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겐 성경 66권이 주어져 있다. 그러다보니 어떤 성경들은 서로 충동하는 듯한 모습도 보인다. 그래서 어떤 것은 받아들이는데 어떤 것은 자신의 관심밖에 두기도 한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는 읽는데, 히브리서와 야고보서는 잘 안 읽는 것이다. 하나는 이신칭의를 말하는데, 하나는 이행칭의를 말하는 것 같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모든 성경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한다. 성도의 구원은 영원한가 아니면 구원에서 탈락한 자 있는가 하는 것도 여기에 속해 있다. 이제 히브리서를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에도 귀를 기울여보자.
1. 들어가며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가 많은 것을 바꾸고 있다. 금방 끝날 줄 알았지만 코로나 사태는 지금도 진행형이다. 그런데 우리나라보다 외국의 경우 더욱 더 심각하다. 왜냐하면 코로나로부터 자신을 방어해줄 마스크를 제조할 공장도 없을 뿐더러, 의료체계도 잘 갖추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먼저 코로나사태를 경험한 우리나라는 이제 마지막으로 확산방지를 위하여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래서 오늘까지 끝내려했던 사회적 거리두기를 2주간 더 연장한다고 한다. 지금도 피로도가 상당한데, 앞으로 2주를 더 견디어야 한다. 교회들마다 다음주 부활주일에는 전 성도가 예배당에 나와서 예배를 드릴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이것도 불투명해졌다. 그렇다고 이대로 그냥 끌려가듯이 갈 수만은 없다. 그럼, 이 난국을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가? 그리고 내 믿음이 식어지거나 뒷걸음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래서 오늘은 지난주에 이어 구원타락의 가능성에 관한 네번째 말씀을 살펴볼까 한다. 어쩌면 강도높은 말씀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무엇이 바른 길인지를 알고 미래를 대비하는 것과 아무것도 모른채 미래에 던져졌다가 그만 낭패를 당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나을 것이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구원에서 탈락하는 죄가 무엇인지 그리고 구원에서 탈락하지 않으려면 무엇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지에 관하여 말씀을 살펴보고자 한다.
2. 구원탈락가능성에 대해서 히브리서는 무엇이라고 말씀하는가?
구원탈락가능성에 대해서 히브리서는 기정사실화하고 있으며 그것도 상당히 강조하고 있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히브리서 기자는 무려 5회나 걸쳐서 이미 믿은 성도들의 구원탈락가능성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 지난 주에는 구원탈락 가능성에 관한 3가지 말씀이 무엇인지를 들었다. 그중에서 구원탈락에 관한 세번째 말씀은 히브리서 5:11~6:12에 나오는데, 6:4~8의 말씀이 그 핵심이었다. 그 내용인즉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구원에서 탈락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구원에 관하여 많은 성도들이 잘못 알고 있는 사실의 하나는 사람이 구원에서 탈락하려면 무슨 심각한 범죄를 저질러야만이 그렇게 되는 줄로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니다. 왜냐하면 "타락한 자"는 심각한 범죄를 저지른 자를 일컫는 말이 아니라, "따로떨어져나간 자"를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구원에서 탈락하지 않으면 그리스도에게 단단히 붙어있어야 하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와 믿음과 신앙공동체에 찰싹 달라붙어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와 신앙으로부터 떨어져나가게 하는 요인은 무엇인가? 히브리서 6장에서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지 않는다. 다만, 열매를 통하여 자신이 바로 가고 있는지를 점검해보라고 권면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히브리서 10장은 다르다. 구원탈락에 관한 네 번째 경고의 말씀에는 그리스도와 신앙으로부터 떨어져나가게 하는 요인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제시해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도가 주님으로부터 어떻게 떨어져나가는지를 정확히 말해주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히브리서 10장에 관하여 관심을 갖지 않을 수가 없다.
3. 사람이 진리의 온전한 지식을 받은 후에 고의로 죄를 범하면 어떻게 되는가?
그렇다면, 사람이 진리의 온전한 지식을 받은 후에 고의로 죄를 범하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히브리서 기자는 그것을 히10:26~27에서 3가지로 정의하고 있다. 첫째는 더이상 죄를 용서해줄 희생제물이 남아 있지 않다고 했다. 둘째는 오직 두려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만 남아 있다고 했다. 셋째는 대적자들을 삼켜버릴 맹령한 불만 있다고 하였다. 이는 결국 죄를 용서받지 못한 채 심판을 받고 불못에 던져진다는 뜻이다. 대체 사람이 자신이 지은 죄를 용서받지도 못한 채 심판대 앞으로 가서 불못에 떨어지게 하는 죄는 무엇인가? 그것은 한 마디로 "고의로 죄를 범하는 것이다."
4. 사람이 고의로 죄를 범한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히브리서기자는 다른 죄는 몰라도 "고의로 죄를 범하면 그 죄는 용서받지 못한 채 결국 지옥형벌을 면치 못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대체 "고의로 짓는 죄"가 무엇이길래 이러한 죄는 용서받지도 못하게 되어 멸망으로 이끌어가는 것인가? 그것은 헬라어원문을 보면 보다 더 정확하게 그 죄가 무슨 죄인지를 알 수 있다. "고의로 죄를 범한즉"이라는 문장은 헬라어로 "헤쿠시오스 가르 하마르타논톤"이다. 여기서 나오는 "가르"는 단어는 접속사로서 원인과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이다. 영어로는 "for 혹은 because of"라는 뜻인데, 우리말로는 "왜냐하면" 혹은 "이는~"이라고 번역할 수 있다.
그러므로 사실 히10:26절이하의 말씀은 앞에 나와있는 히10:23~25절까지 나온 권면의 말씀을 순종해야 하는 이유에 관한 말씀인 것이다. 히1:23~25의 말씀을 준행하지 않는다면 그는 결국 버림받아 불구덩이 속으로 들어갈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렇다면, "짐짓"으로 번역된 "헤쿠시오스"라는 부사는 대체 어떤 뜻인가? 그것은 영어로는 "willfully"(NIV,KJV) 혹은 "deliberately"(RSV)라는 단어로서, 그 뜻은 "고의로, 일부러, 의도적으로, 자진하여, 자발적으로"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사람이 죄를 지어도 고의로 죄를 짓게 되면 그 사람 중에 구원에서 탈락할 자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이미 거듭난 사람치고 죄와 타협하지도 않고서, 그것이 죄인지도 모른 채 죄를 지을 사람이 얼마나 되는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여 거듭날 때 우리 안에 들어오신 성령께서는 우리 속에서 무엇이 죄인지를 우리에게 가르쳐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세상의 모든 성도들 중에는 구원받을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고 봐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다음에 이 문장의 동사를 보아야 한다. 이 동사는 "하마르타노"라는 동사의 현재 분사 능동태의 형태인 그 뜻은 "계속해서 범죄하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고의로 계속해서 범죄하는 자는 결국 구원에서 탈락하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죄를 지어서 고의로 계속해서 죄를 짓는 것은 구원에서 탈락할 가능성이 많아질 것이다.
5. 고의로 짓는 죄들에는 어떤 죄가 있는가?
그렇다면, 성도가 고의를 죄를 지을 때에는 대체로 어떤 죄를 짓는 것을 가리키는가? 히브리서 기자는 구원을 탈락까지 시킬 죄목에 대해서 친절하게도 29절에서 3가지로 언급한다. 첫째,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은 죄가 있다. 둘째,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긴 죄가 있다. 그리고 셋째,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한 죄가 있다. 이 세 가지 죄가 바로 "고의로 죄를 범하는 것"에 해당한다. 특히 이러한 죄를 지속적으로 반복적으로 짓는 사람들 중에는 결국 회개하지 못한 채 지옥형벌을 당할 자가 있을 것이다.
그럼, 첫째로,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은 죄란 무엇"을 가리키는가? 그것은 그가 이전에 분명히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와 하나님의 영접하였지만 나중에는 "예수가 어딨어?"하면서 예수님을 부정할 때 생기는 죄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예수님을 부인하면 아니되는 것이다. 그런 것을 자꾸 반복하다보면 그의 죄를 위해 희생제물이 남아있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번째의 죄는 자신이 회개할 때 자신의 죄를 용서해줄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취급하는 것이다. 이는 예수님의 피를 부정하는 것이다. "내가 회개한다고 해서 예수의 피가 어떻게 내 죄를 씻어낼 수 있어? 그것은 불가능해"라고 하면서 예수님의 피를 부정하는 죄가 바로 두번째의 죄에 해당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번째의 죄는 "은혜의 성령을 모욕하는 죄"를 가리킨다. 이는 죄를 책망하여 죄를 회개케 하는 성령의 음성(요16:8)과 예수님이 누구시며 무슨 일을 하셨는지를 듣고 믿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요15:26,14:26)를 거역하는 죄를 가리킨다(마12:31~32). 예수께서도 공생애기간에 성령모욕죄(성령훼방죄)에 대하여 언급하신 적이 있으셨다. 그때에도 말씀하시기를, 예수님에 대한 훼방이나 말은 용서받을 수 있으나, 성령을 훼방하고 말로 성령을 거역했을 때에 이 세상(시대)와 오는 세상(시대)에서도 용서받지 못한다고 하셨다. 그러므로 성도는 죄를 책망하시는 성령을 거역해서 죄를 지어서는 아니 된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지 않으려고 귀를 막고 성령의 음성을 거역하면 그는 구원받을 수가 없는 것이다.
6. 히브리서 기자는 무엇 때문에 히브리서 수신자에게 이 편지를 써 보냈는가?
그렇다면 왜 히브리서 기자는 히브리서의 수신자들에게 고의로 짓는 죄를 범하지 않도록 경고하고 또 경고하는 것인가? 그것은 지금 히브리서의 수신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부인하고 있고, 회개를 통한 예수님의 속죄를 부정하고 있으며, 회개케 하시고 믿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훼방하고 있었거나 그렇게 하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이상 그들로 하여금 이러한 죄를 범하여 구원에서 탈락하는 일이 없도록 권면하기 위해 이 편지를 쓰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당시 히브리서 수신자의 성도들은 어떤 상태에 놓여있었던 것일까? 그것은 그들이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놓여 있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 때문에 따돌림을 당하고 있었고(히10:33), 불이익을 당하되 감옥에 갇히기도 하였으며(히10:34a), 재산을 몰수당하기도 하였고(히10:34b), 때로는 심한 채찍질과 칼에 죽임을 당하는 일까지도 있었던 것이다(히11:36~37). 아마도 추측컨데 이 편지가 쓰여질 때에는 로마의 도미시안 황제에 의한 핍박의 상황이 있지 않았었나 싶다. 그런데 이들은 이미 그러한 것들을 경험했던 전례가 있었다. 그것은 아마도 네로황제 때의 핍박이었던 것 같다(히10:32). 그러므로 히브리서 기자는 또다시 만나게 된 고난과 핍박의 상황에서 성도가 뒤로 물러나거나 믿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권면해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 편지를 써서 히브리서 수신자들에게 써 보냈던 것이다.
7. 히브리서 기자는 성도가 구원에서 떨어져나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무엇하기를 권면하였는가?
그렇다면, 히브리서 기자는 성도가 구원에서 탈락하지 않도록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한다고 권면하였는가? 그것은 3가지였다(23~25절). 만약 이 세 가지 사항에 주의하지 않느다면, 성도라도 핍박과 고난의 상황에서 그만 구원으로부터 떨어져나갈 수 있다고 언급한 것이다. 그럼, 그들이 그리스도로부터 따로 떨어져나간 상태에서, 그리스도를 부정하고, 회개를 통한 속죄를 부정하며, 성령을 모욕하는 죄를 지을 수가 있다는 말인가? 그것은 이렇다. 첫째, 그들이 전에 가졌던 소망의 고백을 더욱 굳건히 붙들어야 한다고 하였다(히10:23). 그들은 사도들로부터 성도들이 무엇을 소망해야 하는지를 들었던 자들로부터 복음을 전해받았다. 그것은 하늘에 있는 것들에 대한 소망, 영원한 것들에 대한 소망, 영적인 것들에 대한 소망들이었다.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면 어떠한 죄를 지었더라도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는 소망, 예수님을 믿으면 비록 잘나지 못하고 많이 가지지 못했어도 천국의 백성이 될 수 있다는 소망, 이 땅에 살면서 내 시간과 물질을 복음을 전파하는 데에 쓰면 하늘에서 상을 잃지 않을 것이는 소망을 전해받은 것이다. 그런데 지금 핍박과 고난의 현장에서 그들은 그것들을 점차 잃어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둘째, 핍박과 고난의 상황일지라도 더욱더 성도들까지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라는 것이었다(히10:24). 고난도 혼자 감당하면 힘들다. 하지만 고난의 현장에 있는 자들을 돌아보고 격려해주고 중보기도해주면 외롭지 않으며 그 길을 잘 걸어갈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히브리서 수신자들은 감옥에 갇힌 자를 돌아보았다. 그것이 자신에게 어떤 위험을 초래한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렇게 한 것이다. 셋째, 어려운 때일수록 모이기를 폐하자는 사람들의 제안에 귀기울이지 말고 더욱 모이기에 힘쓰라는 것이었다(히10:25). 그렇다. 그때에 아마도 이렇게 제안하는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목사님, 지금은 폭풍우가 몰아치는 때입니다. 지금 대항하다가는 다 죽습니다. 이 풍랑이 잔잔해질 때까지 잠깐이지만 모임을 제한합니다. 지금은 모이지 말고 상황이 조금 안정되면 그때에 다시 모입시다." 얼핏 듣기에는 솔깃한 제안이 아닐 수 없다. 타당성도 보인다. 하지만 그것이 사람들의 영혼을 더 무장시켜주고 더 하늘의 소망을 바라보게 하고, 용기를 갖게 하는 것인가? 아니다. 그 반대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상황이 어렵다고 모임을 폐하자는 주장은 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 성도들은 서로의 격려를 위해서도 모이기를 힘써야 한다. 그리고 더욱더 서로가 서로를 격려하면서 하늘의 소망을 더욱 굳건히 붙들어야 한다.
8. 나오며
그렇다면 히브리서기자는 히브리서의 수신자로 하여금 그들이 만난 갖은 어려운 상황에서, 과연 그들이 신앙의 지조를 지키며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오직 소망의 고백을 붙잡고 갈 때에 어떤 결과가 나타날 것이라고 했는가? 이때 히브리서 기자는 고난중에서도 끝까지 믿음을 지키는 자가 결국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36절). 그리고 하늘에 더 좋은 영구한 소유를 받게 될 것이라고 했다(34절). 그리고 큰 상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했다(35절). 그렇다. 성도들은 어렵다고 힘들다고 뒤로 물러날 자들이 아니다. 오히려 자신의 영혼이 천국에 들어갈 때까지 자신의 믿음을 더욱 견고하게 해야 할 것이다. 서로 격려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모이기를 더욱 더 힘써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한 번 두 번 그리스도에게 벗어나게 될 것이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는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떨어져나갈 것이다. 그러므로 한 번이 중요하다. 한 번을 용납하지 말라. 그리고 신앙의 지조를 지키라. 그런 자들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고 말씀하셨다(히10:38). 왜냐하면 주님께서 속히 곧 오실 것이기 때문이다(히10:37). 구속의 때가 더 가까이 왔기 때문이다(히10:37). 우리 성도들은 고통이 오는 것은 비록 잠시잠깐 뿐이겠지만 영광은 영원히 함께 할 것이라는 격려의 말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
2020년 04월 05일(주일)
정병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