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벨론의 최후와 벨사살
기원전 562년 네브카드네자르(느부갓네살)왕이 죽고 난 후,
키루스 대왕에게 함락되기까지 신바빌로니아는 21년동안 대혼란을 겪는다.
네브카드네자르 사 후, 그의 아들 에윌므로닥이 순조롭게 왕 위를 승계하지만
2년 만인 기원전 560년에 네브카드네자르의 사위인 네리그랏살이
모반을 일으켜 에윌므로닥을 살해하고 왕 위를 찬탈한다.
4년을 치리한 후 기원전 556년, 전쟁에서 죽음을 맞이하는데 그의 아들
라보로소 알코드가 왕 위에 오르지만 저능아였던 그는 1년도 못되어
네브카드네자르의 또 다른 사위인 나보니두스의 주변 사람들에게 맞아 죽고
왕 위에 오른 나보니두스는 네리그랏살의 딸과 결혼한다.
거기에서 얻은 아들이 벨사살인데 왕 위에 오른 해에 키루스에 의해
바빌로니아와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신바빌로니아의 왕의 계보를 보면...
나보폴라살 (기원전 625~605)-갈대아 왕조, 기원전 609년
앗수르제압
네브카드네자르(기원전 605~562)-카르케미시 전투에서
이집트군 대파하고 유다로 진격 1차, 2차, 3차에 걸쳐 유대인들을
바벨론 포로로 잡아감.
에윌므로닥(기원전 562~560)-유다의 여호야긴 왕을 석방하다.
네리그랏살(기원전 560~556)-네브카드네자르의 사위, 에윌므로닥을
모반으로 살해.
라보로소 알코드(기원전 556)-네리그랏살의 아들.
저능아였던 그는 1년도 못되어 맞아 죽는다.
나보니두스(기원전 556~539)-네브카드네자르의 또 다른 사위.
왕 위에 오른 후 네리그랏살의 딸과 결혼한다.
벨사살(기원전 539)-나보니두스의 아들이자 성접 왕, 나보니두스는
페르시아와의 전쟁에 나가 있었는데 유다에서 가져 온
기명으로 대규모의 연회가 벌어지고 있는 순간 키루스에 의해 멸망.
벨사살(Belshazzar)은 네브카드네자르(기원전 605~562)의 손자며,
나보니두스의 장자로 신바빌로니아 제국의 마지막 왕으로 알려졌지만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위해 전쟁터에 나가 있던 부왕 나보니두스가
유사시를 대비해 섭정왕으로 세웠으므로 정식 왕은 아니다.
헤로도토스에 의하면 기원전 539년 10월 10일, 벨사살이 연회를 베풀던 날
밤에 바사(페르시아)제국의 군대가 메마른 강을 건너 성으로
침투하여 벨사살을 살해했다고 기록했다.
다니엘 선지자는 이날 밤, 연회장 벽에 나타난 손가락이 벽에 쓴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란 글씨의 뜻을 풀이하면서 벨사살의
죽음을 예언한다(단5:25)
바벨론은 갈대아 왕국의 수도로 바그다드 남쪽 100km 지점인 티그리스 강과 유브라데 강변에 위치한 성읍이다.
메소포타미아는 두 강(티그리스 강과 유브라데 강)사이의 땅이라는 뜻인데
인류 최초의 영웅인 니므롯에 의해 세워진 여러 도시들 중 한 곳으로(창10:10)
유브라데 강의 수로와 운하가 도시를 가로 질러 흐르는 지형으로 천혜의 해자로 둘러 있어서
자연적으로 풍요롭고 최고의 안전한 요세였다.
배를 타야 건널 수 있는 강 앞에 키루스 황제가 도착해서 과연 어떤 방법으로 도하를 해야 할까
고민을 하고 있었는데 혈기를 못 이긴 백마 한마리가 그만 강 물 속으로 뛰어들어 강을 건너려고 했으나
휩쓸려 떠내려 갈 만큼 강의 물살이 쎘다.
키루스 황제는 강 안 양쪽에 각각 180개의 수로를 파서 360개의 수로로 물을 분산시킨 후
걸어서 강을 건넌다.
바빌론 성벽의 길이는 18km이고 긴쪽은 72km까지 뻗어 있어서 도시의 외곽이 이미 키루스의 손에
넘어갔는데도 그 사실조차 모르고 춤을 추며 놀았다고 한다.
그 날은 바빌로니아 최대의 축제일이었다.
키루스 황제가 점령한 바빌론 성벽의 높이는 14미터이며 삼중으로 되었 있고 성벽 위로 난 길은
4마리의 말이 끄는 마차가 멈추지 않고 비켜갈만큼 넓었다고 한다.
바빌로니아의 역사만 봐도 앗수르를 제압했고, 카르케미시(갈그미스) 전투에서 이집트를 대파했으며
유대의 예루살렘 성을 훼파할 때는 굶주림에 자기 자식을 잡아 먹는 인류 최악의 참상을 겪게 했다.
여기에서 죽은 사람들의 숫자는 과연 몇 명일까?
인간의 눈으로보면 하나의 민족이 무너지고 다른 하나의 제국이 일어서는 세계사일 뿐이지만
하나님의 뜻으로 보면 바빌로니아의 사명은, 패역한 이스라엘 백성을 징계하는 도구로 쓰임 받았고
페르시아의 사명은 '70년이 차면' 다시 유대로 귀환하여 회복한다는 유대인 유수의 마침을 위해
쓰임 받은 후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역사 속으로 사라져 간다.
역사는 인류에 의해 쓰여지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의해 오늘도 움직여지고 있다는 것이다.
다니엘 선지자는 느브갓네살(네브카드네자르)원년인 기원전 605년에 1차 포로로 바빌론에 잡혀 가서
느브갓네살의 꿈을 풀이해 줬고, 벨사살이 본 벽에 씌여진
글을 풀이했으며, 키루스 황제의 원년까지 있었다고 성경에 기록되어있다.
소년이었을 때 잡혀 갔으니 15~17세로 추정한다해도 '70년'이 차서 1차 귀환이 이루어지는 고레스왕
원년(기원전537)까지 살아 있었으니 추정하면 85세쯤이다.
아마도 너무 원로여서 예루살렘까지의 1,700km라는 긴 여정에 오르지 못하고
바벨론(페르시아)에서 죽어 그곳에 묻힌다.
다니엘의 묘는 이란 남서쪽 수사(Susa)를 비롯한 우즈베키스탄등 8곳에 남이 있는데
이란 수사에 있는 묘가 가장 근접하다고 본다.
단5:31에 나오는 '메대 사람 다리오가 나라를 얻었는데 때에 다리오는 육십 이세였더라'의 다리오는
다리우스 대왕이 아니라 키루스의 사령관 중 한사람으로 보고 있다. 역사를 보면 조상의 이름을
그대로 쓰는 경우가 많은데 왕족들의 경우는 특히 그렇다.
단5:18에 벨사살과 느부갓네살의 관계를 부친과 아들 사이로 언급하고 있으나 모계를
통한 손자 뻘로 해석하는게 옳다.
다음 : 페르시아 역사
참고 - 도서출판 휘선, 구속사 시리즈 5권
헤로도토스 역사
고대 페르시아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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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바벨론의 최후와 벨사살|작성자 세르빌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