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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주의 무천년설 옹호 

35,000원( 할인 31,500원)

샘 스톰스 지음 | 윤석인 옮김 | 출간일: 20160120 | ISBN: 978-89-6092-414-7 | 신국판 | 744쪽 

 

개혁주의 무천년설 옹호(Kingdom Come)


 

[책 소개]

『개혁주의 무천년설 옹호』는 세대주의 전천년설 외의 종말론은 복음적이지 않은 것으로 여기는 신학적 배경에서 자란 샘 스톰스가 수십 년 간의 연구를 통해 성경이 무천년설을 지지한다는 변화된 확신으로 쓴 책이다. 스톰스는 이 책을 통해 오랜 기간 동안 강의실과 교회에서 가르치며 정립해 온 사상을 분석적 논증을 통해 잘 드러낸다. 스톰스는 일차적으로 주의를 기울이는 대상인 전천년적 세대주의를 튼튼한 신학적 기반과 세심한 주석을 통해 관대한 태도로 비판한다. 또한 자기 견해를 변호하기 위해 주석적 논증과 신학적 논증을 펼치며, 종말을 다루는 관련 성경 구절들을 광범위하고 심도 있게 검토하여 예증으로 제시한다.
이 책은 종말론에 대해서, 성경의 특정 부분(요한계시록 20장)에 대한 해석에 지나치게 의존하여 성경의 나머지 부분을 해석하는 방법론을 거부하고, 오히려 종말론에 대한 성경의 대다수 부분을 해석적 렌즈로 삼아 특정 부분을 이해하여 성경 해석에 있어서의 객관성을 유지한다. 특히 다니엘 9장에 기록된 일흔 이레에 대한 연구와 현대 이스라엘 국가에 대한 논의는 우리에게 통찰력과 분별력을 제공한다.

 

[미리보기]

 

[추천의 글]
스톰스가 쓴 이 책은 크게 주목할 만한 작품으로서, 향후 몇 년 동안 무천년설 입장의 수호자로 자리매김할 것이 확실하다. 스톰스는 전천년설 견해들, 특히 세대주의 전천년설을 관대한 태도로 비판하는 데 남달리 뛰어난 재능이 있다. 스톰스는 후천년설이나 예언 성취론과 서로 의견을 나누는 방식에서도 이지적이고 통찰력 있는 면모를 보인다. 이 책은 내가 앞으로도 개인적인 연구나 목회 사역에서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다시 살피고 싶은 작품이다. 스톰스는 이해하기 쉽고 삶과 연결되는 온정적인 학식으로 교회를 섬기는 본보기를 우리에게 제공한다.
- 케빈 드영, 유니버시티 개혁교회 담임목사

 

과거에는 그리스도인들이 지나치리만큼 강박적으로 말세에 집착하는 과오를 범했다면, 오늘날 복음주의자들은 말세에 너무 무신경한 정반대의 문제와 마주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샘 스톰스가 쓴 이 책은 우리에게 꼭 필요하다고 할 수 있는데, 그 안에는 목회자의 심령과 경건한 경배를 바탕으로 하는 충실한 신학과 세심한 주석이 담겨 있다. 여러분은 이 책을 읽으면서 스톰스 박사가 종말을 주제로 강의실과 교회에서 수십 년간 가르치며 정립해 온 원숙한 사상을 발견할 것이다. 이 책은 우리가 갖고 있는 신념과 상관없이 우리 모두를 도전하고 격려한다. 나는 이 책이 내게 유익했던 것처럼 다른 사람에게도 유익하기를 기도한다.
- 저스틴 테일러, 『하나님 중심적 세계관』 의 공동편집자

 

복음주의자들은 종말론과 관련해서 지금까지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는데, 이 불일치는 종말까지 이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전천년설이 거의 정통 신앙이나 다름없다. 샘 스톰스는 무천년설을 단호하게 변호하면서 그런 전제에 도전장을 던진다. 스톰스는 폭넓은 영역과 분야를 다루는 이 작품에서 자기 견해를 변호하기 위해 주석적 논증과 신학적 논증을 펼친다. 스톰스의 논증을여전히 납득하지 못하는 사람도 이 책에서 무천년설 해석을 뒷받침하기 위해 제언하는 유력한 논거들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 책의 저자는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는 베뢰아 사람이 될 것을 우리에게 다시금 새롭게 요청한다.
- 토머스 슈라이너, 서던 뱁티스트 신학교 신약 해석학 교수

 

샘 스톰스가 쓴 『개혁주의 무천년설 옹호』는 무천년설 관점이 요한계시록을 포함하여 종말론을 이해하는 데 실행 가능한 관점임을 밝히 보이는 가치 있는 작품이다. 여러분은 종말론 주제와 관련해서 스톰스가 말하는 모든 내용에 꼭 동감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책의 전체 요지는 무천년설을 지지하는 분석적인 논증이다. 스톰스가 대화하는 상대는 전천년설 해석자인데, 스톰스는 전천년설 해석자가 스스로의 견해를 뒷받침하기 위한 설득력 있는 논거를 제시하는 데 미흡함을 발견한다. 내 생각에는 스톰스가 요한계시록 20장 1~10절에 기록된 천년왕국에 대한 구절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대단히 매력적인 방식을 제공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또한 자신의 견해를 뒷받침하기 위해 성경 전반에 걸쳐 다른 많은 구절들을 통찰력 있게 검토하고 예증으로 제시하기도 한다. 스톰스는 요한계시록 20장에 대한 어느 특정 해석이 아니라 성경의 나머지 부분(예를 들어, 바울이 쓴 편지들)이 종말론을 위한 주된 해석적 렌즈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해석 방법론을 상정하는데, 성경의 다른 곳에 나타나는 종말론을 이해하고자 할 때 요한계시록 20장에 대한 특정 해석에 완전히 의존하는 사람이 지나치게 많은 현실을 감안하면 스톰스가 제안하는 해석법은 확실히 옳은 것이다. 논의들 가운데서 다니엘 9장에 기록된 일흔 이레에 대한 스톰스의 연구는 내게 특별히 유익했다. 스톰스가 제안하는 무천년설 입장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도 이 책에서 분명히 유익을 얻을 것이다.
- 그레고리 빌, 필라델피아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신약학 교수

 

샘 스톰스가 쓴 『개혁주의 무천년설 옹호』는 개혁주의 관점에서 놀라우리만큼 포괄적이고 유익한 정보를 제공하는 종말론 연구서다. 스톰스는 무천년설의 입장을 설득력 있게 논증하는 동시에, 대안으로 선택할 수 있는 다른 견해들에 대해서도 관대한 태도로 명료하게 파악할 수 있는 정보를 제공한다. 이 책에 실린 주제들을 하나하나 살피는 과정에서, 나는 스톰스가 어려운 자료를 분별 있게 다루고 알기 쉽게 가르치는 모습에 경탄했다. 『개혁주의 무천년설 옹호』는 종말론을 연구하는 사람에게 특별히 유용한데, 이 책을 소장하지 않고서는 개혁주의 장서를 결코 완비했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 리처드 필립스, 제2장로교회 담임목사

 

샘 스톰스가 쓴 『개혁주의 무천년설 옹호』는 W. J. 그리어가 쓴 『중대한 사건』(The Momentous Event) 이후로 내가 읽어 본 다양한 천년설 관련 서적 가운데서 가장 크게 도움이 된 작품이다. 스톰스의 작품은 관련 본문에 대한 세심한 주석을 특징으로 하며, 종말을 다루는 모든 관련 성구들을 광범하면서도 심도 있게 망라한다. 특정 주제를 다루는 책들 가운데서 그 연구 범위가 완전한 경우는 결코 없지만, 이 작품은 그런 완전함에 근접한다! 스톰스의 작품은 명쾌하면서도 공정하다. 스톰스가 특정 관점(무천년설)으로 연구를 진행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자신이 비판하는 견해들도 잘못 전달하지 않도록 세심하게 주의하며 작품 전반에서 관대한 태도를 유지한다. 스톰스는 천년왕국과 관련된 세 가지 주요 견해를 상세히 조사하는데(내 생각에는 치우침 없이 그렇게 하는 것으로 보인다), 스톰스가 크게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아마도 전천년적 세대주의일 것이다(미국 복음주의 진영에서는 세대주의가 대단히 우세하다). 스톰스는 관련된 대다수의 성경 본문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경우에 전천년적 세대주의(예를 들자면, 천년기 전 휴거에 대한 믿음)를 고수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한 이유를 밝히기 위해 많은 구절을 열거한다. 나는 참으로 스톰스가 성경의 가르침 앞에서 겸손하며, 기록된 말씀을 있는 그대로 가감 없이 받아들이는 분명한 가르침을 바란다고 생각한다. 다니엘 9장에 기록된 일흔 이레에 대한 스톰스의 해석은 명료한 주경 신학의 본보기인데, 오늘날 '대체 신학'으로 불리는 견해에 대한 스톰스의 이해도 마찬가지로 그런 본보기다. 나는 현대 이스라엘 국가에 대한 스톰스의 논의가 분별 있고 유익하다고 생각한다. 스톰스가 종말과 관련해서 말하는 모든 내용에 꼭 동의할 필요는 없지만, 이 탁월한 작품을 진심으로 추천하는 바다. 나는 내가 가르치는 수업에서 이 책을 활용할 생각인데, 종말론을 가르치는 다음 기회가 오기 전에 이 책이 출간되어 시중에서 구입할 수 있다면 크게 기쁠 것이다.
- 더글러스 켈리, 리폼드 신학교 조직신학 교수

 


 

[지은이] 샘 스톰스
오클라호마 주 오클라호마 시티에 소재한 브리지웨이 교회의 담임목사이자 엔조잉 갓 선교회 회장이다(www.samstorms.com). 스톰스는 22권의 책을 저술하거나 편집했고 수많은 잡지와 신문에 글과 서평을 기고했다. 스톰스는 오클라호마 대학교(B. A.), 댈러스 신학교(Th. M.), 텍사스 대학교(Ph. D.)에서 공부했다. 스톰스와 그의 아내 앤은 결혼한 지 41년째인 부부이며 장성한 두 딸을 둔 부모이자 네 손자가 있는 조부모다.

 

[옮긴이] 윤석인
고려대학교 영문학과와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트리니티 복음주의 신학교에서 케빈 밴후저 교수의 지도로 조직신학 석사 학위 ( Th. M.) 를 받았다. 개혁신학과 청교도신학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폭넓게 조직신학을 공부하고 있으며, 부흥과개혁사의 전문 번역위원으로 섬기고 있다. 번역서로는 『은혜의 복음이란 무엇인가』, 『사도신경의 렌즈를 통해서 보는 기독교 핵심』, 『십계명의 렌즈를 통해서 보는 삶의 목적과 의미』, 『거룩하신 하나님』, 『윤리실종』, 『위대하신 그리스도』, 『문화신학』 ( 이상 부흥과개혁사 )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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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목차

추천의 글
저자 소개

서론•
1장 종말론과 해석학 : 예언을 해석하기 위한 다섯 가지 기초 원리
2장 세대주의에 대한 정의•
3장 다니엘 9장에 기록된 일흔 이레와 세대주의를 위한 구약 성경적 기초•
4장 다니엘이 성경의 종말론에 기여한 점•
5장 전천년설과 관련된 문제점•
6장 하나님의 백성은 누구인가? 이스라엘, 교회, 그리고 "대체" 신학•
7장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종말 : 마태복음 24장과 감람산 강론 ( 1 )•
8장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종말 : 마태복음 24장과 감람산 강론 ( 2 )•
9장 사도행전과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약속•
10장 로마서 11장과 이스라엘의 "미래"•
11장 하나님의 나라 : 지금과 아직•
12장 하나님 나라에 대한 후천년설의 견해•
13장 요한계시록과 성경의 종말론 : 인, 나팔, 대접 심판의 연대기•
14장 무천년설, 요한계시록 20장, 그리고 사탄의 결박•
15장 무천년설, 요한계시록 20장, 그리고 첫째 부활•
16장 성경의 종말론과 적그리스도 : 요한계시록 13장과 17장에 대한 연구•
17장 성경의 종말론과 적그리스도 : 데살로니가후서 2장에 대한 연구•
결론 : 무천년설을 지지하는 누적적 사례 논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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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 스톰스의 '개혁주의 무천년설 옹호'에서 발췌(74-83p)

 

지금부터 몇 페이지만 넘어가면 이 책에서는 소위 "휴거 논쟁"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을 것이다. 그 문제가 큰 인기를 끌고 있고 흔히 말하는 "대환난"(Great Tribulation)이 시작되기 전에 모든 신자가 옮겨진다는 발상에 감정적으로 크게 집착하는 그리스도인이 대단히 많은 현실을 감안하면, 내가 휴거 논쟁에 치중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많은 독자에게 실망감을 안겨 줄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많은 사람의 기대와 달리 그 논쟁에 치중하지 않는 것이 어째서 정당한지를 설명해야 할 필요를 느낀다.

여러분이 앞으로 몇 장을 읽어 가는 과정에서 명백해지겠지만, 내가 이처럼 논란이 많은 주제를 깊이 파헤치지 않기로 결심한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예수님의 재림이 이루어지기 직전의 7년 기간, 곧 "대환난"으로 널리 일컬어지는 기간의 개념 자체는 주로 다니엘 9장에 대한 세대주의 해석에 의존한다. 다음 장(3장)에서 나는 소위 다니엘의 "일흔 이레 예언"을 그렇게 해석하는 태도가 완전히 부당함을 밝힐 것이다. 그래서 나는 "휴거"의 때를 역사의 특정 시기와 결부시키는 작업과 관련된 논쟁을 조사하는 일이 가치 있다고 느끼지 못하는데, 내가 이해한 바로는 성경 어디서도 휴거에 대한 존재 자체를 가르치지 않는다.

"휴거", 곧 살아 있는 모든 성도가 부활해서 물리적.공간적으로 "끌어올려져" 공중에서 예수님과 만나는 시간상의 한 순간이 과연 존재할까? 그렇다. 하지만 이 사건은 '파루시아', 곧 예수님의 재림 자체와 동시에 일어나며 분리될 수 없다. 7년 대환난이 아직 발생하지 않은 미래의 시기인 상황에서 "휴거"가 "대환난"의 이전, 사이, 또는 이후에 발생할지의 여부를 왈가왈부하는 것이 불필요한 시간 낭비로 보이는 것은 당연하다.

 

둘째, 살아 있는 성도가 소위 이 7년의 기간 전에(따라서 환난 전에) 들림 받는다는 개념은 또한 이스라엘과 교회의 구별 이스라엘과 교회를 위해 하나님이 정하신 별개의 계획들에 크게 의존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여러분이 이 책의 6장을 읽는 순간에 발견하겠지만, 나는 성경이 그런 구별을 정당화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따라서 거듭 지적하지만, 하나님께 별개의 두 언약의 권위 아래서 일하신다는 개념을 배제할 경우에 의미가 거의 없는 논쟁에 끼어드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며, 그런 개념은 참으로 사람들을 크게 오해하게 만드는 것이다.

 

셋째, 7장과 8장에서 명확히 밝힐 것처럼 예수님이 마태복음 24장에서 언급하시는 이른바 "대환난"은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미래의 가능성이 아니라 과거 역사에 속하는 기정사실이다. 대환난은 주후 66-70년에 예루살렘 성이 로마군에 의해 포위 공격당한 사건을 우리 주님이 묘사하시는 방식인데, 이 포위 공격의 결과로 예루살렘 성과 성전은 모두 파괴되었다.

 

넷째, 미래에 대환난이 7년 동안 발생하리라는 주장과 그와 연관해서 휴거가 일어날 시기에 대한 논쟁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는 근거의 많은 부분은 하나님이 역사의 종말과 예수님의 강림에 앞서(아니면 어떻게든 예수님의 강림과 동시에) 유대 민족 대다수를 구원하기로 뜻하신다는 신념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러나 내가 이 책의 10장에서 로마서 11장을 다루면서 주장하는 것 같이, 유대인 가운데 선택받은 자들의 구원은 이방인 가운데 선택받은 자들이 하나님께 구원받은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지도록 정해졌으며 지금도 그렇게 이루어지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 텐데, 그것은 곧 현재의 교회 시대라는 수단을 통해서다. 바로 이런 방식으로 "이방인의 충만한 수"와 이스라엘의 "충만한 수"가 최종적으로 들어올 것이다.

 

다섯째, 교회가 환난 전에 들림 받는다는 교리는 요한계시록을 엄정한 미래주의 관점으로 해석하는 태도에 크게 의존한다. 다시 말해, 환난 전 휴거 교리는 사도 요한이 요한계시록 6-18장에서 묘사하는 내용이 비록 전부는 아니더라도 대부분 미래에 일어날 사건들이라는 가정 아래서만 의미가 닿는다. 환난 전 휴거론자는 사도 요한이 묘사하는 인, 나팔, 대접 심판이 전적으로 7년 환난기로 불리는 기간 안에 발생하는 일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한다. 나는 이 책의 13장에서 인. 나팔. 대접 심판의 본질과 차례, 그리고 그런 심판이 발생하는 연대기적 구조를 이해하는 데 더욱 설득력 있다고 생각되는 방식을 제언할 것이다.

 

여섯째, 환난 전 휴거라는 개념을 위한 또 하나의 근거로 주장되는 것은 데살로니가후서 2장에 나타나는 "막는 자"가 성령을 가리킨다는 생각이다. 세대주의적 환난 전 휴거론자가 제기하는 논증에 따르면, 만일 적그리스도의 출현 이전이나 적그리스도가 군림하는 7년의 기간이 시작되기 전에 성령이 옮기거나 떠나시면 교회 자체도 당연히 이 세상의 현재 위치에서 옮겨지거나 떠날 것이 분명한데, 이 모든 일은 휴거를 통해 이루어진다. 여기서는 여러분에게 이 책의 16, 17장을 읽도록 권유하는 것으로도 충분한데 거기서 나는 바울이 데살로니가후서 2장에서 염두에 두는 점에 대해 보다 설득력 있는 견해를 제언할 뿐 아니라, 사도 요한이 자신이 쓴 편지들과 요한계시록에서 이른바 "적그리스도"나 짐승에 대해 말하면서 어떤 개별 인물을 염두에 두는지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질문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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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휴거 논쟁에 치중하지 않는 이유를 모두 밝혔기 때문에, 지금부터는 휴거의 시기라는 주제와 관련해서 흔히 가장 중요한 신약 성경 구절로 여겨지는 본문을 잠시 다루고자 한다. 환난 전 휴거론자는 자신의 교리를 변호하기 위해 예수님이 고대 빌라델비아에 세워진 지역 교회를 상대로 하신 말씀을 종종 거론한다.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계 3:10-11).

환난 전 휴거론의 해석은 "시험의 때"가 미래에 극심한 박해가 이루어지는 7년 기간을 가리킨다는 것인데, 그 기간에 하나님의 심판이 땅 위에 쏟아진다. 교회에 주어진 약속은 하나님이 예수님을 믿는 모든 자들로 이때를 "면하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환난 전 휴거론자는 하나님이 이 일을 하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이 환난의 때가 시작되기 전에 교회를 지상에서 물리적으로 옮기시는 것이라고 말한다. 조금만 관찰하면 예수님(또는 사도 요한)이 이런 말씀을 선포하실/기록할 때 교회가 미래의 환난기 전에 들림 받는다는 어떤 개념도 염두에 두지 않았으리라고 내가 믿는 이유가 분명해질 것이다.

 

첫째, 어떤 그리스도인이 시련과 환난과 박해에서 특별한 보호를 보장받는다는 개념은 비성경적이다. 요한계시록 2-3장에 기록된 일곱 편지만 보더라도 우리는 예수님과 복음을 위해 당하는 고난이 모든 신자가 마땅히 받아들여야 할 것임을 거듭 볼 수 있다(계 2:2-3, 2:9-10, 2:13, 3:8-10). 바울이 당부하는 바에 따르면,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틀립시스', 계 1:9, 7:14에 사용된 것과 똑같은 단어]을 겪어야 할 것"(행 14:22)이다. 예수님도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틀립시스]을 당할 것"(요 16:33)임을 분명히 말씀하셨다. 그 대신 우리는 "환난[틀립시스] 중에도 즐거워해야" 한다(롬 5:3, 또한 요 15:19-20; 행 5:40-41; 고전 4:11-13; 고후 4:7-12, 11:24-25; 딤후 3:12를 보라).

 

둘째, 다가오는 시련이나 환난은 신자가 아닌 불신자에 대한 심판을 목적으로 의도된 것이다. "땅에 거하는 자들"(10절), 곧 "땅의 거주자들"은 요한계시록에서 언제나 교회에 대한 이교 박해자를 가리키는 상용구다(6:10, 8:13, 11:10, 12:12, 13:8, 12, 14, 14:6, 17:2, 8). 땅에 거하는 자들은 요한계시록에서 예수님의 초림에서 재림까지 이어지는 교회 시대 전체를 특징짓는 인, 나팔, 대접 심판을 당하는 자들이다.

 

셋째, 따라서 그 약속은 육체적 환난 가운데서 받게 될 영적 보호에 대한 것이다. 예수님은 신자가 비록 어떤 일을 당하더라도 믿음을 지키기에 충분한 양식을 제공하겠다고 자기 백성을 안심시키고 계신다. 여기서 그 약속은 우리가 요한계시록 7장 1-3, 13-14절에서 발견하는 것과 유사한데, 거기서 하나님의 백성은 "큰 환난[틀립시스]"에서 영적으로 해를 입지 않도록 "인침"을 받는다(14절. 참고. 계 11:1-2, 12:6, 14-17). 신자가 환난을 경험하고 환난에서 영적으로 벗어나는 것은 분명하다. 빌이 설명하듯이, "신자는 시련에서 옮겨짐으로써 시련으로부터 보호받는 것이 아니라 시련을 통해 그 믿음이 보전 되는데, 왜냐하면 신자는 하나님께 인침을 받았기 때문이다."

 

넷째, 환난 전 휴거론자는 이 땅에서 물리적으로 옮겨지는 것만이 하나님의 백성이 쏟아지는 신적 진노에서 영적으로 보호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주장하는 특징을 보인다. 그러나 요한복음 17장 15절에서 명확히 밝히듯이(또한 열 가지 재앙이 임했던 동안에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 있었던 사실에서도 분명히 나타나듯이) 이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이 요한복음 본문에서 우리는 신약 성경에서 "~에서 지키다/보전하다"(테레오 엑)라는 정확한 어구가 유일하게 사용되는 다른 구절을 발견한다. 거기서 예수님은 아버지께 다음과 같이 기도하신다.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이 본문에서 "~에서 지키다/보전하다"라는 어구는 물리적으로 옮겨진다는 개념과 사실상 대조된다는 사실에 유의하는 것이 중요하다. 예수님은 아버지께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도록"(즉, 그들을 물리적으로 옮기시도록) 기도하시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들의 영적 생명을 멸하려는 사탄의 활동에서 "그들을 보전하시도록" 기도하신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 3장 10절로 돌아와서, 우리는 예수님이 빌라델비아의 신자들을 "지키겠다"고 약속하시는 것이 바로 "이 땅의 거주자들"(불신자들) 위에 쏟아질 하나님의 진노에서임을 알게 된다. 사탄과 짐승과 불신자들의 적대와 억압 앞에서 이것은 참으로 영광스러운 약속이다.

 

연관된 또 다른 주장은 소위 이런 "대환난"이 하나님의 진노가 불신 세계 위에 쏟아지는 때로 예정되어서 그리스도인은 그때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이미 십자가에서 그들 대신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에, 필경 모든 신자는 하나님의 진노를 결코 겪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 주장은 환난 전 휴거를 사실로 상정하기 위한 설득력 있는 이유가 못 된다. 첫째로, 심지어 환난 전 휴거론자도 이 "대환난" 기간 중에(휴거 이후의 어느 때에 믿음을 갖게 된) 신자가 땅 위에 존재할 것임을 인정한다. 그러나 만일 그런 신자가 하나님의 진노를 겪지 않는다면, 그리고 그런 신자가 하나님의 진노를 겪지 않을 것이 확실하다면, 환난 전 휴거론자가 주장하듯이 휴거를 통해 땅에서 옮겨진 사람의 경우는 어째서 달라야 하는 것일까? 분명한 사실은 신자가 구속사의 어느 때에도 하나님의 진노를 결코 겪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환난"의 기간, 곧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는 때에 피로 사신 신자가 존재한다고 인정하는 경우, 환난 전 휴거론자는 무엇을 근거로 환난 기간 중에 피로 사신 신자로 구성된 교회가 존재하지 않으리라고 말하는 것일까? 우리는 요한계시록에서 하나님의 진노가 신자들 위에 결코 임하지 않고 악인들 위에만 임한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이것은 계 14:8, 10, 19, 15:1, 7, 16:1, 19, 18:3, 19:15에서처럼 "진노"를 표현하기 위해 '투모스'라는 단어가 사용되는 경우나 계 6:16, 17, 14:10, 16:19, 19:15에서처럼 '오르게'라는 단어가 사용되는 경우 모두 해당된다).

 

다섯째, 우리는 (안전한 곳으로 "들림 받는" 때가 아니라) 죽음에 직면해서도 계속 믿음을 지키는 바로 그때 가장 큰 승리를 얻는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참고, 계 2:10). 신자들은 "어린 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써" 사탄과 짐승을 이기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들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다(계 12:11, 강조는 필자의 것임).

그렇다면 "장차 온 세상에 임할 시험의 때"는 정확히 무엇이며 그 일은 언제 발생할까?

내가 확신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보호에 대한 약속은 주후 1세기 빌라델비아 지역에 세워진 교회의 신자들에게 현실적인 유익과 위안이 되었음이 분명하다. 그래서 세대주의자가 주장하는 것과 달리, 이 "시험의 때"는 이 세상 마지막에 나타나는 환난의 때(비록 그때를 포함할 수도 있겠지만)로 한정될 수 없다.

"시험의 때"를 엄정한 미래주의 관점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할 사람이 여러분 가운데 있다면, 예수님이 주후 1세기 소아시아의 한 교회를 상대로 그 교인들 가운데 아무도 결코 겪지 않을 사건, 참으로 흔히 말하듯이 적어도 이후 1,900년 동안 일어나지 않을 사건에서 보호받으리라고 약속하셨다는 것이 이상하게 들리지 않은지(굳이 말하자면 불가능하게 생각되지 않은지)를 자문해 보라! 특히 빌라델비아 신자들에게는 시련에서 보전되는 것이 대단히 구체적이고 역사적으로 인식 가능하도록 박해에 항거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변함없이 성실하게 선포하는 일에 대해 주어지는 아주 특별한 보답임을 감안할 때, 과연 이 "시험의 때"가 빌라델비아 교회 신자들이 살았던 것보다 후대에 일어나는 사건일 수 있었을까? 빌라델비아 신자들은 예수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다"는 이유로 보전을 약속받는다.

나는 예수님이 그리스도인들(빌라델비아 신자들도 포함됨)에게 이미 시작되었고 이 세대가 진행되는 과정에 계속될 그런 "환난"(틀립시스)을 언급하시는 것이라고 확신한다. 사도 요한은 교회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스스로를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틀립시스]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계 1:9)라고 밝힌다. 다시 말해, "환난의 때"는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에 있는 교회 시대 전체를 가리키는 개념일 가능성이 큰데, 그 기간에는 예수님을 위한 증언을 굽히지 않는 자들에게 언제나 고통과 환난이 따를 것이다.

이것은 역사의 마지막에 예수님의 재림과 연관해서 특별히 격심해지고 끔찍한 환난의 시기(여러분이 그 시기가 얼마나 오랫동안 이어질지를 생각하든 간에)가 발생할 것이라는 사실을 부정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주후 1세기 빌라델비아 신자들과 교회가 존재하는 이후의 모든 세대의 모든 신자에게 임박했거나 이미 닥친 체험을 염두에 두신 것이 분명하다.

 

여섯째, 환난 전 휴거론자는 이른바 "대환난"을 묘사한다고 주장되는 요한계시록 4~18장에서 헬라어 단어 '에클레시아'("교회")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는 이유로 요한계시록 3장 10절이 교회가 지상에서 옮겨짐을 묘사하는 것이 확실하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래서 환난 전 휴거론자는 "에클레시아", 곧 "교회"가 하늘에 존재하는 것이 분명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에클레시아'라는 단어는 하늘의 광경을 묘사하는 요한계시록 4~18장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기 때문에, 이런 논증은 어느 쪽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우리는 이 사실을 근거로 교회가 이 땅에 분명히 존재한다고 결론 내려야 할까? 그와 같은 침묵에 의한 논증은 극도로 미심쩍은 것이다. 어쨌거나 "교회"라는 단어는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 디모데후서, 디도서, 베드로전후서, 요한일서, 요한이서, 유다서, 심지어 로마서 16장에 이를 때까지 발견되지 않는다! 여러분이 신약 성경의 많은 부분을 교회와 무관하다고 가볍게 넘기기로 각오하지 않는 한, 그 단어 자체가 나타나느냐의 여부는 이 세대의 성도들에게 특정 진술을 적용할 수 있는지를 결정하기 위한 기준이 될 수 없다.

우리는 요한계시록에서 그 총체성을 염두에 두는 "교회"라는 단어가 예수님의 보편적인 몸을 지시하는 것으로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도 기억해야 한다. 교회라는 단어는 요한계시록 1~3장에서 19회 나타나는데, 모두가 신자들이 소속된 특정 "지역" 교회를 가리킨다. 여기에 덧붙여서, 교회 회원을 설명하는 데 흔히 사용되는 "종"(계 2:20, 7:3, 19:2), "성도들"(5:8, 8:3-4, 13:7, 10, 14:12, 16:6, 17:6, 18:24)이라는 단어가 요한계시록에 두루 쓰이는 것도 사실이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보증과 권고의 한 마디를 담아서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마무리하신다.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계 3:11). 여기서 말하는 "오심"이 역사의 마지막에 나타날 재림일까, 아니면 주후 1세기의 징계를 위한 임하심일까? 재림을 가리킬 가능성은 있으나 징계를 위해 임하시는 것일 가능성은 분명히 희박하다. 어쨌거나 빌라델비아 교회가 보여 준 순종을 감안하면, 예수님이(2장 5절 에베소 교회, 2장 16절 버가모 교회, 3장 3절 사데 교회의 것처럼) 심판하거나 질책하기 위해 "오실" 필요는 전혀 없었다.

하지만 또 다른 선택 사항이 존재할 가능성도 있다. 그레고리 비일은 "이 절에 언급된 '오심'은 한층 더해진 예수님의 현존으로서, 10절에 방금 언급된 것처럼 빌라델비아 신자들이 환난을 통과할 때 예수님이 이들을 보호하실 것을 의미한다"고 제안한다. 다시 말해, 이 오심은 인내할 수 있는 힘과 위안을 제공하기 위한 영적인 오심, 곧 신자가 복음에 헌신할 때 신자를 격려하기 위해 그의 마음에 가까이 오시는 것이다. 예수님의 강림 또는 신자에게 가까이 오심은 공간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이고 거룩하게 하는 것인데, 그 강림에서 예수님은 신자의 영혼 속에서 그들을 붇드는 자신의 영향력을 강화하신다. 예수님이 징계하기 위해 에베소와 버가모와 사데에 있는 교회들에 "오실" 수 있다면, 용기를 북돋고 축복하기 위해 빌라델비아에 있는 교회에 "오실" 수 있는 것은 확실하다.

 

2021년 08월 19일(목)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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