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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투브 주소 https://youtu.be/6KsFAZXxxqY
날짜 2022-11-09
본문말씀 요한복음 6:1~34(신약 151면)
설교자 정병진목사
주제어 오병이어의기적,물위를걸어오신기적,군중과제자들,썩는양식과영생하는양식,모세의만나,광야의생명의떡

2022-11-09(수) 수요기도회

제목: 요한복음강해(18) 예수께서 제4표적과 제5표적을 행하신 이유와 그 영적인 의미(요6:1~34)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6KsFAZXxxqY  [혹은 https://tv.naver.com/v/30623657 ]

1. 들어가며

  예수께서 행하신 기적들 중에서 사도 요한은 표적이라고 불릴 만한 7개의 기적을 요한복음에 수록해 놓았다. 요한복음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지는 바, 전반부는 예수님의 7가지 표적을 중심으로 기록하고 있고(1~12장), 후반부는 예수님의 다락방 강화를 중심으로 기록하고 있다(13~21장). 전반부는 보통 '표적의 책'이라고 부르며, 후반부는 보통 '영광의 책'이라고 불린다. 그런데 오늘은 이것들 중에서 전반부에 속하는 것으로서 예수께서 행하신 표적들 가운데, 네 번째와 다섯 번째의 표적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한다. 그것은 '오병이어의 기적'과 '예수께서 물 위를 걸으신 기적'이다. 그렇다면 요한복음은 왜 오병이어의 기적과 예수께서 물 위를 걸으신 기적을 7가지 표적들 가운데 포함시켰으며 또한 이것을 가리켜 '표적'이라고 부르고 있는가? 그렇다면 진정 '표적'이라는 낱말의 의미는 대체 무엇이며, 오늘 다루게 될 2가지 표적들은 대체 어떤 의미가 있는 표적들인가? 

 

2. 요한복음에 나오는 제4표적과 제5표적을 보는 관점은 어떠해야 하는가?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 6장 1~15절과 16~21절에서 7가지 표적 가운데, 네 번째 표적과 다섯 번째 표적을 수록하였다. 이들 중에서 네 번째 표적은 소위 '오병이어의 기적'이라 불린다. 그런데 '오병이어의 기적'은 사실 공관복음서에도 공히 기록되어 있는 표적에 해당한다. 그런데 원래 요한복음은 공관복음서에 기록되지 아니한 사건을 중심으로 기록한 것인데, 왜 네 번째 표적으로서 '오병이어의 기적'이 요한복음에도 기록된 것인가? 그리고 다섯 번째 표적으로서 '예수께서 물 위를 걸으신 기적'은 마태복음과 그리고 마가복음에도 등장하고 있는가? 왜 사도 요한은 공관복음서에서도 기록되어 있는 '오병이어의 기적'과 '예수께서 물 위를 걸으신 기적'을 요한복음에 수록해야 했던 것인가? 그것은 한 마디로 이 두 가지 기적이 '표적'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표적'이라는 말은 그것이 예수께서 누구시며 그분이 이 땅에 왜 오셨는지를 설명해 줄 수 있는 기적일 때에 붙일 수 있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병이어의 기적'과 그리고 '예수께서 물 위를 걸으신 기적'은 예수께서 누구시며 왜 그분이 이 땅에 오셨는지를 알려 주는 놀라운 표적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요한복음에 수록된 '오병이어의 기적'과 '예수께서 물 위를 걸으신 기적'이 공관복음서에 기록된 것과는 성격상 약간의 차이가 있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공관복음서에는 단지 예수께서 이런 기적들을 행하셨다는 관점에서 기록하고 있는 반면에, 요한복음서에서는 예수님이 누구시며 왜 이 땅에 오셨는지를 알려 주기 위한 목적으로 이 기적들을 표적으로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요한복음에 나오는 '오병이어의 기적'과 '예수께서 물 위를 걸으신 기적'을 공관복음서에서 보는 것과는 다른 관점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이런 기적들이 과연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소개하고 있는지를 살펴볼 수 있어야 하며,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어떤 목적으로 그러한 기적을 행하셨는지를 살펴볼 수 있어야 한다. 

 

3. 요한복음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은 어떤 관점으로 기록된 것인가?

  그렇다면, 요한복음에서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어떠한 관점으로 기록하고 있는가? 우선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공관복음에서는 과연 '오병이어의 기적'이 어떻게 기록되어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공관복음서에서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예수께서 빈 들에서 행하셨던 음식의 기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왜냐하면 오병이어(떡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로서 성인 남자만 5,000명을 먹이고도 12광주리나 남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설교자가 공관복음서를 가지고 설교할 때에는 과연 오병이어의 기적을 우리도 어떻게 체험할 수 있는가를 다룬다. 그리고 설교할 때에는 요한복음에 나와 있는 구체적인 기사를 공관복음 설교에 가져다 쓴다. 그래서 빌립처럼 저녁 식사 비용이 얼마나 될 것인지를 계산만 하지 말고, 안드레처럼 예수님께 어린아이의 한 끼 식사를 갖다 드릴 수 있어야 한다고 설교한다. 그래서 그 작은 헌신이 결국 오병이어의 기적을 가져다 주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즉 작은 것이라도 주님의 손에 들려지게 되면 그때 기적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렇다. 이것은 사실이다. 우리가 교회에서 건축을 하려 할 때에도 계산을 해서는 답이 나오지 않는다. 그렇다. 작은 마중물이라도 주께 드리게 되면 그때에 기적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요한복음의 오병이어의 기적은 이러한 관점으로 기록된 것이 아니다. 요한복음의 오병이어의 이야기는 예수님이 누구시며 그분이 왜 오셨는지를 알려 주기 위해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발견할 수 있는가? 그건 2가지다. 첫째는 그분이 누구신가 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요한복음에서는 오병이어의 기적의 사건을 통하여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은 예수께서 과거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서 있을 때에 만나를 내려 주셨던 하나님이라고 말한다. 더욱이 예수님은 하늘에서 내려온 참 만나 곧 생명의 떡이라는 것까지 말해 준다. 사실 오병이어로 2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의 저녁을 먹게 할 수는 없다. 당시 빌립은 200 데나리온 어치 떡을 구입한다고 할지라도 2만 명의 군중을 먹이기에는 턱없이 부족할 것이라고 말했었다. 왜냐하면 200 데나리온으로 떡을 구입했을 경우 약 6,000명 정도 먹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오병이어로 계속해서 창조의 기적을 행하시는 방법 이외에는 불가능한 것인데, 예수께서 그렇게 행하셨으니 예수께서는 창조주 하나님이시라는 것이 요한복음의 핵심 요지다. 그리고 둘째, 그분이 왜 이러한 기적을 행하셨는가 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즉 이것은 예수께서 사람들의 육신적인 필요를 채워 주시려 오신 분일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사람의 영혼의 필요 곧 생명을 주시기 위해 오신 분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도 육신을 가지셨다. 그러므로 육신적인 필요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그분께서도 잘 알고 계신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 그 옛날 광야에서 만나를 내려 주던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오셨음을 말한다. 그리고 이제는 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과 구주로 붙들어서 하늘의 참 생명을 얻으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예수께서 "내가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요, 생명을 주는 자이며, 내가 생명의 떡이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4. 영적인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표적만 추구하는 표적주의 신앙의 끝은 어떠한 것인가?

  그런데 당시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 한 끼의 저녁 식사를 해결했던 군중들은 어떻게 반응했을까? 예수께서는 당시 수많은 병든 사람을 고쳐 주시고 그들의 먹을거리를 해결해 주셨다. 그러자 그들은 어떻게 반응했을까? 그것은 2가지였다. 하나는 계속해서 자신의 먹을거리를 책임져 달라는 것이었다(30~34절). 마치 모세가 매일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만나를 내려 주었던 것 같이, 이제는 예수께서 모세가 되셔서 굶주린 백성들에게 먹을거리를 계속 제공해 달라고 한 것이다. 당시는 못 먹고 못 사는 시대였기 때문에 어느 정도 이해는 되지만, 그것은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궁극적인 목적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사람의 영혼에 생명을 공급해 주시러 오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이러한 혜택을 계속해서 제공받게끔 예수님이 자신들의 왕이 되어 주기를 바랬던 것이다(15절). 그들에게 예수님만큼 좋은 지도자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즉시 그 자리를 피하여 산으로 올라가셨다. 예수께서는 이 땅에 배고픈 사람들의 배를 채워 주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백성들의 왕이 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사건이 있은 지 얼마 후 유월절 전날 밤, 빌라도의 심문을 받을 때에 예수께서는 당신이 왕이기는 하지만 어떤 왕인지를 분명하게 말씀해 주셨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요18:36)"라고 말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벳새다에서 가버나움까지 쫓아온 이유는 진정 자기들의 영혼에 생명을 얻기 위해 예수님을 찾아온 것이 아니었다. 단지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었던 것이다(26절). 

 

5. 예수께서 물 위를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신 진짜 이유는 무엇인가?

  사람들은 보통 공관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바, 예수께서 물 위를 걸으신 사건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것은 제자들이 바다를 노저어 가다가 풍랑을 만난 뒤, 배가 뒤집혀질 위기에 처하자, 예수께서 그들을 살려 주시려고 바다 위를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신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우리들도 위험에 처해 있는 것을 그냥 내버려두지 아니하시고 반드시 건져 주신다는 것으로 설교한다. 하지만 요한복음에서는 다섯 번째 표적으로서 '물 위를 걸으신 기적'의 목적이 공관복음이 말하고 있는 목적과는 약간 다르다. 왜냐하면 당시 수많은 군중들이 예수님을 자기 육신의 필요를 채워 줄 적임자로 알고 따라다녔기 때문에, 제자들만큼은 자신의 스승이 기적을 일으켜 사람들을 배고픔에서 건져 주실 분으로 이해하지 않도록, 바다 위를 걸어서 오셨기 때문이다. 즉 제자들이 믿고 따라갈 예수님은 한 마디로 '하나님'이심을 알라고 이 표적을 기록한 것이다. 즉 그들이 믿고 따라가고 있는 예수님은 다름 아닌 천지 만물의 창조주로서 만물 위에 계시며, 만물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려고, 일부러 바다 위를 걸어서 오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당도하신 후에 제자들을 향하여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나니'라는 말은 '에고 에이미'라는 문장으로서, "나 자신은 나다." 혹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는 뜻으로서, 예수께서 스스로 계신 하나님이심을 드러내 보이는 아주 특별한 용어이다. 이러한 용어는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누군지를 알려 주는 중요한 표현으로 계속 등장한다. 또한 그때 제자들이 떨었던 것은 그들이 바람과 파도 때문에 떨었던 것이 아니라, 바다 위를 걸어서 오신 예수님을 보고서 떨었다고 말씀하고 있다. 이는 예수님이 하나님이신 것을 눈으로 목도함으로 그랬던 것이다. 그러므로 가버나움까지 쫓아왔던 군중들이 다 떠나가는 그 순간에도 제자들은 떠나가지 않은 것이다. 왜냐하면 제자들은 예수께서 누구시며 또한 이 땅에 무슨 목적으로 왔는지를 이 사건을 통해 경험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제자들만큼은 주님의 곁을 떠나지 않고 그분 곁에 남아 있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때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물으신 바 있다. "너희도 가려느냐?" 그러자 시몬 베드로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요6:68~69)" 그렇다. 이러한 대답은 제자들만큼은 여타의 군중들과는 달리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인지하고 있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6. 예수께서는 당시 군중들에게 어떤 권면의 말씀을 하셨는가?

  그때 군중들은 여전히 계속해서 주님을 찾고 있었다. 그때 예수님은 산 위로 올라가셨고, 제자들은 밤에 배타고 가버나움으로 갔는데, 예수께서 보이지 않게 되자, 다음날 그들도 배를 타고 가버나움까지 쫓아간다. 그리고 가버나움에서 주님을 만나게 된다. 그때 주님께서는 그 군중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첫째로, 이제는 '썩을 양식을 위해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라'고 하셨다(27절). 또한 그 양식은 주님께서 그들에게 주실 것이라고 하셨다. 사실 그때 군중들은 왜 가버나움까지 쫓아왔는가? 그것은 먹으면 소화되어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기 위해 예수님을 찾아왔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먹으면 썩어 없어질 한 끼의 식량을 주시려고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다. 그분은 우리의 영혼에게 영원히 살 수 있는 생명을 주시려고 이 땅에 오신 것이다. 그러므로 그때 사람들은 예수께서 주실 영원한 생명에 관심을 기울여야 했다. 하지만 그들은 끝까지 자신의 육신의 양식에만 관심을 가졌다. 그리고 그것을 언제든지 채워 달라고 요구하였다. 그들은 결국 주님께서 왜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셨는지를 몰랐던 것이다. 그리고 왜 예수께서 그들의 곁을 떠나셔야 했는지를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채 있었던 것이다. 둘째로, 예수께서는 하나님께서 영생을 주시기 위해 보내셨던 자신을 믿어서 영생을 얻으라고 권면하셨다(28~29절). 그들은 그때까지도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인지를 잘 몰랐다. 그래서 육신의 양식을 얻기 위해 예수님을 찾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주님으로부터 일시적인 혜택을 맛보는 것일 뿐 주님으로부터 영원한 혜택을 제공받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그들이 해야 할 일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영생을 주시려고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했다. 그것이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계속해서 모세가 만나를 매일 내려 준 것처럼 예수께서도 자기들에게 그렇게 해 주시기를 요청하였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만나를 내려 주신 것이 아니며, 아버지 하나님께서 내려 주신 것이라는 사실을 교정해 주었으며, 하나님의 떡은 육신의 양식이 아니라 하늘에서부터 내려와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는 예수님 자신이라고 알려 주셨다. 

 

7. 나오며

  요한복음은 표적의 책이다. 왜냐하면 표적들을 통하여 예수께서 누구시며 왜 이 땅에 오셨는지를 알려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예수께서 행하신 여러 가지의 표적들 가운데서 일곱 가지 기적만을 따로 모아 요한복음에 수록해 놓았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1장부터 12장에서는 예수께서 누구시며 무엇을 목적으로 이 땅에 오셨는지를 설명해 주기 위한 일곱 가지 표적을 만나게 된다. 그래야만이 독자들이 그분의 십자가의 죽음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알 수 있게 되며, 그분의 부활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네 번째와 다섯 번째의 표적은 예수께서 하나님이시며 창조주이시자 만물의 주관자이심을 뚜렷이 증거하고 있다고 하겠다. 또한 그분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자신이 생명의 떡으로서 사람들에게 생명을 나눠주려고 오셨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도 오병이어의 기적을 바라볼 때에, 예수님이 보는 관점으로 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의도적으로 벳새다의 빈 들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셨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만나를 먹은 것과 같이, 이제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시려고 오신 것을 알라고 일으킨 기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날에도 어떤 목적으로 주님을 찾든지 그가 진정 예수님을 통해서 얻어야 할 것은 예수님이 하늘의 참된 생명이라는 것을 알고 믿는 것이다. 결코 썩어 없어질 육신의 양식을 위해서만 주님을 찾아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들로서 교회에서 바라고 소망할 것은 교회가 무슨 먹을거리를 주지는 않나가 관심거리가 되어서는 아니 된다. 교회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사람의 영혼에 필요한 생명과도 같은 말씀을 제공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일에 교회에 나와 예배시간 한 시간 떼운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날 자신의 영혼에 필요한 양식을 공급받았는가가 중요한 것이다. 고로 이제는 내가 교회에서 과연 생명을 공급받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려고 오셨기 때문이다. 

 

 

2022년 11월 09일(수)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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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탄명성교회 2022.11.10 09:10

    1. 들어가며

      예수께서 행하신 기적들 중에 사도 요한은 표적이라 불릴 만한 7개의 기적을 요한복음에 수록해 놓았다. 요한복음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지는 바, 전반부는 예수님의 7가지 표적을 중심으로 기록하고 있고(1~12장), 후반부는 예수님의 다락방 강화를 중심으로 기록하고 있다(13~21장). 전반부는 보통 '표적의 책'이라고 부르며, 후반부는 보통 '영광의 책'이라고 불린다. 그런데 오늘은 이것들 중에서 전반부에 속하는 것으로서 예수께서 행하신 표적들 가운데, 네 번째와 다섯 번째의 표적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한다. 그것은 '오병이어의 기적'과 '예수께서 물 위를 걸으신 기적'이다. 그렇다면 요한복음은 왜 오병이어의 기적과 예수께서 물 위를 걸으신 기적을 7가지 표적들 가운데 포함시켰으며 또한 이것을 가리켜 '표적'이라고 부르고 있는가? 그렇다면 진정 '표적'이라는 낱말의 의미는 대체 무엇이며, 오늘 다루게 될 2가지 표적들은 대체 어떤 의미가 있는 표적들인가? 

     

    2. 요한복음에 나오는 제4표적과 제5표적을 보는 관점은 어떠해야 하는가?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 6장 1~15절과 16~21절에서 7가지 표적 가운데, 네 번째 표적과 다섯 번째 표적을 수록하였다. 이들 중에서 네 번째 표적은 소위 '오병이어의 기적'이라 불린다. 그런데 '오병이어의 기적'은 사실 공관복음서에도 공히 기록되어 있는 표적에 해당한다. 그런데 원래 요한복음은 공관복음서에 기록되지 아니한 사건을 중심으로 기록한 것인데, 왜 네 번째 표적으로서 '오병이어의 기적'이 요한복음에도 기록된 것인가? 그리고 다섯 번째 표적으로서 '예수께서 물 위를 걸으신 기적'은 마태복음과 그리고 마가복음에도 등장하고 있는가? 왜 사도 요한은 공관복음서에서도 기록되어 있는 '오병이어의 기적'과 '예수께서 물 위를 걸으신 기적'을 요한복음에 수록해야 했던 것인가? 그것은 한 마디로 이 두 가지 기적이 '표적'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표적'이라는 말은 그것이 예수께서 누구시며 그분이 이 땅에 왜 오셨는지를 설명해 줄 수 있는 기적일 때에 붙일 수 있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병이어의 기적'과 그리고 '예수께서 물 위를 걸으신 기적'은 예수께서 누구시며 왜 그분이 이 땅에 오셨는지를 알려 주는 놀라운 표적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요한복음에 수록된 '오병이어의 기적'과 '예수께서 물 위를 걸으신 기적'이 공관복음서에 기록된 것과는 성격상 약간의 차이가 있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공관복음서에는 단지 예수께서 이런 기적들을 행하셨다는 관점에서 기록하고 있는 반면에, 요한복음서에서는 예수님이 누구시며 왜 이 땅에 오셨는지를 알려 주기 위한 목적으로 이 기적들을 표적으로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요한복음에 나오는 '오병이어의 기적'과 '예수께서 물 위를 걸으신 기적'을 공관복음서에서 보는 것과는 다른 관점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이런 기적들이 과연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소개하고 있는지를 살펴볼 수 있어야 하며,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어떤 목적으로 그러한 기적을 행하셨는지를 살펴볼 수 있어야 한다. 

     

    3. 요한복음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은 어떤 관점으로 기록된 것인가?

      그렇다면, 요한복음에서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어떠한 관점으로 기록하고 있는가? 우선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공관복음에서는 과연 '오병이어의 기적'이 어떻게 기록되어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공관복음서에서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예수께서 빈 들에서 행하셨던 음식의 기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왜냐하면 오병이어(떡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로서 성인 남자만 5,000명을 먹이고도 12광주리나 남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설교자가 공관복음서를 가지고 설교할 때에는 과연 오병이어의 기적을 우리도 어떻게 체험할 수 있는가를 다룬다. 그리고 설교할 때에는 요한복음에 나와 있는 구체적인 기사를 공관복음 설교에 가져다 쓴다. 그래서 빌립처럼 저녁 식사 비용이 얼마나 될 것인지를 계산만 하지 말고, 안드레처럼 예수님께 어린아이의 한 끼 식사를 갖다 드릴 수 있어야 한다고 설교한다. 그래서 그 작은 헌신이 결국 오병이어의 기적을 가져다 주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즉 작은 것이라도 주님의 손에 들려지게 되면 그때 기적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렇다. 이것은 사실이다. 우리가 교회에서 건축을 하려 할 때에도 계산을 해서는 답이 나오지 않는다. 그렇다. 작은 마중물이라 주께 드리게 되면 그때에 기적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요한복음의 오병이어의 기적은 이러한 관점으로 기록된 것이 아니다. 요한복음의 오병이어의 이야기는 예수님이 누구시며 그분이 왜 오셨는지를 알려 주기 위해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발견할 수 있는가? 그건 2가지다. 첫째는 그분이 누구신가 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요한복음에서는 오병이어의 기적의 사건을 통하여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은 예수께서 과거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서 있을 때에 만나를 내려 주셨던 하나님이라고 말한다. 더욱이 예수님은 하늘에서 내려온 참 만나 곧 생명의 떡이라는 것까지 말해 준다. 사실 오병이어로 2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의 저녁을 먹게 할 수는 없다. 당시 빌립은 200 데나리온 어치 떡을 구입한다고 할지라도 2만 명의 군중을 먹이기에는 턱없이 부족할 것이라고 말했었다. 왜냐하면 200 데나리온으로 떡을 구입했을 경우 약 6,000명 정도 먹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오병이어로 계속해서 창조의 기적을 행하시는 방법 이외에 불가능한 것인데, 예수께서 그렇게 행하셨으니 예수께서는 창조주 하나님이시라는 것이 요한복음의 핵심 요지다. 그리고 둘째, 그분이 왜 이러한 기적을 행하셨는가 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즉 이것은 예수께서 사람들의 육신적인 필요를 채워 주시려 오신 분일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사람의 영혼의 필요 곧 생명을 주시기 위해 오신 분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도 육신을 가지셨다. 그러므로 육신적인 필요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그분께서도 잘 알고 계신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 그 옛날 광야에서 만나를 내려 주던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오셨음을 말한다. 그리고 이제는 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과 구주로 붙들어서 하늘의 참 생명을 얻으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예수께서 "내가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요, 생명을 주는 자이며, 내가 생명의 떡이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4. 영적인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표적만 추구하는 표적주의 신앙의 끝은 어떠한 것인가?

      그런데 당시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 한 끼의 저녁 식사를 해결했던 군중들은 어떻게 반응했을까? 예수께서는 당시 수많은 병든 사람을 고쳐 주시고 그들의 먹을거리를 해결해 주셨다. 그러자 그들은 어떻게 반응했을까? 그것은 2가지였다. 하나는 계속해서 자신의 먹을거리를 책임져 달라는 것이었다(30~34절). 마치 모세가 매일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만나를 내려 주었던 것 같이, 이제는 예수께서 모세가 되셔서 굶주린 백성들에게 먹을거리를 계속 제공해 달라고 한 것이다. 당시는 못 먹고 못 사는 시대였기 때문에 어느 정도 이해는 되지만, 그것은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궁극적인 목적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사람의 영혼에 생명을 공급해 주시 오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이러한 혜택을 계속해서 제공받게 예수님이 자신들의 왕이 되어 주기를 바랬던 것이다(15절). 그들에게 예수님만큼 좋은 지도자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즉시 그 자리를 피하여 산으로 올라가셨다. 예수께서는 이 땅에 배고픈 사람들의 배를 채워 주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백성들의 왕이 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사건이 있은 지 마 후 유월절 전날 밤, 빌라도의 심문을 받을 때에 예수께서는 당신이 왕이기는 하지만 어떤 왕인지를 분명하게 말씀해 주셨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요18:36)"라고 말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벳새다에서 가버나움까지 쫓아온 이유는 진정 자기들의 영혼에 생명을 얻기 위해 예수님을 찾아온 것이 아니었다. 단지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었던 것이다(26절). 

     

    5. 예수께서 물 위를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신 진짜 이유는 무엇인가?

      사람들은 보통 공관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바, 예수께서 물 위를 걸으신 사건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것은 제자들이 바다를 노저어 가다가 풍랑을 만난 뒤, 배가 뒤집혀질 위기에 처하자, 예수께서 그들을 살려 주시려고 바다 위를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신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우리들도 위험에 처해 있는 것을 그냥 내버려두지 아니하시고 반드시 건져 주신다는 것으로 설교한다. 하지만 요한복음에서는 다섯 번째 표적으로서 '물 위를 걸으신 기적'의 목적이 공관복음이 말하고 있는 목적과는 약간 다르다. 왜냐하면 당시 수많은 군중들이 예수님을 자기 육신의 필요를 채워 줄 적임자로 알고 따라다녔기 때문에, 제자들만큼은 자신의 스승이 기적을 일으켜 사람들을 배고픔에서 건져 주실 분으로 이해하지 않도록, 바다 위를 걸어서 오셨기 때문이다. 즉 제자들이 믿고 따라갈 예수님은 한 마디로 '하나님'이심을 알라고 이 표적을 기록한 것이다. 즉 그들이 믿고 따라가고 있는 예수님은 다름 아닌 천지 만물의 창조주로서 만물 위에 계시며, 만물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려고, 일부러 바다 위를 걸어서 오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당도하신 후에 제자들을 향하여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나니'라는 말은 '에고 에이미'라는 문장으로서, "나 자신은 나다." 혹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는 뜻으로서, 예수께서 스스로 계신 하나님이심을 드러내 보이는 아주 특별한 용어이다. 이러한 용어는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누군지를 알려 주는 중요한 표현으로 계속 등장한다. 또한 그때 제자들이 떨었던 것은 그들이 바람과 파도 때문에 떨었던 것이 아니라, 바다 위를 걸어서 오신 예수님을 보고서 떨었다고 말씀하고 있다. 이는 예수님이 하나님이신 것을 눈으로 목도함으로 그랬던 것이다. 그러므로 가버나움까지 쫓아왔던 군중들이 다 떠나가는 그 순간에도 제자들은 떠나가지 않은 것이다. 왜냐하면 제자들은 예수께서 누구시며 또한 이 땅에 무슨 목적으로 왔는지를 이 사건을 통해 경험하였기 때이다. 그러므로 제자들만큼은 주님의 곁을 떠나지 않고 그분 곁에 남아 있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때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물으신 바 있다. "너희도 가려느냐?" 그러자 시몬 베드로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요6:68~69)" 그렇다. 이러한 대답은 제자들만큼은 여타의 군중들과는 달리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인지하고 있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6. 예수께서는 당시 군중들에게 어떤 권면의 말씀을 하셨는가?

      그때 군중들은 여전히 속해서 주님을 찾고 있었다. 그때 예수님은 산 위로 올라가셨고, 제자들은 밤에 배타고 가버나움으로 갔는데, 예수께서 보이지 않게 되자, 다음날 그들도 배를 타고 가버나움까지 쫓아간다. 그리고 가버나움에서 주님을 만나게 된다. 그때 주님께서는 그 군중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첫째로, 이제는 '썩을 양식을 위해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라'고 하셨다(27절). 또한 그 양식은 주님께서 그들에게 주실 것이라고 하셨다. 사실 그때 군중들은 왜 가버나움까지 쫓아왔는가? 그것은 먹으면 소화되어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기 위해 예수님을 찾아왔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먹으면 썩어 없어질 한 끼의 식량을 주시려고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다. 그분은 우리의 영혼에게 영원히 살 수 있는 생명을 주시려고 이 땅에 오신 것이다. 그러므로 그때 사람들은 예수께서 주실 영원한 생명에 관심을 기울여야 했다. 하지만 그들은 끝까지 자신의 육신의 양식만 관심을 가졌다. 그리고 그것을 언제든지 채워 달라고 요구하였다. 그들은 결국 주님께서 왜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셨는지를 몰랐던 것이다. 그리고 왜 예수께서 그들의 곁을 떠나셔야 했는지를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채 있었던 것이다. 둘째로, 예수께서는 하나님께서 영생을 주시기 위해 보내셨던 자신을 믿어서 영생을 얻으라고 권면하셨다(28~29절). 그들은 그때까지도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인지를 잘 몰랐다. 그래서 육신의 양식을 얻기 위해 예수님을 찾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주님으로부터 일시적인 혜택을 맛보는 것일 뿐 주님으로부터 영원한 혜택을 제공받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그들이 해야 할 일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영생을 주시려고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했다. 그것이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계속해서 모세가 만나를 매일 내려 준 것처럼 예수께서도 자기들에게 그렇게 해 주시기를 요청하였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만나를 내려 주신 것이 아니며, 아버지 하나님께서 내려 주신 것이라 사실을 교정해 주었으며, 하나님의 떡은 육신의 양식이 아니라 하늘에서부터 내려와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는 예수님 자신이라고 알려 주셨다. 

     

    7. 나오며

      요한복음은 표적의 책이다. 왜냐하면 표적들을 통하여 예수께서 누구시며 왜 이 땅에 오셨는지를 알려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예수께서 행하신 여러 가지의 표적들 가운데서 일곱 가지 기적만을 따로 모아 요한복음에 수록해 놓았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1장부터 12장에서는 예수께서 누구시며 무엇을 목적으로 이 땅에 오셨는지를 설명해 주기 위한 일곱 가지 표적을 만나게 된다. 그래야만이 독자들이 그분의 십자가의 죽음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알 수 있게 되며, 그분의 부활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네 번째와 다섯 번째의 표적은 예수께서 하나님이시며 창조주이시자 만물의 주관자이심을 뚜렷이 증거하고 있다고 하겠다. 또한 그분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자신이 생명의 떡으로서 사람들에게 생명을 나눠주려고 오셨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도 오병이어의 기적을 바라볼 때에, 예수님이 보는 관점으로 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의도적으로 벳새다의 빈 들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셨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만나를 먹은 것과 같이, 이제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시려고 오신 것을 알라고 일으킨 기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날에도 어떤 목적으로 주님을 찾든지 그가 진정 예수님을 통해서 얻어야 할 것은 예수님이 하늘의 참된 생명이라는 것을 알고 믿는 것이다. 결코 썩어 없어질 육신의 양식을 위해서만 주님을 찾아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들로서 교회에서 바라고 소망할 것은 교회가 무슨 먹을거리를 주지는 않나가 관심거리가 되어서는 아니 된다. 교회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사람의 영혼에 필요한 생명과도 같은 말씀을 제공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일에 교회에 나와 예배시간 한 시간 떼운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날 자신의 영혼에 필요한 양식을 공급받았는가가 중요한 것이다. 고로 이제는 내가 교회에서 과연 생명을 공급받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려고 오셨기 때문이다. 

     

     

    2022년 11월 09일(수)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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