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위일체에 관한 구약적인 증거
김정우/총신대 교수
이 글에서 필자의 중심 관심은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구약적 발판을 새롭게 형성해보는 데 있다. 이 새로운 발판을 세우기 위해 전통적으로 조직신학에서 사용된 논거들과 증빙자료 구절(proof text)들을 구약신학적 관점에서 보고자 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전통적인 교의신학에서 삼위일체 교리를 지지해준다고 주장하는 중요한 구약 성경 구절을 주석하여 이 구절들이 갖는 원래의 의미를 드러냄으로써 후대의 의미와 구별해보고 원래의 의미에 근거하여 후대의 의미와 새롭게 연결하는 작업을 하고자 한다.
필자의 또 다른 관심은 신약시대에 몸으로 찾아오신 성자와 성자가 보낸 성령이 구약성경에서 어떻게 나타났는지 찾아보는 데 있다. 즉 신약시대에 찾아오신 성자는 구약시대에는 어떻게 계시되었는가, 또한 오순절에 강림하신 성령은 구약시대에는 어떤 일을 하셨으며, 어떻게 계시되었는가 등의 물음에 답하는 것이다.
필자는 계시의 유기성을 전제하므로 이미 구약 속에 성자와 성령의 사역과 인격이 그림자나 씨앗의 형태로 있었음을 가정하고 그들이 구약에서 어떻게 계시되었는지 살피고자 한다. 무엇보다 신약의 성자와 성령이 구약에서도 독자적인 인격성을 가지면서 신적인 통일성을 가진 존재로 나타나는지 살피고자 한다.
루이스 벌코프는 삼위일체 교리의 성경적 증거 가운데 구약의 증거를 크게 세 가지로 제시한다. 첫째, 하나님은 자신을 복수형으로 말씀하셨다(창1:26; 11:7). 둘째, 여호와의 사자는 신적 인격(위)으로 묘사되었다(창16:7-13; 18:1-21; 19:1-22). 셋째, 영은 확실한 인격으로 불리워졌다(사48:16; 63:10).
그러나 찰스 핫지는 훨씬 더 조심스럽다(Ch. Hodge 446). "삼위일체와 같은 교리는 성경구절을 인용한다고 증명되는 것은 아니다. 그 구성요소들은 이곳저곳에서 드러날 뿐이다." 핫지는 이렇게 조심스럽게 접근하면서도 그가 제시하는 '구성요소'는 벌코프와 별다른 차이가 없다. 따라서 필자는 벌코프가 제시하는 세 가지 논점을 살필 뿐 아니라 그가 빠뜨리고 있는 잠언 8장의 하나님의 지혜를 추가하여 다루고자 한다. 따라서 필자는 복수형 말씀과 삼위일체, 하나님의 지혜와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자와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과 삼위일체의 관점에서 구약이 열어주는 삼위일체 교리의 가능성 등을 생각하고자 한다.
I . 복수형 말씀과 삼위일체
거의 대부분의 전통적 조직 신학자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복수형으로 말씀하셨다"는 점을 구약의 삼위일체에 대한 가장 일차적인 근거로 제시한다. 이와 연관된 가장 중요한 구절이 창세기 1장 26∼27절이다. 이와 함께 하나님께서 "우리가"라고 말씀하신 본문인 창세기 3장 22절과 11장 1절도 구약의 삼위일체를 지지하는 본문으로 함께 인용되고 있다. 이세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우리"가 누구인가에 있다. 학자들은 다섯 가지 가능성을 제시한다.
1. 신화의 파편
게블러(Gabler 1795, Hasel 59쪽에서 인용됨)로부터 시작하여 대부분의 현대 비평학자들은 이 창세기의 본문이 신화의 파편을 담고 있다고 생각한다. 즉 고대 근동아시아의 창조신화에서 '신들' 이 서로 상의하여 인간을 창조하는 사상이 '우리' 라는 복수형으로 아직도 창세기의 본문 속에 남아 있다는 주장이다. 에누마 엘리쉬에는 마르둑이 에아와 상의하고. 아트라하시스 서사시에는 여러 신들이 상의한 뒤 인간을 만든다. 궁켈은 이 복수형이 P기자가 이전에 있었던 다신론적 기사를 가져왔다는 사실을 반영해준다고 한다(1901:101). 그러나 문서가설의 정당성을 제쳐놓고서라도 창세기 1장은 고대 근동아시아의 다신론을 비판하며 그 신화적인 사고방식에 대해 철저하게 논쟁하고 있으므로 다신론의 흔적이 남아 있다고 말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
2. 위엄의 복수형(Plural of Maiesty)
카일(Keil)과 드라이버(Driver)는 '우리' 를 위엄(혹은 장엄)의 복수형으로 본다. 이것은 "신성 안에 있는 속성과 능력의 충만함"이다(Driver 1904:14). 히브리어와 셈어에서는 단수개념이 복수형으로 강화된다. 예로서 하나님을 뜻하는 히브리어 엘로힘(Elohim)은 수적인 복수가 아니라 높고 강하고 존귀한 하나님을 뜻한다. 데라빔(teraphim)도 하나의 신상이지만 복수형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위엄의 복수형은 명사에만 나타나고 대명사에는 그렇지 않으므로 이 입장은 문법적으로 정당하지 않다(P.Joueon 1923:309).더구나 "만들자(asa)"라는 동사는 한 번도 위엄의 복수형으로 사용된 적이 없다.
3. 의사표현형 복수형(Plural of Self-deliberation)
게세니우스-카우칠(#124f, n.3)와 쥬옹(Joueon #ll4e), 브로켈만(24,14a)은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는 복수형으로 보며, 카수토(55)는 스스로 격려하는 형식(self-encouragement)으로 본다. 최근에는 베스터만과 몇몇 학자들이 지지한다
이 입장은 문법적으로 가능하다. 문법학자들은 이사야 6장 8절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와 사무엘하24장 14절의 "여호와께서는 긍휼이 크시니 우리가 여호와의 손에 빠지고 내가 사람의 손에 빠지지 않기를 원하노라"에서 실마리를 찾는다. 이 두 본문에 따르면, '나'와 '우리'가 평행을 이룬다. 창세기 11장 7절도 중요한 근거로 사용된다. 사실 창세기 11장 7절은 의사표현형 복수형으로 보기에 아주 적절하다. 그러나 문법적으로 이런 용법은 지극히 희소하며 문맥을 볼 때 의사표현형 복수형은 창세기 3장22절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다"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이사야 6장 8절도 마찬가지다.
4. 신성의 복수형(Plural of Fullness)
(1) 바나바 서신과 저스틴 마터(Justin Martyr)는 여기의 복수형을 그리스도에 대한 언급으로 보았으며 전통적 교회는 초대교회로부터 삼위일체를 예시하는 것으로 보아왔다. 이레니우스는 성자와 성령이 복수형 속에 있다고 보았고 터툴리안은 성육한 말씀, 즉 그리스도가 포함되었다고 보았다(Hasel 1975:58). 구약신학자 페인(1978: 167)은 여기에서 "삼위일체적 해석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설명도 적절하지 않은 것으로 거부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그 근거로 인간은 오직 하나님의 형상으로만 만들어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본문 속에 "삼위일체가 내포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2)클라인스는 하젤을 이어, '우리' 를 신성 안의 복수형(plurality within the Godhead)으로 해석한다. 창세기 1장의 전체적인 맥락을 보면 이미 창세기 1장 2절에 '하나님의 신' 에 대한 언급이 있기 때문에 이 해석은 가능하게 보인다. 구약성경에서 성령은 창조의 수단으로 나타난다(욥 33:4;시104:30;겔37). 또한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의 창조명령("있으라")을 신적 인격으로 본다면 여기에서 삼위일체로 볼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다. 그러나 신성의 복수형으로 보는 이 해석은 창세기의 자연스런 문맥에 적합하지 않다. 특히 왜 창세기 3장 22절과 11장 7절에 삼위일체가 나와야 하는가?
5. 천상의 총회
필로로부터 유대인 랍비들(Bereshith Rabba viii 3-7)과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이 복수형은 하나님께서 천상의 총회, 즉 '천사들' 에게 말씀하신 것으로 해석해 왔다. 즉 하나님은 천상의 총회에 있는 여러 천사들을 향하여 "우리가…"라고 말씀하셨다. 최근에도 이런 해석을 주장하는 학자들이 많이 있다(폰 라드, 침멀리, 베스터만 144에서 인용됨). 그러나 이 해석에 대해 카수토는 세 가지 관점에서 비판하고 있다(1961: 55). 즉 이 해석은 첫째로 창세기 1장에서 오직 하나님만이 온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중심 사상과 상치되는 것으로 보이며, 둘째로 "우리가 만들자"는 표현은 천사들과 상의하는 말투가 아니다. 또한 셋째로 만약 하나님께서 상의하는 투로 말씀하셨다면 하나님께서 누구와 상의하셨는지 더 구체적으로 시사했을 것이다(왕상 22:19;사 6:1-8; 욥 1-2장). 카수토의 비판이 상당한 설득력을 갖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의 여러 해석 가운데 천상의 총회를 기리킨다고 보는 해석이 아래에 제시된 네 가지 논거에 근거하여 구약 자체의 맥락에 가장 잘 어울린다고 본다.
첫째, 천상의 신의 총회 개념은 고대 근동아시아에 널리 나타나고 있다. 뮬렌(1980:113)은 이 개념이 "애굽, 메소포타미아, 가나안, 페니시아, 이스라엘 문화에서 아주 일반적인 종교적 모티프였다"고 말한다. 그는 신의 총회에 대한 개념뿐 아니라, 그 용어조차 서로 유사함을 발견하였다. 특히 바벨론의 창조신화에 따르면 인간창조에 대한 결정은 신들의 총회에서 질문과 응답형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Enuma Elish 토판 VI, 5-8, ANET 68). 둘째, 구약성경 안에는 천상의 총회에 대한 언급이 여러 곳에 나타나고 있다 (왕상22:19;욥1:6이하 2:1이하 38:7). 물론 구약의 천상총회 개념은 고대 근동아시아의 천상총회 개념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이스라엘에서의 천상총회 개념은 유일신앙의 틀 속에서 나온다. 여기에 등장하는 천상의 존재들은 결코 독립적으로 자존하는 신들이 아니며, 이들은 "야웨의 뜻에 복종하는 천상의 영물들에 불과하다"(Miller1973:70). 구약에서는 '하늘과 구름'과 같은 비유법과 '거룩한 자들, 신의 아들들, 그(하나님)를 둘러싼 자들, 야웨의 군대'와 같은 용어로 천상의 총회 개념을 제시하고 있다(필자의 논문 1992:104를 보라).
셋째, 이사야 6장8절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는 창세기 1장26절과 상당히 유사하며, 주님은 그룹과 스랍들이 있는 천상의 총회에서 이 말씀을 하시고 있다.
넷째, 창세기 1장 26절에서 '우리' 가 천상의 총회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할 때, 어떻게 27절에서 오직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설명할 수 있는가에 있다. 그렇다면 천사들도 인간창조에 개입하였는가? 나아가 인간은 하나님과 천사들의 형상대로 만들어졌는가? 그러나 본문 창세기 1장26-27절을 자세히 보면, 하나님의 선언과 하나님의 창조행위는 구별되어야 함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천상의 총회에서 "우리가 만들자…"라고 말씀하셨지만, 인간은 오직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졌다. 이것은 창세기 11장 7절에서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천상의 총회에서 "자, 우리가 내려가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여 그들로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지만, 바로 이어 8절에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다"고 말한다. 이사야 6장 8절과 9절에서도 같은 경우를 발견한다.
즉 창세기 1장 27절은 오직 하나님만이 인간을 창조했음을 명백하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천상의 총회에 있는 천군천사들을 향하여 인간창조가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선언한 것이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천상의 총회를 향하여 이런 말씀을 하실 필요가 있었는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닮은 인간을 만드실 때 그들의 경배를 받기 원하셨기 때문이다. 욥기 38장 4절과 7절이 이 사실을 지지해준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찌니라‥‥그 때에 새벽별(kokbey boqer)들이 함께 노래하며 하나님의 아들들(beney 'elohim)이 다 기쁘게 소리하였느니라". 여기서 천군천사들이 "노래하며(ranan)", "기쁜 소리를 낸(rua)" 것은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요 경배였다.
6. 정리
창세기 1장 26절의 '우리' 라는 복수형은 하나님과 천상의 총회를 포함한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천사들의 형상으로 만들어졌다는 뜻은 아니다. 창세기 1장 27절은 명백하게 인간이 오직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음을 한정해준다. 따라서 "우리가 만들자'는 천상의 총회에 대한 하나님의 선언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인간을 만드시고 천군천사들의 경배를 받기 위하여 그들로 하여금 인간창조를 주목하게 하신다. 본문에서 '우리'라는 복수형이 천상의 총회를 향한 하나님의 선언을 가리킨다고 해서 삼위의 제 2위시요 말씀이신 그리스도가 여기에서 배제되었다고 말할 필요는 없다. 물론 그는 아직 명백하게 드러나 있지는 않다. 그러나 신약의 저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와 함께 천지 창조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였다고 말한다. 이것은 창세기의 본문이 가지고 있는 더 '충만한 뜻(Sensusplenior)'이기 때문이다. 구약의 본문은 구약의 저자들이 말하는 것보다 더 깊은 뜻을 담고 있다. 창세기 1장에서 다 표현되지 않은 하나님의 계시는 구속역사의 흐름 속에서 다른 본문을 통해 더 온전히 나타나기 때문이다. 창조에 있어서 성자의 역할은 바로 다음에 다루는 하나님의 지혜와 삼위일체에서 보다 명백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