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사랴의 에우세비우스 (Eusebius)(A.D.263~339) ●팔레스틴 출생, 가이사랴의 감독인 팜필루스의 후계자이자 감독 ●고대 기독교의 걸출한 역사가이자 주석가이며 성서연구가 ●최초로 교회역사서인 『교회사』를 저술 |
1. 쿠르트 알란트의 책
가이사랴의 에우세비오스
(최초의 교회 역사가)
가이사랴의 에우세비오스라는 이름은 이미 앞에서 가끔 등장했다. 에우세비오스의 저작에 거듭 의지하지 않고는 기원초 3세기까지에 교회 역사를 기술한다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다. 그가 쓴 『교회사(historical ecclesiastica)』는 다른 경우 같았으면 훨씬 오래 전에 흩어져 없어질 뻔한 수많은 자료와 전승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해 준다. 에우세비오스는 특유의 처리 방식으로 과거사에 속하는 사료(史料)라면 빠짐없이 수집해 두었고, 그것들을 활용하는 방법에도 익달해 있었다. 알렉산드리아에서 강제 추방당한 오리게네스가 팔레스티나에 발길이 닿아 활동 터전을 찾아냈을 즈음, 이미 가이사랴에는 학원을 열어도 좋을 만큼 기반이 닦여 있는 상태였다. 열성스런 오리게네스 추종자 파필로스가 그 학원에 참여하여 오리게네스 신학에 중단이 없도록 강의하였다. 팜필로스의 문하생이면서 동역자이자 친구였던 에우세비오스는 디오클레티아누스 박해 때에 팜필로스가 순교하자 그의 후계자로 세움을 입었다. 그는 자기의 타고난 재능과 견식을 개발하는데 능통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족히 학문상으로 성가를 누릴 만한 것임을 간파하고 있었다. 그를 적대시한 동시대인들과 후대의 신학 논객들은 한동안 그를 폄하하는 데 열을 올렸지만 결코 결정적인 흠을 집어내지는 못했다.
오리게네스 추종자였던 에우세비오스는 니카이아 회의와 아리우스 논쟁 중에는 당연히 반아타나시우스파에 가담하였고, 때로는 걷어붙이고 나서서 아리우스를 변론하기도 하였다. 이런 일들로 해서, 324년에 열린 안디옥교회 회의는 그를 정죄하였다. 그렇지만 이 선고는 니카이아 회의 때에 번복되었다. 이 무렵, 에우세비오스는 대단히 유력한 위치에 올라서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가이사랴 감독이 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박해가 휩쓸고 지나간 뒤 얼마 안 있어서 황제 콘스탄티누스의 두터운 신임까지 받고 있는 처지였다. 감독으로 피택되었을 즈음에 에우세비오스는 『세계 연대기』(Chrononicon). 그리고 가장 중요한 문서 곧 사도 시대에서 디오클레티아누스 박해의 막바지에 이르는 교회 역사 기록을 포함한 일련의 저작을 세상에 냈다. 뒷날 그는 여러 책으로 엮은 저작을 남겼다. “나는 일찍이 다른 기독교 저술가들이 이와 같은 저술 형태에 착안했다는 말을 들은 바가 없다”고 에우세비오스는 그 서문에다 올바로 써 놓았다. 그것이야말로 획기적인 저술 방식이었다. 그러했기에 콘스탄티누스는 비오스가 구사한 저술 방식의 진가를 이내 뚫어보았던 것이 틀림없다. 황제는 그를 학술 고문으로 뽑아 올렸다. 에우세비오스는 철필에 잉크가 마르도록 황제를 칭송하면서 자기를 등용해 준 성총을 망극해 했다. 이 문건들은 콘스탄티누스 시대를 살펴보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자료에 속한다.
에우세비오스의 그러한 황제 찬양의 글발은 그의 빛나는 공적을 기려야 마땅할 뒷 세대들에게 그러나 먼저 강한 거부감부터 준다. 이와 관련하여 자코브 부르크하르트는 에우세비오스를 ‘희대의 아첨배’이며 ‘구역질나는 첫 역사가’라고 지탄한 적이 있다. 이런 무지막지한 비난은 여러 백년에 걸쳐 유포되었고 또 호응을 받아 왔다. 맞는 말인가? 가당찮은 소리다! 분명히 말하거니와, 에우세비오스에 대한 부르크하르트의 평가는 도무지 공정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그는 콘스탄티누스와 콘스탄티누스 시대를 에우세비오스와는 반대쪽에서 이해하고 있다. 양자의 전적으로 상반된 전제를 참작한다면 헤아리고도 남음직한 일이기는 하겠다. 그러나, 실은 그렇지 않지만, 설령 부르크하르트가 조금도 틀림없이 통찰했다고 할지라도 4세기 초의 에우세비오스에게 19세기의 관점에서나 해석함직한 역사 관찰을 기대한다는 것은 무리한 주문이 아닐 수 없다.
부르크하르트는 공격하기를, 에우세비오스가 “결국 콘스탄티누스를 그의 말마따나 자비(慈悲)의 귀감으로, 특히 장래의 추기경들의 전형으로” 만드는 데 일심으로 골몰하고 있었다고 했다. 이렇게 지적한 부르크하르트는, 에우세비오스가 콘스탄티누스의 진면목을 왜곡했다고 단언했다(에우세비오스가 지은 호교적 성격의 『콘스탄티누스 대제 전기』에 대한 비판이다 -역주). 그러나 이 말 또한 정확한 지적은 못된다. 만일 편견을 버리고 에우세비오스의 글을 읽는다면, 그가 콘스탄티누스의 생애와 품성 가운데 사악한 면을 은폐하려고 꾀한 적이 결코 없다는 사실을 누구나 다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에우세비오스가 콘스탄티누스의 정치 및 군사 행위를 맨 먼저 서술한 반면에, 얼마쯤은 눈치 안 보고 칭송해도 무방했을 법한 황제의 ‘경건한 삶의 실례’를 들지 않고 굳이 덮어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는데, 그 밖의 모든 사실에 대해 그는 의미심장한 함구(被口)로써 비켜 갔다. 에우세비오스에게 황제를 신랄하게 비판하기를 기대한다는 것은 무리한 주장이 아닐 수 없다. 콘스탄티누스와 에우세비오스가 생존했던 시대와 엇비슷한 상황에 놓여 있었던 19세기의 역사학자들도 분명히 그네들의 통치자를 에우세비오스보다 더 가차 없이 비판하지는 못한 처지였다.
황제 아들들의 독재적이고 포악한 정권을 참작하여 아주 신중하게 처신을 했는지는 모르되, 에우세비오스가 겁을 먹고 콘스탄티누스의 생애의 패역한 다른 한 쪽 모습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었다고 치부한다면 아마 한참 잘못 짚은 판단일 것이다. 감사와 경의를 품은 사려깊은 마음이 붓놀림을 삼가도록 에우세비오스를 다스렸다고 보는 것이 옳겠다. 콘스탄티누스로 말하면 세계에 일대 변혁을 불러일으켰고, 기독교회에는 자유를 되찾아 준 인물이었다. 당대 기독교인들의 뇌리에 붙박여 있던 것은 그 황제의 바로 그런 모습이었다. 더구나 에우세비오스의 뇌 속에 들러붙어서 콘스탄티누스 일대기를 쓰는 그를 지배한 것은 또한 그러한 모습이었다. 에우세비오스가 집필에 착수한 것은 비로소 황제가 세상을 떠난 뒤였다. 다시 말해, 당대의 아첨배들처럼 살아있는 황제의 굄을 받으려고 붓을 놓친 것이 결코 아니었던 것이다. 그는 또 콘스탄티누스의 아들들의 환심을 사려고 그 글을 쓴 것도 아니었다. 실은 자신의 말년에 다다라서 그 전기를 썼을 뿐만 아니라, 그 뒤 얼마 안 지나 그는 저승사람이 되었다.
그의 저작은, 콘스탄티누스가 이룩한 위업에 대해 4세기의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다 품었던, 이를테면 사은(謝恩)의 표시였다. 그가 얼마쯤 부풀려서 썼을 것은 틀림없지만, 부르크하르트나 그 밖의 논객들이 폄하했다고 해서 지금 세대들마저 덩달아 그를 깎아 내리는 것은 부당한 처사라고 하겠다. 실로 부르크하르트나 그의 후학들은 에우세비오스가 그 전기 안에 그토록 무진장하게 엮어 넣은 여러 기록이 가지는 역사적인 진가를 올바로 분별하지 못했다. 세월이 지나고 나서 부르크하르트의 논지는 공감할 수 없는 주장이었음이 밝혀졌다. 비로 에우세비오스에 대한 평가를 부분적으로는 얼마쯤 유보한다고 하더라도, 그가 저술을 통해 남긴 공적은 뭉개 버리지 않는 것이 온당한 도리일 것이다.
에우세비오스는 고대 기독교의 가장 걸출한 역사가였다. 그에게서 나온 교회 역사서는 말할 것도 없고, 뒷세대 역사 저술가들 가운데 그에 필적할 인물은 아무도 없었다. 겔라시우스이건, 소크라테스나 소조메노스나 테오도레토스이건, 혹은 그 이름이 아무가 되었건 그에 견줄 사람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그가 수행한 역사가로서의 활동은, 그의 신학이나 문학 저술의 활동 경력을 통틀어 볼 때는 전체의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에우세비오스는 이교도나 유대인을 대상으로 호교서들을 집필해서 기독교를 변호하였다. 구약성서의 수많은 구절을 학문적인주석을 달아 풀이했다. 그는 성서 본문 연구로 평판이 자자했었다. 그 위에 또, 훨씬 더 많은 저작들 - 편지나 설교문, 교리적 저작(에우세비오스는 당대의 주요 신학 사상가 중 한 사람이었다), 복음서 사이의 상위점 연구, 성서 지명 목록, 그리고 그 밖의 여러 가지 -을 열거할 수 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오늘날까지는 이런 모든 것이 여전히 실상 그대로 평가되지 않고 있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필자는 팔레스티나 순교자들에 관해 기록한 그의 저작품에 대해서만은 한마디 꼭 덧붙이고 싶다. 에우세비오스는 열 한 개 장(章)에 걸쳐 디오클레티아누스 박해 때에 자기의 모국 팔레스티나에서 그리스도인들이 갖가지 고초를 겪은 진상을 뭉뚱그려 기록하고 있다. 이 문건은 그의 『교회사』 제9권에 증보 수록하였다. 이 기록을 꼼꼼히 읽어보면 4세기의 그리스도인들이 콘스탄티누스에게 품었던 마음상태를 좀 더 분명히 헤아릴 수가 있다. 콘스탄티누스 시대를 비판하거나, 니카이아 회의와 그 뒤에 황제의 요구 사항에 굴복한 감독들을 심판하기란 어찌 보면 어렵잖은 일일 수 있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 등위 전에 엄연히 실재했던 주변 정세를 심층 연구하려하거나 기독교인들이 오랜 세월을 두고 겪은 악몽 같은 공포 시대의 정확한 실태를 연구하려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이들 성직자들에 대해 지나친 속단은 삼가는 것이 올바른 태도일 것이다.
콘스탄티누스의 아들들이 등장하면서 새 시대의 막이 올랐다. 여기서는 아주 다른 평가가 적용되어야 할 것이다. 설령 감독이나 교회가 박해기에 대한 기억을 아직도 떨어버리지 못해 그것이 하나님이 내려 주신 도구임이 분명한 콘스탄티누스에게 마다 않고 굴복했을 정도로 황제를 대하는 자세에 영향을 주었다고 할지라도, 비역사적으로 사고하거나 바리새적인 심판을 내리려고 하는 부류에게는 앞에서 말한 동기가 도무지 곧이 들리지 않을 것이다. 반면에, 콘스탄티누스의 아들들의 치세, 곧 제국교회 형성기에 많은 기독교인들이 보여 준 인간의 숨기지 못할 나약성과 공포심에 굴종한 결과였다. 누구든지 그들의 처신을 옹호하려고 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들에게는 엄혹한 심판이 내려져야 마땅하다.
2. 필립샤프의 책
제10장 교부들과 신학 저서들
1. 그리스 교부들
161. 가이사랴의 에우세비우스
이 책에서 우리가 다뤄온 제3기는 교회의 위대한 교사들이 전례 없이 많이 등장한 시기이다. 신학적 역량과 실천적 경건을 겸전한 이들은 교회에 강력하게 도전해온 오류들에 맞서서 대단히 중요한 교의들을 발전시킴으로써 후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두고두고 감사를 받았다. 이들은 쇠망해 가는 로마 제국의 모든 학문과 웅변을 독점한 채, 그것을 미래 세대들을 위해서 기독교의 대의에 복속 시켰다. 이들은 과연 교회의 아버지들 교부들이라 불릴 자격이 있는 사람들이다. 교단 구분 없이 기독교 세계에 속했고, 특히 그리스 교부들 가운데 아타나시우스와 크리소스토무스, 라틴 교부들 가운데 아우구스티누스와 제롬은 글과 행동으로 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물론 여러 교회들이 성경의 수위권과 교회 전승의 가치에 관해 간직해온 견해들에 따라서 그들이 누린 권위에도 다소 차이가 있긴 했다.
가장 중요한 니케아 시대와 니케아 이후 시대의 신학자들 시리즈를 교회사의 아버지 이자 기독교의 헤로도토스로 평가받아온 가이사랴의 에우세비우스(Eusebius)로부터 시작하고자 한다.
그는 260년 내지 270년경에 아마 팔레스타인에서 태어나서 안디옥에서, 나중에는 팔레스타인의 가이사랴에서 교육을 받았는데, 그가 주로 배운 것은 오리게네스의 저서들이었다. 성경과 교부에 관련된 방대한 문헌을 수집한, 학문이 깊은 장로 팜필루스(Pamphilus)와 두터운 교분을 쌓았는데, 팜필루스는 자신이 가이사랴에 세운 유명한 신학교를 이끌다가 309년에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박해 때 순교자의 최후를 맞이한 인물이다. 에우세비우스는 오랫동안 이 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선임자 겸 친구가 죽은 뒤에는 두로와 이집트를 여행했으며, 그리스도인들에게 가해진 마지막 처참한 박해의 광경을 목격했다. 자신도 고백자로서 옥에 갇혔으나 곧 풀려났다.
20년 뒤에 에우세비우스가 두로 공의회(335 혹은 336년)의 의장으로서 아타나시우스의 반대 진영에 섰을 때, 헤라클레스의 주교 포타몬(Potamon)은 그에게 다음과 같이 면박을 주었다고 에피파니우스의 글은 전한다. “에우세비우스, 어찌 당신이 무고한 아타나시우스의 판사로 앉아 있는 거요? 대관절 이럴 수가 있는 거요? 무슨 이유로? 독재자들이 날뛰던 시절에 당신은 나와 함께 옥에 앉아 있지 않았소? 저들은 내가 신앙을 고백했다는 이유로 내 눈을 후벼 파냈지. 헌데 당신은 성한 몸으로 나왔소. 이리 말짱한 몸으로 이 자리에 와 있는 거요. 어떻게 감옥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지요? 불법(우상들에게 제사드리는 행위를 은밀히 약속한 대가 때문이 아니었소? 아니면 실제로 그 짓을 한 게 아니오?” 그러나 에우세비우스가 이렇게 비겁하고 그리스도를 배반했다는 추측은 흥분에 싸인 순간에 시기와 파당심에서 생긴 것인 듯하다. 만약 그러한 흠이 실제로 있었다면 에우세비우스가 고대 교회에서 주교 지팡이를 위임받지 못했을 것이다. 315년경이나 그 이전에 에우세비우스는 가이사랴의 주교로 선출된 뒤에 죽을 때인 340년까지 그곳에서 봉직했다. 331년에는 유스타티우스(Eustathius)가 안디옥 총대주교직을 면직당한 뒤 그 직위를 수여받았으나, 조용한 집필 활동을 더 중시했던지라 정중하게 고사했다.
그는 원치도 않게 아리우스 논쟁들에 휘말렸고, 니케아 공의회에서 유력한 역할을 수행했으며, 공의회장에 배석한 황제의 우편에 앉는 영예를 누렸다. 니케아 공의회 이후에 전개된 당혹스러운 상황에서 그는 중도 노선을 견지하면서 양 진영의 화해를 도모했다. 이로 인해 한편으로는 황제 콘스탄티누스의 각별한 호의를 입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니케아 정통신앙 지도자들로부터 은밀히 아리우스 이단으로 기운게 아니냐는 의혹을 받았다. 확실한 것은 니케아 공의회 이전에 그가 아리우스의 견해에 동조했다는 점이고, 그 공의회에서 정통이긴 하나 불분명한 절충 신조를 제시했다는 점, 공의회 이후에는 아타나시우스를 비롯한 정통신앙 옹호자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는 점, 그리고 335년에 아타나시우스를 단죄한 두로 교회회의에서 그가 주도적 역할을 했고, 에피파니우스에 따르면 의장을 맡았다는 점이다. 이러한 사실들과 부합하는 것이 자신의 『교회사』에서 아리우스 논쟁(318년에 발생)에 관해 함구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이 저서에서 324년까지 다루었으므로 326년, 그러니까 니케아 공의회의 결정이 가장 적합한 결론으로 제시되어 있었을 때까지 아직 완성하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그로서는 자신의 교회사를 신학 학파들이 논쟁을 벌이던 신조로 마감하기보다 콘스탄티누스가 리키니우스에게 승리를 거둔 사건으로 마감하고 싶었을 것이라는 점도 무시할 수 없다. 그러나 그가 니케아 신조에 서명한 것이 엄연한 사실이다. 비록 소극적인 태도로 서명에 임했고 호모우시온에 대한 자신의 해석을 유보하긴 했을지라도, 그 신조를 자기 교구민들에게 공식적으로 권장했으며, 그것을 공식적으로 배격한 적이 없었다.
이렇게 명백히 모순된 태도를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도는 그의 우유부단함과 교리적 분방함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여러 시대 여러 나라들에 존재해온 다양한 견해들을 친숙히 알고 있는 역사가들에게서 드물지 않게 보게 된다. 호모우시온이라는 중요한 점에 대해서 그는 확고하고 최종적인 확신에 도달한 적이 없다. 기존에 통용되던 오리게네스적 ‘성자 종속설’과 니케아 정통 신앙 사이에서 흔들렸다. 오리게네스 편에 서서 성자의 영원성을 뚜렷하고 강력하게 주장했으며, 그만한 정도에서 그리스도를 시간 안의 피조물로 해석한 아리우스주의를 단호히 배격했다. 그러나 호모우시온에서부터는 한 발을 뺐다. 그 용어와 개념이 성경을 넘어서는 것처럼 비쳤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르켈루스를 논박할 때든 사벨리우스를 비판할 때는 그 용어를 일절 사용하지 않았다. 종교적 정서로는 그리스도의 온전한 신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부담감이 있었으나, 사벨리우스주의에 대한 우려가 그의 발목을 잡았다. 그는 정통신앙에 엄격히 부합하는 문구들을 피하고, 대신에 과거에 널리 사용되던 다소 불분명한 용어들을 취했다. 그는 기질상 신학적 통찰력 면에서 약했다. 사실 그는 논쟁보다는 타협과 평화에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그는 니케아 이전 신학과 니케아 신학의 접경에 서 있었다. 그의 교리는 그 두 가지 신학의 색채를 차례로 드러내며, 아리우스 논쟁의 초기 단계에서 아직 해결되지 않은 교회 문제를 고스란히 반영 한다.
그의 신학적 우유부단함은 유약한 성격과 관련되어 있다. 그는 인간관계의 폭이 넓고 융통성 있는 궁정 신학자였고, 자신의 후원자이자 친구인 초대 기독교 황제의 위세에 눈이 멀어 끌려 다녔다. 콘스탄티누스는 그에게 수시로 자문을 구하고, 그를 식사에 초대하고, 자신이 경험한 십자가 환상을 그에게 들려주고, 유명한 기독교 군기(軍旗, labarum)를 보여주고, 그가 이따금씩 행하는 설교를 선 자세로 경청하고, 그에게 여러 통의 서신을 보내고, 콘스탄티노플의 교회들 이 사용할 성경 사본 필사 작업을 그에게 감독하게 했다.
콘스탄티누스 즉위 30주년 기념식(336) 자리에서, 에우세비우스는 극단적인 과장법을 동원하여 작성한 찬사를 낭독했고, 그가 죽은 뒤에는 “죽은 사람에 대해서는 좋은 점만 말하라”는 격언에 충실하게 정직을 저버리면서까지 그의 덕을 예찬하고 그의 과오들은 의도적으로 생략했다. 하지만 이런 면모에도 불구하고 지성과 정서에 고상한 특성들을 지니고 있었으며, 만약 그가 좀 더 차분한 시대를 살았더라면 어떤 교구를 맡아 사역했을지라도 그러한 특성들이 훌륭하게 빛났을 것이다. 그가 사적인 이익을 위해 황제에게 청탁한 적이 없었다는 것도 그 의 어떠함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에우세비우스의 신학적 · 문학적 가치는 학문 분야에 놓여 있다. 그는 문헌들을 닥치는 대로 읽고 연구하고 수집했으며, 이교와 기독교를 통틀어 그리스 문헌을 접하고 이해하는 분야에서는 여느 교부들보다, 심지어 오리게네스와 제롬보다 한 수 위였던 것 같다. 반면에 독창성과 열정, 예리함, 사고의 깊이에서는 오리게네스 · 아타나시우스 · 바실리우스 · 두 명의 그레고리우스에 현저히 못 미친다. 그의 학문은 깊이보다 폭이 훨씬 두드러지며, 철학적 정신이나 비평적 판단으로 통제되거나 체계화되지 못했다.
그의 저서들 가운데서는 역사 관련 저서들이 단연 가장 유명하고 가치가 크다. 『교회사』(Ecclesiastical History), 『연대기』(Chronicle), 『콘스탄티누스의 생애』(Life of Constantine), 그리고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박해 때를 배경으로 한 『팔레스타인의 순교자들』(Martyrs of Palestine)이 그것이다. 박해기의 막바지와 기독교가 제국의 국교가 되기 시작하던 시기를 걸쳐서 산 그의 위치와, 무수히 많은 고전 문헌을 접한 그의 경력이 이 저서들에 남다른 가치를 부여한다. 그는 대체로 온건하고 중용을 견지하고 진리를 사랑했다. 이것은 그가 살던 시대가 논쟁 열기로 몹시 흥분되고 들떠 있었던 점을 생각하면 쉽지 않은 성품이다. 그가 신학의 이 중요한 분야 교회사를 최초로 본격적으로 개척했고, 수세기 동안 이 분야에서 전범으로 남았다는 사실만으로도 그에게 교회사의 아버지라는 명예로운 칭호가 돌아가는 것이 무리가 아니다. 그럴지라도 그는 비평적 사가도 아니었고 문체가 세련된 작가도 아니었으며, 다만 성실하고 박식한 수집가였을 뿐이다. 그의 『교회사』는 그리스도의 탄생에서부터 324년에 콘스탄티누스가 리키니우스에게 승리를 거두는 대목에 이르기까지 특색이 없고 어딘가 모자란 구석이 있는 듯하고 응집력도 없고 단편적인 모습을 드러내지만, 그러면서도 용사와 같았던 교회의 청년기를 흥미롭게 진술하는데, 따라서 책의 가치도 저자의 탁월한 역사 기술에 있기보다는 낯선 자료들, 몇몇 경우에는 현존하지 않는 자료들을 거의 그대로 발췌하여 인용하는 데에 있다. 처음 3세기를 다룬 교회사 저서로서도 이 책은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에우세비우스 이후의 사가들은 그가 마감한 시기 이후부터 다루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의 『연대기』는 325년까지 내려온 세계사를 시대와 민족별로 간략히 소개한 내용과, 이 세계 연대기를 연표 형식으로 간추린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헬라어 원서는 유실되었으며, 다만 신켈루스(Syncellus)의 저서에 여기저기 단편들로만 남아 있다. 하지만 연표가 실려 있는 둘째 부분은 378년에 제롬에 의해 번역되고 연속해서 작성되었으며, 수세기 동안 기독교 세계의 연대기적 역사 지식의 원천과 역사 집필의 토대가 되었다. 제롬은 『이름』(Onomasticon)이라는 에우세비우스의 유용한 저서 - 성경에 언급된 지명들을 소개한 책 - 를 여러 군데 첨삭을 가하며 번역하기도 했다.
『콘스탄티누스 송덕문』라고 해야 더 적합할 『콘스탄티누스의 생애』에서, 에우세비우스는 송덕문을 쓰려는 열정에 눈이 멀어 사가로서의 품위를 거의 망각했다. 그럴지라도 이 저서는 자신의 친구였던 황제의 재위를 이해하는 데 주된 사료이다.
그의 역사 관련 저서들 가운데 중요성이 조금 떨어지는 것들은 『복음의 예비』 (Praeparatio evangelica)와 『복음의 증명』(Demonstratio evangelica) 같은 변증서들이다. 모두 324년 이전에 집필된 이 책들은 고대 교회의 변증 자료의 집대성이다. 『복음의 예비』는 모두 열다섯 권으로, 그리스 저작들에 등장하는 이교 신앙들을 문헌적으로 논박하는데 의도를 둔다. 『복음의 증명』은 원래는 스무 권이 었으나 처음 열 권만 현존하며, 기독교의 절대 진리를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토대로, 그리고 구약 예언들이 성취된 사실들을 토대로 적극적으로 입증한다. 다섯 권으로 된 『신현』(Theophany)은 대중이 읽기 쉽도록 위의 두 권을 요약한 책으로서, 마치 에피파니우스가 Panarion 이후에 Anacephalaeosis를 썼듯이 좀 더 일반적인 용도로 나중에 집필한 듯하다. 헬라어 원문은 추기경 마이(Mai)가 발행한 단편들로만 알려지며, 오늘날은 1839년에 타탐(Tattam)이 니트리아의 수도원에서 발견하고, 1842년에 새뮤얼 리(Samuel Lee)가 런던에서 편집한 시리아어 역본으로 복원되었다. 이 부류에는 그의 변증서인 『히에로클레스 논박서』(Against Hierocles)가 포함된다.
위의 책들보다 한 단계 더 가치가 떨어지는 책들은 에우세비우스가 쓴 두 권 의 교리서들인 『마르켈루스 논박서』(Against Marcellus)와 『교회 신학에 관하여』 (Upon the Church Theology, 역시 마르켈루스 논박서)로서, 성자의 위격적 존재를 지지하는 내용이다.
그가 성경 여러 권(이사야 · 시편 · 누가복음)에 대해서 쓴 주석들은 독립된 관점이나 히브리어 지식 없이 오리게네스의 알레고리 해석법을 답습한다.
마지막으로 덧붙일 수 있는 저서들은 성경 서론과 고고학 분야의 몇 권, 앞서 언급한 일종의 성경 지리서인 『이름』(Onomasticon), 오리게네스를 힘써 옹호한 『변명』(Apology)의 단편들이다. 『변명』은 팜필루스와 함께 309년 이전에 공동 집필한 초창기 저서로서, 오리게네스 논쟁이 벌어졌을 때 에피파니우스와 제롬에게 신랄한 비판의 표적이 되었다.
3. 위키디피아
카이사레아 에우세비우스
에우세비우스(Eusebius, 기원후 263~339년), 에우세비오는 로마의 역사가, 석의학자이다. 그는 314년 즈음에 팔레스타인에서 카이사레아의 주교가 되었다. 팜필루스와 함께 그는 정경의 학자였다.
유세비우스
[ EusebiusofCaesarea ]
팔레스타인 가이사랴 태생의 신학자(263-339년). 가이사랴 감독. 교회사의 아버지. 가이사랴에서 스승 팜필루스에게 배웠다. 두 사람은 가이사랴의 학교와 도서관에서 함께 연구하며 사제지간 이상의 우정을 나누어 '유세비우스 팜필리'로도 불렸다. 307년 팜필루스가 로마의 기독교 박해로 인해 순교당하자 애굽으로 피신했다가 314년 가이사랴로 돌아와 감독이 되었다.
변증·역사·해석 등에 관한 많은 저술을 남겼는데, 특히 「교회사」가 유명하다. 이 책은 전 10권으로 된 최초의 교회사로서, 전반부 7권에는 303년까지의 교회 역사가, 후반부 3권에는 323년까지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는 서방교회보다 동방교회의 사료가 더 많이 나타나는데, 주로 변증적 입장에서 기술되어 있다. 이외에도 유세비우스는 「기독교 변증론」(20권), 「유대인 변호사」(15권), 「콘스탄틴전」, 「세계사」 등의 작품을 남겼다.
한편, 유세비우스는 아리우스 논쟁에서 온건한 중도파의 입장을 견지했으나 후에 아타나시우스 파에 가담하여 정통 교리 확립에 공헌하였다. 또한, 그는 스승 팜필루스와 함께 오리겐을 변호하는 옹호문을 쓰기도 했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