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셉의 결심(마1:16~21)

by 갈렙 posted Dec 13,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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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투브 주소 https://youtu.be/9HfCwuN3bkY
날짜 2015-12-13
본문말씀 마태복음 1:16~21(신약 2면)
설교자 정병진목사
주제어 사랑,희생,손해,요셉의결심,파혼,책임감당,경제적불이익,살리는,지켜주는,손해보는,불명예

  요셉과 마리아, 그는 혈통적 계보에 따르면 예수님의 부친이요 모친이다. 그런데 그들의 결혼하여 예수님을 얻기위해 어려운 난관을 극복해야 했다. 요셉이 약혼은 했지만 아직 결혼식을 올리지 못한 상태에서 그만 파혼해야 할 위기에 처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과연 요셉은 위기상황을 어떻게 극복했을까?

  여러분은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결혼식을 본 적이 있는가?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결혼식은 2번의 과정으로 진행된다. 먼저는 약혼식이 있으며 그리고 약 1년이 지난 어느 시점에 결혼식이 있다. 약혼식은 신랑된 남자가 신부될 처녀의 부모를 찾아가서 허락을 받아야 하는데, 이때 처녀가 포도주를 마심으로 약혼은 성사된다. 그러면 그때부터 신랑과 신부를 결혼준비를 하게 된다. 특히 신랑은 자신이 결혼하면 살게 될 집을 짓기 시작하며, 아버지로부터 결혼생활에 필요한 지혜를 배우게 된다. 그리고 신부는 혼인예복과 결혼식날밤을 밝힌 등잔기름을 준비하게 된다.

  그리고 약 1년쯤 지나면 결혼식을 올린다. 먼저는 신부집에서 그리고 또 한 번은 신랑집에서 열린다. 그것도 낮시간이 아니라 밤 8~9시가 되면 결혼식을 올리게 되는데, 결혼식 축하연은 밤새껏 진행된다. 그런데 이 결혼식 때 신랑신부가 해야 할 아주 중요한 3가지 절차가 있다. 첫째는, 홉바(결혼텐트) 안으로 들어가 랍비의 주례로 신랑이 신부에게 혼인반지를 끼워주는 것이다. 서로 하나가 되겠다는 의사표시다. 둘째는, 케투바(결혼계약서)를 낭독하는 일이다. 결혼하게 되면 그렇게 살겠다는 자신의 각오를 밝히는 것이다. 셋째는, 포도주 유리잔을 깨뜨리는 것이다. 이것은 한 번 깨어진 유리잔은 원상으로 되돌릴 수 없듯, 한 번 그들이 결혼한 이상 결코 뒤로 물릴 수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어서 춤과 음식이 곁들어진 연회가 밤새껏 열리는 것이다.

  그런데 마1:18부터 등장하는 오늘 이야기는 요셉이 이미 마리아와 약혼한 후 한참이 지난 시기에 일어났다. 이제 요셉이 마리아와 함께 살 집을 거의 다 짓고 난 후 결혼식 날짜를 잡기 위해 신부 집을 방문하였다. 그런데 이게 왠 일인가? 마리아의 배가 불러 있는 것이 아닌가! 약혼녀가 어떻게 되어서 그만 다른 남자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과연 요셉은 이 상황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 혹 당신이 요셉의 상황에 처해 있다면 어떻게 할 수 있었겠는가? 요셉의 고민은 깊어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우선, 요셉의 고민은 마리아의 임신사실을 알리느냐 마느냐이다. 만약 그 사실을 동네사람들에게 그대로 알려버리면, 마리아는 신랑된 사람이 아닌 외간남자와 간음한 사실이 드러나 거기에 상응한 댓가를 지불해야 할 것이다. 만약 구약에 나오는 율법규정을 그대로 적용한다면, 그녀는 틀림없이 돌에 맞아 죽을 수밖에 없다(신22:23~24). 그러한 경우는 둘 다를 죽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임신해 있는 아이가 요셉 자신의 아이라고 한다면,  그녀는 괜찮을른지 모르겠지만 요셉은 그새를 참지 못하고 일을 저지른 남자가 되어, 남자로서 책임감도 없고 절제심도 없는 사람으로 낙인찍히고, 파렴치한으로 몰릴 수도 있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요셉 자신에게 있다. 왜냐하면 마리아가 임신한 아이를 자신의 아이로 평생 키워낼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아닌 다른 남자의 품에 안겨 그 아이를 출산한 여자를 평생 자신의 아내로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러니, 뱃 속에 있는 아이가 자신의 아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럼, 어찌해야 하는가?

  고민과 고민을 거듭한 끝에 요셉이 내린 결정은 그녀와 파혼을 결정한 것이었다. 그것도 여자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파혼을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요셉이 파혼을 결심하게 되었다는 것을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적어도 3가지를 의미할 것이다.

  첫째, 그것은 파혼에 대한 모든 책임을 자신이 다 떠 안겠다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자신이 마리아를 임신시켰지만 파혼하겠다는 것으로서 동네사람들에게 파렴치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요셉은 아마 얼굴 들고 동네를 다닐 수가 없을 것이다. 요셉의 직업은 목수의 일인데 누가 그에게 목수의 일을 맡기겠는가? 그러므로 아마도 그는 그 동네에서 살지 못하고 그 동네를 떠야 할 것이다. 요셉이 파혼을 결정했다는 것은 동네사람들에게 모든 모멸와 수치를 자신이 감당하겠다는 뜻이다. 그러나 생각해 보라. 요셉이 무슨 잘못을 했는가? 무슨 책임지지 못할 일을 했는가? 하지만 요셉은 그녀를 살리기 위해 자신이 모든 책임을 떠안기도 결정한 것이다. 사랑이 무엇인가? 사랑은 상대방의 허물을 덮어주는 것이다. 상대방이 어려움을 당하지 않고 상대방의 허물을 덮어주는 것이 사랑은 것이다(잠17:9, 벧전4:6).

  둘째, 그것은 파혼으로 인해 발생하는 모든 손해를 자신이 감당하게다는 것을 뜻한다. 특히 요셉은 마리아와 결혼함으로써 장인의 기업을 물려받기로 되어 있었다. 왜냐하면 장인이 될 헬리에게는 아들이 없었기에 자신의 기업을 딸들에게 물려주되, 자신의 기업이 타 지파에 넘어가지 않도록 자신의 지파의 총각에게만 시집을 보내야 했다(민36:8). 그러므로 작은 동네에서 요셉만이 그 조건에 맞는 사람이었기에, 헬리는 자신의 기업의 일정부분을 요셉에게 주기로 이미 약속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요셉이 파혼을 한다는 것을 장인으로부터 물려받을 기업을 포기하겠다는 것이다. 파혼은 그에게 엄청난 경제적 손실을 안겨주게 된다. 그리고 그동안 고생고생하면 지어놓은 집은 또 어찌해야 한다는 말인가? 사랑이란 상대방을 살리기 위해 자신이 오히려 어려움과 손해를 감당하는 것이다. 생각해보라. 요셉에게는 잘못이 없다. 단지 그녀와 결혼하기로 약혼한 것이 전부다. 문제는 다 마리아에게 있다. 그러나 요셉은 마리아를 살려내기 위해 자신이 모든 어려움과 손해를 담당할 것을 결정한 것이다. 이것은 마치 우리 인간이 죄를 지었지만 하나님께서 그 책임을 다 감당하여 당신이 매맞고 채찍질당하고 결국에는 죽임당하는 것을 선택한 것과 같은 것이다(요일4:9). 이처럼 사랑이란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상대방을 살려내고 상대방을 지켜주는 것이다.

  셋째, 그것은 상대방을 지켜주기 위해 이 세상에서 맛볼 수 있는 즐거움을 기꺼이 내려놓겠다는 것을 뜻한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일생일대의 가장 행복한 순간은 결혼식날이다. 요셉이 파혼을 결정했다는 것을 이 세상에서 경험할 수 있는 가장 큰 기쁨을 내려놓겠다는 것이다. 그는 결혼식날을 기다리며 가슴 설래는 나날을 보냈을 것이다. 그런데 그가 파혼하겠다는 것은  그 모든 행복을 다 포기하겠다는 것이다. 그렇다. 사랑이란 상대방을 위한 일이라고 한다면 자신이 맛볼 수 있는 모든 즐거움을 포기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래서 어떻게 되었을까? 요셉은 정말 파렴치한이 되었는가? 물질적으로 커다란 손실을 보았는가? 마리아와 결혼도 못한 채 손가락질받는 총각으로 평생 살아야 했을까? 아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의 그러한 결단을 하나님께서 보고 계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요셉 자신이 잘못을 저지르지도 않았는데도 마리아를 살리기 위해 그리고 그녀를 지켜주기 위해 자신을 희생제물로 삼은 요셉을 위하여 일해주셨다. 먼저는 즉시 천사를 보내, 그녀에게 임신된 아이는 성령으로 잉태된 하나님의 아들이므로 파혼하지 말라고 알려주셨다. 뿐만 아니라 아직 결혼식도 올리지 않은 상태에서 약혼녀를 임신시켰다는 불명예를 떠안지 않도록 해 주셨다. 갑자기 세계대제국의 황제를 사용하신 것이다. 당시 로마황제 가이사 아구스도로 하여금 천하에 호적령을 내리게 하여,  모든 유대 남자들은 다 자신의 출신지로 돌아가서 호적을 해야 했던 것이다. 결국 요셉도 그 시기에 호적을 위해 갑자기 갈릴리 나사렛에서부터 150km 떨어진 유대땅 베들레헴으로 가야만 했다. 하지만 마리아는 여자여서 호적할 필요가 없었지만 요셉은 마리아를 지켜주고자 그녀를 데리고 베들레헴으로 갔다. 그런데 당시 유대 헤롯왕이 유대인의 왕이 탄생했다는 동방박사들의 말을 듣고는 그만 베들레헴에 사는 2살아래의 모든 사내아이를 죽이라고 명령했다. 그러자 요셉은 꿈에 천사의 지시를 받고 그곳을 탈출하여 애굽으로 피신하였다. 그리고 헤롯왕이 죽게 되자 애굽에서 자신의 살던 고향 갈릴리의 나사렛으로 가서 살게 되었다. 그러니 어느 누구도 예수님을 사생자로 보는 사람이 없었으며, 요셉도 불명예를 안지 않게 해 되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요셉의 명예를 살려주셨던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요셉의 결심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는 그로 하여금 경제적 손실도 전혀 받지 않게 해 주셨다. 마리아와 한 가정을 이루게 함으로 장인 헬리로부터 기업을 고스란히 물려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다른 사람은 다 땅이나 부동산을 기업으로 물려받았지만 그는 하나님의 아들을 기업으로 물려받은 사람이 되었으니 요셉보다도 다 아름다운 기업을 받은 사람이 또 있을까?

  그렇다. 내가 사랑을 실천한다는 것은 당시에는 아픔이요 고통이요 엄청난 고생이다. 하지만 희생없는 영광이 어디에 있을까? 그러나 요셉의 그러한 결단이 결국 마리아를 살려내었고, 그녀의 태중에 있는 아기 예수님도 살려낼 수가 있었다. 그리고 그의 결정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그 어떤 명예도 실추되지 않았으며, 재산상의 손해도 보지 않았다. 이처럼 예수님의 탄생 배경에는 요셉청년의 희생적인 사랑이 바탕에 깔려 있었던 것이다. 이런 사람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을 보게 된 것이다. 만약 이러한 자신이 섬기는 집안에 그리고 교회에, 또한 자신이 섬기는 지역과 나라에 다만 몇 명이라도 있다면 거기에는 예수님이 계실 것이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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