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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강해
 

 

제 1강 "말씀이 육신이 되어"

사람들이 ‘무지개’하면 유치원이라든가 아파트를 연상하게 되는데, 우리 연구원의 이름은 이러한 유치한 내용으로 붙여진 것이 아니라 성경을 토대로 하여 붙여진 이름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과 약속 혹은 언약을 맺으시는데 하나님이 사람들과 맺은 최초의 언약, 약속은 노아와 맺은 언약, 약속입니다. 이 언약이라는 것은 항상 생명을 담보로 해서 체결하게 됩니다.

고대 근동에 있어서 언약을 체결할 때에는 짐승을 놓고 쌍방이 서로 약정을 하고 그 짐승을 죽인 후 가운데를 쪼개고 그 가운데로 두 사람이 걸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의식을 마친 후에 그 음식을 서로 나누어 먹게 되는데, 이 언약의 의미는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기까지 그 누구도 갈라놓을 수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이 언약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곧 ‘신실’( , 헤세드)이라고 할 수가 있는데 곧 ‘신실하다’ 혹은 ‘변함이 없이 지속된다’는 의미를 갖고있습니다. 이처럼 짐승을 쪼개놓고 그 가운데로 지나가면서 둘 중에 하나가 만일 이 약속을 어기면 죽음으로서 화답하겠다는 의미가 바로 ‘언약’의 의미입니다. 그리고 함께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서로 식탁의 공동체로서 이제 당신과 내가 한 몸, 한 지체로서 한 운명을 같이하게 된다는 예식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후에 우리 인간들이 얼마나 악하다는 사실은 우리 스스로가 더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인간의 원죄, 인간이 악하다는 것을 알려면 신학교에서 인간론을 배우지 않더라도 우리가 주말 승합차를 타고 경부고속도로를 달리면서 옆 차선에 빼곡이 서 있는 승용차들을 보면서 느끼는 쾌감을 통해서도 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만큼 우리의 본능이 악하다는 사실이죠.

이러한 예들을 보면 인간이 이렇게 악한 후에 하나님의 창조물인 온 천지창조의 아름다움을 파괴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쓸어버리겠다는 것이 그 유명한 노아 홍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를 가만히 보면 거기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콜 하아레쯔"라는 단어 즉, "온 땅에"라는 말입니다. 최초의 전 세계적이고 전 우주적인 이 홍수에 대해서 히브리 설화자가 쓸 때에 ‘온 땅에’라는 말을 반복해서 썼습니다. 물론 노아의 홍수 자체가 지역의 가득찼던 홍수였는지 아니면 온 세상의 홍수였는지는 제쳐놓더라도, 성경 기자는 노아 때의 내렸던 비를 가리켜 "온 땅에"(콜 하아레쯔) 가득찼다’라는 말로서 전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바로 거기에서 하나님께서 노아와 그의 속한 식구들에게 은혜를 주셔서 그들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흔히 ‘노아와 그에 속하여’라는 말은 신약에서 마치 ‘예수 그리스도와 그에 속하여’라는 말을 연상케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노아는 제2의 아담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첫 번째 아담이 인류의 시조라고 한다면 노아야말로 새로운 시대, 새로운 세계의 시발자, 조상이 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를 제2의 아담 혹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노아의 홍수사건을 보면 온 땅에 물이 가득 찬 후로 물이 빠진 것을 알기 위해서 노아가 까마귀와 비둘기를 보내게 됩니다. 그리고 비둘기가 감람나무 잎사귀를 물고 날아옵니다. 이 광경을 보면서 미국의 어떤 작가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늙은 어찌보면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어린 광대처럼 보였던 노아, 산 위에다 배를 짓고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상상을 초월할 수밖에 없는 놀라운 미친 짓을 했던 이 어릿광대와도 같은 사람, 저 고공 위에 줄을 묶어놓고 죽음의 춤을 추고있는 모든 사람들을 보면서 어릿광대는 흐르는 눈물은 비로소 한 마리의 비둘기가 그의 손위에 닿는 순간 파릇파릇한 감람새 위에 흘러 넘쳤다.

여기에 비둘기가 소위 새로운 시대를 알리는 메신저의 역할을 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왜 공관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세례(침례)를 받으시고 요단강 가에서 올라오실 때에 성령이 비둘기처럼 그리고 하늘에서 하늘 문이 열리면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하셨을까하는 의문을 가져볼 수가 있을 것입니다. 단순히 예수님이 비둘기처럼 온유하고 온순하고 순하기 때문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에 세례 받으시는 모습 속에서 성령이 비둘기같이 그 위에 임하는 것은 제2의 아담처럼, 새로운 인류의 창시자처럼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알리는 전령자처럼 성령께서 알려주신다는 의미입니다. 이처럼 노아의 사건 자체는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성경적인 신학뿐만 아니라 우리의 생각을 바꾸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약속을 하십니다. 이 노아에게 한 약속은 어쩌면 매우 일방적인 약속입니다. 원래 약속이라는 것은 쌍방 간에 서로 합의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대부분인데, 노아의 경우에는 거의 일방적으로 하게 됩니다. 두려움 가운데에 있는 노아에게 혹시라도 다시 이러한 불행들이 닥칠까하는 염려를 하나님께서 다시 결코 이러한 일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 그리고 계절이 변하고 태양이 뜨는 한은 다시는 물로 심판하지 않으리라는 약속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약속에 대한 ‘표징’(Sign)으로 하늘 위에 무지개를 주셨습니다. ‘무지개’라는 히브리어는 매우 독특한 언어입니다. 사실상 무지개라는 말보다도 이 단어는 ‘활’(케쉐트)이라는 의미가 더 크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무지개가 바로 활처럼 생겼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고대인들에게 있어서 신은 어디에 살고있는가? 라는 질문을 할 때에 그들의 생각은 가장 높은 하늘에 신이 살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고대인들은 하늘을 단수로 표현하지 않고 항상 복수형(샤마임)을 썼습니다. 즉 ‘하늘 들’이라는 의미인데, 마치 사도 바울도 고린도 교인들에게 보낸 편지가운데에도 자기의 독특한 경험을 표현하면서 ‘내가 삼층천에 올라갔다’(고후 12:2)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즉 그때의 사람들은 하늘이 3층으로 형성되어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하늘 꼭대기에 있는 하나님께서 노아와 맺은 언약의 상징, 표징으로서 무지개(활, 케쉐트)를 주셨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노아와 약속을 맺으시고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약속을 깨지 않을 것이며 이 약속에 대한 책임을 질 것이라는 의미이며, 심지어는 혹시 상대방이 이 약속을 파괴할지라도 최종적인 책임을 죽음으로서 내가 질 것이라는 강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러한 내용을 바로 ‘신의 자기저주’라고 표현하는데 즉 하나님께서는 자기 스스로를 저주해가면서 인간과 맺은 언약을 끝까지 수행하겠다는 하나님의 신실하신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처럼 성경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장엄한 시현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장엄한 자시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생겨난 것이 바로 ‘무지개’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무지개에 있어서 가장 극치의 표현은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으심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자기의 저주를 통해서 끝까지 우리와 맺은 언약을 지키시겠다는 것은 매우 감동적인 사랑의 표현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오시는 문제는 매우 장엄할 뿐만 아니라 우주적이라는 것입니다. 단순히 신앙이라는 것은 사적인 것이 아니라 매우 공개적이고 장엄하고 매우 엄청난 사실입니다. 여기에 독특한 사실은 최초의 인간이 범했던 죄는 ‘하나님처럼’되는 것이었는데, 인간이 자기의 한계성과 언약성과 계약성과 자기의 영토 자체를 벗어나서 신의 영역으로 올라가려는 욕망에서 모든 일들이 범해졌습니다. 그것에 대한 대표적인 사건들이 바로 ‘바벨탑’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인류 역사 속에서 가장 중앙 Point에 자리잡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사건은 인간이 하나님처럼 되기 위해서 올라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처럼 되어서 내려왔던 사실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처럼 되기 위해서 올라갔던 사건은 변하여 거꾸로 하나님이 인간이 되어서 내려왔다는 사실입니다.

이렇다면 이 연구소의 이름이 하나님의 은총과 은혜에 대한 의미가 담겨있음을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Ⅱ. 서언(요 1:1∼18) … “말씀이 육신이 되어”

복음서를 자세히 보면 마치 피아노의 4중주(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피아노)와 같습니다. 공관복음(마태, 마가, 누가)이 마치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의 악기에 비유를 한다면 마지막 요한복음은 건반악기인 피아노에 비유해 볼 수가 있습니다. 이처럼 복음서가 4개의 복음서로 구성되어 있지만 3개의 복음서와 요한복음의 내용은 서로 다르면서도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복음서들은 4중주의 형태로 현란한 하늘의 소식, 예수 그리스도의 안에 나타나는 천상의 소식 곧 복음(eujaggevlion, 유앙겔리온)을 연주하고 있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복음서의 첫 부분을 보면 아주 독특합니다. 마태복음 1장 1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세계’(genevsew", 게네시오스)라는 말은 창세기에 약 10회에 걸쳐서 나오는 단어 ‘톨레도트’(td;l]/t])라고 불리우는 단어와 흡사합니다. 이 단어는 ‘족보, 계보, 후계, 약전’등으로 번역되어 있지만 모두 명사형으로서 ‘태어나다, 출생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쉬운 의미로 출생이 시작한 후에 일어났던 모든 이야기들을 집합해서 '세계'(톨레도트)라고 합니다. 창세기 2장 4절에 보면 ‘천지창조의 대략은 이러하니라’고 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대략’이라는 말이 바로 '톨레도트’라는 말입니다. 창세기 37장 2절에는 ‘야곱의 약전은 이러하니라’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지금부터 들을 이야기는 야곱에 관한 이야기라는 것인데, 사실상 야곱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않고 야곱의 아들인 요셉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다시 말하면 ‘야곱의 약전’이라고 하면 야곱을 뺀 그 이후의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창 2:4에 ‘천지창조의 대략은 이러하니라’라고 할 때에도 천지창조에 관한 이야기는 1장에 기록이 되어있기 때문에 그것을 제외한 그 후의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단어를 가만히 보면 축약된 역사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모든 역사를 다 적을 수 없기 때문에 꼭 필요한 역사를 적음으로 어떻게 역사가 진행되어오고 이 역사속에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구성하시는가, 그 역사를 이루어가는 인간이 어떻게 반응했는가에 대해서 기록하는 것이 바로 톨레도트 입니다.

이와 동일한 모습이 마태복음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genevsew", 게네시오스)는 이러하니라’라고 할 때의 단어 역시 ‘창세기’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어떻게 세계가 열리게 되는가하는 책이 바로 마태복음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첫 조상이었던 아브라함부터 예루살렘의 왕정으로서의 찬란한 금자탑을 세운 다윗을 걸쳐서 베들레헴을 향한 예수 그리스도에 이르기까지 장엄한 역사를 기록 하므로써 예수 그리스도야 말로 아브라함의 약속의 후손으로서 새로운 이스라엘의 창시자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가복음서를 보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의 출생이나 족보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여기에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세례요한을 알아야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특이한 사실은 마태, 마가, 누가가 그들의 서두를 인류 역사의 한 시점에서 출발시킨 것과는 달리 요한복음은 그 서두를 소위 ‘영원’에서부터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피아노와 바이올린, 피아노와 비올라, 피아노와 첼로의 다른 점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다른 복음서들은 인류 역사의 한 정점, 지점에서 시작하고 있는데, 반면에 요한복음 역사 저 너머인 영원으로부터 서두를 시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뿌리는 영원에서부터 출발한 그 예수님을 예수 그리스도라 표현하지 않고 ‘말씀’이라고 독특하게 표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말씀이라는 단어는 고유명사입니다. 물론 이 성경을 보게되면 요한복음 1장 1절을 보게되면 이렇게 시작됩니다.
!En ajrch'/ h\n oJ lovgo", kai; oJ lovgo" h\n pro;" to;n qeovn, kai; qeo;" h\n oJ lovgo".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헬라어 성경에는 ‘lovgo"’(로고스)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이 ‘로고스’라는 말은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었던 '다바르'라는 구약성경에 나타나는 단어와 동일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lovgo"’(로고스)단어는 항상 구약에서 ‘다바르’(rBed')라는 말로 쓰이는데 창세기 1장 1절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하는 단어와 동일한 단어입니다.

구약성경에서 말씀이라고 하는 것은 항상 두 가지로 번역이 됩니다. 입에서 나오는 ‘말’도 되지만 ‘사건, 행동, 일’등으로 번역이 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공수표가 되어서 아무런 일도 하지 아니하고 그냥 굴러다닌다는 뜻이 아니라 일단 말을 하면 그 말은 사건화가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자 빛이 있었고, 하나님이 말씀을 하시자 무엇인가 발생한다고 하면 구약성경에서 말이라고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지금 이야기하기를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그 말씀’이 있었고, 그 말씀이 ‘하나님’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을 가졌다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 자체가 하나님이었고, 그 말씀이었던 하나님이 또 다른 하나님과 함께 창조사역에 동참하였다는 것입니다. 즉 이 메시지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모든 것들-피조의 모든 것들-이 그분에게 존재의 빚을 지고있다는 것입니다.

이 본문 가운데에서 유명한 요한복음의 학자들 중에 한 사람은 요한복음 1장 1절부터 18절까지야말로 우리로 하여금 창조역사로부터 그리스도의 성육신으로 절정에 이르며 성육신 하신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은 마치 새벽녘에 동터 오르다가 마침내 찬란한 태양이 갑자가 하늘 지평선에 떠오르면서 그 감성을 흠뻑 내뿜어 온 지구 지평선을 감싸는 것과 흡사한 광경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마치 신구약 성경을 읽어보아도 오늘 본문만큼 공간적으로 장엄하고 시각적으로 분명하고 정서적으로 감동적이고 영적으로 충만한 감동을 표현하는 구절도 별로 많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아무것도 없는 무에서부터 장엄한 천지가 창조되었으며 오늘 본문에 의하면 적어도 하늘과 땅이 서로 이마를 맞대는 광경이 나오는데, 흑암과 빛이 매우 강렬하게 대조되어 있고, 찬란한 영광의 광채가 하나님의 아들을 감싸고 있는 장면, 그리고 위대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이 티끌만도 못한 인생들을 위해서 친히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에 거하시기를 기뻐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장엄한 서사시와 같아서 곰곰이 생각해 보면 우리의 마음속에 깊은 확신과 감격을 안겨다주는 위대한 서문이라는 것입니다.

1장에 있는 단어들을 보십시오. 말씀, 창조, 생명, 빛, 어두움, 증거, 믿음, 세상, 하나님의 자녀, 권세, 말씀이 육신이 되심, 독생자의 영광, 은혜, 진리, 충만 등등의 단어들은 마치 하늘에 떠 있는 별들처럼 각각 제 빛을 발하는 아주 독특한 모습들입니다.

요한복음의 나오는 독특한 단어들을 살펴볼 때에 가장 중요한 key word는 '생명'(조에)이라는 것입니다. 이 단어가 이 복음서 안에 19회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한일서에는 7회가 등장되죠. 동시에 ‘영생’이라는 단어는 이 복음서 안에는 17회나 등장되고 요한일서에는 6회가 등장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요한복음서에서만 ‘생명’ 혹은 ‘영생’이라는 단어는 모두 36회나 등장되는 중요한 단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와는 반대로 공관복음서를 읽어보면 '하나님의 나라'(바실레이아 투 데우)라는 단어는 요한복음에는 1회밖에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이 조금은 특이합니다. 그리고 ‘나라’라는 단어도 요한복음에서는 빌라도와 예수님과 얘기할 때에 등장하는 단어에 불과합니다. 그렇다면 요한복음에서 등장하는 ‘생명’ 혹은 ‘영생’이라는 단어는 복음서에 비하면 ‘하나님의 나라의 현존’에 비슷하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나라의 현존하는 것을 가르쳐주는 요한복음의 단어가 ‘생명’ 혹은 ‘영생’이라는 것입니다. 다시말하면 공관복음서에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였다’는 단어가 쓰이고 있지만 요한복음에서는 ‘생명’ 혹은 ‘영생’의 단어가 쓰여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미래적인 종말론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고 누릴 수가 있다는 것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학적으로 살펴보면 요한복음을 ‘실현된 종말론’에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복음서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또 하나는 요한복음은 예수님을 표현할 때에 공관복음서와는 달리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표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표현한다면 매우 친밀하고 가장 가까운 교제의 관계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항상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에 의해서 보내심을 받은 자라는 사실입니다. 또 한가지는 요한복음은 7번의 표징이 등장되는데 7개의 표징이 무엇인가를 가르치고, 가르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표징 자체들이 예언적인 특성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표징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같은 능력을 가지고 있고, 하나님과 같은 영광을 가지고 있고, 하나님의 주권을 가지고있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한 가장 좋은 예가 바로 ‘기적’이라는 것입니다.

조금 전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영생’의 문제와 동일하게 ‘구원’이라는 것은 장차 받은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현재 소유하고 있는 것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말씀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요 5:24)라는 구절에서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이미 영생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신 ‘말씀’ ‘lovgo"’(로고스)에 대하여 조금 더 나누어보고자 합니다.

요한복음에서 ‘말씀’ ‘lovgo"’(로고스)을 이해하려면 구약성경을 이해하지 않고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헬라어 성경에서 ‘lovgo"’(로고스)라고 번역된 단어는 구약성경에서 ‘다바르’라고 표현되고 있습니다. 이 단어의 뜻은 ‘말’ 혹은 ‘행동’ 그리고 ‘사건’등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 이 ‘다바르’라는 단어가 적용될 때에는 말씀을 선포하므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통해서 어떠한 사건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시편 33:6을 보면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이 그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

여기에 표현되고 있는 것처럼 ‘입’에서 나오는 것이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말’과 또 하나는 ‘기운’이라는 것이죠. 이 말을 들어보면 여러분들은 그 유명한 신명기 8장 2, 3절의 말씀을 떠올릴 수가 있을 것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3절에서 보는 바와 같이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이라고 표현하는데, 이 ‘말씀’은 원어에서는 ‘모든 것’(everything)의 의미입니다. 히브리어에서 '모찌아'라는 말인데, 이 말은 ‘나오다’(야짜)라는 동사형에서 나오는 명사형 단어로서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입에서 무엇이 나옵니까? 바로 ‘말’과 ‘기운’이 나오는 것 아닙니까? 즉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영’이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들어놓고 코에다가 입 기운을 불어넣으니 비로소 사람이 된 것처럼 시편 33:6절의 의미는 하나님의 영이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이 세상을 창조한다는 의미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과 입기운 모든 것으로 이 세상이 자기의 존재의 빚을 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55:10∼11의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비와 눈이 하늘에서 내려서는 다시 그리로 가지 않고 토지를 적시어서 싹이 나게 하며 열매가 맺게 하여 파종하는 자에게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 양식을 줌과 같이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뜻을 이루며 나의 명하여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

여기에서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과 ‘하늘에서 내리는 비’가 평행법을 이루고 있습니다. 하늘에서 비와 눈이 내려서 이 땅의 토지를 적시고 싹이나게 하고 열매를 맺게 하여서 종자와 양식을 주는 것처럼 하늘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내려옴으로 결코 헛되이 돌아오지 아니하고 반드시 열매를 맺고 사건을 일으킨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구약성경에서 ‘말’(rBed',다바르)라는 단어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배경을 알게되면 요한복음 1장 1절에서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고 할 때에 그 ‘말씀’이야 말로 전 우주적이고 전 세계적이고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고 모든 것을 창조하고 생명을 공급하게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바로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을 계시하셨고 드러내셨습니다. 즉 태초에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통해서 자기가 누구인가를 보여주셨을 뿐만 아니라 자기의 행위를 보여주셨고, 자기의 사역과 어떤 존재임을 보여주셨습니다. 따라서 창세 때에 하나님께서 처음 자기 자신을 드러내셨습니다. 우리가 대화를 통해서 상대방을 알고 상대방의 전 인격을 알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말씀을 계시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성육신하신 '다바르', 성육신 하신 ‘로고스’(lovgo")라는 것입니다.

동시에 성육신하신 이 말씀은 자연스럽게 창조를 통해서 온 세계에 그의 영광(dovxa, 독사)을 드러내게 됩니다. 성육신 하시기 전에 이 ‘말씀’은 실제적으로 인격화되어서 미리 선재하고 있다는 사실은 구약성경에서 종종 등장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1에서 나오는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라는 말은 문자 그대로 표현하면 ‘얼굴과 얼굴을 맞대어’라는 표현입니다. 그러면 이 ‘말씀’이라고 불리우는 것이 태초 이전에서부터 하나님과 함께있는 인격체라고 한다면 구약성경의 좋은 예가 잠언서에 등장하는 인격화된 '지혜'(호크마)입니다.

초대교회 교인들이 모일 때마다 불렀던 그리스도의 찬양시가 있습니다. 아마도 그들이 세례를 받을 때에 불렀지 않았는가하는 추측을 해 봅니다. 그들은 세례를 받을 때에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고 고백합니다.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Kuvrio", 퀴리오스)라고 고백하지 않으면 세례를 주지 않았습니다. 세례를 줄 때에 그들이 고백하였던 ‘주’(Kuvrio", 퀴리오스)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그리고 그들이 셰레 받으면서 불렀던 찬미가 있었는데, 골로새서 1장 13절부터 보면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그가 근본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여기에서 보는 바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창조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 교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찬미할 때에 고백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는 창조주’라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18절 이후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속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짧은 구절 속에서 초대교회 교인들이 자기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로 고백할 때의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는 창조주 하나님이시오, 구속주’라는 고백입니다. 다시 말해서 지금 살아있는 모든 존재들은 그들의 존재의 빚을 창조주이신 예수님께 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이 일그러지고 죄 가운데에 엉망진창 되었을 때에 우리를 해방시켜주시고 건져내주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고백이 초대교회 교인들의 고백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단순하게 우리 개인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 오신 분을 넘어서서 본질적으로 성부 하나님과 함께 창조사역에 임하였던 분이십니다. 바로 그분이 인간과 눈높이를 하여서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이야말로 하나님이 인간을 향해 베푸신 가장 위대한 은총의 표현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제2강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요한복음 1장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첫 번째 부분은 1절에서 18절까지의 말씀이고 두 번째 부분은 19절부터 51절까지의 말씀입니다. 지난 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요한복음의 첫 부분인 1절부터 18절까지는 마치 음악에 있어서 서곡처럼 동시에 그 서곡 자체가 독자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그러나 이 서곡을 잘 들어보면 그 앞으로 전개될 모든 음악의 주제가 반복되어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맨 앞에 나오는 이 부분을 잘 들어보면 전체에 대하여 잘 이해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부분을 prologue라고 합니다. 음악으로 말하면 서곡에 해당하는 부분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또 한가지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좋은 소식을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서는 서두에서 인류의 시작을 역사에서 출발을 했지만 요한복음은 인류의 역사가운데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 역사의 저 넘어 영원으로부터 시작하고 있는 것이 매우 독특한 가르침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에서 18절까지를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가 있습니다.

1:1~5 ‘창조’
1:6~13 세례자 요한
1:6~8 세례자 요한의 사역
1:9~11 예수님의 사역
12~13 예수를 믿는 자와 그 결과
1:14~18 ‘언약’

1절에서 5절까지는 분명히 하나의 단락을 이루면서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는 말씀으로 창조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구요, 1절에서 5절까지의 말씀을 받아서 14절에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9절부터는 세례자 요한과 그리고 제사장과 레위인들 사이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6절부터 13절까지의 내용은 세례자 요한의 이야기부터 시작을 하여 예수님께서 이 지상에 오셔서 어떠한 사역을 하실 것이고, 그가 이 지상의 사람들에 의해서 배척을 받을 것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마지막으로 예수를 믿는 자들에 관해서 언급을 하면서 마치고 있습니다. 12절에는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결국 6절부터 13절까지는 요한복음서 2장에서부터 마지막 장까지의 전체에 이루어질 모든 일들을 축약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서두, 서언 혹은 서곡을 잘 들으면 반복되어서 나오는 주제의 음이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가 있는데, 그 주제의 음들을 잘 살펴보면 앞으로 펼쳐질 이야기에 대하여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이야기는 ‘창조’에 관한 이야기(1-5절)입니다. 우리가 요한복음서의 머리말을 잘 이해하는 것은 요한복음서의 전체의 이해를 위한 아주 필수적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1장 1절에서부터 보면 첫 구절은 분명히 창세기 1장을 연상케하는 구절입니다. 그리고 3절에서도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고’라는 언급은 창세기의 창조기사를 모르고서는 이해할 수가 없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흥미있는 것은 이 이스라엘의 지혜전승-욥기, 잠언, 전도서 등-이 있는데, 그 전통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만드실 때에 자기도 만드셨지만 어떤 대행자를 두고 그 대행자가 이 세상을 창조하도록 하였다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히브리의 지혜전승은 온 천하만물을 지었던 창조의 대행자를 가리켜서 ‘지혜’(hm;k]j;, 호크마)라고 부릅니다. 헬라어로는 ‘sofiva’(소피아)라고 부릅니다.

히브리 지혜 전승은 하나님께서 이 대행자 즉, 지혜를 통해서 이 세상을 만드는데, 이 히브리성경은 '지혜'를 여성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구절이 잠언 8장, 9장에 등장이 됩니다. 또 한가지는 구약의 지혜 전승에 있어서 ‘지혜’라는 부분은 ‘구속’ 혹은 ‘역사’와 관계를 맺는 것보다는 항상 ‘창조’와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잠언서를 읽으면서 구원과 구속의 이해를 찾는 대신에 창조 즉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만들어놓은 이 모든 창조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가? 그 목적이 무엇인가? 인간이 창조세계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길이 없는 곳에 어떻게 길을 분별하고 살아야 할 것인가?라는 것들에 관한 기사라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지혜는 항상 길과 관계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히브리 성경에서 ‘지혜’가 이 세상을 만들었고, 창조의 대행자라는 말과 함께 태초에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있었고, 그 말씀이 하나님이었고, 그 말씀을 통하여 세상이 지음을 받았다는 요한복음의 서언과는 좋은 평행을 이루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요한복음서에서 말하는 ‘말씀’은 구약성경에서 말하는 지혜전승에 따르면 의인화 된 지혜가 태초에 창조의 대행자였다는 사실은 특별히 구약성경뿐만 아니라 구약과 신약의 중간시대의 문헌에 보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중간기 문헌 중에 ‘희락서’ 24장 3절에 의하면 의인화된 이 지혜는 자신이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왔고 24장 9절에는 이 지혜는 영원으로부터 기원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시말해서 ‘지혜’라고 불리우는 이 여인은 하나님의 입으로 발설하는 말씀을 가르친다고 중간기 문학에서도 반복해서 나옵니다.
그런데 흥미있는 것은 이 중간기 문헌(희락서)에 보면 이 지혜가 자기가 이 세상에 와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사는 가운데에 천막을 치도록 명령을 받았다고 합니다. 즉 하늘에 있던 여자 지혜가 이 땅에 내려와서 천막을 치고 사는데, 이스라엘 가운데에 천막을 치고 살았다고 희락서 24장 8절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0절에는 이 지혜는 거룩한 성막 안에서 하나님 앞에 수종을 들게 되었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에 요한복음을 기록한 저자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기독론을 이야기하면서 유대인들의 지혜전통, 지혜전승을 적용하면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표면적으로 요한복음은 헬라어로 쓰여져서 그 당시 헬라인들에 이야기하는 매개체였지만 그 안에 들어있는 것은 구약성경, 유대인의 전통, 히브리적인 전통 가운데에서 내려와서 그대로 전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14절 이하를 보겠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서 우리들 가운데에 천막을 쳤다는 하나님의 지혜는 다름이 아니라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라는 분 안에서 구현된 하나님의 '로고스'(lovgo")였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로고스에 대한 헬라인들의 생각은 우주를 이루어가는 어떤 법칙 혹은 이치 어떤 합리성을 가리키는 것에 비해 요한복음 저자는 그 단어를 사용하기는 하지만 그보다 한 단계를 더 넘어가서 구약성경의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다바르’(rBed')에 해당한다는 것입니다. 지난번에 말씀 드린것처럼 구약성경에서 ‘다바르’(rBed')라는 것은 '말'로 번역하기도 하지만 '행동' 혹은 '사건'으로 번역하기도 합니다. 구약성경의 견해에 따르면 '말'(word)은 항상 사건화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말을 주의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인들의 사고에 의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항상 사건화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언어사건’(logos event)라고 합니다. 그래서 강단에서 목회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할 때에 진정으로 정통적인 설교가 이루어질 때에 사람의 삶이 개혁되고, 바뀌고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는 사건화가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코 말은 비어있지 않습니다.

이처럼 ‘언어사건’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창세기의 창조기사입니다. 그 기사를 보면 하나님께서 말씀을 하시자 마자 만물이 존재하게 됩니다. 이러한 뜻에서 성경의 전통은 하나님의 말씀을 매우 중요시 여긴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이 세상 만물을 창조하는 창조의 도구이며 근원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역사를 움직여가는 주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정책, 군사력 혹은 경제력을 가지고 세계를 움직인다고 생각하지만 성경은 항상 인간의 역사의 주체, 원동력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이 하나는 ‘창조’이고 하나는 ‘역사’를 이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 이 세상을 만들었을뿐만 아니라 이 세상을 보존하고 유지하는 근원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약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많이 보내셨는데, 그 이유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움직여가는 것, 하나님의 백성들을 움직여가는 것은 그들이 비록 앗시리아, 바벨론, 애굽가운데에 끼어서 군사력을 키우고 경제력을 길러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가운데에서도 역사를 움직여가는 구심점은 그러한 것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씀의 대행자로 보냄을 받은 자들이 바로 예언자, 선지자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왕정시대에 왜 선지자들을 보냈을까?하는 의문을 해결할 수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그들은 말씀의 수종자들로서 경제력, 군사력에 의해서 이 세상이 변한다고 믿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사고방식을 철저하게 깨면서 역사의 주체, 역사를 구성해 가는 원동력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은 살아있고, 운동력이 있어서 사람의 영과 혼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어서 사람의 모든 것들을 드러낼 수 있는 살아있는 생명을 줄 수 있는 창조와 인간의 역사 자체를 움직일 수 있는 원동력이 바로 말씀이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요한복음 1장 4절에서 그 말씀 안에 ‘생명’과 ‘빛’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 ‘생명’과 ‘빛’은 요한복음에서 자주 등장하는 주제단어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언급되고 있는 ‘빛’이라는 말과 ‘생명’ 역시 창세기 1장의 창조기사를 연상하게 하는 단어입니다. 왜냐하면 창세기 1장에 보시면 ‘빛’과 ‘생명’으로 가득차 있는 모습을 우리가 기억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스스로 만드신 모든 것들을 보시면서 좋아하는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빛’과 ‘생명’으로 가득찬 성경이 바로 창세기라는 것이라고 할 때에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빛’과 ‘생명’으로 표현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실제적으로 태양이 아침에 환하게 비치는 것이라든가, 생명, 목숨 즉 건강하게 사는 것들을 보면 우리가 느끼는 감정이 무엇입니까? 만약에 맑은 하늘에서 찬란한 태양이 비칠 때에, 아니면 젊은이들이 땀을 흘리면서 멋있게 사는 삶의 생명력을 우리가 느낄 때에 이러한 모든 것들이 진정으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것을 느낄 수가 있지 않겠습니까? 이러한 것을 가리켜서 구약의 언어로는 ‘샬롬’(!/lv;)이라고 부릅니다. 왜냐하면 이 말은 ‘가득차다’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즉 ‘샬롬’이라는 말은 ‘가득차서 넉넉하다’는 뜻, ‘부족함이 없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서 여러분들이 아주 허기가 진 상태에서 저녁에 집에 돌아와 부인이 혹은 어머니가 맛있게 저녁상을 차려놓은 것을 배불리 먹었다면 그것이 곧 ‘샬롬’(!/lv;)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20대 청년들이 자기의 삶속에서 건강하게 뛰는 그 모습, 또한 등산을 하는 분들이 저 높은 산꼭대기에 땀을 뻘뻘흘리며 올라가서 정상에서 온 천하를 보면서 느끼는 감정, 또한 낚시를 좋아하시는 분들은 낚시터에 가서 낚시를 드려놓고 강태공의 심정으로, 70년의 세월을 기다리는 심정으로 갔다가 무엇인가 우끼가 내려가는 것을 보면서 잡아 챘을 때에 월척을 낚아 올리는 그 기분 그리고 집에 들어가면 남편과 아내가 보기만해도 너무너무 행복한 그 모습을 바로 ‘샬롬’(!/lv;)이라고 합니다. 이것들을 보게되면 단순히 ‘샬롬’(!/lv;)이라는 말은 ‘전쟁이 없다’는 의미보다는 ‘샬롬’(!/lv;)은 적극적으로, 긍정적으로 ‘가득찼다’, ‘충만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말씀안에 천지를 창조하셨고, 하나님이셨고, 하나님과 함께 하셨던 그 말씀 안에 생명과 빛이 들어있었다는 것은 바로 ‘샬롬’(!/lv;)이라는 것인데, 헬라어에도 이러한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본문은 즉 그 안에 ‘생명’ 과 ‘빛’이 있었다는 것은 우리에게 암시적으로 이러한 충만함, ‘샬롬’(!/lv;)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처음 세상을 만드셨을 때에 창조의 진정한 상태였고, 그리고 빛과 생명을 상실한 사람들의 간절히 갈망하는 구원의 상태였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입니다. 어두움에 있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빛’일 것입니다. 중환자실에 누워있는 사람들에게 간절히 필요한 것이 바로 ‘생명’일 것입니다. 따라서 이 본문에 있는 말씀은 우리에게 ‘샬롬’(!/lv;)이라고 불리우는 ‘빛’과 ‘생명’으로 불리우는 이 충만함이야말로 원래 창조시에 진정한 창조의 의미일 뿐만 아니라 ‘빛’을 상실하고 ‘생명’을 상실한 사람들이 간절히 갈망하는 구원의 상태를 바로 ‘샬롬’(!/lv;)이라는 것입니다. 이 본문은 바로 이러한 것들을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요한복음서의 저자는 5가지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말씀’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였고, 그리고 그 말씀이 창조시에 현존했다는 사실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빛’과 ‘생명’을 주는 능력이라는 사실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였고, 그 빛과 생명으로 오신 말씀이 어두움을 극복했다는 것이며 마지막으로 이 말씀은 바로 하나님과 함께 하셨다는 것입니다.
헬라어의 원어에서 살펴보면 하나님과 함께 하셨다는 의미는 바로 ‘하나님을 마주보고 있었다’ 즉 하나님께서 앞에 계셨고 말씀이 인격체로 서로 얼굴을 마주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과 함께 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기원전 2세기경에 『벤 시라』는 사람이 ‘희락서’를 기록했는데 그 사람은 ‘의인화된 지혜가 영원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그분이 창조시에 적극적으로 창조사역에 참여한 창조사역의 대행자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유대인의 신학자였고, 철학자였던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필러』라는 사람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켜서 ‘두번째 하나님’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것만 보더라도 신약성경이 등장하기 이전에 유대교의 신학은 그들의 신(神)관은 ‘삼위일체론’이 아니고 ‘이위일체론’의 신관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즉 그들은 하나님과 함께 또 다른 신인 ‘말씀’이라고 불리우는 신이 함께 있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부분을 살펴보겠습니다.
사실상 요한복음서의 저자가 그의 독자들에게 가져다 준 가장 커다란 충격은 다름이 아니라 이 하나님의 말씀(rBed', 다바르; lovgo", 로고스) 혹은 하나님의 지혜(hm;k]j;, 호크마) 혹은 하나님의 영(j'Wr, 루아크)이 육체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유대인의 전통, 구약성경의 전통에 의하면 ‘영’과 ‘육’은 항상 반립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서 창세기 6장 3절에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는 말씀처럼 유대인들이 이 말씀을 들었을 때에 매우 충격적이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지혜가 혹은 하나님의 영이 사람(육체)이 될 수가 있는가?라는 사실 때문입니다. 사실상 하나님이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인류역사가 가장 충격적인 사건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은 신이고 사람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서는 선언하기를 ‘하나님이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초대교회의 이단 가운데에 ‘가현설론자’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신이 인간의 육체를 입고 사람이 되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받아 들일 수가 없다’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만약에 되었다고 한다면 여기에 있는 것은 ‘하나님이 사람처럼 보였을 뿐이지 실제적으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온 것은 아니다’는 주장입니다. 그냥 그럴듯하게 보였다는 주장입니다. 즉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사람처럼 보였을 뿐이지 실제적으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올 수는 없다는 주장입니다. 그렇다면 오로지 요한복음서의 전도자는 유대인들이나 또는 헬라인들에게 엄청난 스캔들과 같은 소식을 전해준 것입니다. 하나님이 육체를 입은 사람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께서 ‘말씀이 사람의 육신을 입었다’는 것은 성경의 전체 맥락가운데에서 바라볼 때에 매우 흥미롭습니다. 왜냐하면 창세기의 타락설화에 의하면 사람의 타락은 사람이 하나님처럼 되려고 했기 때문에 시작이 되었습니다. 즉 사람이 하나님처럼 되려고 하자 유명한 ‘실락원’(paradise lost)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거꾸로 ‘하나님이 인간처럼 되었다’는 것은 ‘Paradise regain’(복락원), 다시말해서 낙원이 회복되고 있다는 것을 알리는 좋은 소식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복음’(eujaggevlion, 유앙겔리온)이라고 합니다.

제가 볼 때에 우리 기독교 교리 가운데에 가장 중요한 것이 있다면 바로 ‘성육신’(incarnation)이 아닌가 싶습니다. 조금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인간이 하나님처럼 되었을 때에 우리는 낙원을 상실했지만, 하나님이 인간처럼 내려올 때에 낙원은 회복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 있는 말씀처럼 ‘말씀이 육신이 되어’라는 말은 복음 중에 복음이고 가장 현란한 소식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계속해서 육신이 되었는데 이 육신이 우리들 가운데에 거하였고, 또한 우리가 그 영광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구절은 출애굽기 40장에 기록되어 있는 광야시절의 성막 그리고 그 성막 안으로 내려오시는 하나님의 하강, 즉 하나님이 내려오실 때에 영광이 나타납니다. 이 요한복음에서 말하는 ‘영광’이라는 개념은 구약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이해할 수가 없는 말입니다.

저 위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내려와서 인간이 되었고, 그리고 우리 가운데에 거하였습니다. 여기에서 ‘거하다’는 말은 ‘텐트를 치다’ 혹은 ‘장막을 쳤다’는 뜻인데, 이 구절은 출애굽기 40장에 있는 광야시절의 성막 그리고 그 성막 안으로 내려오시는 하나님의 하강의 영광을 시사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출애굽기 40장 34절부터 보시겠습니다.

34그 후에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매 35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수 없었으니 이는 구름이 회막 위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함이었으며 36구름이 성막 위에서 떠오를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그 모든 행하는 길에 앞으로 발행하였고 37구름이 떠오르지 않을 때에는 떠오르는 날까지 발행하지 아니하였으며 38낮에는 여호와의 구름이 성막 위에 있고 밤에는 불이 그 구름 가운데 있음을 이스라엘의 온 족속이 그 모든 행하는 길에서 친히 보았더라

‘영광’(d/bk, 카보드)이라는 말은 ‘무겁다’는 뜻입니다. 마치 구름이 내려와서 빡빡하게 가득차 있을 때에 사람들은 아주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 구름이 회막 혹은 성막 가운데에 덮이면서 거기에 여호와의 영광이 충만하였습니다. 여기에는 ‘구름’과 ‘영광’이 서로 대칭이 되는데, 여호와의 영광을 표현하는 자연 현상이 바로 구름입니다.

34절 초반부에 있는 말씀을 표현하는 것이 요한복음 1장 14절이라는 것입니다. ‘거한다’(jskhvnw, 스케노)는 말은 문자 그대로 번역하면 ‘천막 혹은 장막 안에 거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는 히브리어 ‘???’’(샤칸)이라는 말에서 빌려온 단어입니다. 이 말은 ‘~에서 살다’ 혹은 ‘~에서 거주하다’는 뜻입니다. 즉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에 거하였다는 뜻은 우리 가운데에 장막을 쳤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다는 자체가 장막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분이 바로 ‘장막’ 이요 ‘성막’, ‘성전’이라는 뜻입니다.

거한다는 ‘???’’(샤칸)이라는 말의 명사형은 앞에 ‘?’를 붙이면 됩니다. 즉 ‘????’(미쉬칸)입니다. 이 말은 ‘거하다’의 명사형으로서 ‘거함’, ‘거주’ 혹은 ‘천막’ 또는 ‘성막’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언제 하나님께서 천막 가운데에 오신다고 하셨습니까? 바로 시내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서 광야 여정을 시작할 초엽에 시내산에서 하나님께서 그들과 언약을 맺습니다. 그 언약이라는 것은 내가 이미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고 하나님과 함께 텐트속에서 살자는 의미입니다. 그 상징으로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들이 움직이는 가장 중앙에 ‘회막’ 혹은 ‘성막’을 만들어 놓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 하늘에서 구름이 내려오게 됩니다. 그러한 현상을 보고 사람들은 여기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구름이 뜨면 하나님이 움직인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일어나시면 함께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저 위에 구름이 뜰 때에 함께 움직였습니다. 그러므로 ‘성전’, ‘성막’이라는 본래의 뜻은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에 거주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 교회당을 ‘성전’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교회당 혹은 예배를 드리는 예배당이지 성전도 성막도 아닙니다. 성전은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에 거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때에 영광이 나타나는데, 그 현상을 전문적인 용어로 ‘쉐키나(????)의 영광’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문자적으로 ‘거주’ 혹은 ‘안주’라고 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거주하시는 영광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진영 가운데에 세워진 성막에 내려오셔서 거주할 때에 나타나는 영광의 빛을 가리켜서 ‘쉐키나의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장 14절의 ‘영광(dovxa, 독사)을 보니’라고 할 때에 그 말은 히브리어로 ‘쉐키나의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쉐키나)는 말은 하나님께서 거주하시고 와서 일어나는 영광을 말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 육체안에 거주지를 마련하시고 인간이 되었고, 이렇게 말함으로서 요한복음서는 광야시절의 여호와의 현존의 영광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간이 된 하나님 안에 나타나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이야 말로 성전이요 성막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성육신 교리중에 우리 가운데에 오셨다는 자체는 우리와 함께 식사하고 우리와 함께 동참한다는 뜻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분이 우리 인간에 있는 모든 것을 ‘체휼’-직접 경험했다-고 말씀합니다. 즉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을 바로 ‘성전’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2장에 가면 예수님께서 성전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허물라. 내가 사흘만에 다시 세우리라’는 유명한 말씀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수십년동안 세운 이 성전을 사흘만에 세우겠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성전을 의미하는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가리키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벧전 2:5 에 보면

너희도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여기에서 보면 예수 그리스도가 성전이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들이 곧 성전이 되었고, 그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제사장이고,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제물이 되었습니다. 구약에는 이 세 가지가 모두 따로 있었지만 신약에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제사장이요, 제물이요, 성전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분과 연합하여서 우리도 보배로운 산 돌이 되어 우리 자신도 이제는 성전이요 제사장이요 우리 자신이 제물이 된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 이후에 보면 광야시절 즉 여호와의 현존의 영광(????’, 쉐키나)을 언급하고 있는 표현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리고 ‘성막 안에서’라는 말의 뜻은 즉 ‘예수’라는 분 안에서 예수님이 하시는 일과 지금까지는 초월하셨던 하나님이 이제는 내주해 계시고, 그 성막을 통해서 속죄가 이루어지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속죄가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성막에 들어가면 언약궤가 있는데 그 언약궤를 덮는 두껑 즉, ‘덮개’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죄를 속한다는 의미는 ‘죄를 말끔히 씻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죄를 덮는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속죄소라는 의미는 바로 ‘덮개’를 가리키는 말인데, 그곳을 ‘시은소’라고 합니다.

‘언약궤’안에 세 가지 물품이 있습니다. 소위 ‘토라’라고 불리우는 십계명과 만나 그리고 아론의 싹난 지팡이가 있었습니다. 이 세가지는 기념물이고 상징적인 것입니다. 훗날 그들이 광야시절을 마치고서라도 항상 언약궤 속에 세 가지가 들어 있었던 것, 다시 말해서 길이 없는 광야시절에 그들을 인도했던 것들, 길이 없던 광야에서 그들을 인도했던 토라 즉, 하나님의 가르침, 교리는 우리로 하여금 그곳에서 살게 하였고 동시에 만나가 있었습니다. 먹을 것이 없었던 광야에서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것’(ax;/m, everything)으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또한 죽은 나무에서 새싹이 나왔다는 것은 영원히 생명을 우리에게 주신 분임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즉 우리가 교회에 예배드리러 나왔다는 뜻은 바로 이것들을 기억하기 위해서 나왔다는 것입니다. 다시말해서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속에 직접 내가 들어가서 나도 거기의 일원이 되어서 그것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 소식이 바로 좋은 소식이요 ‘복음’(’(eujaggevlion, 유앙겔리온)입니다.

그런데 이 성육신하신 말씀안에 ‘은혜와 진리’(cavrito" kai; ajlhqeiva")가 충만하다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은혜와 진리’(cavrito" kai; ajlhqeiva")라는 말은 그리 썩 좋은 해석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헬라인들이 생각하는 ‘진리’라는 말과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진리는 다르기 때문입니다. 사실 ‘은혜와 진리’(cavrito" kai; ajlhqeiva")라는 말은 히브리적으로 표현한다면 ‘dseje’(헤세드) 와 ‘tm,a>’(에메트)라는 단어입니다. 여기에서 ‘dseje’(헤세드)라는 말은 ‘시간이 실현속에서도 살아남는 신실함’입니다. 즉 좋을 때이든지 나쁠 때이든지, 건강할 때이든지 병들었을 때이든지 한결같이 끝까지 남아있는 신실함‘을 말합니다. 혹은 약속의 신실함입니다. 한번 약속을 하면 끝까지 그 약속을 지키는 상태, 변함이 없는 충성을 말합니다. 그리고 변함이 없는 애정, 친절을 말합니다.

구약에서는 아주 구체적으로 나타납니다. 마치 과부가 어디에가서 식량을 얻지 못했을 때에 농장주인이 다 추수하지 못하도록 이삭을 많이 남겨두고 그 여인들이 와서 충분히 다 가져갈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이 바로 ‘dseje’(헤세드)라는 것입니다. 상대방에 상관이 없이 변함없이 신실하게 애정을 표현해주는 것이 바로 ‘dseje’(헤세드)입니다.

또한 이 ‘dseje’(헤세드)와 항상 함께가는 단어가 바로 ‘tm,a>’(에메트)입니다. ‘진리’라고 번역되어 있는 이 단어는 비 인격적인 단어이지만 ‘tm,a>’(에메트)라는 단어는 ‘진실’ 혹은 ‘참됨’ 혹은 ‘성실’이라는 말로 인격적인 단어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히브리적인 관용구에 따르면 이 두 단어는 함께 사용되면서 하나의 개념을 강조하고 있는데, 그 중심개념은 바로 ‘신실함’, ‘믿음직스러운’ 혹은 ‘신뢰할만한’이라는 인격적인 관계에서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그렇다면 이 단어들은 결국 하나님을 표현하는 단어입니다. 하나님을 보면 정말로 친절합니다. 신실합니다. 한결같이 참되고 성실합니다. 이것을 헬라어로 번역한 것이 바로 ‘은혜와 진리’(cavrito" kai; ajlhqeiva")로 번역되었는데 이 글을 읽을 때에는 인격적인 구약의 단어를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여기에서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는 문구는 출애굽기 34장을 연상케하는 구절입니다.

먼저 출애굽기 32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사람들이 자기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신이라고 하면서 광란의 춤을 추었습니다. 그때 지도자였던 모세는 산에 올라갔습니다. 모세가 내려와보고서는 진노를 하고 두돌판을 깨뜨렸습니다. 출애굽기 32장이 있은 후에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언약을 다시 맺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모세가 올라가서 두 돌판을 받아오는데,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즉 ‘목이 곧은 백성들을 감당하지 못하겠다’고 하면서 길을 보여달라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길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영광’을 보여 달라고 하지만 역시 하나님은 ‘영광’도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다시 ‘하나님의 얼굴’을 보여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역시 얼굴도 보여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얼굴을 보게되면 죽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바위틈에 서 있으면 보여주겠다고 약속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 앞을 지나가는데, 하나님께서 바위 틈에 서있는 모세의 앞을 지나가시면서 모세의 얼굴에 하나님의 손으로 막고 지나갑니다. 하나님께서 지나가자마자 손을 떼었습니다. 결국 모세는 하나님의 얼굴을 보지는 못하지만 하나님의 뒷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크게 선언합니다. “여호와로다 여호와로다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tm,a>w< ds,j, Abr'w&Ograve;!yIP'a' &r,a, @WNj'w&Ograve;!Wjr' lae hw:hy&Ograve;hw:hy)라고 스스로 선포합니다. 여기에서 ‘자비롭다’는 말은 ‘불쌍히 여긴다’는 말입니다. 즉 ‘장이 끊어지는 듯한 슬픔’을 말할 때에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즉 하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길 때에, 어머니가 자식을 애틋하게 생각하는 것처럼 혹은 슬픔이 극에 달할 때에 이 단어를 쓰게 됩니다. 그런데 신약성경에서는 ‘은혜와 진리’로 번역을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을 기억하려면 지금 출애굽기에서 하나님께서 자기의 성품을 나타내면서 ‘인자와 진실’의 하나님이라고 선포하고 있는데 요한복음서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구약에서 말씀했던 바로 이 분처럼 ‘dseje’(헤세드) 와 ‘tm,a>’(에메트)가 가득찼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보면 철저하게 인격적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바로 이 사건을 연상시켜주듯이 요한복음 서론은 말하기를 율법은 모세를 통해서 주어졌으나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것을 강조해 주고 있습니다.

특별히 16절에 보면 ‘은혜 위에 은혜’라는 말은 헬라어로 ‘cavrin ajnti; cavrito"’(카린 안티 카리토스)라는 말인데, 여기에서 ‘ajnti’(안티)라는 단어는 ‘위에’라는 말인데 이 말은 ‘덮었다’는 말보다는 ‘반대한다’, ‘대치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은 ‘은혜 대신에 은혜’라는 말로 번역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새 언약의 은혜’라는 뜻입니다. 오래 전에 모세가 이스라엘을 위해서 중재했던 옛 언약을 대치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세보다 더 위대한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모세도 은혜를 주신 분입니다. 옛 언약의 은혜를 주셨는데 그것을 대치하고 그것보다 더 풍성한 새 언약을 주시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입니다.


제 3강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

오늘은 요한복음 1장 19절부터 마지막 절까지의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19절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세례자 요한에게 보내었다는 말은 아마도 산헤드린 공회 혹은 산헤드린 총회에서 제사장 혹은 레위인들을 위임해서 세례자 요한에게 보내었다는 추측을 해 볼 수가 있습니다. 보낸 목적은 ‘네가 누구냐?’, ‘너의 정체가 누구냐?’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증거’ 혹은 ‘증언’이라는 말이 등장이 되는데 아주 중요한 단어입니다.

이 제사장들이 세례자 요한에게 질문한 내용을 살펴보면 적어도 그 당시 사람들이 갖고 있었던 세가지 title이 나옵니다. 첫째는 그리스도요 두 번째는 엘리야요 세 번째는 그 선지자라는 단어입니다. 이것을 거꾸로 생각해 보면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이 아마도 종말론적인 인물-메시야라고 불리우는 인물-들이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제사장과 레위인들이 세례자 요한에게 그것에 대하여 물을 때에 세례자 요한은 단호하게 ‘아니라’는 대답을 합니다.

25절에서 그들의 질문에 의하면 메시야 혹은 그리스도나 그 선지자인 종말론적인 그 사람이 오게되면 놀라운 세례를 주는 것으로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26절의 ‘알지 못하였다’는 말은 이미 앞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이 세상은 빛을 알지 못하고 있다는 내용을 반복해서 연상케 해 주는 내용입니다. 31절에 보면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다’는 말을 통해서 세례자 요한과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음을 암시해 주는 내용입니다. 32절에 중요한 단어 ‘증거’가 나옵니다. 세례자 요한에 의하면 29절에는 예수님을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34절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본 내용에서는 ‘증언’들의 연속이 되고 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사실 요한복음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게 등장하는 단어가 있다면 그것은 곧 ‘증거’ 혹은 ‘증언’이라는 단어가 될 것입니다. 39절에는 ‘거한다’는 단어가 나오고 45절에 ‘율법’이라는 단어는 ‘토라’라는 단어로 번역하는 것이 옳을 듯 합니다.

먼저 우리가 요한복음 1장을 보게되면 요한복음서의 머릿글 다음에 나오는 19절에서 51절까지의 내용을 보면 공관복음서들의 기록된 내용과 달리 세례자 요한의 역할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26절의 세례자 요한은 이사야 40장 3절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므로서 세례자 요한이 누구이며, 어떤 인물인가라는 사실에 대하여 별로 관심을 갖고 있지 않고 다만 세례자 요한을 철저하게 증언자로서만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서에 나오는 대부분의 종교지도자들 또는 많은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무지한 사람들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7:28; 8:43; 12:37-40; 14:19절에 보면 그곳에는 유대인들과 이 세상은 예수님을 알 수 없다고 합니다. 유대인들과 세상은 예수님을 알고 싶어도 알 수가 없는 무능력한 사람들이지만 세례자 요한 만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진정으로 증언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는 것을 부각시켜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 ‘증언’이라는 단어는 요한복음에서만 동사형으로 ‘증거하다’는 말로 33회 등장됩니다. 그리고 명사형으로는 14회 등장됩니다. 그러면 합해서 47회 정도 ‘증거’ ‘증언하다’는 말이 굉장히 많이 등장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증거’ ‘증언’이라는 말을 거의 47회에 걸쳐서 반복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이유는 “예수는 그리스도이시오, 하나님의 아들이다‘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세례자 요한의 입(1:7; 1:8; 1:15, 32, 34; 3:26; 5:33 등)에서 나왔고, 사마리아 여인의 입에서 흘러나오게 됩니다(4:19). 또 5장에 보면 하나님 자신의 입으로부터 ’예수는 그리스도시오. 하나님의 아들‘(5:32~37; 8:8)이라고 증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 많은 무리들이 고백‘(12:17)하고 있습니다. 또한 성령님도 이 사실을 증거(15:26)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예수님 자신이 증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헬라어에 보면 “ejgwv eijmi”(에고 에이미)라는 말이 나오는데, ‘나는 ~이다’라는 말입니다. 어느 학자가 말을 했던 것처럼 이 “ejgwv eijmi”(에고 에이미, 나는 ~이다)의 문구는 사실상 ‘신현양식’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을 계시하고 자기 자신을 드러낼 때에 사용하는 단어로서 “Wj ynIa}”(아니 후, 나는 ~이다)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이 말이 신약에 와서 “ejgwv eijmi”(에고 에이미, 나는 ~이다)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자기 자신을 ‘나는 ~이다’라고 표현하는 이 구절(요 6:39, 48, 51; 8:12; 9:5; 7:7, 9, 11, 14, 11:25; 14:6; 15:1, 5 등)을 통해서 마치 자기가 구약의 하나님과 같다는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유대인들이 들을 때에는 참람한 표현인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그리스도라는 분에 대해서 증거하는 자, 증언하는 자에 불과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입니다.

또 한가지 독특한 것은 예수님은 성령을 담고있는 분임과 동시에 성령을 주시는 분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32절을 보면 ‘성령이 그 위에 머물렀다’는 말이 나오는데 이 구절은 매우 특이한 구절입니다. 요한복음에 자주 등장하는 동사인 ‘mejnw’(메노, 머무르다)는 40회 이상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어딘가 지금 거처를 정해놓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는 하나님과 예수님의 관계를 ‘아버지와 아들’로서 아주 친밀하게, 그리고 함께 속내를 다 드러내놓고 이야기하는 모습을 그릴 때에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그 위에 머물렀다는 그 단어는 아주 친밀한 상태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 ???”(소드 야훼)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소드)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협약’ 혹은 ‘토론 혹은 의사개진, 친밀함, 경륜, 계획 등으로 번역되는 단어입니다. 이 말은 마치 하나님께서 저 천상에 계실 때에 어떠한 안건이 있거나, 꼭 집행해야 할 일이 있으면 혼자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측근들-천사, 하늘에 있는 영체들-의 의견을 듣는 모습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현상들을 ’천상의 어전회의, 천상의 각료회의‘라고 하는데, 이때에 그들은 아주 가까운 관계에 있기 때문에 자기의 속 마음을 다 드러내어 놓고 회의를 진행하게 됩니다. “???? ???”(소드 야훼)라는 말은 모든 각료들의 마음의 이야기들을 다 듣고 일을 수행하는 하나님의 마음을 표현합니다. 그러면 천사들이 나가서 일을 할 때에 바로 자기의 일처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서 선지자들 역시 “???? ???” 즉, 하나님의 생각들 속에 직접 들어가서 하나님의 마음, 의도, 뜻을 알아서 자기의 사명과 소명으로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거한다’는 말은 아버지가 나를 알고, 내가 아버지를 안다는 의미입니다. 얼굴만 보아도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를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관계가 바로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 사이에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함께 머물러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제자도가 모습은 그분의 마음, 그분의 생각, 그분의 계획들을 그 안에 들어가서 충분히 이해하고 그 안에 머물러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말합니다. 또한 예수님 위에 성령이 머무르면서 성령과 예수님과의 관계는 완벽한 '앎'의 관계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32절과 33절에서 성령이 그 위에 머물렀다는 의미는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완전하게 충만하게 채워졌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이 머무르고 친숙한 교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성령님의 마음을 알고 성령님도 예수님의 마음을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완전하게 충만하게 채움을 받은 분일뿐만 아니라 동시에 이러한 성령을 다른 사람에게 주실 자격이 있는 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성령세례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바로 여기에서 주체는 바로 예수님입니다.

또 하나는 32절에 보면 '성령이 비둘기같이 하늘로서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라는 구절은 공관복음서에서 볼 때에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는 장면입니다. 그러나 이 구절에서는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다는 것보다는 '머물렀더라'는 단어에 강조점을 두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새로운 시대의 전령자 즉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서 새로운 시대가 지금 열리기 시작되었다는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새로운 시대를 열고 있는 분이며 성령은 새로운 시대의 전령자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성령의 사역은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서 새로운 시대, 새로운 세계가 지금 열렸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전달자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령이 비둘기 같다’는 말은 온유하고 겸손하다는 의미보다는 새로운 시대의 전령자라는 의미입니다.

분명히 19절에서 51절까지의 내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증인’, ‘증언’에 관한 이야기이며, 세례자 요한이 제일 첫 번째로 증언자였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말라기 4장 5절에 있는 것처럼 세례자 요한은 ‘엘리야’도 아니고, ‘그리스도’도 아니였고, 신명기 18장 18절에 있는 ‘그 선지자’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문헌에 보면 신명기 18장 18절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직전에 모압평지에서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서 마지막 고별설교를 합니다. 이 부분에서 장차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직면할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미리 노출시키고 그것들을 어떻게 대치할 것인가를 이야기하는 본문 중에 하나입니다. 신명기 18장에 보면 ‘너희가 만일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복술자나 박수하는 자들처럼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런 종류의 예언자들말고 내가 너희를 위해서 나같은 선지자 하나를 예비할 것인데 그 선지자가 내가 주는 모든 말들을 다 고하여서 하나도 남김없이 다 이야기 할 것이다’는 이야기입니다.

소위 예언자라는 것이 미래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서 이야기 해 줄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예언자는 천상의 회의에 참여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다 알고 그것을 남김없이 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야기 해 줄 수 있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예언자였습니다. 그 예언자의 효시가 모세였습니다. 왜냐하면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이 하시고 싶은 이야기들을 대신 해야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말라기 4장 5절에 예언되었던 것처럼 여호와의 날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렇다면 ‘여호와의 날’이 언제입니까?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인간의 모든 잘못들을 징계하시고 새로운 시대를 열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도래하는 날입니다. 이 말을 최초로 사용한 구절이 바로 아모스서 5장 18절에 나옵니다.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는 자여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느뇨 그 날은 어두움이요 빛이 아니라”

아모스에서 잘 보여주듯이 그 당시 이스라엘은 늘 마음속에 여호와의 날이 도래하기를 기대했습니다. 왜냐하면 여호와의 날이 자기들에게 구원을 가져다주고 축복을 가져다 주는 날로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신앙의 역사 가운데에서 최초의 여호와의 날이 출애굽의 날이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출애굽때에 하나님께서 바로를 치시고 이스라엘에게 구원을 주셨던 그 날, 이스라엘 사람들은 항상 여호와의 날로 기억했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날이 우리에게 온다라는 것은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주시고, 우리에게 해방을 가져다주시고, 축복을 가져다주시는 날로 생각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어려운 일들이 많이 있을 때에 종말론적인 여호와의 날을 갈망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에 나타나는 예언자가 이야기하기를 ‘당신들이 생각하는 여호와의 날은 빛이라고 생각했는데, 빛이 아니라 어둠이라. 광명의 날이 아니라 흑암의 날이다’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심판의 날로 오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하나님께서 항상 자신들의 편이라고 생각을 했었는데, 하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치기위한 대적자의 모습으로 오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여호와의 날’의 전통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말라기 4장 5, 6절의 말씀을 보면

5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6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말라기 선지자는 구약의 맨 마지막 선지자요, 엘리야는 한참 위에 등장한 선지자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때만 하더라도 이스라엘 사람들 마음속에는 엘리야라는 인물이 매우 신비로운 인물이고, 하늘 나라로 갔던 엘리야가 다시 환생하거나 다시 올 것이라는 기대감이 컸습니다. 바로 이것을 염두해 두고 여호와의 두려운 날이 임하기 전에 먼저 엘리야를 보낼 것이라는 것이 말라기 4장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은 나는 그 선지자가 아니라고 대답합니다. 사실상 세례자 요한은 엘리야였습니다. 그런데도 요한복음에서는 ‘나는 엘리야가 아니라’라고 강조하는 이유는 세례자 요한의 전적인 삶은 증언자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그가 이사야 40장 1절, 3절을 인용하고 있는데, 이곳에서는 하나님께서 굉장히 부드러운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1너희 하나님이 가라사대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3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

여기에서 ‘너희는’은 누구를 가리키고 있습니까? 바로 천상에 있는 하나님의 종들, 천사들입니다. 그리고 3절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는 많은 천사들 가운데에 어느 한 천사가 들려주는 소리입니다. 그 천사의 외침을 살펴보십시오.

'여호와의 길’과 '하나님의 대로'를 사막에다 놓는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이 소리를 천상에서 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광경을 이사야가 보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사야 6장에서 이사야가 천상에서 하나님께서 앉아계시는 환상을 보실 때와 거의 대칭이 되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이사야가 그 장면을 보면서 들려오는 소리가 바로 40장 3절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구절을 세례자 요한이 인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인용할 때에 조금 변형을 시키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 23절의 말씀은 이렇습니다.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하니라

세례자 요한 자신은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일 뿐이라고 강조하면서 이사야서의 본문을 인용하기는 인용했지만 원래 이사야서의 본문의 뜻과는 조금 다르게 인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세례자 요한은 단순히 '증언자’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바로 증언자의 태도를 잘 부각시켜 주는 모습입니다.

36절에서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을 어린양이라고 표현했을까요? 이것은 매우 구약적인 표현입니다. 이사야 53장을 보면 여호와의 고난 당하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매우 충격적인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전통적으로 일반세상 철학에서는 신은 고난 당하는 법이 없습니다. 고난과 고통은 사람만이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성경은 하나님도 고난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대행자인 종도 역시 고통을 당한다고 합니다.

따라서 요한복음에서는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난과 고통가운데에 고난을 받는 하나님의 종이 될 것이며 그 극치점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바로 그 모습이 ‘십자가에 달리신 메시야’ 라는 말 자체는 그 당시 헬라인들과 유대인들에게 scandal이 되었습니다. 이 scandal이라는 말의 뜻은 헬라어로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유대인들과 헬라인들의 머릿속에서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고 넘어갈 수 없는 것이 있다면 바로 십자가에 달리신 메시야라는 것입니다. 그 두가지 사건이 동시에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떻게 신이 십자가에 달릴 수가 있으며, 어떻게 하나님이 죽을 수가 있습니까? 그러므로 이 표상을 통해서 받았던 충격이라는 것은 이루 말할 수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의 '어린양’이라는 이 구절은 출애굽기 12장에 나와있는 유월절에 관한 이야기와 매우 흡사합니다. 예수님은 출애굽 시대에 유월절 어린양이라고 표현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출애굽을 원년으로 삼았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사에 있어서 그들로 하여금 새롭게 태어나게 하고 그들을 출발의 의미에서 출애굽 이 사건은 그들에게 원년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를 어린양으로 부른 이유는 새로운 시대, 새로운 원년이 예수를 통해서 시작되었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유월절의 어린양들은 뼈를 꺾지 않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서도 유대인들이 빌라도에게 가서 십자가에 못박힌 사람의 다리를 꺾어서 시체를 처리해달라는 요청이 나옵니다. 요한복음 19장 31~34절의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31이 날은 예비일이라 유대인들은 그 안식일이 큰 날이므로 그 안식일에 시체들을 십자가에 두지 아니하려 하여 빌라도에게 그들의 다리를 꺾어 시체를 치워 달라 하니 32군병들이 가서 예수와 함께 못 박힌 첫째 사람과 또 그 다른 사람의 다리를 꺾고 33예수께 이르러는 이미 죽은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아니하고 34그 중 한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여기에서 예수의 다리를 꺾지 않았다는 표현은 요한복음서에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하나는 옆구리를 찔렀다고 했을 때에 이 사건은 유월절 어린양을 도살할 때에도 어린양의 피는 다 쏟아 바쳐야 한다는 것이 토라의 가르침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달리셨을 때에 포도주를 담근 스폰지를 우슬초 가지에다 발라서 그 입술에 가져간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것 역시 예수님을 유월절 어린양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도살한 유월절 어린양의 피에다 우슬초를 섞어서 유대인들은 문지방에 발랐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렸을 때에 우슬초에 신 포도주를 묻혀서 가져다준 것 역시 예수님을 유월절의 어린양으로 표현하는 구절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을 ‘세상죄를 지고가는 어린양’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죄’에 대한 내용을 잠시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없애기 위해서, 우리의 죄를 지고 가기 위해서, 우리 자신의 죄성 그 자체를 없애기 위해서 오셨다고 이야기들을 합니다. 누가복음 5장 17절 이하에 나오는 이야기를 살펴보면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기를 ‘네 죄사함을 받았다’고 이야기합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자기의 사명이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마도 여기에서 ‘죄’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앞에서 이야기했던 어린양과 같이 충격적인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에 ‘죄’라는 것은 도덕적인 것을 많이 이야기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가운데에서 ‘죄’라고 하면 부도덕한 상태를 말하게 됩니다. 물론 그러한 것들이 죄스러운 것이 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우리가 도덕한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것 역시 ‘죄’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도덕적이라고 하는 것은 종종 자만, 교만, 자기 중심적인 것으로 가득찬 독약이 들어간 사과와도 같습니다. 도덕성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굉장한 위험이 따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원수들, 예수님의 대적자들은 다 도덕적인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들과 예수님 사이를 갈라놓았던 것들은 부도덕한 것이 아니라 도덕성들 때문에 갈라졌다는 것이 충격적인 사실입니다. 이 말은 ‘죄’라는 것은 우리가 행하는 그 무엇이 아니라 죄는 일차적으로 우리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로부터 숨겨져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죄로부터 구출 받아야 하며, 그 목적 때문에 예수님께서 오셨다는 것이야말로 가장 복된 소식입니다.

또 한가지는 ‘나다나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분명히 이 구절은 창세게 28장에 있는 야곱의 현상을 보여주고 있는 구절입니다. 그런데 창세기 28장에 대한 탈굼의 전통에 의하면 천사들이 천상의 보좌에 있는 야곱을 보기 위해서 하나님의 보좌로 올라갑니다. 그리고 야곱의 지상적인 형태, 모습을 보기 위해서 다시 내려옵니다. 요한복음서에 나오는 ‘인자’는 예수님의 지상사역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영화롭게되고, 높이 들리신 분으로서 저 위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요한복음서에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높이 들리는 것에 대해서 영화롭게 되었다고 표현합니다. 다른 공관복음서에서는 예수님께서 고난 당하신 것과 부활하셔서 승천하신 것을 두 개의 별개의 사건으로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요한복음서에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높이 올라가신 그 자체는 영화롭게 되었다고 합니다.

나다나엘에게 예수님께서 ‘네게 더 큰 것을 보리라’고 말씀하신 것은 2장, 3장에 나오는 어떤 기적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신 일 그리고 그 십자가에 달리신 일 자체가 예수님의 가장 영화롭게 되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영화와 영광을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늘이 열렸다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어찌보면 하늘이 열렸다는 말은 1장 1절에서 18절까지의 서문에 나타나고 있는 것처럼 하늘과 땅이 만나는 우주적인 화해, 그리고 하늘이 열림으로 인하여서 이 땅도 살만한 가치가 있는 곳이라는 희망의 메시지를 우리들에게 주고있는 것입니다.

거기에 ‘사닥다리’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하지만 그 표현은 고대 바벨론 혹은 메소포타미아의 신전이 있었는데, 마치 사다리처럼 올라가는 돌계단처럼 되어 있고 맨 위에 제단이 있습니다. 바로 이것을 우리는 야곱의 사닥다리라고 표현합니다. 야곱이 본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사닥다리가 아니라 신전의 탑의 모양입니다. 이 탑은 인간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창세기 28장에서는 그가 꿈 가운데에 이러한 환상을 보았다는 것은 꿈은 계시의 방편입니다. 꿈은 우리가 죽은 자처럼 아무런 의식이 없었을 때에 일방적으로 내려온 계시라는 것입니다.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하게 오르락 내리락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지상에 있어서의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영화롭게 되고 영광스럽게 된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새로운 시대를 열고있는 상징을 의미입니다. 에스겔 1장에 보면 하늘이 열리는 과정에 대하여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늘이 열리는 과정 가운데에서 에스겔은 환상가운데에서 인자같은 자가 나타나는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하늘’이라는 말은 그런 의미에서 새로운 시대를 여는 상징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은 아직까지 하늘과 땅이 만나지 못한 갈림의 세상 가운데에서 하늘이 먼저 그 품을 열어서 땅을 얼싸 안는 것은 진정한 회복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우리가 화해와 화목의 부르심을 받았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가 배워야 할 가장 중요한 내용입니다.



제 4강 가나 혼인잔치와 성전청결사건


오늘은 요한복음 2장의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1절부터 살펴보면 ‘사흘 되던 날에’라고 시작하고 있는데, 언제가 첫째 날인지, 둘째 날인지 앞에서 언급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잘 알 수가 없습니다. 갑작스럽게 요한복음 2장에서는 세 번째 날이라고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4절에 ‘때’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것은 매우 종말론적인 그리고 의미심장한 때를 말하고 있고, 11절의 '표적'(세메이온)은 무엇인가 지시하는 Sign입니다. 그리고 이 11절은 분명히 요한복음 저자의 논평이라 할 수가 있는데, 예수님께서 이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첫 표적을 행하였고, 이 표적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독사)이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 ‘영광’이라는 말은 1장에 살펴본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나신 상태를 말합니다. 전문적인 용어로 「θεο Παρουσiα」(데오 파루시아)라고 할 수가 있는데, ‘θεο’라는 말은 ‘하나님’이란 말이요, ‘Παρουσiα'는 ‘종말’, ‘~을 본다’, ‘임재한다’, ‘내려온다’ 등으로 사용되는데, ‘θεο Παρουsiα’라고 하면 ‘하나님께서 임재하셨다’ 즉 신의 현현을 말합니다. 여기에 보면 「θεο Παρουσiα」(데오 파루시아)라는 단어는 직접 나오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그 영광을 예수 그리스도의 표적을 통하여서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었다는 11절의 말씀을 통해서 알 수가 있습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어머니와 그 형제들과 함께 가버나움에 내려가 거기서 여러 날 머무신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13절부터는 예루살렘에서 일어나는 사건입니다. 22절의 ‘믿었다’는 말은 부활절을 경험한 후에 그 부활을 경험했던 사람들이 믿었다는 의미입니다. 즉 부활의 언덕 저편에서 부활의 언덕 이편을 바라다볼 때에 비로소 믿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보시다시피 요한복음 2장은 두 가지의 Topic을 다루고 있습니다. 하나는 '가나의 결혼잔치'에 관한 것과 또 다른 것은 '새로운 성전에 관한 주제'입니다. 분명히 1장 51절에서 나다나엘에게 예수님께서는 ‘더 큰 일(들)을 보리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 약속이 지금 이루어지기 시작하는 첫 번째 단계가 2장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물론 위대한 일들이 최종적으로 완벽하고 충만하게 이루어지는 것은 바로 장래에 되어질 일 즉, 때가 이르면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하게 될 그 때에 이 위대한 일들이 성취되겠지만 그러나 그 과정 가운데에서 첫 번째는 가나 혼인 잔치 집에서부터 시작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의 여러 표적들 가운데에 첫 번째 표적'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아마 요한복음서를 처음 읽게되면 여기의 '기적', '이적'에 관한 것에 많은 이야기들로 인해 충격을 받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 기적이 무엇인가를 잘 생각하는 것은 복음서를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하게 작용합니다. 공관복음서를 볼 때에 한 마디로 '기적'이라고 하는 것은 이 세상 가운데에 다가오신 하나님의 주권적인 통치를 외적으로 드러내는 하나의 가현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적이라고 하는 것은 항상 하나님의 온전한 다스림, 하나님의 온전한 통치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 즉 기적 자체가 의미있는 것이 아니라, 그 기적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지금 여기에 와서 온전한 통치, 다스림이 시현되고 나타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기적은 여러 가지로 나타나지만, 이러한 기적들을 보면 공통적인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타락 이전의 첫 번째의 완벽한 창조세계로의 복원을 보여주는 능력들입니다. 다시 말해서 눈먼 자가 보게되면 행복한 것처럼, 벙어리가 말을 하게 되면 행복한 것처럼 기적은 하나님께서 다스리는 사회, 나라가 샬롬으로 가득차고 진정한 행복이 가득찬 것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그 기적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시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요한복음 저자는 예수님을 통하여서 하나님의 샬롬의 세계가 이 땅에 지금 실현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적은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데 복음서 가운데에 반복되어 나오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복음서에 나타난 이 기적들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하시는 전반적인 일이 궁극적으로 완성될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기적에는 효력 혹은 과시가 나타나게 되는데 공관복음서에서는 기적이 능력으로 나타납니다. 다시 말해서 공관복음서의 강조점은 그 기적들이 무엇인가를 가리켜주는 것들이 실제화되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기적이라는 것은 실제화되고 능력으로 나타나는 것이 무엇인가를 가리켜주고 있다는 것 즉 '기적'은 '효력'과 '지시'를 나타내주고 있는데 이러한 의도는 요한복음서에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 일을 통해서 무엇인가를 가리켜 주고, 지시해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다스리시고 통치하신다는 것, 실제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소위 '기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기적들을 통해서 크리스천의 삶은 '성례전'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함께 나누어 먹는 떡과 포도주가 단순히 포도주와 떡 이상의 것, 어떤 실체의 것들을 가르치고 있다는 것을 믿음의 눈으로 보기 전까지는 우리가 기독교의 신앙이 무엇인지를 모릅니다. 또 우리는 대부분 이러한 제3의 눈들을 상실하고 살아갑니다.

제3의 믿음의 눈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면서 경이, 놀라움, 새로운 세계를 맛보고, 현재의 실체 너머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세계를 바라다 볼 수가 있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분명히 하나님의 은혜로운 세계는 도래할 것이고, 눈먼 자가 보게 될 것이고, 벙어리가 말을 하게 될 것이고, 고통하는 자가 새로움을 얻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 눈으로 바라보는 것을 요한복음에서는 '믿는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제가 지난 주일에 설교 도중에 이러한 어린 아이들의 동화 이야기를 예화를 말씀드렸습니다. 어떤 어린 아이가 자기 동네의 한 거리에서 서커스 행렬이 있었는데, 달려나가 그 행렬을 보았습니다. 그 행렬을 보고 난 후에 그 어린 소년은 아버지에게 달려와 말을 합니다. "아빠, 내가 길거리에 나가 보았는데요, 전봇대만한 말 다리가 있고, 거기에 정말로 멋있는 마차가 있고, 덤블링하는 아이들이 있고, 입에서 불을 내품는 마술사가 있었어요.”

아이는 너무나도 찬란한 모습들을 보고 그 광경들을 자세하게 아빠에게 얘기를 합니다. 그런데 그 소년의 아빠는 시큰둥하게 듣다가 "네가 본 것은 말 한 마리와 마차 하나를 보았어”라고 대답을 합니다. 그런데 그 소년은 자기가 본 것은 ‘말과 마차’가 아니라 장엄한 서커스 퍼레이드, 행렬을 보았다고 주장을 합니다.

이러한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어른들은 제3의 눈들을 상실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제3의 눈들을 상실하는 순간부터 우리는 기쁨과 즐거움, 환희 등이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무엇입니까? 성경은 우리에게 한 마리의 말과 하나의 마차를 보는 사람들로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서커스 행렬을 제3의 눈으로 바라다볼 수 있는 사람들의 모임(Gallery)들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기적을 보면 기적의 이야기들을 알 수가 있지만 성경이 우리에게 기적이라고 이야기할 때에는 이 두 가지의 이야기들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우시고 자비로우시고 주권적인 다스림과 통치가 나타날 때에 그것이 얼마나 강력하게 나타나고 있는가의 효력에 대한 이야기가 나타나고 있는 곳이 공관복음이요, 하나님의 은혜로우시고 자비로우시고 통치가 지금 여기에 와서 나타나는데 그것이 무엇인가를 지시하고 가르치고 있는 것을 제3의 눈으로 바라다보기를 촉구하는 것이 바로 요한복음이라는 것입니다.

기적에는 두 양면 즉 하나는 ‘효력, 능력(power)’이요 또 하나는 '지시(Sign)'가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관복음서에서는 이 단어를 쓸 때에 ‘duvnami"’(듀나미스, 능력)라고 번역을 합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에서는 ‘duvnami"’(듀나미스)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고 '세메이온' 즉 Sign과 같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물론 공관복음서에서도 이러한 능력을 나타날 때에는 제자들이 그 뒤에 깔려있는 의미를 파악하도록 요청(막 8:14~21)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요한복음에서는 '세메이온' 즉 Sign이 우리로 하여금 이러한 일들이 무엇을 가르키는가, 지시하는가에 대하여 귀를 기울이고, 제3의 눈을 가지고 바라다보고 그 순간 믿게 하기 위한다는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앞에 말씀드린 예화에서 서커스 퍼레이드를 본 어린 소년은 요한복음에서 말하는 '영광'을 본 것입니다. 이처럼 여기에 제자들과 많은 사람들도 이 가나 혼인잔치에서 일어나는 이 일들을 통하여서 예수 그리스도안에 담겨져 있는 하나님의 은혜롭고 놀라우신 주권적인 다스림과 통치, 세상, 하나님의 세계를 바라다 볼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전체를 볼 때에 제자들은 오해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제자들을 보면서 요한복음서를 읽는 저자-자신들을 포함한-들은 서커스 행렬을 바라다본 소년처럼 믿음으로 바라보아야 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표적'(세메이온)이 모두 일곱 번 등장하는데 그것은 모두 말씀이 육신을 입고 우리가운데에 거한다는 것을 증거해 주고 그리고 인간적인 삶, 인간적인 육체를 입고 오신 예수님이 행동하고 있는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이라는 것을 또한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이야말로 하나님의 현존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θεο Παρουα’입니다.

2장에는 갈릴리 가나 혼인 잔치에서 일어났던 기적과 예루살렘의 성전사건의 기사가 나타납니다. 하나는 갈릴리요, 하나는 예루살렘입니다. 지역적으로 보더라도 갈릴리는 북쪽이요, 예루살렘은 남쪽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일어났던 이야기는 예언자적인 행동이요, 예언자적인 말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겉으로 보면 내용이 서로 다릅니다. 그렇다면 2장에 이러한 서로 다른 기사를 같이 다루고 있는 요한복음 저자의 의도는 무엇인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가나 혼인잔치(2:1~11)

기적을 담고있는 본문들을 보면 기적이 일어나는 환경에 대하여 잘 묘사해 줍니다. 다음에 기적이 시행되며 그리고 기적에 대한 회중들의 반응을 보여주게 됩니다. 그런데 요한은 이러한 기적 이야기들을 자세하게 기록하거나 제자들의 반응을 기록하는데에는 별로 관심이 없이 이러한 것들을 평범하게 ‘shmeivwn'(세메이온) 즉 Sign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렇다면 이 사건 즉, 물이 변하여서 포도주가 된 것이 어떻게 그리스도에 대한 Sign일까요? 6절에 보면 유대인들의 정결예식에 관한 ‘물’이 있는데 이는 유대주의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이 기적은 유대적 색깔이 강한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었습니다. 구약에서나 혹은 고대사회에 있어서 ‘포도주’는 일반적으로 축제 때 많이 사용(시 104:15; 전 10:19)합니다. 또한 구약성경에서 ‘포도주’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그의 백성을 위해서 구원을 베풀어주시고 그 구원이 너무나도 기쁘고 환희스러운 세계를 희망하는 것이 포도주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약성경의 예언서를 보면 포도주 혹은 포도에 관한 이야기들은 대부분 장차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구원을 가져다주고 사람들은 너무 기쁘고 즐겁고 그것을 희망하도록 하는 용어로 사용하는 것(사 55:1; 62:8~9; 호 14:7; 욜 2:19,24; 3:18; 암 9:13~14):이 바로 ‘포도주’입니다.

그러면 이 기적은 유대주의의 물 대신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의 시대에 포도주를 주실 것 즉 옛것이 새것으로 변하고 바뀌어진다는 것을 지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연회장의 증언은 새것이 얼마나 탁월한지를 10절에서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이야 말로 최상의 포도주라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최상의 포도주라는 사실은 요한복음 15장에서 예수님이 포도나무라는 말씀에서 잘 알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표현은 구약적인 배경이 있을 것입니다. 그 배경 가운데에서 잘 표현하는 곳은 이사야 5장 1절에서 7절에 나타나는 ‘포도원의 노래’가 있습니다. 이 본문은 결혼과 관계를 맺고있는 본문입니다. 좀더 쉽게 말씀을 드리면

A의 친구 B가 있습니다. 그리고 A와 결혼할 C가 있습니다. A는 C에 대하여 많은 관심과 사랑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왠지 C는 A에 대하여 별로 관심을 갖지 않게되고 다른 남자들에게 눈을 팔게되자 A가 속이 상하게 됩니다. 그런데 A라는 사람은 직설적이지 못한지라 그의 친구 B가 지켜보다가 C에 대한 A의 애틋한 사랑을 시로 표현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B가 A를 위해서 노래 한 수를 지었는데 그 노래가 바로 ‘포도원의 노래’라는 상징을 통해서 A의 마음을 대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노래는 단순히 포도원의 노래가 아니라 결혼에 관한 노래입니다.

그리고 결혼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 바로 포도에 관한 것입니다. 1절에 ‘나의 사랑하는 자’라는 말은 B가 A를 사랑하는 관계가 아니라, C를 사랑하고 있는 나의 친구 A라는 표현입니다. 그 A에게 C와 같은 포도원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A의 친구 B는 그 포도원에 대하여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친구 A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내 친구 A는 평생을 C를 위해 노력하고 헌신합니다. A에게 있어서는 C를 사랑하는 일 자체가 행복입니다. 그런데 그토록 C를 위해 헌신하고 노력하는 A에게 C가 배반을 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여기에서 C는 '이스라엘'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포도주, 최상의 포도주는 예수라고 한다면 예수야말로 새로운 이스라엘, 참 이스라엘이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태어났다고 해서 이스라엘이 아니고, 외형적으로 토라를 들고 있다고해서 이스라엘이 아니며, 외형적으로 그들이 약속의 땅 팔레스타인에 살고있다고 해도 이스라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가 진정 이스라엘이요, 참 포도나무요, 예수님께서 진정으로 기쁨을 가져다 주실 참 이스라엘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분과 연합하여 우리도 참 이스라엘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종말론적인 포도주라는 것입니다.

'물'과 '포도주'에 관한 것은 요한복음서에서 굉장히 중요한 상징적인 용어입니다. 이 포도주에 관한 것은 에베소서 5장 18절에서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자기가 무엇에 의해 Control을 받는 것, 술에 지배를 받는 것처럼 성령의 지배를 받으라는 명령입니다.

오늘 본문 1절에 보면 '사흘되던 날'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주변을 아무리 찾아보아도 첫째, 둘째 날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물론 어떤 학자들은 이것이 구약의 출애굽에서 시내산 전승과 관계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출애굽 19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기를 보여주시고 자기를 계시하는 가장 절정기가 바로 율법을 수여하는 것입니다. 그 율법수여가 제삼 일에 행하였다는 기록(출 19:10,11,16)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모세를 통해서 옛 율법, 옛토라를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었다고 한다면 여기 '제삼일'에 라는 말은 새로운 언약의 계시, 그리고 비로소 이것을 함께 마시는 자들은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들이 출범한다는 의미가 담겨있다는 것이 가나혼인잔치에서 시작되고 있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율법을 수여하신 것처럼 아마 여기에 새로운 율법 혹은 새로운 언약을 계시해 주시고 또한 잔치 집에 참석한 사람들, 하나님의 백성들이 지금 시작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구절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해석은 조금 무리가 따릅니다. 출애굽 본문에는 첫째 날과 둘째 날에는 준비하는 과정을 통하여 셋째 날에는 자연스럽게 이러한 일들이 있었는데, 요한복음 2장 1절에는 첫째 날과 둘째 날에 준비하는 과정의 기록은 전혀 나타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면 이 해석보다는 더 나은 해석이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죽으셨다가 부활하시고 한참 후에 쓰여진 책입니다. 그러면 요한복음을 읽는 독자들은 '제삼일'이라는 단어를 볼 때에 바로 예수님의 부활을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서 새로운 때가 시작될 것이라는 것을 연상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저자는 이 본문을 통해서 의도하는 것은 부활절 사건을 통해서 선포되었던 메시야의 구원의 시대가 예수님의 기적(Sign)으로 드러났다는 것입니다. 즉 요한복음 독자들은 이미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사흘 되던 날'이라는 말을 들을 때에는 또 다시 기쁨과 감격이 생겨난다는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우리가 메시야의 시대, 포도주를 마시는 시대, 기쁨과 즐거움을 주는 시대에 살고있고, 우리는 참 포도나무가 되신 예수와 연합하여서 우리도 새로운 이스라엘이 되어서 순종하며 사는 순결한 백성이 되었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54장 4절~8절까지의 말씀을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4두려워 말라 네가 수치를 당치 아니하리라 놀라지 말라 네가 부끄러움을 보지 아니하리라 네가 네 청년 때의 수치를 잊겠고 과부 때의 치욕을 다시 기억함이 없으리니 5이는 너를 지으신 자는 네 남편이시라 그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시며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시라 온 세상의 하나님이라 칭함을 받으실 것이며 6여호와께서 너를 부르시되 마치 버림을 입어 마음에 근심하는 아내 곧 소시에 아내 되었다가 버림을 입은 자에게 함같이 하실 것임이니라 네 하나님의 말씀이니라 7내가 잠시 너를 버렸으나 큰 긍휼로 너를 모을 것이요 8내가 넘치는 진노로 내 얼굴을 네게서 잠시 가리웠으나 영원한 자비로 너를 긍휼히 여기리라 네 구속자 여호와의 말이니라

여기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바로 결혼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 본문은 결혼에 관한 내용을 기록하므로 메시야의 구원의 시기를 상징하고 있는 본문입니다. 결혼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포도주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또한 이사야 62장 4절 5절 말씀을 보면

4다시는 너를 버리운 자라 칭하지 아니하며 다시는 네 땅을 황무지라 칭하지 아니하고 오직 너를 헵시바라 하며 네 땅을 쁄라라 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를 기뻐하실 것이며 네 땅이 결혼한 바가 될 것임이라 5마치 청년이 처녀와 결혼함같이 네 아들들이 너를 취하겠고 신랑이 신부를 기뻐함같이 네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시리라

'헵시바'라는 말은 '기쁨', '즐거움'이라는 뜻입니다. 또한 '쁄라'는 의미는 '결혼한 자'라는 의미인데, 더 이상 버림받는 여인이 아니라 결혼한 여자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 본문 역시 이사야 54장처럼 결혼의 기쁨, 결혼의 즐거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결혼 자체는 구약성경에서 메시야의 구원의 시기를 항상 상징하고 있습니다. 메시야가 우리를 구원해주고 우리를 받아주게 되면 그때에는 결혼잔치와 같다는 의미입니다. 물론 공관복음서에서도 이러한 내용을 보여주고 있습니다(막 2:19~20; 마 22:1~14). 따라서 결론적으로 이 가나혼인잔치는 그리스도를 통하여서 메시야의 시대가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초림을 통하여서 종말론적인 새로운 시대가 이미 도래하였고, 그것이 완성되어지고 충만한 것은 앞으로 우리가 기대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성례식 때에 포도주를 마시는데, 포도주를 마시는 것은 두 가지 기능 즉, 하나는 이미 우리를 위하여서 시작된 그 메시야의 시대-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를 「기억」하고 「기념」하며, 앞으로 장차 메시야의 시대가 완전하게 이루어지면 대규모 천국의 연회가 이루어지고 그 연회석상에서 함께 즐거워할 것을 「기대」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전체는 한마디로 슬픔의 장소, 시간이 아니라 기쁨의 장소요 기쁨의 시간입니다. 성례의 의미가 바로 기쁨의 축제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 새로운 이스라엘은 나를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놀라운 하나님의 일-십자가사건-을 통해서 우리를 위해서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자비로우시고 주권적인 놀라운 일들, 샬롬과 하나님의 나라들을 이미 우리에게 시현해 보여주셨던 것들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기억이라는 말을 영어로 Remember라고 합니다. 이 말은 Re 와 member의 단어가 합성된 단어입니다. 즉, 다시 member가 된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우리에게는 추억할 말한 이야기가 있을 때에 가능합니다. 우리가 기억을 상실하면 ‘치매’라고 합니다. 이 말은 이분과 내가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이야기 속으로 들어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원래는 그 이야기 속에 함께 생활하였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기억이 없을 때에는 member가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신앙은 이야기 공동체에 참석하므로 신앙은 유전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공동체는 이야기공동체입니다. 그러므로 기억상실만큼 비참한 것은 없습니다. 기억을 해 보니까 교회 공동체에서 은혜가 무엇인지를 알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기억하기 위해서 모이는 날이 주일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들을 기억하기 위해 모이는 날이 주일날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기억하고 기대하므로 현재 우리의 삶 가운데에서 새로운 생명이 약동하기 때문에 무슨 일을 만나든지 우리는 결코 실패하거나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2. 성전청결사건(2:13~22)

흥미있게도 공관복음서에서 성전청결하는 사건은 예수님의 사역의 말기에 있습니다. 그 사건 때문에 예수님이 잡히게되고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결정적인 사건이 됩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의 사역 초기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떤 학자는 그 사건이 두 번 이루어졌다고 주장하지만 두 번 행한 것보다는 공관복음서처럼 예수님 사역의 말기에 행해진 사건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요한복음서에는 이 사건을 예수님 사역 초기에 기록하고 있을까요? 요한복음을 잘 살펴보면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행하신 일들을 단순히 연대기적으로 기술하는 책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사건, 일들을 통해서 강력한 메시지를 전하려고 한다면 도대체 왜 이것을 예수님 사역 초기에 두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특히 가나 혼인잔치와 성전청결사건이 같은 장에 기록하였다면 서로 연결되는 공통되는 점이 있어야 한다는 추측을 해 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 보면 성전을 청결케하면서 인용한 성경이 있습니다. 시편 69:9입니다.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이 나를 삼키고 주를 훼방하는 훼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이 구절은 바울도 인용하고 있습니다(롬 15:3). 그렇다면 시편 69:9은 언제 잘 사용되는 구절입니까? 초기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의 죽으심에 대해서 회상하고 생각할 때에 종종 사용되었던 구절입니다. 그렇다면 요한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성전을 청결케하시면서 다 쫓아내실 때에 저자가 시편 69편을 인용했다는 것은 우리의 관심을 예수님의 죽으심에 집중시키려고 하고 있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성전을 청결케 하시는 것이 아니라 어찌보면 성전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즉, 이 성전은 종말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다 무너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혼인잔치와 성전청결사건과의 공통점은 무엇입니까? 옛것은 끝났고-물도, 옛 성전 제도가 끝났다- 새로운 것이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옛 성전이 끝났다면 새로운 성전이 나타나야 합니다. 앞에서는 예수님은 진정한 포도주로, 여기에서는 예수님은 새로운 성전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두 이야기는 서로 일치점을 찾을 수가 있습니다. 여기의 ‘성전’은 1장에서 살펴본 것처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에 장막을 쳤다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다시말하면 예수님이야 말로 새로운 성전이며, 그 안에서 새로운 제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따라서 이렇게 보게되면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대해서 구약을 인용했다고 한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서 새로운 성전 그리고 새로운 백성, 새로운 종교가 탄생할 것이라는 예고입니다. 이것을 견디지 못했던 사람들이 유대주의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기독교는 유대교에서 싹이 트였지만 근본적으로 유대교와 전혀 다른 종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시대라고 합니다.
이 두 가지 사건은 결국 합하여서 예수님의 사역이 무엇인가를 가르쳐주고 지시하고 있습니다. 즉 옛 종교-물과 성전-는 다 가버릴 것이고 그 대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새로운 포도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우월성, 새 성전에 의해서 대치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새로운 예배의 초점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우리에게 보이는 건물이 성전이 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번도 그곳을 성전에 거한다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그의 백성들 가운데에 거한다고 하십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에 거하는 ‘θεο Παρουσiα’(데오 파루시야)의 사신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떠난 어떠한 신앙, 어떠한 종교도 진정한 의미에서 신앙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표현하는 것이 바로 성례식입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θεο Παρουσiα’(데오 파루시야)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임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인공은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 중심적인 사고방식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자기를 계시하고 나타나셨는데, 최종적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일날 예배를 드리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나신 그 하나님을 찬양하는 의식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24장로들과 하늘에 있는 모든 영체들이 모여서 죽임당하신 어린양을 찬송하는 것이 예배공동체의 핵심입니다. 새로운 예배의 핵심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성전청결사건과 가나 혼인잔치는 아주 밀접한 관계에 있는 이야기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두 번째 행동 자체가 예언자적인 행동-무엇인가를 가르치는 행동-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러면 예언자들은 시편-예수님의 죽으심을 나타냄-을 인용하면서 예수님의 죽으심과 관계를 맺고 있다고 한다면 성전을 청결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성전을 파괴하는 행위라는 것입니다. 이 성전을 파괴하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실 때에 예수님 자신이 새 성전이 되신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5강 니고데모와의 대화- 위로부터 나야 (2:23 ~ 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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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2장에서 두 개의 단락 즉, 갈릴리 지방에서 발생했던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는 기적이야기와 예루살렘에서 일어났던 성전청결사건 이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이 두 가지 사건은 겉으로 보면 서로 연관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세하게 보면 결국 옛 제도-물로서 표현되는 유대주의 종교와 성전으로 대표되는 옛제도-가 새로운 시대에 들어와서는 아무 쓸모 없이 새것으로 바뀌게 되고 새것으로 변하게 되었다는 것은 포도주와 새로운 성전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것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 두 가지는 근본적으로 한 가지 곧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가? 라는 문제입니다. 그것은 복음서를 읽다보면 제자들이 얼마나 철저하게 예수님에 대해서 오해했는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쫓아 다녔고, 예수님과 가까이에 있었고, 양손에 토라를 갖고있던 사람들이지만 그러나 예수님을 혈과 육으로 또는 예수님을 혈통에 따라 이해를 했지, 근본적으로 제3의 눈인 믿음의 눈으로 바라본 사람은 부활사건 이후까지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이것은 부활사건이라는 것이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경험인가를 가르쳐주기도 합니다.
이에 비해서 대부분의 복음서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측근이 아니었던 변방의 사람들, 도저히 복음과 상관이 없다고 하는 사람들이 충격적으로 놀랍게도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가를 고백-백부장, 여성들-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즉, 전통적인 신앙의 체계 가운데에서는 하나님나라에서 아무런 역할을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그런 사람들에게서 놀라운 고백들이 나옵니다. 그것만 보더라도 복음서가 현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굉장히 크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2:23~3:21)의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2장 23절의 ‘이름을 믿었으니’라는 구절을 보면 1장에서 ‘그 이름을 믿는 자’(1:12)라는 구절을 연상해 볼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3장에 넘어가면서 1절을 보면 표면적으로도 2장 23절에서 25절까지에서 반복되어 나오는 단어가 ‘사람’(a[nqrwpo", 안드로포스)인데, 3장 1절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라는 표현을 통해서 앞 문단(2:23~25)과 3장의 니고데모와의 대화가 밀접한 연관이 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2절에 ‘이 표적들’과 2장 23절의 ‘많은 사람들이 그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라는 말을 통해 니고데모도 표적들을 보았던 사람들 중에 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공관복음서에 가장 많이 사용되는 단어가 ‘하나님 나라’(basileivan tou' qeou, 바실레이아 투 데우) 혹은 ‘천국’(basileiva tw'n oujranw'n, 바실레이아 톤 우라논)이라는 단어인데, 요한복음에는 ‘하나님 나라’라는 단어가 두 번(3:3, 5)밖에 나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10절에 ‘선생’이라는 말은 니고데모가 예수님께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이라는 말 가운데에 있었던 단어입니다. 어찌 보면 예수님과 니고데모가 대표되는 두 세계 사이의 충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즉 이 두 개는 함께 갈 수가 없다는 옛 질서와 새로운 질서들의 만남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11절 역시 ‘너희’와 ‘우리’로 구분하면서 두 세계 사이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2절에서도 니고데모가 ‘우리’라는 단어와 ‘당신’이라는 표현을 통해 두 부류의 공동체를 언급하고 있듯이 ‘우리’라고 할 때에는 분명히 니고데모도 자기를 대표로 하는 자기의 세력들, 체계들이 있음을 이야기하고 있고, 예수님께서도 ‘우리’들과 ‘너희’들도 다르다는 두 세계의 충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미 우리는 지난 시간을 통해서 두 세계 사이에는 만날 점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즉, 하나님 나라의 신선함, 하나님 나라의 충격성, 하나님 나라를 전혀 우리 보통 사람들, 전통적인 개념을 갖고있는 사람들이 알 수 없는 새로운 개념이라는 것입니다.

앞서서 두 단락을 살펴보면서 유대주의라는 옛 질서로는 충분치 않고 이 옛 질서는 새로운 질서로 대체되어야만 합니다. 물은 포도주로 대체되었고, 성전은 진짜 성전의 원형인 예수 그리스도 자신에 의해서 대체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또 예수라는 분 자체가 1장에서 언급한 것처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에 장막을 치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최초로 자기의 이적을 행했던 것은 장례식이 아니라 결혼식이었는데, 이 결혼식은 항상 새로운 시작을 알려주게 됩니다. 마치 창조가 새로운 시작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결혼 역시도 새로운 세대의 새로운 삶을 가르치는 출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치 결혼이라는 것은 온전하게 된 사람들의 시작을 의미하고, 인간적인 표현을 온전하게 나타내는 사랑의 시작을 가르키며, 새로운 생명들이 앞으로 계속해서 출생할 것이라는 생명의 시작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창조이야기를 보면 이미 아담과 하와는 창조될 때부터 ‘결혼한 관계’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구약에서는 남편이나 아내라는 말이나 남자나 여자라는 말을 같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즉, 남자는 곧 남편을, 여자는 곧 아내의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두 단어는 헬라시대에 와서 서로 다르게 사용하게 되었지만, 구약에서는 이미 남자가 되었다는 것은 남편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고, 여자가 되었다는 것은 곧 아내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가나의 혼인잔치에 오셔서 기적을 베푸신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닌 것입니다. 즉, 최초의 인간에게 하나님께서 축복을 하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가득하고 땅을 다스리라’는 본래의 축복들이 성취되는 것의 시작이 바로 결혼입니다. 예수님께서 결혼식장에 오셔서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는 것은 마치 창조질서의 회복, 혹은 새로운 창조가 시작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동시에 창조라는 것이 기쁨과 즐거움 가운데에서 하나님께서 인간과 함께 떡을 나누고 인간과 함께 식사를 나누는 성례전적인 식사인 것처럼 결혼잔치야 말로 온전하게 된 창조를 축하하기 위해서 그리고 성취된 축복을 기대하는 성례전적인 잔치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예수님께서 최초의 영광을 결혼식장에서 나타내셨다는 것입니다.

즉, 창조와 관계를 맺고있는 Setting이 바로 결혼식장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새 시대의 전령자로서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하고 하나님의 최초의 축복자체를 실현하는 분으로서 어찌 보면 제2의 아담으로서, 최초의 아담이 실패한 것을 새로운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새로운 시대를 열고 새로운 수많은 시작들이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모든 좋은 출발들의 시작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잔치가 열렸다는 것은 바로 우리에게 암시하는 것처럼 성례전적인 잔치입니다. 왜냐하면 궁극적으로 새로운 시대에 있어서 사람들이 기쁨과 즐거움을 느끼는 것은 먹고 마시는 것들입니다. 교회공동체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면서 성례전적인 식사를 하면서 성취된 축복들을 기대하는 성례전적인 잔치의 장이 성전에서 이루어지는 교회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창세기에 나타나는 ‘좋음’(b/f, 토브)라고 이야기하는 자체가 타락으로 인해서 상실했는데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되고 또한 창조의 선함을 축하하고 즐거워하는 잔치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명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2장 23절에서 25절까지는 유대적인 범주(Category)들로서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분을 이해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담는데는 적절치 않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물과 포도주와의 관한 이야기와 또한 예수님의 성전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 옛 유대 사람들이 갖고있던 유대주의 범주(Category)로서는 예수님을 담을 수가 없고, 예수님을 이해할 수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고, 옛 질서와 새 질서는 교체하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비록 기독교가 유대교의 뿌리와 많은 경우에 있어서 공통점을 갖고 있지만 그러나 이것은 두 개의 서로 다른 근본적인 차별이 있는 종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고난과 죽으심으로 이끌어 가는 모티브(Motive)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야기-옛 유대주의 범주들-들에 대한 가장 좋은 예가 바로 니고데모의 이야기입니다. 니고데모의 이야기를 하기 전에 2장 23절로부터 25절까지 서문을 열어주고 있습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한다면 23절에서부터 25절을 잘 이해하면 니고데모 이야기를 잘 해석할 수 있는 열쇠를 제공한다는 뜻입니다.


2장 23절에서 25절까지를 보게되면 사람들이 표적들을 보고 믿었다고 기록하지만 3장 이후에 나타나는 기록들을 볼 때에는 그들이 진정으로 믿었다는 표시는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 이유로 24절에서 ‘예수는 자기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치 아니하였다’는 말이 나옵니다. 본문은 예수님을 믿었던 많은 사람들의 신앙이 부적절하였는가를 이야기하고 있지 않고 단순히 예수님께서 자기 자신을 그 사람들에게 의탁치 않았다고 기록할 뿐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내면적인 존재나 사람들의 본성이 무엇인지를 예수님이 아셨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기는 알았지만 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이해정도가 얼마정도 되는가를 예수님은 아셨기 때문에, 그들의 이해가 자기를 완전히 포용하고 자기를 담을만한 정도의 수준이 아니였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자기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치 아니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부적절한 신앙의 사람의 대표가 바로 니고데모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두 개의 세계, 두 개의 질서 사이에 대립관계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머무시는 동안에 예수님을 믿었던 사람들 중 하나로 묘사하는데, 2장 과 3장 사이에 연결점이 바로 ‘사람’(a[nqrwpo", 안드로포스)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마음을 충분히 알고 계셨는데 그 사람들 중 한 사람이 바로 바리새인이었던 니고데모입니다. 그러니까 니고데모에게 예수님께 왔어도 그 사람의 수준을,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충분히 받아들일만한 사람인지 아닌지를 이미 아셨기 때문에 그에게 의탁치 않았다는 것입니다. 또한 두 번째로는 ‘표적’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우리’라는 말을 통해 자연스럽게 두 그룹 사이의 모습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유대주의를 대표하는 인물로서 니고데모가 예수님과 만남을 통해서 유대주의와 예수님 사이에 서로 충돌 혹은 만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니고데모는 항상 유대주의 사고의 틀 안에서만 생각합니다. 그것을 깨뜨릴 수가 없었습니다. 유대주의 사고의 범주들 안에서 그는 예수님에 대해서 긍정적인 태도를 갖고 있지만, 유대주의적인 사고의 틀 안에서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그가 어떻게 예수님에 대해서 긍정적인 평가를 하고 있습니까? 그는 예수님을 ‘랍비’라는 칭호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랍비라는 칭호는 예수님의 제자들에 의해서도 여러 번 사용(1:38,49; 4:31, 9:2; 11:8)되고 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랍비’라고 할 때에는 단순히 예수님을 존경의 표시로 부르는 호칭입니다. 그리고 그는 긍정적으로 예수님을 하나님으로부터 온 선생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처럼 그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부터 온 선생이라고 하는 것은 그가 위탁받은 사명이 그가 기적적으로 행하는 행위에 의해서 확증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선생!’이라고 호칭하는 것을 볼 때에 그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을 유대인들이 기대하였던 모세와 같은 선지자에 잘 맞는 인물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에 대해서 예의를 갖추어서 말하기는 하였지만 예수님에 대한 그의 인식은 예수님께서 자기 자신에 대해서 이야기했던 것 즉, 내가 누구이며 내가 무슨 역할을 하는 인물인지에 대한 내용을 말하는 내용과는 너무나도 거리가 먼 내용들이었습니다.

인자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이 ‘거듭난다’는 말은 헬라어로 ‘a[nwqen’(아노덴)이라는 말로서 1차적인 원래의 뜻은 ‘위로부터’입니다. 번역을 ‘거듭난다’, ‘다시 태어난다’라는 말로 번역하기보다는 ‘위로부터’라고 번역하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사람이 위로부터 태어나지 아니하면 즉, 위로부터 오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는 공관복음과는 달리 ‘예수라고 불리는 분’ 그 분 자체에 모든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라는 개념은 인격적인 개념, 즉 ‘인자’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예수님의 칭호로서 ‘인자’라는 말은 구약성경 다니엘 7장을 연상할 수가 있습니다. 다니엘서 7장 1~14절 말씀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9절에서 ‘본다’라는 단어 ‘hzEj;’(하자)는 구약의 예언자들이 마치 천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 ‘왕좌’가 놓였다는 것은 분명히 왕궁을 말하고 있으며, 왕궁에 왕이 계시고 거기에 보좌가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이 정도면 여러분들이 이사야에서 나타난 이사야의 소명이야기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혹은 에스겔서에 나타난 소명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또한 미가야가 여호사밧과 아합 사이에서 일어났던 사건에서 미가야가 천상에서 보좌를 보는 일이라든가 욥기에서도 천상에서 보좌에서 하나님께서 많은 영체들과 함께 회의하는 광경들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는 지금 짐승들을 큰 바다로 불어서 짐승들이 바다에서 나오는 것을 보았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천상에서 왕좌가 놓이고 옛적(태고적)부터 항상 계신 이가 좌정하셨다는 것입니다. 9절의 상황은 에스겔서 1, 2, 3장에 있는 내용들과 흡사한 것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보면서 고대의 일정한 전승들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13절에 ‘인자’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 말을 그대로 번역을 하면 ‘사람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이 본문에서 두 개의 서로 다른 종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데, 바로 ‘짐승’과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둘은 서로 함께 갈 수가 없는 전혀 다른 종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는 바다에서 또 하나는 천상에서 나타납니다. 그런데 ‘인자같은 이’가 즉, 사람처럼 보이는 분이 천상의 어전회의 속으로 올라가는 모습입니다. 이 내용들은 13절의 ‘인자’를 설명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넓게 보면 두 개의 나라입니다. 하나는 짐승의 나라요, 또 하나는 사람의 나라입니다. 짐승의 나라와 사람의 나라인데 짐승은 땅과 바다- 고대 신화적인 요소 가운데에 바다는 항상 괴물들이 나타나게 됩니다- 에 속해있고, 또 하나는 천상에 있는 사람입니다. 다니엘서에 온 인류의 역사를 지배하고 역사를 관장하는 것은 지상의 세력들이 결코 아니라 천상의 세력에 의해서 진행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인자’라는 말은 항상 짐승과 사람을 비교하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인자’ 즉, 사람의 아들이라는 뜻은 그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사람이라고 얘기할 때에는 짐승이 아닌 새로운 종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에 예수님께서 이 유명한 다니엘 7장 13절에 있는 ‘인자’(Son of Man)라는 말을 사용했다고 할 때에 지난번에 살펴본 것처럼 나다나엘 사건을 통해서도 천사가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볼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때에도 탈굼에서 얘기한 것처럼 마치 그 인자가 천상에 어전에 올라가서 영광과 존귀와 그 명예를 받는 것을 꿈에 보는 것처럼-야곱, 예수-내려와서 보니까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기를 ‘인자’라고 할 때에는 하나님 나라의 통치와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따라서 3절에서 얘기하는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세력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인 개념으로서 예수라는 분이야말로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가를 계시해주고 또한 하나님나라를 가져오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다니엘서 7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에게 통치권, 권세를 주었다면 예수 그리스도라는 분이야말로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생겼고,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움직이고, 작동되고 하나님 나라가 어떤 나라인가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는 인자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거듭남
또 한가지는 ‘a[nwqen’(아노덴, 거듭난다)이라는 단어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사람이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는 말인데, 이 ‘위’는 짐승의 세계와 전혀 다른 ‘인자’가 내려온 곳입니다. 그러므로 짐승이 사람을 이해할 수가 없는 것처럼 밑에 사는 사람들은 윗 세계를 알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천상에서부터 온 하나님 나라, 예수 그리스도라고 불리우는 한 인격 속에서 오신 그 나라, 따라서 그 나라를 알려면 사람 역시 위에서부터 출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밑에 있는 어떤 제도를 가지고도 그 나라를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짐승이 변해서 사람이 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처럼 지상에서가 아니라 천상에서 나지 아니하면 진정으로 하나님 나라를 알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의 진짜 선지자와 가짜 선지자의 차이가 바로 그러한 것입니다. 가짜 선지자들은 천상을 올라가 본 경험이 없는 사람들이고, 즉 하나님을 만나본 경험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천상의 어전회의에 참석해 본 일이 없는 사람들, 하나님의 의중, 하나님의 내면, 하나님의 내심 자체에 대해서 친밀한 관계에서 이해를 해 보지 못한 사람들이 가짜입니다. 비록 그들이 이 세상에서 훈련을 다 받고 무슨 일을 다 하고, 어떤 제도권에 있어서 다 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세계에는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의 차이점이라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서는 항상 참 선지자는 천상의 하나님의 어전,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세계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보고, 하나님을 다 알고 그 나라에 속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유대종교, 혹은 유대교의 제도 혹은 범주로서 이해하려고 해도 도저히 이해가 불가능한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찌 그러한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자기 자신을 의탁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한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친밀한 교제를 나눌 수가 없습니다. 후에 하나님 나라를 인격적으로-인격이라는 것은 우리가 상대방과 나 사이에 친밀한 관계를 가질 때에 인격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만나는 즉 속사정을 다 아는 것처럼, 마치 천상의 세계에 들어간 사람도 굉장히 친밀한 관계 속에서 서로를 이해한다면 그런 종류의 사람과 이 지상의 사람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는 위로부터 내려오고, 위로부터 나오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 나라를 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본다’는 말은 상징어로서 매우 친밀한 관계 속에서 상대방을 이해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께서 ‘사람이 위로부터 나야한다’는 말의 의미를 전혀 깨닫지 못합니다. 그는 계속해서 오해를 하면서 “사람이 어떻게 어머니의 뱃속에 다시 들어갈 수 있습니까?”라고 대답을 하자 예수님께서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이라고 말씀합니다. 즉 ‘물과 성령으로 나는 것’과 ‘위에서 나는 것’이 관계가 있습니다. ‘물과 성령으로 나는 것’과 ‘위로부터 나는 것’은 지금 평행법을 이루면서 둘 다 하나님 나라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니고데모는 구약의 박식했던 학자로서 적어도 ‘성령’하면 구약에서는 종말론적으로 약속된 생명의 창조자로 이해했을 것임이 틀림없습니다. 구약에서 ‘성령’(j'Wr, 루아크)라는 말은 ‘바람’, ‘호흡’, ‘생기’, ‘영’이라는 뜻으로 이 말은 ‘광풍’이 될 수도 있고, 잔잔한 ‘미풍’이 될 수도 있고, 입에서 나오는 ‘호흡’으로 쓸 수도 있습니다. 죽은 사람에게는 ‘생기’가 없습니다. 그러나 고대인들에게 생기가 있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잡힐 수는 없지만 사람에게 ‘생기’가 있다는 것은 분명 그 속에 ‘영’(j'Wr, 루아크)이 있다는 의미합니다. 구약에서는 ‘성령’을 종말적으로 언젠가는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게 되면 선물이 주어질텐데 이 때는 새로운 생명들이 창조될 것이고 이러한 새로운 생명을 창조하는 능력이 바로 ‘j'Wr’(루아크)라는 말입니다. 그것까지는 니고데모가 이해를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물’입니다. 예수님께서 ‘물과 성령’이라고 했을 때에는 니고데모가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천국,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과 연결을 시키고 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이 물은 세례(침례)자 요한의 세례를 연상케하는 내용일 것입니다. 물에서 세례를 받고 성령이 임하였습니다. 이런 세례적인 배경을 가지고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한다면 결국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메시지는 처음부터 회개를 촉구하는 일입니다. 세례요한과 예수님께서도 제일 먼저 회개하라고 했습니다. 회개를 촉구하는 것은 옛 것을 벗어버리고, 장사지내고, 죽이는 것입니다- 이 역할을 하기 위해서 세례자 요한이 왔습니다. 즉 세례자 요한의 사역부터 하나님 나라의 사역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근본적으로 옛것을 죽이고, 없애버리고 씻고, 회개를 촉구하는 것과 물세례를 연결시키는 것뿐만 아니라 동시에 이런 물세례 즉 진정한 회개는 동시에 성령세례와 연결시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합니까? 옛 것을 벗어버리고 새것을 입는 것입니다. 물과 성령으로 옛 것을 벗어버리고 새것을 입어야 합니다. 동시에 이 물은 구약시대의 사건에서도 ‘홍해바다를 건너는 것’도 세례라고 표현(고전 10:2)하고 있습니다. 홍해바다를 건넌 것은 옛 바로의 종으로 살았던 옛 신분 자체는 홍해바다에서 죽고, 그들이 홍해 바다를 건널 때에는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태어나는 것처럼 세례의 의미는 바로 옛것은 지나고 새것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 5절에서 ‘물과 성령’이라는 말은 ‘함께’ 라는 말, 특별히 이 구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또 하나 찾아보아야 할 구약의 배경이 있습니다. 바로 에스겔 36장 24절부터 보겠습니다.

24내가 너희를 열국 중에서 취하여 내고 열국 중에서 모아 데리고 고토에 들어가서 25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 26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여기에서 보면 분명히 앞 단락에서 보면 이스라엘이 자기들이 원래 살아야 할 약속의 땅에서 추방당하여서 외국 땅에서 살고 있는 모습입니다. 제사장인 에스겔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정결’입니다. 그가 사역했던 사람들은 지금 희망을 잃고 바벨론 강변에서 고향을 그리워하며 살던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또한 충격적인 소문은 바로 예루살렘 성전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낙심하며 살던 사람들인데, 그 사람들을 향해서 에스겔은 이스라엘 과거의 역사를 선포하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언약과 약속들을 져버린 이스라엘이 이곳에 온 것은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겠는가? 우리에게는 미래가 있겠는가?’라는 메시지 가운데에 한 부분이 바로 36장 24절 이하에 있는 내용입니다.
24절의 ‘열국 중에서 모아 데리고’라는 말은 지금 하나님께서 그들을 열국중에 흩으셨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마치 체질하듯이 다 흩으셨듯이 다시 모으겠다고 약속하십니다. 흩었다가 다시 모은다는 것은 농업적인 용어입니다. 타작마당에서 체질할 때처럼 다시 모아서 고토-옛날 살았던 그 땅-에 다시 들여보낸다는 약속입니다. 25절에서 ‘정결케’라는 말은 단순히 외적인 의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더러운 것과 모든 우상’에게서 정결케 하신다는 것입니다. 근본적인 변화, 근본적인 개혁, 근본적인 회개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히브리어는 물과 성령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헬라어에서처럼 ‘물과 성령’을 하나의 과정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새롭다’는 말은 ‘전혀 다른 것’이 아니라 우리가 옷을 입었는데 그 옷이 더러워졌습니다. 그 더러운 옷을 빨게 되는데 깨끗하게 빨아 입은 옷을 ‘새롭다’라고 구약에서는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것도 지금 우리가 살고있는 이 세상과는 전혀 다른 희한한 세상이 오는 것이 아니라 깨끗하게 정결하게 되고 회복된 것을 의미합니다. 26절에 ‘새 영’과 ‘새 마음’이 평행을 이루고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돌과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살과 같은 마음을 우리에게 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27절에 가서 토라를 지킬 수 있는 능력을 주신다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사실 한가지는 이 일을 하시는 주체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흩으시고, 모으시고, 새 영을 주고, 새 마음을 주고, 내 율례를 지키게 할 것이라는 모든 것의 주체는 곧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즉 전편에 흐르는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적 사역이라는 것입니다. 회복, 은혜, 하나님 나라, 은총 등은 위로부터 내려온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유대교에서 아무리 많은 일들을 해도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의 호의를 사려고 하는 모든 인간의 행위 자체는 하나님 나라와는 관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위에서부터 부어주어야 합니다. 여기에 ‘씻는 일’ 과 ‘새 영’과 ‘물과 성령’은 함께 하나의 process 즉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물과 성령은 따로 따로 이해하는 것보다도 하나의 총체적인 process로서 옛것을 죽이고 새것으로 대체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분명히 위로부터 태어나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에 대해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니고데모가 예수님과의 만남 사건은 열려진 채로 막이 내려집니다. 다시말하면 니고데모의 반응이 어땠는지에 대한 언급은 없습니다. 그러나 두 군데(7:50~52; 19:38~42)에 기록된 내용을 통해 니고데모의 반응을 살펴볼 수가 있습니다. 먼저 7장 50절 이하에 있는 모습입니다.

50그 중에 한 사람 곧 전에 예수께 왔던 니고데모가 저희에게 말하되 51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판결하느냐 52저희가 대답하여 가로되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 상고하여 보라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하느니라 하였더라

예수님에 대한 성급한 판단을 내리려는 산헤드린 공회 회원들에게 예수님에 대하여 알아 본 후에 판결을 해야 한다는 주장을 합니다. 50절에 보면 ‘그 중에 한 사람’이라고 기록한 것을 보면 니고데모는 유대인의 한 사람으로서 진짜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었다는 의미합니다. 또한 51절의 ‘율법’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으로 볼 때에 니고데모가 유대적인 사고 체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19장을 보면 십자가에 달리셨던 그 왕-예수님-에게 공개적으로 자신이 한편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9장에서 니고데모는 아리마데 요셉과 함께 예수님께 부은 향유의 양(量)은 왕에게만 드릴 수 있는 양을 부으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는 니고데모가 참 제자인지를 확인시켜주는 내용입니다.
마지막으로 ‘뱀’의 이야기입니다.
분명히 예수님은 하나님의 면전으로부터 내려오신 분 즉 선재(先在)하셨던 분입니다. 그리고 그는 다시 하늘로 올라가시는 ‘인자’이십니다. 이 세상에서 ‘인자’외에는 다시 하늘나라로 올라간 자가 없다는 것은 바로 모세의 신비주의자들을 염두에 두고 진정한 종교의 창시자는 바로 예수 자신이라는 것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하늘에서부터 내려왔고, 예수님 만이 하늘로 올라갈 것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들린다’는 말은 광야시절의 뱀에 대한 이야기로서 예수님은 원형이시고, 광야시절에 들렸던 뱀은 모형이라는 것입니다. 그 모형은 장차 원형에 대한 나에 대한 것이라는 것을 기독론적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를 믿는 모든 자에게 생명의 방편이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유대주의적 범주 안에서 예수님을 이해하려고 했었던 니고데모의 사상을 다 훼파시키고 무너뜨리면서 유대주의적인 정신의 틀 속에서는 예수에 대한 진정한 이해와 믿음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3:1~15절까지의 본질적인 메시지이며,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요한이 말하는 위로부터의 출생 이것은 가장 중요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단순히 거듭난다는 것보다도 전혀 다른 세계로부터 와야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위로부터 내려온 사람입니다. 마치 인자를 생각해 보면 땅에 있는 모든 짐승과 근본적으로 서로 다른 것처럼, 기독교인들은 자기가 새로운 인종이요, 새로운 종류의 사람들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세상 사람들은 혈과 육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새로운 세계를 맛보고 사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니고데모와 예수의 만남의 핵심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위로부터 태어난 일 즉 옛 것을 벗어버리는 물과 새로운 창조 속에 사는 일들이 함께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요한을 만나는 것처럼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회개부터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회개’도 하나님이 주신 은혜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시 고토에 데리고와서 맑은 물로 정결케 한 후에 새로운 영, 새로운 신을 우리에게 주어 돌과 같은 마음이 아니라 살과 같은 마음으로 주어서 비로소 그때에 우리를 새사람, 새 백성으로 태어날 것이고 그 때에는 토라를 지키는 것, 율법을 지키는 것 자체가 그들에게는 기쁨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에 사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고 한다면 우리는 위로부터 태어난 사람입니다.


제6강 무명의 여인과의 만남 (4:1~42) 


요한복음 1-3장의 주요 부분들을 다시한번 살펴보겠습니다. 1:1-18절은 요한복음의 서언으로서 요한복음 전체에 대한 가르침, 메시지 혹은 신학의 기반을 놓은 내용이었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는데 그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있었고, 곧 하나님이었다. 그런데 그 말씀이 이 세상에 왔지만 이 세상은 그를 알지 못하였고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이름을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말씀합니다. 1:14절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즉 살과 피를 입고 우리 가운데에 장막을 치시고 천막을 치셨으니 예수 그리스도 자체가 우리에게 성전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이 하나님을 알 수가 있게 되었고,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독생하신 하나님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몇 사람이 등장합니다. 세례(침례)자 요한이 증거자의 제일 첫 번째로 등장하고 그리고 여러 제자들이 등장하게 됩니다. 그 사실을 통해서 우리는 증언자, 증거자가 무엇인가를 배웠습니다. 그리고 2장으로 가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나 혼인잔치에서 첫 번째 Sign을 일으키십니다. 어찌보면 예수께서 모든 새로운 창조의 초, 결혼이라는 것은 모든 것의 처음을 이야기하듯이 또 창세기에서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만들어 놓으시고 최초의 결혼식 주례를 하신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새로운 창조의 세계, 새로운 창조의 질서가 열리고 있음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동시에 그것은 옛 물로 대변되는 유대 지위를 대치하는 새로운 메시야의 세계가 열렸다는 것을 가리켜주는 Sign입니다. 또 하나는 예수님께서 솔로몬이 만들어 놓은 성전을 허물면 사흘만에 다시 세울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 즉 십자가에서 달려 죽으신 자기 자신을 가리켜 곧 성전이라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성전이라는 말은 1장 14절에 있는 것처럼 2장에서 다시 반복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이 새로운 제사, 새로운 예배가 가능하다는 것을 가리켜주고 있습니다. 왜 가리키는가 하는 것은 오늘 본문에서도 사마리아 여인과 이야기하면서 ‘너희가 예배할 때가 오나니’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미 2장에서 성전이신 자기 자신을 이야기했다면 진정한 예배가 무엇인가를 가리켜 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3장에 넘어와서는 니고데모를 만나게 되고 4장에서는 한 여인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3장과 4장이 연결되면서 흥미로운 사실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관계성을 보면 3장과 4장은 한 문맥을 이루고 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3장 // 4장
성(性) 남자 // 여자
이름 니고데모(유명) // 사마리아 여인(무명)
종교 유대교의 대표 // 사마리아교의 대표
때 밤중 // 대낮
만남 니고데모가 찾아옴(종교) // 예수님이 다가옴(은혜)
지역 남유다의 대표 // 북이스라엘의 대표
반응 조용히 사라짐 // 증거자로 동네로 들어감


여기에는 분명히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님과의 대화가 나옵니다. 바로 니고데모와의 대화를 연상케하는 또 다른 대화의 장면입니다. 이 장면의 변화는 하나는 예루살렘이요 하나는 그리심산 즉 유대인들의 성산이라고 알려졌던 예루살렘과 사마리아인의 성산이라고 알려졌던 그리심 사이의 대조법도 강하게 나타납니다.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님과의 대화에서 핵심적인 것이 있다면 그것은 ‘생수’가 옛 물을 대치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벌써 마치 포도주가 옛 물, 결례의 물들을 대치하고 유대인들을 대치하고 새로운 세계가 동터왔다는 것을 분명하게 선언하면서 새로운 시대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가르쳐 주는 것처럼 여기에서도 옛 것, 옛 물을 대치시켜주는 새로운 생명수가 지금 등장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의 대화는 요한복음에서 자주 등장하는 문학적인 기교의 극치를 이루고 있는데, ‘오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계속해서 오해를 했고, 니고데모도 그리고 지금 이 여인도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한 아이러니(irony)-역설이라든가 반어적인 내용-합니다. 여기 등장인물들이 잘 조정되는 연출이 등장합니다. 절정을 향해서 여기 극중에 있는 인물들이 연기를 하고 있고, 가장 climax라고 한다면 39-42까지의 소위 사마리아 여인이 개종을 하고 참(truth)을 안 후에 자기 동네에 들어가서 ‘증언자’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전파하게 되고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앞 부분에서 세례(침례)자 요한도 자기는 ‘증언한다’고 하면서 참된 증언이 바로 ‘가리킨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의 climax가 사마리아 여인에 의해서 상당히 많은 이방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오는 사건들을 그려주고 있는 이 장면이라고 한다면 바로 니고데모와 큰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니고데모는 밤중에 왔고, 이 여인은 대낮에 만났습니다. 니고데모는 가서 증언자의 일을 했다는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지 있다고 할 때에는 굉장히 숨어있는 제자처럼, 심지어는 맨 나중에 예수님께서 죽으신 시체를 다시 돌려서 왕처럼 모시기는 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요한복음 자체는 1차적인 독자들이 남쪽 유대사람들인데, 이들이 이러한 메시지- 자기들이 가장 형편없이 생각하는 사마리아 사람이 그것도 여자이고, 북쪽 출신이고, 과거의 행적도 별로 좋지 않은 여자가 행한 일들을 니고데모와 비교할 때에 그리고 그 여인이 많은 사람들을 불러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였다는 최초의 대규모 선교사건을 그려주고 있는 기록들을 읽을 때에는 그 충격이라고 하는 것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아니 엄청난 수치심을 느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2장에서 가나 혼인잔치의 이야기처럼 4장의 초반부에서 요한은 자기의 메시지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암시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수가’라는 말이 나옵니다. ‘수가’라는 땅을 표현하기를 야곱이 그의 아들 요셉에게 준 땅에 가깝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이 단어를 집어넣었을까요? 그리고 의도적으로 말하기를 바로 여기에 야곱의 우물이 있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2장의 첫 기적과 오늘 본문에서 등장하는 이야기 속에서 공통되는 것을 찾아 볼 수가 있는데 바로 ‘물’입니다. 이 여인은 우물물을 가리켜 ‘야곱의 우물물’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우리 독자들은 이미 족장-아브라함, 이삭과 야곱-의 영토 속으로 들어와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언약의 땅 속으로 들어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님과의 대화에 있어서 이 첫 부분은 야곱의 우물과 예수가 주는 물 사이의 대조를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에서부터 나오고 있는 요한복음의 핵심 내용과 일맥상통한 내용입니다. 즉 가나혼인잔치에서 유대주의를 상징하고 있는 결례의 물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새로운 시대가 메시야의 시대가 올 때의 기쁨을 상징하고 있는 새포도주가 대조를 이루는 것처럼 여기에서는 야곱의 우물물과 예수가 주는 물 사이의 대조를 보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수가’라는 말 혹은 야곱의 우물이라는 것이 요한이 이야기 하고자 하는 핵심, 요한의 메시지의 핵심에 힌트를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당시 유대주의에 의하면 ‘물’이라는 것은 일반적으로 ‘토라(hr:/T)’ 즉 율법(Law) 전체를 상징합니다.

예수님의 전 시대에 ‘쿰란공동체’가 있었습니다. 쿰란공동체에서 발행한 하나의 문서 가운데에 ‘다메섹 규율’이라는 것이 있는데 거기에 보게되면 ‘물’과 ‘우물’은 자기들에게 생명을 주는 ‘토라(hr:/T)’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의 사람들은 ‘물’ 혹은 ‘우물물’들은 생명을 주는 토라를 상징한다고 쓰고 있습니다. 또한 그 당시 랍비들의 문헌에 의하면 ‘물’은 토라에 대한 은유법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요한복음이 이것을 썼을 때에는 이미 랍비문헌이나 쿰란공동체의 사람들이 무엇을 상징하고 있는지를 알고 썼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 한가지 재미있는 것은 구약성경에서도 지혜문학을 보게되면 ‘물’은 ‘지혜’(hm;k]j;;, 호크마)라고 표현합니다. 물을 마셔야 우리가 사는 것처럼 지혜(잠 18:4; 시리아 24:19~20)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물’을 ‘토라(hr:/T)’ 혹은 ‘지혜’(hm;k]j;;, 호크마)로 가르친다면 지혜와 토라는 항상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1장 1, 2절에서 보는 바와 같이 말씀이 육신이 되었는데 그 말씀이 무엇인가? 그 토라가 무엇인가? 그 토라는 동시에 지혜라고 부릅니다. 유대주의에서는 이렇게 지혜와 토라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4:13~14)을 알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영원히 해갈 할 수가 없는 물로서 여인은 율법의 물, 토라의 물, 족장의 우물에서부터 매일같이 길어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과는 대조적으로 생명을 주는 물(u{dwr zwh;n, 후도 조엔), 예수의 물을 여자는 마치 계속해서 흐르는 물로 잘못 이해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 물을 가리켜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표현(10절)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선물이라고 이야기할 때에는 그 앞에서 ‘물’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고 있고, 물 중에서도 끊이지 않는 물, 생명을 주는 물이라고 한다면 하나님의 선물은 분명히 주어지는 물, 위에서부터 주어지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해석은 후반부에 등장합니다. 요 7:37~39을 살펴보겠습니다.

37명절 끝 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38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39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여기에서도 ‘영광’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이 ‘영광’이라는 말은 예수님의 승천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들림을 받는 것이 ‘영광’이라고 합니다. 즉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의 고난 자체를 ‘영광’의 시작이라고 합니다. 마치 십자가에 높이 달리는 순간, 따라서 머리에 씌어진 가시 면류관 자체가 영광스러운 왕의 면류관처럼 변해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39절에 ‘아직도’라는 말은 아직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언제 생명을 주시는 성령을 믿는 자에게 부어주시는 것입니까?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생명을 주시는 성령이 믿는 자에게 부어주신다는 것입니다.

또 한 구절을 살펴보겠습니다. 19장 34절입니다.

그 중 한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옆구리를 찌르면 피가 흘러나오게 됩니다. 그런데 왜 피와 물이라고 표현을 했습니까? 다시 말해서 여기에서 ‘물’은 예수의 죽으심의 결과로서 생명을 주시는 진정한 물을, 성령을 믿는 자 위에 부어주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분명히 율법의 물, 토라의 물은 사람들에게 영원히 해갈할 수 없는 물로서 이 여인은 지금까지 족장의 우물에서 매일같이 물을 길어야만 했습니다. 이것은 자기가 길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물은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주의적인 발상, 인간적인 모든 종교라는 것은 우리가 무엇인가를 길으는 것입니다. 그러나 생명을 주는 물은 ‘선물’ 곧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노력해서 받는 것이 아니라 주어지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위에서부터 주어지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의 결과로 생명이 주어지는 성령이 믿는 자 위에 부어주실 때에 그리고 바로 예수님의 죽는 순간 자체가 영광스러운 순간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영광스러운 순간, 새로운 생명으로 들어가는 순간은 요한복음에 의하면 앞으로 장차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이미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짤막한 구절을 통해서 옛 언약의 땅, 그 땅의 ‘수가성’ 옛 언약의 대표로서의 시내산 율법, 즉 족장의 우물과 족장의 물로서 대표되는 옛 언약과 옛 토라는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이 나타남으로서, 또한 그가 주시는 성령 안에서 다 사라지게 되고 생수로 상징되는 예수님과 그의 성령 안에서 새것으로 대치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예배]

이제 16절부터는 메시야로서 예수님의 우월성이 잘 계시되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지리적으로 초점을 맞춘 예배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사마리아인은 그리심산에서 드려지고 있습니다. ‘그리심산’하면 떠오르는 또 다른 산이 무엇입니까? 에발산입니다. 그리심산과 에발산은 ‘축복’과 ‘저주’의 상징입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리심산’을 선택했습니다. 북이스라엘이 BC722년에 멸망했습니다. 앗시리아에 많은 사람들이 잡혀가게 되고 그 땅에 다른 이민족들을 이주시켰습니다. 결국 혈통과 종교가 혼합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남쪽 유다민족들은 BC 586년에 바벨론에 망하면서 포로로 잡혀가게 됩니다. 그리고 70년 후에 다시 귀환하게 됩니다. 그들은 자기 민족의 정체성을 그대로 유지하였는데 항상 토라에 의해서 유지를 하였습니다. 그런 이유로 남쪽 사람들은 북쪽 이스라엘 백성들을 우습게 여겼습니다.

북쪽과 남쪽의 앙금은 굉장히 강합니다. 북쪽과 남쪽의 분열은 솔로몬 아들 르호보암과 여로보암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게 됩니다. 그 시대에 나라를 남과 북으로 나누어서 정치를 하게 되는데, 민족적인 행사가 있을 때에면 모든 사람들이 남쪽 예루살렘에 모이게 됩니다. 그러한 현상들이 발생하자 북쪽 이스라엘의 여로보암이 성소를 여러군데(‘벧엘’, ‘단’, ‘세겜’) 세우게 됩니다. 또한 여러보암왕은 제사장 제도를 바꾸었습니다. 남유다에서는 레위지파에서만 제사장이 되는데, 여로보암 왕은 지파에 관계없이 제사장의 문을 열어놓고 누구든지 제사장이 될 수 있도록 정치를 하였습니다. 바로 이러한 정치들이 그들 민족가운데에 파고든 앙금들의 시초입니다. 그러자 722년에 북이스라엘이 망하자 남쪽 유다인들은 자신들만이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께서 지켜주신다는 의식으로 오해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BC586년에 그들 역시 멸망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북이스라엘이나 남유다는 다 같은 존재라는 것을 그들은 몰랐습니다.

예루살렘으로 대표되는 유대주의와 그리심산으로 대표되는 사마리아주의는 항상 지역적인 갈등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때가 되면 이러한 모든 민족적인, 제도적인, 지역적인 것들이 무너질 것이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 세상에서 만들어 놓은 접속사 ‘과’는 분리시켜 놓는 일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만들어놓은 접속사 ‘과’의 의미는 비분리 접속사입니다. 그러나 타락 이후로 세상에 있는 모든 ‘과’는 분리접속사가 되어버렸습니다. 예를 들면 ‘하늘과 땅’은 분리가 되어 하늘과 땅이 아직 만나지 못한 상태를 말합니다. ‘남과 여’, ‘가난한 자와 부자’ 등등 모든 ‘과’는 타락이후에 분리접속사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만드신 창조세계를 보면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새로운 창조세계를 보면 모든 ‘과’는 근본적으로 비분리 접속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남자와 여자’, ‘종이나 자유자’, ‘유대인과 헬라인’이 다 하나(갈 3:28)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 사람들의 생각은 이 세계의 범주 가운데에서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다 이러한 관계 속에 넣을 수가 있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분류는 ‘인종’적으로 나누었고, ‘계급’별로 나누었습니다. 또 하나는 ‘성’(性)으로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이야기하기를 접속사 ‘과’는 창조시에처럼 재창조시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별과 차이가 없어지고 하나가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지금 우리는 이 갈라진 틈 사이에서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에서 보여주는 환상은 매우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내가 장차 큰 일을 보리니 인자 위에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 할 것이다’는 것은 야곱이 보았던 환상이라고 한다면 그 환상을 통해서 하늘과 땅이 만날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은 하늘이 땅을 만나는 것이고, 땅이 하늘을 만나는 것입니다. 결국 통합, 통일, 하나됨, 샬롬의 세계를 가져오시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지역적으로 예루살렘과 그리심산으로 나누어졌던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느 때가 되면 성령과 진리 안에서 진정으로 한 하나님을 예배할 때가 올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성령 안에서’라는 말은 ‘성령이 증거하시는 분이신 예수 안에서’라는 의미입니다. 즉 성령께서 증거하시는 예수 안에서 예배가 가능하다는 뜻은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성전’이라는 뜻입니다. 진정한 예배가 이루어질 수 있는 참된 성전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성령께서 증거하시고 또한 예수 그리스도 자체가 진리이시고, 참(tm,a>, 에메트)이십니다. 그럴때에 우리는 진정으로 하나님을 예배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이해하고 하나님께로 갈 수 있는 길, 그것이 바로 성전의 역할이라고 한다면 예배라는 것은 하나님을 만나는 것인데, 우리는 예배를 통해서,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날 수가 있는데 그 예수님에 대해서 우리 마음속에 증거해 주시는 분이 바로 성령이십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참이시고 진리(ajlhqeiva/, 알레데이아)이시기 때문에 그분을 통해서만이 우리가 하나님께로 갈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성령안에서, 진리안에서 우리가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을 경배하고 예배한다고 하면 이 세상의 모든 균열들과 차별들과 갈라짐은 해소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비록 인종이 다르고 학문성이 다르고 경제적 위치가 다르다고 할지라도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꿈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한 예배는 하나님 안에서 하나가 되는 예배입니다.

또 하나는 3장과 4장을 연결하는 것인데, 3장은 남자요 4장은 여자입니다. 3장은 니고데모요 4장은 사마리아 여인입니다. 흥미있게도 니고데모는 밤에 찾아오지만 사마리아 여인과의 만남은 낮입니다. 둘 다 서로 토라를 갖고 있습니다. 니고데모는 유대인들의 가장 핵심인 토라를 갖고 있었고, 사마리아 여인은 사마리아 토라를 갖고 있었습니다. 하나는 유대교를 상징하고 있고 하나는 사마리아교를 상징합니다. 구약적으로 살펴보면 흥미있는 일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BC 586년에 멸망하지만 그들은 왕정의 정통성을 주장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사마리아는 북이스라엘이 대표입니다. 이 두 개의 관계는 사실상 앙숙의 관계이면서도 항상 형제입니다. 이 형제의 관계를 표현해 주는 구절이 여러군데 나오는데, 바로 예레미야 3장의 이야기입니다. 거기에는 둘 다 나쁜 자매로 나오고 있는데 큰 자매의 이름은 ‘laer;c]yI hb;vum]’(메스바 이스라엘, 돌아선 이스라엘)입니다. 또 남쪽에 있는 또 다른 자매의 이름은 ‘hd;Why&Ograve;hd;/gB;’(바고다 유다, 믿지못할 유다)입니다. 북쪽에 있는 이스라엘이 얼마나 못된 짓을 했고, 간음을 하고, 바알신을 섬겼는지 하나님께서 722년에 멸망시켰습니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이혼장을 써 주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이미 다른 남자 즉 다른 신들을 섬기고 행음하였기에 도저히 함께 살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현장에 남쪽 유다가 그 현장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도 똑같은 일을 저지르고 맙니다. 왜냐하면 북이스라엘이 722년에 멸망을 하였고, 722년 후에도 남유다는 계속해서 생존하고 있는 것을 보니- 앗시리아가 북이스라엘을 쳐서 멸망시켰는데-지금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다고 믿고있었습니다. 그 사실을 보고 하나님께서 너무 속상해서 이름을 붙여준 것이 바로 ‘hd;Why&Ograve;hd;/gB;’(바고다 유다, 믿지못할 유다)입니다. 즉 너희나 북이스라엘이나 같다는 의미입니다. 즉 돌아선 이스라엘이나 믿지못할 유다나 같은 존재였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누구에게 더 크게 호통을 칠까요? 바로 남쪽 유다입니다. 왜냐하면 더 많은 것을 주었다면 더 많은 것을 찾지않겠느냐는 신약의 가르침처럼 남유다는 역사를 오해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을 볼 때에 3장의 니고데모 다음에 4장 사마리아 여인이 나온다면 지탄은 누구에게 있습니까? 바로 니고데모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즉 유다인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통해 누가복음 15장의 이야기를 떠올릴 수가 있습니다.

한 아버지에게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집을 떠났기 때문에 잃어버린 아들이었고, 하나는 집 안에서 잃어버린 아들입니다. 둘 다 탕자입니다. 집 밖에서 잃어버린 탕자와 집 안에서 잃어버린 탕자입니다. 그러나 우리 눈에는 안에서 잃어버린 탕자는 결코 탕자라고 생각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한번도 집을 떠나본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비유를 듣고 있었던 사람들은 누구였습니까? 바로 유대인들 그 중에서도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었습니다. 한번도 자기들은 집을 떠나본 일이 없다고 생각했던 사람들, 자기 의(義)가운데에 살았던 사람들, 아버지의 마음을 한번도 섭섭하게 해 본적이 없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을 향해서 예수님께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보면 둘째 아들은 돌아왔지만 큰 아들은 집으로 안들어왔습니다. 성경에 의하면 둘째 아들이 돌아와서 큰 잔치를 벌이고 있는데 놀랍게도 그 잔치에 아직도 들어가지 않은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아버지와 큰아들입니다. 집으로 들어가기를 거절하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큰 아들에게 집으로 들어갈 것을 간곡하게 부탁하고 있는 장면으로 그 이야기는 끝을 맺습니다. 아버지는 지금 집 밖에 큰 아들이 집 안으로 들어오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직도 들어와야 할 큰 아들에게 설득하면서 밖에 서 있다는 것입니다.

어찌보면 사마리아 여인은 그 비유에 의하면 작은 아들이요 니고데모는 큰아들과 같습니다. 작은 아들은 위대한 신앙고백을 하지만 큰 아들이라고 생각했던 유대인인 니고데모는 신앙고백을 하지 않고 슬그머니 사라졌습니다. 이 여인의 위대한 신앙고백을 보십시오.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시다!”(42)는 고백은 보편적이고 광대한 신앙고백입니다. 단순히 예수님은 유대인들을 위해서 온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작은 자가 돌아왔을 때에 큰 아들도 돌아와야 그 가정에 진정한 샬롬이 일어나게 됩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신론 중심적인 해석은 단순히 니고데모에 관한 이야기도, 단순히 사마리아 여인에 관한 이야기도 아닌 하나님 아버지의 이야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에게는 니고데모도 구원받아야 할 대상이고, 사마리아 여인도 구원받아야 할 대상입니다. 그에게는 유대인도 자기의 자식이요, 북 이스라엘도 자기의 자식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충격을 주는 이야기가 많습니다. 항상 신앙고백은 누가합니까? 신앙고백을 할 것 같은 사람들은 신앙고백을 하지 않고 오히려 신앙고백을 전혀 하지 않을 것 같은 이방인들, 창녀들, 여자들, 백부장들, 로마인들, 수로보니게 여인들처럼 outsider들이, 자기 자신들이 한번도 insider라고 생각해 보지 않았던 사람들 아니 insider이 볼 때에 영원히 저들은 하나님 나라의 밖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의 입에서부터 놀라운 고백들이 나옵니다. “당신은 세상을 구원할 구세주요 메시야이십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는 고백을 할 때에 소위 정통성을 주장하는 유다인들 그리고 오랫동안 양손에 토라를 가지고 하나님을 믿었다고 하는 사람들이 철저하게 깨어지고 집으로 들어오든가 아니면 고집적으로 멀리 멀리 떠나던가 둘 중 한가지의 반응을 보이게 됩니다. 이 메시지는 우리에게 굉장히 큰 충격을 주게 됩니다.

마태복음 2장을 보겠습니다.

여기에는 예수님의 탄생에 관한 이야기인데 서로 상반되는 두 종류의 인물이 나옵니다. 하나는 서기관들, 바리새인들, 예루살렘 안에 있었던 유명한 신학자들이요, 하나는 동방에서 왔던 천문학자요 점성가요 우상숭배자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수일을 걸쳐서 일생의 대 모험을 단행합니다. 한번도 밟지 않았던 길, 그 누구도 가지 않았던 길을 떠나 팔레스타인 예루살렘까지 오게 됩니다. 그리고 왕을 찾을 때에 그 당시 서기관들, 바리새인들-주야로 토라를 묵상하던 사람들-은 도저히 사람같지 않은 사람들, 유대인들이 볼 때에는 혐오하리만큼 한 우상숭배자들, 니고데모가 볼 때에 도저히 사람같지 않은 사마리아인들, 큰 아들이 볼 때에 도저히 사람같지 않은 탕자요 패륜아같은 자들에게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찌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미 5:2)의 말씀을 알려줍니다. 그 때 그들은 에브라다 저기 베들레헴이라는 사실을 알고 예루살렘에서 베들레헴으로 찾아갑니다. 그리고 가서 왕이신 아기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렇다면 누가 예수를 만났는가? 유대인들이 볼 때에 우상숭배자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 성경도 모르는 자들 소위 outsider라고 불리우는 사람들, 하나님 나라에 근접할 수도 없다고 하는 사람들이 예수를 만나게 됩니다. 당연히 만날 것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 상당한 지식을 갖고 있었던 사람들은 짧은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왕이신 예수님을 만나는 일에 실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마태복음을 읽는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바로 유대인입니다. 유대인들이 그 이야기를 읽었을 때에 엄청난 충격을 받게됩니다. 하나님 나라에 당연히 들어갈 것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지 못하는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데, 우상숭배자들은 만났고, 유다인들은 만나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아버지의 관점에서 볼 때에 누가 더 낫고 덜 낫고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도, 사마리아인도 자기의 자식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환상적인 내용이 나옵니다. 장차 어느 날 저 북과 남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는 날, 너희가 장차 예배드릴 때가 오나니 성령 안에서, 진리안에서 예배를 할 것이니 성전이신 예수님을 통하여서 진정한 예배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 예배는 우리를 하나로 묶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참된 성전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남과 북이 하나가 되고, 집 안에서 잃어버린 탕자나 집 밖에서 잃어버린 탕자가 함께 춤을 추고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에 대해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성례를 진행하는 것, 우리에게 진정한 생명을 가져다주는 떡을 함께 나누는 것이 예배라는 것입니다.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 가운데에 거주하시고 진리 안에서 실재로 하나님과 교제하고 하나님을 듣고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예배할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그 때에는 바로 십자가에 달리실 때입니다. 그 때야 말로 하늘이 열릴 때이기 때문입니다. 그 순간 하늘과 땅이 만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니고데모도 구원받고 사마리아 여인도 구원받고, 남자도 여자도 구원받고, 북쪽도 남쪽도 구원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만이 모든 것을 다 얻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다 구원받아야 할 내용들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놀라운 소식을 증거했던 여인이 자기 고향에 가서 증거하자 고백했던 말은 “당신이야 말로 세상의 구세주이십니다!” 지역적인 신도 아니고 민족적인 신도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야 말로 우리의 인종과 학력과 계급과 우리의 모든 것을 초월하여서 하나로 묶는 통일자라는 것입니다.

 

 

제7강 안식일과 종말론 (5:1~30) 


우리가 지난 시간들을 다시 한번 정리해 본다면 1장은 요한복음의 서문에 해당하는 부분으로서 요한복음 전체에 대한 내용의 서론부분입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가에 대한 증언자들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2장에서부터 4장에까지는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가에 대한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5장에서부터는 예수님의 공적인 사역 자체가 많은 유대인들 특별히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 의해서 배척을 받고 또한 저항에 부딪치는 이야기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서 5장에서부터 10장까지는 계속해서 도대체 예수는 누구인가? 하는 주제를 계속적으로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자세히 읽어보면 아주 독특한 용어들이 등장하는데, ‘아버지와 아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 ‘아버지와 아들’에 관한 이야기는 요한복음에만 등장하는 용어입니다. 그리고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병자를 고친 이야기는 그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에 관한 것에 대한 이야기의 논쟁에 대한 이야기를 위해 나와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또 이런 일을 통해서 두 가지를 발견할 수가 있는데, 하나는 안식일을 범하는 문제 즉 안식일을 범하는 문제와 또 하나는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것 바로 여기에서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 근본적인 갈등 구조가 등장합니다. 둘 다 구약을 믿지만 그러나 구약성경 말고 그 외에 예수 그리스도를 구약과 어떻게 연결시키느냐하는 문제가 특별한 주제고 부각되고 있습니다.

또 한가지는 예수님의 사역에 대해서, 공적인 행위에 대해서 병자를 치료하고 신유의 은사를 베푸시는 일 자체가 강력한 저항에 부딪치는데, 유대인들 혹은 무리들에게 저항을 받게 됩니다. 물론 현대의 많은 번역가들은 유대인들을 바꾸어서 유대인의 지도자로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을 합니다. 왜냐하면 반유대주의의 색깔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유대인들보다는 유대인의 몇몇 지도자로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을 하기도 합니다.

14절에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잘못 생각하게 되면 마치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보복적인 정의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들려집니다. 보복적인 정의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누군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 죄에 대한 보복 혹은 보응을 하기 위해서 병을 가져다 주었더라고 하는 것처럼 보이게 됩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 말씀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진정한 생명의 원천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안식일에 관한 이슈(issue)입니다. 예수님 자신을 하나님과 동일시함으로서 문제가 시작이 됩니다. 그리고 이것이 안식일 문제의 핵심이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이외에 아무도 안식일에 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 우리가 본문을 통해서 기억해야 할 주제는 안식일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또한 이 안식일 논쟁을 통해서 그리스도께서는 어떻게 구약성경을 성취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안식일을 완성했다고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는 지금 이 요한복음 5장에서는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이 병자를 치료하는 것이 세 번째 징조입니다. 첫 번째 징조는 가나의 혼인잔치였고, 두 번째 징조는 4장에서 천부장의 아들을 고치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면 Sign이라고 할 때에는 ‘~을 가리킨다’고 하였습니다. 즉 병자를 고치는 자체에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자체는 무엇을 가리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독자들은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예수님께서 38년된 이 병자를 치유하고 고친 이야기는 분명히 예수님과 연결해서 가리키고 있을 것입니다. 마치 가나 혼인잔치에서 가리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새로운 시대를 창시하고 새로운 시대를 가지고 오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즉 유대주의 물로서는 대치될 수 없는 새로운 시대, 포도주와 같은 새로운 메시야 시대를 가져오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베데스다 연못가에서도 이 병자를 고치는 일도 예수 그리스도와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가 무엇을 가리키는가?를 보여주는 예입니다.

분명한 것은 1~8절까지를 보면 베데스다 연못에서의 치유 행위의 결과로 9절에서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라”고 기록하고 있을 때에는 사도요한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안식일과 치유와 무슨 관계를 갖고있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이 이야기를 쓰고 있음이 틀림없습니다. 공관복음서에서 보면 안식일에 관한 것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인도주의적인 측면에서 안식일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구절들이 있고, 또 하나는 신학적인 의미에서 안식일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막 3:1~6까지 보면 특별히 공관복음서를 보면 안식일을 보면 두 가지 측면에서 나오는데 하나는 철저하게 인도주의적인 측면(눅 14:1~6; 눅 14:1~6)과 신학적인 내용(막 2:23~28)들입니다. 공관복음에서는 예수께서는 자기가 예언자적인 전통가운데에서 안식일을 소개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즉 안식일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있는데, 이 안식일이 가리키는 모든 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공관복음서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서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시는 것을 보면, 치유라는 것은 구약적인 의미로 보면 ‘샬롬’(!/lv;)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샬롬’(!/lv;)은 병이 들지 않고 건강한 상태를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다른 날도 많지만 안식하는 날에 병자를 고쳤다는 것은 ‘안식’이라는 개념과 ‘샬롬’(!/lv;)이라는 것은 아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입니다. 즉 안식한다는 것은 단순히 어떤 일들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안식이라는 것은 가득찬 상태, 즉 병자들이 완전하게 치료를 받아서 건강을 회복하고 생명의 탄일을 기뻐할 수 있는 것이 안식일의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가 있다고 한다면 안식일은 ‘샬롬’(!/lv;)과 아주 밀접하다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 나라는 안식과 ‘샬롬’(!/lv;)이 가득찬 상태를 가리켜 ‘하나님 나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서 그가 쾌유하고 완벽하게 된다면 이것이야말로 하나님나라가 지금 여기에 도래하고 있는 징조와 징표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안식’하게되면 제일먼저 떠오르는 부분이 창세기 1장의 창조 이야기입니다. 창세기 1장을 자세히 보면 여섯째 날까지 창조사역을 하시는데, 여섯째 날 마지막으로 사람을 만들고 바로 안식일이 시작됩니다. 구약과 신약이 날짜를 선포하는 것이 다릅니다. 신약은 항상 아침에서부터 저녁으로, 그러나 구약에서는 저녁에서부터 그 다음날로 계산이 되어집니다. 구약은 항상 기다림의 세계였습니다. 그런데 여섯 번째날 사람을 창조하셨고, 그리고 일곱 번째날 하나님께서 안식일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안식일에 해당하는 단어 ‘tB'ov;’(샤바트)는 ‘쉰다’는 뜻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어떤 일을 하다가 쉰다는 ‘휴식’의 개념이 아닙니다. ‘tB'ov;’(샤바트)라는 말은 ‘멈춘다’(Stop)는 뜻입니다.

또 하나는 초대교회에서 소위 주일날 휴식했다는 개념은 없습니다. 즉 안식일날 일을 전혀 하지않고 휴식했다는 개념은 없고 초대교회 처음 시작했을 때에는 자기들이 직장생활을 하다가, 일을 하다가 잠시 멈추고 와서 예배드리고 또 다시 일을 했습니다. 일을 하다가 그들이 부활 후 첫날 즉 주일날 잠깐 모여서 축제하고 또 다시 일을 하였다는 이야기를 성경은 말해주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여섯 번째날 사람이 지음을 받자마자 한 일은 잠자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잠자고 깨어보니 소위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가득차 있었습니다. 즉 ‘샬롬’(!/lv;)의 상태가 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 최초로 경험했던 것은 ‘샬롬’(!/lv;)이고 ‘tB'ov;’(샤바트) 즉 안식이었지 그 어떤 것도 아니었습니다. 또한 이 안식과 샬롬 자체는 enjoy 하고 향유하고 누릴(받는다) 대상이지 결코 버는 것이 아닙니다. 좀더 쉽게 이야기하면 ‘안식’과 ‘샬롬’은 받는 것이지 버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창조세계의 이야기의 가장 본질적인 이야기입니다. 안식일은 ‘샬롬’(!/lv;)을 떠나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것 그리고 그 사회야말로 ‘에덴동산’이라고 말하고 신약적으로는 ‘하나님의 나라’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라고 하면 충만함으로 가득차 있기 때문에 거기에는 소위 우리가 이야기하는 병이나 고통들이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시고 안식일에 중풍병자를 고치셨다는 것은 바로 original 창조세계의 회복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안식과 샬롬은 주어지는 것이요, 받는 것이지 결코 우리가 버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안식일이라고 하는 이야기를 보면 대부분이 ‘네 죄가 용서함을 받았다’는 말이 나옵니다. 즉 병과 죄와 연결시킵니다. 그것은 한 개인이 지은 죄에 대한 보복이 아니라 보상의 개념입니다. 창세기 3장 이후로부터 죄로 인하여서 샬롬과 안식상태가 일그러지고 깨어진 상태를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달력’(calendar)를 보면 ‘일요일’부터 시작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우리들은 정 반대로 ‘월요일’부터 살아가고 있습니다. 달력은 저렇게 걸어놓고 살기는 정 반대로 살아갑니다. 그런데 이것이 얼마나 반신학적인 의미가 있는지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월요일부터 시작한다면 현대인들이 만들어놓은 이야기가운데에 소위 금요일 저녁 뉴스 시간에 앵커가 인사를 ‘주말을 잘 보내십시오’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주말이라는 개념이 언제부터 생겼습니까? ‘주말’이라는 개념이 현대적인 개념입니다. Weekend라는 말, 서양사람들이 금요일이 되면 “OK! Have nice weekend!”라고 하면 “좋은 주말을 보내십시오!”라고 인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T.G.I. Friday‘s」라는 식당을 아실 것입니다. 이 말은 “Thanks God It's Friday's!” 약자입니다. 즉 ‘오 하나님, 정말로 고맙습니다. 오늘은 금요일입니다!’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서구인들 특히 미국인들의 사고방식을 잘 나타내주는 외식산업입니다. 이 말은 주말이 시작된다는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서구사람들은 주급을 받는데 일주일 일을 하고 금요일 저녁 퇴근할 때가 되면 주급을 받게 됩니다. 그러면 일주일을 노력한 결과로서 돈을 받고 제일먼저 즐거운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왜냐하면 바로 ‘주말’이 돌아왔기 때문입니다. 주말이 언제입니까? 바로 토요일과 일요일입니다. 현대인들은 알든 모르든 일주일을 두 조각 즉, 주중과 주말로 나누어서 살고 있습니다. 달력은 이렇게 걸어놓고 우리가 살기는 월요일부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스스로 모순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보이지않는 반신학적인 행위입니다. 사실상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T.G.I. Friday’s’대신 ‘T.G.I. Sunday's’를 써야합니다. 다시 말하면 “Oh! Thanks God It's Sunday!” 즉 ‘하나님, 감사합니다. 오늘은 주일입니다!’정도가 되어야 신학적으로 사는 것입니다. T.G.I. Friday‘s 의 생활은 우리가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살고 토요일과 일요일은 주말의 둘째 날로 전락하는 생활이라는 것입니다. 어찌보면 모든 날들의 왕이고 모든 날들의 면류관이고 모든 날들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만 왕의 왕으로서 등극하시고 부활하신 날, 그 날이라고 한다면 가장 중요한 날, 그 날로부터 시작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놀랍게도 현대의 사고구조는 일요일을 두 번째 날로 폐위시켰습니다.

그런데 창조기사를 자세히 보면 안식일은 맨 끝에 가 있습니다. 즉 여섯째 날 마지막으로 사람이 지으심을 받고 그리고 그가 안식일을 누리기 위해서 인간이 했던 일은 잠자는 일밖에 없습니다. 다시말해서 아무것도 한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안식과 샬롬은 은혜로 주어진 것이고 우리는 그저 감사함으로 받을 뿐이지 안식과 샬롬은 버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학의 핵심입니다. 만약에 이 근본적인 사실을 뒤짚는다면 그것은 종교행위가 되고 맙니다. ‘종교행위’라고 할 때에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열심히 일을 하고 그리고 그 노동의 댓가로 주말을 즐겁게 보내는 사람을 말합니다. 즉 많이 노력을 해서 얻게 되면 주말을 즐겁게 누릴 수가 있다고 한다면 소위 안식과 샬롬은 버는 것이 됩니다. 이러한 사실은 반창조질서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소위 유물론자들의 갖고있는 사고구조와는 맞지만 신앙인들의 사고구조와는 맞지 않습니다.

북한사람들의 달력(Calendar)은 우리와는 조금 다릅니다. 그들은 ‘월요일’부터 달력이 시작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한 것을 볼 때에 제 생각에는 ‘이 사람들은 참으로 신실한 사람들이다(?)’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적어도 그들은 유물론적인 사고 방식에 의하면 저 System에 의해서 이렇게 되었다고 한다면 그들은 ‘안식’과 ‘샬롬’은 인간의 노력의 결과이지 결코 공짜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북한사람 혹은 공산주의 혹은 유물론자들이 적어도 우리보다 훨씬 정직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자체는 근본적으로 창세기 1장과 2장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창조질서와 반대되는 행위입니다. ‘안식’과 ‘샬롬’이 가득찬 사회를 가리켜서 구약에서는 ‘에덴동산’(사 11:6~9)이라고 했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새로운 창조자로 오셔서 새로운 세계를 연다고 한다면 그 세계야말로 ‘안식’과 ‘샬롬’의 세계요, ‘하나님나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관복음서는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특별히 병자를 고쳤다는 것은 병과 슬픔과 고난이 없는 완전히 회복된 새로운 세계를 가리키기 이야기입니다.

구약성경에서는 ‘샬롬’과 ‘안식’을 ‘구원’이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신학적으로 ‘구원’이라고 하면 굉장히 피상적으로 생각을 하게 되는데, 구원이라는 것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병든 자가 나음을 얻고 눈먼 자가 눈을 뜨게되고 옷을 벗었던 자가 옷을 입게되는 것 그리고 집을 떠난 사람이 집으로 돌아오는 것들을 통해서 성경은 ‘구원’이 무엇인가, ‘샬롬’이 무엇인가, 그리고 하나님께서 온전히 다스리는 나라가 무엇인가, 그리고 하나님과 아주 긴밀하게 사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요한복음서에는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하신 것은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즉 하나님 아버지와 자기의 관계에 근거에 의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아들 됨의 의미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선 요한복음 5장 10절부터 17절까지를 내용에서 18절은 마치 결론적인 부분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지금 18절에서 유대인들이 왜 예수님을 고소하고 핍박을 하고 있는가에 대한 이야기가 기록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안식일의 행동을 정당화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안식일에 쉬지 않았기 때문에 자기도 일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안식일에 쉬지 않았다는 것은 그 당시 랍비들의 생각에는 안식일에 사람이 태어나고 죽기도 한다면 이러한 일들은 바로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랍비들이 생각할 때에 안식일에도 사람들이 태어나고 사람들이 죽게 되는데, 그러한 의미에서 그들은 하나님께서 가만히 놀고있는 분이 아니라는 사실은 알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을 가지고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사람이 태어나고 죽기도 하는 것을 의미하면서 이것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일을 하고 계심을 알려주고 있는 내용입니다. 왜냐하면 생명이라고 불리우는 것을 선물하는 것과 또한 심판의 행위는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전권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자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과 동등됨을 이야기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그들은 신성모독이라고 주장을 합니다. 성경학자들은 예수님이 죽은 이유에 대한 논쟁이 많지만 성경에서는 단 한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하나님과 동등되다고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신성모독이 그를 십자가에 달려 죽게 했다는 것입니다.

또한 19~30절에서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주장에 대하여 비난하고 고발하자 예수님께서 응답을 하는 내용입니다. 이 부분은 요한복음의 기독론의 highpoint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먼저 19절과 30절을 살펴보면 나 스스로 독립적으로 나 스스로를 인정했다고 하는 것을 예수님께서 반박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가 나를 하나님과 동등되었다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하는데 예수님께서 이것을 받아들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하나님만이 할 수가 있고,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대권적인 전능이 아들에게도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19절에서 독특한 부분은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본다’는 말이 중요하게 등장됩니다.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와 함께, 아버지와 얼굴을 맞대고 아버지가 하는 일들을 보았다는 주장으로서 아들이 아버지와 함께 하늘에 있었다는 내용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구약에서도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진짜 선지자가 누구인가? 진짜 참선지자가 누구인가? 그 사람은 천상의 어전회의에 올라가서 “???? ???”(소드 야훼) 즉 하나님의 마음속에 있는 모든 내용들, 하나님의 의도들을 충분히 알고 대화를 나누고 그들이 무엇을 하는지, 무엇을 원하는지를 아는 사람들이 내려와서 선포할 때에 참선지자라고 하는 것처럼 여기에서도 예수님께서 자신은 아버지와 함께 있었고, 아버지가 하는 일을 처음부터 목격한 자라는 주장입니다. 즉 생사화복의 전권이 아버지에게서부터 아들에게 주어졌다는 사실입니다. 독특한 또 한가지의 사실은 아들은 아버지의 보내심을 받은 자라는 것입니다. 보내심을 받은 자는 자기를 보낸 자의 뜻을 따라 말하고 생각하고 자기의 임무를 성취합니다. 그런데 예수님도 동시에 제자들을 보내게 됩니다. 이것은 요한복음 맨 마지막 장에 가서도 제자도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한마디로 요한복음의 제자도는 하나님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세상으로 보낸다는 것입니다. ‘사도’라는 말이 헬라어로는 ‘ajpostovlo"’(아포스톨로스)라는 말인데, ‘ajpo’라는 말은 ‘앞으로’라는 말이고, ‘stovlo"’라는 말은 ‘보낸다’는 의미입니다. 즉 ‘사도’라는 말(ajpostovlo", 아포스톨로스)은 ‘앞서 보냄을 받은 자’라는 의미입니다. 마치 전령자들처럼 말입니다. 즉 “장차 이러한 일들이 있을 것입니다” 라는 아버지의 소식, 하늘나라의 소식들을 가지고 미리 보냄을 받은 전령자와 같은 사람들이 바로 사도들입니다. 우리가 교회를 가리켜서 ‘사도적인 신앙고백’ 혹은 ‘사도적인 가르침’이라고 이야기할 때에도 동일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질적으로 교회는 보내심을 받은 자들의 무리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보내심을 받았다는 것은 역동적인 이야기입니다.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는 지속적으로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즉 교회는 자기 자체의 목적이 아니라 보내심을 받았다는 것에 중요성이 있습니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하나님이 아들을 아버지가 아들을 보낸 것처럼 그 아들도 제자들을 계속해서 보냈다는 것입니다.

23절을 다시 살펴보면, 아버지와 아들이 똑같은 존재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요한복음에 우연히 나타난 유대교와 기독교의 논쟁의 분기를 보여줍니다. 유대주의는 아버지만을 공경하지만 기독교는 아버지도 공경하지만 아들도 공경한다는 것입니다.

24-25절은 실현된 종말론을 가리키는 부분입니다. 이 부분은 이미 영생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24절에는 “내 말을 듣고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24절과 25절은 분명히 실현된 종말론입니다. 이미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27-29절의 말씀입니다. 이 부분은 전통적인 신앙 즉, 장래에 부활이 있을 것이고, 장래에 심판이 있을 것이고, 장래에 심판은 인자에게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두 가지가 서로 충돌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24-25절은 실현된 종말론이라고 한다면 이 부분은 미래의 종말론처럼 보이게 됩니다. 그러나 이 두 구절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를 하는가?라는 것이 문제입니다. 일종의 해결점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요한복음 1장 1-18절의 소위 성육신한 로고스의 관점에서 보면 충분히 이해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즉, 예수님은 자기의 지상 사역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우리 가운데에 가져오신 성육신의 로고스의 관점에서 보면 영생과 하나님의 심판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분을 통하여 지금 우리 속에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장차 심판과 장차 부활 자체를 성육신하신 로고스가 우리 가운데에 거하신 것처럼 그분을 통해서 우리 가운데에 가지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그 말(27절)은 무엇을 통하여 심판이 주어졌다고 했습니까? ‘인자됨을 인하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인자’라는 말은 다니엘 7:14절에 있는 것처럼 ‘권세와 능력과 통치가 그 인자에게’ 주어졌는데 그 말씀이 오늘 본문 28절과 29절에도 나옵니다. 바로 그분이 부활의 날에 심판을 행하시는데 동시에 이렇게 높아지신 아들 즉, 인자는 현존하는 아들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자의 장래적인 역할이 이미 아들의 사역 속에 시작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25절에서 ‘이때’라는 말은 지금입니다. 다시말해서 25절의 끝날이라고 부르는 장래의 날은 이미 동터왔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죽은 자들이라 할지라도 아들의 음성을 들으면 -예수님께 믿음으로 나오면- 곧 영생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 자체는 이미 종말을 결정지었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성경가운데에 보면 ‘종말’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게 됩니다. 그런데 종말이라는 말을 할 때에는 상당히 시간적인 개념으로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구약이나 신약을 보게되면 시간, 혹은 역사를 이야기 할 때에는 단순히 시계로 잴 수 있는 시간을 이야기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구약이나 신약에서 ‘시간’ 혹은 ‘때’라고 이야기할 때에는 혹은 역사라고 이야기할 때 즉 하나님께서 인간의 삶속에 들어오셔서 활동하는 때, 역사는 항상 경험되어지는 때를 말합니다. 예를 들어서 ‘너희들은 출애굽의 그 때를 기억하라’고 이야기한다면 BC 몇 년 전의 이야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경험했던 바로 그 때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약과 신약에서 종종 이야기하는 시간의 개념입니다. 요한복음에서도 ‘이 때’에 대해서 많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경륜 즉 하나님의 장엄한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져서 무르익을 때를 말합니다. 심지어 구약에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가 언제입니까? 애굽이 죄악이 관영할 때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죄악이 가득찰 때라는 것입니다. 그 때에 비로소 하나님이 행동할 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어느 시간이든지 연대기적으로나 혹은 달력에 의해서 시간으로 잴 수 없는 시간이라는 것입니다. 종말이라는 말도 삶과 죽음을 결정하는 때를 가리켜서 종말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장차 내가 부활과 심판으로 온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사건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하셨던 최후의 통첩과 같아서 예수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해서 응답하느냐에 따라서 종말이 결정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서 종말은 이미 결정이 된다는 것입니다.

끝이라는 말은 단순히 시간이 흘러서 끝나는 것도 있지만, 원래 자기가 생각하고 계획했던 경륜이라든가 뜻이 성취했을 때에 ‘끝’이라고 합니다. 이로서 전도서 3장 1절~11절에 보게되면 ‘만사 만물은 다 때가 있다’고 말씀합니다. 이 때라고 이야기할 때에는 어떠한 일들이 충만하게 이루어져서 목적을 완전히 이룰 때를 말합니다. 그렇다면 ‘종말’이 무엇입니까? 종말은 언제 옵니까? 하나님께서 인류를 향해서 자기의 창조세계에 관해서 자기가 갖고 있었던 모든 뜻, 경륜이 종점에 이르렀을 때에,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힐 때에, 이 종말은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가 삶과 죽음, 심판과 생명을 나에게 가져왔다’ 즉 인자에게 주어졌다고 하는 것은 나야말로 종말의 시작이라는 것입니다. 나에 대해서 어떻게 응답하고 반응하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종말은 이미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서는 이를 가리켜서 실현된 종말론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여러분들은 ‘종말’이라고 할 때에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서 종말은 이미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장차, 최종적인 종말론이라는 것입니다. 마지막 최후의 심판 날에 가서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운명은 결정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어떻게 응답하느냐에 따라서 이미 결정은 되고 형의 집행자체가 최후의 날에 집행된다는 것입니다. 그 날 마지막 날에가서 갑작스럽게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신약성경에서는 종말이라고 이야기할 때에는 항상 두 가지 단어를 씁니다. 하나는 단수로 쓸 때가 있고, 하나는 복수로 쓸 때가 있습니다. 복수로 쓸 때에는 ‘이 모든 날’, ‘마지막 날들’이라고 쓰고있습니다. 그러면 단수로 쓸 때에는 ‘마지막 날’로 쓰게 됩니다. 한글 성경에서는 이 두 헬라어의 구분을 해 놓았는데 이 두 단어에 대해서 정확하게 번역을 해 놓지는 않았지만 단수로 쓸 때에는 ‘아직’, ‘장차 와야하는 그 날’입니다. 그리고 복수로 썼을 때에는 이미 시작된 즉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으로부터 마지막 날들 가운데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윤리생활이 이 중간기의 긴장가운데에 살고 있습니다. ‘이미’와 ‘아직’이라는 양대 축 가운데에 우리가 긴장되어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미’ 종말은 왔지만 ‘아직’ 종말은 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건강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자극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본문은 ‘끝나는 종말’은 이미 동터왔고, 죽은 자들은 아들의 음성을 들으면 즉 예수에 대한 믿음으로 나오게 되면 그것이 곧 영생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제8강 특강/오병이어의 기적 (6:1~71)


요한복음 6장에 나타나는 오병이어의 기적은 상당히 특별한 기적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4복음서에 모두 기록된 기적 사건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사건 그리고 오병이어의 기적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오병이어의 기적이 4복음서에 다 기록된 이유에 대한 공통적인 의견은 이 사건은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남자만 5천명이라면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몇 만명이 될 수가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이야기를 기록할 당시의 독자들 가운데에 오병이어 기적의 사건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가장 많았을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는데에 가장 훌륭한 접촉점이 되었을 것이라는 추측입니다.
또한 오병이어의 기적이 후에 사람들은 예수님을 왕을 삼으려고 했지만 예수님께서는 마다하고 산으로 피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속에 ‘저분이 우리의 왕이다’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는데 요한복음 저자는 그분이 왕이기는 하지만 당신들이 생각했던 왕은 아니라는 것을 설득시켜서 바른 그리스도관을 갖게 만드는데에 가장 훌륭한 사건일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시대적 배경
성경 가운데에서 어떤 기사가 났을 때에 그 기사 자체가 중요하지만 그 기사를 통해서 얼마나 효용성이 있는가라는 것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요한복음이 쓰여진 시기는 AD 90~100년 사이에 쓰여졌습니다. 당시 유대인들 사이에는 4개 종파가 있었는데 바리새파, 사두개파, 에센파 그리고 셀롯당입니다. 그런데 AD 70년에 티투스 장군에 의해서 예루살렘이 함락이 되자 성전 중심이었던 사두개파가 무너지고, 칼을 들고 나섰던 셀롯당원들 그리고 쿰란 동굴에서 칩거생활을 해 왔던 에센파도 다 망했습니다. 결국 율법 중심의 공동체인 바리새파만 살아남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성전이 무너지면서 그들도 위협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때에 바리새파 중에서 ‘벤 쟈카이’라는 랍비가 ‘얌니야’ 종교회의를 소집하여 율법 중심의 유대교를 만들게 됩니다. 이 사람은 성격이 넓은 사람이었고, 또한 시대적으로도 유대교 자체가 위협을 받게되는 시기였기 때문에 유대교와 기독교의 마찰은 거의 없던 시기였습니다. 그런데 이 랍비의 후계자 가말리엘 2세라는 사람이 등장하면서 유대교와 기독교 사이의 갈등은 시작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스승이었던 가말리엘의 아들인 그가 유대교의 수장이 되면서 18개의 기도문을 만들어 유대인들이 회당에 모일 때마다 암송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12번째 기도문에 이단들에 대한 저주문을 기록하게 되는데, 그 저주문이 바로 기독교에 대한 저주문이었습니다. 결국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들이 회당에 참여하지 못하게 되면서 유대교와 기독교가 서로 등을 지면서 논쟁이 시작됩니다. 그 논쟁이 바로 누가 구약성경을 바르게 전승한 후계자인가?라는 문제였습니다. 유대인들을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할례의 문제를 다 지켰기 때문에 진정한 후계자라고 주장을 하고 나섰고, 기독교인들은 메시야의 대망을 기대하던 유대인들에게 그 메시야가 오셨고 또한 그 메시야를 받아들였다는 이유로 기독교가 진정한 후계자라고 주장을 하였습니다. 그러한 상황 가운데에서 쓰여진 것이 요한복음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한복음서를 읽다보면 그런 상황에 처해진 독자들에게 가장 설득력이 있고, 유효성이 있는 것들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를테면 4복음서가 대개 연대기순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요한복음은 조금 다른 내용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즉, 공관복음서에는 예수님께서 사마리아를 통해서 북쪽 갈릴리 지역으로 올라가셔서 2년 정도 사역을 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공관복음 사역의 주 무대가 ‘갈릴리’로 등장이 됩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는 헤로디아 사건으로 인해서 세례(침례)요한을 죽인 다음 사람들이 예수님도 죽이려고 하자 예수님은 아직 때가 아니기에 몸을 북쪽 사마리아로 피하게 됩니다. 그런데 5장 1절에서 보면 공관복음에 비춰볼 때에 사역 초기가 ‘갈릴리’로 나타나야 하는데 요한복음은 ‘갈릴리’ 배경보다는 ‘유대’를 배경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사역하신 장소가 갈릴리도 등장이 되지만 다른 복음서에 비해서 요한복음은 남쪽 유대지방이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두 가지 있는데 첫 번째는 요한복음서가 마지막에 쓰여진 것이기 때문에 공관복음에 기록한 이야기들을 반복해서 기록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다른 곳에 없는 것들을 추가했을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즉 공관복음서에는 갈릴리 사역을 중심으로 기록하였기 때문에 요한은 다른 곳의 사역을 많이 다루었다는 주장입니다. 두 번째는 역사적인 배경이 1차적인 독자들이 회당에서 쫓겨나는 상황에 처해있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의 지도자들과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논쟁이 벌어졌던 시기였습니다. 그러한 논쟁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도 그러한 심각한 논쟁을 하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고 기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사역을 하다가 1년에 세 차례 명절(맥추절, 초막절, 칠칠절) 때에 예루살렘 성전으로 올라가게 되는데, 그 때에 예루살렘에서 종교지도자들과 논쟁을 하는 내용이 바로 AD 90년대에 교회가 새로운 유대교 지도자들과 벌였던 논쟁과 비슷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서는 예루살렘이 등장하는 이야기가 많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5장의 내용을 보더라도 유대 지도자들과의 안식일 논쟁이 등장하게 됩니다. 요한복음 9장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면서 소경된 자를 치료하게 되는데, 그 사건과 관련해서 22절에 ‘출회’라는 단어가 나오게 됩니다. 이는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을 공동체에서 쫓아내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출회’라는 것도 상황이 AD 90년대에 요한이 요한복음을 기록할 때의 상황과 일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6절에서도 사도 바울이 서신서를 쓰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오백여 형제 일시에 보이셨다’는 기록을 하면서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할 때에 오백여 형제들이 있다는 것을 말하게되면 그들이 증거해 줄 것이라는 기대감에서 기록을 했다는 것입니다.
또한 사도 바울은 회당에 가서 전도를 합니다. 우리의 생각에 회당은 유대인들이 모이는 곳이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회당에 가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에 가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회당에 간 이유는 그곳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효용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사도행전 13장에 보면 회당에서 바울이 전도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들’(oiJ fobouvmenoi to;n qeovn, 호이 포브메노이 톤 데온)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들’이라는 용어는 신약 전문용어로서 두 부류가 있음을 암시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즉 회당 앞에는 유대인들이 앉아있고, 이방인들 가운데에서 할례를 받은 자들이 뒤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변두리에는 이방인들 중에서 하나님을 믿기는 하지만 아직 개종하지 않은 즉,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들이 앉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에게는 그 사람들이 관심대상이었습니다. 할례는 그 당시에 굉장히 무서운 일이었습니다. 고통스럽기도하고 사회생활에 많은 지장을 초래하는 것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회당 뒤쪽 구석에서 쭈그려 앉아 있었는데, 사도바울이 회당에 가서 전한 내용이 바로 무할례에 대한 메시지를 선포하게 됩니다. 그러자 그 사람들은 후에 사도 바울을 초청하여 말씀을 듣게되고, 많은 사람들이 모이게 되는데 결국 그것이 교회가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도심지역에서 복음을 전한 이유도 바로 이 효율성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사도바울이 바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들’(oiJ fobouvmenoi to;n qeovn, 호이 포브메노이 톤 데온)에게 복음을 효율적으로 전하기 위해 회당으로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오병이어가 4복음서 기자들에 의해서 쓰여진 이유는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좋은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비유는 청중들이 얼마 없지만 이 이야기의 목격자들은 수만 명이기 때문에 효용성이 높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4복음서 기자들이 이 이야기를 기록했다는 주장들입니다
구약성경에서 함께 모여 식사를 한다는 것은 번영의 상징이요, 또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누릴 축복의 의미를 보여주게 됩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이러한 이야기를 보여주심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선포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구절에 대해서 학자들은 세 가지로 해석을 합니다. 첫 번째는 이 이야기는 기적이 아니라는 주장입니다.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이 이야기는 서로 나누면서 살아가는 윤리적인 이야기라고 합니다. 즉 당시 사람들이 가난한 생활을 했고, 먼 거리를 여행했기 때문에 도시락을 소유하기는 했는데, 자기 식사정도만 도시락을 준비했는데 식사시간에 자기의 도시락을 꺼내면 자기의 도시락이 빼앗길 것 같은 상황이었는데, 한 아이가 예수님께 자기의 도시락을 내어놓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 도시락을 받고 축도를 하여 나누어주게 되자 사람들이 양심에 찔려서 자기가 가지고 온 도시락들을 꺼내어 함께 나누어 먹었다는 주장입니다. 두 번째 주장은 예수님께서 떡과 물고기를 나누어주기는 하지만 아주 조금씩 나누어주었다는 주장입니다. 세 번째는 예수님의 진정한 기적이라는 주장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세 번째의 기적의 주장에 동감을 합니다. 왜냐하면 4복음서 모두 기록이 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기적이라는 것을 증거해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유월절
4절에 ‘유월절이 가까운지라’고 기록하면서 저자는 의도적으로 유월절의 시기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지금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푼 지역이 갈릴리입니다. 이 지역은 사람들이 별로 살지않는 굉장히 변두리 지역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성경에 헤롯이 6명이 등장이 되는데 헤롯대왕(BC 37-BC 4)과 그 세 아들(헤롯 아켈라오, 헤롯 안디바, 헤롯 빌립) 그리고 헤롯 대왕의 손자 아그립바 1세(행 12:23)와 아그립바 2세(행 25장)입니다. 그 중에 헤롯 아켈라오(마 2:22)가 폭정을 행하다가 귀향을 가게 됩니다. 그 귀향지가 바로 갈릴리였습니다. 그런데 갈릴리가 그렇게 한적한 동네였는데 어떻게 수만 명이 모일 수가 있는가?라는 의문을 제기할 수가 있습니다. 바로 그 의문점을 해결해 주는 것이 바로 ‘유월절’이라는 것입니다. 갈릴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목이 되기 때문에 유월절에는 순례객들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모였을 것이라는 의도적인 표현입니다.
13절에는 먹고 남은 조각을 열두 ‘바구니’에 남겼다는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바구니가 왜 갑자기 나타나고 있을까요? 그 이유는 그때 당시의 음식문화를 살펴보면 쉽게 이해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 당시 음식을 먹을 때에 주인은 종들을 위해 음식을 남기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그 남은 음식을 하인들에게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여행을 할 때에 필수품 가운데에 하나가 ‘바구니’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방인들의 음식을 함부로 먹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바구니를 도시락 대용으로 들고 다니면서 정결음식을 챙겼다는 것입니다.
14절에는 ‘유형론’이라는 신학적인 문제를 다루어야 할 부분입니다. 유형론(Typology)이라는 것은 모세의 유형론을 이야기합니다. ‘유형론’이라는 말은 구약과 신약을 연결해서 설명하는 것을 말합니다. 즉 구약의 모세가 신약의 예수님이라는 주장을 말합니다. 즉 신약에 나타난 구원론적인 중요한 것과 구약의 어떤 인물이나 사건 등을 연결해서 설명하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에서 보면 사람들이 ‘그 선지자’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선지자’라는 말은 신 18:15, 18에 보면 ‘나와 같은 선지자’라는 말이 나오는데, 바로 모세와 같은 그 선지자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모세의 유형론이라고 말을 합니다.
유형론(Typology)은 초대교회 교부들이 많이 사용했습니다. 초대교회의 일은 구약성경을 연구하면서 예수님과 연결시키는 일을 하는데 현대신학에서는 굉장히 외면을 당합니다. 즉 유대인들의 주장은 구약은 구약 자체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을 내놓았습니다. 또한 그러한 유형론으로 접목시키다보니까 구약이 굉장히 풍부성을 잃게 됩니다. 여기에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고 기록했을 때에는 그 자체로 이해해야 합니다.
15절의 말씀은 해석상의 어려움은 없지만 역사성을 지지해주는 구절로 신학에서는 중요한 부분입니다. 요한복음이 기록할 당시에 또 하나의 큰 문제는 교회와 국가와의 관계입니다. 요한복음이 쓰여질 당시에는 교회는 절대적으로 약하고 국가는 강한 시기였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고 하는 것은 불신자들 특히 로마 당국자들이 볼 때에는 호의적인 말씀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 당국자들에게 껄끄러운 이 말을 하는 것은 역사적인 사실이었기 때문에 기록했다는 것입니다.

물 위로 걸으심
16절부터 21절까지는 물위로 걸으신 기적이 등장합니다. 우리가 이 기적의 사건을 보면 조금 이상한 것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1~15절의 말씀이 ‘떡’에 대한 기록이고, 또한 22절부터의 말씀도 떡에 대한 말씀을 기록하고 있는데, 중간에 물위로 걸으신 예수님에 대한 기록이 삽입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의미를 살펴보면 하늘로부터 내려온 떡에 대한 제자들이 이해하지 못한 서론적인 이야기로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즉 22절 이하에 나타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떡’에 대하여 말씀을 하지만 사람들이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경험하고서도 예수님의 신성에 대해서 무지했다는 주장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주장보다는 제자들을 위로하는 내용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즉, 제자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볼 때에 수만 명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왕을 삼으려고 했을 때에 예수님은 그 자리를 피하고 산으로 떠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제자들은 나름대로 섭섭한 마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한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으시면서 제자들에게 나타나 자신은 사람들만의 왕이 아니라 자연들도 다스리는 천지의 왕임을 입증해주는 기사라는 주장입니다.

생명의 떡
22절부터 ‘떡’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그런데 공관복음에 비해서 요한복음에서는 ‘성만찬’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그런데 22~58절까지의 내용을 자세히 보면 계속해서 ‘떡’에 대한 말씀을 하십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이 부분을 ‘성만찬’이라고 주장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조금 무리가 따르게 됩니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떡을 먹은 사람들은 믿는 자들만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모든 사람들이 떡을 먹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만찬의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자들이 행하는 의식입니다. 그러한 점을 볼 때에 이 부분을 ‘성만찬’으로 보기에는 조금 무리가 가는 해석이라 할 수가 있습니다. 53절을 다시한번 살펴보면 ‘살과 피’에 대한 말씀이 나오기 때문에 성만찬에 대하여 언급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여기에서 말씀하신 의미는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으면 생명이 없는 즉 구원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성만찬의 개념과는 조금 다르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살을 먹고 피를 마신다’는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학자들 사이에서의 논의가 있기는 하지만 이 부분이 성만찬의 직접적인 언급이 아니라는 주장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자기 자신을 ‘생명의 떡’으로 말씀하신 이유는 공관복음서에서 성만찬에 대한 언급을 했기 때문에 요한이 기록할 때에는 이 ‘요식행위’를 너무 강조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즉 ‘떡과 포도주’를 마시는 순간 모든 죄가 씻어진다는 의식으로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로마 카톨릭에서 행하는 성만찬의 의식이 바로 성체설입니다. 요한이 이러한 사상을 반박하기 위해서 기록했을 것이라는 주장도 합니다.
31절을 보면 ‘만나’를 먹었다는 말씀과 함께 예수님께서 무엇을 주실 것인가?를 기대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살펴보아야 할 부분은 사람들과 예수님과의 논쟁의 줄거리를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즉 이 사람들은 철저하게 물질적인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세 시대에 만나를 주었는데, 당신은 무엇을 줄 것인가라는 주장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만나의 의미와 참 생명의 의미를 가르칠 때에 사람들은 이해할 수가 없어서 떠나고 있습니다. 60절에 사람들의 반응은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철저하게 물질적이고 실제적인 것만을 추구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들의 오해를 풀어주시기 위해 노력을 하는데 제자들만이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러한 구조는 요한복음에서 종종 등장을 합니다. 즉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시지만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들은 3장에 나타난 니고데모와 4장의 사마리아 여인 등이 그러한 반응을 하게 됩니다. 이처럼 아직도 유대인의 지도자들도 역시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변증법적인 기록입니다.
48절에 보면 ‘생명의 떡’이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이다’(ejgwv eijmi, 에고 에이미)는 말씀이 많이 등장(15:1; 14:6; 10:7; 6:35; 11:25; 8:12; 10:11,14)합니다. 이것은 헬라어에서 자기 자신을 표현할 때에 ejgwv(에고, 1인칭)를 쓰지 않아도 무관한 표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자기 자신을 표현하실 때에 꼭 ejgwv(에고, 1인칭)를 쓰는 이유는 자기 자신의 신적인 표현, 하나님의 계시를 표현하는 모습입니다. 이 표현은 구약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을 표현하는 장면에서 등장하는 단어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자신을 나타내는 장면에서 “Wj ynIa}”(아니 후, 나는 ~이다)라고 표현을 하는데, 우리 성경에서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원어에서 문자적으로 직역을 하면 ‘나는 나다’(I am that I am)라는 뜻입니다. 즉 이름은 다른 사람들과 구분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도 이 세상의 참 하나님은 자기 자신밖에 없음을 보여주고 있는 내용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자기 칭호로 사용할 때 쓰였던 용어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ejgwv eijmi(에고 에이미)라고 사용했다는 것은 예수님 자신이 신적인 존재라는 것을 밝히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자신을 표현하실 때에 ejgwv(에고, 1인칭)를 사용하시면서 강조하시는 것은 독특성과 배타성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독특성이라는 것은 ‘내가 참 생명이 떡’이라는 것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나’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배타적으로 다른 사람이 될 수가 없고 오직 자신만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생명의 떡’(oJ a[rto" th'" zwh'", 호 아르토스 테스 조에스)이라는 말에서 정관사 ‘oJ’(호)가 나오는데, 헬라어에서는 정관사가 술부에는 붙지 않습니다. 즉 보어 앞에는 정관사가 붙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아주 독특한 생명의 떡, 아무렇게나 얻을 수 있는 떡이 아니라 그 떡은 나밖에 될 수가 없다는 것을 강조하는 내용입니다.

영생의 말씀
6장 마지막 단락을 보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어려워서 그 자리를 떠나가게 됩니다. 그 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도 떠나려느냐?”고 묻자 제자들이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까?”라고 대답을 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를 말합니다. 왜 열두 명만 남아있습니까? 그 이유가 바로 예수님께서 물위를 걸어오시고 풍랑을 잠잠케하시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에 제자들이 그러한 고백을 할 수 있는 믿음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물위를 걸어오셨을 때에 제자들이 실제적으로 경험했던 것은 ‘죽음’입니다. 그들이 아우성을 쳤던 것은 죽을 것 같은 상황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직접 오셔서 그들을 살려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다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내가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하실 때에는 이 사람들에게는 신학적인 부분보다는 직접 피부에 와 닿는 이야기였습니다. 즉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 생명이 있다는 것을 경험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예수님께서 물위를 걸어서 제자들에게 보여주시는 것은 제자들에게 더욱 큰 위로를 주기 위해서 나타나셨다는 것을 강조하는 부분입니다.
62절에는 61절에 기록된 것처럼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수군거리고 있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들은 하늘에서 만나를 내리는 그것을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계속해서 자신이 참 만나요, 참 떡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자신이 다시 하늘로 올라갔다가 내려온다면 믿겠느냐는 반박의 의미입니다. ‘만나’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처럼 예수님께서도 다시 하늘에 올라가서 다시 내려오면 믿을 수가 있겠느냐는 책망의 말씀입니다. 그러면서 63절에서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는 육적인 것이기에 무익하고 살리는 것은 영이니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영과 육이 대립되고 있습니다. 영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생명입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으라는 것이 바로 생명입니다. 즉 내가 이른 말이 복음이요, 이 복음을 받아들인 자들이 기독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육은 복음을 거부한 자들이요, 그들이 추구하는 것들이 율법으로 인한 선이라는 것입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라는 말에서 살리는 것은 기독교 즉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이제 유대교는 무익하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마지막 단락에서 중요한 메시지는 복음을 받아들이는 자와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들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독자들의 결단을 촉구하는 내용입니다.


제9강 “제자가 되면 진리를 알고” (8:31~47) 


요한복음 6장에 나타나는 오병이어의 기적은 구약의 모압 평지에서 40년동안 생활했던 이스라엘 백성들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비를 베푸셔서 그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되 정기적으로 주시는 분이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평하고 원망함에도 불구하고 은혜로우시고 신실하시고 긍휼이 풍성하시다는 출애굽기 32,33장의 하나님에 관한 신앙고백을 떠올릴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것을 떠오르게 하는 것이 바로 오병이어의 기적입니다. 분명히 여기에서도 무엇을 가리키는 shmeivwn(세메이온)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제2의 모세로 새로운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끄시고 또한 진정한 안식의 세계로 인도하여 들이시는 분이라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구약에 있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신약에 있어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주시는 생명의 떡과 생명의 피를 마시는 자만이 진정한 이스라엘이었다는 것을 가리켜 주는 것입니다.

물론 학자들 사이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이 성례전에 대한 많은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많은 학자들은 이 사건을 성례전과 직접적으로 상관이 없는 것으로 결론을 짓고 있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6:48~59절까지를 읽는 모든 사람들은 성만찬과 연결을 시키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성만찬적인 색상을 풍기는 본문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예를 들면 59절에 ‘나는 생명의 떡이다’(ejgwv eijmi, 에고 에이미, Wj ynIa}, 아니 후)라는 것 즉 신의 현현공식으로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약에서 말하는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가리켜 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 죽었다는 것은 만나 자체도 실제적으로도 영원한 생명의 떡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51절에는 ‘살아있다’는 말 ‘생명’이라는 말은 요한복음에서 반복해서 나오는 중요한 단어입니다. ‘사람이 떡을 먹으면 영원히 살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다’ 즉 예수님께서 자기의 사명에 대해서 분명히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52절에서 유대인들이 ‘어떻게 자기의 살을 우리에게 주어서 먹게 할 수가 있느냐?’고 질문할 때에는 그들의 무지 혹은 오해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또한 53절 이하의 말씀은 성만찬을 연상케하는 구절입니다. 이 말씀은 구약적인 광야 사건을 배경으로 합니다. 구약에 있는 이스라엘과 신약에 있는 새로운 이스라엘 그리고 구약에 있는 모세와 신약에 있는 새로운 모세 예수를 분명하게 대조를 시킬 뿐만 아니라 분명히 차별을 시키고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구약의 시대를 접고 새로운 시대를 열고있는 새시대의 창시자인데 그 뿌리는 구약에 두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으며, 유대인들에게 이 말씀을 할 때에는 예수로 하여금 유대인의 뿌리인 그 구약 자체가 예수에 의해서 실현되고 있고, 새로운 시대가 예수를 통해서 왔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성만찬]

Guilt / Grace / Gratitute
Sin / Salvation / Service
Death / Deliverance / D
죄책, 죄, 죽음 // 은혜, 구원, 구출 // 보은, 봉사, 제자도


1517년 10월 31일 마틴 루터를 통해 종교개혁 운동이 시작되었는데, 종교개혁의 1차적인 구호가 있다면 ‘sola scripture'(오직 성경으로!)라는 말입니다. 16세기에 발간된 유명한 신앙고백론이 있는데 바로 하이델베르그 신앙고백서입니다. 모두 52개의 문답으로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알아야 할 기본적인 가르침, 신앙의 체계를 가르쳐주는 교리서입니다. 그 신앙고백서는 크게 3부로 되어있습니다.

하이델베르그 문답서의 전체적인 큰 구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문답서를 자세히 보면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의 여정과 비슷합니다. 우리가 한때는 죄, 죽음 가운데에 있었다가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되었고, 그 후에는 감사와 보은으로 보답하며 봉사하고 살아가는 모습이 Christian-life 즉, 제자도가 무엇인가를 잘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이델베르그의 첫 번째 질문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여러분의 생사(生死)간에 유일한 위로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입니다. 16세기에서 사람들에게 있어서 ‘위로’라는 말이겠지만 21세기를 사는 우리들에게는 무엇이 이 세상에 살거나 혹은 죽거나 이 세상에서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위로가 무엇입니까? 거기에 대해서 답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살거나 죽거나 내 영혼은 나에게 속해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신실하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 속해있는 것이 내가 이 세상에서 갖고있는 유일한 희망이며 위로이며 위안이며 힘입니다.”라는 것입니다. 나는 내게 속한 것이 아니라 나의 신실하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 내가 속해있다는 것이 내가 가질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며 위로이며 위안이며 힘이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이렇게 질문합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확신을 갖기 위해서는 무엇을 알아야 합니까? 그에 대한 대답은 세 가지를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세 가지가 이렇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비참한 가운데에 있다는 것을 알고, 우리가 그 비참함으로부터 구출을 받게 되었는가를 알아야 하며, 이제는 우리가 어떻게 봉사하고 보은하고 감사하며 살아야 할 것인가를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세 축으로 이야기하면서 십계명과 주님의 기도에 관한 가르침은 어디에 속하고 있을까요? 일반적으로 첫 번째 혹은 두 번째로 생각을 하지만 세 번째에 속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율법으로서의 십계명은 우리의 삶의 원리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있는 보통 율법이라고 하는 것은 항상 첫 번째 혹은 두 번째에 속합니다. 즉 율법은 항상 우리를 고소하고 고발하고 죄인으로 드러내지만 이러한 구조로 볼 때에는 십계명은 세 번째에 속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진정한 제자의 도를 가는 모든 사람들이 살아야 할 원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생명을 존중하는 것입니다.

또한 주님의 기도에 대한 해설을 세 번째에 속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제일 마지막인 Disciplship(제자도)에 속하고 있습니다. 이 기나긴 여정, 순례의 길을 가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 세 번째 Section에 맨 마지막 바로 전에서 열 가지 십계명에 대해서 해설하는 Section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것을 마친 후에 주님이 가르쳐준 기도가 나옵니다. 그렇다면 맨 마지막에 기도하는 삶을 사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가장 멋있는 자세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무엇인가에 대한 기나긴 영적인 여정과 순례의 길을 가면서 기도하는 삶입니다. 예를 들어보면 주기도문을 보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여기에서 보면 세 가지 요청으로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세 번째의 한정구가 바로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라는 말은 세 번째에만 구문법적으로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문법적으로 볼 때에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에 다 적용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당신이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셨던 것처럼 땅에서 거룩히 여김을 받기 원하고 당신의 나라가 하늘에서 이미 임하신 것처럼 땅에서도 당신의 나라가 임하기를 바라고당신이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이것을 볼 때에 아직 하늘과 땅이 만나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의 나라는 하늘과 땅이 입 맞추었을 때에 하늘이 땅을 움켜잡고 땅이 하늘을 포옹할 때에 비로소 진정한 샬롬이 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라는 것은 이 땅에 있을 때에만 필요한 것입니다. ‘기도’ 이것은 아직까지 하늘과 땅이 만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바로 땅에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아직 땅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피조물들이 갈망하고 열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고통과 괴로움과 슬픔들과 병들고 죽는 것들을 보면 아직까지 하늘과 땅이 만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희망을 갖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맨 마지막에 보면 장차 하늘의 새 예루살렘성이 땅에 내려오는 것을 갈망합니다. 성경의 대부분이 바로 이 문제입니다. 바로 하늘과 땅이 만나는 일, 요한복음의 핵심도 바로 말씀이 저 하늘에 있다가 우리(땅)가운데에 내려왔다는 것입니다. 즉 하늘과 땅이 연결되는 일들, 구약의 많은 선지자, 예언자들이 보았던 것, 하늘의 환상들을 보았던 것, 창세기의 맨 앞부분에도 하늘과 땅이 만나는 사건, 요한계시록에 보아도 하늘과 땅이 만나는 것입니다.

성경의 맨 앞부분에 영광스럽고 찬란한 시작이 있습니다. 하늘과 땅이 만나는 일들 그리고 성경의 맨 마지막 부분에 영광스럽고 찬란한 종말이 있습니다. 하늘과 땅이 만나는 일들입니다. 영광과 찬란으로 시작된 성경책, 인류의 시작 그리고 영광과 찬란함으로 끝을 맺고있는 성경의 맨 마지막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는 엉망진창입니다. 앞을 볼 수가 없고, 어디가 어디인지를 모르는 시대를 살아갑니다. 그렇다면 신앙이 무엇입니까? 혹은 신앙을 전하는 사람들의 입장이 무엇입니까? 단 한가지입니다. 혼란과 혼돈과 엉망진창에도 불구하고 여기에는 처음에 시작했던 실타래와 맨 나중에 만나는 실타래가 동일한 하나의 실타래라는 것을 많은 사람들에게 확신시켜주는 것이 바로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신앙의 가장 힘들 때에 삶의 의미가 있을 것인지, 삶에는 일관성이 있을 것인지, 영광스러운 찬란한 시작이 영광스러운 찬란한 종말과 함께 서로 연결되는 것인지, 아니면 이것저것이 엉망진창이 되는 것인지를 볼 때에 신앙의 의미는 처음과 끝이 하나의 실타래고 연결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야만이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시험에 빠지지 않습니다. 분명히 시작이 있었고 끝이 있다면 중간은 엉망진창은 아닐 것입니다.

이 하이델베르그 신앙문답 75번, 76번에는 소위 성만찬에 관한 가르침이 있습니다. 질문 75번은 이렇게 질문을 합니다.

성만찬은 어떠한 방식으로 여러분에게 십자가 위에서 단번에 이루신 희생과 그가 주신 모든 은사들에 여러분들이 참여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나게 하며 확신시켜줍니까?

대답은 이렇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나와 모든 신자들에게 이 찢겨진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시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 명령과 함께 그는 다음과 같은 약속을 주셨습니다. 첫째로, 내가 나의 눈으로 나를 위하여 찢기신 주님의 떡과 나를 위해 주신 잔을 분명히 보듯이, 십자가에서 그의 몸이 나를 위하여 내어 준 바되고 찢겨졌음과 그의 피가 나를 위하여 부어졌음이 분명한 것입니다. 둘째로, 내가 섬기는 이의 손에서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대한 분명한 표로써 나에게 주어진 주님의 떡과 잔을 받고 내 입으로 맛보는 것이 분명한 것과 같이 그가 분명히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몸과 흘리신 보혈로써 영원한 생명을 위하여 나의 영혼을 먹이시고 새롭게 하십니다.

또한 76번은 이렇게 질문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몸을 먹고, 그의 흘리신 피를 마신다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그에 대한 대답은
그것은 그리스도의 전적인 수난과 죽음을 믿는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믿음으로써 죄에 대한 용서와 영생을 받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고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을 통하여 우리가 점점 그리스도의 축복된 몸에 연합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비록 지금은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계시고 우리는 비록 땅에 있을지라도 우리는 그의 살 중의 살이요 뼈 중에 뼈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각 지체들이 한 영혼에 의해서 다스림을 받고 살 듯이 우리도 한 분 성령에 의해서 다스림을 받으면서 영원히 살 것입니다.

성만찬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성찬 예식을 하는 것은 좋은 소식 혹은 복음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돕기 위한 시각적인 보조수단 혹은 복음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하나의 예증 아니면 아니면 결혼 반지나 태극기가 상징이듯이 빵과 포도주도 상징입니까? 상징물로서 반지나 태극기는 분명히 중요하지만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즉 결혼반지를 잃어버렸다고 해서 반려자를 잃어버린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한 분노한 폭도가 태극기를 불태웠다고 해서 대한민국 자체가 불에 탄 것은 아닙니다. 이처럼 상징물은 중요하지만 그렇게까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성만찬식에서 떼는 빵과 포도주는 상징물입니까? 그렇다면 성만찬을 하지 않아도 본질적인 것을 우리가 잃지 않는 것입니까? 빵은 단지 그리스도의 부셔진 육체를 가리키는 것입니까? 포도주는 단지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피를 가리키는 것입니까?

전통적인 은혜의 방편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방편 두 가지가 있는데 말씀과 성례입니다. 그렇다면 이 두 가지는 동일한 의미를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빵과 포도주는 상징 그 이상의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살펴본 이 문답서는 우리에게 성찬식의 빵과 포도주를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입으로 빵과 포도주를 맛보듯이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몸과 흘리신 피로서 우리의 영혼을 먹이시고 키우십니다. 다시말해서 이 신앙교육 문답서는 빵과 포도주는 단순히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의 몸과 그의 흘리신 피를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몸과 그의 흘리신 피로서 우리를 먹이시고 기르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찬식에서 빵을 먹고 포도주를 마실 때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몸에 연합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우리는 성찬식에서 빵을 먹고 포도주를 마실 때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살 중의 살이요 뼈 중에 뼈가 된다는 것입니다.

살 중의 살이요 뼈 중에 뼈라는 말은 창세기 2장에 나타나는 창조기사입니다. 하나님께서 남자의 몸에서 갈빗대를 가지고 여자를 창조하신 후에 남자가 여자를 보면서 하신 말이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에 살이로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결혼식장의 신부의 아버지처럼 하나님께서는 여자를 남자에게로 데리고 옵니다. 예기치 못한 기쁨에 겨운 남자는 “아! 이 여자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입니다.” 즉 이 남자와 여자는 하나로 연합하였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하이델베르그의 신앙고백서 그리고 벨직 신앙고백서에서도 성만찬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입으로 빵을 먹고 포도주를 마시는 것이 사실이듯이 성찬식에 우리는 우리의 영적인 생명을 위하여 그리스도의 진짜 몸과 우리의 영혼 속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이델베르그 신앙고백처럼 벨직 신앙고백서에서도 우리가 주님의 식탁에서 빵과 포도주를 먹는 것은 그리스도 자신의 자연적인 몸이고, 자연적인 피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 한가지 우리가 그것을 먹고 마시는 방식은 입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령에 의해서, 믿음을 통하여서 먹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통해서, 믿음을 통해서 먹는 것은 실제적으로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몸에 연합하게 되며,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살 중의 살이요, 뼈 중의 뼈라는 것입니다. 교회의 공동체는 살 중의 살이요, 뼈 중의 뼈라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야 말로 우리가 살아가는 광야에서 우리가 먹어야 할 떡이며, 우리가 가야 할 기나긴 여정을 위하여서 우리가 마시는 포도주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떡과 포도주는 광야의 기나긴 여정을 위하여 주신 양식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가 우리의 양식이라고 한다면 이 음료와 음식을 어디에서 먹을 수가 있습니까? 바로 주님의 식탁에서 먹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만찬입니다. 어떻게 이러한 음료와 음식을 받아먹을 수가 있을까요? 바로 믿음으로만 가능합니다. 빵 한 조각과 포도주 한 잔을 믿음으로 먹고 마심으로 우리는 생명의 떡과 생명의 물을 받을 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

요한복음 6장 53절 이하에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살과 피를 먹는다는 언어 즉 예수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신다는 말이 거북스럽게 들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누구입니까? 그들은 주님의 만찬은 상징적인 사건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빵은 단지 그리스도의 몸에 대한 상징일 뿐이며,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피에 대한 상징일뿐이라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느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의 언어는 종교개혁자들 특히 칼빈에게 있어서 요한복음 6장은 성찬식을 이해하는데에 가장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문답서에서는 성만찬은 갈보리 언덕에서 치루어진 그리스도의 희생제사를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만찬을 갈보리 언덕에서 치루어진 그리스도의 희생제사를 반복하는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이 신앙고백서에서는 한목소리로 성만찬은 문자 그대로 ‘식사’라는 것입니다. 즉 성만찬은 하나님의 가족, 식구들을 위해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차려놓은 식사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만찬을 고찰하는 글머리에서 존 칼빈은 성만찬의 중심적인 의도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가족으로 받아들이신 후에 자녀를 위해서 걱정하고 염려하시면서 한평생 우리를 먹이시고 기르시고 양육하십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만족하시지 않았던 그분은 이러한 끊임없는 관대함과 너그러움과 넉넉함이 계속 될 것이라는 것을 확신시켜주기 위해서 우리에게 담보물 혹은 정표를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독생자의 손을 통해서 그의 교회에게 또 다른 성례를 주셨으니 곧 영적 잔치의 식사 즉 성례전을 주셨습니다. 따라서 영적인 연회, 이 성례식 가운데에서 그리스도는 자신을 생명의 떡으로 주셨으며, 이 떡을 먹고 우리가 참되고 복된 영생을 향하여 자라가도록 우리들의 영혼을 먹이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만찬의 목적은 이처럼 그리스도께서 이미 새롭게하시고 이미 자신의 식구가 되었고, 가족이 된 자들을 하나님께서 먹이시고 자라게 하시고 충만한 삶, 영생으로 이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만찬은 상징이 전혀 아닙니다. 그러므로 은혜의 수단, 방편이 주님의 말씀을 먹고, 주님의 만찬에 참석하여 먹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성례를 받들어 봉사하는 사람의 손으로부터 주의 빵과 주의 잔을 받아서 우리의 입으로 맛보는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도 진정으로 우리들의 영혼이 영원으로 자라가도록 그분이 십자가에서 못박히신 몸과 흘리신 피로 우리의 영혼을 양육하시고 기르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교회 공동체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살 중의 살이요, 뼈 중의 뼈가 되는 것입니다.


자유(8:31~47)

우리가 읽은 본문은 유대인과 예수님과의 논쟁의 대표적인 부분입니다. 여기에서 나오는 반복적인 단어는 ‘진리’(ajlhqeiva/, 알레데이아) 그리고 ‘자유’ 와 ‘거짓’이라는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이 본문에서 나오는 내용은 ‘참’과 ‘거짓’에 대한 내용 그리고 ‘참’과 ‘거짓’ 사이에 예수와 유대인들 사이에 심각한 마찰이 있으며, ‘참’과 ‘거짓’ 사이에 자유에 관한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30절의 말씀을 보면 ‘많은 사람이 믿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믿습니까? 예수님께서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분이며, 예수님이 하나님과 동등되시는 분이시며, 예수님은 하나님과 같은 분이심을 예수님 자신이 증거하자 많은 사람이 믿었습니다. 그런데 31절을 보면 ‘그러므로’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렇다면 뒤에 나오는 사람들은 믿음이 있는 사람 즉 좋은 사람들에 대하여 기록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뒤에 기록된 내용들은 아주 나쁜 기록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31절의 ‘그러므로’라는 말은 별로 적합하지 못한 단어입니다. 이 말은 원문에서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또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이라는 말보다는 여기에서는 ‘자기를 믿었던 유대인들’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정당합니다. 즉 한때는 그를 믿었지만 지금은 믿지 않고 돌아서서 반역하는 사람들입니다. 바로 그들을 향하여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지금 이 사람들이 참 자유를 누리는 사람들이 아니고 종노릇하는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다시 이 말씀을 살펴보면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조건절
너희는 진짜로 내 제자가 될 것이다/주절

31절에 ‘거한다’는 말은 ‘그곳에 머물러 지속적으로’라는 의미입니다. 즉 예수님의 말씀에 계속해서 머물러 있으면 진짜로 예수님의 제자가 될 것입니다. 내 말에 일순간 감정으로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에 있어서도 수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내 말씀안에서 살고 거하면 진짜로 내 제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 것이 일종의 약속절입니다.

32절은 명령형이 아닙니다. 진리를 알면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할 것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면 두 가지의 약속이 있습니다. 첫째는 진리를 알게 될 것입니다. 둘째는 진리는 너희를 자유케한다는 약속입니다. 이 문장 구성상 주절이 가장 중요합니다. 즉 제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언제 제자가 됩니까? 너희가 내 말에 지속적으로 거하게 되면 진짜 제자가 될 것이고 그런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약속이 있는데, 그 사람은 진리를 알게 될 것입니다. 여기의 ‘진리’는 우주의 법칙이나 이치가 아닙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헛된 것, 거짓된 것, 진짜가 아닌 것에 따라서 살아갑니다. 성경에서 ‘진리’(ajlhqeiva/, 알레데이아)는 히브리어의 ‘tm,a>’(에메트)와 같은 말입니다. 이 말은 인격적인 즉 내가 기댈 수가 있는 것, 흔들리지 않는 확신을 말합니다. 이것은 인격적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신뢰할 만한 사람, 믿을만한 사람을 의미합니다. 여기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너희가 내 말에 지속적으로 거하면 가짜가 아닌 진짜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말’과 ‘진리’가 평행을 이루고 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즉 내 말에 계속해서 머물러 있으면 진짜 내 제자가 될 것이고, 그는 진정한 삶의 의미를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즉 진정으로 신뢰할 만한 분을 알게되면 진정한 자유를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느 것도 속박받고 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유입니다. ‘거한다’는 의미속에 ‘계속해서 머무르는 상태’는 우리가 잘 될 때나 어려울 때에 힘들 때나 병들었을 때나 건강할 때에도 한결같이 지조를 가지고 주의 가르침 가운데에 살면 너는 진짜 내 제자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으며, 그러한 제자의 삶을 살게되면 참을 알게될 것입니다. ‘우상’이라는 말을 히브리어로 ‘lbeh}’(헤벨)이라는 말인데 ‘헛것’ 혹은 ‘비어있다’는 뜻 즉 ‘잠정적이다’, ‘일시적이다’ ‘지속적이지 않다’ ‘있다가 없어진다’는 뜻(전 1:2)입니다. 거짓이라는 것은 비어있는 것입니다. 헛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동일한 단어가 이사야에서는 ‘우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상은 있는 것 같지만 헛것이요, 비어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온갖 것이 다 있다 할지라도 진짜는 하나님 한분 밖에 없습니다. 그분만이 우리의 삶의 기반이요 신뢰할 만한 분이라고 한다면 비로소 우리는 이 세상에 대한 실체를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본문을 잘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그 다음에 너희는 거짓, 마귀에서 속해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너희는 ‘참’을 모르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참’은 하나님이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44절 끝에 보면 두 가지가 등장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났고, 너희는 마귀로부터 났다는 것입니다. 마귀는 처음부터 진리가 없는 존재입니다. ‘거짓’의 반대 개념으로 ‘진리’를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최종적으로 보면 제자의 삶 가운데에서 나타나는 현상은 바로 ‘자유’라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제자’라고 이야기 할 때에는 앞에서 현존한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이야기한다면 이 배경 자체는 심각한 배도와 반역, 환란과 어려움 가운데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 제자는 천국이 아니라 지상의 어려운 박해 가운데에서 그리고 제자를 계속 유지할 수 없는 환경 가운데에서도 제자를 유지하는 제자가 진짜 제자가 되면 그에게 주어지는 가장 큰 축복이 ‘자유’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진정한 샬롬을 유지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샬롬을 유지하는 방식은 천국에서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지상에서 유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삶의 비결입니다. 우리의 삶의 비결이 있다면 어떻게 어려운 환경 가운데에서 어떻게 샬롬을 누리고 사는가라는 것입니다.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이 바로 ‘너희가 내 말에 지속적으로 거한다면’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려운 환경 가운데에서도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이고, 웃을 수 없는 상황 가운데에서도 웃을 수 있는 사람이고, 자유할 수 없는 환경 가운데에서도 진정으로 자유가 무엇인지를 알고 누리고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것이 진짜 제자의 삶의 방식이요 모습입니다.


제10강 “예수 그는 세상의 참 빛” (9:1~41)


요한복음 9장은 1절부터 41절까지가 하나의 독립된 단위입니다. 하나의 에피소드를 가지고 케리그마 즉 말씀을 증거하는 본문이기 때문에 분명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소경치유에 관한 이야기로서 요한복음의 모두 7번에 걸쳐서 나오는 shmeivwn(세메이온, sign) 즉 표적 가운데에 여섯 번째로 나타나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11장에는 마지막으로 나사로를 살리는 일곱 번째 shmeivwn(세메이온)이 나옵니다.

또 한가지는 이러한 표징을 통해서 예수는 누구인가?라는 것을 가리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몇 번의 다양한 표징을 통해서 우리가 믿는 예수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가장 근본적이고도 기본적인 대답을 해 주는 본문들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본문을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2절.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이런 간단한 질문을 통해서 제자들이 갖고있는 신념의 체계가 잘 노출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들이 질문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면 제자들은 소경으로 난 사람에 대한 이해를 이렇게 둘 중 하나로서 분명히 죄와 관계가 될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4절. 때가 아직 낮이매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분명히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일’은 3절에서 말씀하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확장시켜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강론을 하시면서 시각장애인이 태어나면서부터 앞을 보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그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무엇인가 하시고자 하는 일의 catch word 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 또 하나의 중요한 단어가 ‘때’라는 말인데, 이 때라는 것은 단순히 시계에 의해서 측정해볼 수 있는 때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갖고 계신 어떤 의도, 혹은 어떤 계획, 경륜이 무르익어서 만개가 될 때를 말합니다. 그러고 보면 이 때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있는 때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것도 구원역사에 있어서 때가 무르익었기 때문이고,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서 많은 일들을 하는데 예수님과 때는 아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낮’이라는 말과 또한 ‘앞을 보지 못하는 소경’ 즉 ‘어둠’이라는 말, 또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깨닫지 못하는 것 즉 어둠 속에서 헤매는 것을 통해서 다양한 것을 우리에게 암시를 하고 있습니다.

5절. 세상의 빛이로라
이 말은 요한복음 1장에서 영원한 'lovgo"‘(로고스)가 이 땅에 빛으로 오셨고, 빛이 자기의 땅에 왔으나 자기의 백성들이 깨닫지 못하고 알지 못하여 그를 배척했다는 빛과 어둠에 대한 기조적인 논제를 요한복음 서문에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또한 빛과 어두움에 관한 이야기들은 3장과 4장을 통해서도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바로 ‘니고데모’와 ‘사마리아 여인’과의 관계입니다. 물론 거기에서는 여인이 ‘물’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있지만 우리가 3장과 4장을 함께 살펴볼 때에 니고데모가 예수님께 찾아온 것은 밤이었고, 그 여인이 예수님을 만난 것은 대낮이었습니다. 하나는 어둠가운데에서 계속 헤매고있고, 한 사람은 분명한 진리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빛이라는 말과 영원한 물이 함께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가 있고, 6장에서는 영원한 양식, 떡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이처럼 요한복음에서는 상징적인 것들이 많이 사용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단순히 예수님의 죽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현존, 예수님이 함께 하심, 예수님의 임재 자체를 가리켜서 ‘낮’ 혹은 일할 때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7절.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여기에서 ‘밝은 눈’과 1절의 ‘소경된 사람’이 서로 상응을 하면서 최소한 1절부터 7절까지가 자그마한 소단락을 구성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을 문학적으로 inclusio라고 합니다. 이 말은 ‘포함’이라는 뜻인데, 맨 앞과 맨 뒤가 같은 문구 혹은 같은 단어를 통해서 처음과 시작이 이렇게 일치할 경우에 ‘수미쌍관법’이라고 합니다. 여기에 보면 반전이 나옵니다. 하나는 맨 위에서 소경된 사람의 이야기가 처음 나오고 7절에서는 밝은 눈을 가진 사람으로 변하게 됩니다. 그러면 이러한 문학적인 기법으로 보면 앞을 보지 못했던 사람이 맨 뒤에서 앞을 보게된 ‘밝음’가운데로 왔다면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바로 5절의 ‘나는 빛이다’라는 단어입니다.

8절. 구걸하던 자
여기 match가 되는 것이 ‘소경’혹은 ‘시각장애인’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대중들이 알고있는 것은 이 사람이 ‘거지’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지’와 ‘소경’ 혹은 ‘시각장애자’를 match시켜주고 있습니다.
마틴 루터가 이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남긴 한 마디가 ‘우리는 거지입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마틴 루터가 평생에 신학을 최종적으로 잘 정리해 준 명문장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무엇에 대한 표현일까요? 신앙의 본질을 잘 표현하는 말입니다. 즉 거지가 다른 사람들의 은혜로 사는 것처럼 우리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다 굶어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영혼을 잘 표현하는 사실입니다.

주유소의 주유금액에 따라 point 적립을 하게 되고 사은품을 받기 위해서 열심히 그 주유소에서 주유를 하면서 점수를 적립하게 됩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 점수가 적립되면 그 사은품을 받게 됩니다. 그런 행위를 가만히 보면서 이것이 종교개혁 이전의 삶의 모습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놀랍게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와같은 모습의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즉 하나님의 호의를 나의 노력을 통해서 적립 point처럼 올려놓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계시와 종교의 근본적인 차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을 보면 앞을 보지 못하던 소경과 앞을 보는 사람의 근본적인 차이의 중앙에는 세상의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빛은 주어지는 것이지 버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볼 때에는 이 세상은 마치 인과응보의 세상처럼 구원이든지 무엇이든지 자기가 심은 만큼 얻는다는 생각입니다. 이것이 일반적인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에서는 한 사람이 근본적으로 바뀌게 된 결정적인 가운데에는 예수님이 계시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세상의 빛’이라는 것입니다. 이 빛은 세상의 어느 누구도 만들 수가 없는 것으로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주어진 것은 받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을 표현할 때에는 구걸하던 거지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원하든 원치 않든 거지에 대한 표상들은 성경에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마가복음에는 수로보니게의 여인에 대한 이야기(막 7:26 ff)가 있습니다. 그 본문 앞에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서기관들과 율법사들과의 논쟁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결례에 대한 논쟁을 하다가 예수님께서는 그 자리를 피하여 떠나 두로 지경으로 가서 수로보니게의 여인을 만나게 됩니다.

예수님과 그 여인과의 대화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그 여인은 형편이 없는 여인으로 표현이 되고 있습니다. 결국 그 여인은 예수님의 도움을 받게 되는데, 이야기 속에서 exchange가 되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의 기득권층 즉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당연히 하나님의 은혜와 은총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그들이 아니라 이방여인들, 하나님의 은혜와 은총과는 상관이 없다고 하는 그 사람들에게 은혜와 은총을 주십니다. 이것을 가만히 보면 구약성경에서도 이러한 예가 나타납니다. 엘리야 시대에 사르밧 과부의 이야기(왕상 17:9 ff)입니다. 이 ‘사르밧’ 지역이 어디입니까? 바로 시돈 땅입니다. 그 시돈에서 이세벨이 예루살렘으로 들어옵니다. 언약백성이라고 하는 이스라엘 땅에 아합이 이세벨을 받아들이자 말씀의 담지자였던 엘리야는 예루살렘에 있어야 할 이유가 없어서 시돈으로 올라갑니다. 즉 exchange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에는 기근이 있었고, 시돈 땅에는 기근이 없었습니다. 사르밧 과부에게는 양식이 주어졌습니다. 이러한 페턴은 말씀의 선지자가 어디에 가느냐에 따라서 생명이 있느냐? 없느냐? 빛이 있느냐? 없느냐? 의 문제이지 어떤 지역, 전통, 개별적인 사건에 의해서 하나님의 구원이 고착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많은 신학자들, 종교인들은 지역과 전통들을 철저히 믿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성전이 있었고, 여기에는 전통이 있고, 토라가 신학이 있기 때문에 영원히 멸망치 않을 것이라는 착각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이야기는 엘리사 때에 다시 등장합니다. 유대 땅에 많은 문둥병자들이 있었지만 그러나 엘리사가 그들에게 보냄을 받지 아니하고 시리아 사람 나아만에게 보냄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엘리야와 엘리사의 사역 자체는 서로 평행적인 사역을 보여주고 있으며 예수님의 사역과 공통적인 사역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소위 육체적으로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리웠던 자들과 하나는 구원 밖에 있었다고 생각했던 이방인들, 하나는 이세벨과 하나는 사렙다 과부, 이스라엘의 수많은 문둥병자들과 시리아의 나아만 장군처럼 예수의 사역 자체가 그렇게 될 것이라는 모형론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야기로 돌아가면 예루살렘에 있었던 수많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는 대조적으로 수로보니게 여인이 나온다면 여기에서도 남자와 여자, 기득권층과 변방의 사람, 유대인과 이방인이 있는데 하나님의 은혜는 엄청난 파격적이고 충격을 가져다 주고 있습니다. 도저히 하나님의 은혜가 갈 것 같지 않은 땅에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파격성입니다. 이러한 기사들이 많이 등장하는 곳이 복음서입니다. 이러한 이야기를 처음으로 보는 독자들이 바로 유대인이라는 사실에서 충격을 가져다 주고 있습니다. 왜 이러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까? 이런 이야기를 예수님께서 최초의 공생애의 설교본문에서 하고 있습니다(눅 4장).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의 회당에 가서 설교를 하시면서 자기의 mission과 사명이 무엇인지 이야기를 합니다. 그 때에 예수님을 잘 아는 사람들이 혈과 육으로 아는 사람들이 그를 알고 있다고 하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알지 못한다고 하면서 두 개의 옛날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3년 6개월 동안 비가오지 않았을 때에 수많은 과부들이 있었지만 엘리야가 그들에게로 보내심을 받지 않고 시돈에 있는 과부에게 보내심을 받은 것처럼, 유대 땅의 수많은 문둥병자들이 있었지만 그들에게 엘리사가 보내심을 받지 않고 시리아의 나아만에게 보내심을 받은 것처럼 예수님도 그렇게 하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 두 가지는 유대인들은 당연히 받을 것으로 생각했던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은 상관이 없고, 반대로 이러한 은혜와 은총이 도저히 있을 것이라고는 기대치 않았던 사람들에게 은혜와 은총을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소식은 현란한 소식, 복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14절. 눈을 뜨게 하신 날은 안식일이라
요한복음의 저자는 이 글을 읽는 자로 하여금 이 사건과 안식일과 연결시키면서 논쟁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을 통해서 병의 치유 문제와 안식일의 문제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일을 하시고 하나님께서 활동하시는 문제, 즉 하나님의 창조적인 사역과 안식의 문제, 눈을 뜨는 것과 빛을 보는 것과 아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22절.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
‘출교’라는 말은 회당에서 더 이상의 회당의 member가 되지 못하도록 즉, 유대인의 상징으로서 회당에서 쫓아내는 일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회당으로 못나오게 하는 것을 넘어서 사회적으로 매장당하는 일입니다. 또한 요한복음에서 ‘출교’라는 말이 사용되었을 때에는 요한복음에서는 거의 유대교와 기독교 사이의 심각한 갈등과 심각한 문제를 겪고있는 것을 반영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역 시기는 AD30~33년 사이이고, '출교‘의 문제를 논하는 시기는 요한복음을 기록하던 시기입니다. 그렇다면 요한복음을 기록할 시기에서 옛날 이야기 즉 소경을 고쳐준 이야기를 쓰면서 유대교와 기독교 사이의 아주 심각한 문제, 갈등이 있다는 것을 반영해 주는 본문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이야기와 요한복음의 저자가 이 글을 기록하고 있을 때에 당시의 심각한 문제가 유대교와 기독교 사이의 심각한 마찰이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면 그 사회에서 쫓겨나고 출교를 당했습니다.

25절.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소경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
우리는 이 구절을 보면 찬송가 405장을 떠올릴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한 때는 내가 앞을 보지 못하더니, 내가 지금은 보게 되었고, 한때는 내가 어둠가운데에 있었으나 지금은 빛 가운데에 있었습니다’라는 가사입니다. 즉 경험되어진 신앙고백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Amazing grace! how sweet the sound! the saved a wretch like me!
I once was lost, but now am found; Was blind, but now I see.

27절. 당신들도 그 제자가 되려 하나이까
이 정도는 대단한 신앙입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유대인들, 바리새인들을 향해서 이렇게 직설적으로 자기의 경험을 고백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당신들도 제자가 되시렵니까?’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28절. 너는 그의 제자나 우리는 모세의 제자라
여기에서 유대인들은 예수의 제자와 모세의 제자를 나누고 있습니다. 이것은 맨 앞에도 이러한 문제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바보같은 일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이미 앞에서 이야기하기를 ‘모세는 이미 나에게 대하여 이야기한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모세의 제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31절. 우리가 아나이다
‘우리’라는 단어를 사용하면서 ‘우리’라는 집단과 바리새인들과 유대교의 집단을 구별하고 있습니다. 즉 당신들의 신학과 우리의 신학이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35절. 네가 인자를 믿느냐
여기에서 하나님의 아들 대신에 ‘인자’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하나님의 아들 대신에 ‘인자’라는 전문적인 용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38절.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하는지라
‘절하다’는 말은 전문적인 용어로 ‘예배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구약에서는 하나님께만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알고 하나님을 영접하였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39절.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빛’이라는 용어는 조명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심판’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영적인 진리 가운데에 가장 큰 것 중에 하나가 소위 영적인 ‘개안’의 단계가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이 눈먼 사람들의 영적인 성장과정의 개안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영적인 믿음의 성장단계를 보면 충만한 믿음에 이르게 되고 신앙고백에 이르고 그리고 제자도의 값을 지불하는 일이 있습니다. 처음에 믿음이 생기기 시작하는 것, 그것이 점점 자라서 충만한 믿음 가운데로 가게되고, 충만한 믿음 가운데로 가게되면 신앙을 고백하게 되고, 신앙을 고백한 후에 가야할 길이 제자의 길이고, 제자의 길을 가면서 그가 치루어야 할 값에 대하여 복음서는 말하고 있습니다.

이 소경된 사람이 예수님에 대해서 알고 있던 것은 ‘예수’라는 이름이 전부(11절)였습니다. 그러나 점점 영적인 눈이 뜨여지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선지자’로 이해하게되고 점점 더 영적인 개안이 활짝 열리면서 결국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그 발 앞에 엎드려서 ‘경배’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장단계의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빛에 대한 motive입니다. 8장 12절에서 이미 예수님께서는 ‘나는 이 세상의 빛이다’라고 이야기 한 일이 있습니다. 9장에 들어와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이 ‘빛’이라고 하는 motive는 어떤 사람에게는 조명으로 이야기하지만 또한 어떤 사람에게는 ‘심판’으로 이야기합니다.

또 한가지는 예수님의 기적 즉,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을 앞을 보게하는 이야기와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를 연결해주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기적은 하나님의 창조적인 사역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날은 안식일이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창조사역과 예수님의 이 기적을 연결시켜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창세기 1장을 보면 하나님의 창조적인 사역이 무엇입니까? 창조적인 사역은 전체적인 어두움에서부터 빛을 가려내는 일이 창조적인 사역이었습니다. 흥미있는 사실들은 우리가 창세기 1장을 보게되면 이렇게 기록되고 있습니다. ‘이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다’ 그리고 ‘하나님의 신은 그 위에 운행하시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자세하게 살펴보면 하나님의 신은 수면 위에 운행하다는 말이 있는데, 하나님의 ‘신’이라는 말은 신약에서 ‘pneu'ma’(퓨뉴마)라는 말과 구약의 ‘j'Wr’(루아크)라는 말로 ‘바람’ 혹은 ‘기’ 혹은 ‘생기’라고 표현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신’, ‘하나님의 영’ 혹은 ‘하나님의 바람’과 같은 것이 수면 위에 있다는 것은 고요한 바다가 아니라 무엇인가 태고적에 바다 혹은 물에서 넘실대는 것은 무엇인가 일어나려고 하는 현상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하나님의 호흡이 마치 비둘기가 날개를 치면서 휘저으면 물이 점점 움직이면서 무엇인가 일어나려고 하는 광경인데, 그 때에 땅은 혼돈하고 공허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단어를 어디에서 가장 잘 쓰고있는가하면 이사야에서 쓰여지고 있습니다. 특별히 후반부에 보면 ‘혼돈’과 ‘공허’라는 말을 ‘비어있다’, ‘허깨비와 같다’, ‘있는 것 같지만 실재로 있지않다’라고 쓰여지는데 그 단어는 ‘우상’에게만 사용되어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상은 있는 것 같지만 없고, 허깨비와 같고 붙잡아도 붙잡히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천지창조를 하시면서 어둠 속에서 사람들이 마치 무엇인가 있는 것처럼 잡지만 실제로 있지않은 것에 의존해서 사는 그때에 하나님께서 새로운 창조를 주신다는 것은 진짜 즉, 사람들이 눈을 감고있어도 진짜로 보는 것같지만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는 것 같지만 진짜로 듣지 않고 살고있는 세상에서 진짜를 볼 수 있고, 진짜를 만질 수가 있고, 진짜를 들을 수가 있다면 이것이야 말고 진짜 창조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적을 하나님의 일이라고 표현하는 이유 중에 하나는 예수님이 하시는 일들은 창조적인 사역 즉 어두움 가운데에서 빛을 그리고 허깨비와 같이 실제적이 아닌 것 가운에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실제적인 것, 진짜로 있는 것, 참을 알도록 해주는 것 따라서 여기에서 이야기하기를 바리새인들은 ‘너희들은 두 눈을 갖고 있어서 보는 것 같지만 진짜 보는 것은 아니다’ 또한 ‘두 귀가 있어서 듣는 것 같지만 진짜 듣는 것은 아니다’는 ‘봄’(seeing)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어찌보면 여러분과 제가 여기있는 사물을 봅니다. 그러나 우리의 보는 것은 피상적입니다. 우리는 매우 피상적입니다. 여기에서 참다운 보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 하나님의 창조적인 사역이고 예수님의 사역의 본질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바리새인들은 분명히 본다고 하지만 진짜 보는 것은 아니였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두 귀가 있지만 진짜 듣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찌보면 어둠 가운데에서 진짜가 아닌 것을 추구하고, 진짜가 아닌 것을 향해서 발버둥치는데 예수님께서 이 기적을 하면서 ‘너희가 진짜 보는 것이 무엇인지 아느냐? 진짜 보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사역 가운데에서만 얻을 수가 있는 것’이지 하나님의 창조사역에 들어가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호흡이 들어가지 아니하면, 하나님이 일하시지 아니하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가짜와 같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우리가 지난 시간에도 살펴본 것처럼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다 헛되고 헛되고 헛되니 헛되도다”라고 고백하였던 전도서의 고백처럼, 전도서에서는 이 ‘lbeh}’(헤벨)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구약성경에서 약 70회 정도 사용하고 있는데 그 중에 35회 정도가 전도서에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전도서는 ‘lbeh}’(헤벨)에 관한 이야기로서 이 말은 두 가지라고 했습니다. 마치 우리가 아침에 입김을 불면 있는 것 같지만 없는 것, 헛것, 비어있는 것입니다. 즉 비어있다는 말이나 거짓이라는 말은 같이 사용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사람을 안식일에 앞을 보게 했다는 것은 창조적인 이야기, 창조적인 사역이고, 하나님이 창조에 의해서만이 진짜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바리새인과 많은 유대인-은 보기는 보아도 참을 보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진짜를 듣지 못하고, 진리를 안다고 하지만 명품적인 진리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 본문 40~41절의 말씀은 아이러니(irony)의 절정입니다. 자기들은 모세의 제자라고 이야기하지만 요한복음 5장 45~46절에 의하면 모세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고 증거한다고 했으므로 스스로 자가당착에 빠지는 것입니다.

또 한가지는 하나님께서는, 예수님께서는 이 일을 안식일에 이루셨다는 말을 통해서 안식일은 본질적으로 한마디로 구약에서 표현할 수가 있습니다. 즉 안식일은 ‘샬롬’(!/lv;)이라고 표현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샬롬’(!/lv;)은 전쟁이 없는 상태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가득찼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안식의 근본적인 목적이 ‘샬롬’(!/lv;)이라고 이야기한다면 예수님께서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것은 ‘샬롬’(!/lv;)이고 또 다른 표현방법이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안식일에 눈먼 자에게 진정한 안식을 주시고 예수님의 행동이야말로 안식의 진정한 참뜻을 나타내고 있다는 사실들을 바리새인들은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안식이라는 것은 온전한 고침과 모든 치료를 상징하는 하나의 Sign이었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는 소경된 사람이 예수님을 아는 방식에서 제일 먼저 예수를 알았다는 것은 가장 쉬운 즉 혈과 육에 의해서 알았다는 의미이고, 그 다음에 그가 예수님을 알았을 때에는 ‘선지자’로 알았습니다. 이 선지자에 관한 이야기는 특별히 이사야에 여러곳(29:18~19; 35:5~6; 61:1~2)에 나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선지자의 사역 자체가 새로운 개안, 새로운 눈을 뜨게 하여서 참을 알게하고 거짓이 아닌 진실을 알게하는 것이 선지자의 사역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선지자를 알았던 이 소경이 그 다음에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자’(33절)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를 그리스도로 알게 되었다(38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눈먼 자를 보게 한 일과 하나님의 창조사역과는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한다면 창조사역의 절정이 ‘샬롬’(!/lv;)이고, ‘샬롬’(!/lv;)에 대한 재해석을 할 때에 ‘구원’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구원’이라고 할 때에 ‘구원을 얻었다, 구원을 받았다’고 이야기하는데 구원이라는 말은 그런 의미보다는 본질적으로 존재의 상태 자체가 바뀌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한 때는 우리가 집 밖에 있더니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추방에서 귀향
한 때는 헐벗었지만 이제는 입힘을 받았고
한 때는 병들었으나 지금은 치료를 받게 되었고,
한 때는 배고팠으나 지금은 배부름을 얻게 되었고,
한 때는 앞을 보지 못했으나 지금은 앞을 보게 되었고,
한 때는 듣지 못하였으나 지금은 듣게 되었다

이처럼 다양한 은유법(metaphor)으로 표현하는 것이 구원입니다. 이러한 대조법들을 다시 표현하는 것들이 에베소서의 이야기들입니다.
“우리가 전에는 … 그러나 지금은”
그러면 이전과 이후의 결정적인 가운데에 있는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분에 의해서 인간 삶에 근본적인 상태가 바뀐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상태가 바뀌는 것을 가리켜 창조행위라고 이야기합니다.

창세기에서 ‘헛것’, ‘비어있는 것’에서 하나님께서 활동을 하심으로 빛을 주시고, 새로운 삶을 주시고, 또한 완성된 ‘샬롬’(!/lv;)을 주셨다고 한다면 예수 그리스도야 말로 진짜로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유대교와 기독교의 가장 근본적인 차이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받아들이는 문제였습니다. 초대교인들이 예수님을 고백할 때 예수는 첫째로 창조주 하나님이셨고, 동시에 구원자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신약 성경에 소위 그리스도 찬미가 가운데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골로새서 1장 15~20절까지를 보게되면-그것을 학자들은 말하기를 'Christological hymn'(그리스도 찬미시)라고 합니다. 그리스도 찬미시라고 하는 것은 초대교회 교인들이 세례를 받을 때에 둘러앉아서 자기가 믿는 예수님이 누구인가를 고백하는 그 고백문을 노래로 만들었는데, 그 노래의 단편이 신약성경의 여러 곳에 나오는데 그 중에 하나가 골로새서 1:15~20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보면 두절로 되어있습니다.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는 창조주라는 고백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예수 그리스도는 구속자, 구원자라는 고백입니다. 바로 이 사건에 의해서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다라는 문제에 대해서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종교는 바로 유대교였습니다.

복음서를 보게되면 한결같이 예수님과의 투쟁은 평신도들이 아니라 구약종교, 구약의 전통을 사수한다고 하는 바리새인들, 서기관들이었는데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창조주 하나님이라고 할 때에 그 창조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절정이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샬롬’(!/lv;)이었습니다. 그 말은 ‘안식’이라는 말로서 ‘샬롬’(!/lv;)이 창조사역의 절정이라고 한다면 창조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사역은 ‘샬롬’(!/lv;)을 주시기 위한 재창조라고 이야기할 수가 있습니다. 그것을 고린도후서 5장 17절의 말씀은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하는데, ‘누구든지’라는 말은 ‘무엇이든지’라는 말입니다. 즉 “무엇이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창조다”라는 말씀입니다.

그 이야기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서 하나님께서 원래 이루셨던 창조 자체가 새롭게 이해되고 새롭게 완성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이라는 것은 단순히 사적인 문제가 아니고 우주적이고 범세계적이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분이시라는 것을 볼 때에 예수 그리스도는 창조주이시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으며, 창조의 절정이 ‘샬롬’(!/lv;)이라고 한다면 눈먼 사람에게 눈을 뜨게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샬롬’(!/lv;)을 가져다 준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모든 사역들, 예수님의 모든 shmeivwn(세메이온, sign)들은 근본적으로 창조주 하나님이 인간들을 위해서 의도하셨던 목적, 즉 ‘샬롬’(!/lv;)이라고 불리우는 목적을 구현하시는 분으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구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구원’이라는 말을 축소해서 생각하지 말고 우주적이고 포괄적인 개념으로 사용해야 합니다. 그런 관점으로 볼 때에 ‘샬롬’(!/lv;)은 주어진 것이지 버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소경이 보게 된 것은 결정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주어졌다는 사실입니다. 은혜와 은총이 이 모든 것들을 가능하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은혜와 은총에 대해서 인간의 반응에 대해서 믿음이 어떠한 형태를 띠고 있는가?하는 것입니다. 제일 먼저 그가 예수님을 단순히 ‘예수’로 알았으나 그 다음으로는 ‘선지자’로 그 다음에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자’, ‘그리스도’로 안다고 한다면 어린 믿음에서부터 충만한 믿음의 단계까지 그리고 충만한 믿음에서부터 신앙고백의 핵심으로 성장해 갑니다. 신앙고백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두 가지가 있습니다. 간증에서 나타난 첫 번째는 “내가 소경으로 있다가 지금은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신앙고백의 두 번째는 “주여 내가 믿습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 현상은 무엇입니까? 바로 제자도의 길입니다. 그리고 제자도의 길은 예수를 따라가는 길입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는 길이라고 한다면 그 길은 항상 영광과 같이 나오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십자가의 달리심 자체가 예수님의 영광이라고 한다면 여기에서 이 사람이 제자도에 들어서면서 치루어야 할 값은 어디에 있습니까? 바로 출교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런 말을 요한복음이 쓰여지면서 이 요한복음을 읽었던 그 당시의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 그런 사람들은 두 가지 반응이었습니다. 빛은 조명도 이야기하지만 심판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가는 곳에는 항상 두 가지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빛 가운데에 사는 사람과 예수님 자신이 자기들에게 심판이 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면 소경된 사람이 이 글을 읽었을 때에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유대인들이 이 글을 읽었을 때의 반응은 반대였습니다. 따라서 여기에는 아이러니가 작용하게 됩니다. 한쪽에서는 육체적으로 출교당하고, 어둠가운데에서 살고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은 진정한 참을 보게 되었고, 거꾸로 사회의 기득권층이고 또한 앞을 볼 수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맨 끝에 어둠 가운데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개가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참 봄’, 진짜 본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진짜 본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지 결코 자기가 얻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 대조법은 거지 소경과 눈뜬 종교 지도자들로서의 바리새인들과 유대인들의 대조법들은 우리가 앞에서 상당히 많이 나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제11강 진정한 목자는 누구인가? (10:1~11:44)

 

요한복음 10장은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인가? 하는 질문에 대해서 또 다른 답을 주고있는 본문이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분명히 양의 문이며, 선한 목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0장 1절부터 6절까지는 분명히 하나의 단락을 이루면서 1절부터 5절까지는 일종의 비유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비유라고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아는 것처럼 ‘parabolh;’(파라볼레)라는 단어가 아니라 ‘paroimiva’(파로이미아)라는 단어입니다. 이 말은 ‘비유’라는 말보다는 ‘비교’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좋을 듯 합니다.

요한복음 10장에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에게 비교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원래 비유라는 것은 알려진 것과 알려지지 않은 것을 옆에다 놓고 알려진 것을 통해서 알려지지 않은 것을 알게 하는 방식을 ‘비유’라고 합니다. 즉 ‘비유’는 단순히 예증을 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이 비유라고 하면 어떠한 point 즉 어떠한 진리를 알려주기 위해서 예를 들어주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분이 대부분일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설교를 하다가 설교 내용이 어렵다고 생각하면 이 설교를 쉽게, 요점을 분명하게 보여주기 위해서 예를 드는 것을 비유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이것이 일상적으로 우리 한국말의 비유의 의미이지만 성경에서 ‘parabolh’(파라볼레)라고 하는 뜻은 그러한 의미가 아닙니다. 즉 예수님께서 말씀을 강론하시다가 그것을 쉽게 이야기해 주기 위해서 예를 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비유 자체, 독자적인 메시지를 구성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비유’라고 할 때에 알려진 것과 알려지지 않은 것 사이를 평행으로 놓고 알려진 것을 통해서 알려지지 않은 것을 가르쳐주는 하나의 방법이라고 한다면 분명히 여기서 알려지지 않은 것은 천상의 일, 하나님의 숨겨진 일들을 지상의 우리들이 알고있는 평범한 일들을 통해서 깨닫게 해 주는 방식이 비유입니다. 그러나 이 비유라는 것은 또 놀랍게도 모든 사람들이 다 알고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알겠습니까? 그것은 천상의 일들을 아는 사람들만이 비유의 말씀을 안다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case가 마가복음 4장에 나와있는 ‘씨뿌리는 자에 관한 비유’입니다.

마가복음 4장 9절 말씀을 보면 "들을 귀 있는 자들은 들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이런 말씀을 하십니까? 예수님과 함께 한 사람들이 열 두 제자로 더불어 ‘비유’에 대하여 질문을 합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으나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였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비유에 관해서 말씀하시는 가장 전형적인 고전적인 정의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분명히 예수님께서 하신 비유들은 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비밀’(musthvrion th'" basileiva" tou' qeou', 뮈스테리온 테스 바실레이아스 투 데우)을 담고있는 내용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더 쉽게 이야기한다면 하나님 나라의 비유는 하나님 나라에서 오지 않은 사람, 하나님 나라에 속하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알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첫째로 비유의 정의를 말씀할 때에 하나님 나라의 비밀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볼 때에 ‘-의’의 소유격을 자세하게 살펴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헬라어에서의 소유격, 히브리어의 연계형은 일반적으로 세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주사랑교회'라는 교회의 이름이 있다고 가정을 합시다. 이 이름을 가만히 살펴보면 종교개혁 이후의 개혁파 교인으로서 이 문장을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고, 어떤 사람은 종교개혁 이전의 사람들처럼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즉 '주사랑'이라는 말은 '주님'과 '사랑'이라는 두 단어의 합성어로서 '주님을 사랑하는 교회'라는 뜻과 '주님이 사랑하는 교회'라는 뜻도 될 수가 있습니다. 종교개혁 이후의 신앙고백은 '주님이 사랑하는 교회'입니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것처럼 은혜가 먼저이고, 계시가 먼저이지 결코 인간이 하나님을 잡거나 노력이 아니라는 분기점이 종교개혁입니다. 그런데 많은 교인들이 우리 신앙생활의 형태는 '우리가 주님을 얼마나 사랑할 것인가?'라는 봉사차원의 고백입니다. 그러나 복음, 좋은 소식이라는 것은 우리가 얼마나 주님을 사랑하느냐? 하는 것이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소식이 가장 좋은 소식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가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을 때에, 구원이 무엇인지 몰랐을 때에, 빛이 무엇인지 몰랐을 때에 우리에게 빛으로 오셨고, 생명으로 오셨고, 구원으로 오셔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구원이야말로 정말로 은혜라는 고백을 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어의 ‘연계형’ 혹은 헬라어의 ‘소유격’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가 있습니다. 주격 적인 소유격과 동격 적인 소유격 그리고 목적격 적인 소유격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의 사랑’(Love of God)이라는 문장을 볼 때에 이 말의 의미는 ‘하나님이 사랑한다’는 말과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말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말로 표현할 수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할 때에는 목적격 적인 소유격이 될 것이고,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고 할 때에는 동격 적인 소유격, 그리고 ‘하나님이 사랑하신다’고 할 때에는 주격 적인 소유격이 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여기에서도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으나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였다’고 말씀할 때에 비유란 분명히 하나님 나라에 관한 비밀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 나라 자체가 비밀일 수가 있고 또한 하나님 나라가 비밀을 담고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예수님의 제자들과 함께 한 자들에게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 주어졌고, 외인들에게는 주지 않았다는 말을 하는 대신에 비유로 주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비유라는 것은 모르게 하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비유라고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예수님께서 함께 있는 사람들에게는 주어졌다는 것은 마가복음에서 가르치고 있는 제자도라는 것입니다. ‘제자’는 ‘예수를 따르는 자’, ‘예수와 함께 하는 자’ 즉 ‘죽음에 이르기까지 예수님과 함께 걷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잘 보여주고 있는 책 중의 하나가 바로 마가복음입니다. 로마의 유명한 네로 황제의 불과 같은 시련 가운데에서도 견딜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쓰여진 책이 마가복음이라고 할 때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수난을 받고 고난을 받았다면 그를 따라가는 제자들도 수난과 고난을 받아야 하는 것에 대하여 쓰고 있는 책입니다. 거기에 보면 적어도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라고 이야기하면서 비유이야기를 보면 길가, 돌짝밭, 가시덤불 그리고 옥토에 씨가 뿌려질 때에 ¾이 낭비가 되었습니다. 세상에 어떤 바보스러운 농부가 이렇게 씨를 뿌리겠습니까? ¾이 낭비가 되었고, 뿌린 것 중에 ¼밖에 거둘 수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겉으로 볼 때에 엄청나게 낭비가 되었던 바로 이러한 일들이 최종적으로, 종말론적으로 볼 때에 상상을 초월할 수밖에 없는 추수로 이어지게 됩니다. 왜냐하면 30배, 60배, 100배라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의 추수로 이어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정말로 미약하고 별 볼일 없고 낭비된 하나님의 복음, 하나님의 일 자체가 사람의 생각을 초월하여서 어마어마하게 크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나라의 비밀들이 너희에게는 주어졌지만 세상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하면서 이사야 6장의 말씀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0장 6절의 비유(paroimiva, 파로이미아)로 이 단어는 일반적으로 ‘비교’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이 말은 진짜 목자와 가짜 목자를 비교하고 있습니다. 이 비교를 그들이 깨닫지 못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비교’라는 말은 요 16:25, 29; 벧전 2:29에서만 나옵니다. 이 단어는 비교로도 쓰이고 구약의 ‘lv;;];;m;’(마샬)에 해당하는 ‘잠언’ 혹은 짤막한 말로서 ‘수수께끼’라고도 번역이 될 수 있는 단어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드러내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사람들의 이해부족입니다. 목자와 양의 관계에서뿐만 아니라 절도와 강도 그리고 목자의 관계를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도둑이나 강도는 문으로 들어오지 않지만 목자는 문으로 들어온다는 말은 합법적이고 정상적인 절차를 밟고 들어온다는 의미입니다. 그 이야기는 이 목자야말로 정당한 양의 소유자라는 것을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비유를 통해서 ‘자신이 양을 정당하게 소유할 수 있는 소유자’라는 것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야말로 합법적이고 정상적인 문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안다’라는 말은 구약적인 배경가운데에서 이해를 해야 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안다’고 할 때에 그 의미는 매우 다양하게 나타나게 됩니다. 예레미야 15:15에 보면 예레미야는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당신은 압니다’(T;[]d'y: hT;a', 아타 야다타)라는 말로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 말을 가만히 보면서 ‘안다’는 말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원래 히브리어는 동사 안에 주어가 다 내재하고 있습니다. 즉 주어를 별도로 사용하지 않아도 의미가 변치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어를 별도로 사용하는 경우는 강조할 때에 주어를 사용합니다. 그렇다면 예레미야가 하나님을 원망하고 탄식하면서 ‘당신은 압니다’라고 한 뜻이 무슨 뜻입니까? 이 말은 내가 얼마나 고통을 당하고 있는지, 당신을 위해서 얼마나 내가 배반을 당하고 있는지, 내가 얼마나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지 세상 사람들은 다 모른다고 해도 당신은 나를 알지 않습니까? 라는 강한 확언의 표현입니다. 따라서 구약성경에서 ‘안다’는 말은 information을 많이 축적하는 의미에서 ‘안다’라는 말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아내에 대하여 무심했던 남편이 어느 날 집에 들어와서 보니까 부인이 너무 힘들어서 방 한구석에서 쭈그려서 울고 있을 때에 남편이 가서 아무소리 하지 않고 부인의 손을 붙잡고 ‘나는 알아!’라는 한마디를 했다고 가정했을 때에, 이 ‘안다’는 한 마디에 아내의 모든 힘든 것들과 어려움들이 한순간에 씻을 수 있는 강력한 언어가 되는 것입니다.

바로 히브리인들은 가장 친밀하고 친숙한 관계 속으로 속내를 알고, 내용을 알고, 함께 동참하고 함께 고통할 수 있는 능력을 ‘안다’는 단어에 함축적으로 사용했습니다. 이러한 문학적인 패턴을 신약에서 목자가 양들을 ‘안다’ 혹은 그 양들도 목자를 ‘안다’라는 문장에서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즉 네가 지금까지 살아왔던 모든 과거들, 현재들 그리고 앞으로 가야할 모든 것들에게서 지극히 관심을 두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즉 단순히 안다는 말보다는 무엇을 인식한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에 그림적인 언어의 표현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 이름을 불러낸다’는 말은 양과 목자의 관계 그리고 절도 혹은 도둑과 진짜 목자의 비교입니다. 따라서 청중들에게 당신들이 쫓아야 할, 당신들이 알아야 할, 당신들이 진정으로 가서 생명의 꼴을 얻어야 할 곳이 유대교도 아니고, 세속적인 종교 지도자들도 아닌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그들은 다 절도요 강도라는 것입니다. 예수만이 유일한 생명으로 인도하고 풍성한 삶으로 인도하는 길이라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서입니다.

구약에 있어서 ‘목자’라는 말은 그 당시 농경문화에서 빌려오기는 했지만 고대 근동의 문헌들에 의하면 ‘목자’는 항상 정치적인 지도자를 말합니다. 즉 왕을 이야기 할 때에 ‘목자’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즉 정치적인 색깔을 띠고 있었던 단어들이 ‘목자’라는 말입니다. 즉 목자는 정치적, 종교적인 지도자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왕국에 관한 이야기 즉 하나님 나라에 관한 이야기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라는 개념 자체가 정치적인 용어입니다. 즉 누가 통치하고 다스릴 것인가? 또한 이 양들은 누구에게 속한 것인가? 하는 정치적인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에스겔 34장이 요한복음 10장의 배경이 되는 중요한 구약성경입니다.

에스겔 34장 2절의 ‘인자’는 포로기에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왔던 사람들에게 사역을 했던 목회적인 사역자인 에스겔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위로가 필요했던 사람들입니다. 절망가운데에 살고 있던 사람들, 내일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희망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그가 위로의 말씀을 하는데, 이 위로의 말씀을 하기 전에 왜 당신들이 여기에 와서 살아야만 하는가? 라는 과거에 대한 분명한 이해 없이는 미래에 대한 설계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스겔서의 앞 부분들을 보면 대부분이 ‘왜 당신들이 고향을 떠나 타향살이를 해야만 하는가?’라는 질문을 합니다. 왜 이국 땅에 포로로 잡혀와서 살아야만 하는가? 라는 질문을 한 다음에 이것이 당신들의 열조가 하나님을 져버렸던 일들 때문이라는 죄에 대한 심각한 공격들이 나옵니다. 즉 죄에 대한 심각한 인식이 있을 때에 우리에게 미래가 있을 것인가? 혹은 우리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수가 있는가?라고 하는 책이 바로 에스겔입니다. 그래서 에스겔서 후반부에는 찬란한 하나님의 성전, 즉 그들이 상실했던 성전이 아닌 새로운 성전에 대한 희망을 비전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 에스겔서의 후반부입니다.

에스겔 34장에 나오는 ‘목자’는 정치적, 종교적인 지도자들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만 먹이는 이스라엘의 목자들입니다. 4절의 말씀을 보면 복음서 가운데에서 예수님께서 잃어버린 양떼들이 연상이 됩니다. ‘연약한 자’, ‘병든 자’, ‘상한 자’, ‘쫓긴 자’, ‘잃어버린 자’들이 다 구원이 필요한 자들입니다. 구원이 무엇입니까? 여기에 있는 것처럼 연약한 자가 강하게되는 것이고, 병든 자가 고침을 받는 것이며, 상한 자가 싸매임을 받는 것이며, 쫓기는 자가 돌아오는 것이고, 잃어버린 자가 찾게되는 ‘샬롬’(!/lv;)의 상태를 말합니다. 즉 궁극적으로 지도자들이 양들 또한 자기의 백성들을 위해서 해야할 일이 바로 ‘샬롬’(!/lv;)의 정책입니다. 이것이 본질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인류를 위해서 처음으로 만들었던 최초의 정책이 바로 ‘샬롬’(!/lv;)의 정책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세계 모든 민족들, 정치 지도자들이 추구해야 할 것들입니다. ‘샬롬’(!/lv;)을 위한 정책입니다. 우리가 구원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이러한 것들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참된 목자, 참된 지도자는 바로 ‘샬롬’(!/lv;)을 추구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5절에는 ‘목자가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정치적, 종교적인 지도자들은 있었지만 참목자가 아닌 자기의 배만 채우는 거짓 목자들이라는 것입니다. 6절의 말씀은 탄식하는 구절입니다. 이 구절은 예수님께서 먹을 것이 없고 산지에 흩어져있는 사람들, 유리하는 양떼를 보시고 측은한 마음이 든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에 ‘본다’는 말도 구약적인 배경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신다’(ha;r, 라아)라는 히브리어 단어는 단순히 두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태를 인식하고 파악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상태를 보시고 인식하시고 긍휼히 여겼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긍휼’(!j'r, 레헴)이라는 말은 마치 여인이 자기의 생명을 잉태하기 위해서 장이 뒤틀린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8절 말씀에도 ‘목자가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도 참 목자와 절도와 강도, 참 선지자와 가짜선지자를 의미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계속해서 8절에서는 ‘내 양’이라는 말씀을 합니다. 즉 ‘위탁받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정치지도자들, 종교지도자들 누구든지 자기에게 주어진 것은 위탁받은 것이며 대여받은 것이지 결코 자기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대여’라는 말은 다시 돌려주어야 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모든 지도자들은 자기에게 주어진 것들은 대여된 것들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할 것입니다.

만약에 삼손이 자기에게 주어진 힘이 대여된 힘이라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성경에서 ‘힘’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때에는 항상 힘이 없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기드온에게 많은 군대들이 왔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줄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자기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가르쳐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기드온이 숫자를 300명으로 줄인 사건이나 삼손이 힘을 가지고 자기가 남용한 것이나 서로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두 사건을 가만히 보면 기드온을 통해서는 네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내힘으로 한다는 의미이고, 삼손에게는 네가 받은 것은 네 힘이 아니라 대여받은 힘이라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분명히 ‘내 양’이라는 말을 반복적으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대여받은 권리요, 대여받은 명예라는 것입니다.

11절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강조형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내 양’을 찾는 자가 바로 ‘나’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자신이 참 목자가 될 것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13절의 ‘그것들’은 4절에 등장되고 있는 ‘연약한 자’, ‘병든 자’, ‘상한 자’, ‘쫓긴 자’, ‘잃어버린 자’등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제2의 출애굽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14절은 샬롬의 정책의 완성에 대하여 이야기이며, 15절의 ‘친히 양의 목자가 된다’는 말은 34장 자체가 요한복음 10장의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고, 16절은 평온의 상태이며, 이사야 후반부에서 반복되어 나오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이사야 61장 1절에는 ‘주 여호와의 신(j'Wr, 루아크)’, ‘주 여호와의 영’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1~3절까지의 말씀을 보면 마찬가지로 '가난한 자', '마음이 상한 자', '포로된 자', '갇힌 자', '슬픈 자', '슬퍼하는 자'등 이러한 사람들이나 에스겔 34장에 나오는 사람들이 같은 의미의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이 두 부분을 연결해 보면 이사야에서는 여호와의 신이 임하였다는 것이며, 에스겔서에는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 목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목자도 '여호와의 신', '여호와의 영'을 입은 자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구약에서는 이것을 '메시야'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23절에 등장하는 목자는 1~22절까지 이야기했던 모든 부정하고 수치스럽고 더러운 목자에 대비한 참 목자이며 그가 해야 할 사역은 자기는 먹지 못할지라도 양은 먹이고, 연약한 자를 강하게하고, 병든 자를 고치고, 상한 자를 싸매어주고 쫓긴 자를 다시 돌아오게 하고, 잃어버린 자를 찾아다니고, 유리한 양떼들을 찾아서 나가는 일을 하게될 것입니다.

24절은 언약에 대한 언급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왕이 되고, 다윗 즉 새롭게 임명받은 목자는 그들에게 왕이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25절에서 언약의 이야기를 하게됩니다. 30절의 말씀에서 중요한 단어는 '안다'는 말일 것입니다. 이 정도만 되어도 요한복음 10장과 마가복음 6장 34절과 누가복음 19장에 나타난 목자와 양과의 관계된 구약적인 배경이 매우 진하게 드리워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0장 7절로 넘어가면 청중들이 깨닫지 못하자 예수님께서 다시 설명을 하십니다. 7절에서 10절까지는 예수님께서 '나는 문이다'라는 것을 설명을 해 주고 있습니다. 이 설명은 제자들에게만 하신 것이 아니라 그를 따르는 많은 사람들에게 하신 것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19절을 보면 짐작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을 보면 이 설명 즉 예수님은 참 목자이고 그리고 그가 다스리는 목적은 풍성한 삶, 영원한 삶, 생명이라고 할 때 이것도 구약적으로 볼 때에 샬롬을 향한 정책을 펴는 지도자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자기 자신을 가리켜서 '문'이라고 하십니다. 분명히 도둑과 절도와는 반대로 양 우리로 합법적으로 들어가는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이 문이라고 할 때에는 양 우리로 들어갈 수 있는 권한을 이야기해 주고 있습니다. 양 우리에 들어가서 양무리를 돌보는 직무도 함께 포함하고 있습니다. 양 우리로 들어갈 뿐만 아니라 들어가서 돌보는 직무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즉 삯군들과의 태도와는 정 반대로 예수님께서는 궁극적으로 생명, 샬롬 혹은 풍성함을 가져다주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11절부터 21절까지는 '나는 선한 목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절부터 6절까지는 목자에 관한 것과 또한 문에 관한 것을 함께 이야기하고 다음에는 이것을 잘 이해하지 못하자 먼저 예수님께서는 '나는 문이다'라는 말로서 가르쳐주고 다음에는 '나는 선한목자'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22절에는 '수전절'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수전절'이라는 뜻이 '예루살렘 성전 헌당식'의 개념입니다. 그 역사적인 배경은 주전 2세기경 유대인이 시리아인에 의해서 압제를 받고있던 시기였습니다. 시리아 왕 에피파네스 4세는 광폭하고 광란의 왕이었습니다. 이 왕은 예루살렘성을 침략하여 그 안에 있는 모든 기구들, 기물들을 다 빼앗아갔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에 제우스 신상을 만들어놓고 유대인들이 제일 싫어하는 부정한 짐승인 돼지의 피를 뿌리기도 하였습니다. 즉 완전히 예루살렘성이 더럽혀진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죽음보다 더 무서운 핍박이었습니다. 그 때에 생겨난 것이 소위 광복군이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에서 ‘유다스 마카비우스’라고하는 유대인의 광복군 지도자가 있었습니다. 주전 165년경 키슬레브 달(오늘날 12월) 25일쯤 이스라엘 예루살렘에서 가장 가까운 동네에서 시리아와의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게 됩니다. 그 때에 유대인들은 대승을 거두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는 그를 종려나무를 흔들며 환호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제일먼저 한 일이 성전을 깨끗하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더럽혀지고 부정했던 예루살렘 성전을 깨끗하게 하고 다시 하나님께 다시 바치기 위해서 예식을 하였습니다. 불을 비추므로 어두움을 몰아내고 성전을 깨끗하게 하고 그 성전을 다시 하나님께 바치게 된 배경이 바로 수전절이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1장에는 나사로를 살리신 이야기가 나옵니다.

11장을 넘어서면서부터 요한복음은 수난설화 즉 예수님께서 수난을 당하시는 이야기를 집중적으로 쓰고있습니다. 요한복음의 상당한 부분을 예수님의 수난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는데, 11장과 12장은 수난설화로 들어가는 서두곡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나사로를 살리신 이 사건은 요한복음에 나타난 일곱 가지 ‘표적’(shmeivwn, 세메이온)가운데에 제일 마지막 부분입니다. 첫 번째 ‘표적’(shmeivwn, 세메이온)이 ‘가나 혼인잔치’의 이야기인데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새로운 시대를 여시는 새로운 충만의 화신이라는 것입니다. 맨 마지막 역시 생명의 충만으로서 다시 살리심의 역사입니다. 결국 이것도 역시 ‘표적’(shmeivwn, 세메이온)이라고 하는데, 이 사건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인가? 라는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가장 climax 혹은 절정으로서 예수 그리스도 그는 생명을 주시는 분이요, 생명의 충만자라는 것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죽음’을 잠잔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6절에는 죽음을 허락하고 있습니다. 일부러 허락하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이 사건을 통해서 자기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즉 자기의 영광을 죽음 가운데에서 영광이 어떻게 드러나는가? 이 세상에서 죽음은 결코 마지막 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마르다의 솔직한 심정은 ‘때는 너무 늦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두 가지 생명에 대한 견해가 나옵니다. 하나는 미래적인 생명, 미래적인 부활에 대해서 희망을 갖고있는 마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미래적인 생명뿐만 아니라 그 미래적인 생명은 지금 여기에 예수님과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종말이라는 것은 항상 시간에 의해서 따져질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있고,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지금 여기에 현존하고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죽음’은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요 자연의 일부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성경 어느 곳에서도 죽음을 자연스럽다고 이야기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솔직하게 이야기한다면 죽음은 이 세상에서 가장 부자연스러운 것이라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라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가르침은 죽음은 인생에 있어서 최후의 마지막 말, 죽음은 결코 마지막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반복적인 가르침입니다. 죽음은 자연의 일부가 아니라 우리가 물리쳐야 할 원수요 장애물입니다. 그러므로 죽음과 죄의 문제와는 아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세상에서 죽은 사람은 죄 때문에 죽었다는 말이 아니라 인생에게 찾아온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그래서 죽음은 결코 인생의 한 부분이 아니라 원수요 대적자요 장애물이라고 이야기하면서 죽음과 죄의 문제는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죽음에 대하여 ‘빛이 이 세상에 왔으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더 반대하고 거절했다’는 말을 기억할 것입니다. 결국 생명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서 죽느냐, 사느냐 또는 죄냐 아니면 온전한 삶이냐라는 것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하이델베르그 신앙고백문에서는 ‘죽음’을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죽음은 우리의 죄의 빚을 갚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죽음은 우리가 계속 죄 짓는 일을 멈추게 합니다. 우리의 죽음은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는 대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나사로를 살리신 것은 분명한 기적일 뿐만 아니라 징조이며 새 시대가 열렸다는 의미이고,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미래적인 삶이 지금 이 안에 들어와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 표현방법이 중요합니다. 성경의 복음서라든가 ‘생명’ 또는 ‘구원’ 혹은 ‘종말’이라는 것은 우리가 앞으로 가는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지 않고 지금 여기로 쳐들어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즉 우리의 삶 가운데에 돌파하여서 들어오는 삶을 생명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 요한복음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생명으로서 죽음 앞에 서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죽음을 물리치고 죽음을 대적하고 죽음과 대결하기 위해 서있는 모습을 그려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나사로가 다시 사는 것은 생명은 이미 여기에서 시작될 것이고 또한 장차 올 부활에 대한 하나의 보증이라는 것입니다. 징조라는 것이 바로 그러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왜냐하면 나사로는 분명히 나중에 다시 죽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죽은 자의 첫 번째 부활은 아닙니다. 첫 번째 부활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사람들은 장차 올 부활이 지금 여기 죽음앞에 선 생명 자체인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시작한다는 것을 알게하는 사역 자체가 나사로의 부활사건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부활을 미리 예표하고 있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11장 4절의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분명히 여기기에서 ‘영광’이라고 말하는 것은 요한복음 맨 앞부분에 있었던 ‘독생자의 영광’, ‘쉐키나(????)의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즉 현존하는 우리 가운데에 오셔서 우리 가운데에 현존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한다면 예수님의 고난과 영광 즉 죽음과 생명은 함께 가고 있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분명히 마르다는 미래의 부활을 믿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미래의 부활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미래의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생각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부활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라는 분을 떠나서는 부활을 생각할 수가 없는 것이고 따라서 미래적인 부활은 지금 여기에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와 있다는 것을 증거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제12강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12:1∼11)


요한복음 12장은 향유로 예수님의 발을 씻기는 이야기와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이야기 그리고 헬라인이 예수님을 찾아오는 독특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2장부터 12장까지 전체를 가리켜서 '표적(shmeivwn, 세메이온)의 책'이라고 이야기 할 수가 있습니다. 즉 일곱 개의 표적, 일곱 개의 sing들을 중심으로 해서 구성된 것이 요한복음의 전반부였고, 이 일곱 개의 표적 모두 다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인가?' 또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가지고 오는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가?'를 가리키는 역할을 하는 것이 '표적(shmeivwn, 세메이온)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즉 기적 자체, 이적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이적과 기적들은 무엇인가를 가리킨다는 것입니다.
제일 먼저 나타나는 기적은 '가나 혼인잔치'에서 물이 포도주가 되는 기적입니다. 따라서 이 기적 자체는 항상 중앙에 '예수 그리스도 그는 누구인가?'라는 것이 본질적인 질문들입니다. 이 질문은 2천년이 지난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반복적으로 질문되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그것이 교회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본질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자기들이 믿는 신앙의 대상으로서 '예수 그리스도 그는 누구인가?'하는 질문들은 요한복음 뿐만 아니라 복음서에서 반복적으로 질문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질문을 새로운 각도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바로 요한복음입니다.
또 한가지는 요한복음 자체가 그 당시 유대주의와의 심각한 투쟁 혹은 심각한 갈등 속에서 태어난 책으로서 초대교회가 처해있던 상황들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굉장히 어려움, 핍박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9장에 나타난 '눈먼 사람'이 보게 되었을 때에 예수님께 나아와 신앙고백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출교의 문제까지 등장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출교의 문제가 단순히 요즘의 이 교회에서 쫓아내면 다른 교회에 가서 join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소외를 당하고 또는 실제적으로 자기의 삶이 불가능할 정도로 심각하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유대주의자들 가운데에서 자기가 반기를 들거나 아니면 '아니오'라고 한다면 산다는 것 자체가 지옥과 같은 일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목숨을 거는 듯한 심각한 문제였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운데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분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결단이라는 것입니다. 첫 번째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된 사건들을 기억하면서 그리고 맨 마지막의 표적(shmeivwn, 세메이온)의 극치였던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에서 그분이야말로 생명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이라는 것입니다.
이제 12장은 계속해서 이 'shmeivwn'(세메이온)의 책들 혹은 표적의 책들, 빛이신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책들, 요한복음의 전반적인 부분들을 보면 위에서부터 아래로, 빛이 되신 예수님께서 어두운 세상 가운데로 내려오시는 것(desending)들의 일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캄캄한 가운데에서는 보이는 것이 없기 때문에 여러 가지 표적을 주신 것입니다. 그 표적을 주셨다는 것은 우리의 boundary를 정해준 것입니다. 표적들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길, 즉 하늘에서 오신 길은 어떻게 갈 것인가에 대해서 가르켜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이런 표적의 책의 끝 부분이 12장입니다.
1∼11절까지의 부분에서 6절은 저자의 논평하는 내용입니다.
7절의 예수님의 말씀을 보면 "저를 두어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 이를 두게 하라"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죽음을 상징하는 행동이라고 예수님께서 해석까지 해 주고 있습니다. 즉, 마리아가 예수님의 장례를 위하여 이러한 행동을 했는지는 잘 모르지만 마리아의 행동, 헌신을 그렇게 해석해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8절의 말씀은 특별히 가룟 유다를 상대로 해서 하시는 말씀인 듯 합니다. 왜냐하면 가룟 유다가 5절에서 '이것을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지 아니하였느냐?'고 즉, 차라리 구제하는 것이 낫지 왜 이렇게 엄청난 낭비를 하느냐?고 마리아에게 책망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사실 마리아의 행동은 어마어마한 낭비입니다. 이러한 마리아의 행동은 가룟 유다가 볼 때에 두 가지 중에 하나입니다. 물론 나쁜 마음을 먹을 수도 있지만 상식적으로 통하지 않는 행동이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부어진 이 향유는 엄청난 낭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헛된 낭비가 아니라 8절 말씀을 통해서 정당한 행동임을 변호해 주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성경을 읽을 때마다 꼭 이러한 생각을 하십시오. 왜 예수님의 사건들이 많은데(요 21:25) 이 이야기가 이 부분에 꼭 들어가야만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라는 생각입니다. 다른 것은 말고 이 이야기가 꼭 이 부분에 들어와 있다고 한다면 분명히 여기에는 우리에게 무엇인가 이야기하려고 하는 의도가 있을 것입니다. 또한 이 구절은 예수 그리스도 즉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된 것이기 때문에 어느 해석이든지 하나님 중심적으로 이해를 해야하고, 그러므로 하나님이 누구신가? 또는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신가?라는 본질적인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넓은 관점에서 보면 요한복음에서는 irony와 오해 그리고 이상한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대조적인 일들 예를 들어서 예수님과 함께 3년 동안 다녔던 제자들, 그 중에 유다와 마리아를 비교하고 있습니다. 또한 니고데모와 사마리아의 여인에 관한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성경은 첫 번째로 변방의 사람들이 아니라 소위 기득권 층의 사람들, 핵심적인 사람들, 항상 하나님 앞에 제일 가까이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즉, 성경은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구약성경만 하더라도 구약성경은 바벨론 사람들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에게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경 자체가 전도의 책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성경을 주어서 성경을 통해서 예수를 믿게 하는 것이 아니라 어찌보면 이미 예수를,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책이 성경책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주어짐을 통해서 항상 그 이루고자 하는 말은 당신들이 이미 알고, 배우고 지금까지 살아왔던 모든 것 자체가 하나님께서 지금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와 비교해 볼 때에 얼마나 근거가 없고, 얼마나 잘못된 전통, 얼마나 잘못된 인간의 유전에 의해서 신학을 세워나가고 있는가하는 것을 심각하게 비판하고 또한 야단치는 것이 성경입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께서 3년 동안 심하게 투쟁하고 갈등을 빚었던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바로 유대주의의 대표적인 종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바리새인, 서기관들, 율법사들 등과의 갈등이었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예수님과 가장 가까운 측근이었다고 했던 사람들도 결국에는 예수님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매우 충격적인 일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나라와 혹은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가 없거나 예수님의 측근이 아닌 것처럼 간주되었던 사람들이 궁극적으로 반전되어서 놀랍게도 바로 그들이 복음을 전하고 예수에 대하여 신앙고백을 하고 있다는 사실들은 그 당시 사람들에게도 충격이었지만 오늘날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충격이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충격을 받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소위 성경에서는 항상 복음은 예기치 못한 현란한 소식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복음이 현란성, 충격성 혹은 파격성을 경험하지 않고서는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지, 예수가 누구인지를 정확하게 알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과 함께 3년 동안 따라다녔던 군중들 혹은 예수님과 함께 다녔던 제자들과는 달리 미천한 여인 마리아에 의해서 값비싼 향유가 부어지고 이것에 대해서 반대하는 자들의 대표가 바로 가룟 유다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신실한 신복들이라고 자청하고 있는 사람들, 제자들 아니면 심지어 예수님을 향하여서 호산나 찬송을 불렀던 군중들과는 반대로 한 여인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소위 이것을 성경은 marginal people, 즉 변방의 사람들에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역사들을 보게 됩니다. 이런 이야기를 잘 표현해 주는 곳이 고린도전서에 있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에 갖지 못한 자들을 들어서 가진 자들을 부끄럽게 하고 바보같은 자들을 들어서 지혜로운 사람들을 어리석게 하는 것처럼 항상 하나님의 일들은 변방의 사람들 즉 중간에 끼어있는 사람들, 대부분의 많은 경우에 있어서 무명의 사람들, 이름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들을 통하여서 하나님께서 일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것인가를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거지만이 자기가 불쌍히 여김을 받는다는 사실에 대해서 감사하고 자기 속에 충만히 채워진 사람들은 한번도 감사가 무엇인지를 알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감사라는 것은 어찌보면 상대방이 일방적으로 기억할 수 있는 은혜에 대한 반응이 감사입니다. 결국 감사할 수 있다는 것은 내가 도저히 구원받거나 은혜를 받을 자격이 아닌 사람에게 주어질 때에 감사한 사실을 알게 됩니다.
요한복음 12장의 사건은 매우 상징적인 이야기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위에서부터 아래로 내려오셔서 다시 하나님 앞에 돌아갈 때에 되었는데, 이 죽음의 마지막 길목에서 마리아가 예수님을 만나게 되는 사건입니다. 그것이 전반부의 표징의 맨 마지막 이야기입니다. 마리아가 예수님께 향유를 붓는 사건이 마가복음 14장에도 나오는데 마가복음의 향유를 부은 사건은 요한복음의 사건을 비교해 보면 약간 다르게 나타납니다. 마가복음 14장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에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붓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기 전에 예수님의 발에 붓습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입성 전에 이미 왕으로서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의미의 이야기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향유를 붓는다는 것은 구약에 있어서 왕으로 세움 받을 때에 행하는 의식입니다.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는 말은 '기름부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지도자로, 왕으로 세움을 입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입성 전에 이미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고 이제 예루살렘으로 들어갑니다.
그런데 이 왕이 되는 일은 예수님께서 이 향유를 자기의 발에 부어서 씻는 사건을 죽음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예수님의 죽는 일과 왕이 되는 일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이 요한복음의 가르침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반복해서 본 것처럼 요한복음에 있어서는 예수님이 영광스럽게 되는 일과 예수님의 비참하게 죽는 일은 항상 같이 간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죽음과 고난 자체가 예수님의 영화로운 모습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복음서에서는 이 두 가지 이야기를 구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고난받으시고 죽으신 다음에 예수님께서 영화롭게 되었다고 이야기하지만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이 죽으심, 예수님의 고난 자체가 예수님의 영광스러움의 표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반복적으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내가 들리리니 …'라고 요한복음에서는 이야기합니다. 이 '들린다'는 말은 이중적인 의미입니다. 첫째로는 십자가에 못 박혀서 들린다는 뜻입니다. 내가 들리리니 그러면 많은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많은 사람을 이끌겠다고 하는 뜻이 무엇입니까? 마치 왕이 제국의 식민들을 하나로 묶는 것처럼 내가 십자가에 등극하므로 비로소 새로운 왕권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의 아주 독특한 가르침입니다. 여러분이 구약성경 가운데에 특별히 이사야서를 보면 이사야서 안에는 네 편의 소위 야웨의 고난받는 종의 노래가 있습니다. 이사야서의 후반부에 보면 야웨의 종의 노래가 네 편이 있는데 맨 마지막편이 이사야서 53장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사야서 53장을 가만히 보게되면 한가지 독특한 가르침이 있습니다. 고대의 문서를 보면 위대한 황제의 후예, 혹은 황제의 종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종이라는 말은 나쁜 의미가 아니라 좋은 의미입니다. 그 종이라는 칭호는 높은 뜻이지 결코 낮은 칭호가 아닙니다. 즉 왕과 같이 일을 하는 동역자, assistant, 혹은 보조자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고대 근동지방에서 나온 모든 문서를 보면 이 '종'이란 말은 항상 권위를 상징합니다. 그런데 이 단어가 구약성경에 들어오면서 구약성경에서 특별히 야웨의 종에 관한 노래를 하면서 어떤 종으로 표현하고 있습니까? 바로 고난받는 종, 괴로워하는 종으로 표현합니다. 대속이라고 하는 개념은 대신 다른 사람을 위해서 고난을 받는다는 의미입니다. 다른 사람 때문에 고난을 받는다는 개념은 고대근동지방의 그 어떤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사상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의 종이 고난을 받는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사상이었습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신약에 들어와서 고린도서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사도바울이 그 당시 많은 사람들에게 즉, 유대인들과 헬라인들에게 '내가 평생 전하는 것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혹은 십자가에 달리신 메시야'라고 할 때에 그 자체가 본질적으로 이해를 할 수 없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메시야가 고난을 받는다는 것,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는다는 것, 그리스도가 죽음을 당한다는 것은 고대 전통에 의하면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즉 위대한 황제의 신복 부하가 고난을 받고 죽는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황제는 고난 받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단어 '십자가에 달리신 메시아' 혹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라는 말 자체가 1세기에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헬라인들에게는 scandal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원래 scandal이라는 말은 '돌부리에 걸려서 넘어진다'는 뜻입니다. 즉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기 때문에 넘어지는 것들이 바로 scandal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이 단어는 그 의미가 많이 상실되었습니다. 이 단어가 최초에 사용되었을 그 당시에는 충격적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 헬라인들이 볼 때에는 메시야가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달리고, 죽는다는 것은 자기들의 사고방식, 전통들을 완전히 뒤엎는 일이기 때문에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대속'이라는 말은 있을 수 없는 scandal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scandal의 가장 큰 사건은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서 고난을 당하고 죽음을 당하였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복음이라는 것이 파격성이라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바로 그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지만 그 하나님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죽음으로 끝나는 하나님이라고 한다면 신뢰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노동자가 1년을 벌어야 살 수 있는 이 비싼 향유를 공공장소에서 그것도 여자의 신분으로 예수님의 발에 붓고 또한 머리털로 닦아낸 이 사실은 매우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 이야기를 썼을까요? 이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의 제자, 남자가 창피를 당하고 있습니다. 고대에 있어서 어린 아이를 들어서 어른을 부끄럽게 하는 것, 여자를 들어서 남자를 부끄럽게 하는 것, 변방에 있는 사람들을 들어서 기득권층에 있는 사람들을 공격할 뿐만 아니라 그들로 하여금 회개케 하는 것은 복음의 일입니다. 왜냐하면 자기의 양손에 있는 것들을 놓기 전까지는 하나님의 은혜와 은총이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위대한 겸손, 위대한 헌신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요한복음을 쓰면서 예수님께서는 이 이야기를 어떻게 해석하고 있습니까? 바로 구원론적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즉 그녀의 행위가 예수를 장사지내기 위한 준비적인 단계로서 향유를 부은 것으로 이해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유다는 메시야가 죽게 된다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에게는 scandal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고린도서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바로 그 이야기 그대로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메시야가 유대인들에게는 어리석고 헬라인들에게는 바보같이 들리지만 그러나 우리는 이 미련한 것을 전파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메시야의 죽음을 위해서 엄청난 가치의 향유를 쓴다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여기에서 부각시키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제자들의 오해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에 대해서 지속적으로 오해하고 있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리아가 쏟아 부은 향유는 분명 엄청난 낭비입니다. 그러나 마리아의 행동은 예수님의 죽음 자체가 얼마나 귀중하고 얼마나 값진 사건인가를 부인하는 사람들에 대한 역설적인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 예수님의 고난받으심이 단순히 삼백 데나리온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다 바쳐도 다시 살 수 없는 값진 선물이고 귀중한 선물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오해에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와 인류를 위해서 예수님의 대속적인 죽으심 자체는 그 어느 것으로도 값으로 환산할 수 없을만큼 고귀하다는 것을 제자가 인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래서 교회가 혹은 신앙이 단순히 일반 윤리적으로 타락하거나 윤리적으로 전락한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단순히 윤리를 배우러 오는 곳이 아닙니다. 그런데 교회 안의 대부분 많은 이야기들은 윤리적, 도덕적인 이야기를 합니다.
좋은 의도든지 아니면 나쁜 의도에서든지 유다는 그랬습니다. 향유를 팔아서 많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어야 한다는 유대의 생각은 아주 좋은 생각일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 자체가, 우리가 예수님과 관계를 맺고 예수님과 합하여 죽고 예수님과 합하여 산다고 한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으심이야말로 이 세상의 천하를 주고도 살 수 없는 가장 고귀한 사실들을 인식해야 하는데, 이것을 인식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고 부인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신앙생활은 윤리적인 종교로 전락하고 만다는 것입니다. 윤리적인 종교 혹은 문화적인 종교로 전락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즉 nice people들만 모여서 마음속에 기쁨과 즐거움이 있고, 그것은 끼리끼리 노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또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예수님께서 자기의 장례를 위해서 부은 것은 예수님은 단회적인 죽음(8절)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어마어마한 향유를 쏟아 부은 것은 잘한 일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해석하시기를 '나의 죽음이 이 세상의 그 어느 것으로도 살 수 없는 가장 고귀한 것이라는 인식하는 행위가 나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유다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지 아니하겠느냐?고 이야기 할 때에, 그 말이 좋은 의미라고 할지라도 이 경우는 맞는 말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대답이 8절 말씀입니다. 이 말은 자선을 하고 구제를 베푼다는 미명아래 정작 믿어야 할 예수가 누구인지를 알지 못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우선권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예수님이 어떤 분이시고, 왜 그분이 우리에게 오셨고, 그분이 우리를 위해 대속적인 죽음을 당하셨고, 우리가 그분을 믿지 않으면 안되는가?하는 가장 본질적인 문제가 되어야 합니다. 그 이야기가 교회 안에 들려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복음이 기술되고 복음이 전파되는 곳이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경우에 교회에서 복음이 들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좋은 교회라고 할지라도 복음은 들려지지 않고 외적인 일들, 제 2차적인 일들, 교회에서 사회사업을 하고, 복지사업을 하고 교인들의 후생을 위해서 하는 사업들이 우선적으로 행해지고 있다는 것은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하는 일들입니다.
목사가 된다는 것은 1차적으로 좋은 소식의 전령자입니다. 다른 곳에서, 어느 곳에서 들을 수 없는 이야기, 하나님의 현란한 소식, 하나님의 찬란한 소식,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서만이 진정한 구원이 있다는 사실들을 선포하기 위해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 사역자라고 한다면 그것이 우선적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에서 하는 모든 일들이 가장 중요한 본질적인 우선권을 앞서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님께서 신약 공동체에게 이러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또 한가지입니다. 마리아의 값비싼 헌신 자체가 예배의 행위라든가, 종교 시설물에 대한 지나친 호사스러움을 정당화를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것에 대한 헌신을 마치 하나님에 대한 헌신으로 잘못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런 것이 있으면, 가난한 사람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강력한 신앙적인 실천을 요구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항상 있다고 한다면 그들을 누가 돌보아야 하겠습니까? 교회에서 돌보아야 합니다. 따라서 이 priority가 분명하고 여기에서는 가난한 자들을 돌아보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에게 상당한 책임을 지워주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8절의 말씀은 신명기 15장 7절∼11절에 나와있는 말씀입니다.
신명기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직전 모압 평지에서 선포되었습니다.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의 유랑은 상당부분을 지금 이 요르단 지역인 모압평지 지역에서 했는데 바로 이 모압평지에서 여리고 쪽 계곡을 보면서 설교를 했던 부분이 바로 신명기 부분입니다.

7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땅 어느 성읍에서든지 가난한 형제가 너와 함께 거하거든 그 가난한 형제에게 네 마음을 강퍅히 하지 말며 네 손을 움켜 쥐지 말고 8반드시 네 손을 그에게 펴서 그 요구하는 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 주라 9삼가 너는 마음에 악념을 품지 말라 곧 이르기를 제 칠년 면제년이 가까왔다 하고 네 궁핍한 형제에게 악한 눈을 들고 아무것도 주지 아니하면 그가 너를 여호와께 호소하리니 네가 죄를 얻을 것이라 10너는 반드시 그에게 구제할 것이요 구제할 때에는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 것이니라 이로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범사와 네 손으로 하는 바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11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는 고로 내가 네게 명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경내 네 형제의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

7년마다 면죄되는 풍습이 있습니다. 그러면 6년째가 되면 땅을 소유한 사람은 1년 후에는 손해를 보게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그러한 생각을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주변에 어렵고 가난한 사람들이 항상 있다는 것은 우리의 신앙상태를 점검하는 마치 리트머트 용지와 같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형태를, 건강상태를 점검할 수 있는 점검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무엇입니까? 우리 주위에 가난한 자,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하는 자가 있다는 사실 자체는 여러분의 양심은 항상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하나의 표시라는 것입니다.


☞ 별첨 2. 옛적 말씀에 닻을 내리고 23장 참고

네 손을 활짝 펴라
류호준 목사 설교문


7주 너희의 하나님이 너희에게 주시는 땅의 어느 한 성읍 가운데서 가난한 친족이 살고 있거든, 너희는 그를 인색한 마음으로 대하지 말아라. 그 가난한 친족에게 베풀지 않으려고 너희의 손을 움켜 쥐지 말아라. 8반드시 너희의 손을 그에게 펴서, 그가 필요한 만큼 넉넉하게 꾸어 주어라. 9너희는 삼가서 마음에 악한 생각을 품지 말아라. 빚을 면제하여 주는 해인 일곱째 해가 가까이 왔다고 해서, 인색한 마음으로 가난한 친족을 냉대하며, 아무것도 꾸어 주지 않아서는 안 된다. 그가 너희를 걸어 주께 호소하면 너희가 죄인이 될 것이다. 10너희는 반드시 그에게 꾸어 주고, 줄 때에는 아깝다는 생각을 하지 말아라. 그러면 주 너희의 하나님이 너희가 하는 모든 일과 너희가 손을 대는 모든 일에 복을 내려 주실 것이다. 11너희는 반드시 손을 뻗어, 너희의 땅에서 사는 가난하고 궁핍한 친족을 도와 주어라. 그렇다고 하여 너희가 사는 땅에서 가난한 사람이 없어지지는 않겠지만, 이것은 내가 너희에게 내리는 명령이다.

(신명기 15:7-11. 표준 새번역)

이 세상에는 약 60억에 달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놀랍게도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기근과 배고픔, 영양실조, 가난 등을 이 세상을 불행하게 살다가 죽어가고 있습니다. 최근의 통계에 의하면 전 세계 인구 중 8억 이상이 절대적 빈곤가 가난 속에 살고, 그 중 5억 이상의 사람들이 굶어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일어나고, 허기진 배를 움켜잡고 잠에 듭니다. 기근과 가난 가운데서 태어나서 배고픔 속에서 죽어만 갑니다. 먹을 것이 없어, 잠잘 곳이 없어, 영양실조로 인해서 이 세상을 고통 속에서 살다가 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침에 떠오르는 태양은 목마름과 갈증만을 더해주는 저주의 태양일 뿐, 스포츠를 즐기기 위한 아름다운 태양일 수가 없으며, 저녁에 떠오르는 달은 죽음의 그림자를 몰고 와서 영양실졸 넋을 잃은 어린아이를 덮는 유령의 빛일 뿐, 낭만과 시를 읊어내는 아름다운 달빛일 수 없습니다.

굶주림은 전 세계적인 현상입니다. 배고픔의 괴로움은 가장 인간적인 고통입니다. 한 됫박의 쌀로 죽을 쑤어 먹어본 경험이 있습니까? 창자가 끊어져 나가는 고통은, 배고픔과 가난은 결국 한 인간을 인간답지 못하게, 비참하게 만드는 원초적 경험입니다.
가득 쌓여있는 슈퍼마켓의 식품들, 그곳에 자주 가는 우리로서는, 그리고 식료품 카트(grocery cart)에 가득 채워 넘치도록 소비하는데 습관된 우리로서는 이 세상에 굶어서 죽어가고 있는, 한 끼의 양식과 하룻밤의 잠자리가 없는 가난한 자들이 있다는 사실이 까마득한 태고적 이야기처럼 들릴 것입니다. 더 좋은 집, 더 좋은 차, 더 좋은 옷, 더 좋은 식당의 음식, 더 좋고 편리한 부엌 살림 등에 깊은 관심을 가지는 우리로서는 하루 한끼의 음식마저 끼니를 채우지 못한다는 사실이 소설 속의 이야기처럼 들릴지도 모릅니다. 배고픔은 책상에서 학자들이 논의하는 단어가 아니라 수억의 사람들이 매일매일 직면하는 고통 그 자체입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기름기가 흐르는 음식을 먹는 동안, 지구의 저 한쪽에서는, 아니 우리의 가까운 이웃에서는 쓰레기통을 뒤지면서 목숨을 연명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의식해 본 일이 있나요?
·강아지와 고양이 새끼들을 위해 깡통음식(can-food)을 사고있는 동안, 그러한 '더러운' 음식마저 없어 삶을 원망하고 고통하는 사람들의 눈물들을 보았나요?
·아들, 딸들과 즐겁게 TV 앞에서 희희낙락하는 동안, 보살펴 줄 사람없이 거리를 방황하고 있는 늙은 노인들의 고독과 외로움을 눈여겨본 일이 있나요?
·사치와 욕정을 채우기 위해 과도한 돈을 쓰면서도 바로 그렇게 쓰는 것이 가난한 사람들의 목구멍을 졸라매고 있는 엄청난 강도의 행위인 것을 생각해 본 일이 있나요?
·먹다 남아 쓰레기통으로 흘러 들어가는 수만 톤의 기름진 음식들과 피골이 상접해 죽음을 기다리는 배고픈 사람들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요?

부대자루를 등에 걸치고, 상자조각을 잘라 잠자리를 만들며 사는 '집 없는 사람들(homeless people)에게 이 세상은 거룩한 악마들로 가득차 있는 곳으로 생각될 것입니다.

우리는 다음주 추수 감사절을 축하하고 즐기기 전에 오늘 우리의 삶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가난한 자들은 아마도 홍수, 한발, 가뭄, 지진, 태풍 등과 같은 천재 지변이나 실직, 이혼 등으로 말미암아 그렇게 된 희생물들이리라. 그러나 사실상 그들의 가난과 배고픔은 식량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가진 자의 부의 분배와 그것의 사용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들의 가난과 배고픔은 무관심과 무정한 마음의 희생물들이며, 불친절과 이기주의의 희생물들이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인도 캘커타의 성녀 테레사 수녀는 세계적 기근과 가난에 관해서 "오늘날 만연되고 있는 가장 큰 인류의 질병은 문둥병, 폐결핵이 아니라 소외감, 무정한 마음, 버림받았다는 느낌입니다. 가장 큰 죄악은 바로 사랑과 애정의 결핍입니다. 착취, 부패, 빈곤, 병으로 길거리에 나동그라져 쓰러져 있는 이웃들에 대한 무관심이 바로 큰 죄악입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이 세상 땅에는 항상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않을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가난한 자가 필연적으로 있게 될 것이라는 운명론적 선언이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이 말씀은 가난한 자가 있다는 것이 부자나 가진 자의 이기심을 점검하는 검문소(check point)역할을 한다는 경고인 것입니다. 사람은 공동적으로 살도록, 그리고 서로 의존하며 살도록 지음 받았습니다. '상호 의존'은 '권리'보다 더욱 고귀한 도덕적 가치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권고하십니다; "가난한 형제가 너희 중에 있으면 지나치지 말고 반드시 그를 보살펴야 하리라." 사람의 목숨보다 더 중하고 귀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사람을 위해서라면, 그리고 그것이 사람의 생명과 관계된 것이라면 기꺼이 물질을 사용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자비를 베풀기를 요구하신 이면에는, 그들로 하여금 그 자신들의 비참하고 불행했던 과거를 기억하도록 하심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출애굽 사건을 기억하게 하십니다; "압제와 착취의 노예생활로 인하여 가난하고 빈곤했던 애굽의 시절을 기억해 보라. 너희의 형편이 얼마나 비천하였는가?"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이방의 나그네를 압제하거나 무시하지 말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한때 나그네이었음이니라'(출 22:21-24).

약한 자, 가난한 자를 위한 하나님의 특별하신 관심과 보호는 다음과 같은 규정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너희는 너의 땅에서 농작물을 추수할 때 그 밭 모퉁이 구석까지 다 거두지 말고 너의 떨어진 이삭도 줍지말라 또 너의 포도원의 포도를 딸 때 다 따지말라, 또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타국인을 위하여 버려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야웨니라"(레 19:5-10).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은총의 아름다움이요, 자비의 음성입니다. 무정하지 않은 하나님의 긍휼, 부드러운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의 마음과 손을 열도록 권고하시는 것입니다.

어느 성읍에서든지 가난한 형제가 너와 함께 거하거든 그 가난한 형제에게 네 마음을 강퍅하게 하지 말고, 네 손을 움켜쥐지 말라(7절)

'손을 열라', '손을 펴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회화적 권고는 한 인간을 진정으로 인간답게 하는 열쇠입니다. '열려진 손', '펼쳐진 손', '벌려진 손'은 우정과 따스함, 사랑과 돌봄, 추위를 녹이며 배고픔을 채우며 쉴곳을 제공하는 모습입니다.
'열려진 손'은 '받아들여짐'의 위대한 상징이요 표상입니다. 배고픔과 허기, 외로움과 소외, 반감과 분노 등으로 뭉쳐진 한 병든 영혼을 여러분은 기억하시 것입니다. 그는 기근이 쓸고 간 이국 땅에서 돼지를 침 허기진 배를 채우고 있었던 우리의 '탕자'입니다. 누가 그의 배고픔을 채울 수 있었는가요? 그것은 자비로운 돼지농장 주인이 아니었습니다. 탕자의 진정한 배고픔을 채워주었던 분은 다름 아닌 그의 아버지였습니다.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들이 오는 것을 보고 먼저 달려가 그를 향해 두 팔을 벌리신 '그 아버지'를 기억하시나요? 그 펼쳐진 양손은 마음의 안식처요 영혼의 쉼터였으며, 주린 배를 채우는 흡족함 그 자체였던 것입니다.

'벌려진 손' 안에서 가난한 자와 부자가 만납니다. '열려진 손'은 가난한 자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완전히 받아들인다는 표시입니다. 우리가 쥐엄 열매를 먹고 지낼 때 우리를 반기셨던 그 하나님을 생각해 보십시오. 아직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 먼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그 양손을 활짝 펴신 그분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구원이 무엇인지, 새 생명이 무엇인지, 사랑이 무엇인지를 어렴풋하게나마 보게 되는 것입니다.

펼쳐진 손! 그것은 애정과 사랑, 관심과 돌봄, 그리고 무정하지 않은 마음의 표시입니다. 가진 자의 손은 갖지 못한 자를 돕기 위해 열려야 합니다. 굶주림 가운데 있는 자는 바로 우리의 식구들인 것입니다. 펼친 손은 인간사회의 형제애를 확인하는 표상입니다.

어렸을 적 자주 들었던 한 예화가 있습니다. 천국과 지옥의 차이점을 풍자적으로 묘사함 예화입니다. 어떤 사람이 천국과 지옥을 방문했습니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놀랍게도 동일한 환경과 조건 속에서 살았다고 합니다. 한가지 독특한 현상은 모든 사람들의 팔이 꼿꼿해서 구부릴 수 없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 외에는 천국이나 지옥이나 모든 것이 동일하였습니다. 천국이라고 해서 지옥보다 더 낳은 환경이 아니었고, 그렇다고 지옥이라고 해서 천국보다 못한 것도 아니었답니다. 그러나 천국과 지옥의 근본적인 차이점은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얼굴 모습에서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지옥의 사람들은 한결같이 몰골이 흉측하였고 파리한 얼굴을 가지고 있는 반면에, 천국에 사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화색이 돌고 윤기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방문자는 이 비밀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고민하던 끝에 결국 그들의 식당에 가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천국의 주빈들은 두 손을 펴서 서로를 먹여주었지만 지옥의 사람들은 두 손을 움켜잡고 자신의 입으로 음식을 집어넣으려다 번번이 실패하게 되어 결국 영양실조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펼쳐진 손은 한 개인의 자선을 상징하는 것이 아닙니다. 한 공동체를 특징지우는 모습입니다. '받아들이고', '주는' 모습입니다 이 열려진 손은 정의(正義, Justice)의 핵심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열려진 손'이란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기꺼이 가난한 자와 나누려는 징표(sign)이기 때문입니다.
'단순한 삶의 방식'(simple lifestyle)을 향하여 가야 합니다. 우리들의 먹는 습관을 바꾸어야 합니다. 명문 음식점이라고 불리는 곳들을 순례하듯이 전국 방방곡곡을 찾아다니면서 음식을 즐기는 일들은 적어도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한번쯤 생각해 볼 수가 있어야 합니다. 한국의 국토가 마치 전(全) 국토 음식점화의 일환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현실에 대해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적지 않은 책임과 수치를 느껴야 할 것입니다. 미국에서의 육류소비는 가난한 나라 사람의 4배 이상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이 육체가 필요로 하는 그 이상의 고단백을 섭취한다고 합니다. 소고기도 부드러운 고기 맛을 찾다보니 한 파운드(pound)의 부드러운 부위(tender beef)를 얻기 위해 수십 파운드의 곡물을 그 소가 먹어 치웁니다. 많은 사람들이 매우 놀랍게 생각하겠지만, 미국은 소고기를 수출하는 나라가 아니라 소고기를 수입하는 나라입니다. 그리스도인들로서 우리는 감사함으로 음식을 떼며 가족으로서 또한 개인으로서 과식하지 않을 책임이 하나님 앞에 있는 것입니다.
입는 습관도 바꾸어야 합니다. 단순히 유행에 따라, 스타일 따라서 살기 위하여 새 물건들을 구입하는 것을 용감하게 거절할 수 있는 능력도 개발해야 할 것입니다. 옷을 살 때에도 마치 하나님 앞에서 사듯해야 할 것입니다. 현대 대중 광고는 우리의 단순한 삶의 방식(simple lifestyle)을 가로막는 장벽입니다. 만일 당신이 사람이 무엇을 입었는가에 따라 사람을 평가하는 사고 방식을 가지고 있다면 당신은 진정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없습니다. 신앙은 단순히 교회와 주일의 예배로만 환원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부활신앙을 지니고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근본적으로 이 세상이 가져다 주는 가치관으로부터 해방된 사람들입니다.
그가 살고 있는 주택의 크기에 관심이 많은 사람, 그가 타고 다니는 차의 모델과 배기량에 신경을 쓰는 사람, 양손에 움켜잡은 것이 있어야 평안한 마음으로 침대에 들어가는 사람, 이런 종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않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본문에서 '손을 펴라'는 권고를 반복적으로 하시는 지에 관해 다시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7, 11절). 그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그대로 반영해 주는 표상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게실 때 그의 손은 항상 약한 자, 그늘진 곳을 향하여 펴시고 계셨습니다. 거리의 여인들, 세리들, 눈먼 자들, 귀머거리들, 문둥병자들, 혈우병 환자들은 그분의 영원한 친구들이었습니다. 그의 손은 한번도 닫혀진 일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마지막 십자가에서도 그러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멈춘 것은 아니었습니다. 부활 후 승천하실 때 그는 양손을 활짝 펴서 이 땅의 그의 제자들을 축복하셨습니다. 손을 펴는 행위는 이처럼 복을 비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비로소 세상은 그의 품안에 안기게 될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은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갑작스럽게 몰아친 삶의 격랑 속에서 가게를 책임져야 하는 우리의 소년 소녀 가장들, 양로원에서 사람을 그리워하는 무의탁 노인들, 사람들의 저주의 눈길과 알량한 동정심에 우는 정신 박약아들, 실직하여 두려움과 혼란 속에서 초점 잃은 눈으로 자녀와 아내를 바라다보는 중년의 쓸쓸한 아버지들, 치료할 돈이 없어 병든 육체를 노동의 현장에 내어던진 사람들, 부자 동네의 쓰레기 더미를 뒤집고 다니는 어린 소년들, 이들 모두는 우리들의 이웃입니다. 그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쓰라리고 눈물이 돕니다. 강도 만나 신음하며 도움의 손길을 요청하던 사람에게 종교적 이유로, 경제적 이유로, 사회 신분적 이유로 무관심하고 지나쳤던 그 사람이 바로 우리가 아닌지?

추수 감사절, 교회 앞 강단에 수북히 쌓인 풍성한 과일더미와 두툼한 헌금봉투들은 도대체 누구를 위하여 있는 것일까? 목회자들이 그들의 근엄한 목사가운을 벗고, 장로들의 주문적 기도문을 포기하고, 교인들의 무감각한 습관을 고치기 전까지는 진정으로 교회 공동체는 열린 교회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손이 닿는 '우리 경내 우리 형제의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우리들의 손을 활짝 펴기를' 원하십니다(11절). '손을 움켜쥐지 말고 반드시 가난한 형제 자매에게 펴야 할 것입니다'(7절).

필리핀의 한 작은 섬에서 가난한 자를 위한 선교사역에 종사하고 계시는 한 무명의 선교사님의 기도문입니다.

·나는 배가 고팠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세계를 여행했습니다.
·나는 배가 고팠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내가 무식해서 가난하다고 비난했습니다.
·나는 배가 고팠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너는 과학적이지 못해서 그렇다고 비난했습니다.
·나는 배가 고팠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내가 게을렀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나는 배가 고팠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나한테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나는 배가 고팠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평화에 관해 연설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배가 고팠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배가 고파서는 안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나는 배가 고팠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호텔들과 대형 회의장을 짓고 있었습니다.
·나는 배가 고팠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세금을 올렸습니다.
·나는 배가 고팠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이 세상에는 항상 가난한 자가 있는 법이지'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배가 고팠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핵발전소를 지었습니다.
·나는 배가 고팠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외국에다 투자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배가 고팠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다이아몬드 반지를 샀습니다.
·나는 배가 고팠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내가 대항한다고 했습니다.

'너희는 이 작은 자에게 냉수 한 그릇을 주는 것을 내가 결단코 잊지 않겠다'는 예수님! 그렇습니다! 우리는 좀더 단순하고 소박하게 살아야 할 의무와 책임이 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가난한 자들을 단순히 생존이라도 할 수 있게 해야 할 것입니다(We must live more simply, so that the poor may simply live). 양손을 활짝 펴 보십시오.


 

제13강 메시야가 종이 된다고? (13:1∼20)

 

요한복음 13장에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는 관한 이야기와 예수님께서 자기를 배반할 자를 미리 말씀하시는 내용 그리고 사랑의 계명에 대해서 말씀을 합니다. 그 다음에 14∼16장이 유명한 세 개의 고별강론, 즉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던 세 편의 고별강론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설교를 마치고 난 후에 17장에 유명한 대제사장의 중보기도문이 나옵니다. 그리고 18장에서는 체포를 당하시고, 산헤드린 공회원들 앞에서 고난을 받으시고 또 믿었던 베드로가 부인을 하게되고 빌라도 앞에서 재판을 받게 되고, 십자가에 처형을 당하고 장례에 이르게되는 일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게 됩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12장에서부터 시작되어 20장까지 고난과 영광이 함께 묶어져서 가게 됩니다. 그러면 베다니에서 향유를 부었다고 하는 것은 자연스럽게 예수님의 죽으심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또 12장의 승리의 예루살렘 입성은 이중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즉 백성들은 정치적인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해방시킬 것이라는 의미에서 호산나, 호산나를 부르며 맞아들였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측면에 있어서 승리라는 것은 그것이 아니라 죽으러 온 것입니다. 그래서 죽음 자체가 왕권을 회복하는 첫 번째 step이라는 의미에서 예루살렘의 승리의 입성은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이제 13장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일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입성을 하였을 때에 새로운 정치적인 공동체 즉, 하나님께서 친히 다스리는 정치적인 공동체를 만드시기 위하여서 오셨는데, 섬김과 사랑의 공동체를 예수님께서 미리 예견해 주시기 위해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는 사건을 묘사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도덕적으로 겸손하고 겸허해서 상대방을 사랑한다는 의미도 있겠지만 여기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약에서 말씀하시는 고난받는 여호와의 종으로서 자기의 사역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하나의 표징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고난받은 종으로 표현하는 성경구절이 이사야서에 네 편이 나오는데 첫 번째는 이사야 42장 1절부터 나옵니다.
1절.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신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공의를 베풀리라

말씀하시는 분은 분명히 하나님입니다. 42장은 벌써 1절에서 보면 여러분이 예수님께서 세례(침례)를 받으실 때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이는 내 사랑하는 자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말씀처럼 공관복음서의 저자들이 예수님을 표현함에 있어서 철저하게 구약의 이사야서 전승에 큰 영향을 받고 그러한 것들을 의도적으로 쓰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나의 신을 그에게 부었은 즉'은 예수님께서 세례(침례)를 받으시고 위로 올라오실 때에 '성령이 비둘기처럼'이라는 구절 자체도 나의 신을 그들에게 주었은 즉 마치 창세 때에 하나님의 영이 수면 위에 펄럭거리는 비둘기 모양으로 다시 말해서 새로운 시대를 여는, 새로운 창조를 가리키는 표징으로서 여호와의 신을 마치 비둘기처럼 단순히 겸손하다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를 알리는 전령 자로서 지금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을 통해서 지금 새로운 시대가 열리기 시작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 새로운 시대를 알리는 표징이 성령께서 그 위에 임하므로 그가 이방에 공의를 베풀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분명히 여기 '공의'라는 말은 정치적인 말입니다. 눌리고, 억압받고, 어려운 사람들에게 그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되돌려 주는 것이 '공의'라고 한다면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신정치적인 세계 즉 하나님께서 공의로 다스리는 세계, 모든 악들과 죄악들을 없애고 새로운 세계를 베풀어주신다는 것입니다.

3절.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리로 공의를 베풀 것이며
이것이 소위 신정치 즉 하나님에 의해서 다스려지는 세계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방식입니다. 군림하거나 행세하는 일도 아니고 오히려 상한갈대라든가 꺼져가는 등불을 추스르며 하나님께서 이 사람이 '진실함', '신실함' 가운데에서 정의롭고 공의를 베풀고 있다는 것입니다.

4절. 그는 쇠하지 아니하며 낙담하지 아니하고 세상에 공의를 세우기에 이르리니 섬들이 그 교훈을 앙망하리라
그가 당하게 될 고난, 박해, 저항을 염두해두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즉 온갖 종류의 박해들, 어려움들이 있어도 결코 흔들리지도 않고 낙심하지도 않고 일관되게 자기에게 맡겨준 사명을 끝까지 감당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고난'에 대한 암시가 있습니다. '섬들'이라는 말은 그 당시 이 지구의 저 끝에 있는 땅끝,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먼 곳에 있는 사람들까지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교훈'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토라'(hr;/T)라는 말인데, 그 안에서 진정한 희망과 미래를 바라볼 수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말하는 토라는 누구의 가르침입니까? 바로 야웨 하나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받아서 가르치는 이 '종'의 가르침입니다. 이 반복되어 나오는 '정의', '공의'라는 말은 사법적인 개념일 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개념입니다. 한 사회가 진정한 샬롬을 얻기 위해서는 정의롭고 공의로워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 '정의'와 '공의'는 어디에서부터 기인하고 있습니까? 바로 야웨의 토라에서부터 기인한다는 것입니다. 야웨의 토라, 야웨 하나님의 본성인 신실성에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일을 하기 위해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 곧 '종'입니다. 그래서 이 '종'이 일을 함에 있어서 수많은 어려움들과 난관에 부딪친다 할지라도 결코 무너지거나 낙심하거나 시들거나 떨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6절. 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이 '종'의 사역은 두 군데입니다. 하나는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7절. 네가 소경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처한 자를 간에서 나오게 하리라
이 사역은 해방과 구원을 말합니다. 구원과 해방을 가져다 주는 것이 정의로운 운동입니다. 그래서 본문에서도 정의와 공의는 구원과 해방 즉 진정한 삶을 살게하는 결정적인 도구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즉 정의와 공의는 샬롬을 이루기 위해서, 구원과 해방을 위해서 시행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샬롬을 가져다주는 도구가 바로 야웨의 토라(hr;/T)라는 것입니다. 야웨의 가르침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역할을 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첫 번째 자격 요건이 먼저 그가 야웨의 영이 그에게 부어져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원래 의도했던, 이 세상을 만드시고 지배하시고 다스리는 본래의 의도를 충분하게 아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종은 세상이 궁극적으로 샬롬을 이루는 것이 하나님의 의도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정의와 공의는 자연스럽게 일관성있게 베풀어질 때에만 정의와 공의가 이루어지지 케이스마다 바뀐다면 정의와 공의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정의와 공의를 시행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덕이 '진리'라고 번역된 '신실성'입니다. 아무리 박해가 오고, 아무리 위협이 와서 낙심할 정도가 된다 할지라도 굴하지 아니하고 일관되게 하나님의 정의로움과 하나님의 공의로움을 인식시킬 때에 비로소 찾아오는 것이 샬롬이고, 그것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렇다면 이 나라에 포함될 수 있는 사람은 여기에서 볼 때에 저 섬들까지라고 한다면 전 세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 가운데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43장을 보시겠습니다.

1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2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이것은 야웨의 종과 함께 가는 그의 제자들에게 주시는 확신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불'과 '물'가운데 즉, 심한 박해 혹은 어려움들, 낙심하게 하는 것들, 고난 가운데에 있을 지라도 견딜 수 있게 할 것이라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이사야 49장 2절 말씀은 언제라도 화살을 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준비시켰다는 의미이며 이사야 52장 13절 말씀에서는 분명히 왕위로 올라가는 장면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음 절에는
14이왕에는 그 얼굴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 모양이 인생보다 상하였으므로 무리가 그를 보고 놀랐거니와 15후에는 그가 열방을 놀랠 것이며 열왕은 그를 인하여 입을 봉하리니 이는 그들이 아직 전파되지 않은 것을 볼 것이요 아직 듣지 못한 것을 깨달을 것임이라 하시니라

라는 말씀을 하시면서 반전이 되는 모습을 그려주고 있습니다. '이왕'은 '전에는'이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15절에는 '이후에는'이라는 의미로서 전과 후를 나누고 있습니다. 14절의 '얼굴이 상하였다'는 말은 얼굴이 상했다는 말이 아니라 태어날 때에 완전히 일그러져서 보기에도 흉측할 정도로 된 것, 기형적인 표현입니다. 즉 일그러져서 그가 누구인지를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가 왕적인 존재인지를 전혀 찾아볼 수 없을 만큼 형편없이 일그러진 그런 모습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놀랜다는 것입니다. 15절의 표현은 너무 충격적인 내용들 곧 사람 측에도 들 수 없는 자들에게서 보통 사람들이 상상치도 못한 놀라운 말, 놀라운 내용들을 듣게 될 내용들입니다. 그리고 나오는 것이 53장에서 그러한 내용들이 나옵니다. 그러면 53장에서 그렇다면 전하는 것을 누가 믿었으며,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던가? 도저히 하나님의 팔, 하나님의 지혜가 나타날 수 없을 만한 그러한 인물에게 하나님께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상황을 scandal이라는 것입니다. 즉 야웨의 손이 정상적으로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했던 바로 그 사람이 아니라 도저히 하나님께서 그와 같이 아니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그 사람, 바로 이러한 것이 복음의 파격성, 복음의 충격성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왜냐하면 신약에 들어와서 예수님 당시에 대부분의 신학자들, 바리새인들, 서기관들, 율법사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은총, 구원의 손이 첫째로 이방인들이 아니라 유대인들에게 즉, 그들은 고정적인 자기들의 신학에 의해서 하나님이 어떻게 활동하시고 어떻게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주실 것에 대해서 미리 사전적인 지식을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구원의 팔, 여호와의 팔, 구원의 능력이 누구에게 나타난 것을 자기 나름대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뚜껑을 열어보니 전혀 아닌 사람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 하나님의 도우심이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믿을 수 없는 사건 곧 scandal이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그 scandal의 내용이 53장 2절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climax가 무엇이겠습니까? 결국은 도저히 하나님의 구원이 그를 통해서 이루어질 수 없는 바로 그분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사실들, 이것을 대부분의 전통적인 지도자들, 종교 지도자들은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요한복음 13장으로 돌아와서 예수님께서 지금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다는 것은 첫째로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구원사적으로는 엄청난 사건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누구인가를 보여주는 일입니다. 종으로서의 메시야, 이 메시야가 종이 되어야한다는 사실은 그들 생각에는 전무후무한 충격적인 일이었습니다. scandal입니다. 다시말해서 제자들의 신앙의 가장 기본적이고 근본적인 기초들이 흔들리고 있는 상태입니다. 어찌보면 신앙이라는 것은 본질적인 이러한 흔들림을 경험해 보지 못하고는 예수가 누구인지를 모를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신앙의 대부분이 관습, 인습, 전통, 이미 프로그램화된 상태에서 우리의 신앙을 계속 돌려가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충격적인 내용 중의 하나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를 대표로해서 베드로가 예수님의 발 닦는 일을 거절한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알고있는 신학에 의하면 이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발을 닦는다는 의미는 이러한 의미에서 고난 당하시고 죽으신 그분이 후에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 메시야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고난 당하는 종으로서 자기의 고난을 통하여서, 십자가를 통해서 만들어진 것이 새로운 공동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고난을 당하심으로 제자들에게 새로운 구원을 가져다 주고 그들에게 씻김을 가져다주고, 죄 용서함을 가져다주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지 아니하고서는 그리스도와 관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교회 공동체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상관이 없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난 당하는 예수 그리스도야 말로 새로운 공동체의 기초가 되시고, 새로운 공동체를 창시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러한 집단, 세계에 토라가 주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토라를 주신 것이 새계명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에 보면 예수님의 제2의 모세론으로 표현합니다. 첫 번째 모세가 이스라엘 공동체, 구원받은 공동체에게 십계명으로 대표되는 토라를 주심으로 그들에게 삶의 원리, 삶의 방식을 제시하신 것처럼, 새로운 언약공동체를 창시하신 예수 그리스도, 다시 말해서 자기의 고난을 통하여서 새로운 공동체를 만드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공동체를 위한 삶의 규범, 삶의 방식으로 그분의 토라 즉 새계명을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새로운 언약 공동체의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였고, 그리고 이 새로운 시대를 결정짓는 특징이 있다고 한다면 토라에 의해서 사는 것이고, 토라의 핵심이 있다고 한다면 사랑이라고 합니다.
근본적으로 사랑이란 개념은 구약에서부터 나왔는데, 사랑의 'bh'a''(아하브)라는 단어는 많은 경우에 '신실함' 혹은 '인애'(dseje, 헤세드)라는 단어와 같이 사용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예레미야 2장에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2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네 소년 때의 우의(dseje)와
네 결혼 때의 사랑(bh'a')

이 히브리 시(時)는 두 개가 평행을 이루는데 여기에서도 번역을 수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하나님께서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실 때에 하나님이 남편이 된다고 하면 이스라엘이나 유다 사람들은 여자 즉 신부가 됩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표현하고 있는 '소년'은 '소녀' 혹은 '처녀'라는 표현이 더 적절합니다. 즉 '네 처녀 때의 우의와 네 결혼 때의 사랑'이라는 말입니다.
'결혼 때'는 '약혼' 때를 말합니다. '약혼 때의 우의'라는 것입니다. '우의'라는 말과 '사랑'은 서로 평행을 이루고 있습니다. 즉 연애할 때에 잘못하면 배신하기 쉬울 때에 '배신하지 아니하고 신실하게'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즉 네 처녀 때에 아무리 누가 유혹을 하더라도 곁눈질하지 아니하고 일편단심 신실하게 나를 쫓았다는 의미로서 하나님께서 그런 말로 표현하신 것입니다. 네가 처녀 때에 다른 사람들이 유혹을 해도 변함이 없이 나만 좋아해서 사랑을 속삭였던 때를 '헤세드'(dseje)라고 하고 결혼해서도 사랑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랑과 우의라는 단어에 흐르는 것이 무엇입니까? 유혹과 박해와 좋지못한 환경 가운데에서도 마음을 바꾸지 않고 일편단심 절개를 지키면서 그를 따랐다는 의미입니다.
이것과 함께 예레미야 31장 3절을 보면
나 여호와가 옛적에 이스라엘에게 나타나 이르기를 내가 무궁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는 고로 인자함으로 너를 인도하였다 하였노라

여기의 '옛적에'라는 말은 '광야시절'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지금 유다가 몰락 직전에 있을 때에 너무나도 못된 짓을 하고 타락하고, 영적으로 간음한 이 사회를 보면서 탄식하며 광야시절, 아무도 없었을 때에 단 둘이 좋아서 재미있게 살았을 때를 떠올리고 있습니다.
여기에 '사랑'(bh'a',아하브)과 '인자''(dseje, 헤세드)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예레미야 2장에서 '신실함'의 주체는 '여자'입니다. 그러나 31장에서는 '신실함'의 주체는 하나님입니다. 즉 예레미야 2장에서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향해서, 31장에서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향해서 사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표현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사랑'이라는 것이 어디를 배경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까? 바로 '광야', '사막'이라는 것을 배경으로만 이해할 수 있는 단어가 '사랑'(bh'a',아하브)과 '인자''(dseje, 헤세드)입니다. 언제 우리가 사랑과 인자를 알 수가 있습니까? 어려움 가운데에 있을 때에, 박해 가운데에 있을 때에, 광야를 지날 때에 진정한 사랑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지금 발을 씻기신 후에 새계명을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발을 씻기셨다는 것이 구원사적으로 예수님께서 새로운 공동체에게 자기의 죽으심을 통해서, 자기의 고난을 통해서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어 놓으시고 그리고 그 안에 들어와서 사는 사람들에게 제2의 모세로서 새로운 토라(hr;/T)를 주시면서 사랑을 강조하셨는데, 그 사랑의 의미는 바로 광야시절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암시적인 것입니다. 요한복음 14-16장에는 고별설교가 나오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떠나게 되면 얼마나 어려운 환경이 있겠습니까? 바로 이러한 환경 가운데에서 이러한 사랑의 이야기를 하면 신실하게 이 어려움들을 극복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별설교에서 보혜사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됩니다. 즉 내가 너를 홀로있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의 고별강론을 Sketch해 가면서 보겠습니다.
14장이 첫 번째 고별강론입니다. 이 중에서 제일 먼저 말씀하시는 것이 "내 아버지 집에는 거할 곳이 많다"는 말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어 놓으시고 가실 때가 되니까 얼마나 마음적으로 불안하고 안타깝겠습니까? 그러한 관점에서 볼 때에 14-16장의 고별설교는 매우 passion 즉 매우 정열과 마음속에 깊은 emotion(정서)들이 깊이 깔려있는 내용들입니다. 요한복음서는 예수님의 마지막 일주일을 잘 표현해 주고 있는데, 소위 예루살렘의 한 다락방에서 제자들과 함께 만찬을 가지면서 설교를 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때에 제자들은 굉장히 불안해하고 있고, 더구나 13장의 베드로마저 나를 부인할 것이라고 이야기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위로의 말씀을 주시고 있습니다. 위로라는 말을 이해하려면 이사야 40장에 있는 말씀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1절에 'yMi[' Wmj}n" Wmj}n"'(나카모 나카모 암미)로 시작하는 말씀인데 "너희들은 내 백성을 위로하여라 위로하여라!"는 말씀입니다. "고역의 때가 다 끝났고, 형벌을 곱절이나 받았으니 이제는 출소를 할 때가 되었다"는 마치 천상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처럼, 징역살이했던 사람에게 출소할 때가 되었다는 좋은 소식을 전하라는 내용입니다. '위로'하라는 말이 단순히 마음적으로 와서 쓰다듬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시련의 때가 끝나고 네가 출소할 때가 되었으니 이것보다 더 좋은 소식이 어디에 있느냐?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반대로 걱정하지 말고 근심하지 말고 위로를 받으라는 말씀입니다. '믿는다'는 말은 단순히 감정적으로 믿는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안에 집중적으로 거하고 무슨 일이 있어도 변함이 없이 끝까지 눌러서 그것을 붙잡는 행위를 가리켜서 '믿는다'고 말을 합니다.
아버지의 집은 '천국'을 가리킬 수도 있을 것이고, 여기에 다시 '돌아오겠다'고 하는 말씀을 보면 '재림'을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분명히 천국에 가시고 또 다시 재림하실 것을 이야기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단순히 예수님께서 천국으로 떠나시고 그 다음에 나중에 한참 뒤에 그의 재림으로 오신다고 하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그 이유가 있습니다. 4절부터 예수님과 도마의 대화 속에서 나타납니다. 14장에서 가장 중요한 highpoint, keypoint는 6절입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거할 곳'이라고 하는 곳은 단순히 장소적인 어떤 지역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아버지가 계시는 곳'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을 가리켜서 '아버지가 계신 곳'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니까 '곳'이라는 것은 '장소'적인 측면보다는 '아버지와 함께 하는 것' 그것이 '아버지가 계신 곳'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예수님 안에 있다는 것이 마치 아버지의 집에 있는 것과 같다고 한다면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라고 하는 이야기는 자기가 지금 죽으러 간다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천국에 가서 방을 예비하러 가신다는 뜻이 아니라 자기가 십자가에서 죽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죽으신 후에는 반드시 믿는 자에게 돌아오시는데 육체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돌아오신다는 말씀을 14장 21절 이하에서 분명하게 밝혀주고 있습니다. 특별히 23절 말씀을 보면 '거처'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14장 1절에서 다시 오겠다는 것은 육체대로 다시 온다는 말보다도 예수님께서 먼저 십자가에 죽으러 가는 일이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는 일의 극치이기 때문에 그 일을 통해서 그 다음에는 내가 육체대로 신자들에게 오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내가 너희와 함께 하실 것이라는 새로운 성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말은 변치않고 하나님의 약속은 신실하여서 반드시 이룰 것이라는 하나님의 신실성에 자기의 신실함을 기대는 행위를 가리켜서 성경은 '믿음'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나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믿음직스럽고 하나님이 신실하다면 그분이 하신 말씀 자체도 신실하고 믿음직스럽고, 그 믿음직스럽고 신실한 말씀에 자기의 삶을, 자기의 모든 인생을 기대는 행위를 가리켜 '믿음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주관적인 행위 혹은 주관적인 감정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인 실체 즉 믿음의 실체이신 하나님 말씀 바로 그 신실성에 대해서 내가 기대는 것을 가리켜 믿음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기에 믿음은 단순히 믿는 사람의 주관적인 감정에 달려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23절에 "사람이 나를 사랑(bh'a', 아하브)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8장에서 '만일 너희가 내 말씀안에 거하면 산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 안에 산다는 것은 하나님과 함께 산다는 것이요 하나님과 함께 사는 곳이 '성전'입니다. '성전'이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신 곳에 함께 거하는 것 그것이 궁극적으로 성전입니다. 결국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님을 신뢰하고 예수님을 따랐던 제자들 자체들이 각 개인들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 하나님이 거하시는 장소,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라는 의미입니다. 이런식으로 해서 예수님과 예수님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은 신자들 안에 장막을 치시고 함께 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그분의 가르침 안에 거하면 예수가 있는 곳에 있는 것이며, 이미 아버지의 집에 살고 있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을 실현된 종말론 즉 미래가 이미 여기에 와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말입니다. 그래서 14장 1절에 말하고 있는 '거처'라는 것은 단순히 미래지향적이라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곧 내가 십자가에 달릴 것이고, 그리고 이 사건을 통해서 내가 준비하러 가는데, 왜냐하면 십자가의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인간과 하나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가운데에서 하늘과 땅이 만나는 역할이 예수님의 죽음입니다. 죽으로 가는 것이 곧 십자가에 달리는 것이요, 십자가에 달리는 것이 곧 왕권을 갖는 왕좌에 등극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비로소 하나님께서 천상의 영역에 거주하시는 그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내려와서 이 세상을 통일하게 되고 통일하는 증거가 바로 각 사람 안에서 하나님이 함께 거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통해서 근본적인 이 모든 세상이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이 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을 1장에서 나다나엘 사건을 통해서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내가 보았는데, 인자가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네가 앞으로 볼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사건입니다. 그러면 14장에서 가장 highpoint는 바로 6절과 23절이라는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진리'라는 말은 '거짓'의 반대되는 말로서 '비어있음', '허무', '공허', '진짜가 아닌 것'이 아니라 참 진짜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헛것, 비어있는 것에 자기의 삶에 기대고 잡으려고 하지만 비어있는 것 그것을 '우상'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전도서에서 많이 사용합니다. '헛되다' (lbeh}, 헤벨)는 말, 그것을 가리켜서 '우상'이라고 합니다. 다시말해서 잠시적이고, 잠정적이고, 순간적인 그래서 지속되는 의미를 갖지 못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가장 중요한 것이 삶에 대한 일관된 의미를 발견하면 살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지만 만약에 내가 사는데 있어서 일관된 의미를 발견하지 못한다고 한다면 허무하게 됩니다. 결국 이 세상에는 궁극적으로 오래 지속되는 것이 없습니다. 한계성이 있고, 제한성이 있고, 오래 지속되지 않고 그리고 기대었더니 넘어가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의 반대되는 개념이 '진리'(ajlhvqeia, 알레데이아)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만이 우리가 신뢰할 수가 있고, 기댈 수가 있고, 우리를 배신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에 있어서 일관된 의미를 주는 것 바로 그것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구약적인 표현입니다. '길'(&r,D,, 데렉)이라는 것은 '삶의 방식'입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방식들이 있지만 예수님의 방식을 제외하고서는 다 가짜라는 것입니다. 있는 듯해서 가보면 다 속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리'(tm,a,, 에메트) 인격적인 개념으로서 기댈만하고 신뢰할 만한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생명'(!yIj', 하임)은 진짜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보면 용서받고 용서하는 일들 다시 말해서 관계가 회복될 때에 우리는 비로소 우리가 산다는 것을 잘 알 수가 있다는 것처럼 여기에서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러 간다는 것, 이 죽는 일만이 내가 함께 사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생명에 관한 일입니다. '생명'(!yIj', 하임)이라는 말은 '건강체', '생명으로 가득찬 것', '생기'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언제 이런 말씀을 하십니까? 고별설교 가운데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이 말씀이 그들에게 진정한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위로라는 것이 바로 이런 가운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23절의 말씀이 이러한 내용입니다.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
그러므로 앞으로 어떠한 일이 일어나더라도 변개치 아니하고 지조를 가지고 아무리 어려운 시련이 오더라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사랑'이라는 말은 변함이 없이 신실하게. 그렇게 되면 내가 바로 그런 사람에게 와서 그와 함께 살겠다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27절에 보면 1절 말씀과 수미쌍관법을 이루고 있습니다. 27절의 가장 climax는 '평안'(!/lv;, 샬롬)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그 앞에 있는 26절의 말씀은 '보혜사 성령'에 관한 말씀을 하십니다. 이 성령을 보통 comforter(위로자), consultor(상담자)등으로 해석을 합니다. 하지만 문맥을 가만히 보면 예수님께서 떠나시고 믿음의 공동체만 남게 되는데, 그 공동체는 이제 막 걸음마를 하는 단계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사람들을 보호해 주어야 합니다. 이 말은 누군가가 박해를 하거나 시련을 주거나 애를 먹이거나 할 때에 스스로 자기를 방어하고 변호할 수 없는 사람에게 누군가가 울타리 역할을 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후에 '너희를 고아처럼 남겨두지 않는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면 '고아'라는 말은 구약성경에서 같이 나오는 단어들이 있습니다. '과부'와 '나그네'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생활에 늘 불안감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법적인 보호자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이러한 사람들의 남편이요, 아버지요, 법적인 보호자입니다.
즉 성령은 이런 의미에서 '대변자', '법적인 보호자'로서 곤란한 가운데에 있을 때에, 어려운 가운데에 있을 때에 도와달라고 간청을 하면 달려가서 도와주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법률고문' 혹은 '변호사', '대변자'의 의미입니다. 구약성경에서 이러한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긍휼과 관심을 지극히 표현하고 있는 구절이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보내시면서 성령의 역할들이 바로 그러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대변자'가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즉 이러한 일들을 충만하게 하실 때까지 우리로 하여금 성령의 사역과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은 아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은 제1차적인 사명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새로운 공동체에게 토라를 주셨고, 그 토라를 중심으로 해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에게 용기를 주시고 길을 보여주고 우리를 강하게 하고 튼튼하게 해서 이 모든 난관들과 어려움들을 극복하고 넘어갈 수 있도록 해 주시는 분이 바로 성령님이라는 사실입니다.


제14강 대제사장의 중보기도 (17:1∼26)

 

요한복음 14∼16장은 예수님의 고별설교 혹은 고별강론입니다. 예수님은 여기에서 사랑하는 자녀를 두고 먼 길을 떠나시는 분의 입장에서 그들의 안타까움을 그대로 방치할 수가 없어서 보혜사 성령을 보내 주시겠다는 약속을 하셨습니다. 보혜사는 단순히 우리의 마음을 위로해 주는, 개인적인 측면에서 우리를 쓰다듬어 주고 위로한다는 측면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기댈대가 없는, 법적으로 아무런 보호 대상이 될 수 없는 그들에 대하여서 가장 힘들 때 특별히 시련 혹은 법정에 세워졌을 때에 그리고 이 세상에서 아무도 그를 대변해 줄 수 없을 때에 성령께서 그들 마음속에 오셔서 그들을 변호해 주시고 또한 보호해 주시겠다는 매우 법정적인 의미라는 것을 잘 알 수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그들을 고아처럼 내버려두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는데, 이 '고아'라는 말 자체가 구약성경에서 잘 쓰여지는 문장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7장은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것 중에서 가장 긴 기도문입니다. 이 장을 가리켜서 대제사장의 기도문이라고 부릅니다. 제사장들의 두 가지 기능을 보면, 하나는 제사를 집전하는 일입니다. 그때에 드려졌던 제사는 지금의 예배와 유사한 부분이 있지만 많은 부분에서 다릅니다. 구약의 제사의 본질 가운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대속'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방종교의 제사와 성경에서 말하는 제사의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면 이방종교는 만족시켜주고 호의를 얻기 위해 드리는 제사를 말합니다. 즉 신의 마음속에 들게끔 하여서 신의 호의, 신의 친절, 신의 은혜를 얻어내고자 하는 행위로서 인간이 드리는 것이 바로 제사였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러한 개념을 아직도 갖고 있습니다. 제사라고 할 때에 우리가 교회에서 예배를 드릴 때에나 혹은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의 개념은 '내가 이러한 행위를 통하여서 하나님의 마음을 살수가 있고, 하나님의 마음에 기쁨을 가져다 주면서 나에게 호의를 베풀어 달라'는 측면이 아주 강하게 나타납니다. 이것이 바로 이방종교에서 하는 근본적인 제사의 원칙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제사의식을 제정하셨을 때에, 구약 성경에서 출애굽 한 후에 즉 애굽에서 나와서 광야에 살 때에, 심지어 애굽에서 나오기 직전에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가서 바로에게 내 백성을 가게 하라. Let my people go!"라고 말을 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고 "그리하면 그들이 여기에 와서 나를 경배하리라, 예배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히브리어 원문에 있는 의미는 "엎드려서 포복할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왕이 바뀌었다는 뜻입니다. 전에는 바로가 왕이었지만 이제는 하나님이 왕이라는 것입니다. 본질적으로 이스라엘이 된다는 뜻은 하나님의 백성 됨에 가장 본질적인 특징이 있다고 한다면 예배 공동체입니다. 야웨 하나님만이 우리의 절대적인 주인이라는 고백을 해야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분을 창조주로 알뿐만 아니라 구원자로도 알았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민족의 신앙사에서 가장 핵심되는 것이었습니다. 또 자기 자신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여기면서 하나님의 백성 됨의 본질이 바로 예배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단순히 정치적인 억압에서부터 해방되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서 우리는 더 이상 바로를 주님이 아니라 야웨 하나님을 우리의 주로 섬기겠다는 신앙고백입니다.
'섬긴다'는 말은 예배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종이 주인을 섬기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배라는 것은 우리가 입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을 우리의 임금, 우리의 주님, 우리의 지도자로 충성을 맹세하겠다는 신앙고백입니다. 이렇게 해서 생겨난 것이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입니다. 즉 처음부터 이스라엘이 된다는 것은 야웨 하나님과 언약관계에 들어갈 뿐만 아니라 그분을 창조주의 하나님으로 그리고 구원자의 하나님으로 받아들이겠다는 신앙고백의 행위가 예배행위의 중심입니다.
광야에서 하나님께서 언약을 체결하시고 언약 가운데에서 그들에게 율법을 주셨습니다. 약속과 언약을 맺은 후에 주신 규정들이 바로 율법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이라는 것은 애굽에서 나올 수 있는 조건이 아니라 애굽에서 나온 후에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아야 할 삶의 원리로서 주어진 것이 율법입니다. 그래서 율법의 원래의 의미가 '가르침'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은 입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발로하는 것이었습니다. '듣는다', '순종한다'는 말은 입으로 응답하는 것이 아니라 발로 응답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앙생활을 어느 정도 한 다음에 제자훈련 course를 밟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예수님께서 제자를 부르셨을 때에는 이미 제자의 길로 들어서는 것입니다. 제자훈련은 예수 믿은 후에 나중에 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의 주님으로 영접하고 받아들이고 난 후에는 바로 광야 40년 길을 걷는 것처럼 제자의 길을 걸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 광야 40년의 길을 걸으면서 그들이 홀로 걷지 않고 그들에게 방향을 제시하고 가르쳐주신 것이 바로 '교훈', '토라' 혹은 '율법'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출애굽한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제일 먼저 모세를 통해서 하신 일이 '성막'을 짓도록 하셨습니다. 출애굽기의 상당 부분이 성막을 짓는 모형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출애굽기를 보면 하나님께서 성막의 내용들, 내부들, 모든 부분들을 완벽하게 다 보여주셨습니다. 왜냐하면 성전이야말로 인간과 하나님이 만나는 장소였기 때문입니다. 마치 천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서 그분이 성전이라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처럼,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과 인간이 만나는 것처럼 구약에서도 성전을 보여주시고 그 안에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날 것이라는 약속을 하십니다. 이것이 아주 독특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제사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이방종교는 '호의'를 사고 은혜를 사고, 신을 만족시켜 주는 대신에 성경에서는 '대속'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만들어놓고 어떻게 신과 인간이 만날 수가 있습니까?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질적으로 영원한 차별이 있기 때문에 만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만날 수 있는 방편, 자리를 마련해 주신 곳이 '성전'이고 성전에서 가장 중요한 곳이 바로 '속죄소'입니다. 즉 인간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길들을 하나님께서 먼저 보여주셨다는 것입니다. 즉 위로부터 우리에게 보여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그 길을 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구약이나 신약이나 동일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세세하게 성전의 부분들을 보여주셨는지는 이러한 내용을 통하여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성전', '성막'이라고 불리우는 것은 하나님이 계시는 곳입니다. 또 하나님은 이 온 우주 가운데에 계십니다. 그래서 우주와 성소, 성막은 비슷합니다. 마치 성소안에서, 성막안에서 온갖 모든 사람들이 자기에게 맡겨준 일들을 완벽하게 하므로서 제사의 일들이 운영되는 것처럼 온 우주 자체도 각자 맡은 것이 있습니다. 비는 위에서부터 아래로 떨어지고, 때가 되면 눈이 내리고 바람이 불고, 하늘의 별들과 달이 뜨고 해가 있고 풀들이 있고, 세상에 있는 모든 자연 만물들이 각자 자기에게 주어진 역할들을 잘 감당하므로서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신성과 하나님의 높으심과 하나님의 긍휼을 노래하는 것처럼 성소 안에서도 분주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맡겨진 일들을 완벽하게 하므로서 제사를 준비하면서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권능을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이러한 하나님 앞에 갈 수가 없으므로 하나님께서 속죄의 제사제도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러므로 이방종교와 구약의 종교가 다른 것이 있다면 '대속'의 개념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제사장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사장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다리를 놓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대변할 수도 있고, 인간을 대변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중보'라고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이 정해놓은 제사장으로서 하늘과 땅을 연결하고 하나님과 인간을 연결해 줄 수 있는 유일한 기능이 제사장에게 주어진 놀라운 특권입니다. 원래 제사장들은 다리를 놓는 사람들입니다.
어느 신학자가 이야기하기를 "사탄의 사역과 성령의 사역을 차이는 담을 쌓느냐 아니면 다리를 놓느냐의 차이입니다. 사탄의 직업은 미장입니다. 그는 어느 곳을 가든지 담을 쌓는 일을 합니다. 그런데 성령은 bridge builder 즉 다리를 놓는 사람입니다!" 우리의 삶을 살펴보면 사탄의 후예인지 성령의 후예인지를 금방 알 수가 있습니다. 모든 상황이 다르더라도 하늘과 땅을 연결할 수가 있고, 동과 서를 연결할 수가 있고 모든 인간적인, 인위적으로 만든 장벽들을 허물고 만들 수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제사장의 역할입니다. 따라서 대제사장으로서 중요한 역할은 하늘과 땅, 인간과 하나님을 연결하는 역할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핵심, 연결 고리가 바로 '대속'이라고 불리우는 것입니다. 값을 지불하고 생명을 얻어서 전달해 주는 것, 그래서 제사의식 중에서 희생제사가 그렇게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제사장의 역할 중 두 번째는 토라를 가르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토라를 가르치는 일, 하나님의 뜻을 가르치는 일을 하는 사람이 제사장입니다. 이 일들을 제대로 못했기 때문에 나타난 사람들이 예언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언서를 보면 제사장에 대한 질타가 심하게 나타납니다. 대제사장의 역할을 제대로 해 주어야 하는데, 즉 대속을 중심으로 해서 하나님과 인간을 만나게 해 주어야 하는데, 이방종교의 영향을 받아서 뇌물을 가지고 하나님의 마음을 얻을까하는 생각하는 잘못된 신학 혹은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그렇게 행할 뿐만 아니라 그렇게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되면 백성들을 그것이 옳은가 하여 잘못 가르친대로 끌려가게 됩니다.
레위기 16장에 보면 '대 속죄일'이 나옵니다. 언약궤 속에는 모세의 싹난 지팡이와 십계명의 두 돌판 그리고 만나 항아리가 있습니다. 그것을 덮는 뚜껑은 덮개입니다. 그것이 독립적인 이름입니다. 'tr,PoK'''(카파르, 속죄소)의 이름이 '덮개'입니다. '속죄'의 의미가 원래 무엇이 있는데 덮어서 없는 것처럼 여긴다는 것입니다. 즉 죄인인데 우리를 의롭다고 쳐주어서 의인이 된 것입니다. 우리가 의를 쟁취했거나 획득한 것이 아니라 아직도 죄인인데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덮어서 의롭다고 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의 공로로, 예수님의 은혜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예수님께서 덮어주셨기 때문에 그 은혜로 우리가 의로운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 속죄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덮개'라는 것입니다. 그 부분을 가리켜서 다른 말로 '시은소'라고 부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고, 은혜를 베푸시고 우리가 은혜를 받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보면 굉장히 일방적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대제사장들이 제사를 집전한 후에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러므로 제사의 핵심, 예배의 핵심은 '신의 은총의 하사'입니다. 이것이 구약에서 나타나는 복음의 선포입니다. 이렇게 하므로서 당신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선포하는 행위입니다. 이것을 알면 왜 예언서 가운데에서 예언자들이 출애굽에 대하여 많이 이야기하고 있는가를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출애굽이야말로 강력한 하나님의 큰 손과 강력한 손과 편 팔로 그들을 구원해내서 마치 독수리의 날개로 그들을 업고 광야에서 인도해 내신 것처럼 그들이 해야 할 일은 아무것도 없었을 때에 그들을 구원해내신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의 행동이라고 한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한평생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고백하는 행위가 바로 예배의 행위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돌아가기 직전에 그냥 돌려보내지 아니하고 대제사장들이 손을 들어 축복기도를 해 줍니다.
구약성경의 가장 아름다운 축복기도문이 민수기 6장 24절부터 26절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마지막 27절에 보면 대 제사장들에게 축복기도를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그들 위에 놓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축도라는 것은 야웨 하나님의 이름을 백성들 위에 놓는 행위를 말합니다.

1행 / 24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2행 / 25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3행 / 26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lv;, 샬롬) 주시기를 원하노라

대 제사장의 축도문은 3행시로 되어있습니다. 제사장이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집으로 돌아가는 백성들에게 이러한 축복을 합니다.
여기에 독특한 말이 있습니다. 25절에 보면 "여호와는 그 얼굴로 비취사"라는 말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얼굴을 빛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즉 저 태양이 빛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이 여러분에게 비추면 생명이 있고, 살고, 자라게 됩니다. 우리가 캄캄한 길을 다녀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비추시면 환하게 됩니다. 그런데 26절에는 "그 얼굴을 든다"는 말씀을 합니다. 이 말은 친근한 표현입니다. 구약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얼굴을 든다는 말은 호의를 베푼다는, 사랑을 베푼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얼굴을 든다고 하면 내가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께서 나를 쳐다보고 계시고, 무엇을 하든지 쳐다보며 호의를 베풀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맨 마지막 climax는 무엇입니까? 바로 평강(!/lv;, 샬롬)을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이것이 구약성경의 대제사장의 축복기도문의 핵심입니다.

대 제사장으로서 예수님의 중보기도문이 적혀있는 요한복음 17장의 내용은 감동적이지만 구성은 아주 단순합니다. 중보기도는 세 단락으로 나누 볼 수가 있는데, 먼저 1-8절까지는 예수님 자신을 위해서 기도하시고, 9-19절까지는 제자들을 위한 기도 그리고 20-26절까지는 그리스도인을 위한 기도입니다.
요한복음에 있어서 '영화'라는 말, '영광스럽게 된다'는 말이 예수님의 수난과 고난, 십자가와 함께 어울려 간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또한 '안다'는 말은 가장 친밀한 관계에서 상대방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을 말합니다. " "(소드 야훼)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과 밀접한 관계에 있으면서 속내를 주고받는 행위를 말합니다. 바로 그때에야 비로소 우리가 '안다'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영생'이라는 것은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9-19절까지는 제자들을 위한 기도문입니다. 이 기도문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자기가 아주 밀접한 관계를 맺고 하나님의 대행자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들, 하나님께서 이루고자 하시는 것들 즉, 생명을 주시는 일들을 자기가 감당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왔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삶의 분명한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기 위해서 왔다는 것을 천명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자기를 보내심을 받은 자라는 소명의식이 강합니다. 이것은 선지자들의 절정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천상에서 왔으면 천상에 계셨던 하나님과 속내를 터놓고 이야기 할 정도로 친밀한 하나님의 뜻을 내가 이 세상에 와서 하는 사람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버지를 알 수도 없고, 아버지께로 갈 수도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자기가 집에 돌아갈 때에 되었으니 영광의 상태로 회복시켜줄 것을 하나님께 간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만 보더라도 이 신학은 'U'자처럼 선재하셨던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자기에게 있는 모든 의견을 서로 나누시고 그분의 의도를 받아다가 이 세상에 내려왔다고 하면 이것은 구약에 있어서 예언자들과 흡사합니다. 구약의 진짜 예언자들은 마치 천상의 어전회의에 가서 하나님의 " "(소드 야훼) 하나님의 친밀한 innercircle 가운데에서 일어난 모든 일들을 경청하고 거기에서 사명을 받아서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 예언자입니다.
여기에서도 예수님을 완벽한 예언자의 전형으로 이야기합니다. 즉 나는 위에서부터 내려온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자라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구약에서 선지자들을 가리켜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합니다. 그러면 신약에 있어서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 누구입니까? 바로 사도(ajpostolo", 아포스톨로스)들입니다. 이 말은 'ajpo'(앞으로)라는 말과 'stolo"'(보내다)라는 말의 합성어로서 '앞서서 보내다' 즉 마치 전령자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신약성경에서는 예수님을 선지자 중의 선지자요, 사도 중의 사도라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보내심을 받은 자' 즉 전령자라는 말은 매우 정치적인 의미입니다. 왕을 대신하여서 그 왕의 칙령, 왕의 이야기, 왕의 마음속에 있는 모든 것들을 선포하는 사람을 '전령자', '칙사' 혹은 '선지자', '예언자' 그리고 '사도'라고 합니다. '우리의 사도이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도 있고, '우리의 참 선지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도 있습니다.
처음 천상에 계셨던 야웨께서 하나님과 함께 영화를 알고 있었는데, '영화'라는 말은 역시 그것도 Royal concept 즉 왕궁에서 사용되는 것입니다. 흥미있는 사실은 '성전'과 '왕궁'을 함께 사용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왕궁에서 왕으로 혹은 성전에서 보좌에 앉으신 분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6장 1절에 보면 왕국과 성전을 함께 사용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천상에 계신 야웨 하나님이 집전하신 곳을 성전 동시에 왕궁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에 '하나님께서 보내심을 받았다'는 것은 그야말로 구약과 신약의 핵심적인 하나님의 나라 혹은 천상의 나라에서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서 이 세상을 향하여 보내심을 받았다라고 한다면 1장의 요한복음의 서문가운데에서 빛이 세상에 와서 어둠가운데에 비추나 그러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저 천상에 있는 왕권이 지상으로 침투하여 들어오되 그들이 항복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매우 정치적인 의미입니다.
우리는 보통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 많은 관심을 갖지만 승천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는 듯 합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이야말로 복음의 핵심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신약의 가장 절정적인 사건이라고 한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시편에 보면 '왕의 시'(Royal psalm)라는 것이 많습니다. 이것은 왕으로 즉위할 때에 부르는 노래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계셨다가 승천하는 장면을 묘사하기를 마치 천상의 야웨 하나님의 오른쪽에 보좌에 등극하는 예식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모든 사역의 절정이 있다고 한다면 죽으심과 부활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승천'이 climax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비로소 승천을 통해서 하늘이 열리고 하늘과 땅이 만나고 그리고 야웨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통치하고 있다면 지금이야말로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되고 있는 시대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보내심을 받은 자로서 이제 다시 돌아갈 때가 되었으니 자기를 영화롭게 해 달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영화'가 십자가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이것이 내가 보내심을 받은 사명이기 때문에 이 사명을 잘 완수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도와달라고 하는 것이 예수님의 기도입니다. 예수님의 기도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자기를 통해서 이루고자 하시는 뜻을 유감없이 그대로 이루어지게 해 달라고 하기위해서 자기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위한 기도는 이기적인 기도가 아니라 나를 통해서 나를 통해서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온전하게, 풍성하게, 하나도 남김없이 다 증거되고 드러낼 수 있도록 나를 영화롭게 해달라고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의 기도의 핵심을 볼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주기도문에서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기도를 합니다. 왜 이런 기도를 해야 합니까? 엘리야의 기도를 통해서 알 수가 있습니다. 엘리야가 아합과의 전투에서 너무 힘들어서 낙심하여 광야로 들어가서 어느 로뎀나무 아래에서 죽기를 갈구하다가 피곤해서 쓰러져 잠을 자게 됩니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 천사를 통해서 떡과 물 한잔을 가지고 와서 천사를 통해 깨우면서 일어나 "먹으라!"고 하십니다. 엘리야는 떡과 물을 먹고 피곤한 나머지 또 잠을 잡니다. 그랬더니 또 천사를 통해서 깨우면서 "먹고 마시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가야할 길이 아직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왜 하나님께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까? 그것은 우리에게 아직도 가야할 거리가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이루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방식이 충만하게 이루어짐, 아직도 남아있기 때문에 우리가 먹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도문을 보아도 자기 자신의 이기심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기도라는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기도를 보게되면 예수님마저도 분명한 소명의식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한가지를 바라다보면서 나머지 모든 것들이 그것을 위해서 존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제자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시면서 아버지께 간청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첫째로는 이들을 악으로부터 보전하여 달라는 기도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슬픔, 역경, 재난 등에 경고를 하시면서 그리고 자기 자신이 당할 십자가의 형벌과 부활과 승천에 대해서 말씀하신 후에 지금은 자기를 따를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어찌하여 우리가 따를 수 없습니까?"라고 요한복음 13장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즉 마음이 상하고 낙심 중에 있는 제자들을 위한 기도를 하시면서 악에서 보전하기를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하면 그리스도를 위해서 살 때에 다가오는 여러 가지 어려운 시련과 고통과 좌절과 회의와 의심 등 이 모든 악마적인 세력에서부터 보전시켜달라는 애절한 간구는 지금도 그리스도의 중보기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들려오는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반드시 악마에 빠지지 않도록 보존해주겠다는 말씀입니다.
두 번째로는 하나가 되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아버지를 떠나서"라는 책의 '위대한 스캔들'이라는 부분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세 번째로는 이 제자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진리'라는 것은 객관적인 위치가 아니라 '참'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어두움 가운데에 있기 때문에 무엇이 참인지, 무엇이 거짓인지를 구별하지 못하고 잠정적인 것을 말합니다. '참', '진리'라는 말은 단순히 진리라는 말이 아니라 '참으로 의존할 만한 것', '비어있지 않은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떠나시면서 제자들로 하여금 '진리'로 따로 세워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까? 거룩하게 한다는 말은 참을 앎으로서 참으로 하여금 사람들과 구별되게, 따로 세워서 구원에 이르게 할 수 있도록 해 달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로 하여금 참이 무엇인지를 경험하였으면 참이신, 진실이신, 진리의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증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진리'라는 말은 우리의 마음 속 깊이 새겨져야 할 단어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 외에 이 모든 세상에 있는 것은 겉으로 볼 때에는 실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재하지 않는 것 다시말하면 비어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기에서 '진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참', '진리'라는 말을 할 때에 근본적으로 밑에 깔려있는 것은 바로 '지속성', '영속성', '불변성'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기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보여줄 수 있는 그 모든 것들은 사실상 '실상'이 아니라 '허상'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외의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비어있고, 허상들입니다. 인간의 우정도, 돈도, 미모도, 건강도 모두 다 잠시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잘 이야기하고 있는 것 중의 하나가 이사야 40장6절의 말씀입니다.

모든 육체(rc;B;AlK;,, 콜 바사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dseje, 헤세드)은 들의 꽃 같으니

즉 그 육체가 신실하다고 할지라도, 그 인간이 지속된다고 할지라도 들의 꽃과 같아서 해가 지면 다 바스러진다는 것입니다. 꽃도 지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바로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야 말로 실체이고, 실상이고, 내용이고, 변하지 않고, 기댈만하고, 신뢰할만한 것을 '진리'라고 합니다. 그런데 제자들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이 '참'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참'을 그들이 갖게되면 '참'에 대해서 증거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교회공동체는 제자가 된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참'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사람들입니다.
제자들이 하나가 되는 근거는 천상에서 하나님과 예수님이 하나가 된 것에 대한 지상적인 표현이 바로 교회의 하나됨에 대한 표현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함께 계셨을 때에 그 때가 '영광'입니다. 그 때처럼 이 지상 안에서도 제자들이 하나가 됨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여기에 거하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찬 교회가 되기 위해서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영광이 떠났다'는 말은 사무엘 상 4장 21절에 나오는 'd/bk;Aya'(이카봇)이라는 단어입니다. 하나님의 떠난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 현존하는 교회란 무엇입니까? 하나가 되는 교회입니다. 즉 교회의 근본적인 사명은 바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신자들이 하나가 되는 곳에서 하나님의 영광은 이 세상에 빛을 낼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들이 교회가 하나가 되는 것을 볼 때에 이방사람들은 예수가 누구인지, 하나님이 누구인지에 대해서 알게된다는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전도, 증거는 교회 자체가 교회 본질자체를 온전히 수행하면 마치 광채가 나듯이 광채를 통해서 전도가 된다는 것입니다. 구약에 있어서 전도의 행위는 예배의 행위였습니다. 왜냐하면 예배는 하나님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자이고 통치자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예배를 통해서 만방에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약에 있어서 핵심적인 사상입니다. 이것이 신약에 와서도 동일한 사상을 내포합니다. 증인된 삶이 무엇인가? 진정한 증인의 자격 요건이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가 되는 근본 신학적인 이유는 천상에서 야웨 하나님과 아들이 하나가 된 것처럼 그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 광채가 드러나는 것처럼 이 지상에 있는 제자들도 하나가 되어서 하나님의 광채, 영광이 드러나서 그것이야말로 많은 사람들에게 증언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이 세상 안에 심겨진 '의(義)의 나무'입니다. 그렇다면 그 나무를 통하여서 많은 사람들, 나그네들이 그 밑에 와서 의를 배우고, 의를 알고 휴식을 얻고 진정한 참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본질적으로 구약이나 신약에 있어서 증언됨, 전도의 핵심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가시적인 임재였던 것처럼 우리도 교회공동체가 예수님과 하나님 아버지의 가시적인 임재가 교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영광들은 예수님 안에서 하나가 되지 않는 이상은 결코 나타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교회가 하나가 되는 것은 이 세상에 있는 지상교회가 갖고있는 근본적인 사명입니다.

류호준 교수/백석대학교, 구약학교수/http://rbc2000.p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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