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죽은 자를 기념하는데 왜 예수님은 되고 죽은 자들은 안 되는가?(고전11:23~26)

[일시] 2019.11.17.(주일) 오전911

[찬송] 25장 면류관 벗어서, 258장 샘물과 같은 보혈은, 229장 아무 흠도 없고

PW: 믿음, MIW: 살아계시는

T.S: 믿음이란 오직 죽으셨지만 지금도 살아계시는 예수님의 죽음을 기념하고 그분에게만 찬양과 경배를 드리는 것이다.

 

1. 서론

1)인사

오늘도 거룩한 주일을 맞아, 주님 앞에 예배하러 나온 우리 성도님들을 하나님께서 진심으로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교회 가운데 계시며, 예배중에 임재하시어 복을 주십니다.

오늘 우리 교회가 성찬주일로 지키는 주일입니다. 우리 교회는 일년에 딱 두 번 성찬주일을 지키는데, 그 중의 하나는 부활절에 지키고, 그리고 11월 셋째주에 한 번 더 지킵니다. 사실 성만찬은 기독교의 2대 예식의 하나로서, 세례와 더불어 기독교인이 되었다는 표시중의 표시입니다.

성만찬은 우리 주 예수께서 친히 제정하신 것으로서,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가지셨던 최후의 만찬을 시작으로 오늘까지 전래된 기독교의 전통예식입니다(26:26-29; 14:22-25; 22:15-20; 고전11:23-26). 일명 성찬’(Communion), 혹은 주의 만찬’(Lord's Supper), ‘성찬식’, ‘성찬예배(예식)’이라고도 부릅니다. 이는 교회 공동체의 예배의 현장에서만 베풀어지는 것으로서, 기독교의 세례와 함께 교회 공동체를 가장 기독교적으로 만드는 중요한 예식입니다. 특히 예수님에 대한 신앙고백을 하고서 세례를 받은 자는 누구나 이 성만찬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게 됩니다.

그렇다면 성만찬은 어떻게 제정된 것일까요?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제자들과 함께 가졌던 거룩한 저녁식사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죽으시기 하루 전날 밤에 예수께서 당신의 12제자들을 모아놓고, 유월절식사를 하루 앞당겨 가지셨습니다. 거기에는 양고기쓴 나물과 무교병의 포도주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저녁식사를 마치시더니, 떡을 가져 하늘을 우러러 감사기도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찢어서 제자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찢겨질 내 몸이라. 너희가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11:19)그리고 이번에는 잔에 포도주를 따르셨습니다. 또 다시 하늘을 우러러 감사기도를 하시고는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죄사함을 얻게 하려고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너희를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것한 한 번 하고 끝내는 예식이 아니라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계속 행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에 의해 시행된 성만찬은 오늘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사실 사회학자들은 종교에는 3가지 요소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하나는 제의(제사의식)가 있어야 하고, 또 하나는 신화(신적 존재에 대한 이야기)가 있어야 하며, 마지막으로는 에토스(윤리)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여기서 제의곧 제사의식이란 반복하는 행동으로서, 신적 존재를 만나기 위해 그리고 신적 존재를 체험하기 위해 행하는 반복적인 행동을 가리킵니다. 대부분 제사의식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기독교에서는 제사의식을 승화발전시켜 성만찬으로 바꾸어 시행하고 있습니다. 어떤 이는 말합니다. 만약 기독교가 아니었다면 지금도 피흘리는 동물의 희생제사가 계속 되었을텐데, 예수께서 유다의 골고다 언덕에서 마지막 희생제사를 드림으로서 제사를 폐지하심에 따라 이제는 그분을 기념하는 의식 곧 성만찬의식만 있게 되었다고 말입니다. 그러니 동물들도 예수님께 감사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한편 종교의 두 번째 요소인 신화는 천상적 존재에 대한 말씀과 기록들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에토스는 종교의 윤리로서 유대교에서는 토라에 들어있고, 이슬람에서는 코란안에 들어있으며, 우리 기독교에서는 예수님의 산상수훈의 말씀이나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에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성찬주일인만큼 기독교의 제의 가운데 성만찬에 대해서 좀 더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런데 성찬과 제사가 공통분모가 있다는 것입니다. 둘 다 죽은 자를 기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기독교에서는 죽은 자 곧 예수를 기념하는 성만찬을 집례하면서, 유교에서 시행하는 제사는 금지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유교에서 제의란 어떤 것입니까? 그것은 죽은 조상에 대한 제사를 가리킵니다. 우리민족은 죽은 조상을 잘 섬겨야 복을 받는다는 생각에서 조상제사를 극진히 해왔습니다.

그런데 참 아이러니한 것은 이러한 유교국가인 우리나라였지만, 복음전파가 급속도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입니다. 가장 놀라운 성장은 6.25전쟁 이후부터 1980년대까지입니다. 그런데 그 시기가 어떤 시기이냐면, 우리나라의 장로교에서 제사를 추도예배로 공식적으로 받아들이는 시기였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에 사람이 살고 있는 동네치고 교회가 없는 곳은 하나도 없으며, 조금만 넓은 곳이라면 한 동네에도 여러 개의 교회도 볼 수가 있습니다. 사실 대한민국은 기독교국가는 아니지만, 이 세상에서 가장 기독교를 잘 믿는 국가 중의 하나입니다.

그런데 대한민국의 기독교의 성장과 발전은 1990년대 이후 급속도로 줄어들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기독교가 부흥발전했지만 기독교인들의 윤리가 땅에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아마도 회개를 하지 않아도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는 잘못된 구원론교회 안으로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회개도 같이 해야 하는데, 믿음만을 강조하다보니 그만 죄악된 삶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살아도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지 않는 자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했습니다. 성도수는 많아졌지만 천국에 들어가는 비율은 턱없이 낮어졌다는 것이 천국과 지옥에 갔다 온 자들의 증언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것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고 기독교인이 되었지만 여전히 질병에 시달리는 자가 많고, 자녀들이 귀신들려 고통받고 있으며, 아직도 가난과 저주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자가 많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갈3:13의 말씀처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우리가 저주에서 빠져나와야 정상인데, 왜 저주로부터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그런데 최근 들어와 그것의 원인을 발견되었습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우리 개신교가 추도예배와 장례예배를 받아들인 것과 관련이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엄격히 금지하고 있는 죽은 자에 대한 제사를 기독교에서 예배라는 형식을 빌어서 받아들인 것이 화근이 된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믿어도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믿는 자가 가장 주의해야 할 일은 추도예배와 장례예배를 끊는 일입니다. 왜 그런지를 조금 있다가 좀 더 설명해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우리 주님의 죽으심을 전하는 성만찬의 예전을 주님 오실 때까지 계속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생각이 들 것입니다. 예수님도 죽은 사람이고 우리 조상들도 죽은 사람들인데 왜 예수님은 추도해도 되며, 우리 조상들은 추도하면 안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똑같이 죽은 자에 대해서 기념하는 것인데 왜 예수님은 되고 우리의 죽은 조상들은 되지 아니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성만찬에 대한 본문을 통해서 왜 우리는 우리 주 예수님에 대해서만 기념해야 되는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2. 문제제기

 

1)본문요약 및 의문점 제시

오늘 본문 말씀은 사도바울이 주 예수께로부터 넘겨받은 성만찬의 전승에 따라, 고린도교회는 계속해서 예수님의 살과 피를 기념하여, 주님의 죽으심을 주님이 오실 때까지 전해야 한다고 했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죽은 자에 대한 기념을 금지하고 있는데, 왜 예수께서는 자기의 죽음에 대해서는 기념하라고 명령하신 것인가요? 왜 예수님은 기념해도 되지만, 우리의 죽은 조상들을 기억하는 추도예배는 드리면 안 되는 것입니까?

 

2)청중적 접근

오늘날까지 우리나라에서 기독교의 복음전파의 가장 큰 걸림돌은 사실 조상제사의 문제였니다. 기독교는 전래 초기부터 조상제사를 금지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복음전파에도 장애요인이 되었고, 이미 기독교인이 된 후에도 계속해서 문제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러자 기독교인 가운데 제사 대신에 다른 모조품을 하나 만들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추도예배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장로교에서도 추도예배를 예식에 집어넣게 되자, 우리나라의 기독교의 인구가 급속도로 불어났습니다.

하지만 그후 달라진 것이 없이 여전히 옛날과 똑같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병원에는 여전히 성도들로 가득차고 있고, 자녀들이 귀신에 시달리며 고통받고 있고 심지어는 자살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3)본문문제배경

오늘 본문 말씀은 A.D.55년경 사도바울이 제3차전도여행 중에, 2차 전도여행 때에 개척했던 고린도교회에 보낸 첫 번째 편지내용입니다.

 

4)문제발생원인

여기서 사도바울은 제사와 성만찬에 대해 말을 합니다.

고린도전서 10에서는 우상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특히 이방인들은 제사드려서는 아니 된다고 강력하고 권고합니다. 이방인들이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11장에 들어와서는 우리 주 예수님의 죽으심을 전하는 성만찬을 계속해서 행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고전11:23-26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24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25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26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5)문제 심리묘사

믿음이 없으면, 성경의 가르침이라도 곧이곧대로 따라가지 않습니다.
믿음이 없으면, 죽은 자에게 제사하는 것을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믿음이 없으면, 죽은 자에게 제사하는 것을 대신하여 추도예배를 드리게 된 것이 잘 된 일이라고 판단합니다.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의 말씀과 역행하는 것이라도 문화받아들여아 한다고 주장합니다.

믿음이 없으면, 성경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있으면서도 자신에게 어려움이 찾아오면 그때는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다고 판단합니다.

믿음이 없으면, 추도예배와 장례예배를 드리고 있으면서 자신은 반드시 천국에 들어갈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3. 문제해결

1)인간의 헌신

그러므로 우리들은 믿음으로 우리가 성경말씀을 어떻게 왜곡되이 믿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교정해야 합니다.

 

 

2)하나님의 주권(방법, 심정)

. 예수님과 사람은 대체 어떤 차이가 있는가?

그렇다면, 성경에서 제사를 금지하는 이유는 대체 무엇일까요? 기독교인이 되었으니 그냥 기독교의 가르침에 따라야 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오늘 왜 기독교인이 되면, 추도예배나 장례예배를 드리지 말아야 하는지를 근원적으로 살펴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우리가 섬기는 예수님과 우리 조상들에게는 현격한 차이가 있는 것이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 그렇습니다. 즉 하나님과 사람에게 있어서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해서 제사를 드려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 우선 예수님이 누군지부터 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분은 사람이셨습니다. 아니 정확히 말씀드리자면 그분은 사람이셨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이 세상에 태어남으로 존재하게 된 분이 아닙니다.

16:28 내가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노라 하시니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엄마의 뱃속에서 창조된 존재가 아닙니다. 그분은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셔서 사람이 되신 분이십니다. 정확히 표현하자만 그분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신 하나님이신데, 사람이 되심으로 피조물이 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전능한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그분은 원래 무소부재하신 분이셨고 동시존재가 가능하신 분이셨습니다.

그렇지만 그분은 인류의 속죄를 위하여 잠시잠깐동안 인간의 몸을 입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으신 것은 전적으로 우리의 죄를 없이하고자 함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으며, 속죄제물은 흠없는 제물이어야 하는데 아무데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친히 사람이 시어 오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성만찬의 제정사 가운데 왜 예수께서 사람의 몸을 입으셨고 왜 피를 흘리셨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왜 몸을 입으셨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22:19 또 떡을 가져 감사 기도 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10:45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그리고 예수께서 왜 피를 흘렸습니까?

26:27-28 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28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그래서 그분은 우리의 죄와 질병을 없애주기 위해 살이 찢기셨으며, 피를 흘리신 것입니다. 그리고 대속의 죽음으로 죽으셨습니다.

하지만 그분은 살아계신 하나님이셨으므로 죽으신지 3일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리고 40일동안 자신의 부활의 몸을 보여주시고, 승천하셨습니다. 원래 그분이 계시던 곳으로 가신 것입니다. 다시 신적 존재의 상태로 돌아가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은 우리 사람과는 달리 언제 어디에나 동시에 계실 수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께서는 신적 존재로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만찬을 행하면 그곳에 영으로 오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조상이 죽어서 다른 곳에 갔으면 이곳에 올 수가 없습니다. 사람은 피조물로서 동시존재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시공간을 초월하여 다닐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하나님과는 달리 죽으면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게 됩니다. 즉 예수님의 부활승천이후에 사람들은 죽으면 즉시 부활체(사망의 부활이든지 생명의 부활이든지)를 입고 천국이나 혹은 지옥으로 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죽은 자는 결코 여기에 다시 올 수 없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아무리 죽은 조상에게 음식을 차려놓고 그를 불러낸다고 해도 죽은 조상은 올 수 없으며, 우리가 아무리 죽은 조상의 영정사진을 갖다놓고 아무리 거기에 절을 해봐도 그분은 결코 오지 못합니다.

 

. 성경에서는 왜 죽은 자에 대한 기념을 금지하는가?

그럼에도 불구하도 왜 사람들은 자신의 죽은 조상에게 제사를 드립니까? 그것은 죽은 조상을 거짓으로 흉내내는 귀신들에게 속아서 그러는 것입니다. 후손들이 자신의 부모가 죽은 날에 죽은 조상에게 음식을 차려놓고 거기에 꽃을 바치고 향을 피우게 되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 절을 하게 되면 문제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이미 죽은 조상은 절대 오지 못하는데, 거기에다가 정한 기일에 절을 하다보면 귀신이 대신 와서 그 제사를 받는 것입니다. 귀신은 타락한 천사로서 얼마든지 자신의 모습을 바꿀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 죽은 조상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니 그것을 죽은 조상으로 알고 거기에다가 넙죽 절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죽은 조상에게 제사드리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입니. 그것이 바로 우상숭배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우상숭배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은 자를 앞에 두고 제사를 드려서는 절대 아니 됩니다.

하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러면 죽은 아비어미도 몰라보는 불효막심한 놈이라고 평가합니다. 그러니 그날 제사를 드릴 수는 없고, 제사를 안 드리자니 호로자식이라는 말을 들을 것 같고, 그래서 만들어낸 것이 추도예배인 것입니다. 1897년 정동감리교회의 당시 정3품의 고관이었던 이무영성도가 죽은 자신의 어머니 기일에 제사 대신에 예배를 드린 것입니다. 이름하여 추도예배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자 핍박을 면해보고, 호로자식을 면해보고자 아름아름 추도예배를 드리게 되다보니, 1934년에는 감리교총회에서 인정해주고, 1950년대 말에는 구세군과 성결교에서 추도예배를 정식으로 예식에 넣어주고, 1970년대 말에는 장로교에서 어쩔 수 없이 추도예배를 정식으로 인정해주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믿는 성도들이 제사대신에 추도예배를 드리게 되면 그날 귀신을 불러들인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귀신은 어떤 존재입니까? 하늘에서 쫓겨날 때 저주를 받았습니다. 귀신은 저주받은 영이기 때문에, 추도예배나 장례예배를 드리게 되면 귀신이 우리 성도들의 가정과 삶과 그리고 자식들 속에 들어올 때 저주를 가지고 들어오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와 우리의 자녀와 손자에게서까지 저주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죽은 자를 기념하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그것이 저주를 불러들이는 의식이 되기 때문입니다.

 

. 예수께서는 왜 자신의 죽음을 기념하라고 하셨는가?

그러나 우리 주 예수님은 다릅니다. 그분은 죽어있지 않습니다. 그분은 살아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영으로 임재하는 분이십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아무리 그분을 매일매일 기념한다고 할지라도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분과 교제하면 교제할수록 우리의 삶과 영혼에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이유는 첫째, 그분을 우리가 아무리 기념한다고 할지라도 귀신이 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분을 기념하려고 하면 그분이 영으로 우리에게 임재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살아계시고 동시에 존재가 가능하기 때문에 우리가 그분의 이름을 부르고 그분의 임재를 기원할 때 그분은 영으로 오십니다. 그리고 성찬식에 오십니다.

둘째로, 우리가 주의 살과 피를 기념할 때에는 그분이 십자가에서 행하셨던 구속의 은총이 우리에 그대로 적용되어 우리의 죄용서가 더 확실해지기 때문이다. 성찬식은 그분이 우리의 유월절 양이 되셨다는 사실을 확실히 더 체험하게 됩니다. 실물교육이 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그분이 흘리신 보혈이 우리가 고백한 모든 죄를 사해주심을 실제로 경험하는 것이다. 그분은 결코 귀신이 아니고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에, 복이 임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이 성찬식을 행하게 되면 성찬식의 현장에 그분은 영으로 임재하시고 우리에게 속죄의 은총을 더 깊이 체험하게 해주십니다. 그럴수록 우리는 깨끗해지고 그분이 거룩하듯이 거룩해집니다. 그러면 귀신이 얼씬 거리지 못합니다.

 

3)청중의 문제와 해결

왜 기독교인이 되었지만 여전히 힘든 삶을 사는 것입니까? 첫째는 예수님을 믿고도 회개하지 않아서입니다. 그러면 귀신이 합법적으로 들어와 온갖 것으로 역사합니다. 그리고 또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자가 되었어도 추도예배, 장례예배를 드려서 저주를 불러들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우상숭배행위가 되기 때문에 귀신들이 합법적으로 들어와 저주를 주는 것입니다.

 

 

4. 영적 법칙

믿음이란 오직 살아있는 예수님만을 기념하고 그분께만 찬양과 경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5. 복과 결단

1)

. 헌신자가 받는 복

 

. 청중의 더 큰 복

 

2)결단

오늘 사도바울을 통해서 우리는 주님의 부탁이 무엇이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첫째, 우리가 성찬식을 거행함으로 예수께서 인류의 속죄를 위해 행하신 일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둘째, 우리가 성찬식을 거행함으로 이제 갓 믿거나 잘 믿지 못하는 성도들에게 눈으로 보여주는 전도를 하라는 것입니다. 26절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고전11:26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죽었으나 살아계시며 언제 어디서 오셔서 복주시는 예수님만을 기념하고 기억하고 그분에게만 예배드리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 결단의 필요성과 방법

이를 위해서는 첫째, 죽은 자에게 제사하지 말아야 하며, 제사행위를 기독교식으로 고친 추도예배를 드리지 말아야 하고, 장례식장에 가서도 절대 꽃을 바치거나 죽은 자에게 절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둘째,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에게만 예배를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셋째, 일 년에 몇 번 아니지만 성찬식을 통해서 예수님의 찢기신 살과 흘리신 피가 나의 죄를 속죄하기 위함이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넷째, 기독교인들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저주아래 놓여있는 이유가 우상숭배에 있음을 알고 그와 같은 영적 진리를 널리 전파해야 합니다.

 

. 결단의 축복

그러한 자들에게는 첫째, 저주가 없습니다. 귀신이 발붙힐 곳이 없기 때문입니다. 질병과 가난이 떠나갑니다. 둘째, 죄용서를 받습니다. 죄용서를 받아야 자유롭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천국에도 들어갑니다. 셋째, 주님의 임재를 누리게 됩니다. 그러면 두려움과 걱정이 사라지고 평강과 기쁨이 임합니다. 그리고 죽어서는 천국에 들어갑니다.

 

 

<하나님의 장자의 명령과 선포>

1)감사와 회개

주여, 왜 우리가 죽은 조상에게 제사드리지 말아야 하는지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여, 왜 우리가 예수님의 가르쳐주신 성만찬을 아무리 행해도 해가 없는지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여, 죽은 자는 절대 이 세상과 저 세상을 오갈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여, 죽은 자에게 제사하면 저주받은 귀신이 와서 경배를 받는다는 것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여, 우리가 예수님을 기념하고 예배하면 그분은 살아계심으로 영으로 언제나 임재하신다는 것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여, 추도예배와 장례예배가 귀신을 불러들이는 의식이었음을 온전히 깨닫지 못했나이다. 용서해주소서.

 

2)장자권 누림의 결단

주여, 이제는 살아계신 예수님만 예배하겠습니다.

주여, 이제는 성만찬을 통해 예수님을 기억하겠습니다.

주여, 이제는 절대 제사하지 않겠습니다.

주여, 이제는 절대 추도예배를 드리지 않겠습니다.

주여, 이제는 절대 우상숭배하지 않겠습니다.

 

3)장자권의 누림, 명령과 선포

이제까지 나로 하여금 죽은 조상에게 제사드리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닫지 못하게 한 악한 영들은 결박을 받으라.

이제 내가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제사로 미혹하는 귀신은 떠나가라.

내 영혼아 깰지어다. 내 영혼아 깰지어다.

오직 예수님만 기념하고 그분께만 예배드릴지어다.

 

4)오늘의 말씀의 핵심

1. 성만찬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기억하는 의식이로구나.

2. 성만찬은 속죄의 은총에 대한 실물교육이로구나.

3. 예수님은 죽으셨으나 3일만에 살아나셔서 지금도 살아서 역사하고 계시는 분이로구나.

4. 예수님은 언제나 어디서나 영으로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이로구나.

5. 죽은 자는 결코 왔다 갔다 할 수 없구나.

6. 추도예배나 장례예배는 귀신과 저주를 불러들이는 의식이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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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7 그 길을 어떻게 영광의 길이라 할 수 있나?(요13:30~32)_2019-11-24(주일) 갈렙 2019.11.24 182
» 죽은 자를 기념하는데 왜 예수님은 되고 죽은 자들은 안 되는가?(고전11:23~26)_291-11-17(주일) 갈렙 2019.11.17 259
255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눅13:22~30)_2019-11-10(주일) 갈렙 2019.11.10 352
254 초막절을 지키지 않으면 정말 비를 내리지 아니하는가?(슥14:16~19)_2019-11-03(주일) 갈렙 2019.11.02 316
253 왜 하나님은 일주일간 초막에 거주하라고 했을까?(레23:39~44)_2019-10-27(주일) 갈렙 2019.10.27 234
252 받은 은혜에 내 한 목숨 주님께 드릴 수 있다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눅17:11~19)_2019-10-20(주일) 갈렙 2019.10.19 249
251 외부세력의 위협 앞에서 교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행4:23~32)_2019-10-13(주일) 갈렙 2019.10.13 422
250 이제는 WCC와 WEA에 속한 교회를 떠나야 하는가?(계18:1~8)_2019-10-06(주일) 갈렙 2019.10.06 317
249 그리스도인의 정치참여 과연 어디까지 해야 하나?(요18:33~38)_2019-09-29(주일) 갈렙 2019.09.29 248
248 예수님 이후 참된 지혜자는 누구인가?(마11:25~27)_2019-09-22(주일) 갈렙 2019.09.21 278
247 우리의 본향은 진정 어디인가?(히11:8~16)_2019-09-15(주일) 갈렙 2019.09.15 418
246 주기도문강해(08)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마6:13)_2019-09-08(주일) 갈렙 2019.09.07 248
245 주기도문강해(01)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마6:9)_2019-09-01(주일) 갈렙 2019.09.01 228
244 바울의 기도와 내가 드려야 할 기도(엡1:15~19)_2019-08-25(주일) 갈렙 2019.08.25 286
243 주님의 말씀은 왜 영이요 생명인가?(요6:58~64)_2019-08-18(주일) 갈렙 2019.08.18 259
242 영지주의자라 할지라도 절대 할 수 없는 것이 있었다(요일5:19~21)_2019-08-11(주일) 갈렙 2019.08.11 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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