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은 언제 어떤 상태 있을 때에 소명을 받았을까? 그리고 그에게 주어진 소명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를 불러내실 때에 왜 하나님의 보좌의 환상을 먼저 보여주고 그에게 사명을 주셨던 것일까? 그리고 그를 직접 음성으로 부르실 때에 하나님께서는 왜 그의 이름을 사용하지 않으고 그에게 "인자야"라는 칭호를 사용하셨던 것일까? 사실 "인자"라는 칭호는 구약시대에는 에스겔에게 99% 그리고 다니엘에게 단 한 번 사용되었는데, 하나님께서는 왜 그러한 칭호를 에스겔과 다니엘에게만 사용하셨던 것일까? 그리고 그가 보냄을 받은 대상은 이방인이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이었는데, 그들은 "패역한 족속'이라고 하셨다. 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패역한 족속"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일까?
1. 들어가며
에스겔은 25세에 예루살렘에서 제사장의 일을 배우기 시작할 무렵 남유다 19대왕이었던 여호야긴과 함께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5년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다. 하지만 그에게 하나님께서는 환상부터 보여주셨다. 그리고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그리하여 그는 전형적인 선지자의 길을 걸어가게 된다. 그는 먼저 보았고 그리고 먼저 말했던 것이다. 사실 선지자는 선견자로서 선지자(먼저 말하는 자)이면서 또한 "먼저 보는 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에스겔은 바벨론의 그발강가에서 그의 영이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들려 올라가는데, 거기에서 그는 네 생물과 바퀴의 환상 그리고 네 생물 위에 있는 궁창의 환상 그리고 궁창 위에 있는 하나님의 보좌의 환상을 본다. 그리고 아울러 거기에 앉아계시는 분의 음성을 듣는다. 물론 그는 거기에 좌정해계신 하나님은 볼 수 없었고 거기에 사람같은 형상이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그 모습은 여호와의 영광의 형상으로서 불같았다. 그런데 그 보좌로부터 음성이 들려왔다. 그것이 바로 에스겔의 소명에 관한 말씀이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에스겔을 선지자로 부르셨는지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2. 에스겔은 얼마만큼 쓰임을 받았을까?
에스겔은 30살(B.C.593년)의 나이에 포로민의 상태에서 이방땅인 바벨론에서 부르심을 받아서 22년간 사역한 뒤 그의 나이 52세(B.C.571)에 바벨론 땅에서 그의 사역을 마감하게 된다(순교했다가 전해진다). 그가 선지자로 부르심을 받아 사역하는 동안 그는 참 모진 고통을 겪어야 했다. 선지자로 부름을 받았지만 무려 7년동안 이스라엘을 향하여 입을 열어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리고 33살에는 그의 아내가 갑지기 죽게 되었으나 슬퍼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슬퍼하지 말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는 이른바 행동으로 보여주는 예언 곧 "행동예언"만을 해야만 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의 답답한 마음을 오죽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가 했던 행동 예언은 그를 정신병자 취급할 정도였다고 하니 당사자는 오죽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3. 에스겔은 어떻게 부름을 받았을까?
그렇다면 에스겔은 어떻게 부름을 받았을까? 그는 먼저, 하나님께서 그의 눈을 열어 보여주었던 환상을 보았다. 그것도 하나님의 보좌의 환상이었다. 그리고 그는 이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게 된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그에게 먼저 눈을 열어 환상을 보여주었던 이유는 대체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제사장이었던 그에게 하나님께서는 과연 지금 어디서 무슨 일을 하고 계시는지를 알려주기 위함이었다. 그가 5년전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왔을 때만해도 그는 하나님께서는 유대땅에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의 지성소에 계시는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하나님은 어디에 국한되어 갇혀 계시는 분이신가? 아니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의 눈을 열어 하늘에서 온 우주만물과 세계 모든 나라들을 주관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게 하고 싶으셨다. 그래서 먼저 그에게 천상의 모습을 환상으로 보여준 것이다. 그리고 나서 보좌 위에 앉아계시는 이의 음성을 들었다. 그것은 이제 그는 불러서 하나님께서 선지자로 세우시겠다는 것이었다.
4. 에스겔을 부르신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을 어떤 사람으로 불렀는가?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누가 그를 보내며, 어떤 사람에게 보내며, 무슨 말을 해야 할지를 알려주셨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을 부르실 때에 "에스겔아!"라고 말씀하시 않으셨다. 그에게 "인자야"라고 말씀하셨다. 그럼, 왜 많은 호칭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그의 이름으로 그를 불러내지 아니하시고, "인자야"(사람의 아들, 아담의 아들)라고 말씀하신 것일까? 그것은 "인자야"라는 말이 갖고 있는 놀라운 뉘앙스가 있으니, 하나님께서는 구약시대에 오직 에스겔과 다니엘에게만 "인자야"라는 호칭을 사용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약 93회에 걸쳐 그를 "인자여"라고 부르셨고, 다니엘에게는 딱 한 번(단8:17) 그렇게 부르셨다. 그렇다면, 이 세상 사람들 중에서 에스겔과 다니엘에 "인자"라는 호칭이 사용되었는데, 이 두 사람의 공통된 특징은 대체 어떤 것이었을가? 그것은 첫째,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가서 이방 땅에서 환상을 보았다는 것이다. 다니엘은 B.C.605년 1차포로 때에 바벨론에 끌려간 자였고, 에스겔을 B.C.577년 2차포로 때에 바벨론에 끌려간 자였기 때문이다. 둘째,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보좌의 환상을 보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너무나 불쌍한 사람으로 전락한 상태에 있을 때에 "인자야"라는 호칭을 들었고, 너무나 황홀한 하나님의 보좌의 환상을 본 후에 "인자야"라는 호칭을 들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주는 것인가?
그것은 첫째로, 사람은 아무리 놀라운 계시를 보았다고 하더라도 자신이 "사람의 아들" 곧 "아담의 아들"이요, "흙의 아들"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언제라도 하나님께서 훅 불어버리면 날라가 없어지고 말 인생인 것을 잊지 말라는 것이다. 그래서 아마 사도바울에게도 하나님께서 교만하지 말라고 그의 몸에게 사탄의 가시를 넣어주었을 것이다. 둘째로, 비록 사람의 아들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시키신 사명에 충성을 다한다면, 영광스러운 자리에 앉게 해 주시겠다는 암묵적인 선언이 바로 "인자야"라는 호칭이었던 것이다.
5. 에스겔을 불러내신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어떤 말씀을 주셨는가?
먼저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을 불러서 보내시는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말씀하셨다. 그는 이미 보좌의 환상을 보았던 분이 바로 보좌에 앉으셔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금방 알아차렸다.
둘째, 이때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을 누구에게 보내는지 말씀하셨다. 그것은 "이스라엘 자손, 곧 패역한 백성, 여호와를 배반하는 자"에게 보낸다고 하셨다(겔2:3). 그렇다면 "패역한 자"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패륜적으로 반역하는 자라는 뜻이다. 얼마나 그들이 못된 자였으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러한 표현을 쓰셨을까? 그것은 그들이 자기들의 민족을 종살이하던 애굽에서 건져내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땅을 기업으로 주었건만 그새 하나님을 잊어버린 채 여러 이방신들과 온갖 피조물을 자신의 하나님이자 조물주로서 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오직 한 분 하나님에 만족하지 않고 푸른 나무 아래서, 산 꼭대기에서, 무성한 상수리나무 아래에서, 높은 고개 위에서, 제단 사방에서, 심지어 성전에서 우상들을 만들어 섬겼기 때문이다(겔6:13). 이스라엘 백성들은 물론이거니와 이스라엘의 장로들과 제사장들이 각양 곤충과 짐승의 신을 숭배했으며, 동방태양에게 절을 하였으며, 여인들은 담무스를 위해 애곡하였다(겔8장).
그렇다면, 사람이 패역한 사람이 될 때에는 어떤 상태에 들어가는 것일까? 그것에 대해 겔12:2에서는 "그들은 볼 눈이 있어도 보지 아니하고, 들을 귀가 있어도 듣지 아니하나니 그들은 반역하는 족속임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렇다. 즉 하나님께서 보여주는데도 일부러 외면하지 보지 아니하고며 하나님께서 들려주시는데도 일부러 귀를 가리고 듣지 않으려는 상태가 바로 패역한 사람의 상태인 것이다(겔3:27). 사람이 만일 패역한 사람이 되어버리면, 아무리 진리를 알려주어도 들으려 하지 아니하고, 아무리 잘못을 책망한다고 해도 곧이듣지를 아니하는 것이다.
6. 나오며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가서 예언하라고 보낸 사람들은 가서 외치면 들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전부가 귀를 틀어막고 듣지 않으려는 사람이었고, 눈이 있으나 보지 않으려고 눈을 가려버리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 그들은 이방인들이 아니었다. 차라이 이방인들이었다면 말을 더 잘 들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오히려 자기 민족이 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아니한 것이다. 오히려 그들은 에스겔에게 가시와 찔레와 전갈로서 다가왔다. 그들은 오히려 에스겔을 핍박하고 고통을 주며 죽이려고 했던 것이다. 그래도 선지자는 어떤 자인가? 그래도 듣든지 아니듣든지 가서 외치는 자가 선지자다. 그것이 바로 선지자에게 주어진 사명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바로 그러한 사명을 맡겼던 것이다. 만약 우리에게 그러한 사명이 주어진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과연 우리들도 에스겔처럼 7년을 벙어리가 지내며 행동예언을 할 수 있으며, 젊었을 때 아내를 잃어버리고 그리고 자기 아내도 죽었도 슬퍼하지 못하게 가로막는다면 과연 우리는 순종할 수 있을까? 그것이 바로 선지자아 가야할 길이요 선지자의 사명인 것이다. 그것이 바로 말씀맡은 자의 길이요 사명인 것이다. 건투를 빈다.
2019년 7월 3일(수)
정병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