되었다. 황제는 그들을 모두 참수형에 처하되, 만일 믿음을 버리는 사람이 있으면 석방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p253
마침 이곳에서 박람회가 열렸는데 모든 국가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총독은 박람회가 시작될 때 순교자들을 끌어내 군중들에게 구경거리로 제공했다. 그는 다시 그들을 심문하여 로마시민권을 가진 사람들은 모두 참수시켰고 나머지 사람들은 사나운 짐승들에게 보냈다 (호겐 : 한편 로마에서도 바울은 로마시민권이 있어 목이 잘리는 참수형을 당했지만, 베드로는 십자가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전에 주님을 부인했던 사람들을 통해서 놀랍도록 큰 영광을 받으셨다. 그들은 이방인들의 기대와는 달리 신앙을 고백했다. 이 사람들은 마치 곧 석방될 사람인 듯이 분리되어 심문을 받았다. 그러나 그들은 신앙을 고백했기 때문에 순교자의 대열에 참여했다. 그러나 전혀 믿음이 없었고 혼인 예복은 생각조차 하지 않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생각이 없었던 지옥의 아들들은 배교하여 의의 길을 모독하고 목숨을 부지했다. 그러나 나머지 사람들은 심문을 받으면서 신앙을 버리지 않고 모두 교회 안에 남았다. 그들 중에는 브리기아 태생의 의사 알렉산더가 있었다. 그는 고올 지방에서 여러 해를 지냈으며 사도적 은사를 충분히 갖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마음껏 진리를 전파하여 유명했다. 그는 재판정에 섰을 때에 판사 주위의 사람들에게 마치 산고를 겪는 사람 같은 몸짓을 하면서 훌륭한 신앙고백을 하라고 격려했다. 그러나 군중들은 전에 신앙을 부인했던 사람들이 다시 신앙고백을 하는 것을 원통히 여겼으며, 마치 이렇게 된 원인이 알렉산더에게 있다는 듯이 알렉산더에게 소리를 질렀다. 총독이 그에게 그의 이름을 물었을 때 그는 기독교인이라고 대답했다. 화가 난 총독은 그를 짐승들에게 던지라고 선고했다. 다음날 그는 아탈루스와 함께 투기장에 들어갔다. 총독은 백성들의 비위를 맞추려고 아탈루스를 다시 두 번째로 짐승들에게 넘겨주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원형경기장 안에서 온갖 고문을 당하고 혹독한 싸움을 한 뒤 마침내 죽음을 당했다. 알렉산더는 조금도 신음소리를 내지 않았고 마음속으로 하나님과 교제했다. 아탈루스는 뜨거운 쇠의자에 앉혀졌는데, 그는 살이 타는 냄새가 나는데도 군중들에게 라틴어로 말하길 “보라, 너희들이 하고 있는 이 짓이야말로 사람의 고기를 먹는 짓이다. 우리는 결코 사람의 고기를 먹지 않으며 악을 범하지 않는다” 라고 말했다. 그는 하나님의 이름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고서 하나님은 사람처럼 이름을 갖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p254
모든 일이 끝나고 검투경기의 마지막 날이 되었다. 블란디나가 약 15세가량 된 청년 폰티쿠스 Ponticus 와 함께 다시 끌려나왔다. 이들은 매일같이 끌려나와 남은 사람들이 고문을 받는 모습을 보았으며 우상의 이름으로 맹세하라는 강요를 받았다. 그러나 그들은 계속 확고한 태도를 잃지 않았고 우상들의 신성을 부인했으므로 군중들은 격분하여 어린 소년을 동정하지 않았고 여인이라는 점도 배려하지 않게 되었다. 그들은 이들에게 온갖 무서운 고통을 주었고 여러 가지 고문을 하면서 맹세하라고 강요했다. 그러나 그들의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폰티쿠스는 이 자매 때문에 용기를 얻었다. 이교도들은 그녀가 그를 격려하고 힘을 주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폰티쿠스는 모든 고난을 훌륭하게 견뎌내고 숨을 거두었다. 복된 블란디나는 마치 자녀들을 격려하여 힘을 내게 해주는 어머니처럼 그들을 격려하여 위대하신 임금님께 승리자로 보낸 뒤 마지막으로 자기 자신도 자녀들이 겪은 모든 고난의 땅을 되밟아 기쁨과 환희 속에서 그들에게로 갔다. 그녀는 마치 사나운 짐승에게 던져진 것이 아니라 혼인잔치에 초대를 받은 사람 같았다. 그녀는 채찍질을 당하고 짐승에게 던져졌으며 살을 태우는 고문을 받은 뒤, 마지막으로 그물 속에 갇혀 황소 앞에 놓여졌다. 결국 그녀는 황소의 뿔에 받혀 그리스도에 대한 그녀의 확고한 소망과 확신과 신앙 및 교제를 이유로 그녀에게 가해지는 고통을 느끼지 못하게 되어 세상을 떠났다. 이방인들조차 그처럼 크고 많은 고난들을 견뎌낸 여인이 없었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들을 향한 그들의 잔인함과 광포함은 충족되지 못했다. 야만적인 짐승 사탄의 선동을 받은 이 사납고 야만적인 족속들은 쉽게 진정되지 않을 광포함에 휩싸여 있었으므로 그들은 시체들을 능욕했다. 총독과 백성들은 순교자들에게 패배했는데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마치 야생동물처럼 이성을 잃고 더욱 격노하여 여전히 우리에게 불의한 적대감을 나타냈다. 기록된바 “불의를 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게 하라” 는 요한계시록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 같았다. p256
그들은 감방에서 질식하여 죽은 시체들을 개에게 던져주고는 우리가 그 시체들을 매장하지 못하도록 밤낮으로 지켰다. 또 짐승에 먹혀 죽은 사람이나 화형당한 사람의 유골까지도 짓이겨버리거나 태워버렸다. 그들은 참수된 사람들의 몸과 머리를 매장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군인들로 하여금 며칠 동안 계속 지키게 했다. 어떤 사람들은 정말로 그들에게 분노하여 이를 갈았고 보다 훌륭한 처형방법을 찾아내려고 애를 썼다. 또 다른 사람들은 그들을 모욕하고 비웃었으며, 자신들의 우상을 찬양하고 그들에게 순교자들의 처형을 전가했다. 그러나 그래도 온건하고 어느 정도 동정심을 가진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은 그들을 꾸짖으며 “그들의 하나님이 어디에 있느냐? 그들이 목숨보다 더 귀하게 여겨 선택한 그들의 종교가 그들에게 무슨 유익을 주었느냐?” 고 말했다. 이처럼 이방인들은 순교자들에 대해 여러 가지 태도를 나타냈다. 그러나 우리 형제들은 그들의 시신을 땅에 매장할 자유가 없었기 때문에 큰 고통을 겪었다. 그들을 매장하는 데는 어두운 밤도 소용없었고, 돈을 사용해도, 아무리 간청해도 그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었다. 그들은 무슨 큰 소득이나 되는 듯이 순교자의 시신을 매장시키지 못하게 하려고 온갖 방법으로 지켰다. 그들은 이상과 같은 내용 뒤에 다음과 같은 기사를 추가했다. “순교자들의 시체는 온갖 방법으로 능욕을 당한 뒤 6일 동안 그대로 방치되었다가 마침내 저 비열한 사람들에 의해 불에 태워졌으며 남은 재는 가까이에 있는 론 Rhone 강에 던져졌다. 그리하여 이 세상에는 순교자들의 흔적조차 남지 않게 되었다. 그들은 이렇게 함으로서 하나님을 이기고, 그들의 부활을 막으려는 것 같았다. 그들은 직접 이렇게 말했다. ‘그들이 다시 소생할 소망을 갖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들은 이 부활의 믿음 안에서 새롭고 이상한 종교를 도입했으며 지극히 무서운 형벌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기쁨으로 죽음을 맞으려 했다. 우리는 그들이 다시는 부활의 소망을 갖지 못하게 했다. 이제 우리는 과연 그들이 다시 살아날 것인지, 그들의 신이 그들을 도와 우리의 손아귀에서 구출해낼 수 있을 것인지 보게 될 것이다’” p257 호겐 :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순교자들과 동료들이 죽으면 그들을 카타콤베에 묻었다.
제2장 배교했던 신자들은 경건한 순교자들 때문에 신앙을 되찾았다
전장에서 베루스 Lucius Verus 황제 때 그리스도의 교회에 있었던 사건들을 기록한 바 있다. 이 사건들로 미루어 나머지 지방에 있던 사태도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본장에서는 역시 같은 서신에서 발췌한 또 다른 기사를 소개하려 한다. 그 서신에는 앞서 언급했던 순교자들의 온화함과 자애로움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열심히 본받으려 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형상 안에 있는 사람들이었지만 하나님과 동등하게 되는 것을 강도짓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들은 동일한 관점에서 존중되었으며, 한두 번에 그친 것이 아니라 빈번하게 순교를 당했다. 그들은 짐승에게 던져졌다가 다시 감방에 수감되었으며, 온 몸에는 낙인, 불에 탄 흉터, 상처 등이 가득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을 순교자라고 말하지 않았다. 따라서 우리가 그들에게 순교자라는 명사를 적용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혹시 우리 중에 어떤 사람이 편지나 대화중에 그들을 순교자라고 부르면 그들은 우리를 심하게 꾸짖었다. 그들은 참되고 신실하신 순교자, 죽은 자들의 첫 열매, 거룩한 생명의 왕이신 그리스도에게 이 순교자라는 명칭을 바쳤다” 그들은 이미 세상을 떠난 순교자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신앙고백을 통해 받아들일만하다고 인정하셨으므로 순교의 인을 치신 순교자들이다. 그러나 우리는 변변치 못하고 하찮은 고백자에 불과하다. 그들은 형제들에게 온전해지기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라고 눈물로 간청했다. 그들은 실제로 순교의 능력을 나타내어 담대하게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고귀한 인내심과 두려움 없는 용맹을 증명했다. 그러나 그들은 형제들에게서 순교자라는 명칭을 받길 사양했다. 그들은 참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었다” p258
얼마 뒤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그들은 위대한 손 밑에서 자신을 낮추었으나, 지금은 그 손에 의해 크게 고양되었다. 그들은 온전한 순교자 스테판처럼 자신을 적대한 사람들을 위해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전가하지 마십시오’ 라고 기도했고, 모든 사람들을 위해 간구했으며 모두를 용서했고 아무도 속박하지 않았다. 스테판이 자신에게 돌을 던진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했을진대 하물며 형제들을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기도를 했겠는가?” 그들은 몇 가지를 언급한 뒤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것은 그들이 그 (악마) 와 맞서 싸운 가장 큰 싸움이었다. 그들의 순수한 사랑 앞에서는 짐승들조차 목이 메어 그들을 건드리지 못하고 살려 두었다. 그들은 자신이 배교자들보다 우월하다고 여기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에게 여유가 있으면 부족한 사람들에게 공급해 주었으며 어머니와 같은 연민을 발휘해 그들을 위해 아버지께 많은 기도를 했다. 그들은 생명을 구했고 아버지께서는 그것을 주셨다. 그들은 그것까지도 이웃과 나누어 가졌다. 그들은 모든 것을 이기고 승리하여 하나님께로 갔다. 항상 평화를 사랑했던 그들은 평화를 권했으며 평화롭게 하나님께로 갔다. 그들은 자신의 어머니인 교회에 아무런 슬픔을 남기지 않았고, 형제들에게 불화를 남기지 않았다. 그들은 오직 기쁨과 평화와 일치와 사랑을 남겨 주었다” 위의 기사는 그리스도의 지체들에게 비인간적이고 무자비한 성품을 발휘한 사람들 때문에 변절한 사람들에게 베푼 형제들의 사랑을 나타낸 이야기이다. p259
제3장 순교자 아탈루스의 꿈에 나타난 환상
제4장 순교자들은 서신 속에서 이레니우스를 칭찬했다
제5장 하나님께서는 형제들의 기도에 응답하여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게 비를 내리셨다
선왕 Antonine 의 동생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Marcus Aurelius 는 전쟁터에서 독일과 사마리아를 대적하여 싸울 때 그의 군대가 갈증으로 고난을 받아 크게 당황했다고 한다. 그 때 멜리틴 Melitine 군단에 소속된 병사들이 전쟁터에서 적과 맞서 진을 치고 있으면서 우리의 특유한 기도 관습대로 땅에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 시작했다. 적들이 보기에 이것은 참으로 기이한 광경이었다. 그러나 곧이어 보다 기이한 일이 일어났다고 한다. 즉 갑자기 번개가 쳐서 적을 도망치게 했고 또 소나기가 쏟아져 갈증 때문에 죽게 된 형제들의 군대가 새 힘을 얻은 것이다. 우리의 교리를 알지 못하는 이방 역사가들도 이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다. 그들은 우리가 언급해 온 사람들의 저작물들에 흥미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 작가들도 역시 그 일을 기록하고 있다. 우리와 다른 신앙을 가진 역사가들은 이 놀라운 사건을 기록하면서도 이 일이 우리 형제들의 기도로 인해 일어났다는 사실은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사실은 진리를 사랑하는 우리 형제들에 의해 솔직하고 숨김없이 기록되어 전해져 내려온다. 우리는 이들 중의 한 사람으로 아폴리나리스 Apollinaris 를 언급할 수 있다. 그는, 기도로 기적을 이룬 군단은 그 후 황제로부터 그 사건에 합당한 명칭을 하사받아 “Fulminea”, 또는 “천둥군단” thundering legion 이라고 불렸다고 기록했다. 이 일의 증인으로서 우리는 터툴리안을 인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기독교 신앙을 옹호하여 로마 원로원에 보낸 <변증 Apology> 에서 강력하게 그 일을 증거하고 있으니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p262
“지극히 박학한 마르쿠스 황제의 서신 중에서 아직껏 남아있는 서신들이 있다. 그는 그 서신에서 자신의 군대가 물이 없이 죽게 되었을 때에 기독교인들의 기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다고 증거했다” 그는 또 “이 황제는 우리를 고발하려는 사람들을 사형에 처하겠다고 위협했다” 고 말했으며 계속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악하고 불의하며 잔인한 사람들이 우리를 대적하기 위해 시행했던 법은 어떤 것이었는가? 베스파시안 황제는 유대인들을 정복했으나 그런 법은 지켜지지 않았고, 트라얀 황제는 부분적으로 취소시키고 크리스찬을 색출하는 것을 금했다. 또 매사에 호기심이 많았던 아드리안 황제나 피우스 Pius 라는 성을 지닌 황제도 그것을 비준하지 않았다” (호겐 : 아드리안과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는 기독교 박해를 중단했고, 특히 피우스 황제는 ‘덕의 아버지’ 라 불렸다). 다시 우리 역사서를 순서대로 진행하려 한다. 포티누스 Pothinus 는 90세의 나이로 골 Gaul 지방의 다른 순교자들과 함께 순교했었고, 그의 뒤를 이어 이레니우스가 리용 Lyons 교회의 감독이 되었다. 그는 젊었을 때에 폴리갑을 따랐던 사람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레니우스는 <이단을 반박함> 제3권에 엘류테루스에 이르기까지 감독들의 계보를 삽입했다. 엘류테루스는 이레니우스와 함께 이 저서의 제작을 위해 노력했었다. p263
제6장 로마교회 감독 일람표
“거룩한 사도들은 교회를 세워 기반을 다진 뒤 리누스 Linus 에게 감독직을 맡겼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보낸 서신 속에서 리누스를 언급했다. 그의 후임은 아넨클레투스 Anencletus 였으며, 그의 사후에 클레멘트가 제3대 감독이 되었다. 클레멘트는 복된 사도들을 친히 목격했으며 그들과 관계를 맺었던 사람이었으므로 사도들의 교리가 항상 그의 귓속을 울리고 있었으며, 사도들이 전해준 것들이 눈에 선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클레멘트 외에도 사도들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은 많은 사람들이 생존해 있었다. 클레멘트가 감독으로 있던 시기에 고린도 교회의 형제들 사이에 큰 분쟁이 있었으므로 로마교회는 고린도 교회에 여러 번 서신을 보내어 그들이 화평하게 지내고 사도들로부터 받은 믿음과 교리를 되살리게 했다” 이레니우스는 그 뒤에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클레멘트의 뒤를 이어 유아레스투스 Euarestus 가 감독이 되었고, 유아레스투스의 뒤를 알렉산더가 이었다. 6대 감독은 지스투스 Xystus 였다. 그의 후임은 텔레스포루스 Telesphorus 였는데 그는 훌륭하게 순교했다. 그의 뒤를 이어 히기누스 Hyginus 와 피우스 Pius 가 잇달아 감독으로 일했다. 피우스의 후임은 아니세투스 Anicetus 였고, 그의 뒤를 이어 소테르 Soter 가 감독이 되었다. 현재 엘류테루스 Eleutherus 가 12대 감독으로서 교회 내의 사도들의 전승과 진리를 우리에게 전해준 동일한 교리와 질서 속에 활동하고 있다” p264
제7장 이 시대에 신자들이 행한 기적
이 기사는 5권으로 이루어진 이레니우스의 저서 <거짓교리의 타도와 논박 Refutation and Overthrow of False Doctrine> 에 기록된 것이다. 그는 이 저서 제2권에서 그의 시대에도 몇 교회 안에는 거룩한 기적의 능력이 남아 있었다고 밝혔다. 그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그들은 우리 주님께서 죽은 자를 살리시거나 또는 사도들이 기도에 의해 죽은 자를 살렸던 것처럼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들이다. 심지어 우리 형제들 중에도 온 교회가 일치해 금식하며 기도할 때에 생명이 끊어진 육체에 혼이 돌아와 결국 성도들의 기도로 소생한 일이 여러번 있었다” (호겐 : 이레니우스의 추정 생존연대는 AD 135-202년이다). 그는 다른 사실들을 언급한 뒤 다시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그러나 만일 우리 주님께서 단지 표면적으로만 이런 일들을 행하셨다고 사람들이 말한다면, 우리는 그것들에 관한 예언의 말씀들을 참고로 하여 그 모든 일들이 이미 완벽하게 예고되어졌고 주님에 의해 행해졌다는 사실, 또 그분만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밝힐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이 주님에게서 값없이 주시는 은사를 받게 됨에 따라 주님에게서 은혜를 받은 참된 주님의 제자들은 사람들의 최고 유익을 위해 주님의 이름으로 이러한 일들을 행했다. 실제로 어떤 사람들은 지극히 악마들을 내쫓았다. 그리하여 악한 영들이 쫓겨나가 깨끗함을 얻은 사람들은 믿고 교회 안에 영접되었다. 또 어떤 이들은 장래 일에 대한 지식과 환상, 그리고 예언적 교통 능력을 갖고 있었다. 또 어떤 이들은 병자에게 안수하여 그들의 영을 낫게 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죽은 자들이 다시 소생하여 여러 해 동안 우리와 함께 살았다. 이러한 은사에 대해서 더 이상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전세계의 교회에서 하나님에게서 받은 많은 은사들, 그리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해진 일들을 헤아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이러한 일들은 이교도들을 위해서도 행해졌는데, 우리는 결코 속임수를 쓰지 않았고 또 그들에게서 돈을 강요하지 않았다. 교회는 하나님에게서 값없이 받았으므로 값없이 베풀어 주었다” 이레니우스는 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우리는 교회 안의 많은 형제들이 예언의 은사를 가지고 있거나, 성령으로 말미암아 방언을 하거나,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 비밀한 일들을 밝혀내거나, 하나님의 비밀을 설명한다는 소문을 들었다” 앞서 언급된 시대에는 이러한 여러 가지 은사가 자격이 있는 훌륭한 사람들에게 주어져 있었다. p266
제8장 성서에 관한 이레니우스의 진술
제9장 코모두스 Commodus 황제 시대에 활약한 감독들
안토니누스 Antoninus 는 19년 동안 제국을 통치했고, 코모두스 Commodus 가 그의 뒤를 이어 통치권을 갖게 되었다.
그가 즉위하던 해에 12년 동안 활동한 아그리피누스 Agrippinus 의 후임으로 줄리안 Julian 이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감독이 되었다. p270
제10장 철학자 판태누스 Pantaenus
제11장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이 무렵 알렉산드리아에서는 클레멘트가 활약하고 있었다. 그는 로마교회의 감독으로 활동했고 사도들의 제자였던 클레멘트와는 동명이인이다.
이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의 저서로는 <강요 Institutions> 와 <스트로마타 Stromata> 가 있다. p271
제12장 예루살렘 교회의 감독들
이 시기에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있는 나르시수스 Narcissus 가 하드리안 통치 하에서 있었던 유대인들에 대한 공격 이후 15대 예루살렘 감독으로 있었다. 이 유대인에 대한 공격이 있은 이후로 예루살렘에는 유대인들로 구성된 교회가 사라지고 이방인들로 교회가 이루어졌는데, 마르쿠스 Marcus 는 그곳 교회를 다스린 최초의 이방인 감독이었다. 그의 후임은 카시아누스 Cassianus 였고, 푸블리우스 Publius, 막시무스 Maximus, 줄리안 Julian, 카이우스 Caius, 심마쿠스 Symmachus, 또 다른 카이우스 Caius, 또 다른 줄리안 Julian, 카피토 Capito, 발렌스 Valens, 돌리키아누스 Dolichianus 등이 연이어 감독으로 활동했으며 마지막으로 나르시수스 Narcissus 가 감독이 되었으니, 사도들로부터 계산하면 제30대 감독이었다. p272
제13장 로도 Rhodo, 그리고 마르시온 Marcion 이 일으킨 불화에 관한 그의 기록
제14장 브리기아의 거짓 선지자들
제15장 로마에서 발흥한 블라스투스 Blastus 분파
제16장 몬타누스의 사건과 그의 거짓 선지자들
제17장 밀티아데스 Miltiades 와 그의 저서
제18장 아폴로니우스 Apollonius 도 브리기아의 이단을 반박했다
제19장 브리기아 이단에 관한 세라피온 Serapion 의 견해
제20장 로마의 종파분립론자들을 반박한 이레니우스의 저서
제21장 아폴로니우스가 로마에서 순교하다
거의 같은 시기, 콤모두스 Commodus 황제의 시대에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온 세상 교회가 평화가 깃들게 됨에 따라 우리 형제들의 형편도 보다 호전되었다. 그리고 이 유익한 교리는 지구상에 있는 모든 민족들의 마음을 인도하여 높으신 하나님을 경건하게 예배하도록 했다. 그 결과 로마에 있는 많은 부자들과 지체 높은 사람들이 온 집안 식구들과 함께 자신의 구원에 응하게 되었다. 그러나 모든 선을 대적하는 원수인 악마는 질투의 화신이었으므로 이것을 그대로 두고 볼 수가 없었다. 따라서 그는 다시 우리를 대적하여 여러 가지 간계를 강구했다. 그는 이런 목적을 수행하기 위한 사역자로 적임자라고 생각되는 사람을 선동해 아폴로니우스를 고발해 재판정에 세웠다. 아폴로니우스는 당시 신실한 사람으로서 학식과 지혜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 불쌍한 악마의 앞잡이는 시기적으로 좋지 않은 때에 아폴로니우스를 고발했다. 당시 신자들을 고발하는 사람을 살려두지 말라는 황제의 칙령이 발효되고 있었으므로 페레니스 Perennis 판사는 그의 사지를 부러뜨리라는 선고를 내렸고 그대로 시행되었다. 판사는 이 지극히 훌륭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순교자에게 원로원 앞에서 자신을 변론하라고 진지하게 타일렀으나 그는 모든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고난받는 원인인 신앙을 변호하는 훌륭한 연설을 했다. 그 결과 그는 원로원의 명령에 따라 참수되어 죽었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법정에 끌려와서도 자신의 뜻을 바꾸지 않는 사람은 결코 석방시키지 않는다는 오래된 법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순교자가 판사 앞에서 선포한 말, 페레니스의 질문에 대한 그의 답변, 원로원에서 행한 그의 신앙변론을 알고자 하는 사람은 우리가 편찬한 고대 순교자들의 이야기를 참고로 하면 좋을 것이다. p291
제22장 이 시대에 활약한 감독들
콤모두스 Commodus 황제의 통치 10년, 13년간 감독으로 일해온 엘류테루스 Eleutherus 의 뒤를 이어 빅토르 Victor 가 후임자가 되었다. 같은 해 10년 동안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감독으로 일하던 줄리아누스 Julianus 의 후임으로 데메트리우스 Demetrius 가 감독이 되었다. 당시 안티오크 교회의 8대 감독 세라피온 Serapion 이 아직 생존해 있었다. 팔레스틴의 가이사랴 교회는 데오필루스 Theophilus 가 다스리고 있었다. 그리고 같은 시기에 앞서 언급했던 나르시수스 Narcissus 가 예루살렘 교회를 다스리고 있었다. 당시 그리스의 고린도 교회에는 박실루스 Bacchylus 가 감독으로 있었고, 에베소 교회에서는 폴리크라테스 Polycrates 가 감독으로 일하고 있었다. 이밖에도 많은 훌륭한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나 우리는 다만 그 정통성이 기록을 통해 우리에게 전해진 사람들의 이름들만 밝혔다. p292
제23장 유월절에 관해 야기된 문제
제24장 아시아 교회들의 분쟁
제25장 유월절에 대한 일치된 견해
제26장 이레니우스의 훌륭한 저서들
제27장 이 시대에 활약한 인물들의 저서
제28장 아르테몬 Artemon 의 이단을 추종한 사람들 : 그들의 특성과 행동 및 성경을 변조하려는 시도
그들은 대담하게도 성서를 왜곡했다. 그들은 옛 신앙의 규칙을 버렸으며, 그리스도를 부인했다. 그들은 성경이 무엇이라고 선언했는지 알려하지 않고 추론에 의해 자신의 불경함을 확고히 할 방법을 강구했다. 누군가 거룩한 진리의 말씀을 그들에게 제시하면, 그들은 과연 그 말씀으로부터 추론하여 어떤 관련된 형태나 분리된 유형을 만들어낼 수 있을지 조사했다. 그들은 기하학 연구를 위해 성경을 버렸다 (기하학 : 이 단어는 땅, 또는 땅의 측량을 의미한다. 이 학문은 이집트에서 나일강이 범람한 뒤에 땅을 측량해야 할 필요성 때문에 생겨난 듯 하다). 그들은 흙으로 만들어진 존재로서 땅에 대해서만 이야기했으며, 하늘로부터 오신 분을 알지 못했다. 그런고로 그들은 부지런히 유클리드 Euclid 를 평가했고 아리스토텔레스 Aristotle 와 데오프라스투스 Theophrastus 를 찬미했으며, 어떤 이들은 갈렌 Galen 을 숭배했다. p303
제6권
제1장 세베루스 Severus 시대의 박해
세베루스 황제가 교회를 박해했을 때, 도처에 있는 모든 교회 내에서 신앙의 용사들은 훌륭한 증거들을 나타냈다. 특히 그런 용사들은 알렉산드리아에 많았다. 이집트와 테바이스 Thebais 출신의 영웅적인 용사들은 위대한 하나님의 경기장인 알렉산드리아까지 호송되어 와 갖은 고문과 여러 형태의 죽음을 큰 인내로서 감당하여 하늘의 면류관을 받았다. 이들 중의 한 사람인 레오니데스 Leonides 는 오리겐 Origen 의 아버지였다고 한다. 그는 어린 아들을 남겨 두고 참수되었다. p306
제2장 오리겐이 어린 시절에 받은 교육
제3장 그는 대단히 젊었을 때부터 복음을 전파했다
제4장 오리겐의 가르침을 받은 초심자 중에서 순교한 인물들
제5장 포타미애나 Potamiaena
제6장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제7장 역사가 유다 Judas
제8장 오리겐의 단호한 행위
제9장 나르시수스가 행한 기적
제10장 예루살렘의 감독들
제11장 알렉산더 Alexander
제12장 세라피온 Serapion 과 그의 저서들
제13장 클레멘트의 저서
제14장 클레멘트가 언급한 책들
클레멘트는 <Hypotyposes> 라고 불리는 책에서 모든 정경적 성경에 대한 요약된 기사를 제공했다. 그는 히브리서는 바울이 히브리인들에게 히브리어로 적어보낸 것으로서 누가가 그것을 번역하여 헬라인들 사회에서 발행했기 때문에 그 서신에서는 사도행전에 사용된 것과 동일한 문체와 어법이 발견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 서신의 서두에 제목을 붙이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바울이 서신을 띄우는 대상은 히브리인이었는데, 그들은 바울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있었고 또 그를 의심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자기의 이름을 밝힘으로서 그들이 편지를 읽지 않게 되는 사태를 막으려고 지혜롭게 대처했다” 그는 조금 뒤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그러나 지금 그 복된 장로가 항상 말하듯이 전능자의 사도이신 주님은 히브리인들에게 보내심을 받았으므로, 바울은 마치 자신이 이방인에게 보내어졌다는 듯이 히브리인들의 사도라고 서명하지 않았다. 그것은 주님께 대한 존경심에서 나온 행위이며, 또 그는 이방인들의 사도와 사자로서 히브리인들에게 편지를 썼기 때문이다” 클레멘트는 같은 저서에서 옛 장로들에게서 유래된바 복음서들의 순서에 대한 전승도 제시했다. “그는 족보를 포함하고 있는 복음서가 가장 먼저 기록되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마가의 복음서는 다음과 같은 경위에 따라 기록하게 되었다고 한다 : 베드로는 로마에서 말씀을 전파했고 성령의 감화 아래서 복음을 선포했다. 그곳에는 많은 사람들이 참석했는데 그들은 마가에게 그것들을 기록해 달라고 요청했다. 마가는 이전부터 베드로를 따라다녔으므로 베드로가 말한 것을 잘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마가는 복음서를 기록하여, 그것을 기록해 달라고 요청했던 사람들에게 주었다. 이 사실을 안 베드로는 직접적으로 그것을 방해하지도 않고 장려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우리 주님의 육체에 관한 것은 이미 충분히 설명된 것을 알게 된 요한이 마지막으로 친구들의 격려와 성령의 강권을 받아 영적인 복음서를 기록했다” p326
제15장 헤라클라스 Heraclas
제16장 오리겐의 헌신적인 성경연구
제17장 성경번역자 심마쿠스 Symmachus
제18장 암브로스 Ambrose
제19장 오리겐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
제20장 현존하고 있는 그 시대 작가들의 저서
제21장 이 시대에 활약한 감독들
제22장 힙폴리투스 Hippolytus 의 저서
제23장 오리겐의 정열, 그리고 사제로의 승진
제24장 오리겐이 알렉산드리아에서 저술한 주석
제25장 오리겐의 성경에 대한 개관
오리겐은 히브리서에 관한 설교에서 히브리서에 대해 다음과 같은 소견을 기록했다. “히브리서의 문체는 그 사도가 사용하는 모국어의 어법을 사용하고 있지 않다. 그 사도는 자신이 어법상 평범한 말을 사용한다고 고백했다. 그러나 문체의 차이를 구별할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서신의 문장 구성이 완전히 희랍식 문체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또 이 서신에 나타난 개념들이 훌륭하며 사도의 책이라고 인정된 그 어느 책에도 뒤지지 않는다는 것도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사도의 저술을 주의깊게 읽어본 사람은 누구나 이에 대해 진실을 고백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조금 뒤에 다음과 같이 부언했다. “그러나 나는 그 서신에 나타난 사상은 사도의 것이지만, 문체와 어법은 그 사도가 말한 것을 기록했거나, 또 스승이 불러주는 것을 받아 쓴 사람의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러므로 만일 어느 교회가 이 서신을 바울의 것으로 간주한다면 그것을 칭찬해 주어야 한다. 왜냐하면 옛사람들이 아무 이유없이 그것을 사도 바울의 서신이라고 말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 그 서신을 쓴 사람이 누구인지는 다만 하나님만이 아신다. 그러나 과거 사람들에 의하면 로마교회의 감독 클레멘트가 그 서신을 썼다고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가 이 서신을 기록했다고도 한다. 이 주제에 관한 논의는 이만큼만 하기로 하자” p341
제26장 알렉산드리아의 감독 헤라클라스
알렉산데르 황제 (세베루스 왕조 최후의 황제) 의 통치 10년, 오리겐은 알렉산드리아를 떠나 가이사랴로 가면서 그곳 초심자 교육을 헤라클라스 Heraclas 에게 맡겼다. 그러나 곧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감독 데메트리우스가 43년 동안의 감독직 수행을 마치고 세상을 떠났고 그의 뒤를 이어 헤라클라스가 감독이 되었다. 이 무렵 가파도키아에서는 가이사랴의 감독 피르밀리아누스 Firmilianus 가 활약하고 있었다. p342
제27장 오리겐에 대한 감독들의 배려
제28장 막시미누스 Maximinus 황제 시대의 박해
알렉산더 황제는 13년간 제국을 통치했고 그의 후임으로 막시미누스 Maximinus 가 황위에 올랐다. 그는 많은 신자들로 구성된 알렉산더 가문에 대한 증오심으로 불타고 있었으므로 박해를 시작했다. 그는 먼저 복음의 진리를 교사하는 인물이며 행위자들인 교회의 지도자들을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바로 이 시기에 오리겐은 순교에 관한 책을 저술했다. 그는 이 책을 암브로스 Ambrose 와 가이사랴 교회의 장로 프로톡테투스 Protoctetus 에게 헌정했다. 왜냐하면 이들 두 사람은 박해를 받아 큰 위험에 직면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박해를 받으면서도 자신의 신앙고백을 굽히지 않아 유명해졌다고 한다. 막시미누스의 통치는 3년을 넘기지 못했다. 오리겐은 요한복음 주석 제22권을 비롯한 여러 서신에 이 박해의 시기를 지적했다. p343
제29장 파비아누스가 놀라운 신적인 메시지에 따라 로마감독에 임명되다
막시미누스의 뒤를 이어 고르디안 Gordian 이 로마 황제가 되었다. 당시 6년 동안 로마교회의 감독으로 있었던 폰티아누스 Pontianus 의 뒤를 이어 안테로스 Anteros 가 감독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그 직책에 약 1개월 동안 종사했고, 파비아누스가 그의 후임자가 되었다. 파비아누스는 몇 사람과 함께 로마에 왔는데, 그곳에 머물면서 지극히 훌륭한 태도를 나타냈기 때문에 거룩한 하늘의 은사로 말미암아 감독 후보에 올랐다고 한다. 새로이 감독직을 맡을 사람을 임명하기 위해 모든 형제들이 교회에 모였다. 많은 사람들이 기대한 많은 훌륭한 이들이 있었지만 파비아누스가 출현하자 아무도 다른 사람을 생각하지 않았다. 또 갑자기 하늘로부터 비둘기 한 마리가 내려와 그의 머리에 앉아 마치 과거 우리 주님에게 성령이 비둘기의 형상으로 내려왔던 것같은 장면을 나타냈다고 한다. 이 광경을 본 모든 사람들은 마치 하나님의 성령의 감동을 받은 듯이 한 목소리로 그가 감독 자격이 있다고 외쳤고 지체하지 않고 그를 데려다가 감독의 자리에 앉혔다. 같은 시기에 안티오크에서는 감독 제비누스 Zebinus 가 사망하여 바빌라스 Babylas 가 감독이 되었고, 알렉산드리아에서는 43년간 감독으로 활동한 데미트리우스의 후임으로 헤라클라스가 감독이 되었다. 그리고 알렉산드리아의 교리문답학교는 디오니시우스 Dionysius 가 맡았는데, 그도 역시 오리겐의 제자였다. p344
제30장 오리겐의 제자들
제31장 아프리카누스 Africanus
제32장 오리겐이 팔레스틴에서 저술한 주석들
제33장 베릴루스의 오신 誤信
제34장 필립 황제
고르디아누스 Gordianus 는 6년 동안 로마를 다스렸고, 필립 황제가 아들 필립과 함께 제국을 통치했다. 필립 황제는 기독교인이었으므로 유월절의 마지막 밤에 무리와 함께 교회에서 기도에 참여하기를 원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감독은 그를 범죄자로 여겼으므로, 그가 죄를 자백하기 전에는 교회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감독은 황제가 먼저 회개하여 자신이 과거에 범한 죄들을 자백하지 않는 한 결코 그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황제는 즐거운 마음으로 그의 말에 순종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는 순수하고 신앙적인 성품을 나타냈다고 한다. p348
제35장 디오니시우스가 헤라클라스의 후임으로 감독이 되었다
필립 황제의 통치 3년에 헤라클라스는 16년간의 감독 생활을 마치고 세상을 떠났고 디오니시우스가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감독이 되었다. p348
제36장 오리겐이 저술한 그 밖의 저서들
제37장 아라비아인들의 불화
제38장 이단 헬세사이테스 Helcesaites
제39장 데시우스 Decius 의 박해
필립 황제는 7년 동안 제국을 다스렸고, 데시우스 Decius 가 그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되었다. 데시우스는 필립을 증오했기 때문에 그 증오심을 교회의 박해로 나타냈다. 이 박해로 말미암아 파비아누스 Fabianus 가 순교했고, 코르넬리우스 Cornelius 가 로마교회의 감독이 되었다. 한편 팔레스틴에서는 예루살렘의 감독 알렉산더 Alexander 가 가이사랴에서 다시 총독의 법정에 서게 되었다. 그는 나이가 많아 백발이 성성했지만 자신의 신앙을 훌륭히 지켰으므로 감옥에 투옥되었다. 그는 총독의 법정에서 훌륭한 증언을 한 뒤 감옥에서 숨을 거두었으므로 마자바네스 Mazabanes 가 그의 후임으로 예루살렘 감독이 되었다. 한편 안티오크 교회의 감독 바빌라스 Babylas 도 알렉산더와 유사하게 자신의 신앙을 따라 사망했으므로 파비우스 Fabius 가 그곳 교회를 다스리게 되었다. p351
제40장 디오니시우스에게 일어난 사건
제41장 알렉산드리아의 순교자들
디오니시우스는 안티오크 교회의 감독 파비우스 Fabius 에게 보낸 서신에서 알렉산드리아에서 순교한 순교자들의 투쟁에 관해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우리에게 가해진 박해는 제국의 칙령으로 인해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이 박해는 제국의 칙령보다 꼭 1년 먼저 시작되었습니다. 불운하게도 어느 시인이며 선지자인 사람이 우리를 대적해 많은 이교도들을 선동하고 부추겨 그들 본래의 미신을 신봉하게 했습니다. 그의 선동을 받은 이교도들은 온갖 악을 마음껏 발휘했습니다. 그들은 우리를 살해하는 것이 유일한 신앙이며 자기들의 악마들을 예배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최초로 메트라 Metra 라는 사람을 체포했습니다. 그들은 그에게 불경한 말을 하라고 요구했으나 그가 순종하지 않자 그를 곤봉으로 때리고 그의 얼굴과 두 눈을 찔렀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를 교외로 끌고나가 돌로 쳐 죽였습니다. 다음에는 퀸타 Quinta 라는 믿는 여인을 우상의 신전으로 데리고 가서 억지로 예배하게 만들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몸서리를 치며 얼굴을 돌렸기 때문에 그들은 그녀의 두 발을 묶어 돌로 포장된 울퉁불퉁한 온 도시로 끌고 다녔습니다. 그들은 그녀를 맷돌에 부딪치게 하고 채찍질을 하다가 마침내 처음 장소로 돌아와 그곳에서 돌로 쳐 죽였습니다. 그 후 그들은 모두가 한 마음으로 신자들이나 자기가 아는 이웃의 집 등 가리지 않고 습격하고 약탈했습니다. 그들은 귀중한 물건들은 자기들이 가져가고, 흔하거나 나무로 된 가구들은 길바닥에 내던져 태웠습니다. 마치 온 도시가 원수들에게 함락된 것 같은 광경이었습니다. p355
그러나 형제들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한적한 곳에 은거했으며, 마치 사도 바울이 증거한 사람들처럼 자기 재산의 약탈됨을 기쁘게 여겼습니다. 내가 아는 한 이제까지 주님을 부인한 사람은 단 한 사람뿐입니다. 그들은 상당히 나이가 든 훌륭한 처녀 아폴로니아 Apollonia 를 잡아다가 그녀의 턱을 때려 이빨을 모두 부러뜨렸습니다. 그리고 만일 그녀가 불경한 말들을 하지 않으면 산채로 태워 죽이겠다고 위협했습니다. 그녀는 처음에는 조금 위축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고문을 당하게 되었을 때에 그녀는 갑자기 불로 뛰어들어 타죽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또 자기 집에 있던 세라피온 Serapion 이라는 사람을 붙잡아 지극히 잔인하게 고문하여 그의 사지를 모두 못쓰게 만든 뒤 2층에서 거꾸로 던져버렸습니다. 우리는 밤이나 낮이나 마음 놓고 다닐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언제 어디서나 불경한 말을 따라하지 않는 사람은 즉시 끌어다 태워 죽이겠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식으로 박해가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비열한 사람들 사이에서 폭동과 내란이 일어나 그들은 잔인하게 서로를 대적하여 싸우게 되었으므로 우리를 향한 그들의 격정은 약간 누그러졌고, 따라서 우리는 조금 숨을 돌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곧이어 온화한 통치로부터의 전환이 우리에게 선포되고 큰 두려움이 우리를 위협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예고하신 것과 매우 흡사하며 지극히 두려운 양상을 나타내는 칙령이 발해졌습니다. 택함을 받은 자들도 실족할 가능성이 있는 것처럼 여겨지게 되었습니다. p356
실제로 모두가 크게 경악했으며, 많은 훌륭한 사람들이 그들에게 굴복했습니다. 공직에 있는 사람들은 그들의 법령에 의해, 또 다른 사람들은 아는 사람에 의해 끌려갔습니다. 그들은 자기의 이름이 불리면 그 불순하고 부정한 제물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제사를 드리려는 사람이 아니라 그들 자신이 우상의 제물인 듯이 창백해져서 떨었으므로 주위에 있는 많은 사람들의 조소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분명히 죽음과 제사를 드리는 것을 모두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나 몇 사람은 민첩하게 제단에 나아가 담대하게도 자신이 전혀 기독교인이 되었던 일이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들이야말로 주님의 말씀하신바 구원을 받지 못할 사람들입니다. 남은 사람들 중에서 몇 사람이 앞 사람을 좇아 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도망쳤으며, 또 다른 사람들은 체포되었고, 이들 중에서 몇 사람은 감옥에 갇혔습니다. 감옥에 갇힌 사람들 중 몇 사람은 며칠 후 법정에 서기 전에 기독교 신앙을 포기했습니다. 또 몇 사람은 얼마동안 고문을 받다가 견디지 못해 마침내 주님을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굳건하고 복된 기둥인 사람들은 주님으로 말미암아 힘을 얻고 또 스스로 힘과 능력을 받아들여 자신의 신앙에 적합하고 어울리는 훌륭한 주님의 나라의 증인들이 되었습니다. p357
이들 중 첫 번째 사람이 줄리안 Julian 으로서 그는 통풍에 걸려 걷지도 못하고 서지도 못했으므로 다른 두 사람이 그를 부축하여 선채 심문을 받았습니다. 그를 부축했던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곧 신앙을 포기했습니다. 그러나 크로니온 에누스 Cronion Enuus 라는 이름을 가진 나머지 한 사람과 줄리안은 주님을 믿는 신앙을 고백했으므로 낙타 등에 태워져 이 대단히 큰 도시 전체로 끌려 다녔습니다. 또 그들은 매질을 당했으며 결국 수많은 구경꾼들에게 둘러싸여 격렬한 불 속에서 타죽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들 가까이에 베사스 Besas 라는 군인이 서 있었습니다. 그는 군중의 불손한 태도를 반대했었습니다. 그는 이들이 형장으로 끌려갈 때, 그들의 커다란 고함소리와 맞서 싸웠습니다. 그리하여 이 용감한 하나님의 군사는 신앙의 큰 싸움에서 승리한 뒤 참수되었습니다. 또 리비아 Lybia 태생으로서 마카르 Macar 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은 판사가 신앙을 버리라고 간곡히 청했는데도 전혀 흔들리지 않았으므로 산채로 화형에 처해졌습니다. 에피마쿠스 Epimachus 와 알렉산더 Alexander 는 오랫동안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채찍과 인두 (이것은 쇠로 만든 도구로서 그것으로 몸 위를 긁으면 살이 찢어지고 상처가 나게 된다) 를 사용한 고문을 당한 뒤 역시 치열한 불길 속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또 네 여인이 이들과 함께 있었습니다. 암모나리움 Ammonarium 이라는 거룩한 처녀는 판사에 의해 오랫동안 교묘하게 고문을 당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녀는 판사가 불러주는 말을 한 마디도 따라 하지 않겠다고 분명히 선언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녀는 자기의 약속대로 이행하고 끌려나갔습니다. 또 나이가 든 훌륭한 여인 메르쿠리아 Mercuria 가 있었습니다. 디오니시아 Dionysia 는 여러 자녀를 둔 어머니였으나 그들을 주님보다 더 사랑하지는 않았습니다. 총독은 이들을 고문했지만 성공하지 못해 이 여인들에게 패해 수치를 당했습니다. 이들은 모두 칼로 베어 죽임을 당했습니다. 암모나리움은 마치 으뜸가는 전투원처럼 가장 큰 고문을 받았습니다. p358
이집트인들인 헤론 Heron, 아테르 Ater, 이시도루스 Isidorus 와 약 15살 가량된 소년 디오스코루스 Dioscorus 도 체포되어 총독에게 넘겨졌습니다. 총독은 처음에는 이 소년이 쉽사리 신앙을 버릴 것이라고 여겨 그럴듯한 말로 이 소년을 속이려 했고, 또 고문을 하면 쉽게 굴복시키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디오스코루스는 그럴듯한 말에 설득당하지 않았고 고문에도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판사는 나머지 사람들을 지극히 가혹하게 매질했으나 그들이 전혀 굴복하지 않음을 깨닫고 이들도 화형에 처했습니다. 그러나 판사는 디오스코루스를 석방했습니다. 판사는 자신이 던진 질문에 대답한 이 소년의 지혜를 칭찬했고, 또 백성들이 보기에도 그가 훌륭했으므로 그의 나이를 고려하여 그에게 뉘우칠 시간을 준 것입니다. 지금 이 지극히 경건한 디오스코루스는 우리 중에 거하면서 보다 길고 보다 가혹한 싸움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역시 이집트 사람인 네메시온 Nemesion 은 처음에는 도둑들과 한 무리라는 죄목으로 고발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백부장 앞에서 이 죄목에 반발하여 이것은 자기를 중상한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결국 그는 기독교인이라고 보고되어 죄수로서 총독 앞에 섰습니다. 대단히 불의한 판사였던 이 총독은 강도들에게 가하는 것의 두 배나 되는 매질과 고문을 가한 뒤 그를 도둑들 사이에서 불에 태우게 했습니다. 이리하여 이 복된 순교자는 그리스도의 본을 좇아 영광을 받았습니다” p359
제42장 디오니시우스가 밝힌 다른 사건들
여러 도시와 마을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갈기갈기 찢겨 죽었다. 그 중의 한 가지 예를 들기로 하겠다. 이스키리온 Ischyrion 은 어느 통치자 밑에서 청지기로 일하고 있었다. 그의 주인은 그에게 희생제사를 지내라고 명령했으나 그는 순종치 않았으므로 주인은 그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그래도 그는 뜻을 굽히지 않았으므로 대단히 모욕적인 취급을 받았다. 그런데도 그는 그 모든 모욕을 견디었으므로 그의 주인은 길다란 장대로 그의 창자를 찔러 죽이고 말았다. 그밖에도 사막이나 산속을 방황하다가 굶주림이나 목마름으로 죽거나, 얼어죽거나, 병들어죽거나, 강도나 사나운 짐승을 만나 죽은 수많은 사람들이 굳이 언급할 필요가 있겠는가? 그들 중에서 살아남은 자들이 그들이 선택된 자이며 승리한 자임을 증거해준다. 나는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한 가지 사실을 덧붙이려 한다. “캐레몬 Chaeremon 은 나일 Nile 이라는 도시에 살았던 대단히 늙은 감독이었다. 그는 동료와 함께 아라비아의 산 속으로 도망해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발레시우스 Valesius 는 본문에 언급된 산이 아라비아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두 곳에서 그것을 아라비아의 산이라고 번역했다. 그는 그것이 아라비아 인근에 가까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불렸다고 생각한다). 형제들이 그를 여러 번 찾아나섰지만 그에 대해 아무 것도 알아내지 못했다. 그들은 그들을 발견하지 못했고 그들의 시신도 발견하지 못했으며, 오히려 많은 사람이 야만적인 사라센인에게 잡혀 역시 같은 산속으로 노예로 끌려갔다. 이들 중 몇 사람은 간신히 몸값을 주고 나왔으나 다른 사람들은 지금까지 몸값을 지불하지 못하고 있다. 내가 이런 사실들을 형제들에게 말하는 데에는 목적이 있으니, 즉 우리에게 얼마나 크고 무서운 재난이 임했는지 여러분들에게 알리며 또 이 재난 속에서 큰 시련을 당한 사람들을 잘 이해하게 하려는 것이다” p360
제43장 노바투스의 태도와 관습 및 그의 이단
이 시기에 노바투스 Novatus 라는 인물이 출현했다. 그는 로마교회의 장로였다. 그는 배교했던 사람들을 대단히 오만하게 대하여 마치 그들이 순수하고 참된 신앙고백을 위해 온갖 일을 다 한다 해도 그들에게는 전혀 구원의 소망이 없는 듯 행했다. 그는 허황된 상상에 빠져 스스로를 카타리 Cathari 파라고 부르는 특이한 이단자들의 지도자가 되었다. 이 문제로 대단히 큰 규모의 종교회의가 열렸다. 그 회의에는 60명의 감독들, 그리고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장로들과 집사들이 참석했다. 나머지 지방의 목회자들은 각기 자기 지방에서 별도로 어떤 조처를 내려야 할지 의논했다. 그리하여 다음과 같은 법령이 통과되었다. “노바투스, 노바투스와 연합한 오만한 사람들, 그리고 그의 무자비하고 지극히 비인간적인 견해를 채택하기로 작정한 사람들을 그들은 교회로부터 멀어진 사람들로 간주했다. 그러나 우리는 과거 재난을 초래했던 형제들은 회개라는 치료책으로 치유하여 주어야 한다” 또한 로마교회의 감독 코르넬리우스 Cornelius 가 안티오크 교회의 감독 파비우스에게 보낸 서신들이 있는데, 이 서신들은 로마 종교회의의 의사록을 밝히고 있으며 또한 이탈리아와 아프리카와 로마 지역의 모든 의견들도 기록하고 있다. 또 키프리안 Cyprian 과 아프리카에서 그의 동료 감독들이 로마어로 쓴 서신들도 있다. 이 서신을 보면 그들도 역시 가혹한 시련에 굴복하여 배교했던 신자들을 구제해야 할 필요성, 그리고 이 이단의 창시자와 그의 무리들을 파문하는 일의 타당성에 동의하고 있다. 이 서신들에는 노바투스의 행동에 관해서 기록한 내용 외에도 코르넬리우스가 그 종교회의의 법령들에 관해 기록한 서신도 첨부되어 있다. 우리는 그 중에서 몇 부분을 발췌함으로서 본서를 읽는 사람들이 그에 관련된 상황을 보다 쉽게 이해하게 하고자 한다. 코르넬리우스는 파비우스에게 노바투스의 성품에 대해 다음과 같이 알려 주었다. p362
“그는 박해 때에, 비겁하게도 자신의 생명을 사랑하여 자신이 교회의 장로였음을 부인했습니다. 집사들은 그에게 숨어있는 은신처에서 나아가 형제들을 위로하라고 권면하고 요구했습니다. 그는 장로로서 위안을 요구하는 형제들을 도울 권한이 있었고 마땅히 그리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집사들의 권면을 전혀 따르지 않고 화를 내며 그들을 떠났습니다. 그는 자신은 다른 철학을 사모하는 사람이므로 더 이상 장로가 되기를 원치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코르넬리우스는 그 뒤에 이 사람의 모든 어리석은 행위 중에서 가장 악한 행위를 말했다. “그는 성찬을 만들어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면서 그 불쌍한 사람들에게 축복을 해주지는 않고 오히려 맹세하라고 강요했습니다. 그는 성찬을 받는 사람의 두 손을 꼭 잡고 그가 다음과 같이 말할 때까지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두고 내게 맹세하시오. 당신이 결코 나를 버리지 않으며 코르넬리우스에게 돌아가지 않겠다고 맹세하시오’ 이 가련한 사람은 먼저 스스로를 저주하고 나서야 성찬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떡을 먹은 뒤 아멘이라고 말하는 대신 ‘나는 결코 코르넬리우스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라고 말했다” 그는 이 서신의 말미에 로마로 와서 노바투스의 선도할 수 없는 경향을 버린 감독들의 목록을 제시했으며, 동시에 이들이 다스리는 교회의 이름도 밝혔다. 그는 또 로마 종교회의에 참석하지는 않았지만 서신을 통해 이 종교회의의 결정에 동의한 감독들도 언급하면서 그 서신을 쓴 도시와 이름을 밝혔다. 이상은 안티오크의 감독 파비우스에게 보낸 코르넬리우스의 서신에 기록된 내용이다. p366
제44장 세라피온에 대한 디오니시우스의 보고
제45장 디오니시우스가 노바투스에게 보낸 서신
제46장 디오니시우스가 쓴 다른 서신들
제7권
우리는 본서의 제7권을 저술함에 있어서 알렉산드리아의 감독 디오니시우스가 남긴 서신 속에 설명된 당대의 특별한 상황을 발췌함으로써 큰 유익을 얻었다.
제1장 데시우스와 갈루스의 사악함
데시우스 Decius 는 제국을 통치한지 2년이 못 되어 아들들과 함께 살해되었고 갈루스 Gallus 가 그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되었다. 이 시기에 오리겐이 70세로 사망했다. 디오니시우스는 헤르마몬 Hermamon 에게 보낸 서신에서 갈루스 Gallus 에 관해 다음과 같이 평했다. “그러나 갈루스는 데시우스의 사악함을 깨닫지 못했으며 또 그를 멸망케 했던 것이 무엇인지 예견하지 못했으므로, 그도 역시 자기 눈앞에 놓인 동일한 걸림돌에 걸리고 말았다. 그는 자신의 통치가 성공적으로 진척되고 모든 일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이어져나가게 되자 거룩한 사람들을 박해했다. 그러나 성도들은 하나님께 그의 평화와 안전을 빌었다. 그런고로 그는 성도들을 박해한 것은 물론이요, 그들이 자신을 위해 드린 기도까지도 박해했다” p372
제2장 당시 로마교회의 감독들
코르넬리우스 Cornelius 는 약 3년간 로마교회의 감독으로 활동했고 루시우스 Lucius 가 그의 뒤를 이어 감독이 되었다. 그러나 루시우스는 겨우 8개월 동안 감독으로 활동하다가 사망하면서 감독직을 스테판 Stephen 에게 넘겨주었다. 디오니시우스는 이 스테판에게 세례에 관한 첫 번째 편지를 보냈다. 왜냐하면 당시 그곳에서는 이단에 빠졌다가 돌아온 사람들이 세례를 받음으로서 정결케 되느냐는 문제로 상당한 논쟁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람들에 관해 사용되어 온 옛 관습에 의하면 그들은 다만 안수하고 기도만 해야 했다. p373
제3장 키프리안 및 그와 관련된 감독들은 이단적 오류로부터 돌아온 사람들은 다시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카르타고 교회의 감독이었던 키프리안 Cyprian 은 한 번 이단에 빠졌던 사람들은 세례를 받아 자신들의 오류로부터 정결케 되기 전에는 어떤 조건으로도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스테판 Stephen 은 예부터 사용되어 온 전승과 어긋나게 새로운 방법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으므로 이 일로 인해 크게 분노했다. p373 호겐 : 키프리안이 재세례파의 시조인 듯하다. 재세례파는 이렇게 초대교회 시절부터 논란이 있던 무리들로서 칼빈, 츠빙글리 등도 그들을 이단으로 간주했다. 재세례파의 논리대로라면, 재세례를 받기 전에 악했다면, 재세례 후부터 죽을 때까지는 과연 깨끗한 삶을 살겠는가? 즉, 회개할 일이 없겠느냐는 말이다. 이 점에서 모순이 생긴다. 물론 불가능하다. 이들 논리대로라면 죄 지을 때마다 세례를 다시 받아야 될 것이다. 하늘로 올라가기 전에는 이 땅에서 아무리 바울 같이 살아도 우리는 모두 죄인임을 직시해야 한다.
제4장 디오니시우스가 이 주제로 보낸 서신
그리하여 디오니시우스는 이 문제에 관해 편지로 그와 많은 논쟁을 한 뒤 마지막으로 이제 박해가 진정되었으므로 모든 교회는 노바투스가 고안해 낸 것들을 반대하고 서로의 평화를 회복해야 한다고 밝혔으니, 그 내용은 다음 장에 기록한다. p374
제5장 박해 뒤에 찾은 평화
“형제여, 나는 과거에 분열되었던 동방의 교회들이 다시 연합했음을 당신이 알길 원합니다. 각처의 감독들은 모두 화합하여 예상 외로 확보된 평화를 크게 기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안티오크의 데메트리아누스 Demetrianus, 가이사랴의 데옥티스푸스 Theoctistus, 알렉산더가 사망한 뒤 감독이 된 일리아 AElia 의 마자바네스 Mazabanes, 두로의 마리누스 Marinus, 텔리미드레스 Thelymidres 가 사망한 뒤 감독이 된 라오디케아의 헬리오도루스 Heliodorus, 타르수스 Tarsus (다소) 의 헬레누스 Helenus, 그리고 킬리키아의 모든 교회들, 피르밀리아누스 Firmilianus, 모든 카파도키아의 감독들입니다. 나는 편지가 너무 장황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이들 중 보다 유명한 사람들만 이름을 들어 언급했습니다. 당신이 여러 번 생필품을 공급해 주었고 편지를 보낸 일이 있던 시리아와 아라비아의 모든 지방들, 그리고 메소포타미아, 폰투스, 비디니아 Bithynia 등 모든 지역의 형제들이 지금 퍼져있는 일치와 형제애로 인해 기뻐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다” 이상은 디오니시우스의 말이었다. 한편 스테판은 2년간 감독으로 있었고 지스투스 Xystus 가 그의 후임 감독이 되었다. 디오니시우스는 스테판에게 세례에 관한 두 번째 서신을 보냈고, 동시에 스테판과 나머지 감독들이 내린 결정과 의견들을 밝히면서 스테판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했다. p374
“그는 이전에 헬레누스와 피르밀리아누스, 킬리키아와 카파도키아와 갈라디아와 인접한 모든 국가에서 온 사람들과는 이 문제에 관해 의논하지 않겠다고 편지를 쓴 적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말에 따르면 그들은 이단자들에게 다시 세례를 주었기 때문입니다. 당신께서 부디 이 일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시길 바랍니다. 내가 확인한 바와 같이 실제로 감독들의 종교회의에서는 개종하여 교회로 돌아온 이단자들은 먼저 교육을 받고 그 후에 자신의 과거의 불결한 누룩을 씻어 정결케 되어야 한다는 법령을 통과시켰습니다. 나는 이 모든 일에 관해 그들에게 간청하는 서신들을 보냈습니다” 그는 다른 일들을 이야기한 뒤 다시 다음과 같이 계속했다. “나는 이전에 스테판과 같은 의견을 가지고 있었고, 이문제로 인해 나에게 편지를 보낸 우리의 사랑하는 디오니시우스와 필레몬 Philemon 장로들에게도 편지를 썼습니다. 나는 과거에는 간단하게 편지를 썼지만 이번에는 보다 충분한 내용의 편지를 썼습니다” 이상은 지금 언급되고 있는 논쟁에 관한 기사들이었다. p375
제6장 사벨리우스의 이단
제7장 이단자들의 가증스러운 오신, 디오니시우스의 거룩한 환상, 그리고 그에게 주어진 교회의 법규
제8장 노바투스의 이단
제9장 이단자들의 세례
제10장 발레리안 황제의 박해
갈루스 Gallus 는 2년이 못 되어 제거되고, 발레리안 Valerian 이 아들 갈리에누스 Gallienus 와 함께 황제가 되었다. 디오니시우스가 그에 관해 뭐라고 말했는지는 그가 헤르맘몬 Hermammon 에게 보낸 서신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는 이 서신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요한에게 계시가 주어졌고 또 그에게 입이 주어져 위대한 일들과 모독적인 것을 말했다. 또 그에게는 권세와 42개월이 주어졌다. 이 두 가지가 발레리안에게서 일어났다는 것, 특히 이 일이 있기 전 그의 상태, 즉 그가 신자들에게 얼마나 친근하고 친절했는지 고려해보면 참으로 놀랍다. 그 이전의 황제들 중에는 신자들에게 호감을 가진 자애로운 황제가 없었으며, 통치 초기부터 그처럼 지나칠 정도로 공손하고 친근하게 그들을 받아들인 황제도 없었다. 그의 집은 모두 경건한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의 집은 실제로 주님의 회중이었다. 그런데 이집트 마술사들의 우두머리이며 지도자인 마크리아누스 Macrianus 는 황제에게 이 도를 버리라고 권면했으며, 순결하고 거룩한 사람들은 자기들의 악하고 가증한 마술의 적이며 장애물인고로 그들을 박해하고 살해하라고 권면했다. 왜냐하면 그때까지도 자신의 존재에 의해서, 또는 보기만 하거나 숨 쉬고 말하는 것만으로도 악마들의 계교를 사라지게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황제에게 입회의식과 마법을 배우고, 저주스러운 희생제사를 지내고, 불쌍한 어린이들을 죽이고, 불쌍한 부모들의 어린이들을 희생제물로 드리며 갓 태어난 어린아이들의 창자를 찾으며, 하나님의 피조물들을 훼손하고 해체하라고 제안했다. 그들은 이렇게 함으로서 큰 복을 얻는다고 여겼다” p382
그는 여기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덧붙였다. “마크리아누스는 자신이 바라던 정부에 접근하게 된 데 대한 보상을 그들에게 돌려주었다. 그는 이전에는 자신의 신분에 따라 황제의 청지기, 세입징수장관이라고 불렸다. 그러나 이제는 공익을 위한 것이나 합리적인 것은 전혀 선포하지 않고 다만 ‘자신의 마음대로 예언하며 공익을 보지 않는 자는 화가 있도다’ 라고 말하는 예언적 저주만을 행했다. 그는 온 세상을 규제하시는 섭리를 깨닫지 못했고 또 모든 사람 앞에서 모두를 통해 모두에게 임할 그의 심판을 예상하지 못했다. 그런고로 그는 교회의 원수가 되었다. 그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부터 벗어나 자신의 구원으로부터 멀리 도망쳤다. 그는 이렇게 행함으로서 자기 이름이 지닌 특별한 의미를 그대로 나타냈다” (마크리아누스는 ‘긴’ 이라는 의미의 헬라어 μαχρσς 또는 ‘멀리’ 라는 의미의 헬라어 μαχραν 에서 파생되었다). p382 그는 또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발레리안은 이 사람의 요구대로 이러한 조처들을 행해 이사야가 말한바 ‘그들은 자기의 길을 택하며 그들의 마음은 가증한 것을 기뻐한즉 나도 유혹을 그들에게 택하여 주며 그들이 범한 죄대로 갚아주리라’ 는 말씀에 따른 책망과 모욕을 받게 되었다. 아무 공로도 없으면서 정권을 소유하길 바랐으며 황제의 제복을 감당할 수도 없었던 마크리아누스는 자기의 두 아들로 하여금 그것들, 즉 부친의 죄악을 떠맡게 했다. 하나님께서 그러한 사람들에 관해 하신 말씀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리라’ 고 하신 말씀이 증명되었다. 그는 자신이 충족시키지도 못할 기쁨을 위해 자기의 악한 정욕들을 자녀들의 머리에 쌓아두었으며, 하나님께 대한 자신의 사악함과 증오를 그들 위에 휩쓸어다 놓은 것이다” 이상은 디오니시우스가 발레리안에 대해 기록한 이야기였다. p383
제11장 디오니시우스와 이집트 사람들이 겪은 고난
발레리안의 치하에서 지극히 격렬하게 번져간 박해, 그리고 디오니시우스와 여러 사람들이 높으신 하나님을 향한 신앙심 때문에 겪어야 했던 고난은 디오니시우스가 게르마누스 Germanus 에게 보낸 서신에 잘 나타나 있다. 게르마누스는 디오니시우스와 같은 시대의 인물로서 디오니시우스를 중상하려 했던 감독들 중의 하나이다. 디오니시우스가 쓴 서신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나는 우리들에 관한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를 말하라는 강요를 받았을 때에 내가 대단히 어리석고 무감각하게 될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나 왕의 비밀들을 숨기는 것이 옳으며 하나님의 사역을 밝히는 것이 영광된 일이라고 기록되었으므로 나는 게르마누스의 폭력에 맞서기로 했다. 나는 혼자가 아니라 동료 장로인 막시무스 Maximus, 그리고 집사인 파우스투스 Faustus 와 유세비우스 Eusebius (본서의 저자 아님) 와 캐레몬 Chaeremon, 또 로마에서 온 형제 한 사람과 함께 이밀리아누스 AEmilianus 에게로 갔다. 이밀리아누스는 처음에는 나에게 말도 하지 않았고, 불필요하다고 하여 회의도 개최하지 않았다. 그는 결코 가장 중요한 것을 목표로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내가 다른 사람들을 모으는 것에 관심이 없었고 다만 우리가 기독교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 나에게 신앙을 포기하라고 명령했다. 만일 내가 마음을 바꾸면 다른 사람들도 나의 본을 따를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아무런 이유도 대지 않고 많은 말도 하지 않고 다만 ‘우리는 사람보다는 하나님께 복종해야 합니다’ 라고 대답했다. 나는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을 바꿀 수 없으며 결코 기독교인이 되길 포기할 수 없다고 분명히 증거했다. 이 말을 들은 그는 우리에게 사막 근처에 있는 케프로 Cephro 라는 마을로 가라고 명령했다” p384
“그러나 그 때 우리가 했던 말에 귀를 기울여보라. 우리가 한 말은 기록되었다. 이밀리아누스 장관은 심문을 받는 디오니시우스와 파우스투스, 막시무스, 마르셀루스, 캐레몬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우리 군주의 자비하심에 관해 당신들과 개인적으로 논해왔습니다. 당신들도 역시 왕의 자비하심을 경험했습니다. 그들은 당신들이 올바른 길로 돌아서서 그들의 정부를 보존해 준 신들을 예배하며 비자연적인 관습들을 버린다면 당신들의 목숨을 구원할 기회를 주겠다고 했습니다. 이것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하겠습니까? 나는 당신들이 그들의 친절함에 감사치 않으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당신들에게 보다 좋은 동기를 주었기 때문입니다’ 디오니시우스가 대답했다. ‘모든 사람이 모든 신들을 섬기지는 않습니다. 각 민족마다 자기들이 신이라고 여기는 대상을 섬기고 있습니다. 우리는 만물의 창조주이신 유일하신 한 분 하나님을 섬기고 있습니다. 이분이야말로 훌륭하고 거룩한 황제 발레리안과 칼리에누스에게 이 나라를 맡기신 분입니다. 우리는 그분을 예배하고 찬양하며, 그들의 통치가 굳건하고 흔들리지 않고 계속되기를 그분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밀리아누스 장관이 다시 말했다. ‘그러나 만일 이 한 분 하나님이 신이라면 다른 자연신들과 함께 이 한 분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을 누가 막고 있습니까? 당신들은 그 신들과 모두가 신이라고 알고 있는 신들을 섬기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디오니시우스는 ‘우리는 다른 신은 섬기지 않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p385
이밀리아누스 장관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신들이 우리 황제의 자비하심에 대해 감사치 않으며 무관심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당신들은 이 도시에 머물러 있을 수 없습니다. 당신들은 리비아의 케프로라는 지방으로 추방될 것입니다. 나는 우리 황제의 명령에 따라 그곳을 택했습니다. 그러나 당신들이나 그 누구도 회의를 개최하거나 당신들이 공동침실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의 매장지를 공동침실 Χοιμητηρίχ 이라고 불렀다. 왜냐하면 복음적 관점에서 볼 때 죽음은 일종의 잠이었기 때문이다. 기독교인들은 특히 순교자들의 묘지에 자주 드나들었다. 호겐 : 이것은 카타콤베일 것이다) 이라고 부르는 곳에 들어가는 것은 허락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만일 내가 명령한 곳으로 가지 않았거나, 혹은 어느 모임에 참가한 것이 발각된다면 그 사람은 위험을 각오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그에 합당한 벌을 내리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당신들에게 명령한 곳으로 가십시오’ 그는 내가 병이 들었는데도 하루의 여유도 주지 않고 나를 그곳으로 가게 했다. 그러니 나에게 어찌 회의를 개최하거나 개최하지 않을 틈이 있었겠는가?” p385
제12장 팔레스틴의 가이사랴에서 순교한 사람들
제13장 갈리에누스 시대에 찾아온 평화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발레리안은 야만인들에게 사로잡혀 노예가 되었다. 홀로 제국을 지배하게 된 그의 아들 갈리에누스 Gallienus 는 권력을 행사하는데 있어서 관용을 베풀고자 했다. 그리하여 그는 칙령을 내려 기독교에 대한 박해를 억제했다. 그 칙령에서 그는 말씀의 사역자들은 자유로이 자신의 직무에 따른 의무들을 수행해도 좋다고 명령했으니 그 칙령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푸블리우스 리시니우스 갈리에누스 피우스 펠릭스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디오니시우스와 핀나 Pinna 와 데메트리우스와 여러 감독들에게 명령한다. 나에게 주어진 특권에 따라 나는 온 세상에 다음과 같이 선포하도록 명한다. 즉 모든 신자들은 자기들의 종교적 은신처로 떠나도 좋다. 그리고 당신들도 나의 칙령 사본을 이용하여 아무도 당신들을 괴롭히지 못하게 하라. 지금 당신들에게 허용된 이 자유는 이미 오래 전에 내가 허락한 것이다. 그러므로 국사의 최고 경영을 맡고 있는 아우렐리우스 시레니우스 Aurelius Cyrenius 는 내가 보낸 칙령을 준수할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라틴어 원문에서 번역한 것이다. 그는 또 하나의 칙령을 다른 감독들에게 내렸는데, 그것은 소위 공동묘지 (호겐 : 카타콤베) 라고 부르는 곳을 다시 이용해도 좋다는 내용이었다. p391
제14장 이 시대에 활동한 감독들
이 시기에 로마에서는 아직도 지스투스 Zystus 가 감독직을 맡고 있었다. 그러나 안티오크에서는 파비우스의 후임으로 데메트리아누스 Demetrianus 가 감독이 되었고, 카파도키아의 가이사랴에서는 피르밀리아누스 Firmilianus 가 감독으로 있었다. 그리고 폰투스에 있는 교회들은 그레고리 Gregory 와 그의 동생 아테노도로스 Athenedorus 가 감독으로 있었는데 이들 두 사람은 오리겐의 절친한 친구들이었다. 한편 팔레스틴의 가이사랴에서는 데옥티스투스 Theoctistus 가 사망한 뒤 돔누스 Domnus 가 감독직을 맡았으나 그는 그다지 오래 살지 못했으므로 우리와 동시대 사람인 데오텍누스 Theotecnus 가 감독이 되었다. 그도 역시 오리겐에게서 배운 사람이다. 예룻살렘에서는 마자바누스 Mazabanus 가 사망하고 히메내우스 Hymenaeus 가 감독이 되었다. 그는 우리 시대에 여러 해 동안 많은 존경을 받았다. p392
제15장 마리누스 Marinus 가 가이사랴에서 순교하다
이처럼 모든 지역에서 교회가 평화를 되찾고 있었던 이 시기에 팔레스틴의 가이사랴에 마리누스 Marinus 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는 군인으로서 군대에서 훈장을 받았으며, 가문도 좋고 부유한 사람이었는데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고백했기 때문에 참수되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로마인들 사회에는 ‘포도’ 라는 훈장이 있었는데, 그것을 받은 사람들은 백부장이라고 불렸다. 그런데 그 자리 하나가 공석이 되었으므로 마리누스는 서열에 따라 그 직위로 승진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가 이 직위를 얻게 되었을 때 어떤 사람이 판사에게 나아가 그의 훈장수여를 반대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즉 그는 기독교인으로서 황제들에게 제사 지내기를 거부하고 있으므로 로마인의 훈장을 받는 것이 옳지 않으며, 따라서 자신이 그 직책을 맡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듣고 진노한 판사 아캐우스 A촘뎐 는 먼저 마리누스의 의견을 묻기 시작했다. 그가 한결같이 기독교인이라고 확언하는 것을 보고서 그에게 반성하라고 세 시간의 여유를 주었다. 그런데 그가 법정에서 퇴정하자마자 그곳의 감독 데오텍누스가 그에게 와서 그와 대화하며 그의 손을 잡고 교회로 데려갔다. 그는 마리누스를 제단 옆에 데려다 놓고는 자신의 외투를 조금 들어 올려 자기 옆구리에 차고 있는 칼을 가리켰다. 동시에 그의 앞에 거룩한 복음서를 갖다놓고는 둘 중에서 원하는 것을 선택하라고 말했다. 마리누스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손을 내밀어 성경을 잡았다. 그러자 데오텍누스는 ‘굳세게 붙잡으십시오. 하나님을 굳세게 붙들고 그분에게서 힘을 얻으십시오. 당신이 선택한 것을 얻게 되길 기원합니다. 평안히 가십시오’ 라고 말했다. 마리누스가 그곳에서 돌아오자마자 정리 廷吏 가 법정 앞에서 이미 지정된 시간이 되었음을 선포했다. 마리누스는 다시 심문을 받으면서 위대한 신앙을 나타냈으며 결국 끌려가 순교했다. p393
제16장 아스티리우스 Astyrius
이 시대의 인물 중 아스티리우스 Astyrius 의 경건한 신앙에 대해서도 언급할 필요가 있다. 그는 원로원의 지위에 있는 로마인으로서 황제들의 총애를 받고 있었으며, 또 고귀한 출생과 부유하기로 모두에게 잘 알려져 있었다. 그는 순교자 마리누스가 처형되는 곳에 있다가 그의 시신을 인수한 뒤 화려하고 값비싼 옷을 입은 자기 어깨에 그 시신을 메고 가서 장중한 장례식을 치렀다. 그의 친구들 중에 지금까지 생존해 있는 친구들은 그에 대해 다른 여러 가지 사실들도 이야기했다. p393
제17장 파네아스에 나타난 주님의 이적
제18장 혈우병에 걸린 여인이 세운 조상 彫像
제19장 야고보가 맡았던 감독직
야고보는 최초로 우리 주님에게서 예루살렘의 감독직을 받았다. 성경에서는 그를 그리스도의 형제라고 부르고 있다. 이 직위는 지금까지 보존되어 왔으며 그 직위를 이어받은 형제들은 그것을 훌륭히 수행해왔다. 옛사람들과 우리 시대의 사람들은 이 거룩한 사람들의 경건함으로 인해 그들에게 참으로 큰 존경심을 나타냈으며 지금도 나타내고 있다. p395
제20장 절기에 관한 디오니시우스의 서신들 : 그는 그 서신에서 유월절에 관한 규범을 제시했다
제21장 알렉산드리아에서 발생한 사건들
간신히 평화가 깃들기 시작했으므로 디오니시우스는 다시 알렉산드리아로 돌아왔다. 그러나 다시 폭동과 전쟁이 일어났으므로 그가 여러 무리로 나뉜 형제들을 모두 다스리는 일은 불가능했다. 그는 이집트의 감독 히에락스 Hierax 에게 유월절에 관한 편지를 썼는데, 그 편지에서 그는 당시 알렉산드리아에서 발생한 폭동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내가 당황하여 자신의 생명을 염두에 두지 못하며, 또 확신을 가지고 있지 못하고 있으므로 당연히 멀리 떨어져 있는 형제들에게 편지를 쓰기가 어렵습니다. 나는 그 교회에 있는 사랑하는 형제들과 내 친구들에게 편지를 보내야 할 필요를 크게 느끼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편지를 어떻게 보내야 할지 방법을 알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알렉산드리아에서 알렉산드리아로 가기보다 이 관구의 경계를 넘어 동부에서 서부로 여행하는 것이 오히려 쉬울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도시의 중심부는 이스라엘 민족이 두 세대에 걸쳐 횡단한 방대하고 흔적도 없는 사막보다 더 황량하고 통과하기가 어렵습니다. 부드럽고 조용한 우리의 항구들은 마치 물길이 생겨 이스라엘 백성을 통과시켰으나 이집트인들을 삼켜버린 홍해처럼 되었습니다. 때로 그 안에서 자행되는 학살을 볼 때 그것들은 마치 홍해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 도시를 흐르는 강은 때로는 말라붙은 사막보다 더 건조해 보이고, 이스라엘 백성이 여행하면서 심한 갈증으로 인해 모세에게 소리를 쳤기 때문에 놀라운 일을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깨진 바위에서 물이 흘러나오게 했던 여행보다 더 지치게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다가도 때때로 그 강은 넘쳐흘러 주위의 모든 지방에까지 범람했고 도로와 들판도 위협했습니다. 그것은 마치 노아시대의 홍수 같았습니다. 그것은 피와 학살, 그리고 끊임없이 계속적으로 물에 빠져 죽임당한 사람들로 인해 오염되어 있었습니다. 마치 과거 모세가 파라오 앞에서 강을 피와 더러운 물질로 변하게 한 것과 같습니다. p397
이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의아해하며 이 계속적인 재난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이처럼 해로운 질병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저 잡다한 전염병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이처럼 다양하고 많은 인간의 생명을 파괴하는 것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 몰라 당황하고 있습니다. 이 강대한 도시에는 굳세고 활기찬 장년은 찾아볼 수 없고 말 못하는 어린아이와 늙고 노쇠한 이들만 남아 있습니다. 그들은 이러한 파괴의 와중에서 인구가 감소해가고 계속해 허약해지는 것 (노인과 어린이만 남게 된 것) 을 보면서도 전혀 놀라지 않고 있습니다” p398
제22장 페스트의 창궐
이런 일들이 있은 뒤 전쟁에 뒤이어 페스트가 창궐했다. 명절이 임박했으므로 그는 다시 형제들에게 서신을 띄웠다. 그는 이 서신 속에서 이 불행에 따른 큰 불상사들을 설명했다. “사실 다른 사람들에게 있어서 지금은 명절로 지키기에 적당한 시기가 아닙니다. 지금이나 다른 어느 때나 모두 그들에게 축제의 시기가 아니라 슬픔의 때입니다. 아무리 쾌활한 사람이라도 그렇게 생각할 때는 아닙니다. 지금 온 세상은 눈물로 뒤덮여 있고 모두가 슬퍼하고 있습니다. 이미 많은 사람이 죽었고 지금도 죽어가고 있기 때문에 비탄의 소리가 매일같이 온 도시에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성경에 이집트의 장자들의 죽음에 대해 기록된 것 같은 큰 슬픔이 지금 발생했습니다. 지금 이곳에서는 집집마다 사람이 죽지 않은 집이 없습니다. 이것으로 그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먼젓번에도 많은 무서운 재난들이 발생했었습니다. 처음에는 그들이 우리를 추방했습니다. 우리는 고독하게 되었고 유배되었으며 모든 사람에게서 박해를 받고 죽음을 당했지만 여전히 명절을 지켰습니다. 특별한 불행으로 유명해진 곳에는 어디나 우리의 엄숙함으로 유명해진 장소 - 광장, 사막, 배, 여관, 감옥 - 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즐거운 명절은 지금 하늘에서 잔치를 베풀고 있는 완전한 순교자들에 의해 지켜졌습니다. 이 일이 있은 뒤, 전쟁과 기근이 발생했습니다. 이것은 이교도들과 우리가 함께 당했으나, 그들이 우리에게 가한 재난들은 우리만 홀로 겪었습니다. 우리는 또 그들이 우리에게 가한 일들의 결과를 경험했으며, 여러 가지 고난을 당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만 주신 평화 속에서 즐거워했습니다. 그리고 그들과 우리가 모두 잠시 여유를 얻게 되었을 때 페스트의 공격이 임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그들에게는 그 무엇보다 두렵고 무엇보다 고통스러운 것이었으며, 그들의 역사가들이 말하는 바와 같이 모든 희망을 초월하는 재난이었지만 우리는 결코 그러한 특성을 갖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다른 사건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를 연단하고 훈련하는 수업에 불과했습니다. 그것은 이교도들을 크게 공격했으나 결코 우리에게 임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p400
그는 조금 뒤에 다음과 같이 계속했다. “실제로 대부분의 우리 형제들은 넘치도록 큰 사랑과 형제애를 발휘해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않고 서로를 의지하며 끊임없이 병자를 돌아보았고,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계속해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했습니다. 형제들은 그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치료했으며, 그들과 함께 지극히 기분 좋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과 이웃에게서 그 병에 전염되었으면서도 자원하여 환자들의 입에 음식을 넣어줌으로써 자신의 고통을 자초했습니다. 많은 형제들이 다른 사람들을 치료하고 건강하게 해주고는 자기들은 죽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죽음을 자초했으며, 전에는 하나의 공치사이거나 형식에 불과한 것처럼 보이는 흔해빠진 표현을 실증했습니다. 그들은 실제로 자신의 죽음 속에서 만물의 찌끼가 되었습니다. 우리 형제들 중에 가장 선한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들 중에는 장로도 있었고 집사도 있었으며 크게 칭찬받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경건함과 열렬한 신앙을 수반한 죽음은 조금도 순교에 못지않은 죽음이었습니다. 그들은 성도들의 시신을 맨손으로 품에 안아다가 눈을 깨끗이 해주고 입을 닫아주었으며, 그들을 어깨에 지고 가서 사지를 가다듬고 포옹했고, 그들을 단정히 씻기고 수의를 입혔습니다. 그리고 곧 자기 자신도 같은 의식을 제공받게 되었습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앞서간 사람들의 뒤를 좇았습니다. 그러나 이교도들은 이와 반대로 행했습니다. 그들은 병들어 앓기 시작한 사람들을 쫓아냈으며 사랑하는 친구들도 멀리했습니다. 그들은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은 사람을 길에 내다버렸고, 죽은 자들을 매장해 주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해서든 죽음을 피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예방하고 조심해도 그것을 피할 수는 없었습니다” 이 서신을 쓴 뒤, 그 도시에 평화가 깃들게 되었을 때, 그는 이집트의 형제들에게 유월절 서신을 띄웠으며, 이밖에도 많은 편지를 썼다. 그중에 지금까지 남아있는 것으로 안식일에 관한 편지와 예배에 대한 편지가 있다. 그는 헤르맘몬 Hermammon 에게도 편지를 보냈고, 이집트에 있는 형제들에게도 편지를 보냈다. 그는 데시우스 Decius 와 그의 후계자들의 사악함에 대해 묘사한 뒤 갈리에누스 Gallienus 가 베푼 선정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p401
제23장 갈리에누스의 통치
갈리에누스 Gallienus 에 관해 기록한 디오니시우스의 서신을 인용해보면,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마크리아누스 Macrianus 는 전자를 배반하고 후자와 함께 전쟁을 일으켰는데, 갑자기 온가족과 함께 사망했다. 그러나 갈리에누스 Gallienus 는 황제로 선포되었다. 그는 선왕이면서 동시에 구왕으로서 그들보다 먼저부터 있었으며 그들보다 오래 살았다. 선지자 이사야는 말하길 ‘보라, 처음부터 있던 것들이 이르렀으며 이제 일어날 것은 새것이 되리라. 구름이 햇빛을 가려 잠시 그 그림자로 햇빛을 흐리게 하지만 구름이 지나가고 나면 이전에 떴던 태양이 다시 떠오르는 것 같으리라’ 고 했다. 그러므로 스스로 보다 높은 권력을 갈망하여 갈레리누스의 세력에까지 이르려했던 마크리아누스는 더 이상 존재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갈레리누스는 과거와 마찬가지로 공정했으며, 그의 나라는 마치 늙어 연약해지지 않으며 이전의 더러움을 깨끗이 씻은 듯 일어나 더욱 융성한 양상을 취했다. 그리하여 먼곳에서도 그것을 보고 들을 수 있게 되었고 그 세력이 사방으로 확장되었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나서 자신이 이 서신을 기록한 시기를 밝혔다. “나에게는 또 다시 우리 황제의 통치를 관찰할 계기가 생겼다. 과거에 존경을 받고 유명했던 불경한 사람들이 곧 이름도 없는 사람이 된 것이다. 그러나 더욱 거룩하고 경건한 황제는 7년을 더 살아 이제 황제가 된지 9년이 되었으며, 우리는 이 해에 명절을 지키려하고 있다” p402
제24장 네포스 Nepos 와 그의 분파
제25장 요한계시록
제26장 디오니시우스의 서신들
제27장 사모사타의 바울 : 그가 안티오크에 소개한 이단
제28장 당시의 훌륭한 감독들
제29장 한 때 소피스트였던 장로 말키온 Malchion 의 논박을 받은 바울은 해임되었다
제30장 바울을 대적한 공의회의 서신
결국 바울 (안티오크 사모사타의 바울. 사도 바울 아님) 은 참된 신앙과 감독직에서 떨어져 나갔고,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돔누스가 안티오크 교회의 감독이 되었다. 그러나 바울은 교회건물에서 떠나지 않으려 했으며 아우렐리안 Aurelian 황제에게 항소했다. 황제는 그 문제에 관해 지극히 공정한 판결을 내려 그 건물은 이탈리아와 로마의 기독교인 감독들이 인정하는 사람들에게 양도되어야 한다고 명령했다. 그리하여 이 사람은 대단히 불명예스럽게 교회에서 쫓겨났으며, 아울러 세속 정부로부터도 쫓겨났다. 당시 아우렐리안 황제는 우리에게 이렇게 우호적인 경향을 나타내보였다. 그러나 그는 제국을 통치하면서 점차 우리에 대해 다른 생각을 품게 되었고 아첨자들의 영향을 받아 우리를 박해하기에 이르렀다는 소문은 도처에 퍼져 있었다. 그러나 바야흐로 그가 기독교 박해를 허락하는 칙령에 서명하려는 찰나 하나님의 복수가 그에게 임해 그의 계획을 억제하셨고, 하나님의 지고한 손이 아니고서는 세상 통치자들에게 그리스도의 교회를 대적할 특권을 부여하지 않는다는 것을 훌륭하게 증거했다. 그리고 하늘의 명령은 우리를 교정하고 시정해 주기 위해서는 적절하다고 인정되는 때에 박해를 허락한다는 것도 증거했다. 아우렐리안이 6년 동안 통치한 뒤 프로부스 Probus 가 황제가 되어 역시 6년 동안 제국을 다스렸다. 그의 뒤를 이어 카루스 Carus 가 카리아누스 Carianus 와 누메리아누스 Numerianus 와 함께 제국을 다스렸다. 그러나 3년이 못 되어 통치권은 디오클레티안 Diocletian 과 그와 연합한 자들에게 넘어갔다. 그들이 다스리는 시기에 우리 시대의 박해가 시작되었고, 동시에 교회들이 파괴되었다. 이 일이 있기 얼마 전 9년 동안 로마교회의 감독으로 있던 디오니시우스의 뒤를 이어 펠릭스 Felix 가 감독이 되었다. p419
제31장 이 시기에 시작된 이단 마니교
이 시기에 저 미친 사람 μανεις τας φρενας 마네스 Manes 가 나타났다. 그는 그의 이름이 나타내듯이 자기의 악마적인 이단을 위해 왜곡된 이성으로 무장했으며 사탄의 선동을 받아 많은 사람들을 살해했다. 평생 동안 그의 말과 행동은 야만적이었고 그의 본성은 마귀에 사로잡혀 비정상적인 것이었다. 따라서 그는 스스로 그리스도가 되려 했고, 또 자신이 성령과 보혜사라고 선언했으며, 이런 것들로 더불어 미친듯이 크게 자만하고 있었다. 그는 마치 자신이 그리스도인양 자기의 새로운 종교의 동역자로서 12제자를 뽑았다. 그리고 아울러 오래전에 소멸된 수많은 이단들로부터 수집한 거짓되고 불경한 교리들을 꾸며 맞춘 뒤, 마치 치명적인 독과 같은 그것을 가지고 페르시아로부터 이 지방에 이르기까지 휩쓸어 버렸다. 마니교 Manichee 라는 불경한 이름은 오늘날까지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 퍼져 있다. 이것이 이 시대에 이 교리가 싹트게 된 경로이다. p419
제32장 우리 시대의 훌륭한 교회작가들, 그리고 이들 중에서 교회의 파괴 때까지 생존한 사람들
호겐 : 앞으로 나올 이야기는 제8권이다. 그리고 제8권과 제9권 사이에 <순교자들의 책> 이라는 별권 別卷 이 끼어있다. 제8권부터 본격적인 박해의 이야기가 나오므로 그림을 이 부분에 넣었다. 이 그림은 <존 폭스의 순교사화 殉敎史話> 1583년판의 삽화 중 하나이다. 존 폭스 (후배) 의 순교사화 또한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서 받은 핍박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으므로 로마제국과 초대교회의 싸움도 다루고 있지만, 유세비우스 (선배) 의 교회사가 이 부분에서는 더욱 자세히 당시 상황을 전해주고 있다. 그러므로 이 그림은 본서와 어울린다. 그림의 제목은 “성 요한이 요한계시록에서 심혈을 기울여 설명한 ‘마흔 두 달’ The XLII. Months in the Revelation of S. Iohn expended, 예수 그리스도께서 순교한 티베리우스 황제 시대부터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틴 대제에 이르기까지 있었던 핍박” 이다. 크기는 3345x1684px 이므로 그림을 누르면 확대되어 당시 상황을 잘 관찰할 수 있다. 존 폭스의 생전에 그의 순교사화가 총 4번 편집되었는데 (1563년판, 1570년판, 1576년판, 1583년판), 그 중 마지막 버전인 1583년판의 사본을 우리 블로그에서도 만날 수 있다 (원서는 2200 페이지가 넘는 장서이지만 블로그에서는 삽화가 실린 페이지만 요약해서 다루었다). http://blog.naver.com/oyashiki/100149870607
제8권
우리는 이미 제1권부터 제7권 속에서 사도들의 후계자들에 관해 기술한 바 있다.
이제 제8권에서는 피상적인 이야기 이상의 서술을 필요로 하는 우리 시대의 사건들을 기록하는 것이 후대에 유익하리라고 생각된다.
제1장 우리 시대의 박해 이전에 있었던 사건들
제2장 교회의 파괴
이제 거룩한 진리를 증거하는 거룩한 싸움을 요약해 기술하겠다. 디오클레티안 Diocletian 의 통치 19년, 디스트루스 Dystrus 월, 로마력으로는 3월, 주님의 수난절이 임박했을 때에 황제의 칙령이 발표되었다. 그 내용은 교회들을 기초까지 부수고 성경을 불에 태우며 높은 관직에 있는 사람들의 지위를 박탈할 것이며, 자유민일지라도 만일 기독교 신앙을 고수한다면 그의 자유를 박탈하라는 것이었다. 이것이 우리 시대에 우리를 대적하여 발표된 첫째 칙령이었다. 그러나 곧 이어 다른 칙령들이 발표되었는데, 그 내용인즉 온 나라의 모든 성직자들을 감옥에 투옥하고, 어떤 술책을 써서든지 이방신들에게 제사를 지내게 하라는 것이었다. p433
제3장 이 박해 때에 순교한 사람들이 겪은 투쟁
참으로 수많은 교회의 성직자들이 고귀하고 결연한 태도로 지극히 몸서리치는 시련들을 견뎌냈으며 신앙을 위한 훌륭한 투쟁의 본을 보였다. 그러나 또한 영적으로 파괴되고 해이해진 많은 사람들은 싸우기도 전에 겁을 집어먹었으며, 최초의 공격을 받는 순간 자발적으로 굴복했다. 그러나 나머지 사람들은 각기 여러 종류의 고문들에 맞서 싸웠다. 어떤 사람은 막대기로 매질을 당했고, 어떤 이는 몸을 잡아당겨 고통을 주는 고문과 살을 벗기는 고문을 당했다. 어떤 사람은 이러한 고문을 받다가 죽음을 맞았고, 다른 이들은 또 다른 고문을 받았다. 또 사람들로부터 불순하고 가증한 제사를 드리라는 강요를 받은 어떤 신자는 제사를 드리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제사를 드리기나 한 것처럼 석방되었다. 또 어떤 사람은 제단 근처에 가지도 않고 불경한 것에 손도 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들이 그가 제사를 드렸다고 말했기 때문에 묵묵히 비방을 받으며 가버렸다. 또 반죽음의 상태에 있는 사람을 이미 죽은 사람인양 들어 내던지기도 했다. 또 땅에 누워있는 어떤 사람은 발목을 잡혀 여기저기 끌려 다녔으며 제사를 드린 사람들에 포함되어 계산되었다. 그러나 어떤 이는 소리를 치며 제사에 대한 혐오감을 표현했다. 또 어떤 사람은 자신은 기독교인이라고 외쳤고 신앙고백으로 이 유익한 명칭의 훌륭한 모범을 나타냈다. 또 어떤 사람은 자신은 제사를 드린 일이 없으며 앞으로도 드리지 않겠다고 단언했다. 그러나 이들은 바로 이런 일을 위해 예비된 수많은 병사들에 의해 침묵하도록 강요되었다. 병사들은 그들의 얼굴과 뺨을 때리고 난폭하게 몰아냈다. 신앙의 원수들은 유리한 입장을 차지한 것처럼 보이는 것까지도 중요하다고 여겼다. 그러나 이런 일들은 성도들과 맞서 싸우는데 있어서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못했다. 이 성도들에 관해 정확한 기사를 쓰기 위해서는 어떤 묘사로도 충분치 못할 것이다. p434
제4장 도처에서 훌륭한 순교자들이 신앙을 위해 싸우다가 순교의 면류관을 썼다
전반적인 박해가 있던 때뿐만 아니라 그 이전 아직 평화를 누리던 시대에도 많은 사람들이 오직 한 분 하나님만을 인정하는 신앙을 위해 고귀하고 민첩한 본보기를 보였다. 데시우스와 발레리안의 시대가 지난 뒤 이미 권력을 획득하고 있던 디오클레티안은 처음에는 마치 깊은 잠에서 깨어나듯 활동하기 시작하여 은밀하고 눈에 띄지 않게 교회를 공격할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그는 아직 대규모로 우리를 대적하는 공개적인 전쟁을 벌이지 않았고 군대에 속해 있는 사람들에게만 시련을 주었다. 왜냐하면 그는 만일 이렇게 해 자신이 이들을 진압하는데 성공한다면 나머지 신자들도 쉽사리 장악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수많은 군인들이 우주를 창조하셨으며 존귀하신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버리지 않기 위해 기쁜 마음으로 군대를 버리고 민간인으로 돌아갔다. 누구였는지는 모르나 당시의 장군은 군사들을 박해하는 일을 시작하면서 군대에 등록된 사람들을 열병시키고는, 그들에게 만일 자신의 명령에 복종하면 영광을 누리게 될 것이나 반대로 복종치 않으면 이것을 박탈당할 것이니 원하는 대로 선택하라고 말했다. 그러나 수많은 그리스도의 용사들은 주저치 않고 자신이 누리고 있는 표면적인 영광과 위안보다는 그리스도의 이름에 대한 신앙고백을 택했다. 그리고 이들 중에서 몇 사람은 신앙의 절개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지위의 박탈, 심지어는 죽음까지도 감수했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들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이 난폭한 조처들을 교사한 원흉 (디오클레티안 황제) 은 그때까지만 해도 아직 온건한 편이어서 다만 몇 사람의 피를 흘렸을 뿐이다. 아마도 신자들의 수가 막대하다는 것이 그로 하여금 전체를 공격하지 못하고 움츠리게 한 듯하다. 그가 보다 공공연하게 박해하기 시작했을 때 얼마나 많은 훌륭한 사람들이 도시나 시골 등 곳곳에서 그리스도를 위한 순교자가 되었는지는 말할 수조차 없다. p436
제5장 니코메디아 Nicomedia 사건
황제의 칙령이 최초로 발표된 직후의 일이었다. 출신이 훌륭하며 세상에서의 직위도 높아 크게 존경을 받고 있던 사람이 니코메디아에 교회를 박해하는 칙령이 발표되자 거룩한 열정과 뜨거운 믿음으로 인해 분기해 일어나 공개적으로 보게 하기 위해 붙여놓은 그 칙령을 떼어내어 조각조각 찢어버렸다. 이것은 두 명의 카이사르가 그 도시에 있을 때에 행해졌다. 그들 중 한 카이사르는 카이사르들 중에서 가장 서열이 높은 사람이었고, 또 한 명의 카이사르는 제국에서 4번째 지위를 갖고 있었다. 이 사람은 그곳에서 행한 이 행동으로 인해 유명해진 최초의 인물로서 그 대담한 행동에 대한 응분의 처벌을 받으면서도 자신의 영혼이 떠나는 순간까지 마음의 평정을 잃지 않았다. p436
호겐 : 링크하는 포스트 중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개혁” 부분에서부터 콘스탄틴 대제의 출현까지, 이 <유세비우스의 교회사> 제8권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동방 정제 : 디오클레티아누스 - 소아시아, 오리엔스, 폰투스, 이집트 (본부 : 니코메디아) - 은퇴 !!!
동방 부제 : 갈레리우스 - 판노니아, 모이시아, 트라키아 (본부 : 시르미움)
서방 정제 : 막시미아누스 - 이탈리아, 아프리카 (본부 : 밀라노) - 은퇴 !!!
서방 부제 :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 (콘스탄틴 대제의 부친) - 브리타니아, 갈리아, 히스파니아, 비네엔시스 (본부 : 트리어).
305년 5월 1일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막시미아누스는 각각 니코메디아와 밀라노에서 돌연 은퇴를 선언한다.
후임으로는 부제였던 갈레리우스와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가 각각 동방과 서방의 정제로 승격되고 막시미누스 다이아와 세베루스가 부제로 선정되었다.
이로써 제2차 사두정치가 시작되었다. http://blog.naver.com/oyashiki/100180032948
제6장 궁중의 신자들
헬라인들이나 야만인들 사회에서 용감함으로 인해 존경과 찬양을 받는 사람들 중에서도 고귀하고 훌륭한 순교자들이 배출되었다. 예를 들자면 황제의 궁전에 있던 도로테우스 Dorotheus 와 그의 동료들 및 하인들이 있다. 이들은 주인들로부터 지극히 높은 지위를 하사받았고 그들의 친자녀들 못지않은 사랑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신앙을 위해 겪는 질책과 시련이 영광스럽고 사치한 생활보다 훨씬 가치가 있다고 여겼다. 그들은 신앙을 위해 싸우게 되었을 때에 이러한 생활보다는 자신들을 괴롭히기 위해 고안된 여러 종류의 죽음들을 선택했다. 이제 우리는 그 중 한 사람의 종말에 대해 기록하려 한다. 독자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가해진 고난이 어떤 것이었는지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앞서 언급된 도시 (니코메디아) 의 한복판으로 끌려나갔는데 그곳에는 이미 언급했던 황제들이 앉아 있었다. 그는 제사를 드리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거절했으므로 황제는 그의 옷을 벗겨 공중에 매달고 그가 결심을 바꿔 명령대로 할 때까지 온 몸을 막대기로 때리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그의 믿음은 이 모든 고난을 겪으면서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이미 그의 살이 찢어져 뼈가 드러났는데도 그들은 식초에 소금을 섞어 그의 짓이겨진 몸에 부었다. 그런데도 그는 이 고통들을 견뎌냈으므로 그들은 석쇠와 불을 마련했다. 그리고 마치 고기덩이를 굽듯이 그의 육체의 남은 부분들을 불 위에 올려놓았다. 그것도 그의 숨이 단번에 끊어지지 못하게 하려고 한 번에 올려놓지 않고 조금씩 조금씩 올려놓았다. 그를 고문하는 형리들은 이 고통이 끝나 그가 마지막 숨을 쉬게 될 때까지 계속 떠나지 않고 그의 곁에서 자신의 임무를 완수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자기의 뜻을 굽히지 않았고 고문을 받으면서 승리의 일생을 마쳤다. 이 사람은 황실의 하인들 중 하나인 피터 Peter 였다. 그는 자기의 이름에 걸맞는 순교를 한 것이다. p438
그러나 앞으로 간단히 이야기를 진행해 나가면서 우리는 나머지 형제들의 순교도 결코 이보다 뒤지지 않았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도로테우스 Dorotheus, 고르고니우스 Gorgonius 및 많은 제국의 자유민들은 여러 가지 고난을 당한 뒤 교수형에 처해져 하늘나라에서 승리의 상을 쟁취했다. 역시 이 시기에 니코메디아 교회의 감독 안티무스 Antimus 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으로 인해 참수되었고, 그의 주변에 쇄도해 온 수많은 신자들도 역시 그와 함께 순교했다. 그 당시 니코메디아에 있는 황제의 궁전에 원인 모를 화재가 발생했는데 그 화재를 일으킨 장본인이 우리 형제들이라는 거짓 소문이 퍼졌다. 그리하여 황제의 명령에 따라 이곳에서는 모든 경건한 가족들이 집단적으로 살해당했다. 어떤 사람들은 칼에 맞아죽고, 또 어떤 사람은 불에 타죽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남녀 신자들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이 거룩하고도 민첩하게 불 속으로 뛰어들었다고 한다. 또 사람들은 또 한 무리의 신자들을 두꺼운 널빤지에 묶어 깊은 바다에 던져버렸다. 그런데 죽어서 적절한 매장절차를 밟아 땅에 묻힌 황실의 하인들의 법적 주인들은 그들의 시신을 무덤에서 파내어 바다에 던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혹시 사람들이 무덤 속에 있는 그들을 신으로 예배하지 않을까 염려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니코메디아에서 박해가 시작되었던 시기의 상황이었다. 그런데 얼마 후 멜리티나 Melitina 및 다른 지방, 그리고 시리아에서 정부를 전복하려는 사람들이 있었으므로 황제는 칙령을 발해 도처에 있는 모든 교회의 지도자들을 감옥에 가두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 사건들이 있는 뒤의 사태의 추이는 말로 형언할 수 없을 정도이다. 곳곳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투옥되었다. 그리하여 과거에는 살인자와 악한 범죄자들이 갇혔던 감옥이, 감독, 장로, 집사, 낭독자, 구마 驅魔 로 가득 찼기 때문에 범죄자들을 가둘 곳이 없게 되었다. 그리고 먼저의 칙령에 이어 또 하나의 칙령이 발표되었다. 그 칙령은 만일 죄수들이 제사를 드리면 자유를 주지만 저항하는 경우에는 지극히 고통스러운 고문을 받게 하라는 내용이었다. 그 결과 모리타니아 Mauritania, 테바이스 Thebais, 이집트 등 여러 지역에서 신앙을 위해 죽음을 당한 순교자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특히 수많은 이집트의 신자들은 다른 도시나 지방으로 가서 훌륭한 순교자가 되었다. p439
제7장 베니게 (페니키아) 에서 고난 받은 이집트인들
우리는 이미 팔레스틴에서 훌륭한 빛을 발한 사람들을 알고 있으며, 또 두로 Tyre 와 베니게 Phaenice 에서 빛을 발한 사람들도 알고 있다. 그들이 무수한 매를 맞은 일, 그리고 진실로 훌륭한 용사들이 참 신앙을 위해 끝까지 인내한 것을 보고서 놀라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 모든 광경을 놀라지 않고 볼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어디에 있겠는가? 그들은 채찍질을 당한 뒤에 피에 굶주린 사나운 짐승들의 먹이로 던져져 사자, 곰, 산돼지, 황소와 싸웠으며, 불로 괴롭힘을 당하고, 뜨거운 인두로 낙인을 찍혔다. 이러한 싸움에서 놀라운 인내를 나타낸 이 고귀한 순교자들을 어찌 찬양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직접 이러한 자리에 참가하여 이러한 광경을 보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능력이 그들 속에 효과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보았다. p440
굶주린 짐승들은 이 경건한 사람들의 몸을 건드리지도 않고 접근하려 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경기장 밖에서 자기들을 자극하는 다른 사람들에게 난폭함을 발산했다. 거룩한 용사들은 벌거벗은 채 짐승들의 화를 돋우기 위해 명령받은 대로 손으로 짐승들을 때렸지만, 짐승들은 그들을 건드리려고 하지도 않았다. 간혹 짐승들은 그들에게 덤벼들었다가도 마치 어떤 거룩한 힘에 의해 격퇴당하는 듯이 물러나곤 했다. 이런 상태가 오래 계속되어 관중들에게 큰 놀라움을 일으켰다. 결국 첫 번째에 실패했기 때문에 그들은 한 사람의 순교자에게 두 번째, 세 번째로 짐승을 풀어 공격하게 해야 했다. 이 거룩한 성도들의 용감한 인내와 어리고 연약한 육체를 가진 사람들이 나타내는 불굴의 정신에는 누구나 경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신은 겨우 20세의 청년이 두 팔을 펴고 십자가 같은 형태로 서서 움직이지도 않고 물러서지도 않은 채 담대하고 두려움없이 진지하게 하나님께 기도를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죽일 듯이 사납게 포효하는 곰들과 표범들은 그의 몸을 거의 건드릴 듯했다. 그러나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으나 그 짐승들은 입에 거룩하고 불가해한 힘에 의해 재갈이 물린 듯 황급히 물러섰다. 이 청년 외에 또 다섯 사람이 사나운 황소 앞에 던져졌다. 이 황소는 다른 사람들을 뿔로 받아 공중에 내던져 반쯤 죽게 하곤 했다. 그런데 이 황소는 사란ㅁ들에게는 사납게 으르렁거리기만 할 뿐 접근하지도 않고 발로 땅을 구르고 뿔로 여기저기를 받았다. 사람들이 뜨겁게 달아오른 쇠로 낙인을 찍어 성나게 만들자 그 짐승은 미친듯이 거칠게 되었으나 하나님의 개입으로 말미암아 다시 뒤로 물러섰다. 결국 이 짐승은 그들을 조금도 해치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은 다른 짐승들을 풀어놓았다. 이처럼 무서운 여러 가지 공격을 겪은 끝에 그들은 모두 칼에 찔려 죽었으며, 그들의 시신은 묘지에 묻히지 못하고 바다에 던져졌다. p440
제8장 이집트에서 박해를 받은 사람들
앞에서는 두로 Tyre 에서 신앙을 위해 훌륭하게 싸운 이집트인들이 겪은 가혹한 투쟁을 이야기했다. 그러나 이집트 본토에서는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수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우리 주님의 가르침을 위해 세상을 버리고 고난을 겪었으며 여러 형태의 죽음을 당했다. 어떤 사람들은 살갗을 벗기며 사지를 잡아당기는 고문, 무서운 태형 및 듣기만 해도 몸서리쳐지는 여러 가지 고통을 겪은 뒤 화형에 처해졌다. 어떤 사람은 물에 빠뜨려 죽임을 당했고, 또 어떤 이는 자원하여 형리에게 머리를 내밀었다. 어떤 이는 고문을 받다가 죽었고 또 굶어죽은 사람도 있었으며 십자가에 달린 사람도 있었다. 어떤 사람은 일반적으로 죄수들이 처형되는 방법으로 처형당했고, 또 어떤 사람은 보다 잔인하게 거꾸로 십자가에 매달린 채 굶주려 죽을 때까지 산채로 내버려둠을 당했다. p441
제9장 테바이스 Thebais 의 순교자들
테바이스 Thebais 의 순교자들이 겪은 고통과 고문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이다. 사람들은 그들의 몸을 낚시로 삼아 그들의 몸에 조개들이 들러붙어 죽게 했다. 또 여인들의 경우 그들의 한쪽 발을 묶어 공중에 매달아 잔인하고 비인간적이게도 구경꾼들에게 그들의 벌거벗은 나체를 구경하게 만들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나무에 묶인 채 죽었다. 사람들은 이 목적을 위해 튼튼한 나뭇가지들을 기계로 끌어 모은 뒤 거기에 순교자들의 사지를 묶었다가 다시 그 나뭇가지들을 풀어놓아 원래의 나무 형태로 회복되게 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나뭇가지에 묶인 사람들의 사지가 찢어지게 하려는 것이었다. 이러한 잔인한 일들은 얼마동안만 행해진 것이 아니라 여러 해 동안 계속되었다. 어떤 때는 하루에 10명 이상, 때로는 20명 이상, 또 어떤 때는 30명, 60명, 또는 아내와 자녀를 포함하여 100명 이상이 여러 가지 형벌을 받고 살해되었다. 우리도 마침 그곳에 있다가 하루는 많은 사람들이 붐비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곳에서 어떤 사람은 참수의 고통을, 어떤 사람은 화형의 고통을 겪고 있었다. 살인적 무기의 날이 완전히 무디어지고 부러질 정도이며, 사형집행인들이 살해하는데 지쳐 서로 교대할 정도였다. 그 때 우리는 하나님의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들의 진실하고 거룩한 정력과 민첩함, 그리고 대단히 훌륭한 신앙의 열정을 목격할 수 있었다. 첫째 신자에게 사형이 선고되는 순간 이곳저곳에서 여러 사람들이 판사 앞으로 달려 나와 자신이 기독교인임을 고백했다. 그들은 자기들을 기다리고 있는 많은 두려운 고문을 전혀 상관치 않고 오직 유일하신 한 분 하나님만을 인정하는 신앙에 서서 대담한 태도로 자신을 밝혔다. 그들은 진실로 기뻐 날뛰면서 사형선고를 받아들였고, 마지막 숨을 쉬는 순간까지 찬미와 감사의 찬양을 했다. 이들은 참으로 훌륭한 신앙인들이 되었다. p443
그러나 또한 신분이 고귀하고 부유하며 대단한 명성을 누리고 있고 철학과 학문에 능했지만 이 모든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참 신앙에 종속하는 것으로 여긴 참으로 놀라운 신앙인들도 있었다. 그 중에는 필로로무스 Philoromus 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알렉산드리아에서 귀한 직책을 맡고 있었는데, 그는 로마의 직위와 서열에 따라 그가 매일 재판을 하러 갈 때에는 호위병이 그를 수행하곤 했다. 드무이스 Thmuis 교회들의 감독인 필레아스 Phileas 는 자기 지방에서 베푼 봉사와 자신의 행위 및 다른 분야의 철학에 있어서도 유명한 사람이었다. 이들은 수많은 친척과 친구들, 많은 유명인사들, 심지어는 판사까지도 부디 자신을 돌아보고 아내와 자녀들을 불쌍히 여기라고 권면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부인하거나 신앙을 고백해야 하는 명령과 맞서 싸우게 되었을 때 생명을 택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이들 두 사람은 용감하고 철학적인 마음으로,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과 신앙에 헌신한 마음으로 판사가 가하는 모든 모욕과 위협에 맞서 인내했으며, 결국 참수형을 선고받았다. p443
제10장 알렉산드리아의 순교자들에 관해 기록한 필레아스 Phileas 의 저서
전장에서 언급했던 필레아스 Phileas 는 외국의 문학과 과학에도 대단히 능통했다. 이제 우리가 여기에서 제시하는 그의 저서의 발췌문을 보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 그리고 알렉산드리아에서 어떠한 순교가 있었는지를 정확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다음은 필레아스가 트무이스 Thmuis 의 주민들에게 보낸 서신의 발췌문이다. “성경을 통해서 모든 표적과 본보기와 고귀한 교훈들을 받았으므로 우리와 함께 한 그 거룩한 순교자들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고, 마음의 눈을 들어 만물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우러러 보았으며, 진정으로 자신의 신앙을 위한 죽음을 선택하고 자신의 소명에 굳게 매달렸다. 그들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제거하시고 영생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을 제공해 주시기 위해 인간이 되셨음을 잘 알고 있었다. 주님은 하나님과 동등하게 되는 것이 강도짓이라고 생각지 않으셨으나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셨다” p444
이 그리스도를 품은 Christ-bearing 순교자들은 보다 선한 선물을 얻으려고 열심히 노력했으며 온갖 종류의 갖가지 고문들을 한 번만이 아니라 두 번이나 돌아가며 당했다. 그리고 간수들이 서로 경쟁적으로 말로만이 아니라 난폭한 행동으로 위협했지만 그들은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았기 때문이다” 그들이 모든 시련을 겪으면서 나타낸 덕행과 강건한 태도는 말로 표현할 길이 없다. 모든 사람들에게 그들을 능욕할 자유가 주어졌으므로 어떤 이는 곤봉으로, 어떤 이는 막대기로, 또는 채찍으로, 가죽끈, 또는 밧줄로 그들을 때렸다. 고문은 더욱 악하게 변했고 더욱 증가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손을 뒤로 묶인 채 사지를 잡아당기는 고문기구 rack (이것은 사람을 위에 올려놓은 뒤 비틀어 사지를 잡아당기는 고문으로서 처음에는 노예들에게만 사용했던 것이다) 에 매달렸다. 그리하여 그 도구에 의해 사지를 잡아당기는 고문을 받았다. 형리들은 명령에 따라 그들의 온 몸에 집게를 사용하는 고문을 가했다. 그런데 살인자들에게는 양 옆구리에만 집게로 고문했었는데 순교자들에게는 복부, 무릎, 그리고 얼굴에까지 고문 범위를 적용했다. 또 어떤 이는 한 손을 묶여 현관 기둥 높이 매달렸다. 그들은 사지와 관절이 늘어남으로 인해 고통을 겪었는데 이것은 그 무엇보다 끔찍한 일이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발이 땅에 닿지 못하게 한 채 기둥에 얼굴을 맞대고 묶여 자기 몸무게에 의해 미끄러져 내려오게 되어 있었는데, 그들 몸무게의 압력 때문에 그들을 묶은 밧줄로 인한 고통이 더욱 증가되었다. 그들은 거의 온종일 이런 상태로 묶여 있었다. 총독은 다른 사람들을 심문할 때면 부하 관리들에게 앞서 심문을 받은 사람이 고문에 굴복해 신앙을 포기하는지 살펴보게 했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그들의 고통을 감해주지 말고 결박한 채 내버려두라고 명령했으며, 그들의 숨이 끊어지면 땅에 끌어내리라고 했다. 그들은 우리에게 조금도 배려를 해서는 안 되며, 우리를 전혀 무가치한 존재로 여기고 그렇게 다루어야 한다고 말했다. p445
우리의 원수들은 채찍질 외에도 이 두 번째 고문을 고안해냈다. 그러나 어떤 형제들은 고문을 당한 뒤에 두 발이 차꼬에 채워졌다. 따라서 그들은 매질과 채찍질로 인해 짓이겨진 몸을 움직이지 못한 채 어쩔 수 없이 누운 자세로 있어야 했다. 어떤 사람들은 땅에 내던져진 채 고문으로 쇠약해져 누워있었는데 그 광경은 실제로 고문을 받을 때의 상태보다 더욱 끔찍했으며, 그들의 온 몸에는 고문자들의 다양하고 많은 독창성의 증거들을 지니고 있었다. 이런 일들이 자행되는 동안 어떤 사람들은 끝까지 인내하여 원수들을 수치로 몰아넣고 고문을 받는 도중에 죽었다. 또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러 감방에 넣어진 사람들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그 안에서 끊임없이 고통을 겪다가 며칠이 못 가 일생을 마쳤다. 그러나 나머지 신자들은 감옥에 오래 머물게 되면서 치료를 받아 어느 정도 회복이 되었으며, 더욱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리하여 불결한 제물을 만짐으로서 더 이상 괴롭힘을 받지 않고 그들로부터 저주스러운 석방선고를 받거나, 제사를 드리지 않음으로서 사형선고를 받는 것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 그들은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기쁜 마음으로 죽음을 선택했다. 그들은 성경에 기록된바 “주 하나님 외에 다른 신에게 희생을 드리는 자는 멸할지니라”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하지 말지니라” 는 말씀들을 잘 알고 있었다. 지금까지 건전한 철학자인 동시에 하나님께 헌신한 어느 순교자의 기록을 소개했다. 그는 최종선고를 받지 않은 채 아직 감독으로 있으면서 자기 교회의 형제들에게 이렇게 편지를 써서 자신의 처지를 밝혔으며, 아울러 머지않아 자기가 죽은 뒤에라도 굳게 기독교 신앙을 지키라고 권면했다. 전 세계의 경건한 순교자들이 겪어낸 또 하나의 새로운 투쟁을 덧붙일 필요가 없을 것이다. 특히 그들은 평범한 공격을 받지 않게 되었을 때에는 정규적으로 전쟁에 휩싸이기도 했다. p446
제11장 브리기아 지방에서 있었던 사건들
무장한 군인들이 브리기아 Phrygia 에 있는 어느 기독교인 마을과 수비대를 포위한 뒤 그 마을에 불을 던져넣어 만물의 하나님이신 그리스도를 부르는 부인들과 아이들까지 모두 태워죽였다. 이 마을의 주민들은 총독과 장관까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모두 기독교인이었으므로 제사를 드리라는 명령에 복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또 한 가지 사건은 로마의 고관으로서 이탈리아 귀족 출신인 아다네투스 Adanetus 라는 사람의 일이다. 그는 황제의 총애를 받아 모든 고위 관직을 거쳐 수석 행정관의 직책을 맡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를 세무장관, 또는 수상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는 이 모든 관직 외에도 경건한 행위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으로 유명했다. 그는 수상의 직책을 갖고 있는 동안에도 신앙을 위한 싸움을 훌륭히 해냈으며 훌륭히 순교를 쟁취했다. p447
제12장 많은 형제들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고통을 당했다
훌륭한 그리스도의 순교자들의 이름을 밝히거나 그들이 겪은 다양한 고문들을 묘사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아라비아에서는 도끼로 죽임을 당했고, 카파도키아에서는 사지를 찢겨 죽임 당했다. 메소포타미아에서는 형제들의 발을 묶어 거꾸로 땅에서 조금 떨어지게 들어 올린 뒤 그 아래서 불을 피워 연기에 질식시켜 죽였다. 또 알렉산드리아에서는 형제들의 코, 눈, 손, 발을 베어낸 뒤 남은 육체를 토막 내어 죽였다. 어떤 형제들은 제물에 손을 대기보다는 차라리 자기의 두 팔을 불 속에 밀어 넣으려는 결심을 했다. 어떤 형제들은 시련을 겪지 않으려고 원수들의 손에 잡히기 전에 높은 건물에서 투신했다. 그들은 이 불경한 박해자들의 사악함에 비교할 때 죽음이 더 유익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안티오크에 재산과 가문과 명성을 소유하고 있으며 거룩하고 훌륭한 덕을 갖춘 여인이 있었다. 그녀는 아름답고 한창 피어오르는 나이의 두 딸들을 신앙의 우너리 속에서 교육했다. 그들을 질투하고 있던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은신처를 찾아내려고 갖은 방법을 동원했다. 그런데 그들은 해외에 있다가 발각되어 교활한 계획 하에 안티오크로 호출되었다. 그들은 군대의 올가미에 잡혔다. 아제 자신과 딸들이 그 남성들로부터 겪게 될 무서운 능욕을 알고서 당황한 여인은 딸들에게 자기들의 처지를 설명했다. 특히 순결을 더럽히는 것은 그 무엇보다 더 두려운 일로서 조금도 귀를 기울여서는 안 될 일이라고 설명했다. 또 영혼을 마귀의 종으로 내어주는 것은 죽음과 멸망보다 더 악한 것이라고 밝혔다. 그녀는 이 모든 일들로부터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제안했으니, 즉 그리스도의 도움에 의지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모두가 이 방법에 동의했으므로 그들은 호위병들에게 잠시 시간을 달라고 요청한 뒤, 단정하게 옷매무새를 가다듬고서 흐르는 강물에 뛰어들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스스로의 목숨을 끊었다. 역시 안티오크에 경건하기로 유명하며 가문과 재산과 젊음과 아름다움을 갖춘 두 처녀가 있었다. 그들은 모든 면에서 마치 친자매 같았다. 그들은 진지한 마음과 경건한 행실, 그리고 훌륭한 열성에 있어서도 자매 같았다. 이 세상은 그처럼 탁월함을 감당할 수 없었던 듯, 악마를 섬기는 자들은 그들을 바다에 빠뜨리라고 명령했다. 이상은 안티오크에서 일어난 사건들이다. p448
폰투스 Pontus 의 형제들도 말하기에도 끔찍한 고문을 당했다. 어떤 사람들은 손톱 밑을 날카로운 갈대줄기로 찌르는 고문을 당했다. 또 어떤 신자들에게는 녹여 끓는 납을 등에 퍼붓고 육체 중에서 가장 민감한 부분들을 불로 지졌다. 또 어떤 이들은 복부나 그 밖의 부분에 견디기 어려운 고문을 당했으니, 예를 들면 소변을 보지 못하게 금지했다. 이것은 그 관대하고 공정한 재판관들이 자기의 잔인성을 나타내려는 목적으로 자신의 양심에 걸맞게 고안해낸 지혜의 산물이었다. 그들은 마치 가장 잔인한 고문법을 창안해낸 사람에게 상을 주는 경쟁에 참여한 듯 경쟁적으로 새로운 고문법을 고안해냈다. 그러나 이러한 재난도 결국은 종식되게 되었다. 판사들은 더 이상 효과적인 고문법을 발견해내지 못해 절망했고, 학살하는데 염증이 났고, 또 피흘리는데 싫증을 느끼게 되었으므로 그들은 스스로 자비하고 인간적이라고 여기는 일에 열중하게 되었다. 그들은 우리에게 더 이상의 잔인한 일들을 가하지 않으려는 것처럼 보였다. 그들은 더 이상 도시들을 피로 물들이지 말 것이며, 또 만인에게 자비하고 관대한 정부가 지나친 잔인함으로 인해 이름을 더럽히게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또 자비하신 양兩 폐하께서 베푸시는 은혜의 혜택이 만백성에게 미쳐야 하며 더 이상 우리 형제들에게 사형이라는 처벌을 하지 말라고 했다. 그리하여 우리는 황제들의 큰 자비로 말미암아 이러한 형벌로부터 해방되었다. p449
그리하여 그 후로는 우리의 눈을 뽑거나 다리를 자르는 정도의 형벌만 인정되었다. 그것이 그들이 베푸는 자비였고 우리에게 내리는 가장 경미한 형벌이었다. 그들의 이러한 관용의 결과로 무수한 형제들이 처음에는 칼로 눈을 뽑히고 그 다음에는 뜨겁게 달아오른 인두로 지짐을 당했다. 또 달군 인두로 지져 왼쪽 다리가 불구가 된 사람들도 부지기수였다. 또 다른 지방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구리를 캐는 광산에 보내어졌는데, 그것은 노동을 하게 하려는 것이라기보다는 모욕과 고통을 주려는 목적에서였다. 그밖에도 많은 사람들이 겪은 여러 종류의 투쟁을 일일이 상세하게 열거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어쨌든 그들의 고귀하고 강건한 신앙은 말로 묘사할 수 없었다. 도량이 넓은 그리스도의 신자들은 이러한 고난 속에서 온 세상에 빛을 환히 비추어주었다. 그들은 곳곳에서 구경꾼들을 놀라게 했으며 그리스도의 신적인 섭리의 분명한 증거를 친히 제시했다. 그들의 이름을 일일이 언급하는 것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너무나 장황하고 지루한 작업이 될 것이다. p450
제13장 신앙의 실체를 피로 증거한 성직자들
큰 도시에서 순교한 교회의 성직자들로서 그리스도의 나라의 증인이라고 기록된 사람들 중 우리가 언급하려는 첫째 인물은 니코메디아의 감독 안티무스 Antimus 이다. 그는 참수되었다. 안티오크 교회의 장로 루시안 Lucian 은 일평생 탁월한 인품과 경건생활을 하기로 유명했던 사람이다. 그는 니코메디아에서 황제의 앞에서 자신의 석방을 위한 변론을 하면서 그리스도의 거룩한 나라를 전파했으며, 그 진리를 자신의 행위로서 증명했다. 베니게 (페니키아) Phaenice 의 순교자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로는 그리스도의 영적 양떼들을 보살핀 경건하고 헌신적인 목회자들이 있다. 그들은 두로 Tyre 교회의 감독 티란니오 Tyrannio, 시돈 Sidon 의 제노비우스 Zenobius, 에미사 Emisa 의 감독 실바누스 Silvanus 등이다. 이들 중 실바누스는 에미사에서 사나운 짐승들의 먹이로 던져져 순교자의 반열에 들어갔으며, 티란니오와 제노비우스는 죽을 때까지 모든 고난을 인내함으로서 하나님의 교리를 영화롭게 했다. 감독 티란니오는 깊은 바다에 던져졌다. 그리고 훌륭한 의사였던 제노비우스는 양 옆구리에 고문을 당하면서도 참으로 불굴의 정신으로 인내하여 세상을 떠났다. 팔레스틴에서는 가자 Gaza 부근의 교회들을 다스리는 감독 실바누스가 페노 Phoeno 의 광산에서 39명의 순교자들과 함께 참수되었다. 이집트의 순교자들 가운데 펠레우스 Peleus 와 닐루스 Nilus 감독은 화형을 당했다. 알렉산드리아, 이집트, 그리고 테바이스 Thebais 의 순교자들 가운데 가장 탁월한 사람으로는 알렉산드리아의 감독 피터 Peter 를 들 수 있다. 그는 특히 기독교 신앙을 가르치는 훌륭한 교사였다. 그리고 파우스투스 Faustus, 디우스 Sius, 암모니우스 Ammonius 등의 장로들도 완전한 그리스도의 증인들이었다. 이집트 교회의 감독이던 필레아스 Phileas, 포쿠미우스 Pochumius, 헤시키우스 Hesychius, 데오도루스 Theodorus 및 그 밖의 여러 사람들도 그 지역 교회들로부터 뛰어난 순교자라는 언급을 받고 있다. p451
로마제국이 우리를 대적해 전쟁을 일으키기 이전의 상태, 즉 얼마나 오랫동안 황제들은 우리에게 평화적이고 우호적인 태도를 취했으며, 또 제국이 얼마나 풍요하고 번영했는지는 말로는 도저히 서술할 수 없을 것이다. 당시 최고의 지배력을 갖고 있었으며 30년간 국가의 우두머리로 있었던 사람들은 평화와 안정 속에서 축제와 흥행, 즐거운 잔치와 연회로 시간을 보냈다. 이처럼 아무런 방해도 없이 나라가 번영하고 강대해지는 상태에서 그들은 갑자기 우리의 평화로운 상태를 뒤집었고, 우리를 대적해 대단히 불공정하고 극악무도한 전쟁을 도발했다. 그러나 이 전쟁이 시작되어 2년이 지나기도 전에 혁명이 일어나 나라는 완전히 전복되었다. 앞서 언급했던 황제들 중 최고권자는 제2인자와 함께 대단히 몹쓸 병에 걸려 정신이상이 되었고, 따라서 평민의 생활로 돌아가야 했다. 이런 일들이 있을 즈음 제국이 분열되었는데 그것은 역사적으로 그 이전에는 어느 곳에서도 없었던 일이었다. p452
곧이어 평생 자기 백성들에게 친절하고 호의를 베풀었으며 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도 대단히 호감을 갖고 있던 콘스탄티우스 Constantius 황제가 사망했다 (호겐 : 콘스탄틴 대제의 아버지). 그리하여 모든 면에서 그를 닮은 아들 콘스탄틴 Constantine 이 그의 후계자로서 황제이면서 아우구스투스 Augustus 가 되었다 (호겐 :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틴 대제). 그는 죽은 뒤에 황제에게 수여되어야 하는 모든 영예를 누렸다. 그는 가장 자비하고 온유한 황제였으며, 우리 시대의 황제들 중에서 일생을 황제의 신분으로 마친 유일한 황제이다. 그리고 그는 다른 면에서는 물론 우리에 대해서도 지극한 관용과 사랑을 나타냈으며 우리를 대적하여 제기되는 적대감에 조금도 동참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 밑에 있는 경건한 신자들이 해를 입지 않고 비방당하지 않도록 보호하고 보존해 주었다. 그는 교리를 파괴하지 않았으며 우리를 대적하여 전혀 악을 계획하지도 않았다. 그는 행복하고 복된 죽음을 맞았으니, 자신의 나라를 자기 아들에게 평화롭고 영광스럽게 넘겨준 유일한 황제였다. 한편 황제들의 투표에 의해 동방에서는 리시니우스 Licinius 가 황제 겸 아우구스투스로 임명되었다. 이 일로 인해 막시미누스 Maximinus 는 크게 분노했다. 왜냐하면 그는 아직도 카이사르 Caesar 의 칭호밖에 받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독재적 기질을 지니고 있던 그는 스스로 그 지위를 사칭해 아우구스투스가 되었다. 한편 앞에서 언급했던바 황제의 지위에서 물러났다가 다시 지위를 되찾은 막시미안 Maximian 은 콘스탄틴의 생명을 노리려는 음모를 꾀하다가 발각되어 지극히 치욕스러운 죽음을 당했다. 그리하여 그의 동상과 기념비는 불경하고 저주스런 사람의 기념물이라고 하여 파괴되었다. p453
제14장 박해자들의 품행
막시미안의 아들 막센티우스 Maxentius 는 로마에 자기 나라를 세웠는데, 처음에는 자신이 우리와 같은 신앙을 가진 듯이 로마인들에게 아첨하며 타협했다. 그는 백성들에게 기독교인들에 대한 박해를 중지하라고 명령하는 등, 이전의 통치자들보다 훨씬 자비하고 온유한 것처럼 보이려는 의도에서 경건한 체했다. 그러나 그는 행위에 있어서는 전혀 우리의 기대에 일치하는 인물임을 증명하지 못했다. 그는 온갖 종류의 악에 빠져 음란하고 방탕한 짓이라면 하지 않은 짓이 없었다. 그는 간음과 간통을 일삼았으며, 여인들을 남편에게서 빼앗아 능욕한 뒤 다시 남편에게 돌려보냈다. 그는 미천한 사람들에게만 이런 짓을 한 것이 아니라 원로원에서 유명한 사람들에게까지 이런 짓을 했다. 모든 사람이 그를 두려워했으며, 백성들과 장관들, 신분이 높은 사람들이나 낮은 자들은 모두 대단한 학정으로 인해 분노를 느꼈다. 그리고 그들은 이 가혹한 폭정에 아무런 반역도 하지 않고 조용히 참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살인적 잔인함을 덜어주지는 못했다. 그는 아주 사소한 이유로 근위병들에게 백성들을 죽이라고 명해 로마시 한복판에서 수많은 로마시민들이 살해되었다. 그들은 야만인이나 시디아인 Scythians 이 아니라 같은 시민들의 화살과 창에 찔려 죽은 것이다. 또 그가 재산을 빼앗기 위해 온갖 핑계와 거짓 죄목을 씌워 수천 명의 원로원 의원들을 죽이면서 자행한 학살은 말로 표현하기조차 불가능하다. 이러한 악행이 절정에 이르렀을 무렵 이 독재자는 마술을 의지하라는 유혹을 받았다. 그는 악마를 불러내고, 임박한 전쟁을 피하기 위해 한 번은 임신한 여인의 배를 갈랐고, 또 한 번은 갓 태어난 어린 아이들의 뱃속을 살펴보기도 했다. 때때로 사자들을 죽이는 등 온갖 저주스런 행동을 했다. 왜냐하면 그가 지니고 있는 유일한 소망은 이런 방법에 의해 승리를 보장받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 잔인한 폭군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자기 백성들을 압제했으므로 백성들은 우리 시대에 로마나 그 어떤 곳에도 전례가 없던 극도의 빈곤한 생활을 했다. p454
한편 동로마제국의 군주인 막시미누스 Maximinus 는 이미 비밀리에 로마에 있는 악한 형제 막센티우스 Maxentius 와 동맹을 맺고 있었는데 가능한 한 자신의 계획을 감추려 했으나 마침내 그 일이 발각되어 그에 합당한 처벌을 받았다. 이 폭군의 잔인한 행위와 죄악이 그 로마인과 얼마나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었고 흡사했는지, 아니 오히려 그보다 더 방대했는지 놀라울 정도이다. 그는 사기꾼들과 마술사들에게 높은 직위를 수여했다. 그는 극도로 소심하고 미신적이 되었으며 망상을 소중히 여기며 악마들의 감화를 으뜸으로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는 점쟁이나 신탁이 없으면 손가락조차 움직이지 않으려 했다. 그런 까닭에 그는 이전의 어느 황제보다 더 난폭하게 계속적으로 우리를 박해했다. 그는 모든 도시에 신전을 세우라고 명령했으며, 세월이 흐름에 따라 훼손된 신전들을 재건하라고 했다. 그는 모든 도시에 우상을 섬기는 사제들을 배치했고 각 지방마다 이들을 다스리는 대제사장을 두었다. 그런데 이들 중 어떤 사람은 정치적인 일들을 요리하는 데 능숙하여 호위병들을 늘렸다. 그는 모든 마술사들을 대단히 경건하고 신들에게 합당한 사람들인 듯 존경해 그들에게 관할구역들을 하사하며 커다란 특권들을 주었다. 그는 이때부터 하나의 도시나 지역뿐 아니라 자기가 다스리는 모든 지방에서 금과 은과 돈을 부당하게 징수하며, 여러 방법과 핑계로 재산을 몰수하여 백성들을 괴롭혔다. 그는 자기 조상들에게서 재산을 물려받은 부자들을 약탈했으며, 자기 주위에 있는 아첨꾼들에게 큰 재산과 돈을 하사했다. 그는 경솔함의 절정에 이르렀고 술고래가 되었다. 그는 술을 마시면 이성을 잃고 미친 사람처럼 되었다. 그리하여 술 취했을 때에 자신이 명령했던 것도 다시 이성을 회복했을 때에는 뉘우치곤 했다. 그는 과음과 폭식에 있어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으려 했으며, 주위에 있는 지도자들과 백성들에게 자신을 불의의 대가로 내세웠다. 그의 사치와 폭음으로 인해 군인들도 온갖 방탕과 술 취함에 빠졌다. 그리고 총독들과 장군들은 동료 폭군들의 세력을 등에 업고 탐욕스럽게 백성들을 더욱 압제했다. 이 사람의 비열하고 더러운 정욕을 어찌 언급할 수 있으며, 그의 수많은 간음행위를 과연 언급할 필요가 있겠는가? 그는 가는 곳마다 여인들을 범하지 않고 지나가는 곳이 없었다. p456
그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러한 행위를 하는데 있어서 성공했지만 기독교인에게는 성공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기독교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그의 권력도 하찮게 여겼기 때문이다. 기독교인들은 불, 칼, 십자가 처형, 사나운 짐승의 밥, 깊은 바다에 빠뜨림, 사지를 불구로 만들기, 뜨겁게 달아오른 인두로 지지는 형벌, 눈을 찌르고 뽑는 형벌, 그리고 온 몸을 절단하는 형벌을 당했다. 또 굶주리고 광산으로 유배되거나 감옥에 갇히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만 바쳐야 하는 존경과 예배를 우상들에게 바치기보다는 차라리 신앙을 위해 고난을 받길 택했다. 여인들도 남자들 못지않게 거룩한 말씀의 교리로 말미암아 힘을 얻었다. 그리하여 어떤 여인들은 남자들과 똑같은 시련을 견뎌내고 똑같이 훌륭한 상을 얻었다. 어떤 여인들은 폭행을 당하게 되었을 때 자신의 몸이 능욕을 당하도록 하기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택했다. 이 폭군은 알렉산드리아에서 다른 여인들에게서는 자신의 정욕을 충분히 충족시켰다. 그러나 그의 고삐 풀린 욕정은 한 여인의 영웅적인 강인함 때문에 패배하고 말았다. 그녀는 알렉산드리아에서 가장 유명하고 훌륭한 사람 중의 하나로서 기독교인이었다. 그녀는 재산, 가문, 신분 등 모든 면에서도 뛰어났지만 그녀의 정숙함은 더욱 탁월했다. 이 폭군은 그녀를 자기의 뜻에 복종시키려고 여러 번 노력했으나 그녀는 죽을 결심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를 함락시킬 수 없었다. 그러나 그의 욕망이 분노보다 더 컸기 때문에 그는 그녀의 재산을 모두 빼앗고 유배를 보냈다. p457
그밖에도 많은 여인들이 이교도 통치자들로부터의 능욕의 위협을 견딜 수 없어 갖가지 고문과 죽음의 형벌을 받았다. 이들은 참으로 훌륭한 여인들이었다. 이들 중에서 가장 훌륭하고 고귀하고 정숙한 여인이 있었는데, 모든 면에 있어서 막시미누스를 닮은 막센티우스는 그녀를 범하려 했다. 그녀는 그런 일들을 맡은 폭군의 하수인들이 자기 집에 침입했고 당시 로마의 장관이었던 남편이 그녀를 데려가도록 허락했다는 것을 알고서는 몸치장을 할 수 있도록 잠시 시간을 달라고 요청했다. 그리하여 자기 방에 들어가 홀로 있게 되었을 때 그녀는 칼로 자기 가슴을 찔렀다. 그리하여 그녀는 죽어가면서 자기의 몸을 안내인들에게 남겼다. 그녀는 지금 생존하고 있는 사람이나 장래의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인들이 소중히 여기는 덕이야말로 단 하나 정복할 수 없고 불멸하는 재산임을 말이 아닌 자신의 행위로서 효과적으로 전파했다. 이상은 동로마제국과 서로마제국을 뒤흔들었던 두 폭군이 동시에 저지른 불의의 물결이었다 (호겐 : 막센티우스와 막시미누스). 이러한 악행의 동기들을 살펴보고서 우리에게 임한 박해가 이러한 원인들로부터 비롯되었음을 의심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특히 기독교인들이 자신의 신앙을 고백할 수 없는 충분한 양심의 자유를 얻게 된 후에야 당시 극도에 이르렀던 제국의 혼란이 종식되었음을 의심할 사람도 없을 것이다. p458
제15장 이교도들에게 발생한 사건들
10년 동안 박해가 계속되는 동안에 박해자들 사이에서는 음모와 내란이 그치지 않았다. 바다를 항해하거나 어느 지역에서 항해를 떠나려는 선원들은 혹시 적군의 지역으로부터 온 첩자가 아닌가 하는 의심을 받아 여러 가지 고문, 채찍질, 사지를 잡아당기는 고문, 옆구리를 고문기구로 찢는 고문을 당하고 결국은 십자가형이나 화형을 당했다. 이런 일 외에도 도처에서 방패와 쇠줄로 얽어 만든 갑옷, 던지는 창 및 전쟁도구들을 준비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또 도처에서 군함과 해군의 갑옷을 모아놓은 것도 볼 수 있었다. 어느 곳에서나 매일 적의 공격을 예상하고 있었다. 이밖에도 기근과 페스트가 창궐했는데, 이에 대해서는 앞으로 적당한 곳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을 기록할 예정이다. p458
제16장 사태의 호전
박해가 계속되는 기간 동안의 사태는 앞에서 기록한 바와 같다. 하나님의 선하심으로 말미암아 박해는 시작된지 8년이 되던 해부터 완화되기 시작하여 10년이 되는 해에는 완전히 종식되었다. 하나님의 자비하신 섭리가 은혜롭고 자비한 눈으로 우리를 다시 돌아보시게 됨에 따라 우리의 통치자들과 과거 박해의 주역으로 활동했던 사람들의 생각은 놀랍도록 변화되어 자기들의 과거의 주장을 철회하기 시작했고, 우리를 대적해 타올랐던 박해의 불길을 온화한 포고와 법령으로 끄려했다. 그러나 이 일은 단순히 인간의 행위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며, 또 쉽게 생각하듯이 우리 통치자들의 관용과 연민에 의해 이루어진 것도 아니다. 그들은 박해의 초기에서부터 그 때까지 나날이 더욱더 가혹하고 많은 조처들을 우리에게 가하려고 도모했으며, 이러한 목적을 위한 도구와 기구들의 다양성을 증가시킴으로서 새로운 고문방법을 창안해냈다. 그러나 신적 섭리는 한편으로는 자기 백성과 화해하시고, 한편으로는 이러한 재난의 창시자를 공격하셔서 무서운 박해의 장본인인 그에게 진노를 나타내셨다. 이것은 이미 거룩한 심판에 의해 일어났어야 했던 일이다. 성경에는 ‘범죄하는 자에게 화가 있으리로다’ 라고 선포되어 있다. 그는 하나님께서 보낸 심판을 받았는데 그 심판은 그의 육체에서 시작되어 영혼에까지 진행되었다. 그의 몸에는 갑자기 종양이 생겼고, 다음에는 그 부분에 잔구멍이 많은 누관 fistula 이 생겼는데, 그것은 점점 안으로 곪아들어가 창자 속까지 곪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곳에는 수많은 구더기들이 생겨났다. 또 병들기 전에 그가 과식을 했던 음식들이 지방덩어리로 변했는데, 그것이 부패하는 듯 견딜 수 없이 지독한 악취가 그곳에서 솟아났으므로 가까이 있는 사람들은 차마 그 끔찍하고 견딜 수 없는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어떤 의사는 지독한 냄새를 견디지 못했다고 해서 죽임을 당했고, 또 어떤 의사들은 그의 온 몸이 부어올랐는데도 조금도 완화시키지 못했으므로 무자비하게 처형되었다. p459
제17장 황제들의 뉘우침
이처럼 많은 불행과 싸우면서 그는 자신이 경건한 사람들을 대적하여 범한 죄에 대한 가책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을 돌이켜 반성하면서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께 대한 자신의 죄를 자백했다. 그 다음에 그는 관리들을 소집하고서 그들에게 즉시 기독교인들에 대한 박해를 중지하라고 명령했으며 기독교인들은 서둘러 교회를 재건하여 예배를 드리며 황제의 안전을 위해 기도하라는 칙령을 내렸다. 이 칙령은 즉시 시행되었다. 황제의 칙령은 도시들에서 발표되었는데 그것은 우리에 관해 다음과 같은 취소명령을 담고 있었다. p460
“갈레리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미아누스, 카이사르 황제, 인빅투스, 아우구스투스, 최고성직단장 Pontifex Maximus, 게르만의 막시무스, 이집트의 막시무스, 테베의 막시무스, 사르마니아의 막시무스, 페르시아의 5대 막시무스, 카르피아의 막시무스, 아르메니아의 막시무스, 메디아의 막시무스, 아비아베니아의 막시무스, 백성들의 20대 호민관, 19대 황제, 8대 집정관, 조국의 아버지, 지방총독 The Emperor Galerius Valerius Maximianus, Invictus, Augustus, Pontifex Maximus, Germanicus Maximus, AEgyptiacus Maximus, Thebaicus Maximus, Sarmaticus Maximus, the fifth time Persicus Maximus, Second time Carpicus Maximus, sixth time Armeniacus Maximus, Tribune of the People xx, Emperor xlx, Consul vlll, Father of his country, Proconcul 과 플라비우스 발레리우스 콘스탄티누스 카이사르 황제, 피우스, 펠릭스, 인빅투스, 아우구스투스, 최고성직자, 호민관, 황제 V, 집정관, 조국의 아버지, 지방총독 Emperor Cesar Flavius, Valerius Constantinus, Pius, Felix, Invictus, Augustus, Pontifex Maximus, Tribune of the People, and Emperor V, Consul, Father of his country, Proconcul, 그리고 발레리우스 리시니아누스 카이사르 황제, 피우스, 펠릭스, 인빅투스, 아우구스투스, 최고성직자, 막시무스, 호민관 4세, 황제 3세, 집정관, 파테르 파트리애, 지방총독 Emperor Cesar Valerius Licinianus, Pius, Felix, Invictus, Augustus, Pontifex Maximus, Tribune of the People IV, Emperor III, Consul, Pater Patriae, Proconcul 은 각 지방의 백성들에게 문안하는 바이다. p461
우리는 백성들의 공익을 위해 여러 가지 조처를 강구했다. 먼저 우리는 모든 일들을 로마인들의 옛 법률과 공적인 태도에 따라 복구하기로 결정했다. 이것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자기 선조들의 종교를 떠나야 했던 기독교인들이 다시 선한 뜻과 결심을 회복해야 할 것이다. 어찌 된 일인지 그들은 지극한 오만과 어리석음의 공격을 받아 예부터 조상들이 세워 그들에게 명해 온 원리들을 좇지 않으려 했다. 그들은 각기 자신의 뜻과 의지에 따라 법률을 만들어 좇기 시작했으며, 그리하여 다른 의견들을 가진 다른 분파들의 무리가 모이게 되었다. 그런 까닭에 우리가 그들에게 옛 조상들이 세워놓은 관습으로 되돌아가라는 칙령을 발표했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위험에 직면했으며, 또 많은 사람들은 위협을 받고 여러 가지 형태의 죽음을 당했다. 그러나 비록 우리는 아직도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어리석은 생각을 가지고 있으며, 불멸의 신들에게 합당한 영광을 돌리지 않고, 또 기독교인들의 하나님에게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며, 여전히 우리가 만백성에게 용서를 베풀어온 자비함과 변함없는 관습에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알고 있으나, 우리는 이 일에 있어서도 모든 죄를 묻지 않고 용서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들은 다시 자신들의 모이는 장소를 재건하며 자신의 신앙에 어긋나는 일은 하지 않아도 좋다. 우리는 판사들에게 서신을 보내어 그들이 지켜야 할 사실들을 알리려 한다. 우리가 이처럼 양보했으므로 기독교인들은 자기의 하나님께 백성들과 자신의 안전은 물론 우리의 안전을 위해 간구해야 한다. 그리고 사방에서 공공의 복지가 보존되며, 그들이 각기 자기 집에서 무사하게 살게 되길 기원해야 한다” p462
이상은 우리가 라틴어에서 희랍어로 번역한 그 칙령의 취지였으며 앞으로 이 칙령이 발표된 이후의 사태를 생각해 보려 한다. p462
부록 I
주 : 어떤 사본의 제8권에 이것이 첨부되어 있다. 본서에는 2개의 부록이 붙어있는데 첫 번째 것은 제8권의 부록이고, 두 번째 것은 <순교자의 책> 의 서언이다.
이 칙령의 저자는 이 공식승인서를 발표한 뒤 고통으로부터 해방되어 일생을 마쳤다. 그가 박해라는 재난의 근원이었음은 모두가 인정하고 있다. 그는 다른 황제들이 우리를 박해하기 훨씬 이전에 자기 휘하에 있는 기독교인 병사들에게 신앙을 버리도록 유혹하면서 어떤 병사들은 강등시키고 어떤 병사들에게는 지극한 모욕을 주었고, 또 어떤 군인들은 사형에 처했으며, 마지막에는 자기의 동료 황제들을 선동하여 모든 신자들을 대적하는 전반적인 박해를 가했기 때문이다. 나는 이 황제들의 죽음을 언급하지 않고 그냥 지나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4명의 황제들이 주권을 나눠 갖고 있었으며 이미 기록한 바와 같이 박해가 끝나고 거의 2년이 지났을 때에 나이가 든 황제들은 그 지배권을 양위하고 평범한 은퇴생활을 보내다가 생을 마쳤다. 황제들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고 서열이 높았던 황제는 오래 지속된 고통스러운 질병으로 사망했다. 그 다음 서열의 황제는 자신이 범한 수많은 죄 때문에 악마의 예언에 시달리다가 스스로 목을 졸라 죽었다. 나머지 두 황제 중에서 마지막 황제, 즉 우리가 모든 박해의 근원이라고 언급했던 황제가 겪은 고통은 앞에서 언급했다. 그러나 이 세 황제 중에서 가장 자비하고 겸손했던 콘스탄티우스 Constantius 황제는 재위기간 중 자기 나라를 언제나 최고의 권위로 다스렸으며 모든 면에 있어서 지극히 은혜롭고 관대한 군주임을 드러냈다. 그는 우리를 박해하는 일에 참여하지 않았고 오히려 자기 밑에 있는 신자들을 보호하고 후원해 주었다. 그는 교회건물을 파괴하지 않았으며 우리를 대적하기 위한 일을 도모하지 않았다. 그런고로 그는 참으로 행복하고 복된 죽음을 맞았다. 그는 네 사람의 황제 중에서 평온하고 훌륭하게 나라를 다스리다가 임종 시에는 모든 면에서 지혜롭고 경건하기로 유명한 왕자를 후계자로 삼아 황위를 넘겨준 유일한 황제였다. 이 아들이 즉위하자마자 군대는 그를 최고의 황제이며 아우구스투스라고 선포했다. 그 또한 신자들에 관해서도 부친의 경건한 태도를 한껏 본받았다. 이제까지 각기 다른 시기에 사망한 네 황제의 죽음을 다루었다. 이들 중에서 앞서 언급된 고백문을 남긴 황제는 후일 자기와 함께 통치한 사람들과 함께 이 고백문을 해외로 보내어 만백성에게 선포했다. p464
부록 II
디오클레티안의 통치 8년 크산티쿠스 Xanthicus 월 (4월) 의 일이다. 그 무렵 팔레스틴의 총독은 플라비아누스 Flavianus 였으며, 주님의 유월절도 이 시기에 있었다. 갑자기 도처에 있는 교회들을 부수고 성경을 불태우며 신자들이 지니고 있는 직책을 박탈하고 기독교 신앙을 고수하려는 자유민들의 자유를 박탈하라는 칙령이 발표되었다. 그 이후 곧 다른 칙령들도 발표되었는데, 그 내용인즉 먼저 교회의 성직자들을 감옥에 가두고, 어떻게 해서든 제물을 드리게 하라는 명령이었다. p465
순교자들의 책
제1장 프로코피우스, 알페우스, 작케우스
팔레스틴에서 최초로 순교한 사람은 프로코피우스 Procopius 였다. 그는 투옥되어 고통을 당하기 전에 총독의 법정에서 심문을 받았다. 그는 소위 신이라고 불리는 것들에게 제사를 드리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자신은 예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은 오직 한 분밖에 알지 못한다고 선언했다. 그는 네 황제들에게 헌주를 바치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그의 대답이 황제들의 마음에 들지 못해 즉시 참수되었다. 그가 한 말은 어느 시인의 말로서 “군주들이 여럿이라는 것은 좋지 못하다. 오직 한 분의 군주와 한 분의 주권자만 있게 하라” 는 것이었다 (이것은 윌리시즈의 말로서 일리아드 제2권 208행에 기록된 것이다. 또 호메로스의 말도 오늘날 격언처럼 사용되고 있다). 이것은 데시우스 Decius 월 8일, 로마인의 달력으로는 6월 6일 수요일의 일이었는데 이것은 팔레스틴의 가이사랴에 주어진 최초의 신호였다. 그가 순교한 뒤, 가이사랴에 있는 많은 지방교회의 감독들이 기쁜 마음으로 무서운 고문과 맞서 싸워 훌륭하고 고귀한 투쟁의 모범을 보였다. 어떤 감독은 극도의 두려움 때문에 처음부터 고문의 두려움에 굴복하여 신앙을 버렸다. 그러나 나머지 감독들은 각기 여러 종류의 고문을 당했다. 어떤 사람은 가죽채찍으로 수없이 맞았고, 사지를 잡아당기는 고문 기구에 앉혀지고, 옆구리의 살이 벗겨진 사람도 있었으며, 족쇄에 채워져 두 손의 관절들이 탈구된 감독들도 있었다. p468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의 비밀한 결정에 의해 결정된 대로 그 일들을 감당해냈다. 어느 감독은 두 손을 붙잡힌 채 사람들에게 끌려 제단으로 갔다. 그 사람들은 불결하고 부정한 희생제물을 그의 오른손에 밀어넣고는 마치 그가 제사를 드렸다는 듯이 그를 되돌려 보냈다. 또 어떤 사람은 제물에 손도 대지 않았지만 다른 사람들이 그가 제사를 드렸다고 말했기 때문에 조용히 나가버렸다. 또 어떤 사람은 반죽음이 되었는데 이미 죽은 사람 취급을 당해 밖에 버려졌으며, 제사를 드려 감옥에서 석방된 사람으로 분류되었다. 어떤 감독은 이러한 것들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소리치며 주장하다가 입을 맞았고, 이런 일을 위해 매수된 사람들의 주먹에 맞아 잠잠하게 되어, 제물을 바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폭력에 의해 떠밀려나갔다. 그리하여 이처럼 많은 사람들 중에서 다만 알페우스 Alpheus 와 자케우스 Zaccheus 만이 거룩한 순교자의 면류관을 받았다. 이들은 태형을 당하고 쇠갈고리로 긁히고 꽁꽁 결박되고 또 사지를 잡아당기는 고문기구 rack 에서 고문을 당했으며 밤낮으로 네 개의 차꼬구멍에 두 발이 채워져 있다가 결국 디우스 Dius 월 17일, 즉 12월 15일에 참수되었다. 그들은 유일하신 한 분 하나님과 유일하신 임금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고백으로 인해 마치 끔찍한 신성모독이라도 한 듯 프로코피우스와 함께 순교했다. p469
제2장 순교자 로마누스 Romanus
제3장 티모데우스, 아가피우스, 데클라 및 여덟 순교자들
박해가 시작된 지 2년이 되자 우리를 향한 전쟁은 더욱 격렬하게 불타올랐다. 당시 우르바누스 Uebanus 는 본국 밖의 영토를 다스리고 있었는데, 그에게 최초의 제국의 칙령이 발표되었다. 그 칙령은 모든 민족, 모든 도시의 백성들이 희생 제사를 드려야 하며 우상들에게 헌주 獻酒 를 바쳐야 한다는 명령이었다. 티모데우스 Timotheus 는 팔레스틴의 가자 Gaza 에서 무수한 고통을 당했다. 그는 약한 불 속에서 서서히 타죽는 선고를 받고, 신앙을 위한 싸움에서 승리한 거룩한 용사들의 면류관을 얻었다. 그와 같은 시기에 지극히 훌륭하게 신앙을 고백한 아가피우스 Agapius 와 우리와 동시대인 데클라 Thecla 는 사나운 짐승에게 던져 죽이라는 선고를 받았다. 당시 곳곳에서는 이교도들이 즐거운 경기와 명절을 지키고 있었는데, 그들은 순교자들과 사나운 짐승들을 싸움붙이라고 야단들이었다. p471
그 외 6명의 기독교인 청년들도 원형경기장으로 끌려갔다. 이들은 폰투스 Pontus 태생의 티몰라우스 Timolaus, 베니게에 있는 트리폴리스의 디오니시우스, 디오스폴리스 교회의 부감독 로물루스 Romulus, 이집트 사람인 파에시스 Paesis 와 알렉산더, 그리고 가자 Gaza 사람 알렉산더였다. 그들은 맹금의 공격에도 전혀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총독과 그 주위에 있었던 사람들이 놀라 아연실색했다. 그들은 다시 감옥에 갇혔다. 며칠이 못 되어 두 사람이 그들의 무리에 추가되었는데, 그들 중 한 사람은 이미 여러 차례 다양하고 두려운 고문을 받으면서 신앙의 투쟁을 견뎌온 아가피우스 Agapius 였다. 또 한 사람은 그들에게 생필품을 공급해 주던 디오니시우스라는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이들 여덟 사람은 모두 디스트루스 Dystrus 월 23일, 즉 4월 9일에 가이사랴에서 참수되었다. 그 동안 황제들에게 약간의 변화가 일어났다. 제1위와 제2위의 지위에 있던 황제들은 은퇴하여 평민이 되었고 (호겐 : 디오클레티아누스, 막시미아누스), 국사는 어지러운 양상을 띠기 시작했다. 곧이어 로마제국은 분열되어 로마인들끼리 무서운 내란을 벌이게 되었다. 모든 로마인들의 세계에서 신자들을 향한 평화가 선포되기까지 이 분열은 그치지 않았고 그에 따른 소요도 진압되지 못했다. 그러다가 평화가 마치 태양빛처럼 우리를 비추기 시작하자 국가는 다시 굳건함, 평온과 평화를 되찾았으며, 과거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았던 서로를 향한 사랑의 마음도 회복되었다. 이러한 일에 관해서는 앞으로 적당한 곳에서 보다 상세히 이야기하겠다. 이제 다시 우리 이야기의 본론으로 돌아가도록 하자. p472
제4장 아피아누스 Apphianus
후일 정권을 장악하게 된 막시미누스 카이사르 Maximinus Cesar 는 하나님께 대한 선천적인 증오심과 신앙에 대한 반감을 나타내려는 듯, 이전의 어떤 황제들보다 더욱 큰 박해를 하려고 무장했다. 그리하여 백성들 사이에 상당한 혼란이 야기되었다. 사람들은 이곳 저곳으로 흩어져 어떻게 해서든 위험을 피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제국 전역에 지극히 큰 폭동이 있었다. 이 때 순교한 복되고 진실로 흠없는 어린 양, 훌륭한 순교자 아피아누스 Apphianus 의 거룩한 사랑과 거침없는 신앙고백은 어떤 표현으로도 충분히 기록할 수 없을 것이다. 그가 가이사랴 성문 앞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유일하신 한 분 하나님을 향한 굳건한 믿음의 본보기를 보였을 때 그의 나이는 겨우 20세였다. 그는 대단히 부유한 집안의 아들이었으므로 처음에는 희랍학문을 배우려는 목적으로 대부분의 시간을 베리투스 Berytus 에서 보냈다. 그 도시의 한복판에 거하면서도 그는 청년의 정욕의 유혹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들보다 훌륭했으며, 육체의 정력이나 청년들과의 교제로 품행을 더럽히지 않았고, 오히려 온건하고 분별있는 생활을 받아들여 정직하고 경건한 생활을 했으며, 모든 대화도 기독교 신앙을 신봉하는 사람에 합당하도록 스스로를 규제했다. 만일 그의 조국이 어디인지를 언급하여 이처럼 고귀한 신앙의 용사를 배출한 곳을 경축해야 할 필요가 있다면 기꺼이 그렇게 하겠다. p473
이 청년이 태어난 곳은 리시아 Lycia 의 파가스 Pagas 이다. 그곳은 결코 초라한 도시가 아니며 아마 독자들 중에도 그곳을 아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는 베리투스에서 공부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부친을 비롯한 그의 친지들은 경건의 도를 따르는 생활에 찬성하지 않았으므로 그는 그 지방에서 최고의 지위를 누리고 있는 부친과 함께 사는 것을 견딜 수 없었다. 그는 마치 성령, 그리고 일종의 선천적인, 또는 영감되고 순수한 철학의 강권을 받은 듯, 신앙의 도를 생활의 영광보다 더 좋은 것으로 여기고, 육체의 안일을 멸시하여 몰래 친구들로부터 도망쳐 나왔다. 그는 하나님을 믿고 신뢰했기 때문에 일상생활에 필요한 경비에는 조금도 관심을 갖지 않고 마치 성령의 인도를 받은 듯 가이사랴로 갔다. 그곳에는 그의 신앙을 위한 순교의 면류관이 예비되어 있었다. 그곳에서 우리와 교제하며, 짧은 기간이나마 많은 성경공부를 했고 적절한 근행과 수행에 의해 마음의 준비를 한 그는 놀라지 않고서는 목격할 수 없는 훌륭한 인생의 종말을 이루었다. 이 청년이 신앙과 영혼을 위한 열정을 거리낌 없이 증거하는 말을 듣거나 또는 그의 담대하고 정력적이며 굳센 태도를 볼 때 누구나 경탄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p474
폭군 막시미누스 Maximinus 는 우리를 대적하여 두 번째 박해를 일으킨 지 3년이 되는 해에 다음과 같은 요지의 칙령들을 공포했다. 즉 어느 곳에서나 모든 사람들은 공개적으로 희생 제사를 드릴 것이며, 각 도시의 통치자들은 주의 깊고 부지런히 이 일을 실시하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전령들은 총독의 명령에 따라 가이사랴 전역을 다니며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두 우상의 신전으로 나오라고 선포했다. 군대의 지휘관들은 명단을 보고서 사람들을 한 사람씩 호명하여 불러냈고, 이교도들이 사방에서 떼를 지어 밀려들어왔다. 바로 이 때 겁 없는 청년은 함께 거하고 있던 사람들 중 아무에게도 자신의 뜻을 알리지 않고 가만히 나아가 총독의 주위에 있는 군대에 들키지 않고 마침 헌주를 바치고 있는 우르바누스에게 접근했다. 그는 담대하게 우르바누스의 오른손을 붙잡아 제물을 드리는 행위를 갑작스레 중단시켰다. 그리고 엄숙하고 진지한 말로 그에게 잘못된 생각을 버리라고 권고했으며, 유일하고 참되신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과 악마에게 제물을 드리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했다. 아마도 그 청년은 거룩한 능력의 충동에 의해 이러한 행동을 했을 것이다. 성령께서는 이 행동에 의해 기독교인들은 한 번 받아들였던 신앙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며 또한 온갖 위협 및 그에 따른 형벌보다 위에 있을 뿐 아니라 이것들을 극복하고 초월하여 자유로이 행동하며 고귀하고 담대한 말로 자신의 신앙을 밝히며, 혹시 박해자들을 무지로부터 구원할 수 있다면 그들을 권면하여 유일하고 참되신 하나님을 인정하게 하려 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증거하게 한 것이다. p475
이 청년은 이처럼 담대한 행동을 한 뒤 능히 예측되는 바와 같이 사나운 짐승 같은 군인들에게 붙잡혀 괴롭힘을 당했다. 그리고 온몸에 매질을 당하면서도 영웅적으로 견뎌낸 뒤 감옥에 갇혀 다시 명령이 내려지기를 기다렸다. 감방에서 그는 사지를 잡아당기는 고문 기구에 얹혀 밤낮으로 두 발을 잡아 늘리는 고통을 당했다. 다음날 그는 판사에게 불려갔다. 판사는 그가 제물을 드리게 하려고 폭력을 사용했으나 그는 고통과 무시무시한 고문을 꿋꿋이 견뎌냈다. 그의 양 옆구리는 한 두 번이 아니라 여러 차례 찔리고 살이 벗겨져 뼈와 창자가 드러났고, 동시에 얼굴과 목을 얼마나 맞았는지 멍이 들고 부어올라 전에 그를 알고 지낸 사람들도 그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할 정도였다. 그런데도 그는 굴복하지 않았으므로, 형리들은 총독의 명령에 따라 그의 두 발을 기름을 흠뻑 적신 천으로 덮고서 거기에 불을 붙였다. 이 복된 청년이 견뎌낸 고통은 도저히 말로 설명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여겨진다. 불은 그의 살을 태우고 뼈 속으로 파고들어 체액이 마치 밀랍처럼 녹아 방울방울 떨어졌다. 그런데도 그는 굴복하지 않았으므로 패배한 그의 적수는 그의 인간의 능력을 초월한 인내심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라 그를 다시 감옥에 가두었다. 사흘째 되는 날 그는 다시 판사 앞에 불려갔으나 여전히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의 굳은 의지를 밝혔으므로, 이미 반죽음이 되어 있던 그는 바닷물에 던져져 죽음을 당했다. 그 뒤에 일어난 일은 직접 목격하지 않은 사람은 거의 믿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사건들을 어쩔 수 없이 기록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가이사랴의 모든 주민들이 그 사실의 증인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연령고하를 불문하고 이 광경을 직접 보지 않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이 진실로 복되고 거룩한 청년이 깊은 바다에 던져진 순간, 갑자기 바다와 온 하늘에 으르렁거리며 이상하게 우당탕거리는 소리가 퍼졌다. 마치 지구와 온 도시가 그 소리로 인해 흔들리는 것 같았다. 동시에 놀랍고도 갑작스레 그 거룩한 순교자의 몸이 흔들리면서 바다는 마치 그의 시신을 감당할 수 없다는 듯이 그의 시신을 도시의 성문 앞에 떨어뜨렸다. 훌륭한 아피아누스 Apphianus 는 크산티쿠스 Xanthicus 월 2일, 로마력으로는 4월 2일, 금요일에 순교했다. p476
제5장 순교자 울피안과 이데시우스
같은 시대, 거의 같은 시기에 두로 Tyre 에 울피아누스 Ulpianus 라는 청년이 있었다. 그는 무시무시한 고문과 가혹한 태형을 당한 뒤 개 한 마리와 독사와 함께 생가죽 부대에 넣어져 바다에 던짐을 당했다. 그런고로 그도 역시 아피아누스와 더불어 순교자의 반열에 놓일 권리가 있다. 그로부터 얼마 안 되어 이데시우스 AEdesius 도 역시 똑같은 고난을 당했다. 그는 육체적으로 아피아누스의 친형제였으며 또 하나님 안에서도 형제였다. 그는 수없이 많은 신앙고백을 하고 감옥 속에서 오랫동안 고통을 당한 뒤, 판사들의 선고에 따라 거듭 팔레스틴의 광산으로 보내졌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생활하고 교제한 뒤 그의 복장과 태도는 철학자처럼 되었다. 그는 자기 형보다 더 훌륭한 교육을 받았으며 여러 부문의 철학을 공부했다. 그는 알렉산드리아에서 판사가 그곳의 기독교인들을 정죄하며 끝없이 그들을 추적하며, 위엄있고 지체높은 사람들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모욕하고, 또 지극히 정숙한 부인들과 기독교에 헌신한 처녀들을 포주에게 넘겨주어 온갖 능욕과 음란한 일을 겪게 만드는 것을 보았다. 그는 이러한 일을 보고서 자기 형이 했던 것과 비슷한 일을 했다. 그는 이러한 일들을 그대로 참고 볼 수 없었으므로 단호하게 결심하고 판사에게 접근하여, 자기의 칼과 행동으로 그에게 치욕을 주었다. 이 때문에 그는 여러 형태의 고문을 당했지만 용감하게 견뎌냈고, 마침내 형 아피아누스와 마찬가지로 바닷물 속에 던짐을 당했다. 그는 형이 죽은 뒤 얼마 안 되어 이러한 죽음을 당했다. p477
제6장 순교자 아가피우스
박해가 시작된 지 4년이 되었다. 12월 18일, 즉 디우스 Dius 월 20일 안식일 전 금요일, 가이사랴에서는 특기할만한 일이 발생했다. 이 일은 폭군 막시미누스가 자기 생일에 공개적인 연회를 벌여 많은 사람들을 기쁘게 하려는 자리에서 발생했다. 당시의 관습에 의하면 황제가 참석했을 때에는 다른 때보다 더 훌륭한 연회를 벌여야 했고, 또 구경꾼들을 더욱 즐겁게 하기 위해 일상적인 것보다는 새롭고 진기한 광경을 보여주었다. 따라서 인도나 이디오피아, 또는 다른 지방에서 동물들을 수집해오고, 때로는 교묘한 재주를 가진 사람들이 진기한 묘기를 보여주기도 했다. 그런데 이날의 경기는 황제가 주최하는 것이었으므로 이런 경기들보다 더 특이하고 진기한 경기를 준비해야 했으므로 우리 순교자 중 한 사람이 원형경기장에 들어가 유일하고 참된 신앙을 위한 경기를 벌여야 했다. 이 사람이 앞에서 언급했던 아가피우스 Agapius 로서, 그는 테클라 Thecla 와 함께 사나운 짐승에게 던져졌다. 그는 3번이나 죄수들과 함께 감옥을 떠나 경기장으로 갔으며, 판사들은 그에 대한 연민, 또는 그의 마음을 바꿔보려는 소망에서 여러 가지로 그를 위협했다. 그의 싸움은 계속 뒤로 연기되다가 드디어 황제가 참석한 경기장에서 싸우게 되었다. 그는 마치 그 시간을 위해, 또 제자들이 주님을 믿는다고 고백해 임금들 앞에 끌려가게 될 것이라고 하셨던 주님의 말씀의 성취를 위해 의도적으로 남겨진 사람 같았다. 그는 자기 주인을 죽였다는 죄목으로 기소된 죄수와 함께 경기장에 끌려갔는데 이 살인자는 짐승들에게 던짐을 당하려는 순간 관용과 자비를 얻었다. 그리하여 경기장 안에는 황제가 피로 얼룩진 살인을 지극히 관대하게도 사면해주고 자유와 권위를 베푼 것을 찬양하는 소리로 가득했다. 이 폭군은 이 신앙의 용사를 불러다놓고 자유를 주겠다고 약속하면서 신앙을 버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에게 가해지는 어떤 형벌도 달게 받겠으니, 그것은 자기에게 죄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우주의 하나님을 공경하기 때문이라고 큰 소리로 선언했다. 그는 이렇게 말하면서 풀어 놓여 있는 곰에게로 달려들어 그 짐승의 공격을 받았다. 사람들은 아직 숨이 붙어 있는 그를 다시 감옥으로 데려갔고 그 다음날 사람들은 그의 두 발에 돌을 매달아 바다에 던져버렸다. 그리하여 아가피우스는 순교했다. p479
제7장 순교자 데오도시아, 돔니우스, 아욱센티우스
박해가 시작된 지 5년에 접어들었다. 크산티쿠스 Xanticus 월 2일, 다시 말하자면 4월 2일, 바로 우리 주님께서 부활하셨던 날 가이사랴에서 있었던 일이다. 그리스도의 나라를 믿는 증성자 證聖者 들이 재판을 받기 위해 판사석 앞에 앉아 있었다 (증성자 : 증성자란 박해 기간 중에 자신이 기독교인임을 공개적으로 인정하고 고백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자신의 목숨이나 재산을 구하려 하지 않았고 또 자신의 주님과 거룩한 목적을 버리려 하지 않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과단성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 때 당시 18세 밖에 안 되었지만 신앙과 덕이 뛰어난 두로의 처녀 데오도시아 Theodosia 는 그들에게 인사를 하고, 가능하다면 그들이 주님 앞에 이르게 될 때 자기를 기억해달라고 부탁하려고 그들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이런 행동이 마치 불경하고 흉악한 행동이나 되는 듯, 병사들은 그녀를 체포하여 사령관에게 끌고 갔다. 무자비하고 야만적인 사령관은 지극히 두렵고 끔찍하게 그녀를 고문했다. 그는 그녀의 양 옆구리와 가슴을 베어 뼈가 드러나게 만들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여전히 숨을 쉬고 있었고 기쁘고 즐거운 얼굴을 하고 있었으므로 그는 그녀를 바다에 던지라고 명령했다. 그녀의 심문을 마친 그는 다른 증성자들을 심문하고서 그들 모두를 팔레스틴에 있는 페노 Phaeno 광산으로 보냈다. 이 일이 있은 뒤 디우스 Dius 월 5일, 로마력으로 11월 5일, 당시 장로였던 실바누스 Silvanus 가 증성자가 되었다. 그는 곧 감독이 되었고 마침내 순교의 면류관을 받았다. 판사는 불굴의 신앙을 나타낸 사람들을 광산에 보내어 일하게 했는데, 그는 먼저 그들의 발목을 뜨겁게 달아오른 인두로 지지라고 명령했다. 그는 이러한 판결을 내리면서, 끊임없이 훌륭한 신앙을 고백했던 사람을 화형에 처하라고 명령했으니, 그가 돔니우스 Domnius 이다. 돔니우스는 팔레스틴의 모든 사람들에게 정직한 사람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p480
이 일이 있은 뒤, 참으로 무서운 재난의 창시자이며 특히 그리스도의 교리를 대적하기 위한 새로운 방안을 고안해내는데 명수였던 이 판사는 기독교인들에게 전에 들어본 적도 없는 고문을 하기로 작정했다. 그는 세 사람에게 검투경기를 하라고 명했다. 그리고 지극히 훌륭하고 거룩한 장로 아욱센티우스 Auxentius 는 짐승들에게 던져주고, 또 장성한 다른 사람들은 거세한 뒤 광산으로 보내라고 명령했다.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무서운 고문을 한 뒤 감옥에 가두기도 했다. 이들 중에는 나의 지극히 사랑하는 친구이며 동료인 팜필루스 Pamphilus 가 있었다 (유세비우스는 이 사람에게서 팜필루스라는 성을 취했다. 그러나 이것은 그의 성이 아니라 친구에 대한 애정의 표시로 이해해야 한다). 그는 우리 시대의 가장 훌륭한 순교자이다. 우르바누스 Urbanus 는 먼저 팜필루스의 수사학 및 철학학문에 관한 지식을 시험해보았다. 그 뒤에 그에게 제사를 드리라고 강요했다. 그러나 팜필루스는 그의 위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제사 드리기를 거부했으므로, 화가 머리끝까지 오른 그는 그에게 더욱 괴로운 고통을 주라고 명령했다. 이 잔인하기 그지없는 괴물은 고문 도구로 팜필루스의 양 옆구리를 밭 갈듯이 갈아버렸다. 그러나 결국 그는 팜필루스에게 패배해 수치를 당했으므로 팜필루스를 다른 증성자들과 함께 감옥에 가두었다. p480
이처럼 잔인하게 성도들을 괴롭히고,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고백한 증성자들을 극단적으로 대적한 그에게 장차 어떠한 공의의 심판이 임하게 될 것인지는 이곳에서 벌어진 이 재판들의 서막을 보면 쉽사리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팜필루스에게 범죄한 뒤에도 여전히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거룩한 심판이 그에게 임했다.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높은 자리에 앉아 병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재판을 하고 팔레스틴 전역을 다스렸으며, 폭군의 동료이며 총신 寵臣 이요 빈객 賓客 이었던 그는 하룻밤 사이에 모든 직위를 빼앗기고 수치와 망신을 당하게 되었다. 우리는 그가 이전에 마치 황제를 대하듯이 그에게 아첨하던 사람들 및 자기가 다스리던 모든 백성들 앞에서 비겁하게 애원하고 간청하는 모습을 보았다. 하나님의 섭리는 이 지극히 무자비한 판사가 교만하게 의지했던 막시미누스 Maximinus 로 하여금 그를 다스릴 하나님의 공의가 되게 하셨다. 그리하여 황제는 그가 범한 수많은 죄에 대한 책임을 물어 그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그에 관한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내기로 하며, 앞으로 기회가 주어지면 기독교인들의 박해에 관여한 악인들 및 막시미누스, 그리고 그의 하수인들의 종말을 서술하게 될 것이다 (호겐 : 이미 설명한 부분도 있다. 8:13,16, 부록 I). p481
제8장 발렌티나와 파울루스, 그리고 여러 증성자들
기독교인에 대한 박해가 시작된 지 6년이 되었다. 테바이스 Thebais에서 발견되는 돌의 이름을 딴 포피리 Porphry, 斑石 채석장에는 참 신앙을 유지한 수많은 증성자들이 있었다. 이들 중에서 97명의 남자와 여자, 그리고 어린아이들이 팔레스틴의 총독에게 보내졌다. 그들은 높으신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고백했으므로 총독은 뜨겁게 달군 인두로 그들의 왼쪽 발목과 힘줄을 지졌다. 또 그들의 오른쪽 눈꺼풀과 눈동자를 베어낸 뒤 뜨거운 인두로 지져 눈을 완전히 병신으로 만들었다. 이것은 우르바누스의 후임으로 이곳에 파견되어 제국의 명령대로 행동한 피르밀리아누스 Firmilianus 의 명령에 따른 것이었다. 그는 이렇게 한 뒤에 그들을 팔레스틴의 광산으로 보내어 끊임없이 수고하고 숨막힐 듯한 노동을 하는 비참한 생활을 하게 했다. 그러한 불운한 일을 겪은 사람들은 시력을 상실했다. 한편 검투경기를 벌이라는 판결을 받은 팔레스틴 사람들은 제국의 국고지원도 받지 못했으며 그러한 경기에 필요한 훈련도 받지 못했다. 그들은 모든 총독들과 막시미누스 앞에 끌려나와 굶주림과 채찍질을 견뎌 이김으로써 지극히 고귀하고 굳건한 신앙을 나타냈다. 그들도 결국 전자와 마찬가지 일을 당했다. 이들이 잡혀 고난을 당한 뒤 얼마 안 되어 성경강독을 청취하기 위해 가자 Gaza 에 모였던 사람들이 체포되었다. 이들 중에서 몇 사람은 역시 오른쪽 눈과 왼발을 불구로 만드는 고문을 당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양 옆구리를 지극히 끔찍한 방법으로 파헤치는 큰 고난을 당했다. 어느 여인은 남자 못지않게 담대한 사람으로서 그녀를 능욕하겠다는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팔레스틴의 통치를 그처럼 잔인한 총독들에게 맡긴 폭군을 비난했다. 그녀는 처음에는 채찍질을 당했고, 다음에는 사지를 잡아당기는 고문기구 rack 위에 올려져 사지가 찢기고 양 옆구리가 벗겨졌다. 그런데도 고문을 맡은 형리는 판사의 명령에 따라 계속 가혹하게 그녀를 고문했다. p482
이 여인과 마찬가지로 영원한 순결 생활을 묵상했으며 비록 육체적으로는 연약한 여인이었으나 남성 못지않게 굳건한 정신을 소유하고 있던 또 한 여인이 이 무자비하고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광경을 그대로 볼 수 없어서 용감하게도 군중들 속에서 소리쳤다. “당신은 언제까지 내 자매를 잔인하게 괴롭힐 작정입니까?” 이 말을 들은 판사는 화가 치밀어 즉시 그녀를 체포하라고 명령했다. 그녀는 한복판으로 질질 끌려왔다. 그녀는 우리 주님의 위대한 이름에 따라 자신을 불렀다. 그는 먼저 그녀를 설득하여 희생제사를 드리게 하려 했으나 그녀가 거부했으므로 억지로 제단 앞까지 끌고 갔다. 그러나 그녀의 자매가 여전히 자신의 뜻을 지키고 있는 것을 보고서 그녀는 용감하게도 그 제단을 발로 차서 그 위에 있는 불과 모든 것을 뒤엎어 버렸다. 판사는 야생짐승처럼 격분하여 이전에 행한 그 어떤 고문보다 더 지독한 고문을 그녀에게 가했다. 그는 마치 그녀의 살을 먹으려는 듯 그녀의 몸을 찢고 상처를 냈다. 마침내 자신의 광기가 어느 정도 충족되자 그는 이 여인이 자매라고 부르는 앞서 그 여인과 이 여인을 함께 묶어 화형에 처하라고 명령했다. 이 두 여인 중 전자는 가자 Gaza 사람이며, 후자는 발렌티나 Valentina 라는 가이사랴 사람으로서 많은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사람이었다. p483
이들이 순교한 뒤에 있던 복된 파울루스 Paulus 의 순교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파울루스도 이 두 여인과 같은 시기에 동일한 선고를 받았다. 그는 처형장에서 형리가 그의 목을 베려 할 때 잠시 시간을 달라고 요청했다. 그리하여 허락을 받게 되자 그는 크고 분명한 음성으로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는 먼저 동료신자들을 용서하시고 그들에게 평화와 자유를 허락해 주시길 간절히 구했고, 다음에는 유대인들이 회심하여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기도했다. 다음으로는 사마리아인들의 회심을 구했으며, 하나님을 알지 못해 오류를 범하고 있는 이방인들이 하나님을 알고 참된 신앙을 받아들이기를 기도했으며, 주변에 둘러 서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했다. 그는 참으로 위대하고도 말로 표현할 수 없이 마음이 넓은 사람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이렇게 기도한 뒤에 자신에게 사형을 선고한 판사, 제국의 통치자들, 그리고 이제 그의 목을 베려하는 형리를 위해 전능하신 하나님께 기도하길 자기를 대적한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말라고 간구했다. 그는 이처럼 큰 소리로 기도하여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감동해 눈물을 흘리게 한 뒤, 자세를 가다듬고 목을 내밀어 칼을 받았다. 그는 7월 24일, 파네무스 Panemus 월 25일에 순교했다. 이 세 사람이 순교한 뒤 얼마 안 되어 이집트에서 130명의 신앙의 용사들이 눈이 뽑히고 발목에 인두질을 당해 불구가 되는 고난을 겪었다. 막시미누스는 이들 중 일부는 팔레스틴의 광산으로, 그 나머지는 킬리키아로 유배시켰다. p484
제9장 더욱 거세진 박해의 불길 : 순교자 안토니누스, 제비나, 게르마누스
제10장 금욕주의자 페트루스, 마르시온주의자 아스클레피우스, 그 밖의 순교자들
제11장 팜필루스와 여러 순교자
제12장 교회의 고위 성직자들
제13장 실바누스와 존, 그리고 30명의 순교자들
박해가 시작된 지 7년이 지나면서 우리를 대적하는 조처들은 다소 완화되는 듯한 감을 주었지만 여전히 박해는 계속되어 8년에 접어들었다. 당시 팔레스틴에 있는 동광 銅鑛 에는 상당수의 증성자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집회소까지 건설할 정도로 자유로운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대단히 악하고 야만적인 사람이 그 지방의 총독으로 부임하여 그들의 생활방식과 모든 상태를 확인한 뒤 황제에게 그 모든 사실을 알렸으며, 또 온갖 지혜를 동원해 그들을 중상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 후 그 광산의 감독으로 임명된 그는 마치 황제의 명령인 듯 모든 증성자들을 여러 무리로 나누어 키프러스, 또는 리바누스 Libanus 로 보냈고 또 어떤 사람들은 팔레스틴의 여러 지방으로 흩어 보내면서 그들 모두에게 각기 다른 일을 시켰다. 또 그들 중에서도 출중해 보이는 사람들을 선별해 그 지방의 사령관에게 보냈다. 이들 중에 두 사람은 이집트 사람으로서 펠레우스 Peleus 감독과 닐루스 Nilus 감독이었다. 또 한 사람은 장로였고, 네 번째 사람은 파테르무티우스 Patermuthius 라는 사람으로서 대단히 자비하기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사령관은 이 네 사람에게 신앙을 버리라고 요구했지만 성공하지 못했으므로 그들을 화형시키라고 명령했다. 또 늙었거나 눈이 멀었거나 육체적으로 결함이 있는 증성자들은 노동을 면제받고 각기 다른 장소에서 홀로 자신의 운명을 기다렸다. 이들 중에서 중요한 인물로는 가자 Gaza 출신의 감독 실바누스 Silvanus 가 있었다. 그는 참된 기독교 신앙의 본을 나타냈다. 이 사람은 박해의 첫날부터 계속해 많은 싸움을 하면서도 계속 신앙을 지키면서 그때까지 살아왔으며, 팔레스틴에서의 모든 싸움을 최후로 인봉한 인물이었다. p496
많은 이집트인들이 그와 교제를 나누었는데, 그 중에는 존 John 이라는 사람도 있었다. 그는 누구보다 기억력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존은 이미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신앙 때문에 두 눈을 뽑히고 뜨거운 인두로 지져 발이 불구가 되었다. 그러나 이미 시력을 상실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뜨겁게 달아오른 인두로 자기 눈을 또 지짐당했다. 학살자들은 갖은 잔인성과 무자비함, 온갖 야만적이고 짐승같은 일을 자행했다. 그는 탁월한 기억력은 물론 놀라울 정도로 철학적인 생활과 습관을 갖고 있었다. 그는 사도 바울의 말과 같이 모든 성경을 돌, 비석이나 짐승의 가죽, 또는 세월이 흐르면 좀이 먹어버리는 종이 위에 쓰지 않고 육비, 즉 마음 속, 조명된 영혼과 순수한 마음의 눈 위에 기록했다. 그는 율법서, 예언서, 사도들의 서신, 복음서의 어느 구절이나 자기가 원하는 때에 암송할 수 있었다. 나도 언젠가 그가 수많은 사람들이 모인 곳 한복판에 서서 어느 성경 구절을 암송하는 것을 보고서 놀란 일이 있다. 처음에 멀리서 그의 음성을 들었을 때 나는 그가 예배 때에 하듯 성경을 낭독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가까이 가보니 그의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눈을 똑바로 뜨고 그를 바라보고 있었고, 그는 혼자서 마치 선지자처럼 아무 가식 없이, 그리고 육체적으로 건강한 사람들 보다 더 힘차게 성경을 암송하고 있었다. 나는 하나님께 찬양과 영광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으며, 또 사람은 겉으로 나타난 외관에 의해 판단할 것이 아니라 영과 마음에 담긴 진리에 따라 판단해야 한다는 분명하고 또렷한 증거를 보았다. 왜냐하면 그는 육체적으로는 불구자였지만 탁월한 능력과 덕을 나타냈기 때문이다. p497
그 밖에도 각기 다른 곳에서 홀로 살아가며 항상 의무를 수행하고 기도나 금식 및 여러 가지 근행에 몰두하고 있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 하나님은 오른팔을 펴시고 그들에게 유익한 결말을 허락해 주셨다. 원수는 끊임없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그들을 더 이상 참고 볼 수 없었으므로 골칫거리인 이들을 세상에서 제거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이러한 일을 할 수 있는 권력을 주시고 또 그의 분명한 악을 억제하지 않으셨고 또 그들로 하여금 많은 싸움에서 상을 얻게 하셨다. 그리하여 지극히 증오스러운 막시미누스의 명령에 따라 하루에 39명이 참수되었다. 지금까지 8년 동안의 박해 기간 중 팔레스틴에서 있었던 순교를 기록했다. 박해는 처음 교회의 파괴로부터 시작하여, 여러 통치자들 밑에서 때때로 발생한 반란 때에 더욱 치열해졌다. 이 기간 동안 훌륭한 신앙의 용사들은 수많은 싸움을 해야 했다. 그리하여 리비아와 이집트, 시리아, 그리고 멀리 동쪽으로 일루리곤 사람들 중에서도 수많은 순교자들이 배출되었다. 이 국가들 외에 이탈리아와 시실리, 고올 지방, 그리고 서쪽으로 스페인, 모리타니아, 아프리카의 신자들은 2년 동안 밖에 박해를 받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이 지방 신자들의 신앙과 단순함을 아끼셨는지 그들에게는 곧 하나님의 평화와 섭리로 그들을 축복하셨다. 전에는 로마인들의 연대기에 결코 기록된 적이 없는 일이 우리 시대에 기대를 뒤엎고 이루어졌다 (호겐 : 기독교를 정식 공인하는 콘스탄틴의 ‘밀라노 칙령’ 사건은 유세비우스 생전에 터진 특종이다). 이 박해기간 중에 제국은 둘로 양분되었다. 한 쪽 제국의 형제들은 평화를 누렸고, 반대편 제국에 살고 있는 형제들은 계속해 무수한 시련을 겪었다. 그러나 곧 하나님께서 은총으로 우리에게 자비하시고 은혜로운 보살핌을 나타내셨으므로, 우리를 박해했던 통치자들은 참으로 놀라운 방법으로 마음을 바꾸어 퇴각을 고려하게 되었고, 자비한 법령과 보다 온유한 조례를 발표해 박해의 불을 껐다. p498
제9권
제1장 허울뿐인 관용
과거에 공표했던 제국의 칙령들을 폐지한다는 명령이 아시아 전역의 모든 지방에까지 공표되었다. 가장 불경한 사람으로서 유일하신 하나님만 인정하는 종교를 적대하던 동로마제국의 폭군 막시미누스는 이러한 명령에 만족하지 않았으므로 칙령을 발표하는 대신 자기 휘하에 있는 통치자들에게 우리를 대적하는 전쟁을 늦추라는 구두명령을 내렸다. 그는 자기의 상관들의 판단에 반대하거나 다른 태도를 취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그 칙령을 발표하지 않았고 (호겐 : 막시미누스는 정제가 아닌 동방 부제였다. 그의 상관, 즉 동방 정제는 갈레리우스이다), 또 자기가 다스리는 지방에 그것이 공표되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에서 자기의 총독들에게 문서가 아닌 구두로 박해를 늦추라는 명령을 내렸다. 총독들은 서신으로 그 명령을 서로에게 전했다. 지방 통치자들 중에서 최고의 지위와 권력을 갖고 있던 사비누스 Sabinus 는 황제의 뜻을 라틴어로 기록한 서신을 각 지방의 총독들에게 보냈다. 그 서신을 번역해보면 다음과 같다. “우리의 주권자이시며 지극히 존엄하신 황제 폐하께서는 이미 지극히 참을성 있고 진지하게 만백성이 참되고 거룩한 길을 따라 살도록 인도하셨다. 그러므로 로마인들은 물론 다른 관습을 좇는 백성들일지라도 불멸의 신들을 예배해야만 했다. 그러나 어떤 백성들은 완고하고도 굽히지 않는 결심을 가지고 일어나 황제의 명령에 복종하라는 권면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어떤 형벌을 가해도 자기의 뜻을 버리지 않았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관습으로 인해 위험을 자초하는 일이 발생했으므로 지극히 위대하신 황제 폐하께서는 그러한 이유로 사람들이 그처럼 큰 위험을 맞게 되는 것은 폐하의 뜻에 어긋난다고 생각하시게 되었다. 따라서 폐하께서는 기독교인들이 자기 관습대로 예배를 보다가 발각되더라도 그들을 괴롭히거나 위험하게 하지 말며, 또 어떤 사람도 그러한 구실 하에 처벌하지 말라고 당신들에게 전하라고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그처럼 오랜 세월동안 그들로 하여금 완고한 길을 버리게 하려고 애썼지만 결국 그렇게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당신들은 총독, 지방장관, 각 도시의 장관에게 편지를 보내 그들이 더 이상 이 칙령 (또는 일) 에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없음을 알게 해야 한다” p501
이 편지를 받은 각 지방의 통치자들은 이 편지에 기록된 결정이 진실이라고 생각하고서 여러 지방의 장관과 행정관, 관리인들에게 서신을 보내 황제의 뜻을 전했다. 그들은 이런 사실을 서신으로만 강요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황제의 명령을 시행하기 위해 보다 적극적인 조처를 취했다. 그리하여 신앙 때문에 감옥에 갇혀 있던 사람들을 석방했고, 광산에 유배되어 노동을 하던 사람들도 풀어주었다. 그들은 황제의 참뜻을 제대로 알지 못했기 때문에 이러한 잘못을 범한 것이다. 모든 도시에서 마치 칠흙 같은 어둠 속을 비추는 섬광처럼 갑작스레 이러한 일들이 시행되면서, 전과 같이 교인들이 모이고 집회 및 기도회가 개최되는 모습을 누구나 볼 수 있게 되었다. 이교도들은 사태가 이처럼 이상하게 변한 것, 그리고 기독교인들의 하나님이 유일하고 참되신 하나님이라고 외치는 것을 듣고 크게 놀랐다. 박해의 투쟁을 용감하고 신실하게 통과해낸 우리 형제들은 다시 모든 사람들과 함께 위대한 특권을 얻었다. 그러나 과거 유혹에 굴복해 영혼이 흔들리고 신앙을 버렸던 사람들은 간절히 자신의 치료책을 구해 권세 있는 자들에게 자신의 안전을 구했고, 자기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시길 하나님께 구했다. 또 훌륭한 신앙의 용사들은 광산에서 노동하던 일에서 해방되어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들은 기쁘고 즐겁게, 그리고 어떤 말로도 형언할 수 없는 즐거움과 확신을 갖고서 도시로 나아갔다. 무수한 사람들이 고가도로나 광장으로 다니며 시와 노래로 하나님을 찬양했다. 그리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무자비한 형벌을 받아 족쇄를 채운 채 조국을 떠나야 했던 사람들이 밝고 환희에 찬 얼굴로 집에 돌아와 난롯가에 앉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전에는 우리를 비방하고 대적하던 사람들까지도 이러한 일로 인해 우리를 축하해 주었다. p502
제2장 사태의 역전
그러나 이러한 상황을 견딜 수 없었으며 모든 선한 사람과 선의 원수인 폭군, 동로마제국의 황제는 이러한 사태가 여섯 달 이상 지속되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어떻게 해서든 이 평화를 파괴할 방안을 모색하던 그는 먼저 우리가 공동묘지 (카타콤베) 에 모이는 사실에서 구실을 찾아 우리를 억누르려 했다. 그는 몇 명의 파렴치한 사람들로 하여금 안티오크 주민들을 선동해 기독교인들을 안티오크에 살지 못하게 해달라고 자신에게 청원하도록 했으며, 또 역시 여러 사람들에게도 돈을 주며 그렇게 하라고 매수했다. 안티오크에서 이 일을 하는데 있어서 가장 큰 활동을 한 주동자는 데오텍누스였다. 그는 대단히 난폭하고 교활하며 악한 사람이었다. 그는 그 도시의 검사관이었던 듯하다. p502
제3장 다시 안티오크에 세워진 신상 神像
그는 온갖 수단을 동원해 우리를 대적하는 전쟁을 일으키고, 마치 도둑이나 악인들을 색출하듯이 우리 형제들을 색출해 체포하게 했으며, 우리를 중상하고 비난하고, 많은 형제들을 처형한 뒤, 마침내 주피터 필리우스 Jupiter Philius 의 신상을 세우고 여러 가지 헛된 의식과 마술을 행했다. 그는 의식의 개시를 시작하는 주문을 낭송하고, 그 신상 앞에서 무시무시하고 상서로운 신비의식을 거행했으며 저주스러운 속죄방법을 꾸며냈다. 그는 나아가 신탁을 받아 말하는 체하여 황제까지 속이려 했다. 그리하여 그는 황제에게 아첨의 말을 하여 기독교인을 대적하는 악마를 일으켜 세웠으며, 하나님께서 자기의 원수인 기독교인들을 그 도시와 인접 지역에서 쫓아내라고 명령하셨다고 말했다. p503
제4장 기독교인들을 대적하기 위해 발표된 법령
이 일에 주도권을 잡고 있었던 이 사람이 성공을 거두었으므로, 역시 같은 국가 (막시미누스) 의 통치를 받고 있는 여러 도시의 관리들도 이와 비슷한 법령들을 발표했다. 각 지방의 총독들은 황제가 좋아하리라고 생각해 백성들에게도 역시 같은 일을 하라고 제안했다. 황제는 이러한 법령들을 기꺼이 승낙했으므로 다시 우리에 대한 박해의 불이 붙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막시미누스는 모든 도시마다 신상들을 섬길 사제들을 임명했고, 그들 위에 대제사장을 두었다. 이들은 공적인 생활에 있어서 대단히 뛰어나 각기 자신의 활동 분야에서 명성을 얻었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또한 자신이 섬기는 사물들에 대한 뜨거운 정열로 가득 차 있었다. 간단히 말해서 황제의 어리석은 미신은 백성들은 물론 그의 휘하에 있는 통치자들에게까지 뻗어가, 그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온갖 방법으로 우리를 대적하기에 이르렀다. 그들은 이렇게 살인을 하고 끊임없이 우리에게 새로운 음모와 위해를 가하는 것이 황제가 그들에게 베푼 자비함에 대해 감사를 나타내는 방법이라고 여겼다. p504
제5장 거짓법령
그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온갖 모독으로 가득 차 있는 빌라도의 법령들을 만들어 이것을 황제의 승낙 하에 황제에게 속해있는 제국전역에 보냈다. 동시에 모든 도시와 인접 지방에 이 법령을 발표하고, 또 그것을 교사들에게 주어 학생들에게 그것을 공부하고 암기하게 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러한 일들이 진행되고 있을 때, 페니키아의 다마스쿠스의 사령관 둑스 Dux 는 광장에서 평판이 좋지 않은 여인들을 체포했다. 그는 그들에게 고문을 하겠다고 위협하면서 자신이 한 때 기독교인이었으며 기독교인들과 함께 있으면서 범죄행위를 했다고 기록하여 공개적으로 발표하라고 강요했다. 즉 그는 그들이 교회 안에서 음탕한 행동을 했고 그 밖에도 수많은 욕을 했다고 하여 우리 신앙을 비방하게 했다. 그는 이들의 자백을 법령 안에 삽입하여 황제에게 전했다. 황제는 즉시 그 문서를 각처에 발표하라고 명령했다. p504
제6장 이 시기에 순교한 사람들
이 사령관은 얼마 안 되어 자살하여 자신의 악행에 대한 형벌을 받았다. 그러나 그 동안 우리를 가혹하게 박해하고 유배시키는 일이 다시 시작되었다. 모든 지방의 통치자들이 도처에서 우리를 박해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거룩한 말씀에 관한 탁월한 지식을 가진 사람들이 체포되어 무자비하게도 사형선고를 받았다. 페니키아의 에메사 Emesa 에서는 세 사람이 스스로 기독교인임을 고백하고 사나운 짐승의 먹이가 되었다. 이들 중에 실바누스 Silvanus 는 대단히 늙고 존경받는 감독으로서 40년간 사역한 사람이었다. 또 피터는 알렉산드리아의 교회들을 다스린 훌륭하고 모범적인 감독이었다. 그는 성경에 대한 지식이 뛰어났고 모범적인 생활을 했다. 그는 아무런 이유도 없이 체포되어, 황제의 명령에 따른 것인 듯 갑자기 참수되었다. 여러 명의 이집트 감독들도 그와 함께 같은 형벌을 받았다. 루시아누스 Lucianus 는 모든 면에 탁월하고 생활에 절제가 있었으며 성경에 능통했다. 그는 안티오크 교회의 장로였는데 니코메디아로 끌려갔다. 마침 그곳에 황제가 머물고 있었는데 그는 총독 앞에서 자신의 교리를 옹호하다가 투옥되어 살해되었다. 막시미누스는 참으로 짧은 기간에 우리를 박해하기 위한 모든 준비를 갖추었으므로 새로이 시작된 박해는 먼젓번보다 더 가혹할 것이었다. p505
제7장 우리를 박해하기 위해 발표되고 기둥에 새겨진 법령들
우리를 대적하여 여러 도시에서 발표된 법령들, 그리고 여기에서 첨부된 황제의 칙령 사본들은 동판에 새겨 세워 놓았는데, 이것은 이전에 어느 곳에서도 없었던 일이다. 학교의 학생들은 하루 종일 꾸며낸 보잘 것 없는 법령, 그리고 예수와 빌라도의 이름을 외워야 했다. 이제 나는 동판에 새겨넣은 막시미누스의 서신을 소개하여 하나님께 대한 그의 교만하고 자고한 마음, 그리고 이 불의한 악인을 향해 발휘하신 하나님의 공정하시고 세심한 증오심을 나타내보려 한다. 하나님의 공의로운 분노는 곧 그를 엄습했고, 그는 그것에 의해 계속 압박을 받았으므로 그다지 오랫동안 우리를 대적하는 법령을 만들고 적대감을 표현하지 못했다. 그 법령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p506
기독교인을 박해하려는 법령을 받고서 응답한 황제의 서신 (두로 Tyre 에 있는 동판에서 베낀 것)
“드디어 연약한 인간 정신의 능력으로 모든 오류의 안개를 깨뜨리고, 미혹의 구름을 흩을 수 있게 되었다. 이것들은 과거 불경하다기보다 오히려 불쌍하고, 파괴적인 무지와 암흑 속에 싸여있는 인간의 이성을 괴롭혀왔던 것들이다. 우리는 그것이 불멸의 신들의 선한 섭리에 의해 규제되고 강화된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다. 그것은 말할 수 없이 우리를 기쁘고 즐겁게 했으며 당신의 경건한 결심을 충분히 증명해 주었다. 우리는 헛된 말이 아닌 계속적이고 훌륭한 행위에 의해 불멸의 신들에 대한 믿음을 나타내야 한다. 이 일이 있기 전까지는 불멸의 신들에 대해 당신이 품고 있는 존경과 경외심을 아무도 알지 못했다. 이제 당신의 도시는 마땅히 불멸의 신들의 거처요 소재지로 불려야 한다. 왜냐하면 그 도시에 거룩한 신들이 임재하여 거하기 때문에 번성한다는 것이 분명히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일 밉살스럽고 오만한 신자들이 교묘하게 다시 침투해 들어오는 것을 발견하거나, 또 이미 오래 전에 꺼버린 화장 火葬 용 장작불이 다시 강하게 솟아올라 꺼져버린 횃불에 불을 붙이게 된다면 당신의 도시는 지역적 이익을 상관하지 말고 또 우리에게 형식을 갖춰 탄원할 필요 없이 즉시 지체치 말고 우리의 신앙의 도피처를 제공하라. 이제 그곳은 모든 신앙의 수도이니, 우리에게 치료와 위안을 베풀라. p507
불멸의 신들은 당신의 신앙심과 경건함 때문에 당신에게 그처럼 유익한 정신을 주셨을 것이다. 그러므로 지고하고 강대하신 주피터 Jove 신은 당신의 도시를 다스리며, 당신 조국의 신들과 여인과 아이들 및 가정들을 치명적인 페스트로부터 구해주셨으며, 또 당신에게 유익한 조언을 주입해주어 불멸의 신들을 예배하고 신성한 의식을 준행하는 것이 얼마나 훌륭하고 고결하고 유익한 일인지 보여주고 증명해 주었다. 신들의 은혜로운 사랑 때문에 땅은 씨앗을 거부하여 농부들을 실망시키지 않으며, 불순한 전쟁이 세상에 발붙이지 못하며, 또 타락한 대기 속에서 인간의 육체가 쇠약해져 죽음에 이르지 아니하며, 폭풍이 불어와 바닷물이 크게 흉용하지 않으며, 또 예상외의 태풍으로 사방이 파괴되는 일이 일어나지 않게 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할 만큼 이성과 오성이 없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또 자애로이 우리에게 양분을 공급하는 지구가 진동해 땅 속 깊은 곳이 솟아오르고 높은 산이 함몰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은 것도 신들의 보호하심 때문이다. 이것들보다 더 지독한 재난들이 자주 발생해 왔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헛되고 미혹적이며 파괴적인 오신들이 무법한 사람들의 마음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여 거의 모든 세계를 더럽힌 결과이다” p508
그는 조금 뒤에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이삭이 잔뜩 패어 넘실거리는 넓은 들판, 그리고 때에 따라 비가 내리고 기온이 적절하여 온갖 초목으로 반짝이고 있는 초원을 보라. 신들에 대한 당신의 신앙심과 희생제사, 그리고 공경심으로 말미암아 전능하고 강대한 마르스 Mars 신의 노여움이 진정되었다. 그러므로 백성들로 하여금 평온함과 견고한 평화를 누리며 기쁨과 즐거움으로 충만하게 하라. 맹목적인 망상과 어리석은 오신을 버리고 올바르고 건전한 정신을 되찾은 사람들은 갑작스런 폭풍이나 몹쓸 병에서 회복된 사람들처럼 더욱 즐거워해야 하며, 남은 여생 동안 즐거운 열매를 맛보아야 한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계속해 밉살맞고 어리석은 신앙을 고집한다면 당신의 뜻에 따라 그들을 당신의 도시나 영역 밖으로 추방하라. 그리하여 당신의 도시가 당신의 열정에 합당하고 훌륭하게 되어 모든 부패와 불경으로부터 벗어나 오직 타고난 성품대로 불멸의 신들에게 합당한 신성한 의식을 거행하여 공경하도록 하라. 이 문제에 관한 당신의 요청은 지극히 타당한 것이므로 우리는 당신이 아무런 탄원을 하지 않더라도 경건한 당신의 뜻을 이루는데 필요한 특권을 당신에게 부여하려 한다. 당신이 이 일을 이루는데 필요한 것들을 제시하면 우리는 즉시 허락할 것이다. 이러한 특권이 당신의 도시에 주어지는 것은 불멸의 신들에 대한 당신의 헌신적인 신앙의 증거가 될 것이며, 또 당신이 이러한 평생의 목적에 합당한 상으로 우리의 자비를 얻었다는 사실을 증거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증거는 당신의 후손들에게 길이 전해질 것이다” 이처럼 우리를 대적하는 서신들이 모든 지방에 발송되어 우리의 모든 선한 소망을 끊어버렸다. 우리에게서 모든 소망이 이처럼 갑자기 사라졌으며 우리를 박해하는 법령을 실시할 대리인들이 여러 곳에서 그것을 실시하고 있을 때, 교회의 보호자이신 하나님께서는 폭군의 교만하고 뽐내는 입을 닫게 하시고 우리를 위한 신적 개입을 나타내셨다. p509
제8장 그 이후의 사건들 : 기근, 페스트, 전쟁
일반적으로 겨울에 내리던 비와 소나기가 내리지 않았다. 그리고 뒤이어 전례 없는 기근이 임했고, 또 페스트가 창궐했다. 그리고 또 다른 종류의 질병이 퍼졌는데 그것은 일종의 궤양으로서 염증을 수반했기 때문에 등창이라고 불렀다. 이 질병이 온 몸에 퍼지면 목숨까지 위태롭게 되었다. 그러나 대체로 그것은 눈 주위에만 발생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시력을 잃었다. 이러한 재난 외에도 아르메니아와의 전쟁이 폭군을 위협했다. 원래 아르메니아인들은 예부터 로마인들의 친구였으며 서로 동맹을 맺고 있었다. 그들은 기독교인으로서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지극히 귀하게 여기는 백성들이었다. 그런데 이 악하고 타락한 폭군은 그들에게 우상과 악마를 예배하라고 강요했으므로 그들은 친구가 아닌 원수가 되었고, 동맹국이 아니라 호전적인 적수가 되었다. 이 모든 환난들은 동시에 갑자기 발생해 하나님을 대적하는 폭군의 교만하고 난폭하며 방약무인한 태도를 격파했다. 그는 우상에 대한 큰 열정, 그리고 기독교에 대한 적대감을 나타내며 자신의 시대에는 결코 기근이나 페스트나 전쟁이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했었는데, 이런 일들이 한꺼번에 그에게 임해 그의 죽음의 서곡을 연주했다. p510
결국 그는 아르메니아와의 전쟁에서 패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가 다스리는 도시의 주민들은 기근과 페스트로 인해 무섭도록 고통을 받았다. 당시 밀 한 되의 값이 2500드라크마 (약 175달러) 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도시에서 죽어갔으며, 시골에서는 더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다. 그리하여 그가 다스리는 영토 안의 거의 모든 주민들이 식량부족과 역병으로 갑자기 죽었다. 사람들은 양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소유물 중에서 값비싼 것들을 주고서 약간의 양식을 샀다. 어떤 사람들은 양식을 사기 위해 재산을 다 팔았으므로 마침내 극도의 기아상태에 이르렀다. 어떤 사람들은 건초찌끼를 씹었고, 또 어떤 이는 독초를 먹어 불쌍하게 죽었다. 도시의 지체 높은 여인들은 굶주림으로 인해 수치심을 버리고 시장에 나가 구걸했는데 그들의 정숙한 얼굴과 점잖은 옷차림은 과거에 그들이 받은 많은 교육을 나타내주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뼈만 남아 마치 유령처럼 이리저리 비틀거리며 다녔는데 너무나 쇠약해져서 휘청거리고 온몸을 떨고 있었으며 제대로 서지도 못했다. 그들은 거리 한복판에 쓰러지면 그곳에 그대로 누워 사람들에게 빵을 조금만 달라고 애원하다가는 마지막 숨을 거두며 온 힘을 다해 “배고파 !!!” 라고 외쳤다. 한편 양식을 비축해두고 있는 사람들은 처음에는 양식을 나누어 주었으나, 수많은 사람들이 구걸하는 것을 보고서는 자기들도 머지않아 그들과 같은 운명이 될까 두려워 모질고 완고한 성품을 나타내게 되었다. 거리에는 온통 벌거벗은 시체들이 즐비하게 늘어져 있어 참으로 비참한 광경을 이루었다. 시체 중에는 이미 개에게 뜯어 먹힌 것도 있었다. 따라서 생존자들은 개들이 미쳐 사람들을 물어뜯지 않게 하기 위해 개들을 죽이기 시작했다. p510
한편 페스트도 모든 가정들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특히 양식을 충분히 갖고 있었기 때문에 굶주림을 겪지 않은 사람들이 페스트의 공격을 받았다. 부자들, 통치자들, 장군들, 수많은 관리들은 마치 페스트의 공격대상으로 예비 되어 기근을 면했던 것처럼 갑자기 죽고 말았다. 거리나 골목길이나 시장이나 어디에나 슬픔이 가득했다. 어디에서나 장례의 만가 輓歌 와 눈물밖에 볼 수 없었다. 이처럼 죽음은 기근과 페스트라는 두 개의 무기를 사용하여 치명적인 전쟁을 일으켜 단기간에 모든 가족들을 죽게 했으므로 한꺼번에 두세 명이 죽는 집도 있었다. 이것은 교만한 막시미누스와 그가 기독교인들을 박해하기 위해 전국에 발표한 법령들에 대한 보응이었다. 이 때 기독교인들의 열심과 경건함은 모든 사람들에게 명백히 드러났다. 오직 그들만이 이처럼 비참한 상황 속에서 인간성과 동정심을 행동으로 나타냈기 때문이다. 어떤 기독교인들은 하루 종일 죽은 자들을 돌보고 장례를 치렀다. 왜냐하면 아무도 돌보지 않는 시체들이 무수했기 때문이다. 또 어떤 신자들은 도시에서 굶주려 죽어가는 많은 사람들을 모아놓고 빵을 나누어 주기도 했다. 이 사실은 널리 알려졌고 사람들은 기독교인들의 하나님을 찬양했다. 그리고 이 사실로 인해 이 사람들만이 진정 경건한 이들이며, 진실로 하나님을 섬기는 무리라고 인정하게 되었다. 사태가 이렇게 되고 있을 때, 우리를 지나치게 박해한 사람들에게 이러한 재난을 보내어 진노하심을 나타내신 위대하시고 거룩하신 기독교인의 옹호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자비하고 호의적인 섭리를 다시 보여주셨다. 그리하여 이처럼 놀라운 일들을 한꺼번에 발생하게 하심을 통해 칠흙 같은 어둠 속에 있는 우리에게 평화의 빛을 비추어 주기 시작하셨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의 모든 일을 다스리시는 분으로서, 때로는 자기 백성들에게 여러 가지 시련을 주어 징계하시지만 충분한 징계를 하신 뒤에는 다시 자비와 긍휼을 베푸시는 분이심을 모두에게 밝히 나타내셨다. p512
제9장 폭군들의 죽음 : 그들이 남긴 마지막 말
이미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콘스탄틴 Constantine 은 황제에게서 태어난 황제이며, 지극히 경건하고 덕망 있는 아버지의 경건한 아들이었다. 콘스탄틴과 그의 밑에 있던 리시니우스 Licinius 는 신앙심과 온건함으로 크게 존경을 받았다. 우주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는 이들 두 경건한 통치자들을 자극하여 다른 두 명의 불경한 폭군들을 대적하게 하셨다. 그리하여 참으로 특이한 방법으로 교전하여 막센티우스 Maxentius 는 콘스탄틴에게 패배했다. 나머지 한 폭군 (막시미누스) 도 그다지 오래 살지 못했다. 그는 당시 아직은 정신이상 증세를 나타내지 않고 있던 리시니우스에 의해 치욕스런 죽음을 당했다. 황제들 중 제1인자였던 콘스탄틴은 먼저 억압받고 있는 로마인들을 긍휼히 여겼다. 그는 로마인들이 옛 선조 때부터 누렸던 자유를 되찾게 해주려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만민의 구세주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자기의 군대를 도와주시기를 기원했다. 그러나 막센티우스는 자기 백성들을 향한 사랑이 아니라 마술을 의지하고 있었으므로 성문 밖으로 나아가려 하지 않았다. 그는 도시의 모든 지역에 무수한 군인들, 그리고 자기가 노예로 삼고 있던 로마와 이탈리아 전역의 수비대를 배치하여 요새화했다. 그러나 콘스탄틴 황제는 하나님의 도움으로 힘을 얻었으므로 폭군을 대적하러 나아가 3번의 싸움에서 어려움 없이 그를 격퇴시켰다. 그는 이탈리아에서 가장 큰 지방을 통과하여 거의 로마시의 성문 앞에까지 진군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가 폭군으로 인해 로마인들과 싸우지 않게 하시려고 이 폭군을 성문 밖 상당히 먼 곳으로 끌어내셨다. p513
하나님께서는 이곳에서 옛날 악인들을 대적하여 행하셨던 놀라운 사건을 확증하셨다. 많은 사람들은 이 옛날의 사건들을 마치 꾸며낸 이야기인 듯이 여겨 믿지 않으나, 그것은 성경에 분명히 기록된 믿어야 하는 사건들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직접 자신의 능력을 개입시키셔서 신자들이나 불신자들 모두의 눈앞에서 그것들이 사실임을 확증하셨다. 그리하여 옛날 모세의 시대에 파라오의 마차들과 군대가 홍해에 빠졌던 것 같이, 막센티우스와 그의 용사들과 호위병들은 마치 깊은 바다에 돌멩이처럼 빠지고 말았다. 그는 콘스탄틴과 함께 하신 하나님의 권능 앞에서 도망쳐 강을 건너게 되었다. 그는 앞서 그 강에 배들을 연결하여 다리를 놓았는데 바로 그것이 그의 죽음을 위한 준비물이 되었다. 우리는 그에 대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구덩이를 만들고 그것을 파더니 자기가 만든 도랑에 빠졌도다. 그의 해악이 그의 머리로 돌아오고 그의 난폭한 행위가 그의 정수리에 떨어지리로다” (시 7:15-16). 그리하여 강 위에 만들어놓은 보트 다리가 무너지면서 사람들은 배와 함께 물에 빠져 죽었다. 지극히 불경한 폭군이 제일 먼저 물에 빠졌고 다음으로 그의 주위에 있던 호위병들이 마치 홍수가 나서 물이 불은 강 속에 납덩어리가 떨어지듯이 빠졌다. 그리하여 마치 위대한 하나님의 종 모세가 이끌던 백성들이 불경한 폭군을 대적하는 노래를 부른 것처럼 하나님이 주신 승리를 얻은 사람들은 말로써만 아니라 행동으로 노래하며 외쳤다. “내가 주께 노래하리니 그분께서 영화롭게 승리하셨도다. 그분께서 말과 거기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도다. 주께서는 나의 힘이시요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 되시는도다. 오 주여, 신들 중에 주와 같으신 이가 누구니이까? 주와 같이 거룩함 속에서 영화로우시고 찬양 속에서 두려우시며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는 이가 누구니이까” (출 15:1-2,11). p514
콘스탄틴은 승리하여 로마시에 입성하면서 우주의 주권자시며 행동으로 승리를 만드신 하나님을 이렇게 노래했었다. 로마의 원로원, 고관들, 여인들, 그리고 젖먹이 어린이들까지 모든 로마인들이 즐거운 마음으로 한없이 복되고 무한한 기쁨으로 가득 차 그를 구원자로 영접했다. 그러나 그는 마음 속 깊이 신앙심이 심겨진 사람이었으므로 그들이 외치는 환성을 듣고서 우쭐하지 않았으며 자신을 향한 박수갈채로 의기양양하지도 않았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도움을 받았음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곧 손에 구세주의 고난의 기념물을 쥔 자기의 동상을 세우라고 명령했다. 그리하여 로마에서 제일 번화한 곳에 오른손에 십자가 기호를 쥐고 있는 자기의 동상이 세워졌을 때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로마어로 새겨 넣으라고 명령했다. “나는 이 유익한 기호, 진정한 용맹의 귀감에 의해 당신들의 도시를 폭군의 굴레에서 해방시켰고, 로마 원로원과 백성들에게 과거의 지위와 영광을 되찾아주었다” 그 후, 콘스탄틴과 동료 황제 리시니우스는 함께 자기들의 성공의 창시자이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한 마음으로 기독교인들에 관한 대단히 충실하고 포괄적인 법령을 작성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행하신 놀라운 일들과 그들이 폭군과 싸워 이긴 승리, 그리고 그들이 제정한 법률을 당시 동로마제국의 주권자로서 그들에게 우호적인체하고 있던 막시미누스에게 보냈다. 그 당시만 해도 리시니우스는 아직 미치지 않고 정신이 온전했었다. 한편 막시미누스는 폭군이었기 때문에 이것을 알고서 크게 당황했다. 그리하여 다른 황제들에게 굴복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해서, 그리고 또 그는 자기에게 명령을 내린 사람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그 명령들을 억압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서, 그는 마치 자신이 자발적으로 자기의 권위에 따라 행하는 것인 듯 총독들에게 기독교인들에 관한 다음과 같은 명령들을 발표하여 자신이 전혀 행하지도 않은 일들을 자신이 했다고 거짓으로 주장했다. p515
폭군 막시미누스의 서신
“조비우스 막시미누스 아우구스투스가 사비누스에게 : 나는 우리의 주권자이시며 부모님이신 디오클레티안과 막시미누스가 거의 모든 백성들이 신들을 예배하던 일을 버리고 기독교인들에게 애착을 가지는 것을 보고서 불멸의 신들을 예배하는 일에서 벗어나는 사람들에게 형벌과 고통을 주어 다시 신들을 예배하게 만들라고 명령했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내가 좋은 전조 밑에서 처음 동로마제국으로 왔을 때, 나는 판사들이 공화국을 위해 봉사할 능력을 갖춘 수많은 사람들을 바로 앞서 말한 이유로 추방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모든 판사들에게 앞으로는 어떤 판사라도 지방민들을 가혹하게 다루지 말고 권면과 회유로 신들을 예배하게 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판사들은 내 명령대로 지켰으므로 동로마제국의 백성들은 아무도 추방을 당하거나 모욕을 당하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전혀 가혹한 일이 가해지지 않았으므로 그들은 다시 신들을 예배하게 되었다. 이 일이 있은 지 1년 후, 나는 좋은 기회가 있어 니코메디아에 머문 일이 있었다. 그 때 그곳 시민들은 신들의 동상들을 가지고 내게 와서 어떻게 해서든지 이 백성들이 자기 나라에 거하는 것을 허락하지 말라고 간청했다. 그러나 나는 이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그 지역에 많이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므로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 나는 그들이 이러한 청원을 해온 것에 대해 그들에게 감사했다. 그러나 이것이 모든 사람들의 한결같은 요구가 아님을 깨달았다. 이 미신을 고집하는 사람들이나 신들을 예배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나 모두 각자가 자기의 뜻대로 살길 선택할 권리가 있다. p516
그러나 나는 자기들이 사는 곳에 기독교인들이 살지 못하게 해달라고 간절히 청원하는 니코메디아 및 여러 도시 주민들에게 우호적인 답변을 해야 할 필요를 느꼈다. 왜냐하면 과거 모든 황제들은 같은 방침을 따랐으며, 이것이 공화국 정부와 모든 백성들을 지탱해주고 있는 불멸의 신들의 마음에 흡족한 조처이기 때문이었다. 또 나는 그들이 불멸의 신들의 예배를 위해 내게 제출한 이 청원을 비준하길 원했다. 나는 이 편지를 보내기 이전에 당신에게 보낸 편지에서 통치자들은 이러한 믿음을 지키기를 원하는 지방민들을 무자비하게 다루지 말고 온유하고 온건하게 다루어 일반 군인이나 상급관리라도 결코 그들을 때리거나 상처를 입히지 말라고 명령했다. 나는 권면이나 온유한 조처에 의해 지방민들이 신들을 예배하도록 양육해야 한다는 것을 이 서신을 통해 당신에게 다시 환기시키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누구나 자원하여 신들을 예배하기로 결심한 사람들은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나 만일 자신의 신앙을 그대로 따르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은 자유로이 내버려두어도 좋다. 당신은 당신에게 맡겨진 일을 열심히 지키며 누구에게도 우리 백성들을 난폭하고 무례하게 다룰 자유를 부여해서는 안 된다. 내가 앞서 편지했던 것과 같이 고무적이고 마음을 끄는 조처를 취해 우리 지방민들이 신들을 예배하도록 개심시키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당신은 당신의 이름으로 명령을 발표하여 모든 백성들에게 이 같은 나의 뜻을 전하도록 하라” p517
그는 이렇게 명령을 했지만 이것은 전혀 그의 진심이 아니었고 또 누구도 이것을 믿지 않았다. 그는 이전에도 이와 유사한 관용을 명령했으나 원래 표리부동하고 불성실한 사람이었으므로 자신의 참된 의견에 따라 행동한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처했기 때문에 마지못해서 그렇게 명령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형제들은 아무도 공개적으로 드러내어 기도회를 개최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교서의 취지는 우리를 괴롭히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명령이었지 우리가 집회를 열거나 예배처를 건축하거나, 또는 우리가 관습적으로 행해온 일들을 행해도 좋다는 명령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평화와 신앙의 옹호자인 콘스탄틴과 리시니우스는 이 일을 허락하라는 편지를 그에게 보냈으며, 명령과 법령으로서 자기들이 다스리고 있는 모든 백성들에게 그것을 허락해 주었다. 그러나 이 지극히 불경한 통치자는 이러한 방침을 택하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그는 마침내 하나님의 공의에 몰려 마지못해서이기는 했지만 그것을 채택하게 되었다. p517
제10장 신실한 황제들의 승리
막시미누스는 어쩔 수 없는 사면초가의 처지에 놓였다. 그는 신중한 자질과 황제로서의 의지가 결여되고 무능했기 때문에 자기에게 부여된 위대한 통치권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고 어리석고 불명예스런 태도로 국사를 처리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자신과 함께 나라를 다스리고 있었으며 출생이나 교육, 지위 및 지식, 그리고 모든 것 중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지혜와 신앙에 있어서 그보다 우위에 있는 사람들을 대단히 오만하고 교만하게 대했고, 자신이 지위와 영예에 있어 제1인자라고 뽐내고 또 그렇게 선포했다. 그의 교만과 허영은 절정에 이르러 마침내 그는 리시니우스와 맺은 동맹을 파기하고 전쟁을 일으켰다. 그는 모든 도시에 비상소집령을 내려 수많은 군인들을 모집해 온 나라를 혼란에 빠뜨렸다. 그는 자신이 신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악마들과 수많은 병사들을 믿고 의기양양하게 전쟁터로 나아갔다. 이 전쟁에서 그는 하나님의 개입과 도움을 박탈당했다. 그리하여 유일하신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 리시니우스가 승리했다. 처음에 그는 자신이 의지하던 군대를 잃었다. 그를 호위하던 병사들은 모두 그를 버려두고 리시니우스 황제에게로 도망쳤기 때문에 그는 비겁하고 비열하고 나약하게도 황제의 제복을 벗어버리고 군중 속에 숨었다. 그리하여 도망쳐 들판과 마을에 숨어 안전을 도모하여 적의 수중에서 겨우 빠져나왔다. 그리하여 기록된바 “많은 군대로 구원 받은 왕이 없으며 용사가 많은 힘으로 구출 받지 못하는도다. 안전을 위해서는 말도 헛되나니 그가 자기의 큰 힘으로 아무도 건지지 못하리로다. 보라, 주의 눈은 그분을 두려워하는 자들 곧 그분의 긍휼에 소망을 두는 자들 위에 있나니, 이것은 그분께서 그들의 혼을 사망에서 건지시며 기근 중에서 그들을 지키사 살게 하려 하심이로다” (시 33:16-19) 라는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졌다. 이처럼 치욕스럽게 자기 영토로 돌아온 폭군은 분노를 억제하지 못해 자신이 존경했던 신들의 사제들과 예언자들을 많이 살해했다. 왜냐하면 그는 그들의 신탁에 따라 전쟁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그는 이들이 마법사이며 사기꾼이며 또 자신의 신변을 위험하게 한 반역자라는 이유로 살해했다. 마침내 기독교인들의 하나님께 영광 돌릴 일이 벌어졌으니, 즉 그는 곧 기독교인들의 자유를 보장하는 결정적인 법령을 제정했다. 그러나 그는 몹쓸 병에 걸려 그 법을 발표한 뒤 곧 사망했다. 이 때 제정된 법은 다음과 같다. p519
폭군이 기독교인들에 관해 제정한 법령 (라틴어 원문을 헬라어로 번역한 것)
“카이사르 가이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미누스 게르마니쿠스 사르마니쿠스 피우스 펠릭스 인빅투스 아우구스투스 황제 ㅡ 우리는 우리 백성들의 행복을 진작시키며, 만백성에게 최선의 유익이 되고 그들의 보편적 유익에 기여하는 것, 공공의 이익에 기여하며 모든 사람들의 생각과 소망에 일치하는 것들을 부여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 이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그리고 우리는 모든 사람이 과거의 사건들을 기억할 수 있으며, 그것을 알고 확신하고 있다고 믿는다. 과거 지극히 거룩하신 디오클레티안과 막시미안 황제 시대에 제정된바 기독교인들의 모임을 철폐하라는 법을 근거로 하여 관리들은 많은 압제와 훼손을 행했으며, 이러한 폐해가 나날이 증가해 우리 지방민들에게 피해를 끼쳐 그들은 일용할 양식까지도 걱정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들의 재산과 소유가 이러한 구실로 인해 약탈되었기 때문이다. 이상과 같은 사실들을 분명히 알게 되었으므로 우리는 지난해 각 지방의 통치자들에게 서신을 보냈다. 그 서신에는 만일 이러한 관습이나 종교를 추종하고자 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아무도 그를 방해하거나 괴롭히지 말고 자유로이 믿도록 하며, 누구에게나 각기 자기가 선택한 신앙을 아무런 두려움 없이 의심을 받지 않고 믿을 충분한 자유를 부여하라는 법령이 기록되어 있었다. 그런데 몇몇 총독들은 우리의 명령을 잘못 이해하여 우리 백성들로 하여금 우리가 제정한 법령들에 대해 의심을 품게 만들었으며, 또 자신이 선택한 종교의 의식들을 수행하길 꺼리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제 모든 의심과 두려움을 제거하기 위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법령을 공표하길 명령한다. 즉 이 분파를 채택하여 예배하길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누구나 자유로이 그렇게 행할 특권을 부여한다. 따라서 각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자신의 뜻에 따라 자신의 신앙을 지켜도 좋다. 또 그들에게 교회를 세울 것도 허락한다. 또 이제 더욱 큰 사면을 법에 따라 발표하니, 이전에 우리 부모들의 명령에 따라 국고에 귀속되었거나 시에 몰수되었거나 또는 어느 개인에게 빼앗겼던 기독교인들의 집과 땅을 그 주인에게 반환하도록 하라. 그리하여 모든 사람들이 이와 관련하여 우리의 신앙심과 예지를 깨닫게 하라” p520
이것은 1년 전에 기독교인들을 박해하기 위한 법령을 동판에 새겨 발표했던 폭군이 발표한 내용이다. 우리를 불경한 사람, 사회를 파괴하는 버림받은 불량배로 여겨 우리가 도시나 지방, 심지어 사막에 거하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던 이 폭군이 기독교인들에게 우호적인 법을 제정한 것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폭군이 보는 앞에서 사나운 짐승과 맹금의 먹이가 되거나 칼로 베이거나 또는 불에 타죽었고, 또 온갖 형벌과 고문, 그리고 불신자요 타락한 사람이 당하는 비참한 죽음을 겪어야 했던 사람들이 이제 신앙을 가진 예배자로 인정되어 교회를 재건하라는 허락을 받게 되었다. 더욱이 이 폭군은 그들에게도 권리가 있음을 고백하고 증거했다. 이러한 고백을 했기 때문에 그는 자신이 마땅히 받아야 하는 것보다 적은 고통을 받았다. 그는 하나님의 갑작스런 심판을 받아 두 번째 출정 때에 사망했다. 그의 최후는 조국의 영광과 친구들을 위해 용감하고 영웅적으로 자신의 생명을 버리고 죽음을 맞은 장군들이나 사령관들의 죽음과는 다른 것이었다. 이 폭군은 자기의 군대가 싸우기 위해 전쟁터에 정렬해 있을 때에 자기는 집에 숨어 있다가 자기에게 합당한 형벌을 받았다. 즉 하나님의 심판이 갑자기 그의 온 몸에 임해 그는 무서운 아픔과 고통으로 괴로워하며 땅바닥에 쓰러졌고 굶주려 쇠약해졌다. 그의 육체는 하나님이 보낸 보이지 않는 불에 의해 용해되어 쇠약해졌기 때문에 이전의 모습은 완전히 사라지고 뼈만 남았다. 그의 곁에 있는 사람들은 그의 육신이 이미 죽어 완전히 흙으로 돌아갔으며 영혼의 무덤이라고 간주했다. 그러나 그의 심장은 골수까지 더욱 격렬하게 태우기 시작해 그의 두 눈이 튀어나와 장님이 되었다. 그 뒤에도 그는 계속 숨이 붙어 있어 많은 사실을 인정하며 하나님께 죽음을 빌었다. 드디어 그는 이러한 고난이 자신이 기독교인들을 지나치게 난폭하게 대했기 때문에 받는 심판이라고 고백하고서 숨을 거두었다. p521
제11장 신앙의 원수들의 완전한 멸망
생존해 있는 모든 신앙의 원수들 중에서 가장 악한 인물이었던 막시미누스가 전능하신 통치자이신 하나님의 선하심으로 말미암아 제거되었으므로 교회는 그 기초부터 새로이 쇄신하기 시작했다. 불경하고 부패한 사람들은 수치와 치욕으로 뒤덮인 반면, 그리스도의 교리는 높으신 하나님의 영광을 널리 비추며 전보다 큰 특권을 누렸다. 우선, 황제들은 막시미누스를 공적 公敵 으로 선포했고, 또 막시미누스는 자신이 발표한 법령에 의해 지극히 불경하고 혐오스러우며 또 하나님을 대적한 자임이 확인되었다. 사람들은 그와 그의 자녀들을 기념해 여러 도시에 비치해놓은 조상이나 초상화들을 끌어내려 찢고 부숴버렸고, 어떤 것들은 그 얼굴에 검은 칠을 하기도 했다. 또 그를 기념해 세운 동상들도 내던져 깨뜨려버렸다. 그리하여 그는 많은 사람들의 조소와 비웃음의 대상이 되었다. 그밖에도 많은 신앙의 원수들에게 바쳤던 영예도 제거되었다. 막시미누스의 당파를 지지하던 사람들은 모두 살해되었다. 특히 그에게 아첨을 하고 우리의 믿음에 대해 지나치게 방자한 태도를 취하여 그의 총애를 받아 통치자의 직책을 맡았던 사람들이 모두 살해되었다. 이들 중에는 그의 총신들 중에서도 가장 존경과 사랑을 받았던 페우세티우스 Peucetius 도 있었다. 그는 세 차례나 집정관으로 있었고, 또 수상으로 임명되었다. 또 계속 승진해 모든 관직을 두루 거쳤으며 이집트의 많은 기독교인들을 살해한 일로 유명한 쿨키아누스 Culcianus 도 역시 살해되었다. 그밖에도 막시미누스의 폭정을 공고히 하고 증대시킨 많은 사람들이 살해되었다. p522
또 데오텍누스 Theotecnus 도 기독교인들에게 행한 악행으로 인해 심판을 받았다. 그는 안티오크에 동상을 세우고 그 지방의 통치를 맡았으므로, 이제 즐거운 생활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 때 리시니우스가 안티오크에 도착하여 모든 사기꾼들을 색출해냈다. 그는 새로이 만든 동상을 섬기는 선지자들과 사제들을 고문하여 어찌하여 그러한 기만술을 만들어냈는지 물었다. 고문으로 인해 더 이상 숨길 수 없게 된 그들은 모든 것이 데오텍누스가 꾸민 짓이라고 털어놓았다. 그는 모두를 각기 그들의 행적에 따라 처벌했는데, 먼저 데오텍누스를 선두로 하여 그의 사기극에 동참한 모든 사람들에게 최고도의 고문과 아울러 사형을 선고했다. 막시미누스의 자녀들도 이들과 함께 처형되었는데, 막시미누스는 이미 그들에게 황제의 지위를 부여했다. 그리고 이 일이 있기 전 의기양양하게 거드름을 피우며 모든 사람들에게 권세를 과시하던 폭군의 친척들도 같은 형벌을 받았다. 그들은 성경에 기록된바 “통치자들을 신뢰하지 말며 도움을 주지 못하는 사람의 아들도 신뢰하지 말라. 그의 호흡이 끊어지면 그가 흙으로 돌아가고 바로 그 날에 그의 생각들이 소멸하리로다” (시 146:3-4) 라고 하신 권면을 깨닫지 못했고 받아들이지 않았던 사람들이다. 그리하여 불경한 사람들은 모조리 제거되었고 국가는 콘스탄틴과 리시니우스가 다스려 안전하게 되었다. 이들 두 황제는 먼저 하나님께 대한 적대행위를 제거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큰 은혜를 깨달았으므로, 기독교인들에 대한 우호적인 법률을 제정하여 하나님께 대한 자신의 신앙과 감사함, 그리고 하나님과 덕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나타냈다. p523
제10권
제1장 하나님의 개입으로 주어진 평화
우리는 전능하시며 우주의 주권자이신 하나님, 그리고 우리 영혼의 구속자이며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감사를 드린다. 우리는 밖으로부터 오는 세상의 괴롭힘과 마음으로부터 오는 시련에도 우리의 평화가 흔들리지 않고 견고하게 보존되길 그리스도께 기도한다. 오, 거룩한 파울리누스 Paulinus 여, 우리는 본 교회사에 제10권을 추가하면서 이것을 당신에게 헌정하며 당신을 이 저서의 봉인으로 선포합니다 (파울리누스는 두로 Tyre 의 감독이었는데, 그는 유세비우스에게 본 교회사를 저술하도록 제안하고 권유했으므로 유세비우스는 본서를 그에게 헌정한 것이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우리를 초청하시는 하나님의 성령에 순종하여 교회의 쇄신에 관한 완전한 설교와 찬송을 완전수에 첨가하려 한다 (10이라는 숫자는 완전수로 여겨지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의 계산법에서 최종수로서 10이 넘는 수는 모두 나머지 숫자들을 결합해 사용하기 때문이다). “오, 새 노래로 주께 노래하라. 그분께서 놀라운 일들을 행하시고 그분의 오른손과 거룩한 팔이 그분을 위해 승리를 얻었도다. 주께서 자신의 구원을 알리시며 자신의 의를 이교도들의 눈앞에서 명백히 나타내셨도다” (시 98:1-2). p526
성경에서는 우리에게 새 노래로 찬송하라고 명하셨으므로 무섭고 음울한 광경과 사건들이 지나간 뒤, 앞서간 신자들과 순교자들이 그처럼 보고 듣기를 갈망했으나 보지 못하고 듣지 못했던 일들을 보고 기리는 특권을 누리게 되었음을 우리는 밝히려 한다. 그러나 앞서간 선조들은 ‘더 좋은 것’ 을 얻었으니, 즉 그들은 하늘나라, 거룩한 기쁨의 낙원으로 옮겨갔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의 상태가 우리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좋다는 사실을 거리낌 없이 인정하며 자비하신 하나님께서 나타내신 큰 은혜에 한없이 놀라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마음을 다해 그를 찬미하고 찬양하며 다음과 같은 말씀의 진리를 증거한다. “와서 주께서 행하신 일들을 볼지어다. 그분께서 땅에 황무지를 만드셨도다. 그분께서 땅 끝에 이르기까지 전쟁들을 그치게 하시나니 곧 활을 꺾고 창을 동강내며 병거를 불태우시는도다” (시 46:8-9). 우리 시대에 이루어진 이러한 일들을 기뻐하면서 우리는 본 역사서의 취지를 추구하려 한다. 하나님의 모든 원수들은 앞서 말한 것과 같은 방법으로 멸망했고 사람들의 시야에서 갑자기 사라지게 되었으니 기록된바 “내가 악인의 큰 세력을 본즉 그 본토에 선 푸른 나무의 무성함 같으나 사람이 지나갈 때에 그가 없어졌으니 내가 참으로 찾아도 발견치 못했도다” 라는 말씀처럼 되었다. 이제 구름 한 점 없는 밝고 청명한 날이 전 세계의 교회를 거룩한 빛으로 밝히 비추어주며, 우리와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들까지도 우리와 동일한 축복을 누리며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넘쳐흐르는 축복을 함께 나누어 갖게 되었다. p527
제2장 교회의 회복
모든 백성들이 폭군의 압제에서 해방되었다. 과거의 비참한 상태로부터 해방된 사람들은 각기 나름대로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 경건한 자들의 보호자이심을 인정했다. 특히 하나님의 그리스도에게 모든 소망을 걸고 있는 우리에게는 끊임없는 기쁨이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불경한 폭군들 때문에 황폐해졌던 곳들이 다시 부흥하며 오랫동안의 치명적인 불안에서 회복되며, 파괴되었던 성전들이 이전보다 더 화려하고 높이 세워지는 것을 볼 때 사람들은 거룩한 기쁨을 느꼈다. 게다가 주권자들은 우호적인 명령을 내려 더욱 크고 넓은 특권을 우리에게 부여해주었고, 황제는 감독들에게 명예와 금전을 수여한다는 서신을 발표했다. 이것들 중 몇 부분을 발췌하여 기록해 후대 사람들에게 남겨주는 것도 타당할 것이다. p528
제3장 곳곳에서 개최된 헌당식
이 일이 있은 뒤 우리가 그처럼 바라고 기도하던대로 모든 도시에서 새로이 건축된 기도의 집을 헌당하는 축제의 광경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그 후 성직자들의 회의, 해외로부터 온 외국인들의 모임, 사람들끼리의 사랑, 그리스도의 지체들의 일치가 하나의 몸 안에서 발생했다. 그리하여 “뼈와 힘줄로 나를 뭉치시고” 라는 말씀을 비롯한 여러 거룩한 말씀의 예언적 선포가 그대로 성취되었다. 모든 지체에게는 하나의 거룩한 영의 에너지가 흐르고 있었다. 모두가 한 마음, 똑같은 신앙의 열정으로 똑같이 하나님을 찬양했다. 또 교회의 지도자들과 고위 성직자들의 완전하고 온전한 의식, 거룩한 의식수행, 엄숙한 의식이 재개되었다. 여기저기에서 시편을 노래하는 소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음성, 거룩하고 신성한 비밀들이 수행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사람들은 주님의 고난을 나타내는 신비적 상징들을 기념하고 축하했으며,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들이 기도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모든 행복의 창시자이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성직자들은 각 사람의 능력에 맞추어 모든 사람들에게 영광을 더해주고픈 마음으로 찬양의 설교를 했다. p529
제4장 교회의 영광된 상태를 찬양하는 찬사
어느 평범한 능력을 지닌 사람 (이것은 유세비우스 자신을 지칭하는 말이다. 이 찬사는 두로의 감독에게 드린 것이다) 이 많은 목회자들과 회중들이 참석한 곳에서 설교를 했고, 사람들은 모두 조용하고 단정하게 경청했다. 그는 감독들 중에서 가장 선하고 경건하며, 페니키아에서 가장 훌륭한 성전을 건축한 두로의 감독에게 다음과 같은 찬사를 올렸다. p529
교회 건축에 대한 찬사 (두로의 감독 파울리누스에게 행한 것)
“교회의 목자이신 주님은 과거에 교회로 인해 죽음에 굴복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가 교회 때문에 취하셨던 연약한 육체는 고난을 겪은 뒤 찬란하고 영광된 육체로 변했고, 또 부패해 썩어질 육체는 썩지 않는 육체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교회도 주님과 마찬가지로 주님이 겪으신 일을 겪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주님에게서 보다 선한 것들에 대한 약속들, 하나님의 천국에서 빛의 천사들이 합창을 하는 가운데 썩지 않을 몸으로 부활하여 훌륭한 중생의 영광을 얻는다는 약속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이런 약속들보다는 지극히 은혜로우신 은인이시며 영원한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얻길 바라고 있습니다. 이전에는 과부로서 버림받았으나 이제 하나님의 은혜의 꽃으로 장식한 교회는 이 세상에서 백합화같이 피어날 것이며, 선지자 이사야가 가르친 것처럼 기뻐하고 춤추며 신부의 의복과 영광의 면류관을 얻고, 그 감사함을 자신의 임금이신 하나님께 즐거운 말로 선포합니다. ‘내가 주를 크게 기뻐하며 내 혼이 내 하나님을 기뻐하리니 이는 마치 신랑이 장식으로 자기를 꾸미고 신부가 보석으로 자기를 단장하는 것 같이 그분께서 구원의 옷으로 나를 입히시고 의의 겉옷으로 나를 덮으셨기 때문이라. 땅이 자기의 싹을 내며 동산이 자기 안에 뿌려진 것들을 솟아나게 하는 것 같이 주 하나님께서 의와 찬양을 모든 민족들 앞에 솟아나게 하시리라’ (이사야 61:10-11). p542
교회는 이렇게 찬양을 하며 기뻐하고 춤을 춥니다. 또 거룩한 신랑이시며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그녀에게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당황하지 말라. 네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라. 네가 젊은 시절의 수치를 잊고 과부 때의 치욕을 다시는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너를 만드신 이는 네 남편이니 만군의 주가 그의 이름이니라. 그는 네 구속자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니 그는 온 땅의 하나님이라 불리리라. 주가 너를 부르되 마치 버림받아 영이 괴로운 여인 곧 젊어서 거절당한 아내를 부르는 것 같이 하였도다. 네 하나님이 말하노라. 내가 아주 잠시 동안 너를 버렸으나 큰 긍휼로 너를 모을 것이요, 내가 조금 진노하는 중에 내 얼굴을 잠시 네게 숨겼으나 영존하는 친절로 너를 긍휼히 여기리라. 네 구속자 주가 말하노라’ (사 54:4-8). ‘오, 주의 손에서 그분의 분노의 잔을 마신 예루살렘이여, 깰지어다. 깰지어다. 일어설지어다. 네가 사람을 떨게 만드는 그 잔의 찌꺼기를 마시되 그것을 다 짜내어 마셨도다. 예루살렘이 낳은 모든 아들들 중에서 예루살렘을 인도할 자가 없고 예루살렘이 기른 모든 아들들 중에서 손으로 예루살렘을 인도할 자가 없도다.... 보라, 내가 사람을 떨게 만드는 잔 곧 내 격노의 잔의 찌꺼기를 네 손에서 거두어 다시는 네가 그것을 마시지 못하게 하고, 그 잔을 너를 괴롭히는 자들의 손에 두리라’ (사 51:17-18, 22-23). ‘깰지어다. 깰지어다. 네 힘을 낼지어다. 오 거룩한 도시 예루살렘이여, 네 아름다운 옷을 입을지어다. 이제부터 할례 받지 않은 자와 부정한 자가 다시는 네게로 들어오지 못하리니, 네게서 티끌을 털어 버릴지어다. 오 예루살렘이여, 일어나 앉을지어다. 오 포로로 사로잡힌 시온의 딸이여, 네 목의 띠를 스스로 풀지어다’ (사 52:1-2). p543
‘네 자녀들은 서두르며 너를 파괴하던 자들과 너를 피폐하게 만든 자들은 네게서 떠나가리라. 네 눈을 들어 사방을 보라. 이들이 다 함께 모여 네게로 오느니라. 주가 말하노라. 내가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하노니 네가 반드시 장식을 걸치듯 그들 모두를 네 몸에 걸치며 신부가 두르듯 그들을 네 몸에 두르리로다. 너의 피폐하고 황폐한 곳들과 파멸 당하였던 네 땅이 이제는 거주민들로 인하여 좁게 되며 너를 삼켰던 자들이 멀리 있으리라. 다른 자녀들을 잃은 뒤에 네가 갖게 될 자녀들이 네 귀에 다시 이르기를, 거처가 내게 너무 좁으니 내게 거처를 주어 내가 거하게 하소서, 하리라. 그때에 네가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나는 내 자녀들을 잃고 황폐하게 되었으며 포로가 되어 이리저리 옮겨 다녔거늘 누가 내게 이들을 낳아 주었는가? 누가 이들을 양육하였는가? 보라, 나는 홀로 남게 되었거늘 이들은 어디에 있었던가? 하리라’ p544
이상은 이사야가 예언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들은 이미 옛날에 우리와 관련하여 성서에 기록된 선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젠가 그 말씀의 진리를 사실로 받게 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 때 이후로 거룩한 교회에 이러한 말씀이 전해졌으므로, 이 우리의 신랑의 들러리 (파울리누스를 지칭함) 는 사람들이 보기에 마치 죽은 사람처럼 소망 없이 버려져 누워있는 그녀를 일으켰으며, 당신들 모두의 공통된 기도로 그의 손을 내밀어 그녀를 일으켜 세웠고, 지존하신 임금이신 하나님의 명령과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의 현시 속에서 그녀를 똑바로 세웠습니다. 그리고 이처럼 교회를 일으켜 세우면서 그는 신성한 계시에 의해 주어진 기록에서 배운 대로 배열하고 기초를 확립했습니다. 그러므로 특히 겉모습에만 치중하는 사람들이 볼 때에 이 사역은 놀랍고 강대하며 찬탄할 만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께서 친히 자신의 형상을 따라 지으셨으며 모든 면에서 하나님의 모양을 나누어 받은 우리 영혼 안에 있는 거룩하고 신령한 건물, 정신적 표준이며 거룩한 견본이며 원형의 재건은 더욱 놀랍습니다. 그것은 모든 세상적인 혼합물과 물질과는 분리된 썩지 않는 영적인 본질의 것으로서 지혜로운 현존입니다. 그는 이렇게 그녀 (영적인 교회) 를 창조하여 존재하게 만든 후, 자신과 성불르 위해 그녀를 거룩한 배우자, 완전히 신성하고 거룩한 성전으로 만드셨습니다. 이것은 ‘나는 너희 중에 행하여 너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니라’ 하신 말씀 속에 분명히 선포되어 있습니다. p545
이처럼 마음은 태초부터 거룩한 말씀의 형상을 품도록 완전하고 깨끗하게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악한 마귀의 탐심과 질투로 말미암아 그녀는 자유의사에 따라 악과 쾌락을 좋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하여 신성 神性 은 그녀의 보호자로서의 자격이 부족하다는 듯이 그녀에게서 물러났으므로 그녀는 오래전부터 그녀의 축복을 탐해온 악마의 음흉한 음모에 쉽사리 노출되어 사로잡히게 되었으므로 그녀는 보이지 않는 영적 원수들의 도구와 포병의 공격을 받아 끔찍스런 시체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덕을 기념하는 돌도 남기지 못한 채, 하나님에 대한 일상적이고 본성적인 개념도 전혀 갖지 못한 채, 완전히 죽어 땅에 누워 있었습니다. 과거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았던 그녀가 이처럼 녹초가 되어 땅에 쓰러져 있을 때에, 우리는 그녀를 그처럼 쇠약하게 만든 것은 숲 속에 사는 산돼지가 아니라 파괴적인 악마와 영적인 짐승들임을 보았습니다. 이 짐승들은 그녀에게 불의로 타오르는 창을 던져 정욕으로 불타게 만들어 하나님의 거룩한 성소에 불을 질렀으며 그의 이름으로 지은 장막을 더럽혔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불쌍한 사람을 흙으로 덮어 장례하면서 그녀의 구원의 소망을 완전히 파괴해버렸습니다. 그러나 그녀를 돌보시는 거룩하시고 구원하시는 말씀께서는 그녀가 자기의 죄에 합당한 형벌을 다 받은 뒤에 다시 그녀에게 지극히 은혜로우신 성부의 긍휼에 대한 확신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녀는 먼저 제국의 통치자들의 은혜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훌륭한 군왕들의 중재로 말미암아 그녀는 온 세상과 더불어 불의한 폭군들, 즉 두렵고 파괴적인 만백성의 원수들로부터 구원을 얻었습니다. 또 그리스도의 친밀한 친구들, 이전에 주님께 생명을 바쳤으며 고통의 폭풍 속에 숨겨 하나님의 은밀한 보호를 받았던 사람들에게 주님은 자비롭고 관대하신 성령에 의해 빛으로 인도하시고 영광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또 주님은 이들을 사용하셔서 과거에 더럽혀진 영혼들의 더러움을 깨끗이 씻어 제거하셨습니다. 그리고 삽과 곡괭이, 즉 책망하시는 말씀으로 모든 축적된 불경한 명령 (막시미누스와 그의 총독들이 추구했던 조처들) 들을 제거하셨습니다” p546
제5장 황제의 칙령 (콘스탄틴과 리시니우스 황제가 발표한 칙령을 라틴어로부터 번역한 것)
호겐 : 이것은 ‘밀라노 칙령’ 이다.
황제의 포고령 사본
“우리는 이미 오래 전부터 종교의 자유를 부인해서는 안 되며, 각 사람에게 자신의 결정에 따라 거룩한 의무를 수행할 권리를 부여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따라서 모든 백성들과 기독교인들이 자신이 선택한 종교와 독특한 예배 방법을 준수해도 좋다는 명령을 내렸었다. 그 칙령 (여기에 언급된 칙령은 분실되어 없어진 것이다. 따라서 참조하는데 약간의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이것의 라틴어 원본이 락탄티우스 Lactantius 의 저서 De Mortibus Persecutorum 에 보존되어 있다) 은 수많은 분파들에게 이러한 특권을 부여했는데 그 중 어떤 분파들은 얼마 후 이런 종류의 배려와 의식을 시행하지 않고 움츠러들었다. 그러므로 나 콘스탄틴 아우구스투스와 리시니우스 아우구스투스는 좋은 전조 아래 밀란으로 와서 공익 및 복지와 관련된 모든 일들을 고려하면서 다른 것보다 이 일들이 모든 백성들에게 유익하고 도움이 되리라고 여겼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공경하고 예배하는 일에 대한 것을 먼저 제정하기로 결정했다. 따라서 우리는 기독교인과 모든 백성들에게 자신의 자유의지에 따라 원하는 신앙 양식을 좇을 것을 허락한다. 우리 및 우리의 통치 아래 살고 있는 모든 백성들에게는 어떤 신이나 거룩한 존재들이라도 호의를 나타낼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건전하고 올바른 의도를 갖고서 기독교인들이 자신들의 관습을 지키고 예배를 드리는 자유를 박탈하지 않는다는 우리의 뜻을 명령하는 바이다. 각 사람이 자신에게 적합하다고 생각되는 신앙에 자신의 마음을 바칠 권리를 허락한다. 그러면 그 하나님은 모든 일에 있어서 우리에게 자신의 은총과 자비를 나타내실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기쁨임을 기록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p551
과거에 우리가 충성스러운 당신들에게 보냈던 서신에 기록되었던 기독교인에 관한 모든 반대조항, 그리고 우리의 온유함에 반대되는 모든 조처들은 완전히 제거되고 이제 완전히 무효화되었다. 이제 모든 기독교인들은 아무런 괴롭힘을 받지 않고 자유로이 자신이 선택한 예배와 진로를 추구하고 좇을 수 있다. 우리가 기독교인들에게 자기들의 예배양식을 따르는 자유를 허락했음을 당신이 깨닫도록 하기 위해 우리는 이 사실을 당신에게 전해 완전히 당신의 보호와 배려 하에 맡기기로 결심했다. 우리가 기독교인들에게 허락한 자유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적용되므로 그들도 각기 자신이 원하는 예배와 신앙을 택할 수 있다. 각 사람이 자신의 마음에 드는 신을 선택하여 예배하는 특권을 누리게 되는 것은 우리 시대의 평화와 안정과도 일치하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종교나 예배양식을 훼손할 의도로 이러한 조처를 내린 것이 아니다. p552
또한 우리는 기독교인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명령한다. 즉 이미 당신에게 서신을 보낸 바와 같이 만일 어떤 사람이 과거에 기독교인들이 모이던 장소들을 다른 사람이나 국가로부터 사들였다면, 아무런 대가나 돈을 받지 말고 조금도 지체하지 말고 되돌려 주어야 한다. 또 혹시 이런 처소를 선물로 받은 사람이 있다면, 그도 즉시 그것들을 기독교인들에게 반환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만일 그 처소를 구입했거나 선물로 받았던 사람들이 정부에 요구할 것이 있다면 지방 총독에게 재판을 청구하라. 그러면 우리는 관대하게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제공할 것이다. 당신은 책임지고 이 모든 것들을 조금도 지체하지 말고 기독교인들에게 넘겨주어야 한다.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집회처 외에도 개인의 것이 아니라 기독교인 전체의 소유인 다른 처소들을 소유했었다고 알려져 있다. 당신은 앞서 언급된 법에 따라 지체하지 말고 이 기독교인들 집단과 각 비밀 집회소의 소유였던 것들을 모두 그 주인에게 돌려주라고 명령하라. 앞서 명한 바와 같이 아무런 대가를 받지 않고 기독교인들에게 재산을 돌려준 사람들에 대해서는 국가가 보상하도록 하라. 당신은 기독교인들에게 우리의 명령을 신속하게 실시하고, 또 이렇게 하는데 있어서 보편적이고 공적인 안정의 유지를 위해 필요한 것들을 국고에서 공급하는 책임을 지도록 하라. 이렇게 함으로서 이미 우리가 많은 일 속에서 경험했던 하나님의 은총이 항상 영원히 지속될 것이다. 이 같은 우리의 관용과 명령을 문서로 기록하여 공포하여 모든 사람에게 알리며, 그리하여 이같은 우리의 관용과 자비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게 하라” p553
황제들이 발표한 또 하나의 명령 (이것은 이 은혜는 오직 그리스도교에만 주어진다고 지적하고 있다)
“지극히 존경하는 아눌리누스 Anulinus 에게 문안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소유인 것들은 훼손하지 말아야 하며 필요하다면 그것들을 그리스도인들에게 돌려주길 원합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이 서신을 받았을 때, 만일 당신이 다스리는 도시나 여러 지방에 있는 기독교회의 재산으로서 현재 원로원 의원들이나 다른 사람들이 소유하고 있는 것들이 있다면, 당신은 즉시 이것들을 그들의 교회에 반환하도록 조처를 취하십시오. 우리는 이미 과거 교회가 소유했던 것들을 모두 돌려주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이러한 우리의 명령이 지극히 분명한 것임을 깨닫고 교회에 속한 모든 것, 즉 정원이나 집이나 그 밖의 것들을 서둘러 가능한 한 신속히 반환하며, 당신이 우리의 명령을 주의 깊게 준행했음을 알게 해주시기 바랍니다. 지극히 사랑하고 존경하는 아눌리누스여, 안녕히 계십시오” p553
황제의 서신 사본 (교회의 일치와 단결을 위해 로마에서 감독회의를 개최하는 명령)
“콘스탄틴 아우구스투스는 로마의 감독 밀티아데스 Miltiades 와 마르쿠스 Marcus 에게 문안합니다. 훌륭한 아프리카의 총독 아눌리누스는 나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소식을 여러 번 전해왔습니다. 즉 카르타고의 감독 캐실리아누스 Caecilianus 가 여러 면에서 아프리카의 동료 감독들로부터 비난을 받고 있다고 합니다. 나의 충성스런 신하가 다스리고 있으며 수많은 주민들이 살고 있는 이 지역에서 많은 사람들이 타락하고 두 진영으로 양분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으며, 특히 감독들이 서로 불화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 문제는 참으로 중요한 문제라고 여겨지므로 나는 캐실리아누스, 그를 고발한 10명의 감독, 그리고 캐실리아누스가 자신을 변호하는데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또 10명의 감독을 로마로 소환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당신도 그곳에 참석하여 내가 이 목적으로 서둘러 로마로 소환한 당신의 동료 레티시우스 Reticius, 마테르누스 Maternus, 마리누스 Marinus 의 견해를 청취하여 그것이 거룩한 율법에 일치하는지 알아보시기 바랍니다. 당신이 이 일의 전말을 완전히 알도록 하기 위해서 나는 아눌리누스가 나에게 보내온 문서의 사본들을 이 서신에 동봉했습니다. 나는 그것들을 앞서 말한 당신의 동료들에게도 보냈습니다. 당신은 그것을 읽고 어떻게 해야 이 문제를 정확하게 조사하고 공정하게 결정할 수 있을지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거룩한 그리스도교를 위해 이처럼 관심을 나타내고 있음과 또 당신이 분파주의나 분열의 여지를 남겨두지 않길 바라고 있음을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위대하신 하나님의 능력이 당신에게 오래도록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p554
황제의 서신 사본 (감독들의 불화를 제거하기 위해 또 다시 감독회의를 개최할 것을 명령함)
호겐 : 이것은 아리우스를 이단으로 정죄한 ‘제1차 니케아 공의회’ 를 소집하는 문서이거나, 혹은 그 공의회가 있기 전에 문제 해결을 촉구할 것을 감독들에게 명령한 문서일 것이다. 니케아 공의회가 정식으로 있기 전 이러한 소규모의 토론은 여러 차례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감독들의 토론이 결판나지 않고 교회 (회중) 안에서 계속 반목이 심해지자 황제 콘스탄틴이 직접 개회한 것이 니케아 공의회이기 때문이다.
“콘스탄틴 아우구스투스는 시라쿠사 Syracuse 의 감독 치레스투스 Chrestus 에게 문안합니다. 이미 전부터 거룩한 신앙과 교회 안에서 악하고 고집스럽게 동요하기 시작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따라서 나는 그들의 불화를 예방하기 원해 다음과 같이 결정하여 편지를 썼습니다. 즉 고올 지방에서 선출한 감독들, 그리고 끈질기기도 끊임없이 논쟁을 계속하고 있는 아프리카의 두 집단 (호겐 :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시작된 아리우스 이단) 에서 몇몇 감독들을 소환해 그들이 참석한 곳에서 그들의 분쟁의 원인이 되고 있는 문제를 자세히 조사하여 이 문제를 일단락 짓게 되길 원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구원, 그리고 지극히 거룩한 종교에 합당한 경외심을 망각하여 지금도 자신의 적의를 버리지 않으며 이미 발표된 결정에 순응하지 않으려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의 견해와 의견을 충분한 인원이 발표되지 못했으며, 또 충분히 논의되어졌어야 할 모든 문제들이 먼저 조사되지 않았는데 너무나 성급하고 경솔하게 결정을 내렸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하여 마땅히 형제애와 평화로운 일치를 나타내야 할 사람들이 치욕스럽고 흉측하게도 서로 반목하는 일이 발생했으며,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과 우리의 신앙을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비웃음거리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그런고로 나는 그들이 자발적으로 동의하여 결정을 내렸으므로 마땅히 종식시켰어야 할 이 문제를 이제는 많은 사람들의 중재를 통해 종식시켜야 할 필요가 있다고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8월 1일 아를르 Arles 시에 원근 여러 지역 감독들이 회의를 개최하라고 명령했습니다. p555
나는 당신에게 시실리의 징치자 懲治者 라트로니아누스 Latronianus 의 관용마차 1대, 또 두 번째 지위에 있는 사람의 마차 2대를 빌리고 아울러 당신을 위해 수고할 하인 3명을 선출하여 이곳으로 오시라고 편지를 쓰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당신이 앞서 언급된 회의 일에 그 장소에서 그들을 만나시길 원합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권위와 그곳에 모인 다른 사람들의 일치와 분별력에 의해 지금까지 치욕스러운 싸움으로 인해 부끄럽게 계속되어온 이 논쟁에 대해 토론하시기를 바랍니다 (호겐 : 아리우스파 vs. 삼위일체파. 콘스탄틴은 제1차 니케아 공의회에서 삼위일체파의 손을 들어줌으로써 자신이 정상적인 마인드를 지니고 있음을 공식천명했다). 당신은 지금 서로 반목하고 있으며 우리로부터 참석하라는 명령을 받은 사람들의 주장을 모두 청취하여 비록 늦더라도 이 논쟁이 종식되고 그들이 믿음과 신앙의식과 형제의 일치를 되찾게 해주시기 바랍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당신을 안전하게 보호해주시기 바랍니다” p556
제6장 기독교인들의 재산에 관한 칙령 : 황제가 교회에 돈을 하사한다는 내용을 담은 서신
“콘스탄틴 아우구스투스는 카르타고의 감독 캐실리아누스에게 문안합니다. 우리는 아프리카와 누미디아와 모리타니아의 모든 지방에 있는 합법적이고 거룩한 그리스도 교회의 사역자들이 경비로 사용할 수 있게 하기 위해 그들에게 무엇인가 하사해야 한다고 결정했습니다. 따라서 나는 아프리카의 부총독 우르수스 Ursus 에게 편지를 보내어 당신에게 3000폴리 (약 10,000달러) 를 지불하라고 전했습니다. 당신이 이 돈을 받으면, 당신은 호시우스 Hosius 가 당신에게 말한 내용에 따라 그 돈을 앞서 말한 사역자들에게 분배하라고 명령해 주십시오. 그리고 만일 나의 뜻대로 모든 감독들에게 분배하기에 이것이 부족하다고 생각되면 지체하지 말고 우리의 재산 관리인 헤라클리데스 Heraclides 에게 필요한 액수를 요청하십시오. 나는 이미 그에게 만일 당신이 그에게 돈을 요청하면 지체하지 말고 지불하라고 명령해 두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심령이 안정되지 못한 몇 사람들이 위험하게도 교리를 변조 變造 하여 백성들을 거룩한 교회로부터 빗나가게 하려 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호겐 : 이단 아리우스파를 말함). 그러므로 나는 총독 아눌리누스와 장관 대리 파트리시우스가 참석한 자리에서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명령했음을 당신에게 알려 드립니다. 즉, 나는 그들에게 무엇보다도 특히 이것에 주의를 기울여 조금이라도 이것이 간과되도록 허용해서는 안 된다고 명령했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누구라도 계속 이 미친 짓을 고집하는 사람이 있으면 당신은 주저하지 말고 이 판사들에게 나아가 보고하도록 하십시오. 그러면 판사들은 내가 명령한대로 그들을 출석시켜 책망할 것입니다. 위대한 하나님의 능력이 세세토록 당신에게 함께 하시길 빕니다” p557
제7장 성직자들에게 부여된 권리와 면제특권 : 교회의 성직자들에게서 정치적 일에 있어서의 국가에 대한 봉사를 면제해 준다고 명령한 황제의 서신
“존경하는 아눌리누스의 건강을 기원합니다. 여러 가지 상황으로 판단하건대 거룩한 하나님을 경외하는 종교가 멸시를 받을 때에는 우리의 국사가 대단한 위험에 처했고, 반대로 이 종교를 합법적으로 인정하고 지켜갈 때에는 마치 하나님께서 은혜를 허락하신 듯 로마인들에게 지극한 번영이 임했으며, 만백성에게 탁월한 축복이 임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거룩함으로 예배를 드리고 율법을 지켜 신을 섬기는 사람들의 노고에 대해 보상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맡고 있는 지역의 교회 안에 있는 이 사람들이 (이들은 이 거룩한 종교의 의식을 수행하는 사람으로서 일반적으로 성직자라고 불리며, 그들을 다스리는 사람은 캐실리아누스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수행하지 못하고 공무에 종사하게 되면,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오류를 범하거나 탈선할 우려가 있으므로 그들에게서 이러한 의무를 면제해 주어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율법에 헌신하게 하려는 것이 나의 뜻입니다. 그들이 하나님께 최고의 경배를 나타내게 되면 이 나라에 큰 행복이 임할 것입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아눌리누스, 안녕히 계십시오” p558
제8장 리시니우스의 악한 변화와 죽음
그 당시에는 우리 주님의 개입에 의해 이처럼 거룩한 은혜가 베풀어지고 있었다. 우리에게는 풍성한 축복이 임했으며, 우리의 일에는 기쁨과 축제의 면류관이 씌워졌다. 그러나 악하고 질투가 많으며 불의한 악마는 이러한 광경을 참고 볼 수 없었다. 앞서 언급된 폭군들에게 임했던 사건들은 리시니우스로 하여금 온전한 이성을 갖게 하기에는 충분하지 못했다. 그는 근친결혼을 했고 또 최고 지위의 황제인 콘스탄틴 대제와 동맹해 콘스탄틴 대제 다음가는 지위를 누렸으므로 그의 정부도 번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선한 본을 따르기를 포기했고, 오히려 불의한 폭군들에 못지않게 사악하게 행했다. 그는 이미 그 폭군들의 종말을 직접 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선한 성품과 우애를 신실하게 지키지 않고 폭군들의 전철을 밟았다. 그리하여 그는 자연의 법칙, 자신이 맺은 동맹, 자신의 혈연관계 등은 전혀 상관치 않고 만백성의 은인을 대적하여 대단히 압제적이고 극악무도한 전쟁을 도발했다. 진정 은혜로운 콘스탄틴 황제는 그에게 참된 자비의 증거를 나타냈다. 그는 그와 친밀하게 지내길 거부하지 않았고, 자기 누이와의 결혼도 반대하지 않았으며, 자신이 선조들로부터 받은 황실 가문의 고귀한 신분을 그에게도 나누어 주었고, 또 그를 자신의 친척이며 동반자로 여겨 제국을 나누어 통치했으며, 그에게 자신과 마찬가지로 제국의 한 지역을 다스리고 통치할 권력을 부여했었다. 그러나 리시니우스는 이와는 반대로 자신의 상관을 대적하여 온갖 궤계와 술책을 도모해 은인의 호의를 악으로 갚으려 했다. 그는 처음에는 자기의 음모를 감추고 마치 친구인 체 하면서 종종 배반과 속임수로 그를 공격하여 쉽게 자기의 목표를 달성하길 바랐다. p559
그러나 하나님은 콘스탄틴 황제의 친구이시며 그를 불철주야로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분이셨으므로 어두움 속에서 만들어진 이 음모들과 비밀을 밝히 드러내어 좌절시키셨다. 우리의 원수를 격퇴하고 우리의 안전을 보존하기 위한 튼튼한 경건의 갑옷은 이처럼 훌륭한 것이었다. 그리고 거룩한 하나님의 은총을 받고 있던 황제는 이 갑옷으로 인해 더욱 강하게 되어 이 불의한 사람의 잡다하고 복잡한 음모로부터 벗어났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사랑하는 군주에게 리시니우스가 행하려는 모든 술책과 악행을 감지했으므로, 자기가 원하는대로 자기의 은밀한 계획이 이루어지지 못하게 된 리시니우스는 더 이상 자기의 속셈을 감추지 않고 본색을 드러내어 전면적인 공격을 개시했다. 리시니우스는 콘스탄틴을 대적해 전쟁을 하기로 결정하면서 동시에 자신이 예배해야 한다고 알고 있는 지고하신 하나님도 대적했다 (호겐 : 본서 p13 를 보면 이렇게 나와 있다 : 한편 제국의 동쪽지방을 다스리던 리시니우스가 갑자기 돌변하여 기독교인들, 특히 성직자들을 박해하기 시작했다. 그는 성직자들이 자기보다는 콘스탄틴에게 호감을 갖고 있고, 또 콘스탄틴을 위한 기도를 더 많이 드린다는 의심을 품었다. 그리하여 콘스탄틴은 두 번의 전쟁에서 그를 패배시키고 굴복시켰으며, 따라서 동쪽 국가의 기독교인들은 평화를 되찾았다). 후일 그는 자기의 다스림을 받고 있으며 전혀 그의 통치를 어지럽힌 일이 없는 경건한 백성들을 눈에 띄지 않게 점진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오성을 뒤덮어 흐리게 만든 선천적인 악한 경향의 충동 때문에 매우 난폭하게 이러한 일을 했다. 그는 이전에 기독교인들을 박해했던 사람들, 또 그들의 사악함을 징계하기 위해 자신이 친히 임명했던 징계자들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는 온전한 이성에서 벗어나 정신이상이 되었으므로 콘스탄틴의 조력자이며 보조자이신 하나님과 대적하여 싸우기로 결심했다. 그는 먼저 자기의 집에 있는 모든 신자들을 쫓아냈다. 이 불쌍한 인간은 만민을 위해 기도하라는 말씀에 따라 그들이 그의 안전을 위해 하나님께 드리던 기도 (호겐 : 중보기도) 를 잃게 되었다. 이 일이 있은 뒤, 그는 도시에 있는 군사들 중에 악마에게 제사드리기를 택하지 않는 군사들의 직책을 박탈하고 추방하라고 명령했다. p560
그러나 이런 일들은 그 후에 저지른 큰 악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이 하나님의 원수가 범한 행동들을 여기에서 특별하게 상세히 서술할 필요는 없다. 그는 모든 법을 범한 자이면서 또한 불법한 법들을 고안해냈다. 그는 감옥에 갇힌 사람에게 음식을 나누어 주거나, 구속되어 굶주려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동정을 베풀지 못하게 하는 법을 제정했다. 따라서 우리는 본성적으로 형제들에게 나타내는 동정심에 끌릴 때에도 선한 사람에게 관용을 베풀지 못하고 선한 일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것은 본성적으로 인간의 마음에 심겨져 있는 인간성을 말살하기 위해 제정된 지극히 수치스럽고 비인간적인 법이었다. 게다가 그는 동정심을 베푼 사람들에게도 동정을 받은 사람과 똑같은 벌을 주라고 했으며, 인간적인 일을 행한 사람들은 감옥에 가두어 극악한 죄인과 똑같은 형벌을 당하게 만들었다. 이것이 리시니우스가 발표한 법령이었다. 그밖에도 그가 결혼에 관해 고안해낸 제도들이나 또는 죽어가는 사람들에 관해 만들어낸 기괴한 제도는 다시 서술하지 않겠다. 그는 이런 것들에 의해 예부터 전해 내려온 로마인들의 지혜로운 제도들을 폐지하고 대신에 야만적이고 미개하며 불법적이고 참으로 무법한 법률을 도입하려 했다. 그는 또 백성들에게서 강제로 세금을 징수하기 위해 무수한 구실을 만들어냈고, 금은을 강탈하기 위한 온갖 방법을 강구했고, 새로이 땅을 측량하고 (새로운 땅의 측량은 횡령을 위한 새로운 구실을 제공했으며, 그에 따라 새로운 과세표준이 제정되었다), 소득을 올리기 위해 이미 오래 전에 죽은 사람들에게서까지 벌금을 받았다. 이밖에도 이 인류의 대적은 귀족들과 저명인사들을 추방하고 그들의 젊은 아내들을 빼앗아 자신의 악당들에게 넘겨주어 능욕을 당하게 했다. 그는 이미 노년에 들어섰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기혼녀나 처녀들에게서 자신의 고삐 풀린 정욕을 충족시켰다. p561
이제 마지막으로 행한 지극히 악한 행동들을 기록하겠다. 그의 만행은 마침내 감독들을 공격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그는 그들을 자신의 조처를 반대하는 지존하신 하나님의 종들로 여기고 있었으나 자신의 상관인 콘스탄틴이 두려워 아직 공개적으로 공격하지는 않고 있었다. 그는 총독들과 장관들을 시켜 교묘하고 은밀하게 작업에 착수하여 가장 유명하며 인정받는 감독들을 음흉하게 살해했다. 그들에게 자행된 살인방법은 참으로 이상한 것으로서 이전에는 전혀 들어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마나 Amana 와 폰투스의 여러 도시에서 자행된 만행은 그 잔인성에 있어 모든 것을 능가하는 것이었다. 그곳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중 몇은 파괴되었고, 또 어떤 교회는 폐쇄되었다. 그는 아무도 그곳에 들어가지 못하게 했고 하나님을 예배하지도 못하게 했다. 그는 자신의 악한 양심을 좇아 생각하길 (착각하길) 우리가 그를 위헤서는 기도하지 않고, 오로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황제 (콘스탄틴) 만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한다고 추측했기 때문에 우리에게 분노를 발했다. 동시에 그에게 아첨하는 총독들은 이 흉측한 폭군을 흡족케 하기 위해 몇 감독들에게 중죄인과 똑같은 형벌을 가했다. 그리하여 전혀 악이라곤 행하지 않은 이 감독들은 아무 죄도 없으면서도 살인자나 자객들처럼 끌려나갔다. 또 그들은 어떤 감독들의 몸을 토막토막 자른 뒤 깊은 바닷속에 던져 물고기의 먹이가 되게 했다. 또 다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은 도피하기 시작했다. 그리스도의 종들은 넓은 들판이나 사막이나 숲속으로 도피했다. 이 불의한 폭군은 이 방법이 성공을 거두게 되자 드디어 신자들에 대한 전면적인 박해를 재개하려는 생각을 품었다. 만일 자기 종들을 보호하시는 하나님께서 선수를 치지 않으셨다면 그는 분명히 자신의 생각대로 행했을 것이며, 또 아무도 그의 일을 방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종 콘스탄틴으로 하여금 막강한 군대를 이끌어 그를 치게 하셔서, 이 깊고 짙은 어둠 속에 빛을 주시고 우리의 구원자를 보내주셨다. p562
제9장 콘스탄틴의 승리, 그리고 그의 통치하에 로마제국 전역에 임한 축복
지존하신 하나님께서는 콘스탄틴에게 그의 신앙의 열매들, 즉 악인들을 정복하여 이긴 승리의 기념비를 하늘로부터 주셨다. 그리고 사악한 폭군과 그의 변호사들과 추종자들은 콘스탄틴의 발 앞에 엎드리게 하셨다 (콘스탄틴이 이 뛰어난 승리를 거둔 것은 AD 324년의 일이다. 최초의 전쟁은 콘스탄틴의 생명을 해치려는 음모를 꾸민 시니시우스를 리시니우스가 보호하려 했기에 AD 314년에 일어났었다. 그로부터 10년 후 그는 황위를 박탈당했다. 그러나 콘스탄틴의 누이였던 그의 아내의 간청으로 목숨은 부지하게 되었다). 리시니우스가 이처럼 광포한 행동으로 치닫고 있었으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황제는 더 이상 그를 너그러이 내버려둘 수 없다고 생각해 자신의 관용과 공의의 원리를 섞어 신중한 조처를 취했다. 그는 폭군에 의해 학대받고 있는 사람들을 보호하기로 결정하여, 작은 해충들을 축출함으로서 수많은 인류를 구원했다. 만일 그가 전혀 동정할 가치도 없는 이 사람을 불쌍히 여겨 관용을 베풀었다 해도 아무 소용이 없었을 것이며 그는 자신의 불의를 버리지 않고 오히려 자기 백성들에 대한 광포함을 더해갔을 것이며, 야만적인 짐승으로부터 온갖 잔인한 일을 겪고 있는 억압받는 자들에게는 구원의 소망이 없었을 것이다. 선한 백성들의 보호자인 콘스탄틴은 악에 대한 증오와 선에 대한 사랑을 결합해 자신의 아들이며 지극히 관대한 카이사르인 크리스푸스 Cerispus 와 함께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구원의 팔을 펼치기 위해 진군했다. 콘스탄틴과 아들은 우주의 왕이신 하나님과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그들의 지도자인 동시 조력자로 모신 듯, 군대를 이끌고 나아가 하나님의 원수들을 사방으로 에워싸 쉽사리 승리를 거두었다. 하나님께서는 그 전쟁에서 모든 일이 그들이 원하는 대로 잘 되어 나가게 해주셨다. 어제까지만 해도 백성들을 죽이고 위협하던 자들은 사라져 그 이름조차 기억에 남지 않게 되었다. 그들의 초상화들은 멸시와 치욕을 당했다. 리시니우스는 과거 불의한 폭군들이 당했던 것과 똑같은 광경을 직접 경험하게 되었다. 그는 교훈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고, 또 이웃의 징계를 보고서 지혜롭게 행하지 않았으므로 그도 역시 불의의 길을 밟아 그들과 함께 절벽 아래로 내리침을 당했다. 그는 이런 식으로 쓰러졌다. p564
그러나 승리를 얻은 막강한 콘스탄틴은 모든 면에서 부친을 닮은 경건한 아들 크리스푸스 카이사르와 함께 신앙의 덕으로 치장하고서 동쪽 제국을 자신의 소유로 회복했다. 그리하여 로마제국은 과거처럼 하나의 일치된 국가로 회복되어 해가 떠오르는 곳에서부터 지는 곳까지, 또 남쪽에서 북쪽에 이르는 지역까지 온 세상에 그들의 평화로운 통치를 뻗쳐나갔다. 그리하여 과거에 백성들을 괴롭혔던 자들에 대한 두려움은 완전히 제거되었다. 그들은 기쁘고 즐겁게 찬란하고 즐거운 날들을 경축했다. 만물은 빛으로 충만했고, 전에 슬픔에 빠졌던 사람들은 서로 즐겁고 미소띤 얼굴로 쳐다보았다. 도시와 마을에서는 먼저 찬송과 합창으로 우주의 임금이신 하나님을 찬양했고 그 다음에는 경건한 황제와 모든 사랑하는 그의 자녀들을 찬미했다. 과거의 악과 사악함은 완전히 망각되어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 사람들은 현재의 축복을 누리고, 장차 누리게 될 축복을 기대할 뿐이었다. 승리를 얻은 황제는 자비가 충만한 칙령들을 발표했고, 선하고 참된 신앙을 나타내는 법률을 제정했다. 이와 같이 모든 폭정을 깨끗이 제거한 뒤 콘스탄틴과 그의 아들들은 아무런 경쟁자가 없이 굳건하게 제국을 다스리게 되었다. 과거 통치자들이 하나님께 발휘한 적의를 처음으로 일소한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수여하신 긍휼을 깨닫고 있었다. 그들은 온 세상에 나타난 사역과 작업에 의해 하나님과 신앙에 대한 자신의 사랑,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감사를 나타냈다. p564 거룩하신 축복으로 말미암아 유세비우스 팜필루스의 <교회사> 제10권을 마치는 바이다. p564 END
연대표
유세비우스의 <교회사> 에 등장하는 유명한 인물들과 사건들의 연대를 나타내준다.
본 연대표는 당대의 주요 사건과 인물들의 일람표를 제시하려는 목적으로 작성된 것으로서, 연대가 서력기원, 또는 실제 연대보다 4년 늦게 기록된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왼쪽에 기록된 숫자는 연대를 나타내며, 오른쪽의 숫자는 그 사건이 기록된 본서의 페이지이다.
AD 1년 10월 :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 때에 그리스도 탄생함 p62
AD 14 : 티베리우스 황제
AD 33 : 그리스도, 십자가에 못 박힘 p75
티베리우스 황제가 23년의 통치를 끝으로 사망하고 칼리굴라가 즉위함 p94
AD 37 : 최초의 기독교회의 감독이던 예루살렘 교회의 의인 야고보 p89
다대오가 에뎃사로 파견됨 p89
'크리스찬' 이라는 명사가 안티오크에서 사용됨
AD 41 : 칼리굴라 사망, 클라우디우스 즉위, 사도행전에 언급된 기근이 발생 p100
AD 43 : 헤롯 아그리파가 교회를 괴롭히고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처형함 p100
헤롯 사망 p102
사기꾼 드다 p113
오스르헤니아의 여왕 헬렌 p104
시몬 마구스 p105
베드로, 로마로 감 p106
필로가 베드로와 교제함 p110
예루살렘에서 발생한 유대인들의 폭동과 그에 따른 멸망
헤롯의 아들 아그리파가 유대인의 왕으로 임명됨 p117
AD 54 : 클라우디우스 사망, 네로 황제 즉위 p117
마가의 후계자, 알렉산드리아의 감독 안니아누스 p126
제1차 기독교 박해 p127
베드로와 바울의 순교, 로마의 초대 감독 리누스 p132
AD 68 : 네로 사망하고 갈바와 오토가 황제가 되었으나 18개월 밖에 다스리지 못함 p136
AD 69 : 비텔리우스가 황제로 인정되었으나 곧 살해되고 베스파시안이 황제로 선포됨 p136
유대인들이 혹독한 기근을 겪음 p138
AD 70 : 베스파시안의 아들 티투스가 예루살렘을 포위 함락시킴 p136
영지주의, 도시테우스, 시몬 마구스, 에비온파, 세린투스
예루살렘 교회의 2대 감독으로 클레오파스의 아들 시므온이 임명됨. 예루살렘 교회의 처음 두 감독이 주님의 친척이었음은 주목할 만하다 p152
베스파시안이 다윗 가문을 수색함
AD 79 : 베스파시안 사망하고 티투스 즉위함
로마교회의 감독 아넨클레투스
AD 81 : 티투스 사망하고 제2의 네로라고 할 수 있는 도미티안 즉위, 제2차 기독교 박해 p154
로마교회의 감독 클레멘트. 알렉산드리아의 감독 아빌리우스
사도 요한 밧모섬에 유배됨 p155
AD 94 : 순교자 클레멘트와 도미틸라
주님의 친척 유다의 손자들이 이때까지 생존함 p156
AD 96 : 도미티안 사망하고 네르바 즉위, 네르바의 뒤를 이어 트라얀 즉위
AD 98 : 알렉산드리아의 감독 세르돈 p159
로마의 클레멘트. 안티오크의 익나티우스가 초대 감독 에보디우스의 후임이 됨 p158
예루살렘의 감독 시므온 순교하고 저스투스가 후임이 됨 p178
이 시기에 예루살렘 교회의 감독직 계승 연대는 불확실하다.
처음부터 15대 감독까지는 모두 히브리인이었으며, 이들의 이름은 유세비우스가 제시한 것 외에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p193
예루살렘 함락 이후로는 이방인들이 예루살렘 교회의 감독이 되었다
AD 99 : 사도 요한 에페소에서 사망
로마의 감독 유아레스투스 p190
알렉산드리아의 감독 프리무스
알렉산더가 유아레스투스의 후임으로 로마감독이 됨 p190
AD 107 : 익나티우스 순교
AD 117 : 트라얀 사망하고 아드리안 즉위 p191
콰드라투스와 아리스티데스가 기독교에 대한 변증서를 저술하여 아드리안에게 증정함
로마의 감독 지스투스 (식스투스)
알렉산드리아의 저스투스. 로마에서는 지스투스의 후임으로 텔레스포루스가, 알렉산드리아에서는 유메네스가 지스투스의 후임이 됨 p194
사기꾼 바르코케바스 p194
예루살렘의 최후 함락. 예루살렘이라는 이름 대신에 일리아라는 이름이 사용됨 p195
이 시기에 시몬 마구스의 후예인 메난더, 사투르니누스, 바실리데스 등의 이단자들이 출현함 p196
아드리안 황제가 심문 없이 기독교인을 처형하지 못하게 함 p200
저술가 헤게시푸스와 저스틴 p198
AD 138 : 아드리안 사망하고 안토니누스 피우스 즉위 p201
로마의 감독 텔레스포루스의 후임자 히기누스 p201
영지주의자 발렌타인과 세르돈이 로마에서 유명해짐 p202
저스틴이 안토니누스 황제에게 기독교 신앙을 변호하여, 황제가 아시아의 도시에 칙령을 보냄 p204-205
로마교회의 감독 피우스의 후임자 아니세투스 p207
AD 161 :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뒤를 이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가 형제인 루시우스 안토니누스 베루스와 함께 통치함 p208
AD 163 : 저스틴이 황제들에게 두 번째 변증서를 보냄. 거의 같은 시기에 아테나고라스와 타티안도 변증서를 저술함
AD 166 : 저스틴과 폴리갑 순교 p217
제4차 박해. 로마교회의 감독 아니세투스의 후임으로 소토 임명. 알렉산드리아의 셀라디온 감독의 후임 아그리피누스 p225
안티오크의 감독 헤론, 에로스, 데오필루스 p226
고린도의 디오니시우스, 크레테의 피니투스, 필립 아폴로나리스, 멜리토, 무사누스, 모데스투스, 이레니우스 등의 저술가들 p226
AD 169 : 베루스 사망
기독교인 군단이 비를 내려달라고 기도하여 마르코만니를 이겼고, 그리하여 ‘천둥군단’ 이라고 불림 p263
로마의 엘류테루스 p242
시리아의 바르데사네스 p240
AD 177 : 고올 지방의 리용과 비엔나의 순교자들 p243
이 무렵 신약성서가 시리아어와 이탈리아어로 번역됨. 그리고 심마쿠스, 아킬라, 데오도시안의 역본도 이루어짐 p253
AD 180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사망하고 콤모두스 즉위 p269
알렉산드리아의 감독 아그리피누스의 후임자 줄리안 p270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철학자 판태누스 p270
판태누스의 제자인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호겐 : 로마감독 클레멘트와 혼동하지 말 것) p271
아드리안 황제의 유대 공략 후 시작된 예루살렘 교회의 이방인 감독 계열의 제15대 감독 나르시수스 p272
로도가 마르시온의 오류를 반박함 p273
브리기아의 이단자, 몬타누스와 프리스길라 막시밀라 p273-274
분파주의자 블라스투스 로마로 가다 p275
교회작가인 밀티아데스와 아폴리나리스. 아폴리나리스는 순교자이기도 함 p290
로마교회의 감독 엘류테루스의 후임자 빅토르. 알렉산드리아의 감독 줄리안의 후임자 데메트리우스 p291
안티오크의 감독 세라피온 p291
예루살렘의 나르시수스, 고린도의 바길루스, 에베소의 폴리크라테스
유월절을 지키는 방법에 대한 문제가 야기됨 p292
사모사타의 바울이 아르테몬의 이단을 부흥시킴 p300
나탈리우스, 아스클레피오도투스 p302
AD 192 : 페르티낙스 Pertinax
AD 193 : 디디우스 줄리우스 Didius Julius
AD 194 :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
터툴리안 <변증> 저술
제5차 박해 p306
이집트의 총독 필립. 레오니다스 및 여러 명이 순교함
AD 205 : 이레니우스와 리용의 순교자들
오리겐 p307
알렉산드리아의 학교를 클레멘트가 판태누스에게서 이어받음
이 시기에 역사가 유다, 예루살렘의 알렉산더, 알렉산드리아의 데메트리우스 및 기독교의 반대자 포피리가 활약함 p330-331
AD 211 : 카라칼라와 게타 황제
AD 217 : 마크리누스가 아들과 함께 통치함
로마교회의 감독 빅토르의 후임자 제피리누스, 그는 다시 우르바누스에게 교회를 넘겨 주었다 p335
AD 218 : 마크리누스의 뒤를 이어 헬리오가발루스가 즉위함 p335
AD 222 : 알렉산더 세베루스 황제 p335
안티오크 교회의 감독 아스클레피아데스의 후임자 필레타스 p335
알렉산더 황제의 모친 마매아가 기독교에 호의를 보임 p335
교회작가 히폴리투스 p336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감독 레메트리우스의 후임자 헤라클레스 p342
카파도키아의 가이사랴의 감독 피르필리아누스 p342
팔레스틴의 가이사랴의 감독 데옥티스투스
AD 235 : 막시미누스 트락스가 알렉산더 황제를 살해하고 황제가 됨, 제6차 박해 시작됨 p343
AD 238 : 막시미누스 트락스 황제의 뒤를 이어 고르디온 즉위
로마교회의 감독직이 폰티아누스로부터 안테로스에게, 또다시 파비아누스에게 계승됨 p343
알렉산드리아의 감독 헤라클라스 p344
안티오크의 제비누스의 후임자 바빌루스 p344
Cesti 의 저자 아프리카누스
아라비아의 베릴루스 p347
AD 244 : 고르디온 황제의 뒤를 이어 아라비아인 필립이 즉위
성경에 관한 오리겐의 저서들 p346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감독 헤라클라스의 후임자 디오니시우스 p348
아라비아인들의 불화 p349
헬세사이테스의 이단
AD 250 : 필립 황제의 뒤를 이어 데시우스 즉위, 제7차 박해 p351
예루살렘의 감독 알렉산더 순교하고 마자바네스가 감독이 됨
안티오크의 감독 바빌루스가 감옥에서 사망하고 파비누스가 감독이 됨 p351
오리겐의 큰 고통과 고문 p353
알렉산드리아의 순교자들 p355
노바투스가 로마에서 분열을 조장함 p361
파비아누스 순교하고, 코르넬리우스가 로마의 감독이 됨 p362
카르타고의 시프리안. 안티오크의 파비누스 p366
디오니시우스 노바투스에게 서신을 보냄 p368
카르타고의 시프리안과 스테판의 논쟁 p373
칼루스 황제. 로마의 감독 루시우스 p372
발레리아누스 황제
로마의 감독 스테판 p375
이 시기에 활약한 다음의 감독들은 모두 동시대 인물이다 :
안티오크의 데메트리아누스, 가이사랴의 데옥티스투스, 일리아의 마자바네스, 두로의 마리누스, 라오디케아의 헬리오도루스, 다소의 헬레누스
스테판의 후임 감독 지스투스 2세 p374
사벨리우스의 이단 p376
마크리아누스가 발레리안 황제를 선동하여 박해를 하도록 함 p381
로마의 감독 디오니시우스 p411
알렉산드리아의 디오니시우스가 겪은 고난 p383
네포스의 분파주의 p403
AD 259 : 갈리에누스가 부친 발레리안을 체포한 뒤 홀로 황제가 됨 p390
시프리안과 라우렌티우스 순교
이 시기에 예루살렘에서는 야고보의 감독직을 크게 존경함 p395
알렉산드리아의 디오니시우스 사망하고 막시무스가 후임 감독이 됨 p412
AD 264 : 사모사타의 바울이 분파를 만듦
AD 268 : 사모사타의 바울 안티오크 공의회에서 정죄됨 p411
로마의 클라우디우스 2세 황제 p412
로마교회의 감독 디오니시우스의 후임자 펠릭스의 후임으로 유티키아누스가 감독이 되었고, 곧 그는 카이우스에게 감독직을 넘겨줌
AD 270 : 아우렐리안 황제에게 사모사타의 바울을 반박하는 탄원을 함 p418
AD 272 : 아우렐리안 황제가 제9차 박해를 시작함 p418
AD 275 : 타키투스 황제
AD 276 : 플로리아누스 황제
AD 277 : 프로부스 황제
마니교도 오리겐 p409
AD 282 : 카루스 황제 p419
카리누스와 누메리아누스 황제
AD 283 : 로마의 감독 가이우스 p420
AD 284 : 로마의 황제 디오클레티안, 그의 시대에 제10차 박해가 시작되어 교회가 붕괴됨 p432
AD 287 : 가이우스 감독의 후임 감독 마르셀리누스, 그는 감독이 되어 15년이 되는 해에 박해를 받았다 p420
AD 302 : 최악의 박해였던 제10차 박해
안티오크에서는 티매우스, 돔누스, 시릴루스가 연속적으로 감독으로 활약함 p420
시릴루스의 후임자 티란누스 p420
라오디케아의 감독 소크라테스의 후계자 유세비우스
AD 304 : 로마에서는 마르셀리누스의 후임으로 마르셀루스가, 다시 그의 후임으로 유세비우스가 감독이 됨. 유세비우스는 이들을 언급하지 않았다.
마르셀루스는 너무 엄한 징계 때문에 막센티우스에 의해 축출되었고, 후자도 역시 막센티우스 황제에 의해 축출되었다.
AD 310 : 이들의 후임으로 밀티아데스, 또는 멜키아데스가 감독이 되었다. 이들은 콘스탄틴의 서신에 마르쿠스와 관련되어 언급된다 p553
디오클레티안과 막시미안 황제의 퇴위
콘스탄티우스 크롤루스, 디오클레티안의 사위 갈레리우스 막시미아누스가 아우구스투스가 됨 p453
제국이 두 황제에 의해 양분됨. 갈레리우스는 세베루스와 그의 조카인 막시미누스 카이사르를 상속자로 삼음
황제들의 투표에 의해 리시니우스가 황제인 동시 아우구스투스로 임명됨 p453
막시미누스가 아우구스투스의 칭호를 사칭함 p453
AD 306 : 서로마제국의 황제 콘스탄티우스가 브리튼에서 사망하고, 그의 아들 콘스탄틴이 황제로 선포됨.
이것은 갈레리우스 막시미아누스의 야심적이고 독재적인 계획을 좌절시킨 사건이다 p453
막시미안이 콘스탄틴의 생명을 노리다가 수치스럽게 사망함 p453
막시미안의 아들 막센티우스가 로마에서 황제의 지위를 사칭함 p454
동로마제국의 막시미누스와 로마의 막센티우스가 비밀리에 콘스탄틴과 리시니우스를 대적하여 동맹을 맺음 p455
폭군들이 자행한 일들 p456
이 무렵 아나톨리우스가 라오디케아의 감독이며 저술가로 활약했다 p421-424
안티오크의 스테판 감독 p425
팔레스틴의 가이사랴의 감독 데오텍누스의 후임으로 팜필루스와 동시대 사람인 아가피우스가 감독이 됨.
아가피우스의 후임으로는 <교회사> 의 저자 유세비우스가 감독이 되었음 p424
이 시기에 활약한 저술가로는 알렉산드리아의 피에리우스, 폰투스의 멜키우스 감독, 아티카의 꿀이라고 불리는 밀레티누스가 있다 p426
이 무렵 예루살렘의 감독으로는 히메내우스, 람브라스, 헤로몬이 있다 p426
알렉산드리아의 감독 디오니시우스의 후임자 막시무스의 후임으로 데오나스가 임명됨 p426
데오나스의 후임으로 피터와 아킬라스, 또 아키라스의 후임으로는 알렉산더가 임명됨. 이 알렉산더가 아리우스 논쟁의 직접적 원인이 된다.
예루살렘의 헤르몬, 알렉산드리아의 알렉산더, 로마의 밀티아데스, 안티오크의 티란누스, 라오디케아의 데오도투스, 팔레스틴의 가이사랴의 아가피우스 등이
유세비우스가 언급한 최후의 감독들이다.
AD 314 : 로마교회의 감독 밀티아데스의 후임으로 실베스터가 임명됨. 그의 시대에 니케아 공의회가 개최됨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 신앙의 자유로운 신봉을 허락했고, 로마세계를 억압으로부터 해방시킴 p527
교회가 재건되고 헌당됨 p528
교회가 누린 전반적인 평화. 황제는 성직자들에게 많은 재산을 하사하고 특권을 부여했음. 또 몰수된 교회의 재산을 반환해줌 p556-557
교회가 새로이 누리게 된 영광은 뒤이어 야기된 타락의 기초가 되었다
AD 315 : 리시니우스가 콘스탄틴을 대적하여 음모를 꾀했으나 수포로 돌아감 p559
리시니우스가 대단히 난폭하게 기독교인들을 박해함 p560
그가 자행한 월권행위 p561
AD 315 : 리시니우스가 콘스탄틴과 교전하여 완전히 패배하여 곧 처형됨 p562
AD 324 : 콘스탄틴이 로마제국의 유일한 황제가 됨
유세비우스가 언급한 감독들의 계보
예루살렘의 감독
1. 주님의 형제 야고보 James
2. 클레오파스의 아들 시므온 Symeon
3. 저스투스 Justus
4. 자케우스 Zaccheus
5. 토비아스 Tobias
6. 벤자민 Benjamin
7. 요한 John
8. 마티아스 Mattias
9. 필립 Philip
10. 세네카 Seneca
11. 저스투스 Justus
12. 레위 Levi
13. 에프레스 Ephres
14. 요셉 Joseph
15. 유다 Judas (히브리인으로는 마지막 감독)
16. 마르쿠스 Marcus
17. 카시아누스 Cassianus
18. 푸블리우스 Publius
19. 막시무스 Maximus
20. 줄리안 Julian
21. 카이우스 Caius
22. 심마쿠스 Symmachus
23. 카이우스 2세 Caius II
24. 줄리안 2세 Julian II
25. 카피토 Capito
26. 막시무스 2세 Maximus II
27. 안토니누스 Antoninus
28. 발렌스 Valens
29. 돌리키아누스 Dolichianus
30. 나르시수스 Narcissus
31. 디우스 Dius
32. 게르마니오 Germanio
33. 고르디우스 Gordius
34. 나르시수스 2세 Narcissus II
35. 알렉산더 Alexander
36. 마자바네스 Mazabanes
37. 히메내우스 Hymenaeus
38. 잡다스 Zabdas
39. 헤르몬 Hermon
안티오크의 감독
1. 에보디우스 Evodius
2. 익나티우스 Ignatius
3. 헤론 Heron
4. 코르넬리우스 Cornelius
5. 에로스 Eros
6. 데오필루스 Theophilus
7. 막시미누스 Maximinus
8. 세라피온 Serapion
9. 아스클레피아데스 Asclepiades
10. 필레투스 Philetus
11. 제비나스 Zebinas
12. 바빌라스 Babylas
13. 파비우스 Fabius
14. 데메트리아누스 Demetrianus
15. 사모사타의 바울 Paul of Samosata
16. 돔누스 Domnus
17. 티매우스 Timaeus
18. 시릴루스 Cyrillus
19. 티란누스 Tyrannus
로마의 감독 (유세비우스에 의하면 베드로와 바울이 로마에서 순교한 뒤에 다음의 인물들이 활동했다고 한다)
1. 리누스 Linus
2. 아넨클레투스 Anencletus
3. 클레멘트 Clement
4. 유아레스투스 Euarestus
5. 알렉산더 Alexander
6. 지스투스, 또는 식스투스 Xystus
7. 텔레포루스 Telephorus
8. 히기누스 Hyginus
9. 피우스 Pius
10. 아니세투스 Anicetus
11. 소테르 Soter
12. 엘류테루스 Eleutherus
13. 빅토르 Victor
14. 제프리누스 Zephyrinus
15. 칼리스투스 Callisthus
16. 우르바누스 Urbanus
17. 폰티아누스 Pontianus
18. 안테로스 Anteros
19. 파비아누스 Fabianus
20. 코르넬리우스 Cornelius
21. 루시우스 Lucius
22. 스테파누스 Stephanus
23. 지스투스, 또는 식스투스 2세 Xystus II
24. 디오니시우스 Dionysius
25. 펠릭스 Felix
26. 유티키아누스 Eutychianus
27. 카이우스 Caius
28. 마르셀리누스 Marcellinus
29. 밀티아데스 Miltiades
알렉산드리아의 감독 (복음서의 기자 마가가 이곳에 교회를 세웠고, 그 후 다음의 인물들이 활동했다)
1. 안니아누스 Annianus
2. 아빌리우스 Avilius
3. 세르도 Cerdo
4. 프리무스 Primus
5. 저스투스 Justus
6. 유메네스 Eumenes
7. 마르쿠스 Marcus
8. 셀라디온 Celadion
9. 아그리피누스 Agrippinus
10. 줄리아누스 Julianus
11. 데메트리우스 Demetrius
12. 헤라클라스 Heraclas
13. 디오니시우스 Dionysius
14. 막시무스 Maximus
15. 데오나스 Theonas
16. 피터 Peter
17. 아킬라스 Achillas
18. 알렉산더 Alexander
라오디케아의 감독 (유세비우스가 언급한)
텔리메드레스 Thelymedres
헬리오도루스 Heliodorus
소크라테스 Socrates
알렉산드리아의 유세비우스 Eusebius of Alexandria
아나톨리우스 Anatolius
스테판 Stephen
데오도투스 Theodotus
가이사랴의 감독 (유세비우스가 언급한)
데오필루스 Theophilus
데옥티스투스 Theoctistus
돔누스 Domn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