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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투브 주소 https://youtu.be/oiApq18OZ-Y
날짜 2016-08-05
본문말씀 마가복음 7:1~13(신약 64면)
설교자 정병진목사
주제어 칼빈주의, 칼빈과 어거스틴, 예정론, 절대예정론, 이중예정론,베자와 알미니아누스, 코른헤르트와 코마누스, 개인예정과 공동체예정, 구원예정과 사역예정

1. 들어가며

오늘날 칼빈의 예정론의 폐해가 생각보다 심각하다. 칼빈의 예정론 때문에 오늘날 성도들은 자신이 짓고 있는 죄악의 심각성을 잘 모른다. 예수믿고도 계속 우상을 숭배하고 있는 자는 과연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을까? 칼빈주의자들은 천국에 들어갈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그렇다. 그들은 자신이 지은 죄 때문에 천국에 가지 못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살고 있는 것이다. 칼빈주의자들은 이런 질문을 받아도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아니 이런 질문들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신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예수님을 믿고 있으니, 이는 만세전에 하나님께서 이미 자신을 구원하기로 예정한 것이라고 철썩같이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견인해 주셔서, 구원에서 결코 떨어지지 않게 하실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오늘 이 시간에는 칼빈의 예정론이라는 것이 무엇이며 그것 때문에 얼마나 무서운 결과들이 나타나고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칼빈주의와 개신교의 신학적인 토대

  칼빈주의자들이란 누구를 가리키는 것일까? 일반적으로 칼빈주의자란 칼빈의 예정론과 칼빈의 5대교리를 따르는 자들을 말한다. 사실 칼빈은 자신의 주장을 예정론이라고 따로 부르지도 않았고 그것을 5가지 항목으로 나열하지도 않았다. 후대에 알미니우스와 논쟁하면서 칼빈을 따르는 자들에 의해서 그렇게 붙혀진 것이다. 그런데 사실 오늘날 우리 개신교회들은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적인 바탕 위에 서 있다. 그러므로 오늘날 개신교인들이 가지고 있는 신학적 토대는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사상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칼빈주의에 근거하고 있다. 종교개혁을 루터(A.D.1483~1546)가 개시했다고 한다면, 칼빈(A.D.1509~1564)은 완성한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3. 드디어 밝혀지기 시작한 칼빈의 인성과 그의 신학

  그런데 500년이 지난 오늘에 들어와 우리는 칼빈이 얼마나 비성경적인 주장을 했었는지를 조금씩 조금씩 알게 되었다. 이런 것은 지금으로부터 10여년전만해도 상상하지도 못할 일들이었다. 칼빈하면, 종교개혁의 대부요, 우리가 믿는 개신교 신학의 근간이라고 칭송하며 믿어져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젠부턴가 칼빈이 저지른 만행이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가 제네바시에서 4년동안 통치하고 있었을 때에, 그는 종교국을 통해서 무려 58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잔인하게 죽였다. 그들 중에서 13명은 교수형으로 죽였고, 10명은 목을 잘라 죽였으며, 35명은 화형시켜 죽였다. 인구의 숫자가 불과 13,000명에 불과했던 제네바시에서 로마카톨릭을 대적하는 종교개혁을 위해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살인은 어디까지나 하나님께서 금하시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칼빈이 그들을 죽인 이유가 단지 자신의 예정론과 사상에 위배된다는 이유였다는 데에 있다. 그는 그것 때문에 고의적으로 그리고 반복적으로 잔인하게 살인하고 고문했던 것이다. 그 당시 정치가들은 모든 권한을 칼빈에게 위임한 상태였기에 그는 왕처럼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지고서 마녀를 사냥하듯 사람들을 사냥했던 것이다. 칼빈사상이 지배했던 스위스 전체를 볼 때, 무려 8,800명 이상이 마녀로서 재판을 받았고, 5,000명 이상이 처형되었다는 사실에 우리는 놀라움을 금하지 아니할 수 없다. 그가 사람을 처형한 이유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그는 자신의 예정설을 비난하고 반대했다는 이유 때문에 죽였는데, 어떤 남자는 대로에서 피가 터질 때까지 채찍질을 한 뒤에 화형에 처해졌다고 한다. 또한 칼빈을 위선자라고 불렀다는 이유 때문에 지크그뤼에라는 사람은 고문을 받고 사형에 처해졌다고 한다. 그리고 부모를 구타했다는 이유로 어떤 소녀의 목을 낫으로 잘라 죽였다고 한다. 또한 칼빈 자신의 생각과 맞지 않거나 자신의 의견이나 신학이론에 반대하면 국사범으로 화형을 시키거나 처형시킨 것이다. 오늘날의 기독교 IS의 모습이 그때에도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칼빈은 인성적으로 볼 때에도 온전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가 주장했던 신학사상은 또한 어떠했을까?


4. 그의 책 <기독교강요>에 나타난 칼빈의 이중예정론과 그 실체

  이제 우리는 칼빈이 주장한 예정론이라는 신학사상이 대체 어떤 것인지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성경에서 빗나간 것이었는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특별히 이번에는 칼빈이 직접 저술한 1559년 최종판 <기독교강요>에 수록된 그의 주장을 보자. 칼빈은 자신의 예정론을 그의 책 <기독교강요(1559년)> 제3권의 21장에서부터 24장에 걸쳐 서술하고 있다. 21장부터 24장의 제목은 이렇다. 제21장 영원한 선택: 하나님께서는 이 선택에 의해 어떤 사람은 구원에, 또 어떤 사람은 멸망에 처하도록 예정하셨다. 제22장 성경의 증거에 의한 이 교리의 확인. 제23장 이 교리를 겨낭한 거짓되고 부당한 비난들에 대한 반박. 제24장 선택은 하나님의 소명으로 확인되나, 악인은 예정된 공정한 멸망을 자초한다. 그런데 그의 예정론의 대략적인 내용은 제21장에 나오며, 칼빈의 5대교리는 22장에서 24장에 걸쳐 등장한다. 오늘은 그의 예정론의 핵심사항만 살펴보고 다음주에 그의 5대교리를 살펴보도록 할 것이다.

  이제 칼빈의 예정론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살펴보자. 칼빈의 예정론은 의외로 간단하다. 하나님께서는 만세전에 그의 기쁘신 뜻대로 그리스도 안에서 어떤 사람은 영생으로 예정하시고 어떤 사람은 영원한 멸망으로 예정하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칼빈의 예정론을 사람들은 '이중예정론'이라고 부른다. 두 개의 갈림길을 하나님께서 절대적으로 예정하셨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그의 예정론은 그가 만들어낸 최초의 작품이 아니었다. 사실은 어거스틴의 신작작정에 의한 예정론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사실 칼빈의 이중예정론은 어거스틴의 이러한 예정론을 집대성한 것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예정을 위한 하나님의 절대주권사상과 영원한 작정에 의한 선택이라는 개념을 칼빈이 어거스틴에서 끌어왔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칼빈은 기독교강요 제21장에서 예정에 대해 직접적으로 어떤 말을 했을까? 칼빈의 기독교강요(1559년) 제21장 5절을 보자. 제목은 "하나님의 예정과 예지: 이스라엘의 선택"이라고 되어 있다.

  "경건한 사람으로 인정을 받고자 하는 자는 아무도 예정 즉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은 생명의 소망을 가질 수 있도록 선택하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영원한 사망을 선고하시는 그 예정을 감히 부정하지 못한다... 우리는 예정을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이라고 부르며, 이 작정에 의해서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이 어떻게 되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스스로 예정하셨다. 이는 모든 사람이 이같은 상태로 창조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어떤 사람을 위해서는 영생에 예정되며, 어떤 사람을 위해서는 영원한 저주가 예정되기 때문이다. 각 사람은 이 중의 어느 한 쪽 결망에 이르도록 창조되므로, 우리는 그를 생명 또는 사망에 예정되었다고 한다."

  사실 성경에 하나님의 예정이라는 것이 분명 있기는 있다. 하나님께서는 만세전에 그리스도를 예정하셨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행3:20). 뿐만 아니라 엡1:3~7에서도 "하나님 곧 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분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의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다"고 하였다. 또한 롬8:29~30에서도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렇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온 우주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예정도 하지 않으시고 어떤 일을 무턱대고 하시지는 않을 것이다.


5. 칼빈의 이중예정론과 개인예정은 과연 성경적인가?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께서는 과연 어떤 사람은 개인적으로 창세전에 구원하기로 예정하시고 어떤 사람은 멸하시기로 예정하셨는가 하는 것이다. 칼빈은 그것을 하나님의 예정하심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성경은 그것을 하나님의 예정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어떤 개인에 대한 구원예정은 오직 그리스도뿐에게만 적용되기 때문이다(행3:20). 기타 모든 사람들에 대한 예정은 개인예정이 하나도 없다. 다시 말해, 에베소서에 의하면, 하나님은 개인이 아니라 "우리"를 예정하신 것이다. 즉 어떤 공동체를 구원하여 영생을 주시기로 예정하신 것이지, 하나님은 결코 어떤 개인을 구원하여 그에게 영생을 주시기로 예정한 적이 없으시다하나님께서는 누구(개인)는 구원하기로 예정하고 누구는 지옥에 보내기로 예정하신 것이 아니다. 이것을 예수님의 말씀으로 표현하자면, 누구든지 하나님(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을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이자 구세주로를 믿고(그분이 오실 메시야이든, 오신 메시야이든) 그분을 계속해서 따라가고, 자신의 죄를 날마다 회개하는 자를 구원하기로 예정하신 것이다. 다시말해,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는 자를 구원하기로 예정하신 것이지 아무아무개 개인을 구원하기로 예정하시지는 않으셨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칼빈의 예정론은 처음부터 잘못된 가정에서 출발한 것이며, 그것이 진짜인지에 대해 성경이 뒷받침해주지 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만약 성경에서 개인에 관한 예정이 있다면 그것은 개인의 사역에 관한 예정일 뿐 한 개인에 대한 구원예정은 결코 아닌 것이다. 특히 칼빈은 개인에 관한 이중예정의 근거로서 롬9장에 나오는 에서와 야곱의 비유를 주장하는데,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칼빈은 에서와 야곱이 아직도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하나님께서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시려고 리브가에서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고 하셨다고 했으며,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다고 하셨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것은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길 것이라는 사역적인 예정일 뿐 그것은 구원에 관한 예정이 아니다. 그리고 롬9~11장은 민족의 사역에 관한 예정으로서, 이스라엘 민족이 어떻게 버림받게 되었는지를 설명하면서, 바울이 에서와 야곱을 비유로 들고 있음을 말한다. 다시 말해, 어떤 일에 관하여 이스라엘 민족이 버림받은 것을 에서가 버림받은 것에 비유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에서와 야곱은 구원에 관한 예정의 비유가 결코 될 수 없다. 그것은 두 사람이 나중에는 두 민족이 되는데, 두 민족이 어떻게 쓰임받을 것에 관한 예정인 것이다. 훗날에 에서의 민족은 에돔족속이 되었고, 야곱의 민족은 이스라엘민족이 되었다. 그런데 당시 에서는 야곱을 섬긴 적이 없다. 다만 1,000년 뒤에, 다윗왕의 시대에 에돔족속이 이스라엘족속을 섬긴 일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빈은 사람들로 하여금 이 말씀을 곡해하도록 적용하고 있다. 즉 하나님께서 아직 에서와 야곱에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님은 야곱은 사랑하기로 예정하셨고, 에서는 미워하기로 예정하셨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 주장은 틀린 것이다. 이 말씀은 인용의 말씀인데, 그것은 말라기 1장 2절의 인용말씀이다. 이 말씀은 창세기 25장에서 리브가에게 하신 말씀이 아니다. 이 말씀은 시간이 흐른 뒤에 보니, 에서는 장자의 축복을 경홀히 여김으로 인하여 결국에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한 자가 되었지만, 야곱은 장자의 축복을 간절히 원함으로 인하여 결국에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가 되었다는 뜻이다(히12:16~17). 그리고 이것은 리브가에게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고 말씀이 주어진지 약 ,1600년 후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신 말씀이다. 만세전부터 하나님께서 그렇게 작정하시거나 예정하신 것이 아니라, 에서와 야곱이 그렇게 살았기에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셨다는 말씀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만세전에 누구는 영생으로 예정하시고, 누구는 멸망으로 예정해놓으셨다는 칼빈의 의 주장은 틀린 것임을 알 수 있다. 바울은 롬9장에서 계속해서, 토기장이의 비유를 들어 말씀하는데(롬9:30~23), 이것도 다 사람의 쓰임(사역)에 관한 말씀이지 결코 개인의 구원에 관한 말씀이 아닌 것을 확인할 수 있다.


6. 예정에 관한 바른 성경적인 견해

  그렇다. 개인구원에 관한 작정이나 예정은 없다. 있다면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어떻게 쓰시겠다는 사역적인 개인예정만 있을 뿐이다. 전부다 공동체적 예정인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복음을 듣고 회개하여 예수님을 믿기로 한 자들을 구원하시기로 예정하신 것이다. 또한 유기(버림)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복음을 듣고도 계속해서 회개하기를 거부하고 주님을 믿고 따르지 않는 자가 유기되는 것이지, 만세전에 그를 유기하겠다고 예정하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유기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가룟유다 개인을 버리기로 예정해놓으신 것이 아니다. 메시야를 팔 자를 예정해 놓으셨을 뿐이다. 비록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팔았다고 하더라도 만약 그가 자신이 지은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끝까지 믿고 따랐다면 그는 자신이 행한 일에 관계없이 구원받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칼빈의 예정론은 그 전제가 틀렸으며 비성경적인 주장임을 확실히 알 수 있다.


7. 칼빈의 이중예정론이 말하는 엄청난 잘못

  또한 만약 칼빈의 이중예정이 성경적이라고 한다면, 하나님은 크게 편협적으로 보이고 폭군으로 보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신이 가진 절대주권을 사용하여, 그 어떠한 이유도 없이 한 사람은 영생으로 들어가게 예정해놓고 또 한 사람으로 지옥에 보내기로 결정하신 뒤에, 무조건 그것을 따르라고 강요하는 분으로 비춰질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개인을 구원하기로 예정하신 것은 좋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어떤 사람을 멸하기로 예정해놓으셨다면 하나님은 폭군이라는 말 이외에 다른 말이 없을 것이다. 또한 이러한 하나님은 공의로운 하나님이 되실 수도 없다. 생각해보라.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만세전에 지옥보내기로 예정하셨다고 한다면, 마지막날에 하나님께서 어찌 그를 불러내어 심판할 수가 있겠는가?  그가 이렇게 말할 것이다. "하나님은 무슨 이유로 만세전부터 나를 지명하여 지옥에 보내기로 결정하셨습니까? 그리고 내가 믿지도 못하고 회개도 하지 못하도록 나를 막으셨습니까? 하나님은 처음부터 불공평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공의는 대체 어디에 어떻게 설 수가 있다는 말인가?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만세전부터 어떤 개인을 구원으로 인도할 것인지 아니면 멸망으로 인도할 것인지 예정해 놓으셨다고 주장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편파적인 분이며 폭군으로 몰고간다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 한다.


8. 나오며

  이제 우리 성도들은 자신이 복음을 듣고 회개하여 예수님을 믿고 있다 하더라도, 두렵고 떨림으로 자신이 받고 있는 구원을 이뤄 나가야 할 것이다. 지금은 잘 믿고 있고, 지금은 회개를 잘하고 있는데, 나중에 믿지 않게 되고 회개를 하지 않게 된다면 그는 구원에서 제외될 수밖에 없다. 그것은 공관복음서와 히브리서와 야고보서 및 요한계시록에서 고스란히 우리에게 증거하고 있다. 구원은 믿음과 회개를 통해서 시작은 되지만, 그것이 잘못되었을 경우에는 잃어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만약 얻고 있는 구원을 잃어버리지 않는다면 어찌 생명책에서 그 이름을 지워버리겠다고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셨겠는가?(계3:5) 그러므로 우리는 죽는 그날까지 우리의 믿음을 날마다 확인하며 어떠한 순간에도 그 믿음을 부인하지 말아야 하며, 날마다 지은 죄를 회개하며 살아가야 한다. 구원은 오직 믿음과 회개를 통해서 받게 되니 말이다(마4:17, 막1:15).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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