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강해(06) 서머나교회에게 주신 승천하신 주 예수님의 말씀(계2:8~11)_2017-08-02

by 갈렙 posted Aug 02,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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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투브 주소 https://youtu.be/KngV4-L1Ztg
날짜 2017-08-02
본문말씀 요한계시록 2:8~11(신약 400면)
설교자 정병진목사
주제어 서머나교회, 소아시아일곱교회, 폴리갑, 고난과 핍박받는 교회, 전능자이신 예수님

서머나교회, 핍박받는 교회를 상징하는 두번째 유형의 교회다. 부활승천하신 우리 주 예수께서 이 땅에 존재하고 있는 일곱가지 유형의 교회들을 말씀하셨는데, 그중에 두번째로 언급하신 교회가 바로 서머나교회였다. 그런데 이 교회는 주님의 책망을 발견할 수가 없다. 오직 격려와 칭찬만 있는 것이다. 이 세상에 어찌 격려와 칭찬만 들을 수 있는 교회가 존재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교회가 소아시사에 있었다. 아무리 뛰어난 성도라 할지라도 한 가지쯤은 책망받을 일을 가지고 있을 터인데, 이 교회는 그 어떠한 책망도 듣지 않았던 것이다. 대체 이 교회는 어떤 교회였길래, 주님으로부터 이러한 과분한 평가를 받았야 했던 것일까? 우리도 언젠가는 주님 앞으로 나아가 평가받을 날이 올 텐데, 그날 칭찬듣는 성도가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그리고 이 서머나교회를 통해서 주셨던 말씀을 우리는 어떻게 간직하고 또한 실천할 것인가? 그래서 오늘은 서머나교회에 대해서 알아보자.

 

1. 들어가며

  이 세상에 있는 교회는 어떤 유형의 교회로 분류할 수 있을까? 예수님에 의하면, 교회는 총 7가지 유형의 교회로 분류해볼 수가 있다. 그것은 당시 소아시아에 현존하고 있던 교회들의 모습과 같다. 당시 소아시아에는 에베소교회, 서머나교회, 버가모교회, 두아디라교회, 사데교회, 빌라델비아교회, 라오디게아교회 등이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소아시아의 일곱교회는 당시에 현존하고 있던 교회였을 뿐만 아니라 놀라운 사실은 초기교회 때부터 주님 오실 때까지 있을 역사적인 교회의 유형과도 흡사하게 맞아떨어진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주님에 의한 교회의 분류는 완벽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가 있다.

  그렇다. 소아시아의 일곱교회는 역사상에 나타났던 교회의 유형과 흡하다. 첫번째 교회로 소개되고 있는 에베소교회를 보자. 이 교회는 거짓 사도를 분별하다가 첫사랑을 잃어버린 교회로서, 기독교 초기교회의 모습과 거의 유사하다(예수부활이후~ A.D.96년경). 그리고 두번째 교회로 소개되고 있는 서머나교회는 로마의 도미시안 황제의 황제숭배 강요 때부터 기독교신앙이 로마의 공식종교로서 인정되기 전까지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는 교회로서(A.D.96년경~313년), 유일신을 믿는 유대인들과 로마의  세력에 의해 기독교인들이 핍박받아 순교하는 시대의 교회를 가리킨다. 그리고 세번째 버가모교회는 기독교가 공인된 이후 세상과 타협하는 로마공인시대의 교회를 가리키며(A.D.313~590년), 네번째 두아디라교회는 영적인 지도자가 타락의 극치를 달리는 중세로마카톨릭시대의 교회상을 반영하고 있다(A.D.590~1517년). 그리고 다섯번째 사데교회는 1517년 종교개혁 이후의 1,700년까지 시대의 교회상을 말하는 것으로서, 살아있다고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어있는 교회를 가리킨다. 그리고 여섯번째 빌라델비아교회는 작은 능력을 지녔지만 말씀을 순수하게 보존하면서 갖은 핍박 속에서도 주님을 부인하지 않고 복음을 전파하는 시대의 교회를 가리킨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일곱번째 라오디게아교회는 말세지말의 교회상으로서, 물질적으로는 풍성하지만 영적으로 죽어있어 뜨뜻미지근하게 신앙하는 교회를 가리킨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사실은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이러한 일곱교회의 소개 순서가 소아시아의 지역위치상으로 볼 때 시계가 돌아가는 방향과 일치하고 있다는 점이다. 어떻게 이러한 배치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인지, 역시 예수님은 교회를 주관하시는 전능한 하나님이신 것을 다시 한 번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렇다. 예수께서 언급하신 소아시아의 일곱교회 기록 순서 또한 기독교회의 역사적인 변천순서와 일치하며, 위치적으로 볼 때에는 시계방향과 일치한다. 그래서 오늘은 소아시아에 있었던 두번째 교회였던 서머나교회로서, 로마의 도미시안황제 의한 황제숭배강요 이후 로마의 콘스탄틴 대제가 기독교를 공인하기까지의 기독교회의 모습을 그대로 담고 있는 교회상을 살펴보고자 한다.

 

2. "서머나"라는 도시와 서머나교회의 상황을 알아보자.

  먼저, 서머나라는 도시와 서머나교회 상황을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자. "서머나"라는 이름은 고난과 죽음을 상징하는 '몰약'이라는 뜻이다. 특히 서머나라는 도시는 지역적으로 볼 때 에베소에서 북쪽으로 약 56Km 떨어진 곳에 위치하는 항구도시로서, 헬라의 유명한 시인 호머가 출생했던 바로 그 도시다. 그런데 이 도시 역시 다른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황제숭배를 아주 집요하게 강요받던 도시 가운데 하나였다. 만약 황제숭배를 거절할 경우에, 그들에게 돌아오는 결과는 배고픈 원형경기장 안에 풀어놓은 사자밥이 되거나 화형에 처해지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일들의 배후에는 유대인들의 시기질투심도 작용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A.D.70년을 기점으로 유대인들이 대거 서머나 지역으로 이주하여, 서머나에서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승에 의하면, 당시 서머나도시의 절반 이상이 유대인들이었다고 한다. 그러니 예수님만을 오직 주와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기독교인들을 보면서 유대인들은 기독교인들을 가만 둘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사단의 앞잡이인 로마정부를 꼬드겨 로마황제를 자신의 주님과 신으로 인정하지 않는 기독교들을 골라내어 철저히 죽이는데 앞장섰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머나교회 성도들은 극심한 핍박 속에서도 결코 흔들리지 않는 신앙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이미 주님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놓았기 때문이다. 서머나교회는 이처럼 불굴의 투철한 믿음, 모진 고난과 박해속에서도 신앙을 지켜내 믿음이 있었다. 그러므로 서머나교회는 그리스도로부터 칭찬만 듣는 교회로 발돋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2천년이 지난 지금까지 오직 유일하게 살아남아 존재하고 있는 교회는 일곱교회들 가운데 오직 서머나교회 뿐이다.

 

3. 서머나교회에 말씀하시는 주님의 모습과 그 교회의 상황과 칭찬 그리고 축복의 약속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서머나교회를 향해 주님은 자신을 어떻게 소개하고 있는가? 그리고 서머나교회의 당시 상황은 어떠했는가? 그리고 오직 칭찬만 들었던 서머나교회는 어떤 칭찬을 받았으며, 그들에게 주어진 축복의 약속의 말씀은 무엇이었을까? 이제는 성경 한 구절 한 구절(계2:8~11)을 직접 직역하면서 살펴보도록 하자.

 

가. 서머나교회에 자신을 소개하고 있는 예수님은 과연 누구신가?

(8) 그리고 [너는] 서머나 안에 있는 교회의 사자(메시지 전달자)에게 [단번에] 편지하라(쓰라). 처음이요 그리고 마지막이신 이가 이것들을 말한다. 이분은 죽게 되었다 그리고 살아나셨다.

  서머나교회에 자신을 소개하고 계신 예수님은 과연 누구신가? 그분은 첫째, 처음이요 마지막이신 분이라고 자신을 소개하신다. 이것은 그분이 모든 것을 시작하고 끝내시는 분으로서 시간과 역사의 주관자이심을 말씀하셨다. 그런데 이러한 칭호는 사실 구약시대에 자신을 여호와로 계시하셨던 하나님 자신의 자기계시였다(사41:4, 44:6, 48:12)그러므로 우리는 예수께서 구약의 여호와로 나타나셨던 그분과 한 분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41:4 이 일을 누가 행하였느냐 누가 이루었느냐 누가 처음부터 만대를 불러내었느냐 나 여호와라 처음에도 나요 나중 있을 자에게도 내가 곧 그니라

44:6 이스라엘의 왕인 여호와, 이스라엘의 구원자인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는 처음이요 나는 마지막이라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

48:12 야곱아 내가 부른 이스라엘아 내게 들으라 나는 그니 나는 처음이요 또 나는 마지막이라

  둘째, 그분은 자신을 죽으셨지만 다시 살아나신 분이라고 소개하신다. 그렇다. 그분은 분명 죽음을 통과하셨다. 그러나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살아나셨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이셨지만 사람이 되셔서 죽고 부활하신 분을 만나게 된다. 그렇다면 그분은 인류를 위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것인가 아니면 사람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신 것인가? 또한 그분은 하나님에 의해 일으키심을 받은 것인가 아니면 스스로 살아나신 것인가공관복음서들과 사도들의 증언에 의하면, 그분은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하시고, 하나님에 의해 일으키심을 받으신 분이라고 표현되어 있다(마16:21,17:23). 그렇다. 예수께서 사람이 되신 입장에서 보았을 때, 그분은 죽임을 당하시고 하나님에 의해 일으키심을 받은 분이시다(고전15:3~4,13~14,17,20, 행2:23~24,32). 하지만 하나님이신 입장에서 보면 다르다. 예수께서는 인류구원을 위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신 분이며, 스스로 생명을 취하여 부활하신 분이시다(계2:8). 성경은 이 두 가지 사실을 공히 증거하고 있다.

  한편, 우리말 성경에서는 예수께서 살아나셨다”고 하는 표현이 자주 나오는데, 이 말씀은 그분이 살리심을 받았다는 뜻인가 아니면 스스로 일어나셨다는 뜻인가? 그런데 성경에 등장하는 이러한 모든 문장들은 사실 수동태문장이다. 즉 하나님에 의해 일으키심을 받았다"는 뜻이다(동사 에게이로의 직설법, 완료, 수동태, 3인칭, 단수). 하지만 요한계시록에 의하면, 그것은 다르게 표현되어 있다. 즉 요한계시록에서 예수님은 죽으셨지만 스스로 생명을 취하여 부활하신 분이라고 묘사되어 있는 것이다(계2:8). 결국 이러한 사실들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가? 그것은 예수께서 곧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증거해주는 것이다.

16:21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죽임을 당할 것과) 제삼일에 살아나야(일으키심을 받을)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17:23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리라(일으키심을 받을 하시니 제자들이 매우 근심하더라

고전15:3-4 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4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일으시킴을 받으사)

고전15:13-14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일으시키심을 받지) 못하셨으리라 14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일으키심을 받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고전15:17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일으키심을 받은)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고전15: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일으키심을 받으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2:23-24 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으나 24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으니(일으키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2:32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일으키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자신을 소개할 때, 당신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신 분이며,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분이라고 소개하신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그것은 예수께서 핍박과 죽음의 위기 앞에 있는 서머나교회 성도들에게 두려하지 말고 용기를 주기 위한 자기소개라고 할 수 있다. 즉 비록 서머나교회 성도들이 현재 환난과 핍박의 상황에 직면하여, 혹 죽임을 당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부활로 인해 새로운 생명이 다시 시작되는 것임을 알려주고 싶으셨던 것이다. 그러니 고난과 죽음 앞에서도 절대 두려워하지 말라고 격려하고 계시는 말씀이다. 사람이 혹 죽임당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단지 첫번째의 사망에 처할 뿐이지, 그것은 결코 둘째 사망의 해를 가져오지 않을 것임을 알려주고 싶으셨던 것이다(계1:18~19).

1:18-19 [현재] 살아 있는 자라(,,,) 내가 전에 [나를 위하여] 죽었었노라(,,,중디)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있는 채로] 있다.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19 그러므로 네가 본 것과 지금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나. 주님은 서머나교회를 향해 무엇을 칭찬하셨는가?

(9) 나는 너의 환난과 궁핍을 알아왔다. 그러나 [너는] 부하다. 그리고 자기자신들을 유대인들이라고 말하고 있는 자들로부터 [밖으로] [있는] 훼방(비방)[나는] [알아왔다]. 그리고 그들은 유대인들이 아니라 오히려 사단의 회당[이라는 것을].

  사실 서머나교회는 오직 칭찬만 들었던 2개의 교회들(서머나교회, 빌라델비아교회) 가운데 하나의 교회다. 그렇지만 서머나교회의 성도들을 겉모습만 본다면 참으로 비참한 모습으로 비쳐질 수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신앙적으로는 극심한 환난을 당하고 있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을 유지하려다보니 물질적인 궁핍에 휩싸여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님의 평가는 달랐다. 그들을 부자라고 선언하셨다. 한편, 서머나교회와는 반대로 꾸중만 들었던 라오디게아교회의 경우는 서머나교회의 형편과는 정반대였다. 그 교회는 물질적으로는 풍성한 교회였으나 사실 영적으로는 매우 가난한 거지상태의 교회라고 꾸지람만 들었기 때문이다(계3:17).

3: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그렇다면, 서머나교회 성도들을 핍박하고 죽였던 장본인은 대체 누구였는가? 놀랍게도 숨겨진 핵심세력은 바로 유대인들이었고, 밖으로 드러난 세력은 로마정부였다는 사실이다. 유대인들이 로마정부를 꼬드겨 당시 서머나교회의 성도들을 핍박하게 했기 때문이다. 그럼, 언제부터 서머나도시에 유대인들이 이주해 들어왔던 것일까? 그때는 A.D.70년경이었다. 예루살렘이 로마의 디도장군에 의해 함락당하기 전, 많은 유대인들이 서머나로 이주해왔기 때문이다. 그때 그들은 서머나에서 회당을 중심으로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였는데, 나중에는 로마정부와 협치를 통해서 서머나교회 성도들을 악랄하게 핍박했던 것이다. 실제로 A.D.155년 서머나의 초대감독이었던 폴리갑이 빌라델비아교회 성도들 11명과 함께 죽임당할 때에, 기독교인들을 죽이는데 앞성 섰던 핵심은 다 유대인들이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유대인들이 비록 자신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그들을 일컬어 "사탄의 회당(모임)"이라고 격노하였던 것이다(계2:9).

 

다. 서머나교회에게 주신 격려의 말씀과 축복에 대한 약속은 무엇이었는가?

(10) [너는] [네가] [계속] 고난받으려 한다는 것을 [두고] [계속]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장차 마귀가 너희들로부터 [밖으로] 감옥 안으로 던지려고 하고 있다. 너희들을 시험받게 하려고. 그리고 너희가 [미래에] 십일들의 환난을 받을 것이다. [너는] 죽을 때까지 [계속] 충성하라(신실하게 되어라). 그러면 [내가] 너에게 생명의 승리관을 줄 것이다.

  이어서 주님께서는 앞으로 서머나교회에 박해가 또 다가올 것이라는 사실을 미리 알려주셨다. 성도들이 한 번 어떤 고난을 통과했다고 해서 그것으로 고난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들려주신 것이다. 즉 주님께서는 사탄의 회당인 유대인들과 로마의 정치권력이 결탁하여 장래에 서머나교회의 성도들을 옥에 가둘 것이고, 몇 사람은 죽게 할 것이라고 예고해 주셨다. 하지만 그것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다. 왜냐하면 그것은 제한된 시간 속에서 몇 사람에게만 해당하는 사건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사실 성도의 생사여탈권은 핍박자나 참소하는 자 곧 사탄에게 있지 않다. 오직 교회의 머리되신 예수님에게 있기 때문이다(계1:18). 그러므로 우리는 사탄마귀마저 손에 쥐고 움직이고 계시는 예수님만 두려워하면 된다. 특별히 주님은 서머나성도들이 받을 환난의 기간이 십일이라는 하신 것은 그 기간이 어느정도 될 것인가를 암시해주셨다. 성경에서 "열(10)"이라는 숫자는 손가락과 발가락이 열 개이듯이, 이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충만한 숫자를 가리키나, 하나님 보시기에는 제한된 충만을 가리키는 숫자다. 곧 "열"이라는 숫자가 다니엘과 요한계시록에서 열 뿔(12:3, 13:1, 17:3,7,12,16)이라는 짐승의 뿔 에서도 말해주듯이, 그 뜻이 ‘충만이나 완전수이기는 하나 제한된 숫자임을 가르쳐준다. 이는 믿는 서머나교회 성도들에게 임할 고통이기는 하겠지만, 동시에 그 기간이 제한된 시간에만 해당되는 것이며, 그것도 몇 사람만 해당하는 것이임을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특히 "열"이라는 숫자는 셈족의 독특한 표현에서도 등장하는데, 그것은 창24:55에도 나온. 그리고 그 의미는 아주 짧은 제한된 기간을 가리키는 데에 사용되었다.

24:55 리브가의 오라버니와 그의 어머니가 이르되 이 아이로 하여금 며칠 또는 열흘을 우리와 함께 머물게 하라 그 후에 그가 갈 것이니라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고난을 통과하고 있는 서머나교회 성도들에게 어떤 약속의 말씀을 주셨는가? 그것은 그들에게 생명의 면류관이 주어질 것이라고 하셨다. 성도들은 과연 언제까지 믿음의 지조를 지켜야 하는가? 그것은 한 마디로 죽을 때까지의 기간이다. 순교하기까지 성도는 자신이 가진 믿음을 지켜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다 순교의 현장까지 가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일은 마귀가 자신의 통치기간을 단축시키는 것이라는 사실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성도들은 순교적인 신앙을 간직하며 살아가야 한다. 그럴 때, 우리의 육신을 벗는 그날, 생명의 면류관(승리관)을 우리에게 주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10절에 나오는 "면류관"은 왕관(디아데마)이나 제관이라는 단어가 아니다. 그것은 올림픽의 최후승자에게 주어지는 영광의 승리관(스테파노스)이라는 단어다. 그렇다. 천국에서는 승리관을 쓴 자가 참으로 복된 자다. 왜냐하면 천국에 들어갔을 때에 제일 큰 상급은 주님을 위해 그리고 신앙을 지키기 위해 자기의 목숨을 내어놓는 자가 받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어서 복음전하는 자가 그 뒤를 따르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을 위해 고난받고 순교하는 것에 대해 결코 두려워하지 말라. 그때가 되면 오히려 감사드리고 기뻐하라.

  이어서 11절에는 이기는 자들에게 대한 축복의 약속이 등장한다.

(11) 귀를 가지고 있는 자는 그 영이 교회들에게 무엇을 말씀하는지를 [단번에] 들으라. 이기고 있는 자는 두 번째의 죽음으로부터 [밖으로] 결코 [단번에] 해를 받지(부당하게 되지) 아니할 것이다.

  그렇다. 주님께서는 서머나교회의 이기는 성도들에게 또다른 축복의 말씀을 주셨다. 그것은 두 번째 죽음의 해를 결코 받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이었다. 여기서 "둘째사망"이란 하나님과 영영 분리되는 죽음을 가리키는데, 지옥불에 들어가는 고통을 가리킨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러한 고난과 핍박을 이겨낸 자들에게는 둘째사망의 해를 결코 맛보게 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이것은 이기는 자는 단 한 사람이라도 결코 불못에 던져지는 일은 없을 것임을 분명하게 말해준다(계19:20,20:6,10,14,21:8).

19:20 짐승이 잡히고 그 앞에서 표적을 행하던 거짓 선지자도 함께 잡혔으니 이는 짐승의 표를 받고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던 자들을 표적으로 미혹하던 자라 이 둘이 산 채로 유황불 붙는 못에 던져지고

20:6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

20:10 또 그들을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져지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20:14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21:8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4. 나오며

  에베소교회가 바른 진리를 수호하고 그것을 분별하려다가 그만 주의 종들에 대한 처음 사랑을 잃어버린 교회라고 한다면, 서머나교회를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고난당해 궁핍함 속에서 살아가지만 끝까지 믿음의 지조를 지키는 교회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핍박과 고난을 이겨낸 서머나교회는 단지 빌라델비아교회와 더불어 오직 칭찬만 들은 교회가 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그렇다. 성도들은 핍박과 고난 그리고 궁핍함이 찾아온다고 해도 거기에서 떨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을 인내하는 자에게 영광스러운 미래가 선물로 주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이여, 잠시 잠깐의 삶 속에서 비굴한 사람이 결코 되지 말라. 주님을 부인하지 말라. 주님을 모른다고 말하지 말라. 우리는 오직 우리가 가진 믿음을 지켜내기 위해 죽음도 불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 자들만이 결국 천국에 입성할 수 있고, 그곳에서 영광의 면류관을 받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고난이 찾아온다고 해도 너무 염려하지 말라. 그것도 제한된 시간만 허용될 것이기 때문이다. 고난과 죽음 앞에서 당당하라. 어떤 상황 속에서도 오직 예수님만을 붙들고 그분만을 믿고 따라가는 지조있는 성도들이 되어보자. 건투를 빈다.

 

2018년 9월 25일(화) 1차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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